필자는 '역사적 상상력'을 사랑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데 있어서 이 '능력'은 필수적이다. 역사의 현장 속에 자신의 투영해 본다거나, 혹은 역사 속의 특정 인물이 되어 보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때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패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은 어떠한가? 기존의 학설, 정설과는 다른 역사를 꿈꿔보는 것은 얼마나 짜릿하고 황홀한 일인가? 이런 과정 속에서 '새로운' 역사가 발견된다. 감춰졌던 혹은 잊힌 역사들이 다시 숨쉬기 시작한다. 이처럼 '역사적 상상력'은 위대한 능력이다. 물론 그 '역사적 상상력'은 '증명'되어야 한다. 사료 등을 통해 '고증'되어야 한다. 증명되지 못하고 고증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단지 '상상'에 불과한 것이다.
- <경향신문>에서 발췌 -
모국 고려 농단한 기황후·폭군 충혜왕 영웅화..MBC 최악 역사왜곡 드라마 만드나 <경향신문>
하지원, 주진모 주연의 MBC 드라마 '기황후'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MBC는 '기황후'를 "낯선 이국의 황실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인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이라고 소개했다. 또, '충혜왕'에 대해선 "원나라에 맞서는 기개 넘치고 영민한 고려왕"이라고 설명했다. 이 정도가 되면 '재해석'의 수준을 넘어 '역사 왜곡'이라고 봐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극의 흐름'을 간단히 짚어보자.
1. 정통 사극의 시대
1990년대는 사극의 전성기라고 불러도 될 만큼,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했다. 이덕화가 출연했던 '한명회(1994)', 정선경의 '장희빈(1995)', 유동근의 용의 눈물(1996~1998)'까지 선이 굵은 사극들이 방영됐다.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원톱으로 극을 이끌었다는 점과 역사에 기록된 사건과 인물의 성격을 극대화시켰다는 것이다. 가령, 한명회의 경우에는 권모술수에 뛰어났다는 점을 부각시켰고, 장희빈에서는 '악녀'의 이미지를 무엇보다 강조했다. 용의 눈물에서는 유동근의 강하면서도 단호한 면모가 카리스마 있게 표현됐었다. 이 시기만 해도 '역사 왜곡'이라는 논란은 없었다. 물론 고증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역사적 사건 혹은 인물의 '해석'에 대한 논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처럼 '정통 사극'의 흐름은 2000년대까지도 일부 이어진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최수종이 출연했던 '왕건(2000~2002)', 대조영(2006~2007)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 퓨전 사극의 시대
퓨전 사극이라는 장르의 문을 활짝 연 것은 '다모(2003)'였다. '폐인'을 만들어내기도 했던 중독성 강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 이전에 '허준'이 엄청난 인기 속에 방영됐음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극은 역사책에 기록된 인물이 아닌, 역사 속에 있을 법한 인물을 상상해서 드라마로 표현해내기 시작했다. 놀라운 진보였다. '대장금(2003~2004)'의 경우도 대표적인 퓨전 사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 이병훈 감독이 연출한 '서동요(2005)', '이산(2007)', '동이(2010)', '마의(2012)'는 모두 퓨전 사극의 계보에 들어간다. 그러고 보면 이병훈 감독이야말로 퓨전 사극의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창민이 출연했던 '신돈(2005~2006)'의 경우에는 고려 공민왕 시기의 인물인 신돈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퓨전 사극은 수도 없이 많다.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다. 최근에 방영됐던 송중기를 낳은(?) '성균관 스캔들(2010)', 한석규가 열연했던 '뿌리깊은 나무(2011)' 등도 대표적인 작품이다.
3. 이젠 역사 왜곡의 시대?
최근에 방송됐던 김태희가 출연했던 '장옥정(2013)'은 '장희빈'을 재해석(?)하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출발한 드라마였다. 하지만 결국 뻔한 드라마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전문적 궁중 직업인으로서 신분의 굴레를 뛰어넘고자 했던 여성 장옥정'을 그려내고자 했지만, 결국 '악만 쓰다 죽는 여인 장옥정'을 반복하는 데 그쳤다. 시청률의 압박도 한몫 단단히 했겠지만, 무엇보다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힘'이 부족했던 탓이다.
이번에는 '기황후'다. 물론 역사는 '재해석'의 여지가 있다. 상상력이 개입될 수 있는 부분도 많다. 여러가지 시각에서 바라보면 색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무조건 뒤집는다고 '재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기황후를 두고, '낯선 이국의 황실에서 고려의 자긍심을 지키며 운명적인 사랑과 정치적 이상을 실현한 여인'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고려사절요>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다. "기황후와 기철 4형제가 갖은 횡포를 일삼고 경쟁적으로 악행을 저질렀다" 공민왕은 나라를 사유화하고, 전횡을 일삼았던 기씨 일가를 숙청했다.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이후 기황후는 복수를 감행한다. 공민왕의 폐위를 요구하고, 끝내 고려 정벌을 주도한다.
충혜왕의 경우는 어떨까? <고려사절요>에는 충혜왕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휘(諱)는 정(禎)이요,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이다. 충숙왕(忠肅王)의 큰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충숙왕 2년 정월 을묘일에 출생하였다. 성품이 호협하여 말타고 활쏘는 것을 좋아하였고, 재리(財利)에 밝으며 황음무도(荒淫無度)하여, 여러 소인들이 뜻을 얻고, 충직한 신하들은 배척을 당하였다. 바른말만 하면 반드시 베어 죽이므로 사람들이 처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과감하게 말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재위연수는 전후 6년이고, 수(壽)는 30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충혜왕은 부왕인 축숙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와 원나라 경화 공주를 겁탈했다. 겁탈의 아이콘이라고나 할까? 이상국 아주대 교수(고려사 전공)의 말을 들어보자. "기황후가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아무리 좋게 해도 긍정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하다. 드라마라고 해도 역사를 왜곡하면 시청자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다. … 충혜에 대한 평가는 정쟁에 의한 역사 왜곡도 아니다. 그가 했던 악행은 역사적 사실로 남아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터무니 없는 설정이라면 가공의 인물을 만들지 왜 대중의 역사관을 혼란시키느냐. 작품을 수출하면 한국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으니 제작진은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역사를 다룬다는 것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팩션(faction)의 시대가 된 이 시점, '역사적 상상력'이라는 미명 하에 '역사 왜곡'이 자행되고 있다. 물론 다양하고 참신한 관점과 시선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이고, 권장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재해석'이라는 것도 풍부한 근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그러한 자신이 없다면, 하재근의 말처럼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내면 된다. 김종학 연출, 송지나 극본의 '대망'이나 이승기와 수지가 주연했던 '구가의 서(2013)'는 사극이라는 형식을 빌렸지만, 가공된 시대와 가공된 인물로 구성된 드라마였고 큰 성공을 거두지 않았던가?
- MBC 드라마 <신돈>이 묘사했던 기황후의 모습 -
궁금하다. 제작사 측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드라마를 제작하는 걸까? '기황후'의 대본을 맡은 외주제작사 이김 프로덕션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역사서 속 한 줄만 가지고도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사극이다. 우리가 역사학자도 아니고 해외에 수출하려는데 이상하게 하면(악행 등을 그대로 작품에 담으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말했다. 경악스럽기만 하다. 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게다가 해외에 수출하려는데 이상하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은 어처구니가 없다.
그것이 '드라마'라고 하더라도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매우 막중한 일이다. 수많은 시청자들이 그것이 진짜 역사라고 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우리 역사를 우습게 알고, 마음대로 왜곡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다. 제작사 측이 저 정도의 얄팍한 생각으로 '기황후'를 제작하고 있다면 상황은 정말 심각하다. 이 드라마가 방영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아찔하기만 하다.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