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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며 권한 말
행 20:25-38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 설 교 >
피로 사신 교회
문기태목사 / 행 20:28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20장 28-32절)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밀레도라는 항구로 에베소교회의 지도자들을 불러 고별설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의 설교내용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교회를 하나님께서 피를 값으로 주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헌금을 많이 했으니까' '내가 개척했으니까' '내가 가장 오래 되었으니까' '내가 중요한 직분 자이니까' 등의 이유로 교회를 자신의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고 싶어합니다. 오늘 현대교회들 중에서 많은 교회들이 분쟁에 휩싸여 부흥하기는커녕 쇠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의 주인이라는 착각을 하면 누구라도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수많은 영혼의 구원을 가로 막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주인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자기 아들의 피로 값 주고 교회를 사셨으니까 주인이십니다. 우리교회에서 아무도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물론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돌보고 주인의식을 갖고 새 가족을 맞이하고 주인의식을 갖고 VIP를 섬기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에 적극적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하며 교회에서 주인의식을 갖고 교회를 사랑하되 교회의 주인행세는 하지 말기 바랍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가 산 나의 백성'으로 묘사를 하셨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히브리 백성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내어 자유를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들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고 세계 모든 민족이 그들을 통해 복을 받도록, 하늘의 복이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 만방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만 선민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다하지 않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만민의 죄값을 십자가에서 지불하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새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들을 위해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제는 나라 공동체가 아닌 교회 공동체를 통해 만민에게 하늘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전에는 내가 다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불안했습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를 믿고 나니 평안해졌습니다. 담대해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유로 소유권이 바뀌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도, 내 가정도, 내 미래도 책임지고 다 최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면 인생이 쉽고 행복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것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1. 피로 사신 교회의 양 무리를 돌보아야 합니다(28).
교회는 값비싼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장에서 만원을 주고 물건을 사면 그 물건은 만 원짜리입니다. 우리가 백화점에 가서 십 만원을 주고 물건을 사면 그 물건은 십 만 원짜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값 주고 교회를 사셨으면 교회는 얼마짜리입니까? 예. 예수님 짜리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백 억 원보다 더 비싸고 천 억불 보다 더 비싸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도 예수의 피로 사신 존재들이니까 모두 존귀합니다.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보배롭게 여기고 존귀하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이토록 값 비싼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성령님은 교회를 지키는 감독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울의 고별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이 누구입니까?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즉 목회자들이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장로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목자 목녀들로 보면 맞습니다. 목회를 하고 치리를 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운 목적은 양 떼를 보살피고 감독하고 돌보도록 세운 것입니다. 28절은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목자가 양을 지키고 먹이고 보살피듯 교회를 보호해야 합니다. 목회자 뿐 만 아니라 목자 목녀들도 자신에게 맡겨 주신 양떼를 책임을 다해 돌보고 보살펴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주님이 맡겨주신 교회를 위해 양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몇 사람의 영혼을 돌보고 섬기는 일이 대충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믿음이 잘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영적 가족은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고 교회의 가족들을 돌보고 섬기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목자 목녀들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교회 즉 영적 가족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존귀하게 여기고 보호하는 귀한 일입니다.
휴스톤 서울교회에 가서 인상 깊었던 것은 모든 목자 목녀들이 한 영혼을 구원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목자 목녀들과 면담을 하며 듣게 된 공통된 이야기입니다. "한 영혼을 VIP로 정하고 일 년 반 정도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섬기고 부지런히 돌아보면 그 중에 대부분은 목장과 교회에 나오게 되고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데 그 안에 포기를 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VIP를 정하고 일 년 반을 꾸준히 사랑으로 섬기고 기도하며 돌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남에게 많은 시간을 내 주는 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내 돈 들여가며 피곤한데 쉬지도 못하고 밥해 먹여 가면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가족처럼 사랑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즐겁게 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큰 칭찬을 들을 것을 기대하며 사명감에 젖어 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게 된 새 가족들이 목자 목녀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자신도 목자 목녀가 되어 저렇게 멋진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고 간증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는 증거로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몰려오는 영혼들을 감당하도록 작은 집에서 크고 좋은 집으로 넓혀 주셨습니다. 매 주 맛 있는 집 밥을 기대하며 몰려드는 VIP들을 감당하며 들어가는 돈이 부족한데 기가 막힌 방법으로 매 주 풍성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시키신 일에 순종하면서 이렇게 생생하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게 되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를 정말 귀하게 여긴다면 대가를 지불하며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보내신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의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 예수님은 피를 기꺼이 흘리셨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값을 지불하기를 주저하지 않기 바랍니다.
2.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 이리와 싸워야 합니다.(29)
사도 바울은 자신이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교회 안에 들어와 양 무리를 마구 해칠 것을 예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양에게 생명을 주고 더 풍성히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리들은 양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양의 생명을 마구 해치는 이들입니다. 또 이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바르게 걸어가는 양떼를 길에서 이탈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진리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리는 교회를 비난하고 목자를 비난하고 온갖 험한 말을 쏟아 붓습니다. 그 목적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서 벗어나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리의 공격을 받은 양들은 큰 상처를 입고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됩니다. 양이 상처를 입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가 해를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나운 이리의 공격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내야 합니다. 저들의 미혹에 연약한 이들이 속아 끌려가지 않도록 보호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천년 동안 이리의 공격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저들은 참으로 간교합니다. 숨어서 기회를 엿보다가 양 무리가 허점을 보이고 있으면 공격합니다. 교묘하게 거짓말로 성도를 이간시키고 진리를 왜곡시켜서 성도를 현혹시킵니다. 이리에게 속아 끌려가지 말고 조심하여 잘 분별하고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둔감해져서 분별력을 잃고 저들이 충동질 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진리를 거스르고 거짓을 진리로 믿게 됩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교회의 보호와 보살핌을 멀리하게 되고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있다가 이리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깨어 있으려면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를 힘쓰며 말씀에 귀를 기울여 예수님과 대화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이리가 다가올 때 쉽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양의 탈을 쓰고 자기를 천사처럼 위장해도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저들이 어떤 목적으로 속이고 있는지, 저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눈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를 소홀히 하면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쉽게 현혹됩니다. 저들의 말만 믿고 목자를 의심합니다. 교회가 얼마나 큰 하나님의 축복인지 모르고 교회를 멀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복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스스로 이리의 입 속으로 들어가 멸망 당하고 맙니다.
또한 이리와 싸우기 위해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32절 '나는 이제 하나님과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튼튼히 세울 수 있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업을 차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우고 온 힘을 다 쏟아 양육한 에베소 교회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떠난 후에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사나운 이리가 양떼를 해치듯이 미혹하게 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잘 보살피라고 부탁을 하는 동시에 주님과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기고 있습니다. 말씀이 성도를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성도를 튼튼하게 세워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성도로 하여금 믿음이 성숙하게 만들어 하늘의 유업을 받아 누리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무장한 성도는 마귀 사단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합니다. 공격을 해도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쉽게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말씀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세대를 사는 성도에게 바르게 살아갈 지혜를 줍니다. 말씀이 죄의 유혹이 많은 시대를 사는 성도에게 거룩함을 가져다 줍니다. 말씀이 연약한 이들에게 능력을 안겨 줍니다. 말씀이 사단의 온갖 술책과 악한 계략을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은혜의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삼 년 동안 자신이 에베소에서 가르쳤던 말씀을 기억하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결혼식이 있어서 오랜만에 만나는 교인들이 우리 교회가 아주 좋은 교회인 것을 실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 성경공부를 통해 훈련을 잘 받아서 다른 곳에 가서도 모두 지도력을 발휘하며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훈련을 받을 때는 힘들게 여겼지만 지나고 나니 말씀이 오랫동안 자신을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 주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은혜의 말씀이 우리 성도들을 튼튼하게 세워주고 있습니다. 은혜의 말씀이 우리 성도들을 하늘의 유업을 차지하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다른 것에 맡기지 말고 은혜의 말씀에 맡기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가득 채워 말씀이 여러분을 보호하게 하고 말씀이 사단을 물리치게 만들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충만하여져서 하늘 유업을 누리며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실만큼 교회를 아주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교회만이 사단의 공격을 물리치고 하늘 복을 온 세상에 확산시킬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로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소통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만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들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교회를 소중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을 사랑하며 섬기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공격하는 모든 사단의 세력과 맞서 싸워 물리치고 어떻게든지 교회를 보호하는 일에 더 적극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위하여 양떼를 위하여
행 20장 28~32절 / 김영규목사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29-30)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20:28-32)
교회의 감독자로서 어떻게 할 것인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한 설교의 세 번째 부분입니다. 본문은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권면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8) 교회의 지도자로서, 자신과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먼저 바울은 목회자의 신분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직접 임명하신 교회의 감독자들입니다! 교회의 가치는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속죄를 받은 하나님 백성들이 모인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생명을 희생하셔서 구원하신 무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목숨과 바꿨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 귀한 교회를 인간 목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 감독자들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입니다.
여기서 목회자의 칭호에 대해서 잠깐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장로, 감독, 목사라는 칭호를 구분 없이 사용했습니다. 장로(presbuvtero")라는 칭호는 유대 사회에서 사용하던 칭호를 그대로 교회에 차용한 명칭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을 장로라고 불렀습니다.(본문 17절, 딤전4:14,5:17,19, 딛1:5, 약5:14, 벧전5:1, 요이1:1, 요삼1:1) 오늘날 장로교회는 장로가 다스리는 교회입니다. 강도와 치리를 겸한 장로를 목사라 하고, 치리만 담당한 장로를 장로라고 합니다. 목사와 장로는 함께 당회, 노회, 총회를 구성하여 모든 치리를 담당합니다.
목사(poimhvn)라는 말은 양치기, 목자란 뜻입니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칭호입니다. 양 무리를 돌아본다는 뜻에서 붙여진 칭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1,14) 사도들 역시 예수님을 목자장, 혹은 큰 목자, 목자와 감독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히13:20)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2:25)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벧전5:4)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양치기 직분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21:15,16,17)
본문에는 감독자(ejpivskopo")란 말을 사용합니다.(빌1:1, 딤전3:1,2, 딛1:7) 양무리를 지키고 보호하고 감독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칭호입니다. 오늘날 감리교에서는 감독이란 칭호를 계속 사용합니다. 로마 카톨릭이나 영국 성공회, 동방교회는 오늘날에도 수직적인 감독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감독이란 말은, 영문 성경에 “overseer”(KJV, NIV, NASB, RSV, NLT)로 번역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감독자란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감독자에게 두 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첫째는, 삼가라는 명령입니다. 삼가라(prosevcw)는 말은, 마음을 두다, 몰두하다, 주목하다, 조심하다는 뜻입니다. 영문 성경에는 take heed(KJV), pay attention to, keep watch over(NIV), Be on guard for(NASB), beware(NLT) 등으로 번역합니다. 목자의 책임은 양 무리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보초를 서는 일입니다. 둘째는, 보살피라(poimaivnw)는 명령입니다. 종전 개역 한글판에는 “치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먹이라는 말입니다. 영문 성경에는 to feed(KJV), to shepherd(NKJV), to care(RSV) 등으로 번역합니다. 양 무리를 지키고 먹이고는 것이 목자의 책임입니다.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올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특별히 강조하려는 것은 장차 다가올 특수 상황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29-30) 사나운 이리가 교회에 나타날 것이다! 양무리를 물어뜯고 죽이는 맹수가 쳐들어옵니다. 교회 비상사태입니다. 사나운 이리는 바로 교회를 공격하는 이단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 배후는 마귀입니다. 교회는 거짓 지도자들 때문에 수많은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거짓 지도자들을 사나운 이리와 같습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TV 다큐멘터리, “늑대의 생존법”을 보았습니다. 늑대는 눈 덮인 광활한 삼림지대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냥을 합니다. 늑대의 사냥은 매우 치밀하고 집요합니다. 늑대 몇 마리가 사슴 떼를 바라보면서 공격의 기회를 엿봅니다. 자기 몸보다 몇 배나 큰 사슴을 공격하기 위해 섣불리 달려들지 않습니다. 하루, 이틀, 한 주간이 지나도록 사냥감을 계속 추격하면서 관찰합니다. 어떤 것을 공격할까? 때로는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상대의 약점을 살핍니다. 혹시 노쇠한 것은 없는지, 혹은 다리를 절거나 불구는 없는지, 무리에서 이탈한 것은 없는지, 혹시 병든 것은 없는지, 공격 대상을 기가 막히게 찾아냅니다. 그러다가 일단 공격할 기회다 싶으면 일제히 달려들어 숨이 끊어질 때까지 함께 물고 늘어집니다. 저는 그 늑대들을 보면서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교회를 공격하는 거짓 지도자들을 늑대라고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24:4-5,11-12) 오늘 바울 사도 역시 똑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29) 이리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부에서도 나타납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30) 어그러진(diastrevfw) 말을 한다는 것은 말씀을 왜곡한다는 뜻입니다. 정당한 해석 대신에 정도에서 벗어난 해석을 합니다. 엉터리 교훈입니다. 얼마나 엉터리일까요?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 엉터리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역사상 에베소 교회에 나타났던 거짓 지도자들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특히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 서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로,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바울은 그 디모데 목사에게 이런 말씀들을 했습니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딤전1:18-20) 양심을 버린 지도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믿음이 파선당한 사람들입니다. 양심도 신앙도 없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런 사람 중에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란 실명이 나옵니다. 바울은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줬다고 합니다. 아마 교회에서 출교하여 쫓아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딤전4:1-3) 어떤 거짓 지도자들은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음식을 지정하여 먹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겉모양은 경건한 것 같았지만 실상은 양심이 불에 탄 사람이요, 사단의 영과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요한 서신에 나타난 영지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이단자들입니다. 스스로 신령한 체하고, 임의로 사람들의 신앙등급을 매겼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딤후1:15)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딤후2:16-17) 어떤 지도자들의 교훈은 마치 온 몸을 썩게 만드는 나쁜 병처럼 사람의 영혼을 썩게 만듭니다. 그들은 영혼 구원만 받으면 되기 때문에, 육신은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음란하고 타락한 생활을 조장했습니다. 여기에도 역시 후메내오와 빌레도란 실명이 언급됩니다. 실명이 언급된 것은 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인물이란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단자들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3:1-7) 이런 거짓 지도자를 따른 결과는 비참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신앙생활이 헛것이 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집집에 찾아다니면서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합니다. 저는 가끔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쩌면 그렇게 무식할까! 성경에 대한 기초 지식도 없는 교주가 영적 해석이랍시고 되는대로 풀어 놓습니다. 초등학교 수준도 못 되는 뒤죽박죽의 맞춤법에, 성경 단어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슨 예언서랍시고 써 놓은 책들이 그들의 경전입니다. 교주가 한심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 교주를 따르는 사람들이 한심합니다.
사도 요한이 쓴 계시록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가 내려졌을까요?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처음 사랑을 버렸다! 그것이 평가의 결론입니다. 그렇게 잘 믿던 교인들이 거짓 지도자들을 따르더니 주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습니다. 이단자들은 엉터리 논리와 교리에 집착합니다. 사랑은 없고 논리만 가득합니다. 요즘도 그래요. 이단에 빠진 사람들 보세요. 자식 학교도 보내지 않습니다. 돈은 교주에게 털어 바치고 직업적인 일들은 버리고 매일 은밀한 곳에 모여서 비밀 교습을 합니다. 성경에 보세요. 밭에서 일하다가 들림 받습니다. 집에서 맷돌 갈다가 들림 받습니다.(마24:40-41) 일상생활을 성실히 해야 됩니다. 이단의 특징이 있습니다. 삶이 정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잠깐만 관찰하면 참 신자인지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삶이 정상이 아니면 신앙도 정상이 아닙니다.
오늘날 거짓 지도자들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교회를 공격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교인들의 잘못이나 과실들을 물고 늘어져서 집요하게 공격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마치 무슨 학문적 신학적 주제인양 떠들어댑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내부는 세속적인 사상과 가치관으로 점점 세속화시킵니다. 암이란 병이 그렇잖아요. 언제 시작됐는지 모르는데 일단 증상이 나타나면 심각해집니다. 교회도 그래요. 은근히 병들어서 증상이 나타나면 심각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교회에 사나운 이리가 공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우리는 이런 공격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러면 이런 특수 상황에 대해서 교회는 어떻게 대응해야 될까요? 바울은 이미 다가오는 위험에 대해서 경고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31)
첫째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일깨어라! 헬라어로는“grhgoreuvw”입니다. 교황의 이름 가운데 보면 그레고리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깨어 있는다는 뜻입니다. keep awake!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라는 말은 마치 보초병이 불침번을 서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사단이 교회를 어떻게 공격해 올는지 모르니까, 깨어서 사정을 살피고 보초를 서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적으로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 경각심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죄를 짓지 말고, 향락에 빠지지 말고, 안일과 나태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근면하게 직무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일입니다.
둘째는,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기억하라!(mnhmoneuvw) 바울이 평소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그 과정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매월 15일에 민방위 훈련을 합니다. 적의 공습에 대한 대비 훈련도 있지만, 방재 훈련도 있습니다. 지진이나 화재와 같은 재난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평소에 훈련을 합니다. 민방위 훈련 빼먹고, 훈련을 대충 받은 사람들은 막상 재난이 닥쳤을 때 우왕좌왕 합니다. 과거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기억하세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은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8:2)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32:7) 과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어느 시기에나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지난 날 삶을 통해서 체험했던 신앙의 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평소 이리들이 공격해 올 때에 어떻게 막아야 되는지 몸소 보여줬습니다.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훈계했습니다. 교회는 평소에 이단에 대한 교훈을 합니다. 삶의 원리들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주일 설교, 구역 공과, 성경공부, 주일학교, 수련회 등등. 그 많은 교훈 중에 다만 몇 개라도 마음에 기억할 수 있다면 유혹이 다가왔을 때 도움이 될 겁니다.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열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단자를 대항하는 비결, 거짓 지도자에게 넘어가지 않고 이기는 비결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하는 일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을 주님께 부탁하는 동시에 말씀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부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말씀에 부탁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복음 진리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일입니다. 교리적 지식이 있어야 됩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은혜의 말씀”이란 복음의 진리를 말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말씀은 성경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은 특별히 은혜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말한 은혜의 말씀이란 구원 진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구원 진리를 교리적으로 확고부동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이단자에게 넘어가지 않는 비결입니다.
물론 성경 말씀을 매일 듣고 실천하는 것은 더 없이 중요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성경을 절대적 표준으로 삼으세요! 신앙에 있어서나, 삶에 있어서나 성경은 표준입니다. 성경대로 살 때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능력입니다. 본문에 “능히”(duvnamai)라는 표현은 능력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오늘 말씀 32절에 보면 성경 따라 살 때에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견고한 신앙의 틀을 세워줍니다.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든든히 세워 준다는 말은 “oijkodomevw”입니다. 건축하다, 또은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말씀을 체계적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단적 가르침도 분별하게 됩니다. 매일매일 말씀을 취하면서 바른 길을 찾으세요. 영혼에 감동을 받으세요. 죄를 책망 받으세요. 잘못을 바로잡으세요. 말씀을 따라 자신을 훈련하고 단련하세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둘째는, 기업을 얻게 합니다.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 기업을 얻는다는 말은 천국 상속자가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자녀가 됩니다. “kai; dou'nai th;n klhronomivan ejn toi'" hJgiasmevnoi" pa'sin. ” give you the inheritance! 상속자가 되면 종국적으로 부모 재산을 물려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서 천국을 물려받습니다. 세상 종말에만 물려받는 게 아닙니다. 현세를 사는 동안에도 상속자의 신분을 유지합니다. 하나님께 영적 유산을 이미 물려받고 있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19:29)
오늘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입니다. 상속자! 세상 사람들은 상속이란 말을 몹시 싫어합니다.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상속을 당연시 합니다. 물려받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든지 좋아하든지 세상은 상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도 불가항력적인 상속입니다. 내가 어느 부모 아래 태어난 것, 내가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난 것, 혈액형, 유전자, 피부색, 생김새, 지능 정도, 성품,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상속됩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떤 종족들을 보면 수 없는 분쟁과 다툼 속에서 서로 죽이는 역사를 반복합니다. 어떤 민족은 탁월한 사회를 이루고 잘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산이 작용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가치관을 상속받으면 일하기 싫어하고 게으르게 살아갑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정신 유산을 물려받으면 타락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다투고 싸우는 유산을 물려받으면 밤낮 싸웁니다. 알카에다처럼 자살 특공대가 되어 죽으면 다음 세상에서 72명의 미녀를 거느리고 행복하게 산다고 하니까 어린 10대들이 폭탄을 안고 죽음으로 뛰어듭니다. 부모의 가치관은 자식에게 상속됩니다. 부모가 바른 가치관을 가지면 자식도 그렇게 됩니다. 부모가 되는대로 살면 자식들도 되는대로 사는 것을 상속받습니다.
이러한 상속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상속은 신앙의 상속입니다. 영적 유산의 상속입니다.우리가 성경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믿고 살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됩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25:34)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2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롬8:17)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9) 신앙의 선배들은 영적 상속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상속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상속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데 있습니다. 말씀 따라 사세요. 그래서 사나운 이리들을 이기세요. 뿐만 아니라, 굳건한 신앙 안에서 천국 유산을 상속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행 20장 28~32절 / 석원태목사
오늘 우리 모두는 주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신 영감의 말씀 앞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제3차 세계선교원정(행 18:23~21:16)의 마지막 코스를 거쳐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행 20:22),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밀레도(Miletus)에 머물면서, 거기로부터 약 45KM 떨어져 있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행 20:17) 남긴 고별사의 주제입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자기 선교활동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인 3년이나 사역한 목회적 낭만이 서려 있던 곳이었습니다(행 20:31). 바울은 그가 초청한 장로들에게 이곳에서 3년간이나 목회했던 지난날을 회고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수많은 복음의 맹수들과(고전 15:32) 싸우면서
① 시종이 여일하게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고 두려움없이 주를 섬겼다고 하였습니다(행 20:18~19).
② 신자들에게 유익하다고 하면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전하여 가르치고, 주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을 증거하고(행 20:20~21),
③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행 20:25),
④ 일깨어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고(행 20:31),
⑤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친히 자급전도를 하면서 약한 사람들을 도왔다고(행 20:33~35) 회고하였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거리끼지 않고 담대하게 너희에게 전했다고 하였습니다(행 20:27). 지금 자신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가는 그 길이 자신이 받은 사명수행의 길인 줄 믿고, 자신의 생명까지 다 바치기로 작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행 20:22~24).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미래를 용감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초청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나타낸 이러한 회고적 고별사의 중심은 에베소 교회와 그 미래를 향한 예언적 메시지를 남겨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신 사실입니다.
Ⅰ. 교회는 신적 구속의 특수 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자기 피로’라고 하신 말씀은 ‘그 자신의 피가 매개체(diav)가 되어서’라는 뜻입니다. ‘샀다’는 말은 속가(贖價), 곧 값을 지불하고 도로 찾아내었다는 뜻입니다. 그 속가는 바로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이나 마태복음 20장 28절에는, 예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속물’이나 ‘구속’은 팔려간 노예를 도로 찾아내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ejkklhsiva)’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조직을 가리킴이 아니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그의 백성 곧 회중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아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회중)를 뜻합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저들이 맡은 ‘교회의 본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나 이 세상의 산물이 아닌 특별한 하나님의 신적 산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속인들의 공동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 산물, 자기 피로 사낸 무리들의 모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성도)는 마땅히 이 세상의 모든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와 구별되는 영의 단체요, 구원인의 무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Ⅱ. 교회는 성령이 구별하여 세운 감독자들에게 맡겨졌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중에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감독’(ejpivskopo")은 사도행전 20장 17절의 ‘장로들’과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사도행전 20장 28절 끝에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poimaivnein)는 말은 ‘목자’(poimhvn)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초청한 에베소 교회의 감독은 장로요 목자의 이름을 가진 영적인 지도자들입니다. 성령께서 양떼(교회)를 위하여 저희를 감독자(장로, 목자)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삼았다’는 말은 ‘만들었다’, ‘임명하다’, ‘세우다’라는 뜻으로 성령께서 목회자들을 택하고, 부르고, 임명하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저들을 영의 지도자로 세우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치게 하다’라는 말은 우리를 ‘먹이다’, ‘돌보다’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하신 분부와 같은 뜻입니다(요 21:15, 16, 17).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영감은 예수를 가리켜 ‘양의 큰 목자’라고 하였습니다(히 13:20). 베드로의 영감에서는 예수를 가리켜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25)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맡은 영적 지도자들에게 바로 그런 직함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를 위해서도, 또 온 양떼를 위해서도 ‘깨어’ 있어야 된다는 영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곧 ‘삼가라’(prosevcw)고 하였습니다. ‘주의를 기울이라’, ‘전심전력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하나님의 백성=양떼)는 부름받고, 세움(임명)받은 깨어있는 영적 지도자인 감독(장로, 목자)들에 의하여 멱여지고, 양육되고, 성장되어간다는 바울 사도의 메시지입니다. 사도는 그만큼 교회 영적 지도자의 필연성과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Ⅲ. 교회의 미래는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2절에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부탁하다’(parativqemai)라는 말은 ‘옆에 두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지금 사도는 성령이 선택하여 부르시고, 교회를 위하여 감독자로 세움받은 에베소 교회와 지도자들을
① 주님 곁에 맡긴다고 하였습니다.
② 주님 곁에 맡기는 구체적인 내용을 ‘그 은혜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행 20:32)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래를 맡은 영적 지도자(감독=자로=목자)들에게 과거 자신의 모범이나, 현재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의 성실함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유력한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의 장래의 보장이 결코 되지 못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역사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 미래의 안전이요 보호요 부흥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은혜의 말씀만이 두 가지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가 사도행전 20장 32절 중에, 그 은혜의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집을 든든히 세움’에 해당되는 말로 구원에 이르는 확고한 신앙을 가리킵니다. 집이 든든히 세워짐 같이, 그 은혜의 말씀이 교회 존립과 성장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20장 32절 하반절에 그 은혜의 말씀이, 천국 기업이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성도들이 말씀신앙으로 구원에 든든히 서서 마침내 약속된 기업인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힌 감독들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미래를 책임맡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여기 ‘교회’란 다름아닌 기독신자들의 무리, 성도들의 공동체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이 모임 자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이 신령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대속의 피의 산물입니다. 이 교회는 성령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신 감독들에게 맡겨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세움 입은 감독들은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게 붙잡혀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확실한 영감의 내용은, 교회는 예수 피로 세워지고 성령 받은 사자들에게 맡겨지고, 그 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세워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바울이 남긴 고별사의 미래적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놀라운 교회운동의 흐름이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 운동은 유구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교회는 십자가의 지도자에 의하여 존재하고, 성장하고, 계승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바로 교회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것입니다. 역사상의 교회는 우리에게 이 요긴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께서 세운 베드로와 야고보 같은 지도자에 의해서 창설되고 부흥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신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서 이방선교의 중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소아시아의 에베소 교회는 성령께서 세운 사도 요한과 그 뒤를 이은 디모데 같은 지도자에 의해서 부흥되어 마침내 소아시아에 3000여 교회 이상으로 부흥되는 교회운동을 이룩하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크리소스톰이, 아프리카의 히포에는 어거스틴이 있었습니다. 중세기의 종교개혁 전에 이탈리아에는 사보나롤라가, 영국에는 위클립이, 보헤미야에는 요한 허스가 있었습니다. 저들이야말로 개혁의 샛별이었습니다. 종교개혁 때는 독일에 루터, 제네바에 칼빈, 취리히에는 쯔빙글리가, 스코틀랜드에는 요한 낙스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영국과 미국 등지의 기독교 역사를 이룩하였습니다. 지난 100여 년이 넘는 한국 기독교회사도 성령께서 세운 말씀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2000년 세계선교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오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와 경향교회를 향한 미래적 축복 보장과 부흥은 성령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말씀의 지도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는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지도자에 의하여 계승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이룩하여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택자 구원운동의 구속사에 하나님이 친히 주장하시는 당신의 뜻입니다. 우리 경향교회의 미래에 이 축복의 은총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행 20장 28~32절 / 석원태목사
오늘 우리 모두는 주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신 영감의 말씀 앞에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제3차 세계선교원정(행 18:23~21:16)의 마지막 코스를 거쳐 성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행 20:22), 소아시아의 서쪽 해안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도시 밀레도(Miletus)에 머물면서, 거기로부터 약 45KM 떨어져 있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행 20:17) 남긴 고별사의 주제입니다. 이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자기 선교활동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인 3년이나 사역한 목회적 낭만이 서려 있던 곳이었습니다(행 20:31). 바울은 그가 초청한 장로들에게 이곳에서 3년간이나 목회했던 지난날을 회고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난 수많은 복음의 맹수들과(고전 15:32) 싸우면서
① 시종이 여일하게 겸손과 눈물과 시험을 참고 두려움없이 주를 섬겼다고 하였습니다(행 20:18~19).
② 신자들에게 유익하다고 하면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꺼림이 없이 전하여 가르치고, 주님께 대한 회개와 믿음을 증거하고(행 20:20~21),
③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행 20:25),
④ 일깨어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고(행 20:31),
⑤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 친히 자급전도를 하면서 약한 사람들을 도왔다고(행 20:33~35) 회고하였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거리끼지 않고 담대하게 너희에게 전했다고 하였습니다(행 20:27). 지금 자신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가는 그 길이 자신이 받은 사명수행의 길인 줄 믿고, 자신의 생명까지 다 바치기로 작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행 20:22~24).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미래를 용감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초청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나타낸 이러한 회고적 고별사의 중심은 에베소 교회와 그 미래를 향한 예언적 메시지를 남겨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신 사실입니다.
Ⅰ. 교회는 신적 구속의 특수 산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자기 피로’라고 하신 말씀은 ‘그 자신의 피가 매개체(diav)가 되어서’라는 뜻입니다. ‘샀다’는 말은 속가(贖價), 곧 값을 지불하고 도로 찾아내었다는 뜻입니다. 그 속가는 바로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이나 마태복음 20장 28절에는, 예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속물’이나 ‘구속’은 팔려간 노예를 도로 찾아내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ejkklhsiva)’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교회는 어떤 건물이나 조직을 가리킴이 아니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그의 백성 곧 회중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의 십자가 대속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부름받아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회중)를 뜻합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저들이 맡은 ‘교회의 본질’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이나 이 세상의 산물이 아닌 특별한 하나님의 신적 산물이라고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구속인들의 공동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 산물, 자기 피로 사낸 무리들의 모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성도)는 마땅히 이 세상의 모든 개인이나 가정이나 단체와 구별되는 영의 단체요, 구원인의 무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Ⅱ. 교회는 성령이 구별하여 세운 감독자들에게 맡겨졌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 중에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감독’(ejpivskopo")은 사도행전 20장 17절의 ‘장로들’과 같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 사도행전 20장 28절 끝에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poimaivnein)는 말은 ‘목자’(poimhvn)라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초청한 에베소 교회의 감독은 장로요 목자의 이름을 가진 영적인 지도자들입니다. 성령께서 양떼(교회)를 위하여 저희를 감독자(장로, 목자)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삼았다’는 말은 ‘만들었다’, ‘임명하다’, ‘세우다’라는 뜻으로 성령께서 목회자들을 택하고, 부르고, 임명하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저들을 영의 지도자로 세우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치게 하다’라는 말은 우리를 ‘먹이다’, ‘돌보다’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하신 분부와 같은 뜻입니다(요 21:15, 16, 17).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요 10:11)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영감은 예수를 가리켜 ‘양의 큰 목자’라고 하였습니다(히 13:20). 베드로의 영감에서는 예수를 가리켜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25)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맡은 영적 지도자들에게 바로 그런 직함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를 위해서도, 또 온 양떼를 위해서도 ‘깨어’ 있어야 된다는 영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곧 ‘삼가라’(prosevcw)고 하였습니다. ‘주의를 기울이라’, ‘전심전력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하나님의 백성=양떼)는 부름받고, 세움(임명)받은 깨어있는 영적 지도자인 감독(장로, 목자)들에 의하여 멱여지고, 양육되고, 성장되어간다는 바울 사도의 메시지입니다. 사도는 그만큼 교회 영적 지도자의 필연성과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Ⅲ. 교회의 미래는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2절에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부탁하다’(parativqemai)라는 말은 ‘옆에 두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지금 사도는 성령이 선택하여 부르시고, 교회를 위하여 감독자로 세움받은 에베소 교회와 지도자들을
① 주님 곁에 맡긴다고 하였습니다.
② 주님 곁에 맡기는 구체적인 내용을 ‘그 은혜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행 20:32)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래를 맡은 영적 지도자(감독=자로=목자)들에게 과거 자신의 모범이나, 현재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의 성실함이나, 아니면 다른 어떤 유력한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의 장래의 보장이 결코 되지 못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택하신 백성들의 구원역사의 방편인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 미래의 안전이요 보호요 부흥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은혜의 말씀만이 두 가지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하나가 사도행전 20장 32절 중에, 그 은혜의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워주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집을 든든히 세움’에 해당되는 말로 구원에 이르는 확고한 신앙을 가리킵니다. 집이 든든히 세워짐 같이, 그 은혜의 말씀이 교회 존립과 성장의 뿌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20장 32절 하반절에 그 은혜의 말씀이, 천국 기업이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성도들이 말씀신앙으로 구원에 든든히 서서 마침내 약속된 기업인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사로잡힌 감독들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미래를 책임맡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여기 ‘교회’란 다름아닌 기독신자들의 무리, 성도들의 공동체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이 모임 자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이 신령한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대속의 피의 산물입니다. 이 교회는 성령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신 감독들에게 맡겨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세움 입은 감독들은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게 붙잡혀 있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확실한 영감의 내용은, 교회는 예수 피로 세워지고 성령 받은 사자들에게 맡겨지고, 그 사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를 세워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바울이 남긴 고별사의 미래적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놀라운 교회운동의 흐름이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 운동은 유구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교회는 십자가의 지도자에 의하여 존재하고, 성장하고, 계승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바로 교회운동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할 것입니다. 역사상의 교회는 우리에게 이 요긴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께서 세운 베드로와 야고보 같은 지도자에 의해서 창설되고 부흥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신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서 이방선교의 중심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소아시아의 에베소 교회는 성령께서 세운 사도 요한과 그 뒤를 이은 디모데 같은 지도자에 의해서 부흥되어 마침내 소아시아에 3000여 교회 이상으로 부흥되는 교회운동을 이룩하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크리소스톰이, 아프리카의 히포에는 어거스틴이 있었습니다. 중세기의 종교개혁 전에 이탈리아에는 사보나롤라가, 영국에는 위클립이, 보헤미야에는 요한 허스가 있었습니다. 저들이야말로 개혁의 샛별이었습니다. 종교개혁 때는 독일에 루터, 제네바에 칼빈, 취리히에는 쯔빙글리가, 스코틀랜드에는 요한 낙스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청교도 지도자들이 영국과 미국 등지의 기독교 역사를 이룩하였습니다. 지난 100여 년이 넘는 한국 기독교회사도 성령께서 세운 말씀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2000년 세계선교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오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한국 교회와 경향교회를 향한 미래적 축복 보장과 부흥은 성령에 의하여 세움을 받은 말씀의 지도자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는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전하는 말씀의 지도자에 의하여 계승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이룩하여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택자 구원운동의 구속사에 하나님이 친히 주장하시는 당신의 뜻입니다. 우리 경향교회의 미래에 이 축복의 은총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바울의 고별 설교
행 20장 28~38절 / 서금석목사
유언에는 몇가지 특색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유언은 절대로 길지가 않습니다. 세상 떠나면서 긴 얘기합니까? 대개는 긴 얘기하지 않습니다. 상식적인 면에서 유언은 새로운 얘기가 없습니다. 평소에 늘 하던 말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얘야, 내가 늘 네게 해주었던 말 명심하거라. 알았느냐?" 대개 유언 얘기하면 흔히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를 재산 분배와 많이 관련을 짓습니다만, 유대인 격에 '자녀에게 물고기를 물려 주면 사흘을 먹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먹고산다'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가치 있는 유언은 물질에 관계된 유언이 아닙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가장 가치있고, 귀하고, 아름답게 사는 방법을 담고 있는 것이 귀한 유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교훈이야 평소에 늘 들려주던 얘기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순간에 다시 다짐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유언은 마지막이기 때문에 다른 것들보다 소중하게 다룹니다. 유언이라고 하면 고인을 생각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던 없던 간에, 가장 우선적으로 취급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3년간 눈물로 가르쳤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마지막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시점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마치도 유언과도 같습니다. 오늘은 바울의 고별 설교 두 번째 시간으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들려준 바울의 권면과 당부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신앙의 참 교훈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1. 바울의 마지막 권면- 삼가라 : 스스로 잘 살피라.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영국 런던에서 대형백화점을 경영했던 셀프리지(Gorden Selfridge)라는 사람은 상관(boss)과 지도자(leader)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관들은 사람들을 몰고 가지만 지도자는 그들을 인도한다. ·상관은 위협적인 경우가 많이 있지만 지도자는 감동적일 때가 많다. ·상관은 '나는'이라는 말을 자주하지만, 지도자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한다. ·상관은 잘못된 것을 책망하지만, 지도자는 잘못된 것을 고쳐준다. ·상관은 '가라'고 명령하지만, 지도자는 '갑시다'하고 말한다.」 다스리고 명령하는 상관보다는 솔선수범하여 본을 보여주며 인도하는 지도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⑴ 지도자는 성령께서 세우십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누가 세웠겠습니까? 그 당시는 지금처럼 교회 조직과 규칙이 있었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 기간에 좋은 재목들을 뽑아서 바울의 교회의 장로들로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들을 당신이 임명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로들을 세운 분은 성령이시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지도자 세우는 것 성령께서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목사도 성령께서 세우셨습니다. 장로님들도 성령께서 세우셨습니다. 성령께서 왜 세우셨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하시려고. 교회를 돌보게 하시려고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희생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셨으니 '피로 사신 교회'라 하셨습니다. 지도자들은 바로 이러한 교회를 하나님을 대신하여 치리하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점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피값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피를 흘려서 값주고 사신, 대가를 치르고 사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교회지도자는 바로 이들을 바르게 인도하라고 세우신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⑵ 지도자가 해야 할 일 - 자기 관리, 양 떼 관리
이런 지도자가 해야 할 두가지가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삼가라'는 말은 희랍어로 '프로세코(προσεχω)'는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라', '전력하라', '관심을 가져라', '조심하라'는 뜻인데 표준새번역에는 '보살피라'로 번역했습니다.
현재 명령법이므로 계속적으로 구현하고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누구를 보살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먼저 자기를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먼저 자기 성찰, 자기 절제를 바로 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지도자는 따르는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언행심사에 바르지 않으면 자녀들이 비뚤어집니다. 부모가 신앙생활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자녀들은 바른 믿음생활 하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 뿐입니다. 평소 보고 배운 것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것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는 자기 욕심만 채우면서 아랫사람들에게 희생하고 충성하라 한다면 그 말이 통하겠습니까?
결국 나라 문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오늘 우리의 현실에 웃음이 사라지고 마음 속에 허탈과 분노만 쌓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믿고 찍어 주었더니 자기들끼리 싸움질만 하고, 자기들 실속은 다 채우면서 말없이 따라 주는 백성들에게 부담만 가중시키니 웬일입니까? 세상 얘기해서 뭘 합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문제도 대부분 지도자의 문제입니다. 적어도 교회에서 목회자와 장로님들 정도가 제 위치에서 제 역할 제대로 하기만 하면 교회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문제 아닙니까? 교회 지도자들도 자기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자신의 영적 훈련은 제대로 되고 있는가? 교회 지도자들이 스스로 희생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섬긴다면 성도들은 자연히 믿고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갈등하고, 지도자들이 스스로의 영적인 문제에 나태하다면, 그런 교회는 시끄러운 교회 게으른 교회, 신앙은 잠들어 있고 인간적 생각만이 깨어 있는 교회일 뿐입니다. 지도자는 스스로를 살핀 후에 반드시 양 떼를 보살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리하는데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은 양떼를 보살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도 드려야 합니다. 봉사도 해야 합니다. 전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양떼를 돌보는 일입니다. 목사들이 해야 할 일은 양떼를 보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내 양을 먹이라" 잠시 후 예수께서 다시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 예수께서 세 번째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 때 예수님은 "그래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질문을 묻고 계십니다. 목회자와 장로님들-교회지도자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은 양을 돌보는 일입니다.
양떼 - 성도들은 보살피는 일입니다. 양 떼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피값으로 사신 귀한 백성들 아닙니까? 목회자와 장로님들 뿐이겠습니까? 교회학교 교사들, 속회지도자들(교구장, 지역장, 인도자, 속장) 선교회 회장들, 각 위원회 위원장들. 양떼를 잘 돌보시기 바랍니다.
⑶ 왜 지도자는 자기 관기 / 양떼 관리를 해야 합니까?
- 외부에서 오는 거짓 교사와 내부의 이단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먼저 자신을 살피고 그리고 양떼를 살피라고 간곡하게 권면했습니다. 지도자가 자신에게 소홀하면 아랫 사람들, 양떼들이 손해 봅니다. 목사가 자기 관리 못하면 성도가 손해 보는 법입니다. 목사위해, 장로님들 위해 기도많이 하셔야 합니다. 왜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교회 지도자들에게 자기 관리 잘하고 양떼를 잘 돌보라 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29절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떠난 후에 반드시 흉악한 이리9(거짓 교사를 말함)가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한다-양떼를 마구 해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거짓 교사는 처음부터 거짓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15에서도 예수께서 양의 탈을 쓴 이리를 조심하라 하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양 떼를 해치는 무리는 외부로 부터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교회 자체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어그러진 말'이란 말을 왜곡하다, 구부러지게 하다는 뜻으로 복음을 곡해하고 교묘한 논리로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외부에서이건 내부로부터이건 잘못된 교사와 사상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지도자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자신에 대한 절제, 관리, 훈련도 잘해야 하는 동시에 양 떼들을 잘 살펴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감독자는, 지도자는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시는 보지 못할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어떤 심정으로 말하고 있는지를 헤아린다면 어떻게 말씀을 받아야 할 줄도 깨닫게 됩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일깨어(깨어 있어서) 기억하라
바울의 고별 설교는 이제 절정에 이릅니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⑴ 삼년 동안 밤낮으로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31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삼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 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바울은 설교의 절정에서 새로운 내용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삼년 동안 밤낮 얘기한 것 있지 않느냐? - 그것 마음 속에 꼭 기억하며 살아라.
먼저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방심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합니다.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 바울은 삼년 동안이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두란노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열심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전한 것이 아닙니다. 눈물로 전했습니다. 간절한 사랑으로 전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례식에도 참석하지를 못했습니다. 어머니와 저와의 마지막 만남과 대화는 임종 두달 전에 있었습니다. 회복의 가망성이 없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어머니는 눈물로 말씀하셨습니다. '어서 가서 공부 마치거라' 중환자실에서 찾으시던 막내 아들 다시 등 밀어 보내시던 어머니의 마음, 그 눈물을 저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간절한 눈물로 가르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려운 일 생기고, 힘든 시련 만나면 내가 가르쳤던 것 기억하라.
신앙 생활에 기억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과 먹을 음식 때문에 고생할 때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통해 해방시켜 주셨고 홍해까지 가르시던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만 했더라도 불신앙의 길을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이 왔습니까? 주님을 기억하세요. 시련이 왔습니까? 주님을 바라 보세요.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어떤 경우라도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아들까지 내어주시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⑵ 당신들을 누구에게 부탁할까? 하는 것입니다.
"32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付託)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 사랑과 정성으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떠나면서 그들을 부탁할 곳을 생각했습니다. 다시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허전하기도 하고 걱정도 생겼습니다.
이후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 때 누구에게 부탁할까? 생각하다가 바울은 주님께 맡겼습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 붙잡아 주시고 든든케 해 주실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주님만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 말고 주님께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채워주시고 세워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말씀을 읽고 또 듣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말씀을 믿고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말씀이 나를 보호해주고 나를 지탱해 줍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은혜가 되었는데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이 말씀만 생각하면 힘이 솟아요! '그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지' 이쯤 되면 말씀이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바로 능력입니다. 말씀이 힘이 되고 내 영혼의 양식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붙잡고 있는 한 결코 실패하지도 멸망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군대가는 아들을 누구에게 부탁하시렵니까? 시집가는 딸을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패물 잔뜩 장만해서 사돈에게 맡기시렵니까? 병들어 세상 떠날 때 자녀들을 누구들에게 맡기시렵니까? 주님과 그 말씀에 맡기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그 말씀에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어디에 있던 어떤 경우던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말씀 다라 살다보면 영원한 하늘 나라의 기업이 있습니다.
⑶ 본을 너희에게 보여 준대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33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35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바울은 삼년을 에베소에서 보내면서 장로들과 성도들에게 보여주었던 기본적인 삶이 있었습니다.
나는 탐심을 버리고 살았던 것 너희도 알지 않느냐? 너희도 탐심을 버려라. 왜 이 중요한 순간에 물질에 대한 말을 하고 있을까요? 왜 탐심을 버리라고 했을까요? 긴 설명 생략합니다. 탐심 때문에 인생 망치게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많은 경우에 지금도 고민하고, 걱정하고, 싸움하는 이유 중 대부분은 탐심 때문입니다. 바울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쁘게 복음을 전하는 중에서도 스스로 땀 흘려 돈 벌어 썼습니다. 물론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가르치면서 생계비를 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손수 일해서 얻은 물질로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과 생활했습니다. 약한 사람도 도왔습니다.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도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 말씀을 인용하여 '주??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는 것이 박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없습니다. 짐작키는 바울이 늘 함께 보았던 외경에서 온 말씀같습니다. 성경 여러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마음에 꼭 심고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녀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십시오. 받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 - 거지입니다. 주는 것 좋아하며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남에게 주며 살 때 하나님께서 내게 채워주십니다.
여러분 자신도 남에게 하나라도, 한가지라도 더 주려고 애쓰며 사시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될 수 있는대로 주려고 하며 살아야 합니다.
3. 눈물의 작별
"36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37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 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바울의 마지막 감동적인 이별 장면이 나옵니다. 무릎 꿇고 함께 기도하며 다시 보지 못하리라 한 말 때문에 걱정하며 배에까지 전송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헤어지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사람에게는 감동과 감격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마음에는 원망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한이 맺혀 있어요. 분명한 것은 한이 맺혀 있는 동안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울의 이별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사람은 울 때는 울어야 합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이란 말은 참 무서운 말입니다. 바울은 이제 마지막 길을 떠납니다.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얼마전 어떤 성도가 서울을 떠나 춘천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흘린 눈물을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만날 수 있는 헤어짐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영원한 헤어짐도 있지 않습니까? 바울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목을 안고 울었습니다.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세상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합니다. 주위에서 같이 지내던 동역자들이 한둘 떠나가기도 합니다.
언제인가 헤어져야 함을 안다면 같이 있을 때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리
누구나 마지막은 아쉽기도 하지만 의미가 크기도 합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애써서 가르쳤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권면합니다.
당신들은 성령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입니다. 이제 곧 교회 안과 밖에서 거짓 교사들과 이단들이 나타나 양 떼들을 흩어버리고 교회를 혼란케 할 터인데 자기 관리 양떼 관리를 특별히 잘해 주세요. 3년 동안 밤낮 눈물로 했던 권면 기억하세요. 탐심 버리고 주님과 말씀에 의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 바라보고 주님 의지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은혜,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사랑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려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도 주님 중심 / 말씀의 은혜 중심으로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누리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는 자의 행복
행 20장 29~35절 / 서정호목사
여러분은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누군가에게 준 것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혹시 받은 것보다 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자신이 받은 것보다 남에게 준 것이나 잃은 것, 빼앗긴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자인생을 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남에게 준 것이나 잃은 것, 빼앗긴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여기는 사람은 흑자인생이라고 여기며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적게 받았는데 많은 것을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며, 받은 것 없이 주기만 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남에게 준 것, 잃은 것, 빼앗긴 모든 것들은 예외 없이 받은 것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하고도 아직 더 줄 것이 남아있는 것이기에 모든 인생은 적자가 아니라 흑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규 씨는 [사랑과 인생]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십계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산하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되돌려 받으려고 하지 말고, 조건을 달지 말고, 다짐하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비교하지 말고, 확인하지 말고, 상황에 맡기라"
계산하거나 후회하거나 기대하지 말고 무조건 나누어줄 때 좋은 열매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작은 사람이고,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 더 나아가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은 큰 사람이며,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복 받을 사람입니다.
행복은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것
옛날 희랍에 전제국가의 한 왕이 있었는데 그는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호색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큰 상금을 걸고 쾌락과 행복의 도를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을 천하에 널리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일 다 해 보았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져 보았지만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높은 행복, 더 높은 즐거움은 없을까? 해서 높은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 방법을 간구했지만 불만과 갈증은 날로 더 가중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나보아도 실망하게 되고 끝없이 향락과 기쁨을 추구했으나 별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소녀 하나가 자기가 왕께 나아가서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말하겠다면서 왕 앞에 나타나서 당돌하게, 꾸짖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행복을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행복하게 하십시오. 그리고서야 왕이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왕은 숙연해 지고 한참 생각 끝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딸아! 그대의 말이 옳도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상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나 혼자서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인 오연호 씨는 대학생 때부터 철저하게 반미주의자 였고 데모 주동자였습니다. 그는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잘못한 것만 주로 끄집어 내 가지고 발표하는 일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미국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잘못한 것들만 전부 취재해서 책을 4권이나 썼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 그는 좀 더 미국을 알아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미국 유학을 하게 되면서 그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소련도 망하고 사회주의도 망하고, 구라파도 엉망이고 일본도 저렇게 시들어 가는데 도대체 미국은 왜 8년 동안 계속 호황을 이루고 있는가?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면서 그 결과로 쓴 책이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미국은 벌런티어 정신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벌런티어는 자원봉사자를 말합니다. 적어도 미국사람이라면 일주일에 몇 시간, 한 달의 며칠은 자원봉사 해야 되는 줄 알고 있고 이것을 못하면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봉사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기도 하고, 자기 생애 중에 어렵거나 가난하거나 상관없이 적어도 몇 시간은. 그리고 며칠 동안은 꼭 자원봉사 해야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 년에 4천만 명이 자원봉사에 나선다고 합니다. 이래서 미국은 망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고 나서 그분이 미국에서 신앙을 얻은 다음 이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 행복의 길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그는 영원히 불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어느 쪽이 복됩니까? 어느 쪽을 기뻐합니까? 여러분 어디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받는 것만 복이 있고, 더 가지는 것만 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바울이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친 제자가 아니었기에 살아생전 예수님 하신 말씀을 들은 바가 없어서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한 절, '주는 것이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 이 한마디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행복과 불행이 어디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행복
주는 행복,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행복이 있습니다. 수재의연금을 접수하는 창구에 할머니 하나가 왔습니다. 조용히 앉아서 3분 동안 손을 모으고 기도g나 다음 5천만 원을 내 놓습니다. 이름과 주소를 대라고 하니까 "아니오. 좋은 일에 쓰면 되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저와 제 아들이 여러 해 동안 모은 겁니다. 좋은 일에 바로 쓰면 됩니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했습니다. 저마다 자기 이름을 내 놓고 자랑하는데 이렇게 내 놓고 조용히 사라진 이 할머니! 이렇게 돌아서는 바로 이분의 마음속에 있는 행복은 누구도 빼앗지 못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데 그 행복을 모르고 살까요? 불행이 있다면 주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는 것이 불행입니다. 주는 것이 행복한 것인데 왜 이걸 모르고 살까요?
빼앗기는 마음에서 사는 것이 불행한 것
줄 때마다 좋은 마음으로 주지 못하고 꼭 빼앗기는 것입니다. 체면 때문에 무엇 때문에 할 수 없이. 자식에게 주는 것까지도 강도 만나는 마음으로 주고, 한 평생 빼앗기는 마음으로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번도 남을 기쁘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자기가 불행한 것이고, 자기가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마음으로 한 평생 사는 사람이라면, 이 얼마나 신세가 가련할까요? 그런가 하면 받지 못하고 빼앗지 못하는 불행, 더 가지고 싶고 빼앗고 싶은데 못 빼앗아서 몸부림치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불행한 것입니다.
행복의 기본이란 어디에 있습니까?
행복은 더불어 가지는 것이기에 이기주의자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나만 행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내가 행복할 수 없고, 굶주리는 사람을 보면서 내 입맛이 동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편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더불어 행복하게 되어 있고 주고받는 관계 속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는 자가 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주고받고 사는데 '받는 자와 주는 자' 어느 쪽이 되고 싶습니까? 어느 쪽이 되어야겠습니까? '주는 자' 된 것을 기뻐하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또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대체로 보면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뒤에 후회하게 되는데 오늘도 다소라도 남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요? 병원에 가보면 방문 받는 자와 방문하는 자가 있는데 방문하는 자 편에 있고 오늘도 이런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편안하고 건강하고 잘 뛰는 사람이 되어서 줄 수 있다는 것, 줄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 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내가 남에게 무엇을 줄 때 그 받는 자의 기쁨에 내가 동참하고 함께 하는 거기에 교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기본 철학입니다.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먹고 싶은 것도 아이들에게 주고, 아이들이 먹으면서 좋아할 때에 자기 입에 들어 간 것은 없지만 자신이 더 좋아하는 것은 이것이 사랑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 당한 사람을 내가 돌보면서 주면서 그가 기뻐하는 마음에 자신이 같은 교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내 기쁨이 있는 것이고, 이 기쁨이 기쁨의 극치인 것입니다.
준다는 것은 자유함을 말한다.
때로는 받으면 한 편으로는 좋지만 마음이 무겁고 괴로운 것은 주는 자만이 언제나 자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상대방을 기쁘게 하려고 하면 주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요, 이것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의를 주고 생명을 주고 음식을 주고,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행복한 것입니다.
주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주는 것을 좋아하고 대접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언제나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주심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8절과 8:32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이고, 대접하는 것이고,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시간을 주고 물질을 주고 나아가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까지라도 바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모든 복을 다 받는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뿐만 아니라 모든 복을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공부를 많이 하고 출세를 하면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기가 많을수록 유명해질수록 더욱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 물질 때문에 그 명예 때문에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왜 기쁨이 없습니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대접을 받지 못합니까?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일에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대접을 받으면 살려고 한다면 남을 대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는 것이 복이기 때문이다.
병문안을 받는 것과 병문안을 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플 때 병문안을 받는 것은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병문안을 받는 것은 작은 복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병문안을 가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은 건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을 도울 수 있는 건강과 남에게 줄 수 있는 물질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실 구제 받는 사람보다 구제하는 사람이 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주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눅 6:38).
잠언 11:24.25절을 보면“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했습니다. 요즘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때에 참으로 의미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28:27).
특별히“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한 영혼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집을 드리고 땅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백배의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막 10:28-30).
거룩한 계산
모든 것을 물질만으로 사람의 가치를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소유한 것만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
나눈 것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사람들
드린 것을 재산으로 생각하는 신앙의 사람들
당신은 어느 반열에 서 있습니까?
당신은 어느 계산대 앞에서 더 많은 계산을 합니까?
당신은 당신 인생의 종착점을 어디에 가서 맞으려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당신이 뿌린 씨앗을 누구와 함께 추수하려 합니까?
오늘의 모습이 당신의 전부는 아닙니다. 계산하려거든 더 거룩한 계산을 하십시오. -고훈 목사-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전도법은 없습니다. 사랑은 가장 큰 은사입니다. 작은 선(善)들이 모여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과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만일 주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절망 속에서 영원한 파멸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로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 피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만 소망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사랑은 우리들 가슴 속에 각인된 채로 오래오래 남아있게 됩니다. 그처럼 오래도록 남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꽃이 자기를 가꾸어주는 손길에게 향기를 남기듯이 받은 사랑을 되돌릴 줄 아는 사랑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실 주는 것만 복이고 받는 것은 복이 아니란 말씀은 아닙니다. 받는 것도 복입니다. 다만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얻는 자 보다는 베푸는 자가 더 복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는 복된 아이입니다. 사랑은 진정 받을 줄도 알아야 그 사랑을 남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사랑을 줄줄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가 어려서 제대로 정상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불행한 배경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극도의 개인주의는 사랑을 받기도 싫고 주기도 싫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무정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친절이나 호의도 잘 받아 드릴 줄 아는 것도 축복입니다. 대접을 잘 받아본 사람들이 남을 대접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놀랍고 엄청남 사랑을 받은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것도 축복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아내들은 남편사랑을 받아야 하고, 직장에서도 사장의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도 목회자의 신뢰와 사랑을 받아문제는 받는 것만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받는데서 다시 주는 자, 베푸는 자로, 꾸어주는 자로 바뀌어 가는 인생이 될 때 더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받는 것도 복이지만 주는 자가 되는 것은 더 복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보다 저것이 더 복된 일이라면 더 복된 일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도 축복이지만 그 사랑을 받은 후에 그 사랑에 고마움을 느끼고 주님께 내 몸과 맘과 물질을 드리는 자가 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주는 자가 더 행복한 것이고 축복된 것입니까?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뜻과 진리가 있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은 내 인격이나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어린아이는 자기중심적이지만 어른은 남을 생각하면서 행동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입만 알지만 어른은 부모의 입도 이웃의 입도 생각하며 삽니다. 철부지 때는 달라는 소리로 일관하지만 자꾸 커가면서 달라는 소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 40살이 되도 부모에게 어린아이처럼 계속 달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육체적으론 어른이지만 인격적으로는 어린아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들은 처음 초창기신앙은 달라는 기도로 일관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지면서 달라는 기도에서 이제“주님의 사랑 받았으니 나의 무엇으로 은혜를 보답하리이까?”하는 기도로 바뀌어 질 때 그 신앙은 성숙해 가는 징조입니다.
어떤 철인(哲人)은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받으려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베푸는 때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것을 준다는 일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줄 수 있는 마음과 베푸는 태도가 바로 그의 인격과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뜻이니, 어찌 이것이 복된 일이 아닐 수 있습니까? 아직도 나이는 들었으면서도 성숙치 못하고, 철부지의 인격과 신앙에서 이제는 받는 자보다 주는 자로 인생을 바꾸어보시기 바랍니다.
주는 것은 참된 기쁨을 선물하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것
자녀들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는 부모들의 기쁨은 선물 받는 자녀보다 더 큰 것입니다. 젖을 주는 어머니의 보람과 기쁨은 젖을 빠는 어린아이보다 더 흐뭇한 것입니다. 받는 것이 외형적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내면적인 기쁨입니다. '죠지 피바디'란 사람은 그의 막대한 재산을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내어놓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지만 결단하고 내 놓을 때는 재산을 모을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원해서 이 재산을 내놓을 수 있다" 이런 죠지 피바디같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겠습니까?
'폴 투르니에'란 사람은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곧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 무엇을 얻으려 할 때의 미안함과 떳떳치 못함과 나중에 비루함을 느껴본 일이 있습니까? 이제 남에게 주는 자로써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의 만족감과 떳떳함이 받는 자 보다 확실히 더 복됨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주님의 삶을 닮아가는 모습이기에 더 행복한 것
성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해서 성자 예수님을 인간들을 위하여 자기의 살과 피 한 방울 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다 주셨습니다. 야고보서 1:17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연약한 인생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삶은 받으시는 삶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주시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받으신 것은 없고 모두 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베푸는 생활, 주는 생활, 바치고 드리는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는 것을 통하여 주님과 천사를 대접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
마가복음 25장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양과 염소의 삶은 주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입니다. 옥에 갇힌 자, 헐벗은 자, 배고픈 자를 도와주는 일이 곧 주님을 대접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소에 손님은 극진히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1-2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기를 좋아하는 자를 크게 쓰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일 싫어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인데 그 이유는 그들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상좌에 앉아서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만 좋아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직분은 대접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더 섬기고 더 사랑하고 더 베풀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귀한 직분인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됩시다. 필요 없는 그릇, 진열장에만 진열해놓은 그릇이 되지 말고, 매일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받는 것보다 베풀고 바치고 드리는 것을 더 우선할 수 있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
행 20장 31~38절 / 최인근목사(시애틀빌립보교회)
미국에서 가장 좋은 직장 1등에 선택된 회사는 제약회사인 화이저라고 합니다. 미국에 얼마나 많은 기업체와 직장이 있을 것인데 그 중에서 최고라면 이는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곳의 연봉이 5만에서 8만으로 그리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돈만이 좋은 직장을 선택하는데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 것입니다. 돈 보다 더 귀한 것들, 이를테면 업무환경, 직장 상호간의 협조와 존중, 좋은 복지, 미래에 대한 기대 등등의 여건이 어느 직장보다 더 좋은 것으로 판단된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평생을 주고 받으며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회생활과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지식과 기술과 능력과 시간을 주고 결국은 돈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인생을 다 산 후에는 어떻게 잘 주고 잘 받았는가로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로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이것이 결국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평가하게 되는 매우 날카로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깊은 뜻을 가슴에 새겨서 훗날 뒤돌아보고 후회하지 않도록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 어긋남이 없이 훌륭하게 잘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지 2천 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수많은 성도들의 가슴에서 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삶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다음과 같은 몇 문장에 실어 이 세상에 남겨 두었습니다.
(행20:17-21)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저희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평생을 살아왔던 삶의 철학이었고 현실이었습니다. 그 핵심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고 또한 성도들에게 드렸던 삶입니다. 그의 그와 같은 가치관은 결국 하나 뿐인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놓게 됩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이토록 온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는 이런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멋들어진 삶은 오직 하나 우리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가슴으로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삶의 축복이었습니다.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는 늘 많이 받아야 복이 있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많이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게 많이 받으려고 욕심을 부리면 더 못 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세상은 많이 달라고 요구한다고 주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휘자를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의 말이 지워지지 않고 제 머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만큼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 말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목사님, 저는 사례를 많이 주면 전공이 살아나서 지휘를 잘 할 수 있는데 사례를 작게 주면 전공이 살아나지 않아서 지휘를 잘 하지 못합니다. 저는 받는 만큼 합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도 이웃교회에서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성탄연합예배 때 그 교회의 연주를 들어보니 우리보다 훨씬 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그 교회에서 사례를 많이 주지 못해 전공이 잘 살아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주고 받는 삶! 이것은 매우 평범한 말 같지만 우리들의 모든 것을 대변해 주는 인격과 신앙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과 예수님을 통해 이처럼 주고 받는 삶의 근본을 배우고 실천하여 죽어도 후회 없는 그런 멋들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그냥 삶 속에서 그렇게 좋게 느껴서 불러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바 사랑의 정의는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우리들에게 주심으로 스스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몸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시는 사랑에 도무지 조건이 없었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들을 감동시켜 줍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주는 데는 조건이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월급을 받는 것은 노동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입니다. 주는 것이나 받는 것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조건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이처럼 아무런 조건도 없이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거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 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주시면서도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면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깨달아야 할 내용일 것입니다. 우선 다음 말씀부터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이 놀라운 한 말씀가운데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씀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주실 때 우리는 그와 같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조건이 충족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들에게 조건 없이 주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는 것"에 대한 배경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독생자 예수님도 아낌없이 주셨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역으로 돌려서 생각해 보면 하나의 해답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결코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명령하고픈 말씀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엄청난 축복을 담보로 우리들에게 친히 명령하십니다. "주라!"고 말입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심으로 우리들에게 축복을 주시기를 너무나도 원하시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축복을 받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다 내 놓았던 것입니다. 다음의 두 말씀을 묵상해 보신다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한 사람이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빌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만 이렇게 하고 실제 삶은 자신의 유익만을 위하는 그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그대로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로운 것과 같이 버리고 오직 주님을 위해 일생을 쫓아갔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 뿐인 생명마저도 주님을 위해 과감하게 내어 놓고 거룩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이처럼 자신의 소중한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거룩한 삶으로 열매를 맺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도 이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에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시간을 아껴서도 안 되고 돈을 아껴서도 안 되고 몸을 아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주님으로부터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을 우리들이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마땅한 일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일4:9-11)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말 못하는 나무도 물을 받고 생명을 받은 줄 알고 끊임없이 우리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산소를 내 놓고 있습니다. 하물며 만물의영장이라 일컬음 받는 우리 사람들이 받고도 모른 척 하고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오늘 날 신문이나 인터넷 상에서 십일조가 비성경적이라는 논평을 내놓고 있는 자칭 잘난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십일조가 되었든 십이조가 되었던 감사가 되었던 무엇이 되었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리는 우리 성도들이 그 하나님께 감사하여 되돌려 드리는 예물에 무슨 명칭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더 드리지 못해 늘 죄송하고 힘이 닿는 대로 드리도록 힘쓰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랑 받은 백성들이 사랑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인색한 마음이나 마지못해 하는 억지는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자신의 모든 것 다 드렸던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고후9:7-8)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입니다. 이 얼마나 사랑 받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감동이 되는 말씀입니까? 솔로몬의 일천 번제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더 드리지 못해 늘 마음이 아플지언정 인색한 마음이나 억지로 드리는 어리석은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기를 기뻐하고 넉넉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은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복된 성도들인 것입니다.
열두 살 된 아들과 일곱 살 된 딸을 데리고 단란하게 살아가던 한 가정에 뜻하지 않는 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네 식구가 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모두가 다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다행히 세 식구는 가벼운 경상을 입었는데 아들은 아주 크게 다쳐 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의사는 수술이 끝나봐야 알겠지만 수혈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딸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에 찾아갔습니다. "수잔, 혹시 말이야. 오빠가 수혈을 받아야 될지도 모른단다. 만약 오빠가 피를 더 필요로 한다면 네가 피를 좀 내 놓을 수 있겠니?"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이제 겨우 7살밖에 되지 않은 딸 수잔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더니 비장한 각오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아빠. 오빠를 살리는 일이라면 제 피를 내 놓겠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후 다행히도 아들은 수혈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호전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다시 아빠가 딸에게로 가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다시 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수잔, 내가 오빠에게 수혈을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너는 왜 그렇게도 심각하게 망설였니?"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수잔은 정색을 하며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죽는 일을 앞에 두고 어찌 심각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아니, 수잔. 죽는 일이라니?" "나에게서 피를 뽑아내면 나는 죽게 되잖아요?" "그럼, 수잔. 너는 죽는 줄 알면서도 오빠를 위해서 피를 주겠다고 한 거니?" "그럼요, 나는 오빠를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내가 죽더라도 오빠를 살릴 수 있다면 제 피를 주기로 했어요." 그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아빠는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어떻게 이렇게도 어린 딸이 제 오빠를 살리겠다고 죽는 줄 알면서도 피를 주겠다고 했는지? 가슴이 뭉클하고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단어인가를 가슴이 저미도록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아무리 소중한 것도 그냥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삶은 사랑하는 삶인 것입니다.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이제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 다니면서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받는 월급에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자신이 쏟아 붓는 노동력에 비하면 너무나도 월급이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국에서 얼마 전 있었던 한국철도공사의 파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평균 월급보다 훨씬 더 많이 받고 있으면서도 월급을 더 올려달라고 데모를 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엄청난 국가적 재정 손실을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은 또 의사들이 들고 일어나 진료를 거부하고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수입이 적어지는 정부정책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단이기주의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업주가 이런 상식을 초월한 이기주의자들의 노동쟁의를 받아들일 수 없어 아예 직장을 폐쇄하거나 사업장을 폐쇄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주나 고용인 모두가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나가는 직장을 천직으로 알고 이와 같은 좋은 직장이 있었기에 가정도 자녀들도 미래를 향한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여 더 많이 일하고 더 열심히 충성하면 과연 어떠한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전자들의 집단이기주의와 전혀 다른 윈윈과 상생의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하늘과 땅으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는 기초는 아주 간단한데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받는 것에 대한 은혜 정신"입니다.
다윗은 원래 들판에서 양이나 치고 있었던 목동이었습니다. 그러했던 그가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결코 자신의 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그는 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16: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탄식만 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화답하려고 자신이 가진 재산을 과감하게 하나님께 바쳐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받은 것에 대한 정확한 자세입니다.
(대상29:3-4)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대상29:13-14)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숨길 수 없는 다윗의 믿음과 인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처럼 천문학적인 재산을 하나님께 바쳐드리고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다시 하나님께 바쳐드린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러므로 그는 부와 귀와 능력과 권세와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받는 것에 대한 해답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달라고 조른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속된 말로 받을 짓(?)을 해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미도 우리 주님께서 그 분명한 해답을 남겨 두셨습니다.
(마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25:28-31)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해 보신다면 누가 과연 받아 누리게 되며 누가 과연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게 되는지 그 분명한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받아 누리는 것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만큼의 삶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삶의 근본정신과 믿음이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는 지극히 단순한 대답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신 사도 바울을 한 번 보신다면 이 말씀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비교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금까지 변화되고 성장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 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전15:8-10)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도다운 바울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 될 사람은 끊임없이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탓하며 자신을 정당화시킵니다. 하지만 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자각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은 낮추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기적 같은 은총과 축복을 주셨던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도 사도 바울과 다윗과 같은 사람의 근본이 되어 있고 하나님을 진실 되게 고백하는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인생 여정 중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고 받는 아름다운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결과를 보면 그렇게 받는 것을 좋아한다고 받아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면에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었기 때문에 가난하여지거나 망하는 경우 또한 볼 수 없습니다. 결국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근본과 신앙의 문제이지 욕심을 내거나 사모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들에게 주어진 짧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고 말씀하신 바를 사도 바울과 같이 귀하게 여기고 따라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이 바로 "주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험상으로 볼 때 주는 기쁨이 실로 받을 때 받는 것보다 크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이와 같은 근본적인 기쁨을 회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주라!"고 말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가고 맙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죽고 나서도 욕을 먹는 것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펫과 같이 사회에 환원하여 귀한 일도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오로지 기술 개발과 돈만 끌어 모으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이 세상에서 우리는 늘 주는 자가 되어 줌으로 되돌려 받는 그런 멋진 축복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비가 내려와 이 땅에 물이 고이게 하고 그 물에서 다시 수증기를 만들어 비가 되는 것과 같이 우리들도 나누어 주고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이렇게도 멋들어진 삶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복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그렇게 하라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귀한 말씀을 주셨는데 이 말씀을 사모하여 성전에 나온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은 이처럼 놀라운 삶으로 더욱 멋들어진 남은 삶을 살아가시게 되기를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 멘
받는 자 보다 베푸는 자가 행복 합니다
행 20장 31~35절 / 고일성목사
육군 사관학교에 가보면 교정에 동상을 세우고 기념하는 한 인물이 있습니다. 계급이 높아서 기념하는 것이 아니요, 참모 총장을 지냈기 때문에 기념하는 것도 아니랍니다. 여러분, 군인이라면 저마다 별을 흠모하고 그 별을 자신의 어깨에 달아는 보는 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하지만 훗날 그 별을 기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번쩍이는 별을 단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육군 사관학교 교정에 세워진 동상은 육군 소령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의 숭고한 정신을 우러러 보는 강재구 소령입니다. 계급이 높아서 기념하는 것이 아니요, 인물이 잘나서 기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의 인격이 위대하고 영원히 남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고 강재구 소령 그는 자신의 귀한 몸.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그 귀한 한 몸을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었던 마리아 같이, 그의 몸이라는 옥합을 깨뜨려 피를 쏟아 많은 부하들의 생명을 살렸기 때문입니다. 월남 파병 직전 훈련 중 부하가 수류탄을 오발하여 폭발이 되면 전 중대가 완전히 못살될 것을 생각해서 자기 몸을 덮쳐 자기 하나가 죽어 온 부하를 살렸으니 그의 생이 위대하여 후대에까지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옛 조상들로부터 함께 즐거워하는 명절중에 추석이 있습니다. 하늘은 그 없이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곡식이 있어 향기롭고 풍요하며 밤에는 하늘높이 둥근달이 떠 있어 가난과 고생, 아픔과 설음, 타향 살이의 시름을 달래면서 야릇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명절이 바로 추석입니다.
그 즐거운 명절에 조상의 무덤을 찾아 갑니다. 즐거운 명절에 무덤을 찾는다! 참으로 의미깊은 전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추석명절은 우리에게 두 가지 깊은 감회를 던져 줍니다. 조상의 무덤을 찾을 때 인생의 무상함과 허무를 느끼게 합니다. 또 하나는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참으로 인생은 무상하고 허무합니다. 그토록 한 많은 세월이 가노라면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인생은 무덤을 남긴 채 인생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그 어떤 사람도 흘러 가는 세월속에서 인생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도 갑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여러분의 무덤을 찾아 왔을 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자기의 것을 주면서 사는 부자가 있고, 남의 것을 얻어 먹고 사는 거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움켜 쥐고만 살아가는 부자도 있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모름지기 부자란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는 아닙니다.
반면에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가난한 것만도 아닙니다.
가진 것은 많은데 일생 동안 남에게 준 것이 없는 가난한 자가 있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많이 주고 간 부자가 있습니다. 부자란 소유한 것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줄 것이 있어야 부자입니다.
거지도 먹을 것이 없어서 얻어 먹으려는 거지와 마음 속에 항상 만족이 없어서 남의 것을 가지려는 마음의 거지가 있습니다. 무조건 하고 받아 먹기를 바라는 사람. 그것으로 만족하게 살다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추성명절에 훗날 여러분의 후손들이 무덤을 찾아와 조상을 그리는 마음으로 성묘하며 기도들릴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떤 모습의 조상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하여, 받는 것 보다 베푸는 자가 행복하다는 성서의 말씀을 따라 저 세상 살때에 언제나 아름답게 베풀면서 살았던 믿음의 조상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베풀지도 못하고 받는 것으로일생을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
1931년 남궁억 선생이 연희 전문하교 졸업식에서 축사로 남긴 말입니다.“오늘 아침 내가 여러분을 보려고‘놀미재’라는 높은 고개를 넘어왔습니다. 간밤의 많은 눈으로 길이 모두 없어져 앞서 간 발자국만 따라 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본래의 길을 찾아내어 눈을 옆으로 치우며 걸어왔습니다. 그래야 내 뒤에 오는 사람도 내 발자국을 따라 바른 길을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간 발자국이라고 생각없이 따라서도 안되고, 그보다도 내 발자국을 따라오는 사람이 내 뒤에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문을 나서는 여러분의 발길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교육의 혜택도, 문화의 혜택도 못받고 헐벋고 굶주린 동족을 구원하러 내 고장의 농촌으로 발길을 재촉하지 않으렵니까?. 우리는 강한 자에게 붙어서 부스러기 권세에 만족할 것이 아니요, 약한 자를 도와 같이 강해지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요,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 또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내가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20:35).
바울은 예수님께 직접 부름받은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는 평소 소원인 로마 전도를 위하여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의 갈길이 바빠 그가 개척하여 설립한 에베소 교회에 들릴만한 시간이 없어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청하여 고별설교를 한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분문입니다. 먼 훗날 저와 여러분들도 자녀들에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는 복이 있고 행복임을 전해줄 수 있는 조상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는 그의 명작‘베니스의 상인’중에서“주고 받는 일은 동시에 축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받는 일에는 익숙해 있고 주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고 응당 받는 것이 제일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주는 자는 어리석고 받는 자는 행운아 이다’
이런 생각은 매우 잘못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가득차 있으면 평생 거지가 됩니다.
훗날 자녀들에게 거지 인생을 살았던 조상으로 기억되기 바랍니까?. 인생은 서로가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습니다.
있는 것을 주고 훗날에 없는 것을 받습니다. 남는 것을 주고 모자라는 것을 받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받고 주는 것은 동시에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교훈입니다. 우리 모두 훗날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는 자로서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를 기억되게 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왜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됩니까?
우리는 받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결코 끊을 수 없는 부모님의 크나큰 정과 피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정모혈이라 합니다. 양육과 사랑과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웃과 사회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넓고 높고 깊은 그 크신 사랑의 은혜를 받았습니다.우리가 받지 않고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은 없습니다. 빈손들고 온 자들이 아닙니까? 내가 오늘 누리고 있는 것 중에 선인들로부터 물려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물려받은 것들입니다.
“여자들은 울면서도 거울을 쳐다본다”고 합니다.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것은 비단 여자들만의 마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모든 여성들이 이정도의 고운 얼굴을 지닌 수 있었던 것은‘제너가’종두법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종두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 홍역으로 우리의 얼굴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아크라이트라는 사람 덕분 이라고 합니다. 그가 무엇인가 연구하다가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그의 부인은 장래가 보이지 않는다면 이혼하고 가버렸습니다. 그는 인생의 파산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보내고 쓸쓸함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는 혼자서 찬바람이 부는 가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연구하다가 기어코 방적기계를 발명하여 오늘 우리에게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받은 자가 그 은혜를 갚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복된 일입니다.
2. 이제“준다”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준다’는 말의 의미는 구제금을 낸다는 정도의 좁은 의미의 말만은 아닙니다. 억지로 내는 수해의연금이나 기부금은 피차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마지 못하여 내는 자선금은 오히려 복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히 체면 때문에 내는 헌금이라면 그것은 정성스런 헌금과는 구별되어야 마땅합니다.
성경에서 ‘주다’는 말에는 몇가지 뜻이 깊은 뜻이 있다
(1) 자기 희생이 전제된 의미의 말입니다.
정성스럽게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드리기 위해 자기가 누려야 할 것은 누리지 못하고 정성을 다하여 드립니다. 주님께 더 많이 바치기 위해 아낍니다.그러기에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2) 영향력을 끼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언행심사가 중요합니다. 진실한 성도는 무언의 전도자입니다. 변화받은 성도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 됩니다. 그러나 이름만의 성도는 거치는 돌이 되며. 거짓된 신자는 오히려 주님을 욕되게 합니다.
마음씨 착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이웃의 전도로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어느날 새 신을 신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나와보니 신장에 넣어둔 자기의 새 신은 없어지고 헌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다음 주일 날 잘못 신고 간 사람이 가지고 오겠지 기대하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새 신은 몇주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할머니의 기대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거짓 말하지 않고 다 착하고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양심이 나쁜 사람도 있구나”생각하면서 교회출석을 그치고 말았답니다.
(3) 남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남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크게는 위대한 이름과 업적을 남기고. 작게는 발자국을 남깁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선인들이 무엇을 남겼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무엇을 남기고 갔느냐, 무엇을 주고 갔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일상의 삶은 무엇인가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프로 가운데 옛 친구나 스승을 찾아 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니 주로 학적부를 찾아 추적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동적부 통해 찾고자 하는 사람을 찾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적부를 남깁니다, 거기에는 출석과 성적이 기록되고, 주소및 기타 여러 가지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사무소에는 주민등록부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남기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주고 받으며 사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무엇인가를 뿌렸다가 때가 되면 거두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둡니다(갈6:7)
남기는 것도 주는 것이며 영향을 끼치는 것도 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도 이런 저런 모양으로 많은 것을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주면서, 즉 남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먼 훗날 여러분의 자녀들이 추성명절에 무덤에 찾아 와서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남겨주셨는가를 분명하게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3. 받은 자임을 알아야 주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는 받아 본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생각하기를 받는 것은 적고 주는 것은 많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면 받은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받은 것과 준 것을 비교해보면 어느 것이 많습니까? 사실은 누구든지 받아 온 것이 더 큽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긴 자리 마른자리 길러준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받은 것을 받아야 감사가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아침 우리에게 조용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얼마나 받았고 얼마나 주면서 살고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받은 것이 너무나 많고,너무나 큽니다. 나의 평생에 다 갚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할 줄 알아야 주고자 하는 마음도 생겨납니다. 아직도 받은 것이 없습니까? 더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어느만큼 받아야 만족하시렵니까? 죽는 날까지 복복 하면서 죽어야 할 일입니까?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는 주는 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조상의 무덤을 찾는 후손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이 지구상에서 찬란한 영광을 받는 사람은 그만치 역사에 많이 주고 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주고 가는 사람만이 남는 것이요, 그리고 참으로 행복을 누리는 자입니다.
5. 받은 것을 깨닫고 주는 자가 될 때 비로서 부자가 된 것입니다.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서 부자가 아닙니다. 좋은 일에 많이 쓰는 자가 부자입니다. 아무리 가졌어도 좋은 일에 쓰지 못하고 가는 자는 자기의 것이 아니요 그는 결코 부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없고 이웃을 위해 쓸 것이 없다면 이는 가난한 자일 뿐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물질을 다스리면 가장 신실한 충복이 되지만 물질을 다스리지 못하면 가장 잔인한 폭군이 된다”줄 수 있는 자유가 없는 사람은 물질을 갖는 것 자체가 불행입니다. 사람이 움켜쥐고만 살면 그것 때문에 명대로 못살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울게 합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안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가진 것이 도리어 그에게 불행입니다.
5. 무엇을 주고 가시렵니까?(남기고 갈 것이 무엇인가)
인류의 시조 아담은 우리에게 불순종과 죄만 남겨주고 갔습니다. 고통과 슬픔과 죽음을 남겨주었습니다. 가인은 우리에게 믿음 없는 형식적인 예배와 첫 살인자라는 이름만 남기고 갔습니다. 가룻 유다는 영원히 저주받을 배은망덕자란 이름을 남기고 갔습니다.
(1) 물질을 남기고 가는 자들도 있습니다.
미국의 기업가 굴드(Jay Gouldj)는 가난하게 자란 것이 한이 되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았습니다. 매점매석, 부정주식발행, 돈을 벌기 위해 친구까지 네 명을 자살케 하였고 이 회사 저 회사를 끌여들여 결국은 다른 회사를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모은 재산이 4천만불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자선사업을 위하여 돈뭉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그 는 돈을 모아놓고 죽었습니다.
반면에‘지라드’(Stephen Girad)는 자녀도 없었고 아내도 일찍 죽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낙은 없었으나 소원이 있었습니다.“세계에서 제일 큰 고아원을 세우고 싶다” 이것이 그의 낙이요 보람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200백만불을 모았습니다. 그 돈으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않던 ‘펜실베니아 주’에 땅을 사놓았습니다.
그가 죽으면서 유언하기를“이 돈으로 두개의 고아원을 세워라 하나는 나를 퀴워준 ‘뉴올라언즈’에 세우고, 다른 하나는 내가 살던‘펜실베니아’에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사 놓은 산이 후에 석탄과 철이 나는 광산이 되어, 세게에서 제일 큰 고아원은 몇천먼불의 재산이 되어 아무리 사업을 확충해도 돈이 모자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다 돈을 남기고 갔으나 그 가치는 달랐습니다.
(2) 정신이나 사상을 주고간 사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과 순종의 모습을 남겼으며. 모세는 조국에 대한 깊은 사랑을 남기고 갔으며, 스데반은 순교의 정신을 남기고 갔습니다. 죠지 위싱턴은 위대한 미국의 정신을. 레오날드 다빈치는 불후의 명화를 남겼으며, 헨델은 명곡을 남기고 갔습니다. 헬렌켈러는 삼중고의 고통을 이겨내는 불굴의 정신을 남겼다.
(3) 자신의 몸을 주고 간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난미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고 하였습니다.
스코트랜드의 어느 교회에서 낮 예배 시간에 선교사업을 위하여 헌금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간절했습니다.“아직도 아프리카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곳은 미개한 곳입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일을 위해서 세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1) 내가 가는 길입니다
2)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습니다.
3) 간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가지 중에 무엇을 하겠습니까? 많은 성도님들이 목사님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정성스럽게 선교헌금을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맨 뒤에 서 있던 한 소년이 헌금궤 위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년을 꾸짖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은 눈을 깜박이면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에게 바칠 돈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을 아프리카를 위하여 몽땅 바치겠습니다”
‘목사님은 눈물을 흘리는 서년을 만났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예, 저는 리빙스턴입니다”“지금 몇 살이냐?”“네 열두살입니다”
그가 바로 “검은 대륙의 아버지”로 불리웠던 바로‘리빙스턴’입니다. 그는 약속대로 아프리카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친 후 죽은 유해로 고국에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교회당 묘지에 안장된 것입니다. 그는 운명하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나의 예수님,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전체시여, 나는 다시 한번 내 생애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그를 위대한 사람이라고 흠모합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사람이 죽어 무덤에 묻히면. 성도(직분)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비석을 세웁니다. 저는 그 비석에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살았던 흔적도 새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흔적을 남기시기를 원하십니까?. 훗날 자녀들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십니까?
6. 주는 것은 풍요로운 삶의 비결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주라, 그러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사랑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고 또 주어도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입니다.
주려고 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받으려만 하기에 불평이 있고 원망이 있습니다. 받기만 하면 자유가 없습니다. 주려는 자들이 모인 곳이 천국입니다. 서로 받으려고 하는 곳은 지옥입니다.
주다가 망하는 자가 없어도 받다가 망한 자는 많습니다.
때로는 알면서 받고 모르고 받았는데 뇌물이 되어 쇠고랑차기도 합니다. 그러니 받는 것만이 좋은 것 아닙니다. 주어야 복입니다. 주님 말씀을 기억합시다“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재산을 물려주는 일을 아무나 못합니다. 사업을 물려주는 것도 큰 일입니다. 그러나 정신을 주고 가는 것은 더 큰 일입니다. 몸을 바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들 보다 더 중요하고 더 절실하고 더 축복스러운 것은 믿음을 전해주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돈이 귀하지만 생명 보다는 못합니다. 사업이 귀하지만 구원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믿고 구원받는 일은 이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 일 때문에 오셨다가 그 일을 이루시고 가셨습니다.
머지 않는 날에 우리도 가야 합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것은 이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옥포교회가 이땅 위에 세워진 것도 이 일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헌신과 선교를 다짐하는 결의가 새롭기를 당부합니다.
주고 주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랑, 후회도 실망도 없는 보람있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무수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받을려고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어리석은 인생으로 살지 말고 베풀다가 가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주는 자의 복
행 20장 31~35절 / 김진호목사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바울이 3년동안 목회했던 에베소교회를 떠나기 전 마지막 설교의 메시지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 중 35절 말씀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모였나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있도다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라"는 말씀을 가지고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더 복이 있다"는 내용으로 오늘 이 아침 은혜 받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어서 생각하고 묵상함으로 그 말씀의 뜻을 바로 이해하게됩니다. 예를 들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씀이라든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라든지, 웃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 보다 애통하는 작 복이 있다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사실 우리의 계산이나 상식을 뛰어넘어서 생각해야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받는 자 보다는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누구를 통해서 자꾸 받아내는 것이 복이요 내 것을 주는 고, 희생하는 일은 믿지는 일이요 손해보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 세상상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오늘 이 아침에 우리모두가 바로 이해하고 바로 깨달아 우리모두 주는 자로서의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에서 먼저 전제해야될 사실은 주는 것만 복이고 받는 것은 복이 아니란 말씀은 아닙니다. 받는 것도 복입니다. 다만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얻는 자 보다는 베푸는 자가 더 복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는 복된 아이입니다. 사랑은 진정 받을 줄도 알아야 그 사랑을 남에게 줄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사랑을 줄줄 모르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그가 어려서 제대로 정상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불행한 배경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고아원에서 고아들을 지도해 본적이 있습니다. 처음엔 외로운 고아들끼리 더 사랑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들이 그렇지 못한 것을 보고 실망했었습니다.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고아들은 남에게도 사랑을 주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거기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극도의 개인주의는 사랑도 받기도 싫고 주기도 싫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무정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친절이나 호의도 잘 받아 드릴 줄 아는 것도 축복입니다. 대접을 잘 받아본 사람들이 남을 대접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몸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껴주게되고 내 인격의 귀함을 바로 아는 사람이 남의 인격도 존중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학하고 무시하는 사람은 결코 남도 바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의 놀랍고 엄청남 사랑을 받은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것도 축복입니다. 자녀들이여, 부모의 사랑을 받기 바랍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직장에서도 사장의 사랑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도 목사의 신뢰와 사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여러분의 존경과 사랑 받는 목사가 되고싶습니다. 문제는 받는 것만을 축복으로 생각하는 자리에 머물러선 안됩니다. 받는 것만 복으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받는데서 다시 주는 자로 베푸는 자로, 꾸어주는 자로 바뀌어 가는 인생이 될 때 더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받는 것도 복이지만 주는 자가 되는 것은 더 복이 된다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보다 저것이 더 복된 일이라면 더 복된 일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도 축복이지만 그 사랑을 받은 후에 그 사랑에 고마움을 느끼고 주님께 내 몸과 맘과 물질을 드리는 자가 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주는 자가 더 축복된 것입니까? 여기에 몇 가지 중요한 뜻과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로, 줄 수 있는 것은 내 인격이나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주는 것이 더 복된 것입니다.
보세요, 어린아이는 자기 중심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남을 생각하면서 행동합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입만 압니다. 어른은 부모의 임도 이웃의 입도 생각하며 삽니다. 자녀들을 키워보니깐 철부지 때는 달라는 소리로 일관하지만 자꾸 커가면서 달라는 소리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0, 40살이 되도 부모에게 어린아이처럼 계속 달라고만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육체적으론 어른이나 인격적으로는 어린아이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들은 처음 초창기신앙은 달라는 기도로 일관합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자라면서 달라는 기도에서 이제 주님의 사랑 받았으니 나의 무엇으로 은혜를 보답하리이까 하는 기도로 바뀌어 질 때 그 신앙은 성숙해 가는 징조입니다.
어떤 철인(哲人)은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받으려는 이기심을 극복하고 베푸는 때라"고 했습니다. 앨버트 뮬러라는 유명한 화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뮬러는 어린 시절에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계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자기 반에 자기처럼 그림에 재주가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도 어려워서 계속 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친구는 서로 의논하다가 이 친구가 뮬러에게 우리가 모두 어려워서 공부를 포기하면 성공할 수 없으니 내가 먼저 식당에서 일하여 돈을 벌어서 너의 학비를 대고 그래서 네가 졸업하면 그 다음 네가 돈을 벌어 나를 대주면 좀 늦지만 나도 공부를 마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서로 합의를 본 후 "이 친구는 식당에 가서 열심히 일해 뮬러의 학비를 대주었습니다. 그래서 뮬러가 학교를 마치고 자기가 그린 그림이 인정되어 팔리기 시작하면서 돈을 벌어서 자기를 위해 먼저 희생한 친구를 찾아가 보는 그는 뮬러를 위해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아제 네가 공부할 차례라고 나는 이미 너무 일을 많이 해서 손을 다 버려서 이 손으론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뮬러는 그 친구의 은혜에 감사해서 그의 기도하는 손을 그렸는데, 이것이 불후의 명작이 된 것입니다.
미술관에 가면 두손을 모아 기도하는 손의 그림이 바로 저 유명한 세계적 화가 뮬러가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를 생각하면서 그의 손을 그린 그림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것을 준다는 일이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나의 것을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줄 수 있는 마음과 베푸는 태도가 바로 그의 인격과 신앙이 성숙해졌다는 뜻이니, 어찌 이것이 복된 일이 아닐 수 있습니까? 아직도 나이는 들었으면서도 성숙치못하고, 철부지의 인격과 신앙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받는 자보다 주는 자로 인생을 바꾸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는 것은 참된 기쁨을 선물하기 때문에 더 복된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는 부모들의 기쁨은 선물 받는 자녀보다 더 큰 것입니다. 젖을 주는 어머니의 보람과 기쁨은 젖을 빠는 어린아이보다 더 흐뭇한 것입니다. 받는 것이 외형적 기쁨이라면 주는 것은 내면적인 기쁨입니다.
저도 지방교역자들과 목욕하거나 설렁탕 집에 가서도 내가 돈을 내서 대접하면 흐뭇하고 지갑에 돈이 준비 못되어 얻어먹고 오면 좀 기분이 찜찜합니다. '죠지 피바디'란 사람은 그의 막대한 재산을 자선사업과 교육사업을 위해 내어놓으면서 이런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에 걸쳐 피와 땀을 흘려 모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결단하고 내 놓을 때는 재산을 모을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원해서 이 재산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죠지 피바디같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많이 있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지금보다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겠습니까?
'폴 투르니에'란 사람은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곧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란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 무엇을 얻으려 할 때의 미안함과 떳떳치 못함과 나중에 비루함을 느껴본일이 있습니까? 이제 남에게 주는 자로써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의 만족감과 떳떳함이 받는 자 보다 확실히 더 복됨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주는 것은 주님의 삶을 닮아가는 모습이기에 받는 것보다 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성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해서 성자 예수님을 인간들을 위하여 자기의 살과 피 한방울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다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말씀하시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야고보서 1:17에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셨다"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도 연약한 인생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삶은 받으시는 삶이 아니라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주시는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받으신 것은 없고 모두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베푸는 생활, 주는 생활, 바치고 드리는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삶을 닮아가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길이 생명이요, 축복의 길이라면 이 길은 조금씩 닮아가고 따라가는 삶이야말로 더 복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삶은 있는 것까지 빼앗아가고 죽이는 생활입니다. 성도의 삶은 마귀를 따라가지 말고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부흥회인도를 합니다. 사실 부흥회인도가 쉽지 않습니다. 심신이 피곤합니다. 그러나 제게 주신 달란트대로 말씀을 베풀고 나면 그 교회가 힘이 나고 부흥되는 기틀이 마련될 때 저는 한없는 보람을 느낍니다. 땀흘려 말씀전한 보람을 가집니다. 저의 부흥회는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주는 것을 통하여 주님과 천사를 대접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마가복음 25장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데 양과 염소의 삶은 주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입니다. 옥에 갇힌 자, 헐벗은 자, 배고픈 자를 도와주는 일이 곧 주님을 대접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소에 손님은 극진히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1-2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야사에 보면, 아기예수를 찾아온 동방박사 세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의약품을 가지고 오다가 도중에 어떤 불쌍한 환자를 만나 그 약을 다 써버리고 베들레헴으로 올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기도하고 눈을 떠보니 자기가 치료해준 그 불쌍한 환자가 예수님으로 변하면서 그 앞에 나타남으로 이 박사는 베들레헴 마굿간까지 가지 않고도 예수님을 만났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의 손으로 나의 미소로 나의 정성으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베푸는 성도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성경에 보면 받기를 좋아하는 자보다 주기를 좋아하는 자를 하나님이 그때마다 크게 들어 쓰셨으니 이것이 더 복된 사실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일 싫어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장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상좌에 앉아서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만 좋아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강력한 통치자를 다르고 있으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섬길 줄 아는 자를 귀히 여기시고 그런 자를 크게 들어 쓰십니다.
교회 직분은 대접받기 위해서 이뤄진 직분이 아니라 더 섬기고 더 사랑하고 더 베풀기 위해서 내게 주신 귀한 직분인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모두 주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됩시다. 필요 없는 그릇, 진열장에만 진열해놓은 그릇이 되지 말고 매일 쓰임 받는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받는 것을 제일로 여기기보다 베풀고 바치고 드리는 것을 더 우선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모임에도 회비도 내고, 찬조도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분이 존경받고 인정도 받지만 얌체회원이 있습니다. 의무도 안하고 하나도 베풀지 못하는 회원이 있습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우리 교회는 더 복된 교회가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더 복된 교회란 받은 것을 제일로 하는 교회에서 이제 주는 교회, 베푸는 교회가 되도록 힘쓰는 교회가 바로 복된 교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예산에 50%이상이 선교와 구제와 봉사에 쓸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기독교시인 '크리스티니 로세티'란 분이 주님께 헌신을 결심하면서 이런 시를 써서 기도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주님께 드릴 수 있사오리까? 내가 만약 목자라면 어린양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만약 동방박사라면 나도 황금, 유향과 몰약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 그러나 주여! 나는 내 마음을 주께 드릴 수가 있겠나이다"
우리 모두 깊이 음미해보고 은혜 받을 기도의 시입니다.
무엇이 성도를 강하게 만드는가?
행 20장 32절 / 오정호목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강함은 육체의 힘이나 세속적인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강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도하신 원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교회의 직분, 가정에서 믿음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에베소는 상업이 번성한 세속과 음란이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사역을 마치고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신생(新生)교회인 에베소 교회가 영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세속화 될 수밖에 없는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고 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 지도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고 강해져야 했습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32절).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강하게 세우기 위해 당부한 본문의 말씀을 통해 성도를 강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살펴봅시다.
1. 하나님께서 성도를 강하게 하십니다(32a절).
바울은 자신의 전인격을 걸고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내가 너희를 주님께 의탁한다" 이 장면은 다윗이 그의 최후의 순간에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다윗은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기라"(역대상28:9a)고 말합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왕의 본분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강한 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답입니다(Jesus is the answer!)"라고 쓰여진 간판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란 의미입니다. 왜 하필이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라고 했을까요? 다윗은 베들레헴의 목동이었던 자신을 부르셔서 예루살렘의 왕위에 앉히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들 솔로몬이 좋으신 하나님을 평생 주인과 목자로 섬기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여러분은 생명과도 같이 아끼는 아들과 딸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겨야 한다면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너희는 예수 잘 믿어야한다"는 말보다 더 소중하고 절박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강하게 하십니다.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주권자가 되실 때 우리는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만을 높일 것을 마음에 확정하고 주님만을 경배하면, 생명이 흘러 넘치는 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2. 말씀이 성도를 강하게 합니다(32b절).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8:32). 말씀은 우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실 때에 어떤 신비한 기적이 우리를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은혜의 말씀이 너희를 능히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은 말씀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면 인생이 변화되고 새로워집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생명을 겁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 생애를 거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성도를 성도답게, 교회를 교회답게 만듭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외에는 그 어떤 권위도 우리 교회를 다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아버지의 말씀의 권위만이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는 자유할 수 있고 강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의 주창자 찰스 다윈이 임종이 임박했을 때 호프 부인이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다윈은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는 호프 부인에게 "이 책은 성경입니다. 이 책은 존귀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지요, 제가 젊을 때는 모든 만물을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눈으로 보고 진화론을 가설로 세웠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진화론을 기독교와 맞대응하는 진리로 생각합니다. 나는 원하건대 기독교의 성경의 진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찾기를 원합니다." 다윈은 그의 임종 직전에 선교단체에 적지 않은 돈을 선교헌금으로 전달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 세상의 모든 상대적인 이론과 회의론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모두 뜨겁게 헌신합시다.
3. 말씀에 약속하신 풍성한 기업이 성도를 강하게 합니다(23c절).
기업이란 유산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놀라운 유산을 물려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모르고 사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진정 강한 사람은 죽음의 그림자가 닥쳐왔을 때 스데반처럼 천사의 미소를 띠고 죽음의 문턱을 뛰어넘는 사람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빌3:20).
우리 교회의 한 성도의 간증을 일부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함께 은혜를 나눕시다. "첫째, 나는 주일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주일성수가 온전하게 되니 전에는 미처 행동에 옮기지 못한 주일저녁 예배와 수요예배도 성령께서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로 하여금 주일예배를 기쁨으로 준비하게 하시니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갑니다. 둘째, 나는 기도생활의 변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새벽기도를 통해 기도의 기쁨을 누리고 있으며 나와 함께 하는 기도의 동역자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기도의 동역자를 주시고 그들과 새벽제단을 쌓도록 영육간에 강건함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셋째, 기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헌금을 의무감에서 했지만 헌금은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며 좀더 나아가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헌금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기도 하며 내게 축복의 비결이 된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건축헌금을 작정하고 물질로 헌신하게 됨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 생각합니다. 넷째, 술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불만이 가득할 때 술에서 위로를 찾았고, 비겁함 때문에 술에서 용기를 찾았으며 우울한 마음이 가득할 때 술에서 기쁨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저에게는 영적 곤고함만이 더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세상 술은 일시적인 즐거움을 주나 하나님의 새 술은 영원한 기쁨을 주는 줄 믿사오니 늘 주님의 새 술에 취해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올 한해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지 벌써 상반기가 지났습니다. 이번 여름을 성경다독대회와 한가족 수련회를 통해 주님과 말씀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과거의 의례적인 신앙생활을 떨쳐버리고 진취적인 신앙생활의 변화를 통해 강한 성도가 되십시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은혜로 강해지고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하시는 주님을 더욱 의지합시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는 믿음의 비밀을 가지게 하소서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임재를 온 몸으로 체험케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게 하소서
약속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소서
주여, 우리로 강한 십자가의 군사로 써 주소서.
오직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라!
행 20장 32절 / 전순기목사
지난주에 저는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주에 드린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험한 인생길을 걸어갈 때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나그네와 행인같은 자세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동시에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를 날마다 누리며 확장해 나가라!”는 겁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합한 목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원한 천국은 아주 힘들 때만 잠깐씩!” “현재적인 천국은 매순간마다!”라는 표어도 외쳐보았습니다.
오늘부터 5주간에 걸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발견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또 확장하는 일을 하려면, 다섯 가지 영적인 원리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것을 “다섯 가지 오직!”이라고 부릅니다. 따라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령으로! 오직 기도로!”
저는 지금까지 이 다섯 가지 원리를 제 삶의 원리로 삼고 실천해 오면서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오직!’은 또한 저의 목회철학이 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들께서도 잘 이해하시고 따라와 주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이 다섯 가지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시고 실천하신다면, 누구라도 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축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양 교회가 이 다섯 가지 원리만 충실하게 실천해 나간다면, 우리들 자신만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에게로, 이웃들에게로 이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원리인 “오직 말씀으로!”의 원리를 말씀드리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는 마치 씨를 뿌리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네 종류의 밭 중에서 좋은 밭에서만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밭은 마음 상태를 비유해 주는 것이었는데, 좋은 밭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고, 순종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말씀을 통하여 이뤄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자세를 통하여 이뤄진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우리 편에서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합당하게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갖춰지려면, 단 한번이라도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의 능력과 권세를 경험하고 나면, 말씀에 대한 올바른 자세와 태도가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 보고자 한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런 능력을 나도 경험해 보아야 하겠다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점검해 보고, 잘못된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채우는 실제적인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예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간증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제자 훈련을 하는 ‘바나바 훈련원’이라는 훈련원을 운영하시는 이강천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1945년생이신데, 서울신학대학 교수도 하시고 여러 교회를 목회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교회 집사님이었던 친구 아버지를 통해서였습니다. 6.25를 당해 피난 가서 살던 동네에 40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그 중 예수 믿는 가정이 딱 한 가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집 맏아들이 이 목사님의 또래 친구라 그 집에 자주 드나들었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마침 이 목사님은 몸이 약해서 병이 들었고, 죽을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친구의 아버지가 전도하기를 시작했답니다.
워낙 교만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친구 아버지의 전도를 무시하며 좀처럼 교회당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사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 전도를 하셨고, 결국 집사님의 정성에 못 이겨 한번 교회에 나간 것이 끈이 돼 매주 주일 교회에 다니게 됐다고 합니다. 교회를 가게 된 또 다른 이유는 교회당에서 중학교에 가지 못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간 고등공민학교를 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예수 믿을 마음은 별로 없었지만, 공부를 하고픈 마음이 간절해 교회당 다니는 일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를 전도한 친구 아버지 집사님에게 “집사님, 1년 동안 교회 다녔는데 하나님이 없습디다. 집사님은 한번이라도 하나님을 만나 보신 적이 있습니까?” 결판을 낼 양으로 질문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사님은 이런 질문에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더랍니다. “이 사람아,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닐세. 나는 하나님을 매일 만나네….” 집사님의 너무 당당한 대답에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잠시 후 잔머리를 굴려 두 번째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만나신다고요? 그럼 집사님, 날마다 만나는 그 하나님, 한 번만 면회시켜 주시지요.” 집사님은 얼마동안 답을 하지 못하더랍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고 합니다.
'내가 이겼구나. 이제 교회 안 나가도 되는구나….' 하지만 잠시 후 집사님이 입을 열어 말하기를 “면회? 그것 참 좋은 생각이네. 하나님께 자네를 면회하시도록 주선해 놓을 테니 하나님 만나 뵐 준비를 하게나….” “면회 준비요? 그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무슨 하나님 만나는 데 면회 준비가 필요합니까?”
“그렇다네. 일국의 대통령을 만나려 해도 인사법을 배워야 하거늘 하물며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만나려는데 예법도 모르고 어떻게 만나 뵙나. 하나님 면회 준비법은 이 성경책 안에 쓰여 있네….” 그 집사님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성경을 불쑥 내밀면서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솔깃했습니다.
얼마 후 이 목사님은 속는 셈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뒤 성경을 읽는데, 요한 1서 2장 11절에 눈길이 멈췄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이 말씀을 읽는데, 가슴이 뜨끔하더랍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는 술주정뱅이인 아버지를 미워하여 함께 밥상도 마주하지 않고 지내던 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내 인생이 어두운 인생인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랍니다. 그러면서 양심에 갈등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미워하지만 형제는 미워하지 않아….”
양심의 가책을 일부러 모른 척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요한1서 3장 15절을 보니까,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라고 나오는 게 아닙니까? 속으로 ‘아니. 한술 더 뜨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라고….’
또 양심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나는 형제는 미워하지 않아. 웬 살인자….” 4장 20절에 이르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마음이 아려 왔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양심의 소리를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 미워해도 아버지나 미워하지, 형제는 미워하지 않는다구….” 그 때였습니다. 양심에 어떤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 형제만 미워해도 어두움 속에 있는 자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 이겠거늘, 너를 낳아 양육하신 너의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어디로 도망치려 하느냐.”
하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 이 목사님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입에서 “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고백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날이 바로 이 목사님이 예수를 믿고 운명이 바뀌는 소중한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의 좋은 예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오늘의 본문 말씀의 요지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강퍅한 심령을 깨트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과 같아서 심령을 찔러 쪼개며, 마음의 뜻과 생각을 판단해 줍니다. 죽었던 양심이 살아나게 합니다.
또 우리의 이성과 타협하지 않고 양심을 찔러댑니다. 그래서 결국 양심의 소리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병든 우리 마음을 치유합니다. 우리의 성품과 삶의 태도와 자세를 변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들을 내 마음에 누리고, 가정에서 누리고, 교회에서도 누리고, 목장에서도 누리고, 직장생활 속에서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내 심령 골수를 파고들어서 찔림 받고 쪼개지는 경험을 해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살아서 꿈틀거리며, 나의 양심을 밤낮 괴롭혀서 굴복시키기도 하고,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나를 교훈하기도 하고, 나를 책망하기도 하고, 나를 세워주기도 하는 것을 날마다 경험해 보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의 능력을 사모하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기자는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여 피곤하니이다”라고 고백했고,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함으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시119:131).
시편 기자는 얼마나 말씀을 사모했던지, 성경을 보느라고 눈이 피곤하고, 깨닫게 해 달라고 부르짖어 간구하느라고 숨이 차서 헐떡일 정도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역사를 훑어보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고, 또 천국을 확장하는 일에 효과적으로 쓰임을 받았던 주의 일꾼들은 누구라도 다 이런 과정을 반드시 통과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모한다면,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에 자주 나와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공부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암송함으로 기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새겨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성경 말씀을 펴서 성경을 읽는 시간을 확보해야 합니다. 선한 의도로 하든, 좋지 못한 의도로 하든,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예화) 크리스천 음반사인 ‘피셔뮤직’의 유지연(57)사장의 간증이 흥미롭습니다. 이 분은 국내 포크 계열과 팝 계열의 수많은 가수들의 음반을 만들어낸 프로듀서요, 편곡자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정태춘 박은옥의 앨범도, 김범룡의 ‘바람바람 바람’, 또는 이선희의 ‘J에게’ 같은 음반이 유지연 사장을 통하여 나왔습니다.
또 그는 한때 어쿠스틱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자로 국내에서는 톱 클라스로 이름을 날렸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음악으로 사람을 낚는다'는 의미로 '피셔(Fisher)'뮤직을 설립한 후에 전 세계 워십 뮤직을 국내에 소개하고 배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70·80년대 최고의 뮤지션이었던 그는 온갖 자만심으로 꽉 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의 집에 전도하러 온 한 새내기 전도사와 '내기 성경구절'을 하다 철저히 낮아졌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평소 목사님이나 성도들이 전도하러 오면, 말로써 그들을 이겼지요. 저는 신자는 아니었지만 성경을 비롯해 다양한 책들을 읽어 스스로 지식이 풍부하다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젊은 전도사와 성경 이야기를 하다 말문이 딱 막혀버렸습니다. 오기가 났던 저는 그때부터 성경을 다시 독파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는 말씀을 읽는 순간 온몸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는지가 깨달아졌습니다. 그 때 그는 오만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유지연 사장은 오기로 성경을 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사로잡아 주님께 굴복시켰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말씀을 향한 갈급함이 생기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묻고 싶은 성도들이 틀림없이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런 분들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진단받아 봐야 합니다. 사람이 밥을 먹지 않아도, 밥 먹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그건 몸이 건강치 못하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너무 무위도식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가 맞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배고픔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영적인 배고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내 영혼이 건강치 못하다는 증거요, 영적으로 무기력증에 빠져 주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하면 식욕이 왕성해지듯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면 말씀에 대한, 은혜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강렬하게 느끼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자신에게 말씀에 대한, 하나님에 대한, 은혜에 대한 갈급함이 없다면, 영혼의 의사에게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치료해 주셔서 제게도 말씀을 향한 갈급함,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라고 정직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결단하고 노력하라!
정말로 말씀을 사모하고, 또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고 싶다면, 구체적인 행동으로 그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기 위해서 시간을 정하여 투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고 묵상하는 데 얼마나 시간을 쓰고 계십니까? 이 시간에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는 데에 시간을 내지 않으면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위해서 시간을 따로 떼어내시기 바랍니다. 가장 귀한 시간! 가장 좋은 시간을 떼어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라면 그 분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고 합당한 일일 것입니다.
주일에 오셔서 설교 말씀 한 편 듣는 것으로 족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주일 예배에 참석하셔서 말씀을 들으시는 것은 잘 하시는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 원하신다면, 말씀을 위하여 시간을 내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의 형편과 사정을 다 모르기 때문에 어느 시간이 가능한 시간인지, 얼마나 시간을 낼 수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은 알 것입니다.
당장 오늘부터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 위해서 어떤 결단을 내리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너무 욕심을 많이 내지는 말고 하루 성경 3-4장 읽을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확보해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 조용한 장소를 찾아 성경을 펴고 앉아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깨닫고 싶습니다. 내 눈을 열어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난 후에 성경을 읽으십시오.
매일 세 장 주일에는 다섯 장을 읽으면 일 년에 한 번씩 신구약 성경 전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아지거나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가지고 그렇게 살게 해 달라고, 또는 그 말씀대로 이뤄지게 해 달라고 기도함으로 마무리 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는 데 넉넉잡고 15분이면 족할 겁니다. 우선 이 정도 수준에서 하는 게 몸에 배거든 조금씩 시간을 늘려보시기 바랍니다.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의 시간을 갖는 것을 'Q.T.'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들으실 때는 “나도 이제 말씀을 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지만, 막상 교회문을 나서서 집으로, 직장으로 돌아가시면,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사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천이 안된다는 것은 아직 절박하지 않다는 증겁니다. 아직 말씀의 은혜가 없어도 살만하다는 말이겠지요. 절박한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시겠습니까?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건 너무 힘들고 아픕니다.
좋은 환경에일 때 열심히 주님을 찾는 게 좋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결심하고 혼자 실천하는 건 성공할 가능성이 적습니다. 그래서 교회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말씀과 더불어 사는 습관을 길러드리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11월경에 리더들부터 묵상 교재를 가지고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며 살아가는 경건의 시간을 갖는 훈련을 실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온 성도들이 경건의 시간을 갖는 훈련을 함께 받고, 모두가 다 함께 말씀을 묵상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온 교우들이 매일 같은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고, 목장 모임에서 만나면,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며 서로 축복하고 서로 격려한다면, 우리 안양 교회 성도들은 말씀의 능력을 날마다 풍성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를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이고 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영화 ‘크로싱’을 만든 김태균 감독의 간증을 소개하며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고 손해를 봤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2003년 1월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상황은 겉으로는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마음의 밑바닥이 무너져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는 온누리 교회 양재동 성전에 찬송가나 들으려고 갔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예배를 구경을 했다고 합니다.
기도 시간에 혼자만 눈 뜨고 있기가 어색해 마지못해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이 자기를 끌어안는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겁니다. 전에도 몇 번 교회에 간 적은 있지만,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답니다. “너 이제 왔구나. 기쁘다. 정말 많이 기다렸다. 내가 널 사랑한다.”는 음성이 들리는 것 같더랍니다. 눈물이 터져 창피고 뭐고…,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그는 석 달여 동안 인터넷을 통해 하용조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하루에 10여시간씩 성경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매일 교회에 가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이 연애편지처럼 달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너무 행복하고 기쁜 날들이 몇 달 동안 계속됐어요. 이제 인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가 풀려 게임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영화 찍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푹 빠졌지요. 당시는 너무 뜨거운 나머지 어리석게도 식혀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어요.”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영화사 안에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어 5년째 신앙과 삶을 나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김태균 감독은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의 능력을 경험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또 확장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에 붙잡힌바 되어 하루에 열 시간씩 성경 공부를 했다는 김태균 감독처럼 안양 교회 모든 성도들도 말씀의 맛을 보시고, 말씀에 붙잡히시기 원합니다. 주님 “제게도 저런 은혜를 주십시오!”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은혜 주실 것을 기대하고 말씀을 펴 놓고 읽기 시작하시면서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말씀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오직 말씀의 능력을 경험함으로만 누릴 수 있고,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오늘 당장 말씀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기로 결단하시고 꾸준히 실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양향모목사 / 행 20:33-35
록펠러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53세에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55세에 죽을병에 걸려서 1년 이상 더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기적적으로 98세까지 장수하였는데 그를 죽을병에서 고침을 받게 하고 장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게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설교 제목이자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로 정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말씀입니다.
록펠러가 마지막 검진을 받기 위해서 병원에 왔을 때 마침 로비에 걸려 있는 액자에 글이 그의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 액자의 글이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이 있다"라는 글이었습니다. 누가 오늘 본문 말씀을 살짝 바꾸어서 실감나게 걸어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록펠러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노력을 했지 한 번도 남을 도우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병원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 허름한 옷을 입은 여자가 병원 관계자와 다투고 있었습니다. 병원 측에서 그녀의 딸이 병원비를 내지 못했으니까 데리고 나가라고 했고 여인은 퇴원시키면 딸이 죽는데 어떻게 퇴원을 시키느냐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를 본 록펠러는 비서를 시켜 아무도 모르게 그 아이의 병원비를 다 내어주게 했습니다. 그 결과로 얼마 안 있어서 그 여인의 딸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에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기하게도 그의 병이 나았고 98세까지 살면서 이런 선한 일을 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후일 록펠러는 그의 자서전에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을 하였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자가 되기 위해서 살았던 53년은 불행한 삶이었고 그 후 45년의 나누어주는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삶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착같이 노력하여서 성공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내가 가지기 위해서 내가 누리기 위해서 악착같이 노력을 하는 것은 불행을 자초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남을 도와주기 위해서 악착같이 노력을 하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이 원리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해주신 원리이고 사도바울이 친히 실천했던 원리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따라야 할 귀한 삶의 원리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지 않았습니다.
본문 33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습성 속에서 가장 악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탐심 즉 지나친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을 하게 된 원인도 이 탐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탐심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서 먹었습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탐욕 때문에 죄를 짓고 이 탐욕 때문에 망하게 되고 이 탐욕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돈에 대한 지나친 탐욕, 성에 대한 지나친 탐욕, 명예에 대한 지나친 탐욕, 이런 탐욕들 때문에 오히려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도바울은 철저하게 이런 탐욕을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은이건 금이건 의복이건 아무리 귀한 것이라고 해도 남의 손에 있는 것에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구약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으로 헬라의 문화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출세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도 얼마든지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직접 복음의 진리를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깨달은 복음의 비밀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그 귀한 복음의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을 하고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면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고 존경받는 스승으로 지도자로 행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받은 능력도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병이든지 고칠 수 있었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쓰던 앞치마나 손수건만 환자에게 올려놓아도 어떤 병이든지 다 나았다고 했습니다. 이정도 실력을 가지고 욕심을 차리려고 했다면 어마어마한 사람을 모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마어마한 재물도 거둘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요즘 사이비 이단들은 되지도 않은 재주들 가지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라고 속여서 사람들을 모으고 엄청난 재물을 모읍니다.
사도바울의 능력은 요즘 사기꾼 같은 이단들이 거짓으로 꾸미거나 아주 작은 요술을 가지고 대단한 것처럼 떠벌리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이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능력이었습니다.만약에 사도바울이 이런 능력들을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찾기를 원했다면 천문학적인 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바울이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면 그런 능력도 주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주는 것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나누어주면서도 더 행복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하였습니다.
본문 34절에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라고 했습니다.
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탐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할 수 있어야 남에게 받는 것을 바라지 않고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하였다고 해서 모든 지도자들이 다 자기의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하면서 일을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쓸 것을 공급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 9장에는 교회의 일꾼들에게 생활비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경우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4)
“우리가...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5)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고전9:6)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과 그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에게도 먹고 마셔야 될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내를 대동하여 다닐 권리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전념할 권리도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다 가정을 꾸리고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목회에 전념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시대에도 모든 일꾼들이 바울처럼 결혼도 하지 않고 일을 하면서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고전9:7)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고전9:7)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고전9:7)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은 아니지만 최소한의 생활비는 받을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 복무를 하는 사람도 나라에서 주는 비용으로 삽니다. 포도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를 지어서 그 열매를 먹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양을 키우는 사람도 양떼의 젖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원리들을 예로 들면서 모든 일꾼들이 다 자기처럼 스스로 필요한 것을 충당하라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다 사례를 받아서 먹고 살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 자신이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고전9:12)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사도바울이 이 귀한 복음을 전하면서 생활비나 요구하고 돈이나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면 사람들이 장삿속으로 생각하여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임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목회자들에게 생활비를 주기 위해서 성도들의 헌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헌법에도 세례교인이 된 사람은 의무적으로 주일헌금과 감사헌금 십일조헌금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무규정을 강조하면 성도들이 시험에 들고 또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돈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를 할 소지가 있어서 웬만하면 헌금 이야기는 안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을 마치 돈을 받고 파는 것처럼 생각할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강조하지는 못합니다. 성도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깨달아서 기쁨으로 헌금을 드릴 때 드리는 사람도 기쁘고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또 사도바울이 자기 스스로 필요한 것을 충당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자랑을 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바울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바울 자신의 소유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자신은 그냥 전달만 했을 뿐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자신을 자랑하거나 칭찬을 받을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께 이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명령을 따르는 것이고 명령에 불복종하면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부득불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누구에게 대가를 받거나 칭찬을 받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고 그런 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생활비를 받아서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사도바울은 스스로 자기가 필요한 것은 자신의 손으로 벌어서 충당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데 그것이 걸림돌이 될까봐서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필요한 것을 충당하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본문 35절 말씀에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주지 못하고 받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탐심 때문입니다. 지나친 탐욕을 버리지 않는 한 남에게 줄 수가 없습니다. 남에게 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게으름 탓이기도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불로소득만 바라는 사람은 남에게 주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쓸 것을 스스로 충당할 수 있는 사람만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은 주는 자가 받는 복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고 삶속에 실천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베풀지 못합니다.
남에게 베푸는 삶을 보고 자란 사람이나 자신이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베풀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사람은 남에게 주는 일을, 그렇게 손해나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산 사람은 나중에 부자가 되어도 남에게 주지 못합니다. 가난한 것이 너무나 힘들고 돈이 없이 사는 삶이 너무나 비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돈이 들어오면 목숨처럼 붙잡고 남에게 주지도 못하고 자신도 쓰지 못하고 삽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남에게 나누어 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준 것보다 더 많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후히 되어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해서 도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곡식을 저울에 무게로 달지 않고 되나 말로 담아서 측정을 했습니다. 되에 담을 때 그냥 담는 것 하고 누르고 흔들어서 담는 것하고는 많은 차이가 납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남에게 나누어 줄 때 하나님께서 다시 되돌려주실 때는 후하게 더 많은 것으로 주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누어줄 때 우선적으로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세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는 것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되돌려주시는 축복의 통로라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헌신하시는 분들은 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로된 한 형제자매들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할 형제자매이며 험한 세상에서 서로 도우며 천국까지 가야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누어주어야 할 가장 귀한 것은 우리가 받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최고의 것을 나누어주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도 우리교회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목표로 삼고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진 물질들을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되돌려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줌으로 나 자신도 복을 받고 나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백성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행 20장 33~35절 / 임현수목사
어린 아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어릴수록 자기 자신 밖에 모른다는 것 입니다. 부모의 사정이야 어떻든…남의 입장이야 어떻든 … 남의 입장은 이해 할 줄 모르면서 자기는 이해 받기를 원하는 것이 어린 아기들의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어른도 그렇게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성인아기라고 부르고 이기주의자 라고도 부릅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 입니다 … 그러나 사랑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 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이 훌륭한 이유…나라와 백성들의 유익을 먼저 생각 할 줄 알았던 성인들 이었기 때문 입니다. 테레샤 수녀, 성프랜시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13:11-12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어른(사랑)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마찬가지로 사랑이 성숙하면 어린아이 같은 이기적인 삶에서 떠나게 되는 것 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은사를 구해도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구하고 있었지 은사를 주신 목적대로 형제를 섬기고 덕을 세우는데는 별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우상은 자기라는 우상 이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구해도 자기를 위해서 구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 합니다.
고전 14: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항상 자기라는 우상이 문제입니다. 선진국의 국민의 병 1,2위가 비대증과 심장병 계통의 병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 입니다. 미국의 사망율 54%가 비대증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먹은 것을 신진 대사하고 소모 시키기 위한 운동 부족과 과잉 취식이 이런 병의 원인입니다.
정신분열증 환자도 그렇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거나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병 입니다. 남을 위해 시간과 돈과 기도와 정력과 생애를 바치는 사람이 정신 분열증이 걸리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사람의 정신과 영혼도 그런 것 입니다.
사랑과 인기와 칭찬과 존경을 받으려고만 하면 정신 비대증 증상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항상 주어야 생산되고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 입니다. 사랑은 버리는것, 희생하는 것, 다 주는 것, 주는 자가 복되다고 주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3:16) 사랑하고자 하면 줄 것이 항상 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 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이가 성 미문에서 전 구걸하는 것을 목격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주머니에는 가진 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없는 것을 생각지 않고 자기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 인가를 생각했습니다.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이렇게 사랑은 반드시 줄 것을 찾아내는 법 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 때문 입니다. 이것이 아가페적 사랑의 본질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내부에 깊이 뿌리 박은 이기심을 극복 하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무엇 보다도 주님에게서 섬김의 정신을 배워야 하는 것 입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사랑의 결핍증 내지 정신 분열증을 고치는 약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그것을 순수하게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 입니다. 그래야 정신적인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 지향의 생활철학과 가치관을 가져야겠습니 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봉독하신 사도행전 본문에 보시면 사도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말씀가운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는 자가 복된 자라는 말씀 입니다.
행 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우리는 자연세계의 생명의 작용 속에서도 (줌)의 축복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에너지를 부여 받은 태양은 그 빛을 온 우주 만물에 나누어 줍니다. 태양의 온기를 피하여 살 수 있는 생물이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 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
또 그 빛을 받은 수 많은 별들은 밝은 빛을 반사하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으며, 지구에 있는 대양은 태양의 열을 받아 하늘에 구름을 만들고 구름은 다시 땅을 적시고 땅은 식물들을 내어 놓습니다.
식물은 또한 각기 필요한 곳에 자기를 내어 주므로 온 우주 만물이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상호 줌의 순환작용이 멈추어 진다면 이 세계가 어떻게 될 것입니까? 가공할 만한 일이 일어날 것 입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은 자연은 절대 그런 어리석을 짓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런 시를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하늘은 축복의 비를 내린다
하나님은 태양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리하여 태양은 따사로이 우리를 지킨다
하나님은 달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래서 달은 우리가 가는 걸음을 은은히 비쳐준다
하나님은 공기를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우리는 이 공기를 호흡한다
하나님은 땅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리하여 땅은 모든 열매를 제공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다
줄 수 있도록
그러나 인간은…
시가 이렇게 끝나는 것은 사람만이 아직도 주는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오래 자기 집착증이라는 병에 걸려 있고, 자기 밖에 모르는 미숙한 성인아동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자아를 깨고, 욕심을 버리고, 아집을 버리는 것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 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주는 것과 받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여 받으면 받을수록 부자가 되고, 남에게 주면 줄수록 가난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는 것을 빼앗기는 것, 도적 맞는 것,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유산을 많이 받으면 복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뇌물도 많이 받으면 축복 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구나 남의 재산을 빼앗거나 남의 기업 을 빼앗아서 일단 자기 것으로 만들고서는 마치 자신이 성공한 것처럼 승리를 자축하는 착각에 빠진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노태우 사돈 수백억 착복…) 이러한 것들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만일 이 세상이 이런 사람들로 가득 찬다고 하면 이 세상은 곧 싸움과 전쟁으로 망하게 될 것이고,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 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항상 주면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왜 주는 것이 복일까요? 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일까요?
1.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사랑은 주는 것 이라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롬 8:32에 보시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끊임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은 주는 것 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명하십니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막 10:21)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주는 자가 이 땅에서도 내세에서도 복을 받을 것 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축복받는 비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또 요한일서 3:16-19절에서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먼저 주는 것 입니다. 주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주는 자에게 행복과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왕으로 지혜와 지식이 뛰어나서 세계각국 으로부터 그를 만나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는 여자를 천명이나 데리고 살아보았고,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져보았습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면서 쾌락이 될만한 것은 금하지 않고 무엇이든 다 해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사람이지만 그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이 고통과 허무만 주었을 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전 3:12)
미국과 카나다 사람들이 많은 복을 받은 비밀을 아십니까? 미국사람들은 어려서 부터 일주일에 몇 시간씩 사회에 나가서 남을 돕고 선한 일을 하며 사람답게 사 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합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봉사를 경험하는 것 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년간 5,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북미를 지탱하는 힘이고 미국과 카나다를 살아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말 할수 있습니다.
이런 정신으로 그들은 돈을 벌어 수천 개의 병원을 세우고, 수천 개의 학교를 세우고, 수천 개의 자선 단체와 복지 재단을 세워 운영하고 있습니다.
왜 기쁨이 없습니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 다.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병 문안을 받는 것과 병 문안을 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플 때 병 문안을 받는 것은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병 문안을 받는 것은 작은 복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병 문안을 가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은 건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믿음…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칼 메닝거 박사는 의학 강연 후, 주위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찾아가 도와주는 것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는 처방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신 분 신경 쇠약에 걸리신 이런 분들은 집안에 가만히 계시지만 말고 나가서 힘닿는 대로 도울 사람을 찾아서 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도 생겼을 것 입니다.
지금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을 도울 수 있는 건강과 남에게 줄 수 있는 물질이 남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실 구제 받는 사람보다 구제하는 사람이 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선용하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나 봉헌 할 때의 마음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8:2,3)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마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 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즐겁게 하고, 기쁨으로 하고, 자원하여 하고,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미국의 강철 왕 카네기가 세계적으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려서 부터 주는 생활을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1:24.25절을 보면 [흩어 구제 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 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고 했습니다.
요즘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 때에 참으로 의미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28:27).
특별히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한 영혼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집을 드리고 땅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백 배의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막 10:28-30).
막 10: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 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 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전도법은 없습니다. 사랑은 가장 큰 은사입니다. 이제 북한의 문이 열리고, 북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날도 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들을 열심히 도와줌으로 해서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될 것 입니다. 김대규라는 사람은 [사랑과 인생]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십계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① 계산하지 말 것. ② 후회하지 말 것. ③ 되돌려 받으려 고 하지 말 것. ④ 조건을 달지 말 것. ⑤ 다짐하지 말 것. ⑥ 기대하지 말 것. ⑦ 의심하지 말 것. ⑧ 비교하지 말 것. ⑨ 확인하지 말 것. ⑩ 상황에 맡길 것.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계산하거나 후회하거나 기대하지 말고 무조건 나누어줄 때 좋은 열매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그런 큰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주는 자가 행복합니다.
3. 주는 자가 성숙해지기 때문 입니다.
어린아이 일수록 받으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이 ‘유아기적인 고착 증세’를 보이는 어른들 입니다. 이런 사람을 ‘성인아이’라고 하는데 불행한 것은 오늘 우리 시대에는 이런 성인 아동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 입니다. 더군다나 아이들을 적게 낳다 보니까 너무 스포일 시켜 놔 가지고 마마 보이들이 많이 생기고, 공주병 걸린 딸들이 많아 지면서 이런 사회 문제가 생긴 것 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되면 그 가정은 불행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한 직장의 보스가 되면 그 직장은 갈등과 불화가 심해 집니다. 이런 사람이 한 사회의 리더가 되면 그 사회는 퇴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교훈의 핵심은 <주는 것>입니다. 그늘을 주고, 열매를 주고, 그 나무로 놀이터를 만들어 주고, 돈을 만들어 주고, 집을 만들어 주고, 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주는 것’의 행복을 배우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은 불행을 꼬집은 것 입니다. 줄 수 있다는 것은 성숙을 뜻합니다. 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뜻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시는 분 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는 삶을 배우기까지 우리는 주님을 닮을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푼 사랑과 친절이 바로 내게 한 것 이라고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사도 바울의 성숙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손수 노력하여 이웃들의 필요를 공급했다고 말 합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사도는 철저한 절제와 극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섬기려 하는 것이고, 자기 목숨까지도 대속물로 주시려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요한 자 로서 우리들을 위하여 가난한 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진짜 부자는 어떤 사람이 어야 하는 가의 모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줄 수 없는 부자는 진정한 부자가 아닙 니다. 졸부입니다.
참된 부요는 모으는데 있지 않습니다. 참된 부요는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부요는 주는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공부해서 남 주고, 사업해서 남 주고, 성공해서 남 주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소유한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준 것 만이 내 것 입니다. 주는 것은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에 쌓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무엇 일까요? 복음입니다.
살전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성숙하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다
른 사람을 기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찾아 주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악을 선으로 갚아 주십니다. 항상 먼저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봐 주십니다. 그 분은 하늘의 궁중보다 대신 가난 함을 택하셨습니다. 그 분은 아버지의 명 외에는 아무 말씀도 듣지 않으셨습니 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너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의 입맛에 바꾸려하거나, 강제 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옷 입는 방식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다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이런 옷을 입는 게 좋다고 말할 수 있지만, 상대방의 옷을 입는 방식을 바꾸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억지로 음악을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개성과 습관을 중요시하고 참여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관 앞에서 남자는 액션영화를 보기 원하고, 여자는 애정 드라마를 보기 원한 다고 합시다. 이럴 때 나의 고집대로 정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나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욕심대로 상대방이 따라줘야 한다는 강제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희생을 강요하고, 자신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래야 한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은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해주기를 바랍니다. 자신은 하나도 주지 않으면서 받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주지 않을 때 사랑이 식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상대방에게 주지 않은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었다면 반드시 대가를 요구합니다. 이것은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90이 다 되신 전종석 할아버지 지금도 중국 땅에서…북한 땅에서 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행복하기 때문 입니다….이번에 제가 할아버지와 같은 방에서 몇일을 함께 자면서 그동안 하신 일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
나진 양노원 1차 (건축비5만불, 가구 시설1만불) 2차(건축비 6만불, 시설1만불) 3차 (3만불 + 시설 5천불) 회령 양노원 (건축비 2만불, 양식과 옷 5천불) 회령 시멘트 지원 (600톤+ 수송비 3만불) 회령 유치원 (건축비 2만불, 양식과 옷 3천불)
원봉 유치원 (건축비 3만불+ 석탄, 양식, 옷 지원) 원봉 탁아소 (건축비 2만불+ 가구, 담벽 공사 6천불) 원정 탁아소(건축비 3만불+ 석탄, 옷,간 식 제공) 굴포 유치원 탁아소(건축비 2만 5천불+ 쌀 지원, 부식) 나진 양노원 생활비 지원 (매월 중국돈 1만5천원, 쌀, 석탄, 옷, 의약품 등 생활 필수품 일체) 나진 시립병원 담석기 지원(1대 2만불, 2013.7월 현재 800명 시술) 평양 시립병원 담석기 지원( 1대 2만불 + 3천불 추가 비용)
중국 조양천 양노원 (1년에 인민피4만원 지원 9년+ 2013년 새로 시작한 지원 2만원 ) 도문 기술학교 재개 (인민피 1만원 지원) 이것 뿐 입니까? 탈북동포 들이 중국 벌판을 헤맬 때 그들 수백명을 밤낮으로 찾아 다니며 먹을 것, 입을 것을 제공해 주고, 살 집을 마련해 주고, 가난한 불구자들을 위해 중국에 예배당을 지어 주고, 그들과 함께 살면서 섬겨주고 또 북한 안에서도 지난 15년 동안 수많은 사람 들을 섬겨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 것 입니다. …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 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남은 생애가 사랑으로 섬기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물질관
행 20장 33~35절 / 김영규목사
물욕 없는 삶
에베소 장로들을 위한 설교의 마지막은 뜻밖에도 물질에 대한 교훈입니다. 물질관은 영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이 말씀에는 바울의 역설적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몸을 바치는 것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육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영성이 좌우됩니다. 마찬가집니다. 교회 일군은 물질관이 바로 되어야 영적 직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질관이 바르지 않으면 바른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의 물질관을 세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물욕을 버리는 일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삶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3) 은이나 금이나 의복은 성경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재산 목록입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아간이 훔친 전리품은 바로 은과 금과 의복입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수7:21)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는 아람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주인 몰래 요구한 것도 의복과 은입니다.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왕하5:22-23)
재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유욕을 갖게 합니다. 아합은 한 나라의 왕이면서도 신하의 포도밭을 탐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부동산 욕심입니다. 다윗은 많은 왕비와 여인을 거느린 왕이었지만 밧세바를 보고 소유욕에 빠졌습니다. 저 여자를 소유했으면! 그래서 결국은 불륜에 빠지고 살인에 빠졌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러므로 탐심을 물리치는 것은 성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싸움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마귀는 탐심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성경 계명의 요약이 십계명입니다. 그 십계명의 제일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이 바로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앞선 아홉 가지 계명 하나하나가 다 탐심에 걸리면 넘어집니다. 탐심 때문에 발람처럼 하나님을 저버립니다. 탐심 때문에 우상에 빠집니다. 탐심 때문에 불효자가 됩니다. 탐심 때문에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탐심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사도 바울은 탐심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로서 성공했고, 목회자로서 성공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물질의 탐심을 이겨야만 합니다. 물욕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재산 상속 문제로 질문할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탐심을 이기기 위해 우리는 우선 탐심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탐심은 백해무익하고 불건전한 욕망입니다. 그 자체로써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탐심은 자신에게 해롭고, 남에게 해롭습니다. 탐심은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행복을 빼앗아갑니다. 인간관계를 깨뜨립니다.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소유 할수록 더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만족체감의 법칙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칸 방 하나라도 있었으면 만족하리라” 하다가, 집이 생기면 “이 작은 집에서 어떻게 사나?” 하면서 더 큰 집을 갈망합니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27:2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
바울은 만족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다. 과거의 모든 소유를 다 버렸습니다. 부모에게 받을 상속 재산을 버렸습니다. 학문적 업적도 버렸습니다. 유대 사회가 주는 신분의 특권도 버렸습니다. 다 버리고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찬송가)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우리는 조만간 세상을 떠날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는 잠깐 쉬어가는 나그네입니다. 장차 들어갈 천국이 우리의 진정한 거주지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사는 동안 너무 많은 것을 쌓아 두려고 하지 마세요. 현재 상황에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성실한 노동
바울의 물질관 둘째는, 성실한 노동입니다. 바울은 친히 노동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34,35) 바울의 직업은 아시는 바와 같이 천막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 앞에 자신의 두 손을 들어보였습니다. 내가 이 손으로(ceivr: 노동 수단으로써의 손) 노동을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노동을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첫째로, 자급의 원칙입니다.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34) 바울이 비록 전도자로 헌신했지만 스스로 생활비를 벌면서 전도 했습니다. 그것은 생활비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배려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을 특권이 있지만 그 특권을 사양한 일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4-6)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7)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8-10)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12)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9:4-15)
세상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놀고먹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편안히 돈 벌고 쉽게 사는 방법은 없을까? 젊어서 떼돈을 벌어놓고 노후에 누워서 손 놓고 먹고 사는 방법을 없을까? 그러나 그것은 도적놈의 심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명하셨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3:19)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4:11)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3:10)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고 하면서 일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내일 세상 종말이 온다 해도 우리는 신성한 노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노동하여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로, 자선의 목적입니다. 나 하나 먹고 살기 위해 노동하는 것도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더 가치 있는 노동은 남을 돕기 위한 노동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35) 내 수고의 소득으로 남을 돕자! 그것이 바울이 가진 자선의 원칙입니다. 요즘 남의 돈으로 자선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쨌든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선은 내가 수고하여 번 것으로 남을 돕는 일입니다.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예전에 남의 재산 축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내 손으로 벌어서 선한 일을 하세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 하나 겨우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노동에서, 나아가 남을 돕기 위한 노동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권면이요, 주님의 권면입니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
바울의 물질관 셋째는, 주는 것이 복이 있다는 원리입니다. 받는 것도 복이지만, 주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5) 왜 주는 것이 복일까요?
첫째로, 줌으로써 내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은 영적 행복의 원리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 여리고 성의 세관장이었던 삭개오를 보세요.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삶이 변했습니다. 주면서 행복해 합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눅19:6) 예전에 삭개오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대접하면서 즐거워 합니다. 평생 돈 모으는 재미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재산의 절반을 내주겠다고 하면서 즐거워 합니다. 주는 삶이 행복합니다. 받을 것만 생각하고, 받기만 바라면 우울증에 걸립니다. “왜, 내겐 안 주나? 왜, 나는 빼놓았을까? 왜, 남들만 가지고 있는가?” 밤낮 뺏을 궁리만 합니다. 그러다가 거지발싸개처럼 된 것이 북한 공산당입니다. 밤낮 남의 것 뺏어 먹을 궁리만 하니 될 게 없어요. 전 국민이 우울증에 걸려 있습니다.
오늘 내 주변 사람이 뭔가 달라고 합니까? 내가 형제들보다 잘 살고 있습니까? 내게 손 벌리는 사람들이 많나요? 싫어하지 말고 주세요. 줄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저는 지금도 줄 수 있는 것이 행복합니다. 자식에게, 부모님께, 이웃에게, 뭔가 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돈도 주고, 명예도 주고, 사랑도 주고, 지혜도 주고, 다 주세요. 자식에게도 주고, 부모님께 드리고, 형제자매에게 주세요. 이웃에게 주세요. 주면 즐겁고 행복합니다. 심리학자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누리는 최상의 행복감은 남에게 베푸는 행복감이다! 심리학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면 행복하도록 만든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주는 삶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세요.
둘째로, 줌으로써 하나님께 엄청나게 되돌려 받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주는 것은 얼핏 보면 손해나는 일처럼 보입니다. 성경 전도서에 보면 자선 사업은 음식을 강물에 뿌리는 것처럼 헛되게 보입니다. 그러나 되찾을 날이 있습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전11:1) 누가 찾아 줍니까? 누가 되돌려 줍니까? 하나님이 되돌려 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내가 남에게 준 것보다 몇 백 배, 천배, 만배 되돌려 주실 수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곡식 장사는 될 수 있으면 곡식이 그릇에 많이 담기지 않도록 살살 담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때에 그냥 담아 주시지 않으십니다. 후히 담으십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하십니다.
지구상에 보세요. 주는 나라는 다 선진국입니다. 받는 나라는 다 후진국입니다. 선진국이니까 주는 건가요? 주기 때문에 선진국이 된 것일까요? 우리나라는 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했습니다. 우리도 먹고 살 것이 없는 데, 무슨 해외 선교사를 그렇게 많이 보내는가? 그런데 이제 보세요. 이제는 국가에서 해외 협력단을 보냅니다. 유엔 분담금을 늘리고 있습니다. 국가적 번영이 어디서 오는 겁니까? 보세요. 하나님께서 태풍 안 오게 하시니까 곡물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전 세계 경제 위기 가운데 한국을 가장 먼저 벗어나게 하시니, 이제는 G20 의장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자력 종주국 프랑스를 누르고 UAE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건설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에 기적을 일으키며 동계 올림픽 세계 5위가 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주는 자에게 더 주십니다. 주는 자의 복을 받으세요.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신24:19-21)
셋째로, 줌으로써 영혼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복음 전파입니다. 어떻게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게 할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어떻게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파됩니까? 그 하나의 방편이 바로 주는 삶을 통해서입니다. 성도들은 남에게 줘야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의복도 주고, 학자금도 주고, 양식도 주고, 줘야 마음이 열립니다. 줘야 예수님 사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줘야 인간 관계가 원활해집니다. 줘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 줌으로써 복음을 전파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 정신이요, 복음이요, 오늘의 최종 메시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볼까요? 물질관은 전도자에게, 교회 일군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물질관을 가졌는가? 첫째로, 물욕을 버려야 합니다. 탐심을 버리고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노동을 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삶을 위해 노동해야 합니다. 또한 남을 돕기 위해 노동해야 합니다. 셋째로, 남에게 주어야 합니다. 주는 것이 복입니다. 줌으로써 행복하니 복입니다. 줌으로써 더 많이 받게 되니 복입니다. 줌으로써 복음이 전파되니 복입니다. 바른 물질관으로 축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