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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38,1-6.21-22.7-8
1 그 무렵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2 그러자 히즈키야가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3 말씀드렸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
4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렸다.
5 “가서 히즈키야에게 말하여라.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6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21 이사야가 “무화과 과자를 가져다가 종기 위에 발라 드리면,
임금님께서 나으실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22 히즈키야가 “내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은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7 “이것은 주님이 말한 일을 그대로 이룬다는 표징으로서,
주님이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8 보라, 지는 해를 따라 내려갔던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내가 열 칸 뒤로 돌리겠다.”
그러자 아하즈의 해시계 위에 드리워졌던 해가 열 칸 뒤로 돌아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Picking grain on the sabbath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병이 들어 죽게 된 히즈키야 임금의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셨다며 주님의 표징을 보여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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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히즈키야 임금의 기도를 들으시어 그의 수명을 연장해 주시고 아시리아의 손아귀에서 도성을 보호해 주시리라며 표징을 보여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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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즈키야 임금은 자신이 병사할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에 슬퍼하며 자비를 간구한다. 주님께서는 히즈키야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의 수명을 더해 주시며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 있는 도성을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과 함께 밀밭을 지나가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에 바리사이들이 이를 두고 예수님께 항의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성전에서 제사 빵의 규정을 어기고 먹은 사례를 드시며 그들을 논박하셨다. 그리고 당신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안식일에 대한 논쟁은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그만큼 유다교에서 중요한 율법이었고 지금도 유다인들에게 안식일 규정은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예수님 시대에 있던 율법 가운데 삼분의 일 정도가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었다는 것은 안식일의 중요성을 보여 줍니다.
안식일의 기본 원칙은 ‘쉬는 것’입니다. 창조 때에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하루를 쉬셨다는 말씀에서 유래합니다. 안식일에는 ‘일하는 것’, ‘노동’을 모두 피해야 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무엇이 일하는 것인지 세세하게 규정합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 밀 이삭을 뜯는 제자들의 행동은 분명 일이고 노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을 비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예로 답하십니다. 먼저 다윗의 이야기는 아마도 1사무 21,1-7의 내용처럼 보입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에 대한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사제는 안식일에도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두 경우 모두 예외적인 내용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라는 점과 안식일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안식일, 곧 지금 우리에게 주일은 쉬는 날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의미를 생각하고 하느님의 업적에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화로운 창조에 걸맞은 용서나 자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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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죽음을 앞둔 히즈키야는 하느님께 자신의 인생을 고백합니다. 비록 하느님 앞에서 흠 없는 인생은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온 한 인간의 진실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그의 눈물 어린 기도를 들으시고, ‘해시계의 그림자를 열 칸 뒤로 돌리는’ 표징을 통해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한 상황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얻은 것이 세속적인 성공이나 부유함이 아님을 알게 해 줍니다. 그들은 단순히 게으르고 가진 것이 없어서 배가 고팠던 것이 아니라, 밥보다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했기에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세속적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생각한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제자들의 행동이 눈엣가시였을 것입니다.
그런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예수님께서는 질책하십니다. 그들이 존경하는 다윗왕도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그들에게 음식을 먹이는 일이 율법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먼저 깨달았다는 사실을 기억시키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적 의무에 매달려 의무를 지키는 일 이외에 희생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는 우리의 왜곡된 신앙관을 질책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법과 계명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법과 계명의 정신을 잃으면 인정과 자비가 사라지고, 형식과 위선만 남게 됩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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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들이대며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을 통해 그들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십니다.
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고, 율법은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규정합니다. 이 법이 우리에게 무섭게 느껴지고 두려움을 줄 때도 있으나, 이 법들은 결국 사람을 옥죄려고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을 보호하고, 사람을 하느님께 올바로 이끌도록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나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시키려는 도구로 사용하면,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무서운 무기로 돌변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성 생활을 해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선한 형태를 띠고 있는 어떤 것도 상대방을 제압하고 나의 선익만을 추구하려고 사용한다면 새로운 형태의 바리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보다도, 또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인 성전보다도 더 크신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규나 성전이 인간을 사랑하시고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보다 더 클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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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예수님의 이름을 그리 낯설게 여기지 않습니다. 비록 신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현대인이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에 제법 익숙합니다. 기나긴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축적된 신학, 미술, 건축, 문학, 영화, 철학 등 인류의 문화유산에는 그분에 대한 이야기와 해석들이 가득 담겨 있고, 대중 매체는 사람들이 이를 손쉽게 대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나 그분의 활동을 수시로 듣고 보는 이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일까요?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깨달으려는 노력에 오히려 더 소홀하지는 않을까요? 그분에 대해 익숙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더 큰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문자로 쓰인 법이 올바른 삶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 곧 당신께 행위의 참됨이 달려 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율법 규정 자체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서 보여 주시는 행적을 통하여 사람을 살리는 자비의 진리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그리스도인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를 ‘절대적’ 신뢰로 바라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규정도, 거룩한 성전조차도 삶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고, 살아 계시는 주님 앞에서 상대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유한한 진리가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가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진리 밖에 있다 하더라도 진리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남는 쪽을 택할 것’이라는,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유명한 말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을 이처럼 절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은 그분께서 진리 자체이시라는 근본적 신뢰에서 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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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남의 곡식에 손을 대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에 따르면, 추수 행위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노동으로, 밀 이삭을 뜯는 행동은 바로 수확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나친 율법주의로 말미암아 율법의 근본정신을 소홀히 여기는 이들의 태도를 나무라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 법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왜 하필 안식일 법의 근본정신이 자비인지는, 안식일의 기원을 전하는 ‘천지 창조’의 이야기(창세 2,1-3 참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뒤 이렛날에 쉬십니다. 그런데 사실 전능하신 하느님께 굳이 휴식이 필요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휴식하신 것을 창세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2,3).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축복하시고자 쉬신 것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유배 생활이나 노예 생활 때문에 쉬고 싶어도 강제적으로 노동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만이라도 쉬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시간을 갖자는 데에서 생겨난 것이 안식일 법입니다. 곧 이 법은 약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에 대한 자비의 법인 것입니다.
어제 복음을 묵상하면서도 보았듯이 ‘사랑’은 모든 법의 근본정신입니다. 우리도 바리사이들처럼 법을 지키고 있는지에만 집착한 나머지 사랑의 마음을 담은 삶에 소홀한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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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에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정해졌습니다. 안식일의 휴식은 하느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노동을 한 사람들에게 하루를 쉬게 함으로써 인간을 존중해 주고자 정한 날입니다.
안식일 법에는 안식일에 추수나 타작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추수나 타작은 노동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안식일의 본디 의미는 희미해지고 세부적인 규정들이 더 중요한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안식일의 규정을 보면, 밀 두 이삭을 따면 그것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가 됩니다.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곡식을 타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라고 따집니다.
제자들이 오죽 배가 고팠으면 영글지도 않은 밀 이삭을 뜯어 먹었겠습니까?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제자들의 딱한 처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을 얽어매어서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하느님의 법이라면 분명 사람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계명들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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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며 주님께 시비를 겁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이라면 당연히 절도죄로 고발당할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배고픈 사람이 길을 가다가 밀 이삭 한 줌을 뜯어 먹었다고 절도죄로 몰아 부칠 정도로 인심이 흉흉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천 년 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인심의 후덕함 여부를 떠나, 안식일 법을 가지고 주님께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기에 앞서 법을 먼저 따집니다. 이는 주님의 행위에 트집을 잡거나, 법을 앞세워 실추된 자신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욕심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법보다 사랑이 우선이며,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야말로 참된 예배임을 제시하시면서, 당신이 곧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십니다. 신앙인은 법을 따지기에 앞서,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실천이 삶의 기본 정신임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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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제자들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배가 출출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항의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추수는 율법에 금지된 노동이었습니다. 그러니 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억장이 무너질 일입니다. 이삭 몇 개 비벼 먹은 것을 추수 행위로 보다니 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경직되어 살았습니다.
계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도 추수 행위로 보셨을까요?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기에 앞서 다윗의 예를 드십니다.
다윗은 배가 고파 제단에 바쳐진 제사 빵을 먹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금지된 일입니다. 하지만 배고픔이 참작되어 용서받습니다. 그러한 다윗도 용서받았는데 이삭 몇 개 비벼 먹은 것에 웬 호들갑이냐는 예수님의 반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제단에 바쳐진 음식보다 다윗이 더 소중합니다. 안식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아니, 그러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께서 더 위대하시다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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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은 하느님의 자비,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도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주변에는 끊임없이 우리를 흠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작가는 일찍이 악인들의 못된 짓을 체험하고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재앙을 모르는 그자, 저주만을 퍼붓습니다. 마을 으슥한 곳에 숨어 앉아 죄 없는 사람을 몰래 죽이려 그의 눈은 힘없는 이를 살핍니다. 그는 덤불 속의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서 노립니다. 가련한 이를 잡아채려 노리다가 그물로 끌어당겨 잡아챕니다. 이렇듯 가련한 이는 두들겨 맞아 쓰러지고, 힘없는 이들은 그의 폭력에 넘어집니다.” 오늘날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을 곳곳에서 노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악에서 벗어나려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의학의 아버지’라고 하면 떠올려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의사 윤리 등에 대한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주인공, 히포크라테스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히포크라테스가 상당히 윤리적이며 이성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지금 이야기한다면 아마 사회적으로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의 윤리성에 큰 문제가 있다면서 말이지요.
그가 했던 여성 비하의 말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자들은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지내다 보니 몸에 분비물이 많이 생기고, 이 지저분한 분비물 찌꺼기를 몸에 담아 두었다가 생리를 통해 여러 구멍 중 하나로 배출시킨다. 그래서 월경 시기의 여성은 병을 옮기기 쉬운 지저분한 존재이다.’
어떻습니까? 지금 이 말을 했다면 커다란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되지도 않았고, 미혼의 여자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은 창녀가 하는 행동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현재에는 거짓이 된 경우도 참으로 많습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오직 하나, 하느님밖에 없음을 다시금 묵상하게 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안식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에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어 먹는 모습이 일하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밀 이삭을 뜯는 것은 ‘추수’이고, 뜯은 밀 이삭을 비벼서 겨를 날려버리는 것을 ‘타작’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합당한 이유 없이는 율법을 어긴 일이 없으시며 언제나 합리적인 설명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행위도 결코 죄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즉, 안식일 법 자체보다 안식일의 본뜻인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뜻인 사랑에 기준을 맞추는 것이 참 진리입니다. 결코, 세세한 안식일 규정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억압과 규제를 위해서 안식일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실천으로 안식일을 우리를 위해서 제정하셨다는 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주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자비로운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안식일 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됩니다.
문제는 모르는 것 때문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안다고 믿는데서 생긴다(윌 로저스).
어렵고 힘든 말.
평소와 마찬가지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이 그렇게 와닿지를 않습니다.
사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상당히 컸습니다.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지를 말하는 책으로,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 있는 제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 내용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평소에 이 책을 읽었다면 큰 감동과 함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내용을 계속해서 메모했을 것 같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슬픔과 제가 간직하는 슬픔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슬픔을 안고 저를 찾아온 분에게 해드렸던 말들이 얼마나 공허했을까 싶었습니다. 부끄럽고 죄송스러웠습니다. 그 다양한 슬픔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그냥 안아만 줄 뿐입니다.
남에 관한 이야기는 참 쉽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이야기가 되면 힘든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아픔은 안아줄 뿐이고, 기쁨은 함께 나누는 것뿐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율법지상주의에 깊이 함몰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언제 들어도 유쾌, 상쾌, 통쾌합니다. 그들은 특히 안식일 규정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규정들을 셀수도 없이 많이 만들고 나서는, 누가 규정을 어기는지 매의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조금이라도 어기만 가차없이 잣대들 들이대며 단죄하고 처벌했습니다.
그들의 과도한 가르침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극히 사소한 일도 절대 금지였습니다. 미쉬나(Mishnah)에는 안식일에 금지된 39개의 주요 노동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밭갈이, 파종, 수확, 단묶기, 타작, 키질, 선별, 분쇄, 체질, 반죽, 굽기, 글쓰기, 건축, 이사, 점등, 소등 등등.
너무나 웃기는 부분도 수두룩합니다. 안식일에 촛불을 켜는 것은 금지되지만, 촛불을 켜기 위해 이방인을 고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손수건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지만, 손수건을 옷에 달고 사용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땅에 침을 뱉는 것도 금지요, 벽에 고정된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금지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웃기는 짬뽕’같은 규정입니까?
안식일에는 약 1킬로미터 정도까지 걷는 것은 가능하나 그 이상 걷은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엿새간 열심히 일했으니 하루 편안한 몸과 마음을 쉬라는 의미에서 제정된 안식일 규정입니다. 안식일 날 편안한 복장으로 호젓한 산길 3~4킬로 천천히 걸으면 그 얼마나 편안한 휴식이겠습니까?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 따르면 큰일 날 일이었습니다.
밀이삭을 추수하는 규정도 꽤나 까다로웠습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웃집 밀밭에 심어져 있는 밀 이삭을 그 자리에서 잘라 먹는 것은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낫을 대는 것을 금지되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된다.”(신명기 23장 26절)
그러나 율법학자들의 잣대는 점점 수위가 높아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배배꼬인 시선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현미경처럼 관찰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신명기의 가르침을 위배한 것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들이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오 복음 12장 2절)
고지식한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타는 날카롭습니다.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오 복음 12장 5~8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실수는 참으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고생하는 인간의 휴식을 위해 제정한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속박하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만든 안식일 규정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가는 규정이 되고만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 근본 정신이 사라진 법과 강제력은 얼마나 위험한 것이지 모릅니다. 기쁨 없는 봉사 역시 위험합니다. 자비없는 선행의 실천 역시 부담입니다. 고행과 단식은 기쁜 얼굴로 행해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 역시 행복한 얼굴로 행해야 마땅합니다.
휴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일도 잘하는 사람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제들은 동기들이 한 달에 하루 만나 식사를 함께 합니다. 소위 ‘동기 모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동기 모임은 전혀 생산적인 모임이 아닙니다. 그냥 먹고 마십니다. 그래도 신부 대부분이 동기 모임에 빠지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동기 모임은 정말 비생산적 모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생산적인 무언가를 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너무 의미가 없어 보여서 아예 동기 모임을 나오지 않는 사제들도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들끼리 얼굴 보고 떠들고 웃고 하는 의미 없는 쉼은 창세기부터 시작한 ‘안식일’에 매우 가까운 쉼입니다. 주님 이름으로 모여 쉬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쉴 수 없을까요? 그동안 열심히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 보상을 절대 빼앗기지 않습니다.
이제 휴가철이 시작됩니다. 이상하게 휴가 가서 일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면 일하면서 휴가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지내느냐가 사실 일의 능률과 직결됩니다.
15년 동안 오로지 골프에 둘러싸인 박세리가 골프여왕답지 않게 두 경기를 계속 컷오프당한 뒤 “골프에 지쳤다. 이제 골프에서 잠시 빠져나오고 싶다. 나는 골프 말고 다른 일상생활을 즐기는 게 필요하다.”라고 자가진단과 처방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정되었지만, 그때가 가장 최악의 슬럼프였습니다. 그녀는 스승이기도 한 아버지에게 “다른 건 다 가르쳐놓고 왜 쉬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했다고 합니다. 일하는 것은 가르치고 쉬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다면 다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달리는 것은 가르치고 브레이크 잡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제7일의 안식일이 우리가 힘겹게 일하고 사는 오늘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6일 동안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 고생의 대가로 누리시는 것이 안식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님 창조사업에 참여하는 이들은 안식에 들게 됩니다. 물론 그 안식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도 세상에서의 창조사업을 마치시고 안식에 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행의 보상은 안식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왜 모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사이들은 그 안식에 들 수 없을까요? 바로 선행에 대해 또 다른 ‘보상’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비판했습니다. 안식일을 자기만족의 또 다른 일하는 날로 삼은 것입니다. 그들에겐 남을 비판하면서 오는 맛이 그들 선행의 보상이었습니다. 안식일이 보상이 아니라, 안식일에도 남을 비판하며 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였고 스미르나 교회의 주교였던 폴리카르푸스의 일화입니다. 자고새 한 마리와 놀고 있던 폴리카르푸스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성인이라는 분이 어떻게 새와 놀며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폴리카르푸스는 빙그레 웃으며 “활도 쓰지 않을 때는 줄을 풀어 놓아야지, 언제나 줄을 매어 두면 못쓰게 되고 맙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 자체가 그분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지쳐있을 수도 있습니다. 일하며 보상을 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과 함께 쉬는 것만을 보상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면 안식일도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아직 만족스럽지 못하기에 다른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결국 지쳐 쓰러집니다.
부자들은 돈을 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큰 부자가 되는 것? 이미 부자입니다. 그들은 돈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돈을 번다고 합니다. 돈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 때문에 놀지 못하게 될까 봐 돈을 버는 것입니다. 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성취한 자유, 그다음에 오는 것이 안식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안식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쉼이 목적이 아닌 일은 그 쳇바퀴에 영원히 갇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도 일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열심히 일한 것의 유일한 보상입니다. 쉼만으로 모든 것이 충만히 채워집니다. 쉼이 아닌 다른 보상을 바라는 사람이 쉬지도 못하고 안식에 들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사업에 협력했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안식에 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쉬는 것,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 노력에 부어주시는 유일한 행복입니다. 열심히 주님 뜻에 따라 살아갑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는 주님과 함께 머무는 쉼을 즐깁시다. 이것을 잘할 수 있을 때 영원한 안식에도 들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류의 역사에 분기점이 된 큰 흐름이 있습니다. 수렵과 채집으로 살던 인류가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인류는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인류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식량이 많아지면서 소유와 계급이 생겨났습니다. 소유와 계급은 사회와 질서를 필요로 하였고, 마을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생겨났습니다. 인류는 이런 흐름을 ‘농업혁명’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제도와 문화, 철학과 종교는 농업혁명의 ‘틀’에서 발전되었고, 우리는 아직도 그 문화유산을 우리가 가야할 이정표로 여기고 있습니다.
석탄, 석유, 전기는 사람과 가축에 의지하던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차는 기차로 발전하였습니다. 물레방아는 댐이 되었습니다. 바람에 의지하던 배는 기선이 되었습니다. 손으로 만들던 제품을 기계로 만들게 되었습니다. 초가집은 빌딩이 되었습니다. 마을에 살던 인류는 도시로 모였습니다. 총과, 대포, 군함, 비행기는 제국주의를 받쳐주는 힘이 되었고, 힘을 가진 국가는 식민지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전기는 밤에도 불을 환하게 밝혀주었습니다. 인류는 이런 흐름을 ‘산업혁명’이라고 합니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는 인류를 풍요롭게 하였지만 인류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인류를 빛의 속도로 소통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국가단위의 산업에서 국제적인 산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생산, 유통, 소비, 공급은 국가단위에서 국제적인 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종교가 융합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사상이 융합하게 되었습니다. 한 국가의 경제위기는 지구촌의 경제위기로 확대되었습니다. 산업과 경제가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이런 흐름을 ‘정보혁명’이라고 합니다. 교통의 발전, 도시화, 국제화는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과도 더불어 살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정보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미래학자들은 새로운 ‘혁명’을 이야기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의 시대를 맞이할 거라고 합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달릴 거라고 합니다. 요양원, 병원에는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일 할 거라고 합니다. 위험하고, 힘든 일을 로봇이 대신 할 거라고 합니다. 이것이 인류를 새로운 신세계로 안내할 수도 있지만, 인류는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이 인류보다 힘과 능력을 더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공학은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인류의 수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명공학은 우성인 사람과 열성인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탄생에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은 우리를 유토피아로 안내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어둠의 세계로 안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혜와 윤리의식이 필요합니다. 철학과 종교의 균형이 함께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과 문명의 발전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과 문명의 옷을 입는 사람의 마음이며, 사람의 삶입니다. 그것은 시대와 역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옷은 갈아입을 수 있지만 마음은 언제나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 저는 당신만을 바라오니, 제 목숨 구해 주소서. 저를 고쳐 주소서.”
제도와 문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실한 삶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도와 문명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주인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1-2)”
이 이야기를 바로 앞에 있는 ‘멍에와 짐에 관한 가르침’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우리는 제자들의 배고픔이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어떻든 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아닐 텐데,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너무 배가 고팠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멍에’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멍에가 아닙니다.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수 있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16,8-10).
이 이야기에서,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리사이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기들도 율법주의라는 멍에를 메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멍에를 메라고 강요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거나 타이르면서 그들이 메고 있는 율법주의라는 멍에를 벗겨 주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던 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그 멍에를 벗기를 거부했습니다.)
<만일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살 정도로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하루 굶는다고 죽지는 않는다.” 라고 말하면서, 그가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을 꾸짖을 수 있을까? 굶주림의 고통을 참고 억지로 주일을 지킨다면,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일까? 주일에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고 주일을 ‘기쁨으로’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안 지키는 것과 못 지키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정말로 몸이 아파서 주일을 못 지키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파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사람에게 가서 주일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는 그렇게 아파서 주일을 못 지킨 것에 대해서 고해성사를 보라고 강요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3-6)”
바리사이들은 다윗이 율법을 어긴 일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팠다는 특별한 상황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고, 또 다윗이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적용하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다윗이 배가 고파서 한 일을 비난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한 일도 비난하면 안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려면, 다윗을 먼저 비난해야 합니다.)
또 사제들은 제사 준비 등으로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하느님께 제사를 바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나는 하느님과 같은 권위와 권한을 가지고 있다.” 라는 뜻이고, 또 이 말은, “내 제자들이 율법을 어겼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내가 한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을 꾸짖어야 한다면 당신이 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셨으면서도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들의 배고픔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예수님의 판단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7-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한 일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셨지만, 제자들을 ‘죄 없는 이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진짜 죄인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헤아리지 않고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비난하기만 한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의 죄는,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죄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말하기 전에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순서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형식적인 율법 준수가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기를 바라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섬기면서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씀은, “어떤 사람이 율법을 지켰는지 어겼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다.” (어떤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나의 권한이다.) 라는 선언입니다.
만일에 종교가 사랑도 자비도 없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율법 준수만 강요한다면, 그 종교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폭군일 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개인 사정을 내세워서 너무 무질서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 또한 옳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죄인이라고 판단하면 안 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들의 방종을 내버려 두시는 무질서가 아니라, 정말로 딱한 사정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시는 관심과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하느님께서 빚으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르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모르더라도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하느님께서 빚으신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더라도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 먹자 그것을 보고나서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하고 말씀을 드렸고, 예수님께서는 다윗 때의 일과 사제들이 성전에서 일하는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내신 칙서 자비의 얼굴 9항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가리키는 핵심어, 자비는 우리를 향해 움직이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이 말씀을 통해 전하는 것은 곧 우리 교회가 진정 자비로운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드러내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전하고 드러내기 보다는 자비를 받기만을 바라며 살아가곤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께 희생 제물을 드리는 것 이면에는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은총과 자비를 바라는 마음이 깔려져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자비를 베풀기 시작할 때 그 순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굶주린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실 때에 제자들이 빵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누었던 순간처럼 우리가 자비를 베풀기 시작할 때 그 기적에 나에게서 또 다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비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기적의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가족으로 영원히 행복하려면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안식일에 밀밭 지나다 밀알 좀 뜯어먹었다고 그걸 노동이라 하다니요.
안식일을 지키는 본뜻은 제쳐놓고서 외형만으로 판단한 지도층이었죠.
외형으로 단죄하는 한심한 지도자들을 예수님은 되게 야단치셨습니다.
지금도 이런 어리석은 법령 만들어 국민 괴롭히는 정치인들 많습니다.
그래서 국법이라도 하늘의 신법 울타리 안에서 이행돼야 참 법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달리 살면서 하느님의 가족이라고요? 사기꾼들!
하느님가족으로 영원히 행복하려면 십계명과 주님의 기도 상기합시다.
하늘계명과 쉽게 풀어주신 주님의 기도는 세상 인류가 알아야 됩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8).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전통적 안식일 의미를 바로 잡아 주셨다. 전통은 사람을 안식일 법이라는 틀과 공식에 대입하도록 강요했고 사람을 박스 안에 가두고 하늘을 날고 땅을 춤추게 하는 자유를 박탈하고 구속했다. 사람의 생각은 안식일을 위해 ‘희생제물’을 준비하는데 급급하게 만들었다.
사람은 이런 사고의 외적통제로 자유를 잃었고 길들여졌다. 이때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의미를 새롭게 선언하신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8). 이는 전통이 가르친 안식일 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법을 뛰어넘어 더욱 진보되고 창조적인 진정한 자유인의 삶을 살도록 마음을 열어 주셨다.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큰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전통적 고루한 사고의 틀을 깨도록 하신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사람이 자발성을 갖게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통제함으로 안식일에 대한 적극적 해석과 창조적 의미를 갖고 살도록 하셨다.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라는 곳에서 머물러 묵상하며 그 의미를 찾는다.
오늘 복음(마태12,1-8)은 마치 구원타자가 적시안타를 날려주어 위기탈출이라는 명쾌한 답을 갖게하는 느낌이다. 시원하다. 사람이 안식일에 쉬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배고푼 사람에게 굶주림을 채워주려는 갸륵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다. 안식일에 사람은 지키는 일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감사드리고, 굶주리는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는 거룩한 날이어야 한다. 얼마나 생기가 돋는 선언이신가?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시대에 걸맞게 타이밍이 절묘했다. 이것이 인간해방이고 구원이 아닌가?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주님은 오늘 미사의 말씀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떠올려 주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결론부터 보자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먹었다고 바리사이들이 따지는 상황에서 하신 응답입니다.
"배가 고파서"(마태 12,1).
복음사가는 제자들 행동의 이유를 밝힙니다. 배가 고파서입니다.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 제자가 된 이들이니, 딱히 밥벌이 수단이 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 장정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아마도 사람들의 친절과 호의에 의지해 의식주를 해결했을 겁니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며,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난까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수호하는 일에 사활을 건 이들에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나 정황 따윈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지켰느냐 어겼느냐의 심판이 중요할 따름이지요. 하느님 말씀인 율법의 정신은 사랑이건만 이런 이들은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율법을 운용할 수 있었지요.
제1독서는 하느님 자비의 훈훈한 예를 들려 줍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이사 38,3).
예언자를 통해 죽음을 통보받은 히즈키야 임금이 주님께 기도합니다. 진정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겨온 이만이 드릴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실제로 히즈키야는 유다 역사에서 "주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으며 하느님을 신뢰하고 계명을 지킨 임금"(2열왕 18,1-8 참조)으로 기려지는 선왕입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이사 38,5).
히즈키야의 진실된 기도와 눈물이 주님의 마음에 가닿습니다. 어쩌면 히즈키야의 기도는 자기 죽음을 재고해 달라는 의도였다기보다, 주님 뜻 안에서 당신께 드린 사랑과 충심을 기억해 달라는 의미였을 것 같습니다. 살려달라는 애원보다 깊고 진한 사랑 고백입니다.
이에 주님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그의 수명을 열다섯 해나 늘려 주시고 거기에 보태어 아시리아로부터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건 히즈키야가 감히 상상도 못한 자비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발동된 주님 마음에는 못해주실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계획을 수정하시면서까지 히즈키야가 바라던 기도 이상의 것을 베풀어 주시지요.
"내가 주님의 집에 오를 수 있다는 표징은 무엇이오?"(이사 38,22)
히즈키야의 이 질문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보통 새 삶을 부여받은 이들은 상징적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재회나 가장 즐겨하던 일 등을 궁금해 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히즈키야에게 첫째로 중요한 것은 다시 주님의 집에 오르는 것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운 뵙는 것"(화답송)이니까요. 그가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정성을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허락하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께 찬미와 흠숭과 사랑을 올리는 것, 이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에게 있어 "삶, 생명"의 정의입니다.
주님께 감히 "표징"을 요구하는 그의 담대함을 의심이나 무례함 같은 단어로 얕게 평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만한 신뢰와 믿음이 있기에 여쭈었고, 주님도 기꺼이 시간을 되돌리시면서 응답해 주시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자비는 이렇습니다. 그분은 "네가 감히 내게!?!" 하며 괘씸해 하거나 꾸짖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이에게 한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분이시지요. 율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가 율법 조항에 매여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율법을 만드셨지요. 자비는 율법의 모태입니다. 그러니 사랑과 자비가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원리여야 하지요.
앞으로도 율법주의자들과 종교 지배층들의 소모적인 왜곡과 곡해,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직 엉성하고 어설퍼서 예수님께 누가 될 빌미나 제공하는 제자들을 이끌고 보호하시면서 꿋꿋이 아버지의 일을 해 나가실 것입니다.
벗님! 요즈음같이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의 원리가 주님의 사랑과 자비임을 굳게 믿을 때, 범람하는 온갖 말들의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진리를 향해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판단이 어려운 미혹과 무명 앞에서 대충 급히 판단하고 심판하기에 앞서 주님의 크신 자비에 고요히 머무르는 지혜를 청합시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예전에 어떤 분이 성당에도 열심이고 헌금도 많이 하고, 신부님, 수녀님에게도 때마다 선물도 잘 가져다주셨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분이 자기 회사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상습적으로 체불하는 사람들의 명단에 나왔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았다고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6-8)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자기가 마땅히 자기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주어야할 임금을 체불한채 성당에 헌금한다면, 예수님께서 그 헌금을 기쁘게 받아들이실 수 있겠습니까? 배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노동을 했다고 안식일에 쉬어야 하는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비난한다면 그 계명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계명이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신의 몫은 악착같이 챙기면서도 이웃의 아픔과 어려움을 모른 채 한다면, 주 예수님께서 얼마나 부끄러워하시겠습니까? 사람을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며 내주신 주님의 마음과 사랑의 정신을 기억하며, 기회가 될 때마다 작게나마 우리 몸으로 실현합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함승수 신부님
라면을 훔쳐먹다 붙잡혀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배추 두 포기를 훔치다 적발되어 징역 3년6개월 실형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유전 무죄, 무전 유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회자되곤 합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또는 단순 절도로 범행을 저지른 이에게는 중형을 선고하면서, 상습적으로 마약을 반입하고 투여한 유명 정치인의 자녀나, 비싼 돈을 주고 유능한 변호인을 고용한 아동성착취 영상물 제작자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에게 그런 높은 형량이 선고된데에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긴합니다. 액수가 크지는 않지만 상습적으로 계속 절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고 보고 더 엄중한 처벌을 내린 것입니다. '법과 원칙'에 따른 처벌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판결을 볼 때마다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절도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당장 오늘 먹을 것이 없어 아무런 대책 없이 굶어야 하는 사람의 입장을 헤아린다면, 그들에게 '선처'를 베풀지는 못할망정 '같은 잘못을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더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가혹한 발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행히 이 '장발장법'은 위헌으로 판단되어 사라졌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누가 '왜' 죄를 지었는지 그 이유를 헤아려주는 사람보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도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남의 밀밭에서 '밀 서리'를 해먹었다는 이유로 단죄하려고 한 것입니다. 걸어가면서 밀 이삭을 뜯어먹는데 먹어봐야 몇 개나 먹었을까요? 종일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그분 곁에서 밥 챙겨먹을 시간 조차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야 했던 제자들의 딱한 사정을 헤아렸다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고발한 '죄목'은 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그 밀밭의 주인이 아니기에 '절도'죄로는 고발할 수가 없으니, 여러군데에 폭 넓게 적용할 수 있는 '안식일 규정'을 걸고 넘어진 것입니다. 유대교 율법조항 중 절반 가까이가 안식일에 관한 것일 정도로 안식일에 관한 규정이 많고, 그것을 어겼을 때의 처벌도 무거우니 그것을 이용하여 예수님 일행을 옭아매려고 한 것이지요. 마음 속에서 사랑과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참으로 '비인간적'인 모습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함께' 살도록 하신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어 비난하고 단죄하며 서로 싸우기를 바라셔서가 아닙니다.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부족한 점은 서로 채워가며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닮은 영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너그럽고 자비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화를 내고 비난하며 단죄하기 전에, 그 사람이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먼저 차분하게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길'은 이렇게 부족한 이들끼리 서로 도와가며 '함께' 가는 것입니다.
안식일법과 주일의 의무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
유다인들에게 안식일법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종교적 계율에 속합니다. 안식일에는 어떠한 노동도 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가스렌지에 불을 켜거나 화장실에서 화장지를 손으로 뜯어내는 행위마저도 단죄하는 유다인의 세밀한 율법 조항을 들으면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안식일법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먹는 행위를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고, 안식일의 정신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는 것임을 분명히 강조하십니다. 본래 안식일 법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하여 일과 노동을 멈추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바치는 종교적 삶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정신보다 법 자체의 준수를 강조한 바리사이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사정이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보잘것없는 이들의 마음은 읽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은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기에 하느님의 용서와 기쁨을 얻습니다. 오늘날 안식일을 주일로 보내는 가톨릭교회에서 주일을 거룩히 보내야 하는 의무는 단순히 미사 참례가 아닌 어떤 형태로든 교회와 인연을 맺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자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판단의 잣대는 예수님. -예닮기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른 아침부터 당신의 은총을 어서 입게 하옵소서. 어디로 가야할 길 내게 알려 주시고, 당신의 은총을 어서 입게 하옵소서.”
아침성무일도시 독서후 계응송이 잔잔한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기도하듯, 고백하듯, 일기를 쓰듯 날마다 일어나자 마자 하루가 시작되면서 쓰는 매일 강론입니다. 어제는 만 8개월만에 게시판에 붙어있던 말마디 고백안에 ‘구원’을 넣어, ‘날마다의 강론은 내 운명이요 사랑이요 구원이다’로 정정했습니다. 기도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니 그대로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과 직결됩니다.
바오로 수사님은 떠나셨어도 계속되는 평범한 일상이요, 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함이 구원이자 위로요 영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깨달음 역시 기도의 은총입니다. 새벽 산책 기도시 깜짝 놀랐습니다. 수도원 농장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온갖 횡포를 부리던 백해무익하게 생각되던 큰 멧돼지가 감옥같은 덫에 포획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그 앞에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농장 두 수도형제는 다시 일상에 돌아와 배농장에 농약을 살포하고 있었으며 꽃말이 '일편단심', '영원'이라는 무궁화꽃도 피기 시작했고 달맞이꽃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수사님은 떠나셨어도 하느님은 묵묵히 한결같이 일하시고 수도형제들은 본분의 제자리에 항구하고 충실하니 바로 기도의 힘입니다.
운명을 바꾸는 기도의 힘, 기도의 은총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기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입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이루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인명人命 역시 재천在天입니다. 사람의 수명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향한 기도는 간절하고 절실할 수 뿐이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중병으로 주님께 죽음을 선고 받은 히즈키야 임금의 기도가 참 절박합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기도하며 슬피 통곡하는 히즈키야 임금에게 주님은 즉시 이사야를 통해 응답을 주십니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 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히즈키야의 항구하고 충실한 삶과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하느님은 활짝 열려 있는 귀이자 눈같은 분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듣고 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건의 발단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음으로 시작됩니다. 안식일의 잣대를 들이대며 예수님 제자들의 죄를 추궁하는 무지의 바리사이들에 맞서 당신 제자들을 두둔하시는 예수님의 답변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일치된 이런 확신에 찬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기도가 얼마나 항구하고 충실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새삼 하느님 자비의 마음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그대로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 예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6-8).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마음이 바로 예수 성심의 자비심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궁극의 판단의 잣대는 성전보다 더 크신 분, 안식일의 주인인 파스카의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죄의 유무도 법의 잣대가 아닌 예수님 자비심의 잣대로 하면 당장 드러납니다. 결코 바리사이들처럼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판단의 잣대는 예수님 자비심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수록 올바른 판단이자 분별임을 깨닫습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 때 더욱 기도하게 되고 이런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이요 저절로 올바른 분별의 지혜도 선물로 받습니다. 무엇보다 다시 나누고 싶은 제 자작 ‘행복기도’, 일명 ‘예닮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은총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새로 태어난 이들에게 주는 성체에 대한 가르침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성사론’에서 (Nn. 43. 47-49: SCh 25 bis, 178-180. 182)
이렇게 깨끗해지고 흰옷을 입은 새로 태어난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단에 나아가 노래합니다.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 가리이다. 내 기쁨, 내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 가리이다.” 그들은 옛 허물의 때를 벗어버리고 “독수리처럼 새로워진 청춘으로” 그 천상 잔치에 바삐 달려갑니다. 그들은 나아와 거룩한 제단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주님은 내 앞에 상을 차려 주셨도다.”라고 외칩니다. 다윗은 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누여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끌어 주시는도다.”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내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향 기름 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만나를 비처럼 내리시어 그들을 천상의 양식으로 매일 먹이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주께서는 천사들의 빵으로 사람을 먹이셨도다.” 광야에서 그 빵을 먹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신 살아 있는 이 빵은, 즉 여러분이 받는 이 양식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입니다. 이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사막에서 먹은 천사의 빵과 생명을 주는 몸이신 그리스도의 살 - 이 두 양식 중 어느 것이 더 위대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옛적의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왔고 현재의 만나는 하늘보다 더 높은 데서 내려오십니다. 전자는 하늘의 것이었고 후자는 하늘의 주님의 것입니다. 전자는 다음날까지 놓아두면 썩어 버렸고 후자는 온갖 부패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영하는 사람은 누구나 결코 부패를 체험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 조상들에게는 바위에서 물이 흘러 나왔고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 나옵니다. 조상들은 그것을 마시고 나서 목말랐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마실 때 다시는 갈증이 없을 것입니다. 전자는 예표였고 후자는 실재입니다.
여러분이 놀라워 하는 것이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그 그림자의 현실재는 얼마나 더 위대하겠습니까? 조상들에게 일어난 것은 분명히 그림자뿐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은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대부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어서 그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상징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 가치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빛은 그림자보다 낫고 실재는 상징보다 나으며 창조주의 몸은 하늘의 만나보다 낫습니다.
모든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다. <마태 12, 1-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우주의 모든 움직임은 질서를 따라 움직이고 일초도, 일도도 어김없이 우주의 법칙을 따라 움직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도 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생명이 유지됩니다.
우리의 삶도 원칙이 없거나 벗어나면 불편하고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빠져 듭니다. 그런데 모든 법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고 존재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안식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모든 법의 중심에 하느님 계시고, 법은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이 공로를 쌓기 위해 고신극기를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재물이 아니라 자비다.”
우리의 불쌍한 처지를 호소하며 자비를 구합니다. 자비를 받기 위해 주님을 찾고 주님의 자비를 받게 됩니다.
주의 기도 후반부에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 하는 기도는 끝까지 자비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무엇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법을 통해 우리를 불편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법은 사람을 더 행복하게 살리려고 만들어 낸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법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됩니다.
오늘 바리사이는 제자들의 하는 행위에 대해 미움 섞인 말로 말하니 주님은 사람이 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뜻으로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는 것을 보고 자비의 주님은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시며 법의 본질을 깨우쳐주십니다.
수도자들도 수도 규칙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수도 규칙은 수도자가 영적으로 주님을 따라 사는데 길을 내주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지 인간이 하느님 나라에 살기 위해 가져야 할 법입니다. 규칙이 사랑을 거슬리면 규칙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도자는 순명을 원칙으로 하지만 본인의 양심에 장애를 받으면 양심적 호소를 하고 규칙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습니다.
길에서 속도 법칙도 어기고 속도를 규정 이상으로 내는 경우는 소방차 뿐 아니라 경찰차는 속도를 지키지 않고 생명을 구하고 생명에 관계되는 한 속도를 추월해서 운전할 수 있습니다.
공동 기도시간 영광송 할 때 매번 일어나야 하는데 저는 앉아서 영광송을 합니다. 다리에 힘이 없고 갑자기 일어나면 어지러워서입니다. 다만 거짓이 없고 솔직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자살한 사람은 절대 미사도 드리지 못하고 기도도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자살한 사람 위해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합니다. 자살하는 사람은 미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귀한 생명을 버리기까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귀한 목숨을 버리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어느 수도원에 식탐이 많아 먹다가 죽었는데 장례미사를 드리는데 ‘저 수도자 구원 받았을까?’ 하고 의심하며 미사 드리는데 관속에서 “저를 위해 자비를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니 수도자들이 지옥에 가서 그런가 했더니 “저는 지금 천당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실 열 그릇 먹고 싶은 것 한 그릇 덜 먹고 절제하여 하느님 곁에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판단하십니다. 양심에 따라 살기를 기도하고 사람을 위하여 법을 만들어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과
안식일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몸과 마음을
쉬어가는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사람답게
살기위해서는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새로운 일상이
펼쳐집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새롭게
바라보는 날입니다.
사람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길
바라십니다.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의 자비입니다.
안식일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가까운 가족과
형제, 이웃
나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휴식과 축복
사람과 안식일은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을 따뜻이
바라보고
마음을 나누는
은총의 날 되십시오.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가 하나 생각납니다. 친한 친구로부터 훈련이 아주 잘되었다는 사냥개 두 마리를 받았습니다. 사냥을 즐기던 알렉산더 대왕은 너무나 기뻐했지요. 곧바로 이 두 마리의 사냥개를 데리고서 토끼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냥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토끼가 지나가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알렉산더 대왕은 화가 났습니다. 친한 친구가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사냥에 돌아온 뒤에 그 친구를 불러서 호통을 쳤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아무런 필요도 없는 개를 나한테 왜 선물한 것인가? 그대는 내가 우습게 보이는가?”
친구는 알렉산더 대왕의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가 아닙니다. 호랑이나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훈련받은 개입니다.”
호랑이나 사자 등의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너무나 약해보이고 볼품없는 토끼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단순히 토끼 사냥을 못한다고 사냥 자체를 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개 취급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이런 모습을 취할 때가 많지 않았을까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서 그 모습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특히 잘못된 판단에서 나온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줄 때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겉모습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순간의 감정에 취하지도 않고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것을 보고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지요.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 따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두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는 아주 못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의 모든 계명은 바로 자비와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자비와 사랑을 먼저 생각했다면,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를 봤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에 집중했더라면 주님이야말로 안식일 법을 뛰어넘는 진정한 주인이심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다보니 세상에서 아주 못된 분으로 만들게 됩니다.
자비와 사랑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판단을 넘어서 주님의 뜻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어리석은 자는 멀리서 행복을 찾고, 현명한 자는 자신의 발치에서 행복을 키워간다(제임스 오펜하임).
작은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요즘 매일같이 걷기 운동을 합니다. 그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운동을 소홀히 하고, 요즘에는 덥다는 이유로 운동을 소홀히 해서 손쉬운 걷기 운동부터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제 저녁에도 저녁식사를 하고서 운동을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 방에 있었던 복장 그대로 나온 것입니다. 반바지에 짧은 티셔츠 그리고 양말도 신지 않은 상태에 편한 운동화만 신고 나왔습니다. 고민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양말은 신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보통 10,000보를 걷다보니 6Km 이상을 걸어야 하기 때문에 양말을 신지 않으면 힘들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방까지 올라가는 것도 귀찮아서(날이 더우니 판단도 흐려지고 게을러집니다) 그냥 걸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까지도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힘든 상태입니다. 더군다나 신발 안에 모래가 들어있었는데 귀찮다고 그냥 걸었더니 더욱더 발의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양말, 신발 안의 작은 모래. 모두 아주 작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것들도 제대로 운동을 할 수 없게 만들게 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별 것 아닌 것이 내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작은 것도 충실히 해야지.’라는 철저한 마음이 우리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벼랑 끝에서 바치는 기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홀로 괴로워하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우리 이웃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만 갑니다. 참혹한 뉴스를 접할 때 마다 너무나 안타까워 밤잠을 못 이룰 지경입니다. 죄책감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OECD 가입 후 ‘이제 우리도 살만하구나.’했었는데, 자살률, 이혼율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수치는 하늘을 찌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극단적인 선택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옵니다. 그 참혹한 심정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정말이지 하지 말아야 할 선택입니다. 당사자들이야 한 순간의 선택으로 이제 모든 것 끝나버렸겠지만 남은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충격과 고통, 죄책감과 무너져 내리는 가슴은 대체 어찌하란 말입니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의 문화’가 버젓이 우리들 사이로 들어와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분들이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진 낭떠러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서계십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외치던 시편작가의 울부짖음이 남의 말 같지 않습니다. “주님 당신 외에 저를 돌보아 주는 이 아무도 없습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있으나 마나입니다. 오라는 곳도, 의지 할 곳도 없습니다. 바라볼 대상, 희망할 대상, 기대할 대상도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극단적인 선택은 절대 안 됩니다. 삶이 선물이듯 죽음도 선물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의 생명은 축복이고 은총입니다. 나는 내가 원해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 당연히 내 삶에 대한 마지막 정리 역시 그분 손에 맡겨야 합니다. 최종적인 선택은 우리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이 목숨 걸고 지켜야할 우리 교회 불변의 교리입니다.
죽고 싶을만큼 힘겨운 분들, 야고보 사도는 권고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기도는 그냥 기도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한 기도, 목숨을 건 기도, 모든 것을 다 바친 기도를 말합니다.
하느님께 충실했던 성왕(聖王)으로 기억되는 히즈키야 왕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심한 피부질환에 걸려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그를 방문하여 이런 말을 건네고 갔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집안일을 정리하여라.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이사야서 38장 1절)
청천벽력같은 통보에 히즈키야 왕은 대들거나 따지지 않고 즉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기도를 바쳤습니다.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바친 히즈키야 왕의 기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보겠다는 표현입니다. 아무런 분심 없이 하느님과 대화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모든 것 하느님 손에 맡기겠다는 표시입니다.
히즈키야 왕 기도의 특징은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자주 히즈키야 왕은 대성통곡을 터트리며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 바쳤습니다. 이런 기도를 어떻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캄캄하고 깊은 구렁 속에서도 계속해서 하느님을 향해 온몸으로 외치고 부르짖다보면, 다시 말해서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한 가지 특별한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거짓말처럼 하느님께서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오십니다. 울먹이며 흔들리는 내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려주시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잔잔한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저앉아있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고, 힘겹겠지만 한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보라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더 이상 길이 없다고 말하는 그 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러니 적당히가 아니라 온몸을 바쳐 기도해보십시오. 사랑의 하느님께서 반드시 다른 문 하나를 열어주실 것입니다.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며 주저앉아 계시는 분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거기 사랑의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새로운 길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났다는 증거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말에서 나옵니다. 맹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와 처음 살았던 곳은 공동묘지 근처입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친구들과 놀더니 점점 곡하는 것을 따라하고, 장사(葬事)지내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맹모는 공동묘지 인근에서 시장으로 집을 옮겼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놓인 어린 맹자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시장에서 흥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친구들과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흉내를 내며 놀게 되었습니다. 맹모는 다시 이사를 하는데, 이번에는 서당 근처였습니다. 맹자는 새로 만난 친구들과 책을 넘기고 놀거나, 절하기 등의 예법을 따라하며 놀았습니다.
이 예화는 맹모가 주변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육을 위해서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으로 주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일부는 맹자의 어머니가 삶과 죽음, 그리고 실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라는 큰 의미의 공부(工夫)를 먼저 시작한 후에 책을 읽는 공부에 들어가게 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공부에 아이의 의지가 중요할까요, 환경이 중요할까요?
의지가 아무리 약해도 공부해야만 하는 환경이 주어지면 어느 정도는 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는 것입니다. 다 공부하는데 자신만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느낌 때문에 집에서보다 공부가 더 잘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망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 공부를 하고 싶은 의지와 하기 싫은 의지가 싸우는데, 하고 싶은 의지를 더 성장시켜 줄 환경이 있고 하기 싫은 의지를 성장시켜주는 환경이 있을 뿐입니다.
맹모삼천지교와 함께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비슷한 말로는 화북에 심으면 탱자가 되고 화남에 심으면 귤이 된다는 의미의 귤화위지(橘化爲枳)가 있습니다. 좋은 학군이 있는 쪽의 집값이 비싼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심겨진 환경이 나를 만듭니다.
그런데 환경 중의 가장 중요한 환경은 무엇일까요?
‘사람’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가까운 것일수록 더 잘 따라합니다. 나무와 개가 함께 있다면 사람은 나무보다 개를 더 따라합니다. 공동묘지나 시장이나 서당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맹자는 그 어떤 놀이도 즐겁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공동묘지에서 사람이 장사지내는 것을 보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서당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을 보고 따라하게 된 것입니다. 행복하려면 행복한 사람들 가운데로 가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바꾸는 ‘진짜 환경’은 바로 우리 주의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를 만나기를 선택하느냐가 내가 누가 되기를 선택하느냐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신 것은 홀로 계시려는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와만 함께 계시기 위해 광야라는 환경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히즈키야 왕이 나옵니다.
그는 선친과 다르게 이방 민족과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하느님을 신뢰하며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병들어 죽게 생긴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사야를 보내시어 죽게 될 것이니 준비를 하라고 시킵니다. 그가 죽게 된 것 때문에 울자 하느님은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15년이란 시간을 더 주십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그를 치료해 주십니다. 히즈키야 왕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느님은 태양을 뒤로 돌려 그의 부친 아하즈의 해시계를 열 칸 뒤로 돌려주겠다고 하십니다. 태양을 뒤로 돌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데 열 칸에서 열은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15년을 더 살게 되는 것도 자신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하느님만이 해 주실 수 있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아하즈의 해시계’일까요?
히즈키야 왕의 선친 아하즈는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었던 인물입니다. 아시리아는 이방민족입니다. 아하즈가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었다는 말은 자신의 환경을 하느님이 아니라 사탄의 손에 넘겼다는 말입니다.
그는 사탄과 동맹을 맺어 이웃사랑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하지만 히즈키야에게는 당신 은총으로 그의 마음 안에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솟아나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도 용서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기도를 통해 용서하게 되었다면 그것이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가장 큰 징표가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누군가에게 그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정원 씨는 자신의 일가족을 죽인 유영철을 용서하였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정원 씨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밤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 날은 5분 정도 미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기도의 힘을 믿었고 그러면서 하느님의 존재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1년 전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용서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면, 아무도 미워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런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환경이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 나의 사랑이 증가하고 있다면 그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면서 미워하는 사람을 계속 미워한다면 사실 그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중에 실제로는 악의 세력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배를 흐르는 물 위에 띄우면 떠내려가는 것이 당연하듯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만나면 변하게 됩니다. 내 변화의 흐름이 내가 만나는 분이 빛이신지 어둠인지 분별하게 해 줍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소국장 모임이 있었습니다. 회의 전에 친교의 시간을 갖습니다.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준비해서 이야기합니다. 회의 시간에는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합니다. 교구의 어려움, 성소국의 고충을 이야기합니다. 친교의 시간에는 가벼운 이야기를 합니다. 선, 후배의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합니다. 교구에 오면 맛집을 소개하겠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삼국사기가 있어서 삼국의 역사를 알 수 있지만, 삼국유사가 있어서 삼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 수 있습니다. 성소국장 모임도 공적인 회의가 있어서 자료를 남기지만, 친교의 모임도 있어서 서로 연대하고,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친교의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매년 교구로 찾아가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제주에서 있었고, 올해는 전주에서 있었고, 내년에는 대전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강물이 어는 겨울에도 어느 한 곳에는 숨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공기가 통하고, 그래야 물고기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이기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긴급조치가 있었고, 유신헌법이 있었고,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외롭고 지친 사람들이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공권력을 피해서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인권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절에 숨구멍과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명동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학생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힘없던 노동자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찾아오던 곳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학생들을 잡아가려거든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뒤에는 사제들이 있고, 그 뒤에는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숨구멍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눈먼 이는 뜨게 해 주셨고, 듣지 못하는 이는 듣게 해 주셨고, 나병 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돌아온 아들은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목자의 헌신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셨습니다.
율법과 안식일은 지켜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내재한 악한 습성을 고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쟁과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 일하지 않았던 게으름을 탓하기 전에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지금 헐벗은 사람에게 부모의 말을 듣지 않았던 어리석음을 탓하기 전에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이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의 것에 취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 잘못을 탓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정자들은 더욱 정직해야 하고, 더욱 겸손해야 하고, 더욱 청렴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군대에 가야 하는데 편법으로 가지 않는 사람, 세금을 내야 하는데 불법으로 내지 않는 사람은 군대에 가야 하고, 세금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의 가식과 위선을 탓하셨습니다. 그들의 교만과 독선을 탓하셨습니다.
저는 첫 번째 본당 신부님을 자상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에게는 안 되는 것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랬습니다. 다만 한 가지 본인에게는 무척 엄격하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기도하셨습니다. 신자들이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재물에 대해서 청렴하셨습니다.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두 번째 본당 신부님은 엄격하고 원칙적이셨습니다. 박사학위도 3개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은 곧 법이었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본당의 모든 단체는 질서를 잘 지켰습니다. 본당의 모든 시설물도 관리가 잘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생활이 시계추와 같으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존경하였지만, 신부님께서 엄하셨기 때문에 무척 어려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들었습니다. 법과 원칙은 만인에게 평등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것만 잘 지켜져도 우리 사회는 발전하고, 모든 이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법과 원칙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엄격하지만, 상대방에게는 관대한 법 적용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인 것은 더 많은 자비를 베풀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자선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15주 금요일
복음: 마태 12,1-8: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안식일이란 창조주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안식일도 그 깊은 의미를 보면,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 즉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그래서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뿐 아니라, 점점 자기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지금은 더구나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절).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절)라고 한다. 이 주장을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물리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 했는지 묻고는 사제들과 레위 지파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 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제물은 바로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이러한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8절)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신,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래서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병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병자 성사를 다니다보면, 정말 희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많이 아프신 분들을 만납니다.
예를 들면 말기 암에 걸리신 분들이나 치매에 걸리신 할머니, 그리고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형제님들을 만납니다.
최근에는 병자성사를 주러 응급실에 갔는데, 3살짜리 여자 아이가 누워 있었습니다.
너무 귀엽고 예쁜 아이였는데, 의식이 없었습니다.
3층에서 떨어져서 머리를 다쳤다고 하는데,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함께 모인 신자들도 ‘너무 귀엽고 어린 아이인데...’ 하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아마 누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마음이 많이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함께 모인 신자들과 마음을 모아 기도를 하고 병자 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돌아왔는데, 마음이 편치 않아서 아이를 위해서 묵주기도를 바치고, 성당에 앉아 있다가 사제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 함께 갔던 자매님이 그 아이의 소식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의식이 깨어나고 말도 하더랍니다.
지금은 더 많이 회복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들었습니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기도, 미사 중에 저와 신자들이 기억해 준 기도가 헛되지 않고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한다고 모두가 회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지만 돌아가셔서 장례미사 때 다시 보게 되는 분도 계시고, 기도하지만 아직도 고통 중에 괴로워하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면 그분들에게는 기도와 병자 성사가 아무 소용이 없었던 걸까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도 보았다."
주님께서는 아픔 중에 있는 병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의 눈물을 보며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병자성사와 기도는 환자에게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곧 주님께서 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한 깨달음, 곧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깨달음은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고, 나의 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믿음으로 견뎌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원인 모를 아픔과 불치병에서 올 수 있는 원망과 분노를 주님께 쏟아놓는 것이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병을 견뎌내고, 내 힘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죽음의 두려움을 믿음으로 견뎌내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을 느끼고, 믿음으로 견뎌낸다 하더라도 투병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우리들의 기도가 더 많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내가 아는 병자들을 위해서 마음을 다해 기도해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우리 성당에 형제님들은 대부분 키가 작으신 거 같다.
가끔 키 얘기가 나오면 늘 하시는 이야기가 있다.
“그 때는 내 키가 평균 키였어~”
<사랑, 참 쉽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7. 20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이에게
쉬어야 하는 날
안 쉰다고 나무라지 않고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사랑, 참 쉽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 -사랑이 답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무더위가 한창입니다. 이런 무더위중에도 곳곳에서 산책중 발견되는 말없이 피어나는 나리꽃, 백합꽃, 능소화꽃, 달맞이꽃, 메꽃 등 이런저런 꽃들이 참 아름답고 청초해 보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사랑은 세상 곳곳에서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어제 써놓은 짧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어디에나/때되면/피어나는 꽃들
“참되다/좋다/아름답다
말그대로 진선미眞善美다”
더/무엇을/바라겠는가
임이/봐주시고/알아주시는 데-
흡사 누가 알아주든 말든 하느님이 봐주시고 알아주시기에 자기 일에 충실한 성인들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히즈기야 임금의 경우가 이와 일치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사랑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중병의 치유가 아닌 살아 온 삶을 봐주십사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히즈키야는 하느님 앞에 얼마나 당당하고 의연한 삶을 살아왔는지요. 온전히 하느님 처분에 맡기는 히즈키야의 신뢰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임종 전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지요. 두려움 없이 모두를 하느님께 맡기고 선종의 죽음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깊은 평화와 안정은 물론 분별의 지혜도 선사받습니다. 하느님은 이사야를 통해 즉시 응답하십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해를 더해 주겠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오늘로서 제1독서 이사야서는 끝납니다만, 마지막으로 히즈키야 임금이 아름답게 대미를 장식합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생략됐지만 즉시 이어지는 하즈키야의 하느님 찬미가(이사38,9-20)의 응답입니다. 하느님 찬미가를 통해 다시 입증되는 히즈키야의 하느님 사랑과 신뢰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의 진위는 이웃 사랑으로 판별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저절로 샘솟는 사랑의 용기요, 전체를 넓고 깊이 바라보는 ‘하느님은 눈’도 지닙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눈은 그대로 하느님의 눈이요, 예수님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제의 묵상을 나누고 싶습니다.
예전 왜관수도원 아빠스님에 대한 일화입니다. 모두가 아빠스님의 이면을 칭송합니다. 수도공동체의 연로한 분들과 병자들을 사랑의 관심으로 늘 잘 보살피셨다는 것입니다. 잘 들여다 보면 약하고 아픈 형제들은 공동체의 중심임을 깨닫습니다. 예전 그 아빠스님의 말씀중 생각나는 말마디입니다.
“나는 아침마다 병실에 계신 연로한 분들을 찾아 조배하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공동체는 하나의 몸과 같고, 장상의 역할은 몸의 영혼과도 같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누구나 체험하게 되는 아프고 약해지는 몸의 각부분들입니다. ‘젊을 때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病魔와 싸운다’는 말을 요즘 조금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몸전체를 돌보고 하나로 모으는 영혼의 역할이 참 중요하다는 확신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영혼을 튼튼히, 부지런히 하는데 사랑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나이들어 갈수록 영혼은 하느님 사랑으로 더욱 튼튼해지고 부지런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영혼이 약해져 육신을 잘 통솔하지 못하면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는 육신을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영혼이 하느님 중심이 확고하여 튼튼할 때 육신도 영혼에 순종합니다.
이렇듯 공동체의 장상 역할과 몸의 영혼의 역할은 흡사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당신의 약한 제자들을 두둔하고 변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법, 율법의 잣대로 밀이삭을 뜯어 먹는 예수님 제자들을 단죄하는 반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픈 현실을 직시하여 사랑의 잣대로 분별하시며, 다윗과 그 일행들, 성전의 사제들, 그리고 신명기를 인용하며 이들을 적극적으로 두둔하시고 변호하십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죄이지만 사랑의 잣대로는 무죄입니다. 복음의 결론과도 같은 말씀이 분별의 잣대는 사랑임을 웅변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참 용기있고 멋있는 예수님의 처신입니다. 바로 애오라지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에서 나온 용기요 멋있는 삶에 분별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사랑이 없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했던 어리석은 경우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람 눈에 죄인이지 하느님 사랑의 눈에는 무죄한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약하고 아픈 형제들은 하느님이 공동체에 맡겨주신 사랑의 선물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 삶의 중심에, 공동체의 중심에 늘 현존해 계신 성전보다 더 크신, 안식일의 주인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법을 상대화 시키는 절대적 법은 사랑의 법뿐이요,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신 예수님 자신이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예수님 마음으로, 예수님 사랑으로 분별하면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공동체의 영혼’으로 ‘각자의 영혼’으로 오시는 사랑의 주님은 당신 사랑과 하나된 우리 모두의 병과 아픔을 치유해주시며 분별의 사랑과 지혜도 선사하십니다. 아멘.
모든 법의 창시자.<마태,12/1-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법은 안정과 질서유지를 위하여 만들어진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유지하는데 절대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 우주를 일정한 질서를 따라 창조하시고 움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뜻은 바로 하느님의 법을 만들어 우리가 세상을 더 아름답고 거룩하게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유주의 질서를 유지하려 시간 공간의 따라 조금 다르게 적용됩니다.
오늘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은 제자들이 안식 법을 범하였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에게 구약의 예를 따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규칙에도 예외 사항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수도원은 금요일과 수요일 금육을 합니다. 그런 관례를 그날이 크 축일이면 금육을 해제하고 고기를 먹습니다.
법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함같이 사랑을 어기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공산당은 일정한 법이 없이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이 법이여서 한사람의 생각과 말에 의하여 그의 법대로 움직입니다.
독재자의 법은 사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읮에 의하여 움직이고 법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큰 혼란과 무질서를 느끼게 합니다.
법에는 경중하가 있습니다. 쉽게 용서 할 수 있는 죄가 있고 엄하게 다루어야 할 죄가 있습니다. 제일 중용한 죄는 인간의 생명의 관한 죄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아이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법을 조종하여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서로 종칠을 하면서 죽이려고 하다가 총상을 입고 죽음에 고통에 있는 사람은 적십자 법에 의하여 병원으로 이송하여 병을 돌보아야 합니다.
법 중에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새로운 계명인 사랑을 어기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주님은 안식의 주인이다 하시며
사랑을 앞세웠습니다.
가끔 우리는 가돌맄 교회는 규제가 너무나 많아 따라기기에 힘들어 시아을 소흘리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 안에 사랑으로 넘치면 그 규제의 멍에는 온유하고 겸손하게 지켜가야 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주인이시고 모든 율법의 주관자이신 주님의 법을 사랑으로 지켜나가고 사랑으로 법을 다스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주님이 주신 온유함과 겸손함을 몸에 배도록 살아갈 때 법이 짐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길에 평화와 기쁨을 주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더 행복한 삶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성녀 원귀임 마리아 순교 기념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시몬 부제님 강론
독서 : 지혜 3,1-9 / 로마 8,31ㄴ-39/ 복음 : 루카 9,23-26
오늘은 성녀 원귀임 마리아 순교 기념일입니다. 1839년 7월 20일, 180년 전 바로 오늘 성녀께서 서소문 밖에서 순교 하셨습니다.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감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순교, 성인과 같이 대단한 사건이나 사람들에 대하여 들으면 우리는 나도 모르게 ‘우와’하고 생각하면서 몸을 살며시 뒤로 뺍니다. 그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하기는 힘들다는 암묵적인 표현이죠.
그런데 오늘날에도 실제로 박해가 일어나고 있으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17년 이탈리아 종교 연구소에 따르면, 연간 9만 명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다고 발표했습니다. 박해와 순교는 그저 과거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사건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는 성체 모독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체를 부정하고 직접적으로 훼손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뿐 아니라, 종교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온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요즘처럼 신앙의 증거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상황이 저에게는 신앙심을 굳건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왜 아직도 고통을 받으셔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하고, ‘난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되돌아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지녀야 하는 마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의인들이 사람들의 눈에는 비록 죽은 것처럼 보이고, 벌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대우를 받겠지만, 평화를 누리며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의인의 상황은 어려운 듯 보이지만, 현재 부제로 살아가고 있는 제 입장을 보면, 저는 신자들에게 좋은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또 밖의 제 친구들은 월급이 밀리지 않고, 대우받으며, 당장 집걱정 하지 않아도 되는 신부를 부러워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복음의 가치인 가난을 이야기 하는 것에서 한계를 느낍니다. 내가 가난하지 않는데 어떻게 가난한 사람의 어려움을 알 수 있나하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오늘날 가난한 이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가난한 이에게 다가가려는 준비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제2독서에서 나오듯 그 무엇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로마 8,39)기 때문입니다. 저 비록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기 부족할지는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이런 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심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제게 있어 순교입니다. 잠시 묵상 중에 나 자신에게 순교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부정은 긍정을 위한 것이여야 합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마태오12,1)
허기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낟알을 까먹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트집을 잡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정말 율법에 나온 조항을 어겼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을까요?
과연, 몇 퍼센트의 바리사이들이 613개의 율법 조항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고 있었을까요?
어느 누가 미워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미워집니다.
그가 잘했던 못했던 모든 것이 미워집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지닌 또 하나의 약함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이 싫었던 것입니다.
낟알 몇 움큼이 없어지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더욱이 율법 조항에 어긋나는 듯 한 일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싫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 걸맞은 논리를 찾으려 합니다.
대부분 빈약한 논리들입니다.
안식일이라는 틀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는 듯한 논리입니다.
사람이 돈을 위해 있는 듯한 논리입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된 일을 비판해야 합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위한 부정이어야만 합니다.
율법 조항 613개가 많다고 하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의식할 수조차 없는 수없이 많은 복잡한 법과 규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모든 법과 규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를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모든 생명체와 자연이 그 존재 이유에 맞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모든 도리의 기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2013)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사람이 환하게
되살아납니다.
언제나
더 중요하고
더 소중한 것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단죄와
통제의 날이 아닌
사람이 자랑스러워지는
사람의 날입니다.
내 앞에 있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목숨을 위해
좋은 일을 올자르게
실천하는 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안식일이
자비의 실천을
멈추게 할 순 없습니다.
이기적이고
오만한 마음을
내려놓는 안식일이
되어야합니다.
안식일은
목마르고
배 고픈 이들이
더 이상 목 마르지 않고
더 이상 배 고프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제가
되어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사랑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이끌어 가시는 분은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임을
기억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 사랑에
순명하는 것이
안식일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랑의 멋진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저를 당황스럽게 했던 사건 하나가 생각납니다. 이 모임에 참석은 했지만 아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멀뚱하게 서 있었지요. 정말로 이 자리를 얼른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다행히 저를 알아보는 분이 다가오셔서 다른 분들 소개도 받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분들과의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이 주로 경영 쪽에 계시는 분이라서 저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를 보셨는지 한 분이 “신부님께서는 이런 이야기가 생소하시죠? 죄송합니다. 우리 다른 이야기를 나눌까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 가만히 있었으면 다른 이야기를 했을 텐데, 이분의 대화를 제가 끊은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관심 있는 부분이라 경청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는 척도 하고 가끔 고개도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무슨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냥 지나가는 말로 했던 것뿐인데, 이분들은 정말 관심이 있는 줄로 아시고 계속해서 경영에 관한 말씀을 나누십니다. 뭐 아는 것이 있어야 질문도 할 텐데, 아는 내용이 하나도 없으니 그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뭘 물어본다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고, 당연히 저의 무지가 들통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상황이 우리 삶 안에서 너무나 자주 일어났었고, 그래서 매번 후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밀 이삭을 뜯어 먹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밀 이삭을 뜯어서 먹는 것이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너무 억지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제사 빵을 먹은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이 빵은 사제나 레위인만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따라서 다윗은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사제 아히멜렉은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사람을 돕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제사 빵을 먹은 사건을 바리사이들이 모를 리가 없었지요. 즉, 율법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확대 해석해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말합니다. 밀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한 것이고, 먹기 위해 비볐으니 타작의 노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트집을 잡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고, 그 결과 주님의 뜻과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기만 옳다는 억지를 부르면서 거짓과 오류의 길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했던 제자들만이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명언: 기쁨과 슬픔 그 어느 하나라도 부정한다면 삶을 부정하는 것. 그렇기에 기쁨과 슬픔 모두에게 조용히 대답한다. “네.”라고(주디 브라운).
자극이 되는 말
지금 갑곶성지에서는 전국 성지전담사제 회의를 하고 있습니다. 제 소개를 하고 난 후에 몇몇 신부님께서 “빠다킹신부님이 신부님이셨군요.”라면서 아주 반가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한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신부님 글이 예전 같지 않아요. 예전에는 참 재미있었는데…….”
저에게 자극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솔직히 16년째 새벽 묵상 글을 써 오면서 약간의 타성에 젖었던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어떤 간절함을 간직하지 못한 채, 그냥 단순히 의무적인 마음으로 매일 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극이 되는 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자극이 되는 말을 들을 때는 어떨까요? 그리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분명히 가장 큰 힘이 되는 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듣는 말에 대해 부정하고 거부하기 보다는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어 주는 말이라고 굳게 믿어보면 어떨까요? 어떤 말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핵심주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헛똑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이 배워 박학다식해보이지만 그 배운 바가 별로 쓸 데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스스로 현자(賢者)라고 생각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지만 배운 바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옵니다. 많은 말을 하지만 사리에 맞지 않거나 일상생활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궤변들입니다. 오히려 엉뚱한 말들로 인해 사람들을 혼동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잘 배우는 것입니다. 또한 배운 바에 멈추지 않고 진일보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성찰하고 사유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배운 바를 내 삶과 연결시키고, 보다 나은 세상의 건설을 위해 사용하는 일입니다.
배움이나 깨우침의 방향, 핵심, 질(質) 역시 아주 중요합니다. 백화점 쇼윈도에 진열된 잡다한 상품처럼 이것 저 것 다 배울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생에 있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우선적으로 배워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배움의 핵심주제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겠지요. 가장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 주제를 외면하고 더 나아가서 무시까지 합니다.
언젠가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우리가 직면하게 될 또 다른 세상에 관련된 주제입니다. 유한한 이 육체가 소멸되면 맞이하게 될 또 다른 형태의 삶에 관련된 주제. 결국 영원한 생명과 구원이라는 주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세상사는 동안 가장 소중히 여기고 마음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야하는 주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인간 세상으로 육화강생 하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진리. 그분께서는 이 세상과 우리 인간 각자 안에 현존하시면서 우리 인생길을 보살펴주신다는 진리. 그분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진리. 과분하게도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를 끔찍이도 사랑하신다는 진리.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진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너무나 엄청난 진리여서 그런지 자만으로 가득 찬 헛똑똑이들은 이토록 은혜로운 진리를 수용하거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순수한 시선, 겸손한 태도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헛똑똑이들이 괜한 헛심을 빼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그들과 맺고 있는 관계 안에서의 보람과 기쁨인데, 관계 다 망치고 점수 다 깎아먹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가족이요 친구, 건강이요, 자신 돌보기인데, 이런 소중한 것들을 완전 무시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세상 속절없이 사라지고 더 큰 세상, 더 의미 있는 세상, 참된 의미의 세상이 다가올 텐데, 그런 거짓말 하지마라, 그런 세상은 없다며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크신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가장 우선적인 가치와 중요성을 부여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주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변두리에 계신 주님을 사랑으로 모시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유대인들은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율법을 중요시했습니다. 안식일에 관한 유다 율법은 매우 엄격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 왕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울 때 사제 아히멜렉에게 음식을 구걸하자 달리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던 사제는 성소의 제사떡을 다윗 일행에게 내어준 일화를 들어 가르치십니다. 존엄한 인간의 생명과 그 인간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율법에 앞서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이 희생제사가 아닌 자비임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렇다고 결코 희생제사 의식을 단죄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율법과 희생제사는 우리를 하느님과 보다 가까이 맺어주기 위한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보다 더 인간다워지고 하느님을 닮을 수 있어야 함을 바라신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는 우리가 진정 지녀야 할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임을 알려줍니다. 히즈키야 왕은 범한 죄 때문에 죽어 마땅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엄격한 정의를 적용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왕의 열렬한 기도를 들어주시어 마음을 누그러뜨리시고 그가 살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율법의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자신의 잣대와 편견으로 판단하고 인간을 도외시한 채 문자화된 율법 규정을 지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랑의 혼을 지니는 것입니다. 세라핌 박사 보나벤투라 성인은 말합니다.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알려고 하지 마라.”(Non voglio conoscerti, se non per amarti.) ‘사랑의 일차성’을 강조했던 이 성인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오늘날 이타적 사랑과 사랑에 기초한 인간 존중을 소홀히 여기는 가치 기준의 혼란은 악을 조장하고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영신 생활에 있어서도 살아가는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정한 규칙과 목표를 어김없이 지키면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하느님을 자신의 틀 안에 가두고, 예수님을 변두리로 내몰아버릴 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곧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오신 사랑 자체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나 자신의 영성생활은 물론이요 가정과 사회생활의 기준과 목표가 되고 한없이 자유롭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의 제도나 각종 법규들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은 하느님 사랑에 바탕을 둔 인간의 존엄성을 살려나가기 위한 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음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바로 그 사랑을 망각한 채 자기만족이나 자신이 세운 목표에 집착해서 살아간다면 존엄한 인간성도 나의 존재이유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사랑의 혼을 잃지 않고, 형식적인 규범과 제도의 준수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도록 했으면 합니다. 변두리에서 떨고 계신 예수님을 나를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내 마음 한복판에, 우리 가정의 안방에, 나의 일터에, 만나는 사람들 한 가운데에 모셔오도록 합시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결코 율법이 분별의 잣대가 아닙니다. 아니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보다는 연민(compassion)이, 자비(mercy)가 더 깊어 좋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사랑은 상식에 기초합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사랑은 책임감입니다. 제가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순례를 완성할 수 있음도 책임감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만민 보편언어입니다. 어디에서나 다 통하는 만민보편언어가 사랑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호세아 예언자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예수님이나 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나 이런 하느님의 자비를 고스란히 닮으셨던 분입니다. 역시 어제 고향순례의 마지막 여정을 잠시 나누면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제 고향에 인근에 있는 유명한 두 곳을 순례함으로 순례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우선 단군이래 최고의 천재이자 명필인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을 순례했습니다. 비록 가톨릭은 아니더라도 그 깨달음의 깊이는 관상의 정점에 도달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몇 깨달음의 단편들입니다.
“세상에서 두 가지 큰 일은 밭갈고 독서하는 일이다.”
“한나절은 정좌하고 한나절은 책읽고.”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늙어서도 특이한 글자를 보면 눈이 맑아진다.”
“멀리서 훌륭한 선비의 소문을 들으면 금방 마음을 터놓게 되고,”
몇 인상적인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분의 깊은 깨달음의 편린들입니다. 충남 예산 신암면의 추사 김정희의 고택에 이어 당진 송산 솔뫼에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생가를 순례했습니다. 목사님인 사촌형님이 저를 배려한 사랑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를 순례함으로 이번 1박2일의 휴가는 성지순례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촌 목사 형님은 저와 함께 미사에도 참석했습니다.
새삼 가톨릭교회는 말뜻 그대로 보편적인 종교요 가톨릭 신심이 깊어짐에 따라 자비의 ‘보편인(universal man)’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떠나 올 때 목사 형님은 예산에서 산 짠지를 수사님들과 반찬을 하라며 선물했고, 또 한 형님은 약값에 보태 쓰라고 성금誠金도 주었습니다. 이 또한 종파를 초월한 하느님 자비의 표현입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히즈키야의 통곡의 기도가 하느님의 자비에 닿았습니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자비로운 주님은 즉시 당신 자비를 닮은 이사야를 통해 히즈키야에게 응답하십니다.
“너의 조상 다윗의 하느님인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이사야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로운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일화입니다.
이어 복음의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서도 하느님의 자비는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직시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제자들의 배고픈 현실이었습니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옛 모 대선후보의 모토와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전적으로 변호, 두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정작 큰 죄는 무자비한 언행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잊을 때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는 죄를 짓게 마련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은 사랑의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라는 말입니다. 자비하신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하셨을까 잘 생각하면 처방의 답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치유의 구원을 베푸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아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히즈키야 왕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전달하게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히즈키야 왕은 그저 슬피 통곡하면서 자신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만 해 온 것을 기억해 달라고만 기도합니다. 화를 내지 않습니다. 왜 자신이 이렇게 빨리 죽어야 하는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생명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어떤 처분에도 고분고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종의 자세입니다.
이 모습에 주님을 마음을 바꾸시고 15년을 더 살게 해 주시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까지 벗어나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자신의 힘을 뺀 사람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무화과 과자를 종기 위해 바르게 시키십니다. 아주 쉬운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이 걸려 있는 일이지문 생명의 주인께는 아무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표징을 보여 달라는 히즈키야를 위해서 아하즈의 해시계의 그림자를 열 칸 뒤로 돌려놓으십니다. 스스로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지만 실제로 인간은 자신의 수명을 단 1분도 늘이지 못합니다. 그때가 돼서야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해시계까지도, 즉 시간까지도 당신이 주관하시는 분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주인이 시간을 마음대로 돌려놓았다고 하여 인간이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주인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법에 지배받지 않습니다. 개의 주인이 개의 밥을 하루에 세 번 주어야 하는 법을 만들어놓고는 그것을 어기면 감옥에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남의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죄 없는 이들”로 정의했다면 그들은 죄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고 남의 것에 손을 대는 행위인데도 예수님께서 죄 없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법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해적선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해적질을 한 것이고, 해적선을 잡는 국가에서 파견한 배에 탔다면 그냥 승선해 있는 것만으로도 애국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법을 제정하시는 분 안에 머문다면 그분의 뜻 안에서는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여 바치라고 할 때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치켜드는 것도, 물속에 이집트 군대를 매몰시키기 위해 바다 위로 손을 뻗은 모세의 행위도 모두 세상눈에는 살인으로 보이지만 주님의 뜻 안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선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처럼 주님 앞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했다고 자랑을 하여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죄 중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죄 중에 머무는 이들 특징은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어서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도 이미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따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나서는 하느님과 자신과 이웃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심판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성전보다 더 큰 분이시기 때문에 “사제는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면 모든 행위가 선한 행위가 되는데 그 법이 이전의 마음을 차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들의 주님이 되십니다. 당신을 모시는 이들이 곧 성전이요, 안식일이며, 교회입니다. 그분의 통치가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성전이 죄를 지을 수 없고, 안식일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전이고 안식일이며 우리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경지가 되면 공자가 일흔 살이 되면 “마음에 하고자 하는 일을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으니라”라고 하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단계에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법은 곧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주님께서 다스리시니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주님께서 쉬시니 안식일이 되는 것이며 주님을 모시고 있으니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그분의 사랑의 법대로만 살아간다면 절대 법도에서 어긋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근본을 잊지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 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잊고 삽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 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 중요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을 우선시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관대 하고 소위 힘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겠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 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시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포함하여 용서, 그리고 가지치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찾으면서 기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그것은 성사에 다가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체성사, 고해성사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이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것을 행하는 것을 뜻하고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은 ‘무덤에 묻어버릴 때’, 예를 들어서 그들에 대해서 나쁘게 말할 때, 뒤에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것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런 거짓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이에게 있을 수 있는 이 더러운 짓으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 때 우리는 죽음의 가지들이 되고 그분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이 하셨던 것과 같은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돕는 것,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것,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성령의 기쁨을 간직하는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오스티아 평화의 모후 성당, 2015, 5 3).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이사 38.5)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저희 작은형제회의 훌륭한 성인 보나벤투라의 축일입니다.
수도회가 여러가지 내외적 위기에 봉착했읊 때 그의 탁월한 덕행과 지혜로 수도회를 구하여서 제2의 창설자라 불리는 분이십니다.
또한 교회의 개혁과 쇄신을 위해 리용 공의회 준비위원장으로 일하시다 공의회 회기 중에 돌아가신 교회의 큰일꾼이셨습니다.
그는 어릴 때 건강이 아주 안 좋았었는데 어머니가 눈물어린 기도 중에 성 프란치스코가 "좋은 일이 있을지어다"(Bona ventura!) 걱정마라고 격려하고 아이를 축복해 주었답니다.
그래서인지 정말 건강도 회복하였고 수도회와 교회를 위한 큰일꾼이 되었답니다.
오늘 내 주위에 여러가지 이유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우리도 그를 위해 "보나벤투라!" 하며 격려하고 축복해 주면 어떨까요?
보나벤투라 성인의 전구로 정말 "좋은 일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Bona ventura!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오늘만이라도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인 까닭입니다.
희생제물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제 자신이 바로
진정한 제물인 까닭입니다.
제 자신이
흠 없는 제물,
사랑의 제물 되게 하소서. 아멘.
생명의 소중함<마태, 12/1-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이 자기 생명을 보존할 의무가 있습니다. 생명을 보존 하려면 마시고 숨쉬고 먹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는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합니다. 주님은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시며 각자의 생명의 소중함을 들어내십니다.
어제 저녁 특별 스페셜 시간 베이비박스 이야기를 보면서 눈물을 흐리며 암담한 현실을 보았습니다. 한 달에 25명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그 중에 부보를 찾아 주는 경우 5명정도 보모가 나타나도 먹여 살릴 능력이 없어 다시 버려진다는 이야기와 갓 낳은 아기는 입에 손을 대고 먹을 것을 찾는 광경은 무책임한 사람들 더 놀란 것은 13살 어머니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을 너무나 모르고 버리는 사람들 그래도 그런 아이들을 거두어 들이는 기관의 봉사자들과 지도자들을 높이 칭찬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작은 뉴스에 필리핀에서 마약 사법을 새 대통령되고 100명이나 사형시킨 뉴스는 나를 또 놀라게 하였습니다. 쉽게 돈을 벌려는 사람과 권력을 기진 사람들과의 사이에 어떤 함수 관계가 있을까? 권력이 인간의 어떤 욕망을 제어 할 수 있을까? 모순과 괴리로 연속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과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문제는 자비에 있습니다.
교육의 부재로 청소년들이 성의 남용으로 책임 못질 아이를 낳고 어른들이 그 철없는 청소년들의 저질은 일을 합당하게 처리 못하고 방임하거나 환경을 개선하지 못하거나 자비심이 없으면 생명은 경시되고 문제는 남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작은 일을 보고 바리사이는 과대평가를 하며 “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 고 하며 비난하는 사람의 마음은 자비심이 없어서입니다.
저는 오늘 하느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것처럼 모두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 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안식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저마다를
안식일로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향한
비난을 멈추고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안식일을 통해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수정하게 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안에서
안식일을 만나게
하십니다.
안식일의 참된
길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안식일이라는
새 삶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안식일이 있어야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본질적인 삶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가장 고귀한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는데 언제나
수시로 변하는 건
우리의 마음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안식일의 기쁨은
단순함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가장 좋으신
사람의 아들과 함께
사랑의 길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의미있는
안식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람의 영혼을
기쁘게하는
안식일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안식일의 본질은
사람의 아들처럼
진실된 관계를 맺는
사랑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변화와 성화로
우리를 이끌고
계심을 믿습니다.
독일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계획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945년 4월 9일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 집행을 위해 간수가 “수감자 본회퍼, 준비하고 떠나자!”라고 말했을 때 본회퍼는 감방에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이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고 실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 시작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세상의 기준보다는 주님께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잠시의 만족만을 원한 것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삶을 아쉬워하고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세상에 대한 불안감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만이 최고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서 바리사이들이 난리가 났지요.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일하신 뒤에 쉬셨으므로 우리도 쉬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쉰다는 것을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안식일 법을 지켜야 한다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병자들을 보고서도 외면하는 당시의 사람들의 모습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모습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치 안식일을 폐지하러 온 사람처럼 비쳐졌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율법을 폐지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찬양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단순히 쉬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쉬게 하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을 제1원칙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누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까? 바로 인간을 위한 사랑 때문에 제정하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항상 일순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식일 법을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 정도로만 생각하고,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단죄하려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이 무시되고 대신 덜 중요한 원칙만이 최고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바로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며, 사람을 향한 사랑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원칙이었으며, 이를 통해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원칙이 될 것입니다.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에 그대는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것이다(톨스토이).
용서하는 용기(차동엽, '뿌리 깊은 희망' 중에서)
야망이 있는 한 젊은 회사원이 자기 회사에서 수억 원의 공금을 빼돌려 달아날 준비를 마쳤다. 다행히 이런 사실은 곧 적발되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냐는 사장의 질문에 젊은이는 '그렇다' 고 답했다. 젊은이는 자신의 잘못과 자신이 받아야 할 법적 처벌이 얼마나 큰지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장은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를 용서하고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어도 되겠는가?”
순간 젊은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물론입니다, 사장님. 최선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사장이 다시 말했다.
"좋네. 나는 자네에게 일말의 책임도 묻지 않겠네. 가서 일하게."
돌아서려는 젊은이에게 사장은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참 한 가지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네.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 갔다가 관대한 용서를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야.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날세. 한 때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지... 그리고 자네가 받은 용서를 나도 받았다네."
사람이 기준이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원칙을 세우시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도 사람을 기준에 두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핵심을 놓치지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 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 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을 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법이 오히려 올가미가 되고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 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 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시 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폼 잡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파스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성서에서 파스카는 특별한 사건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파스카 사건은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집트는 고난의 땅이었습니다. 노예 상태의 삶이었습니다. 희망이 없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라는 정화의 장소를 지나서 희망의 땅, 축복의 땅,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이 커다란 체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스카’로 기억하고 축제를 지냈습니다.
신약에서의 파스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올랐습니다. 그분은 비참하게 죽었지만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사건을 신약의 파스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였고, 이제 고통도, 박해도,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예수님처럼 죽음을 건너 부활하리라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파스카는 ‘건너감’입니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건너갈 수 있을까요? 우리를 건너가게 해 주는 다리는 무엇일까요? 형식과 율법이 우리를 건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형식과 율법을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규범과 도덕’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길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희생과 봉사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율법과 형식을 뛰어 넘을 수 있고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많은 집의 대문에는 표시가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분은 교회의 이름이 적힌 표를 붙여 놓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성당 이름이 적힌 표를 붙여 놓습니다. 그러나 그 표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표식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차에 걸어 놓는 묵주는 부적이 아닙니다. 그 묵주를 보며 감사기도를 드리고 안전 운행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번 주말 봉사를 통해서, 주말 참가 부부들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안식년을 맞이하여 32년 만에 수도원을 떠나보니 가는데 마다 처음이며 하는 것마다 처음이니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분들을 만나니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원하던 국내 성지를 순례하니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어제는 지우(知友)와 41년 만에 만나 식사를 하며 맘껏 대화를 나누니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또 휴대폰을 말끔히 수리하니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아, 이렇게 좋을 수가!'입니다.
엊그제 곽병찬 대기자의 향원익청이란 기사(한겨레2014.7.16.29면) 마지막 대목에서 착안했습니다. 향원익청(香遠益淸), '멀수록 맑다'라는 뜻도 깊고 아름답습니다. 멀수록 맑기로 하면 예수님보다 더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내용은 강원도 평창 첩첩산중, 하오개에 살고 있는 권용택 화가 부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대목입니다.
-상투적인 물음 하나 던졌다. 바람조차 외로울 법한 그곳에 사는 이유는? 화가 이장은 멋쩍게 웃었고 부인이 대신 답했다.
"언젠가 야생초 밭에서 김매다 보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아, 이렇게 좋을 수가!'
바로 이게 충만한 행복입니다. 진정한 환희는, 희열은 이런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 있습니다. 향원익청이라 이런 이들의 향기는 갈수록 맑기를 더합니다. 화가 이장을 방문하여 꽃그늘에 앉아 술잔을 나누었던 벗은 그 날의 감회를 이렇게 남겼다 합니다.
-금강송 솔바람에/꽃잎이 날리어 술잔에 앉는다
지나온 시간도 아름다움이요/살아갈 시간도 아름다움이라-
아마 화가를 찾았던 벗도 '아 이렇게 좋을 수가!' 향원익청의 삶을 절절히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미 타계한 구상 시인 역시 '꽃자리'란 시를 통해 '아 이렇게 좋을 수가!' 향원익청의 삶을 사셨음이 분명합니다.
-반갑고/고맙고/기쁘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
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그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고맙고/기쁘다.-
깨달아 눈 활짝 열리면 지금 여기가 꽃자리입니다. 살아있음이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 역시 자기들을 변호, 두둔해 주는 스승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아 이렇게 좋을 수가!'넘치는 기쁨을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아, 이렇게 좋을 수가!'
복음을 듣는 우리도 통쾌하여, 주님이 좋고 고마워 저절로 터져나오는 기쁨의 환호입니다.
1독서의 병이 들어 죽게 된 히즈키야 임금이 슬피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그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주님의 다음 응답을 듣습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 다섯해를 더해 주었다. 그리고 아시리아 임금의 손아귀에서 너와 이 도성을 구해 내고 이 도성을 보호해 주겠다.-
필시 히즈키야 임금 역시 주님의 이 응답 말씀을 듣고 회복되어 '아, 이렇게 좋을 수가!'환호했음이 분명합니다. 예전, 어느 동방수도승이 늘 바보처럼 벙글벙글 웃기에 어느 구도자가 그와 나누었다는 문답이 생각납니다.
-어떻게 하며 하느님을 뵐 수 있어요?-
"아주 쉬워요. 눈만 열리면 바로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뵐 수 있어요.“
이렇게 주님을 만날 때,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희의 소리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만나 저절로 터져나오는 우리 환호의 소리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주님을 만나고 '참 나'를 만나니 아,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아멘.
옳은 일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네가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다음 날로 연기하거라.
가령 누가 너를 모욕하거든 그에게 24시간 후에 보자고 말하거라.
그러나 옳은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거들랑 즉시 실천에 옮기거라.” 이 말은 아르메니아 출신 신비가 게오르그 이바노비치 구르지예프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
강한 메시지가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어긴 예수님 일행을 옳지 못하다고 비난합니다.
주님은 옳은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옳은 일은 바로 자비의 실천입니다.
자비의 실천이 모든 법의 근본입니다.
우린 옳은 일을 실천하기에 얼마나 굼뜬지요.
반면 내 이익이나 영역이나 권리가 침해되면 얼마나 빨리 반응하는지요.
모든 판단 기준은 내 자신의 안위가 아닌가요? 더 나아가 하느님을 섬기는 것도 나 자신만을 위해서는 아닌가요?
지금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들은 우리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습니다.
온갖 거짓 왜곡 보도와 말로 상처에 또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그래도 또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이 바라는 것은 진실입니다.
옳은 것을 바랍니다. 과연 우리는 옳은 일에 마음으로 몸으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마태오12,1)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허기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낟알을 까먹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율법을 이야기하며 트집을 잡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행간을 읽어야 합니다.
정말 율법에 나온 조항을 어겼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을까요?
과연, 몇 퍼센트의 바리사이들이 613개의 율법 조항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고 있었을까요?
어느 누가 미워지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미워집니다.
그가 잘했던 못했던 모든 것이 미워집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지닌 또 하나의 약함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이 싫었던 것입니다.
낟알 몇 움큼이 없어지는 것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더욱이 율법 조항에 어긋나는 듯 한 일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싫었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싫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에 걸맞은 논리를 찾으려 합니다.
대부분 빈약한 논리들입니다.
안식일이라는 틀에 사람을 끼워 맞추려는 듯한 논리입니다.
사람이 돈을 위해 있는 듯한 논리입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니라 그 잘못된 일을 비판해야 합니다.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위한 부정이어야만 합니다.
율법 조항 613개가 많다고 하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의식할 수조차 없는 수없이 많은 복잡한 법과 규제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은 모든 법과 규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과의 조화를 위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모든 생명체와 자연이 그 존재 이유에 맞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모든 도리의 기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배가 고파서>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마태 12,1)."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안식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가까운 곳에 있는 회당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마태 12,9).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은 '심심해서'가 아니라, '배가 고파서'입니다. (아마도 분명히 예수님도 배가 고프셨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제자들의 배고픔을 기록한 것은 '그들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또 '그들의 행동을 변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겁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 12,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마태 12,3)"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만 보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셨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보았겠지만 무시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노동을 하면 안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곡식을 추수하는 노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행동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일을 이야기하신 것은 제자들의 행동이 안식일을(율법을) 어긴 일이긴 하지만,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식일에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이 죄가 안 된다면 그것은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다윗과 그 일행은 율법을 어겼지만 배가 고파서 한 일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마태 12,5)."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안식일에 노동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외적인 일은 두 가지입니다. '배고픈 사람'의 경우와 '사제들'의 경우입니다(마태 12,3-5).
그리고 나중에 '병자들'이 추가됩니다(마태 12,9-13). 마르코복음에는 '마귀 들린 사람'의 경우가 더 있습니다(마르 1,21-26).
우리는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지금 우리는 안식일 대신에 주일을 지키지만,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안식은? 배고픈 사람의 안식은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고픈 사람에게 안식일은 배불리 먹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안식일에도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배가 고프더라도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일하지 말고 참아라." 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이고, 안식일을 '무거운 짐과 멍에'(마태 11,28-30)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배가 고프다면 하느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실제로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미사부터 드려야 한다고 윽박지르지 말고 먼저 음식부터 제공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도 못 참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가?" 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사랑 없는 율법주의자의 차가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이 말씀에서 '죄 없는 이들'은 당신의 제자들인데, 제자들에게 죄가 없다는 말은, 그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행동이 안식일을 어긴 일이라고 하더라도 배가 고파서 한 일이기 때문에 죄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바라신다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일하는 것을 비난하지 말고, 그들에게 먼저 먹을 것을 주어라. 안식일은 그렇게 하는 날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다." 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실 제자들은 당장 뭔가 먹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이 밀 이삭 몇 개 뜯어 먹은 일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픔을 조금 더 참아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리사이들의 태도입니다. 배고프지 않은 사람이 배고픈 사람을 대하는 그 '사랑 없는' 태도가, 또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그 태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6)."
이 말씀은 "율법보다 나의 가르침이 더 위에 있다." 라는 뜻이고, 다시 이 말씀은, "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랑 실천부터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이고, 사랑은 법보다 더 위에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이 보여야
안식일의 본질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다시
바라보는 법을 배웁니다.
어느 것 하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왼쪽도
오른쪽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본래의 모습을
잊어버린 우리들에게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나눔의 기쁨을 모르기에
더더욱 용서할 줄도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멀리 계시는 주님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물질에 종속된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은 생명입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물질만 보이는 이곳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가 사람임을
인정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하루 되십시오.
단죄를 멈추어야
사람이 보입니다.
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누고자 하는 그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라고
사람이 되어 오시고
사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웃들의 아픔에
눈 감지 않는
사람이 보이는
그리스도의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안식일은 우리를 정화시키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땅에서 사람으로 사는 생생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잃어버린 사람을 찾듯 사람 자체가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자비입니다.
희생제물은 결코 안식일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자비의 축제가 베풀어지듯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입니다.
주님 자비안에 우리가 살기에
매 순간이 축복이 됩니다.
안식은 이렇듯 주님 자비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안식은 이렇듯 모든 이를 살게하시는 주님 자비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픔을 극복하고 주님 빛으로 들어가게 하는 힘은
안식일처럼 주님께서 이끌어가실 빈 자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삶을 완성하시는 주님께 나아가는 날입니다.
허물과 죄를 탓하기보다 오히려 주님 자비를 배우는 날입니다.
우리는 주님 자비를 통해
나를 위한 배려
이웃을 위한 배려를 배우게 됩니다.
다시금 자비는 구체적인 배려를 통해
사람의 안식일을 풍성한 축제가 되게합니다.
이와같이 안식일의 정신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겸손과 배려로 돌려놓기에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안식일이 축제와 축복이 되기위해서는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해야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자비는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주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랑의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비입니다.
맘에 안 들어
나명옥 신부님
한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안 들어’ 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한번 미운털이 박히면 정말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고, 반대로 예뻐 보이면 이에 낀 고춧가루도 애교로 보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예수님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태도가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 몇 개 잘라먹은 행동을 가지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가지씩이나 말입니다. 첫째, 추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에, 둘째,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셋째, 키질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에 저촉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니 장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숨이 탁탁 막힙니다. 법 (法) 이란 바로 물이 흘러가듯 숨통을 터주는 것이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지나치게 법이나 규칙만을 앞세우면 세상살이가 삭막해지고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율법만 보이지만 주님의 눈에는 율법 너머 배고프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자비가 필요한 이들이 보였습니다. 안식일은 법대로 지키고 안 지키는 것에 참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위하고 살리며, 이웃을 하느님께 인도하는 날로 살아갈 때 그 참뜻이 있음을 명심합시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 방으로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곤 하지요. 하지만 제 방에 손님이 올 때마다 솔직히 부끄러운 마음이 늘 가득했답니다. 왜냐하면 무척이나 지저분한 방이 바로 제 방의 모습이거든요.
솔직히 저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깨끗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정리를 해도 그때뿐이지 결코 깨끗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지요.
“난 이렇게 지저분한 것이 편해.”
사실 지저분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도저히 정리를 할 수 없으니 천성적인 것처럼 미루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깨끗하게 방 정리를 하는 사람이 부럽고,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난 달 간석4동 성당에서 교구 성소국으로 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번만큼은 정말로 정리 정돈 잘하면서 깨끗하게 살아 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지저분한 것을 과감하게 버렸고, 정리할 것을 먼저 정리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항상 아깝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했고, 버리지 못하는 것을 이것저곳에 놓아두다보니 방이 지저분해졌지요. 또한 나중에 정리하겠다는 미루는 성격 때문에 항상 어수선한 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잘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달이 지나도 괜찮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더불어 이제까지 그냥 체념하면서 시도도 하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반성하게도 되네요.
이것 또한 제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나도 할 수가 있는데,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자기 자신을 하나의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한 그리고 그것이 주님 뜻에 벗어나지 않는 한, 반드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따지는 바리사이들 역시 안식일 법이라는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예수님 제자들이 어겼다는 이유로 예수님 역시 옳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근본적으로 모르고 있었던 사실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고정관념이 나를 위축되게 만들며, 더 나아가 내 주변과 세상을 위축되게 만듭니다.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과 정반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은 무엇일까요? 또한 나의 고정관념으로 내가 지금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고, 다른 사람들 역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장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하나씩 버리는 연습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얻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은 버릴 줄 아는 것이다(그라시안).
흰 봉투의 비밀(정은우, ‘해피데이스’ 중에서)
중학교를 생각보다 먼 곳으로 배정받아서 매일 아침 버스를 타고 통학을 해야 했다. 그래서 부모님께는 비밀로 하고 매일 아침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사기 위해서였다. 부모님께 자전거를 타고 통학한다고 말씀드리면 위험하다고 말리실 게 뻔하기 때문에 철저히 비밀로 해야 했다. 드디어 거금 10만 원을 모은 날, 나는 행여나 누가 훔쳐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책갈피에 돈을 숨겨 위장을 해놓았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이었다. 방문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더 놓여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잘 어울려 놀던 동갑내기 사촌이 온 것이다. 놀래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 “워!”하면서 방문을 여는 순간, 사촌이 깜짝 놀라면서 무언가를 급히 감췄다. 뭐냐고 묻자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단 한마디를 던지고는 휑하니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서둘러 책을 꺼내 책장을 펴보았다. 돈이 든 흰색 봉투가 온데간데 없었다. 밖으로 뛰쳐나간 나는 사촌을 붙잡고 다짜고짜 돈 봉투 어디 있냐고 따졌다. 하지만 사촌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모른다고 시치미를 뗄 뿐이었다. 화가 난 나는 우리 집에 다시는 오지 말라며 방문을 쾅 닫고 들어와 버렸다. 문밖에서 사촌의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모른 체했다.
다음날 아침, 밥을 먹으려는데 엄마가 그 큰돈이 어디서 났냐며 다그쳤다. 어제 방 청소하다 돈 봉투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사촌을 오해했다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또 놀러오면 그때 사과해야지.’하고는 넘겨버렸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사촌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사촌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지금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얘기였다. 결국 사촌은 그날 밤 두 번 다시 말할 수도 뛰어놀 수도 없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엉엉 울고 있는 내게 사촌이 사고 당시 가지고 있던 것이라며 이모가 전해준 봉투에는 1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내가 자전거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을 알고 자신도 보태주려고 모은 돈이었다. 그날 사촌이 내 방에서 감추던 것은 바로 그 봉투였다.
선물
신효원
지난 스승의 날 아침에 수호가 꽃바구니를 불쑥 내밀었습니다. 장미 열 송이가 예쁘게 담겨 있었습니다. 수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4년간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속을 무던히 썩이다가 지난 가을에 우리 대안학교로 왔습니다.
수호는 오히려 선생님과 부모님이 자신의 속을 무척 썩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도 그 점에 대해서 분이 덜 풀렸는지 자주 화풀이할 데를 찾았습니다. 결석을 많이 했고 수업시간에도 영 게을렀습니다만 새학기 들어서는 표정이 밝아지고 있습니다. 선생님들이 수호가 변했다고 기뻐합니다. 들어주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분위기에 많이 편안해진 것 같았습니다. 꽃바구니를 가져온 것도 누구에겐가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겠지요. 꽃바구니에서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고마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특별한 물건보다는 밝은 미소와 상냥한 인사가 더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물은 언제나 반갑습니다.
관계를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지요. 그런데 가장 좋은 선물은 물건이 아니라 정겨운 눈빛, 설렘과 용기를 주는 말, 감사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보내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은 웬일일까?
밀 이삭을 뜯어 먹는다고 주님의 제자들에 대해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의 역성을 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에는 이들이 참으로 심통 사납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런 사람은 아니리라는 것이지요.
심통 사나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심통 사나운 사람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든 그를 깎아 내리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귀신같이 그의 나쁜 점과 잘못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를 헐뜯습니다.
바리사이 중에는 이런 못된 인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 바리사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상당수의 바리사이가 나쁘고 못된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부족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곳에 법으로 대표되는 당위와 의무만 남습니다.
가끔 저를 보며 놀랍니다.
남이 잘못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심통 사나운 사람처럼 잘못된 점만 봅니다.
상대의 문제도 그리 크지 않고 저도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어떤 때 사랑보다 분별심이 더 커서 시비가림이 날카로워지고 옹졸하고 까칠하게 법, 원칙을 들이댑니다.
그러다 이런 저를 보며 깜짝 놀라 분별심과 시비지심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잘 못보다는 그의 고통을 보자”는 연초의 결심을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의 반복이 인생이 아닌가 싶네요.
껍데기를 벗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의 동기 신부 하나가 랍스터를 단 한 번 먹어보고 그 이후엔 절대 먹지 않는 사연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신부가 부자동네 본당에서 제 2 보좌를 할 때였습니다. 그 신부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본당 청년들이 신부님께 식사대접을 해 드리겠다고 청했다고 합니다. 그 신부는 학생들이 돈이 어디 있느냐며 거절을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선배 신부인 제 1 보좌 신부님을 통해 청년들에게 잘 좀 이야기를 해 달라고 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제 1 보좌 신부님은 신부님이 청년들에게 부담주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니 이해하라고 청년들을 설득했으나 말을 듣지 않자 “그 신부님은 워낙 럭셔리해서 니들 돈 많이 들걸? 그 신부님은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 아니면 안 가.”라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이 워낙 잘 사는 집 아이들이라 호텔 레스토랑에 랍스터를 예약 해 놓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신부님은 청년들을 따라 레스토랑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자마자 주눅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개씩 놓여있는 스푼과 나이프, 포크 등을 어떻게 써야할 지 몰랐고, 또 랍스터가 나왔는데 함께 주는 위에는 서로 길이가 다른 가위와 뱀 혀처럼 생긴 꼬챙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청년들을 보며 따라하려고 했는데 청년들은 또 신부님이 먼저 드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먹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들이 포도주를 시키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어떤 포도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어? 그냥 다 좋아~”라고 말을 흘렸고 청년들은 자신들이 고른 포도주를 시켰습니다. 웨이터는 포도주를 따고 신부님에게 “테이스팅 하시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 어~ 그냥 주세요. 좋은 포도주 같은데...”라고 하였고 청년들은 급기야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대며 웃기 시작하였습니다. 테이스팅은 포도주 숙성동안 공기가 들어가서 맛이 변하지 않았는지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런 긴장 속에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와서 라면부터 찾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내가 아닌데 그런 척 하려니까 정말 힘들더라. 그냥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맞습니다. 본질보다는 형식에 주위를 더 기울이며 살면 인생을 즐기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어떤 포도주 전문가가 말했습니다.
“포도주는 마시고 취하면 그만입니다.”
정말 자신을 감추고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은 자신을 지옥에서 살게 합니다. 특별히 자신을 감추고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격식을 차리는 것입니다. 상류사회에서 쓰는 언어가 따로 있고 그 사람들이 가는 쇼핑몰이나 레스토랑도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감추는 가식적인 것을 때에는 자신의 삶이 고통스러운 감옥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긁어 비벼서 먹자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기고 있다고 그들의 스승인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며 법의 본질이 중요하지 겉모양을 보고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또 상황에 따라서는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법도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예로, 다윗이 도망 다닐 때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고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은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라고 하십니다. 성전은 바로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만 계시다면 그 성전의 모양이 어떻든 성전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성전은 그 모양이 아무리 아름답고 웅장하더라도 돌무더기에 불과합니다. 성체가 없고 미사가 드려지지 않는 성전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성전의 겉모양이 바로 법입니다. 그러나 그 핵심은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이고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모시고 있으면 그 성전의 모양은 변형되어도 괜찮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안에 예수님을 모시지 못하고 그저 가식적으로 보이는 면만을 지켜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율법주의나 형식주의를 저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열매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예루살렘의 위대한 성전도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수 없이 복잡한 외형 안에 본질인 하느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인사 잘 한 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인사는 그 어른들을 존경해서 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칭찬해주니 만나는 어른들에게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물론 인사하는 사람을 다 그만큼 존경하고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보다는 어른들을 더 존경합니다. 하느님은 인사하는 겉모양이 아니라 그 사람 안의 진심을 봅니다.
공자는 덕의 최고의 경지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것들에 그 내용을 채워가다 보면 그 외형과 내형이 같아지는 경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도 더 중요한 것은 겉모양이 아니라 안의 내용인 것입니다. 겉으로 그런 척 하며 살면서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 줄 알고 착각하며 사는 것보다, 법도에 어긋나더라도 껍데기를 벗고 솔직한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본질을 완성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염이 텁수룩한 거지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옆을 지나가던 장난기 많은 사람이 이 거지의 수염에 구린내가 몹시 나는 썩은 치즈를 발라놓았지요. 그러니 잠에서 한참 만에 깬 거지는 기분 좋게 일어났을까요? 아니지요. 비록 지저분한 자기였지만, 구린내가 몹시 나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잠자고 있는 사이에 이 근처에 누가 큰일(?)을 보았나?’
하지만 냄새는 분명히 가까이 났지만, 큰 일 자국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지요. 거지는 ‘내가 아직 술이 덜 깨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하고는 해장술을 한 잔 먹기로 했지요. 술을 한 잔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여전히 풍겨대는 수염에서 나는 지독한 냄새로 술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술집을 나온 거지는 꽃을 향해 걸어가서 꽃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꽃향기와 치즈 썩은 냄새가 석여서 더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나가는 아름다운 여성에게서 냄새를 맡았습니다. 이 여성에게도 화장품 냄새와 썩은 냄새가 섞여서 더욱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경찰관이 자기 옆을 지나가는데 경찰관에게서도 썩은 냄새가 났습니다. 거지가 투덜대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젠장, 낮잠 한숨 자고 났더니 온 세상이 다 썩어 버렸구먼.”
사실 썩은 냄새는 자기 코 밑의 수염에 바른 치즈 때문인데 말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들을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에서 찾으려 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남의 문제점을 먼저 보기보다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때, 진리에 더욱 더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척이나 시장했는지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지요. 이것을 보고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하지요.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즉, 이삭을 뜯은 것은 추수를 한 것이고,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남의 죄만을 바라보니, 하느님 아버지께서 가장 강조하신 계명인 ‘사랑’의 계명은 오히려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윗 일행의 이야기를 전해 주시면서, 안식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임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혹시 나의 문제점은 항상 뒷전이고, 남의 문제점만을 세세하게 꼬집어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렇게 해서는 하느님의 사랑 역시 맨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문제점을 찾기보다는 나의 문제점을 먼저 찾아보도록 합시다.
안데스의 예수님 상(‘행복한 동행’ 중에서)
아르헨티나와 칠레 사이의 국경에 위치한 우스파야타 고개에는 예수님 동상이 하나 있습니다. ‘안데스의 예수님 상’이라고 불리는 이 청동상은 양국의 국경분쟁이 평화롭게 타결된 것을 기념하여 1904년에 제작되었지요. 동상은 그 후 100년 동안 양국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며 굳건히 제 위치를 지키고 있지만, 착공되던 당시에는 동상의 방향을 두고 한바탕 소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지형과 여러 가지 조건들을 따지다보니 동상이 자연스럽게 아르헨티나 쪽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칠레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왜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어? 저들에게만 예수님의 축복이 임하라는 거야?”
칠레 사람들의 원성이 커지자 양국 간 화해의 분위기에도 차츰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이 난국을 해결한 것은 어느 기자의 재치 있는 기사 한 문장이었습니다. 예수님 상을 취재한 기자는 기사 말미에 예수님 상이 칠레에 등을 돌린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습니다.
“예수님 상이 아르헨티나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은 그 나라가 아직 더 많이 돌봐 줘야할 나라이기 때문이다.”
기사를 접한 칠레 사람들은 더 이상 예수님 상의 방향을 문제 삼지 않았다고 합니다. 새롭지만 전혀 어렵지 않은 해법을 제시한 기자의 재치로 양국은 계속 평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
조성숙 수녀님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걸어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손으로 뜯어 먹은 일을 노동으로 판단하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주장입니다.
이 논쟁 내용을 가볍게 읽자면 저는 당연히 안식일 법보다 사람을 아끼시는 예수님 편에 서서 율법주의로 눈이 먼 바리사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을 취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과연 저는 어떻게 행동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어느 종교에서든 사람들이 일단 그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게 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흔히 이 가르침들은 신앙 세계에 대한 헌신과 얽혀져서 철옹성이 되어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극단적인 한 예를 최근 <신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힌두교의 카스트에도 포함되지 않는 비천한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경제학자가 된 인도의 나렌드라 자디브가의 가족사입니다. 전생의 악업 때문에 미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불가촉천민들에게는 경전을 읽거나 교육을 받는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가르침을 깨는 데 3,500여 년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을 각오하고 그것은 “하느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기정희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또 트집을 잡으며 예수님께 도전한다. 배가 고파 밀 이삭을 뜯어먹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안식일의 규정을 철저히 지키는 그네들의 눈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보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명쾌한 말씀을 던지신다.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관들만 먹을 수 있는 빵을 먹었다는 것, 성전보다 큰 이가 바로 당신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가수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들을 때면, 서울역 근처에서 학교 다닐 때 일이 떠오른다. 그곳은 행려자들이 많아 저녁 시간에는 사실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걸음을 빨리 하곤 했다. 어느 날 한 아저씨가 나를 향해 달려오더니 어깨를 덥석 잡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소리를 지르자 아저씨가 얼른 손을 내리며 “놀랐어요?” 하며 당황해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데 아저씨가 “수녀님, 저 안드레아예요. 복지병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아 반가워서 인사했는데….”라고 말했다. 순간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던지 “바삐 가던 길이라 놀랐어요.” 하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버렸다.
과연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 그들을 보고 있는가? 세상이 말하는 실패한 인생들,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진 사람들로 치부해 버린 건 아닐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을 만큼 무엇이 나를 그들과 경계 짓게 했던가?
우리 수도회 설립자께서는 가장 가난하고 작은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마음이 문제다. 주님은 마음에 대해 말씀하시며 “마음에 가득 찬 것이 나오는 법이다.”라고 하셨다. 비록 사회와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 속에서 마음이 어두워지고 깨어지기는 했어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듯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것, 그들을 위해 주님이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 그분이 바로 오늘도 성체 안에서 당신을 내어 주고 계시다는 것,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분이 사람을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건은 내가 평소 사람들과 사건을 어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해주었다.
통 큰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율법을 사람 위에 놓는 바리사이를 비판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판하는 그 짓을 똑같이 하곤 합니다.
나를 미워하건 다른 사람을 미워하건, 우리가 미워하는 것 대부분이 같은 이치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해야 하는데 내가 왜 이러지’, 또는 ‘이러해야 하는데 저 사람 왜 저러지’ 하고 미워합니다.
당위성을 나름대로 정하고 그래야만 된다고 스스로 강제합니다.
어제는 미사를 봉헌하는데 어떤 분이 뒤에 멀찍이 혼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속으로 저는 ‘저 사람 왜 저 모양이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모양이 어째서’하고 즉시 반발이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쩨쩨할까?’ 자책을 하였습니다.
쩨쩨함.
어떤 때 우리는 무진장 쩨쩨해집니다.
돈 몇 푼에 버들버들 떨고 인색한 쩨쩨함도 있지만 마음을 통 크게 쓰지 못하고 정한 작은 원칙이나 결정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 심지어는 지극히 주관적인 선호와 바람들에 집착하는 옹색하고 옹졸함의 쩨쩨함도 있습니다.
작년 북한 평화 봉사소 합의와 관련하여 북한과 마지막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때 북한 관계자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저에게 말을 전하여 왔습니다.
“김찬선 신부 선생, 거 통 좀 크게 쓰시라고 전해 주세요!”
우리 신부가 북한에 상주하는 것, 편의 시설이 아니라 평화의 집이라는 명칭을 써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원칙과 조건을 제가 끝까지 고집하니까 마음을 통 크게 쓰라는 얘기지요.
저의 고집이 작은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저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것인데 북한 인민을 먹이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는 얘기지요.
우리의 마음을 다 읽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약점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작은 원칙과 조건 때문에 더 중요한 것 망치지 말고, 조건 달지 말고 합의하라는 일종의 압박이지요.
고민스러웠습니다.
‘너희들이 너희 인민을 소중히 여긴다면 너희 인민을 위해 너희가 양보하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떤 원칙과 조건보다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큰 메아리로 저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결국 제가 저의 조건, 아니 우리의 조건을 관철시켰지만 통 크게 쓰라는 말, 사람이 율법보다 소중하다는 북한식의 이 말이 저에게는 지금까지 깊이 남게 되었습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지 않고 통 크게 쓰는 것. 그 무엇보다도 사람이 중요하고 하느님이 중요하다는 것.
불교에서는
‘불경이 너를 집착케 하면 불경을 태워버려라!’,
‘부처가 너를 집착케 하면 부처를 죽여 버려라!’합니다.
아무 것도 집착할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뜻이 되겠지만 크리스챤적으로 이해하면 꽃보다 중요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법과 원칙보다 중요하고 사람보다 중요한 하느님은 말할 것도 없이 법보다도 원칙보다도 그리고 그 모든 인간관계보다도 중요하다는 얘기라 저는 이해합니다.
나도 바리사이파
김종근 신부님
신학교 아침기도 시간의 풍경. 성당은 학년별로 모여 앉도록 좌석 배치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아침기도와 묵상을 하는 뒷모습만 봐도 학년 구분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졸고 있는 뒷모습이 학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아래 학년일수록 머리의 출렁임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해가 다르게 조는 기술은 늘어나고 신학교 전 과정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꿈속에 있으면서도 거의 머리를 움직이지 않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사제품을 준비하는 신학생 시절이나 성품성사를 받을 때 가졌던 열정과 정의가 사제생활 중에도 변함없이 지켜나가기가 참 어렵다. 심지어는 사제들이 강론을 통해 강조하는 신앙생활의 모범은 오로지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인 양 강론 따로 생활 따로인 경우도 있다.
본당에서도 처음 시작하는 신앙인들이 기존의 신자들보다 더 순수하고 열심인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더 많이 알고, 더 오랜 기간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될 때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사제로서 한 해 한 해 햇수를 더해가는 것, 본당에서 직책(봉사자리)이 하나씩 더 늘어나는 것, 더 책임있는 자리를 맡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바리사이파가 될 수 있는 유혹이 더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정신차릴 일이다.
안식일의 주인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 시대에 밀밭은 길고 좁은 밭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러한 밭 가운데 있는 이랑은 언제나 통로로 쓰였다. 오늘 복음의 사건은 바로 이러한 밀밭 사이를 걷고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유대인들의 안식일 법은 단순히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율법 해석가들은 이것을 39가지 조목으로 세분하여 가르쳤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예수님 제자들의 죄목을 따져 보면,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는 것이고,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는 것이며, 알곡의 쭉정이를 가리는 것은 키질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는 것이니, 따라서 이들의 전체 행동은 안식일에 음식을 장만하지 말라는 그들의 율법을 어기는 죄였다. 이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며 예수님을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민수 28,9에 나오는 안식일이라도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예로 들어 답변하셨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 어떠한 율법이나 제사를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위하는 것이 하느님께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호세 6,6을 인용하여 강조하신다. 즉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느님 앞에 형식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이웃에 대해 선행을 베푸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책하시는 것이다.
가끔 고해 때, 단식재와 금육재를 궐했다고 고백들을 한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사순절에 대림절에 이러한 재를 시행할 때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우리는 흔히 인간적 관습에 따른 예의를 지킨다든지 성당에서 오래 기도할 줄 알면서도, 형제와 이웃을 위할 줄 모르고, 이런 경우에는 이랬어야 하지 않았느냐 하는 식으로 냉엄하게 판단하여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복음을 보고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오래 또 자주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던 표양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 오랫동안 기도도 하고 인간들 서로가 갖추어야 할 관례적인 예의도 존중해서 행하여야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신,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래서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이진호 신부님
저는 양파를 좋아하고 즐겨 먹습니다. 양파를 좋아하는 이유는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양파는 처음부터 끝까지 양파만 있고, 속으로 갈수록 더 진짜 만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도 쉽고 먹기도 쉽습니다.
․세상도 아주 쉽고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일이나 모두 진심으로 대하고 진짜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특별히 신경 쓸 일도 긴장할 것도 없습니다. 진심으로 대하면 그 모든 것이 진짜로 이루어집니다. 너무나 쉽고 편합니다.
․신앙생활도 쉽고 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무엇이든지 진심으로 대하고 진짜로 행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제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전례, 기도, 성사, 신심, 봉사, 자선, 공부 같은 모든 신앙생활이 아주 쉽고 편해집니다.
․독서의 히즈키야도 아주 쉽고 편하게 병을 고쳤습니다.
“몹시 앓아 거의 죽게되었을 때, “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주님께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진짜로 울면서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진심을 보시고 “그의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 히즈키는 진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과 제자들도 진짜 배가 고팠습니다. 진심으로 먹을 것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법도 성전법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답니다. 바리사이들도 어렵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사람 앞에, 하느님 앞에 진실하지 못했습니다. 한번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일생을 가식과 위선으로 살면서 하느님과 백성을 기만하였습니다. 평생을 허례허식으로 허영의 삶을 살았습니다. 살기가 어렵고 힘이 듭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진실한 마음을 보시고 그 마음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인”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뭐든지 진짜로 해야 합니다. 머리나 혀끝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무엇이든지 기쁘게 다 받아 주십니다. 진짜로 살아야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을 다 이루어 주십니다.” 진짜로 살면 모든 것이 쉽고 편합니다.
무엇이든지 진짜로 해 봅시다. 한번만이라도 ..
“하느님은 진실하시며, 그 하시는 일마다 자애로우시도다. 진실하심 우러르며 당신이름 찬양 하오리니,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아멘
"사람의 아들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다."
김경식 몬시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배가 고파 밀 이삭을 잘라먹었습니다. 예부터 밀 이삭을 낫으로 베어 가는 것은 안 되지만, 그 자리에서 손으로 잘라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신명 23,25). 마침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곡식을 따서 비비는 것은 금지된 사항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본적인 질서를 내세워 제자들의 행동을 변호하십니다.
원래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쉴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해주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안식일 법이 오히려 사람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인간의 생명이 법률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다윗이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은 행동을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즉 어떤 법이든지 인간생명에 이바지하는 법이라야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예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9,3)한 호세아서의 말씀을 빌려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 사랑, 신뢰, 정의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정신을 가지고 제사를 바친다면 하느님께서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같은 정신으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 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 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애쓰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행복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독서> :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는 신앙
경규봉 신부님
믿음과 눈물로 드리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유다 왕 히즈키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된 상황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그의 죽음을 예고한다. 이에 히즈키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간구한다. 당시 사람들은 일찍 죽는 것은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히즈키야는 자신이 일찍 죽는다면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므로, 이에 대해 슬피 울면서 주님께 눈물로 간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히즈키야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병을 낫게 해주시고 그로 하여금 15년을 더 살게 해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마르코복음(9,14 이하)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악령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악령을 쫓아주시기를 간청한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마르 9,23) 하고 말씀하신다.
아이의 아버지가 큰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치시거나 악령을 쫓으실 때,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간구하는 이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사무엘 상권(1장)을 보면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기 때문으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녀가 겪는 내적 고통은 상당히 컸다. 더구나 브닌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곤 하였을 때, 그녀의 아픔은 더더욱 컸다.
한나는 실로에 있는 신전에서 슬피 울면서 서원을 하며 하느님께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녀가 그처럼 눈물로써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그녀로 하여금 사무엘을 낳도록 해주셨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좋으신 아버지이시다. 우리를 벌하시고 괴롭히시길 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녀인 우리가 깊은 믿음을 가지고 눈물로 간청했을 때,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아버지처럼 자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아버지이심을 항상 가르치셨다.
그리고 “너희 중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9-11) 하고 말씀하셨다.
히즈키야가 눈물로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눈물과 믿음을 보시고 그의 청을 들어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더 오래 살면서 주님의 은총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믿음 깊은 신앙인이 되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이 되자. 그리고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눈물로 호소하는 신앙인이 되자.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안식일의 참된 의미
장효강 신부님
오늘 우리가 묵상할 복음은 성서에서 자주 등장하는 율법의 준수에 대한 바라사이들과의 갈등을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예수님이시며, 모든 사물의 질서가 예수님 안에 주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은데 대해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합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분은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이끌어 낸 주(야훼) 하느님이십니다.
인간을 해방하신 분이 인간을 해방코자 주신 계명인데, 그 참된 의미를 잃은 바리사이들은 그것을 통해 거꾸로 인간을 억압하였습니다. 즉 본(本) 말(末)이 뒤집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뒤집어진 본말을 바로 세우고자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첫 번째 예로써 신명기 23장 25절의 말씀, 즉 "이웃집 밭에 서 있는 곡식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집 밭에 있는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는 말씀을 통해 안식일 율법에 대한 분명한 해석과 함께, 참된 안식일을 지내는 방법이 모두 주님이신 예수님께 예속되어 있음을 전합니다.
두 번째 예에서는 사제들의 안식일 규정에 대해서 말씀 하시면서, 성전에서는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만 보증되지만 예수님 안에는 하느님께서 볼 수 있게 현존하여 계신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세 번째 논증은 호세아 예언자의 말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의 제물을 원하시며 순종과 신뢰와 사랑과 참된 정의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성취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제사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규정이 폐지되었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나아가 온전히 안식일 규정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시며 완성해 주신 것입니다. 즉 안식일 규정보다 더 중한 의무들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의무들을 더 촉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확립하신 사물의 질서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에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 삶에 역사하심을 감사드리는 찬미의 날로 봉헌하고 있습니까?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날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감사와 찬미의 날로 봉헌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연히 살찐 여우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의문이 생겼어요.
“여우가 어떻게 살이 쪘을까?”
그는 여우의 습성을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그 비밀을 알 수가 있었지요. 여우는 스스로 힘들게 사냥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사자가 먹다 남긴 먹이로 배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어요.
‘옳거니! 여우처럼 사는 법이 가장 쉬운 방법이구나!’
마을로 돌아온 그는 큰 장사꾼이 장사하는 가게 옆에 조그만 가게를 내었습니다. 그는 큰 장사꾼을 위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조달했고, 그럼으로써 힘들이지 않고 작은 만족을 얻을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큰 장사꾼은 더 큰 사업을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린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기댈 곳을 잃게 되었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점점 모았던 재산을 탕진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그가 어느 날 거리에서 한 현자가 말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사자가 남긴 것을 먹겠느냐, 네가 남긴 것을 여우가 먹게 하겠느냐?”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영유하면서 살고 계신지요? 사자가 남긴 것이나 먹으면서 편하게 살려는 여우의 삶을 지향하시는지, 아니면 힘들고 어렵지만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사자의 삶을 지향하는지요?
여우의 삶이라는 것은 편하지만 분명히 별 볼 일 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러한 삶을 꿈꾸고 있으며, 나 역시도 그런 모습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예수님께서도 그런 모습을 지향하셨을까요? 아니지요. 그분께서는 항상 창조적인 일을 하셨고, 그래서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과감하게 행하셨습니다. 바로 사자의 삶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장면을 복서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밀을 두 이삭 이상 따는 것만으로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추수 행위로 간주했으며,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을 탈곡으로 생각했거든요. 따라서 제자들이 십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라는 계명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자처럼 주도적이며 창조적인 커다란 생각을 하지 않지요. 대신 여우처럼 작은 것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율법의 정신보다는 율법의 세세한 조문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이 없는 가운데에서 율법의 조문만을 실천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제 우리들의 모습을 바꿔야 할 때입니다. 작은 것에 집착하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여우의 삶이 아닌, 비록 힘은 들지만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처럼 창조적이며 주도적인 삶을 지향하는 사자의 삶으로 말입니다.
사자가 남긴 것을 먹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남긴 것을 여우가 먹게 하겠습니까?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스피노자)
가장 큰 악덕(법정,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다' 중에서)
"사람이 항상 나물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백 가지 일을 이룰 수 있다"
기름지게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겠지만,
담백하게 먹는 사람들은
이 말뜻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몸에 들어가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음식물이 지닌 업까지도 함께 먹어
그사람의 체질과 성격을 형성한다.
살아 있는 생명을 괴롭히거나
살해하는 것은 악덕 중에서도
가장 큰 악덕이다.
언제 어디서나 이 우주에
가득 차 있는 진리의 혼을 보려면
가장 하잘것없는 미물일지라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전, 안경을 하나 맞추기 위해서 안경점에 갔었습니다. 왜냐하면 쓰고 있던 안경이 자전거에 밟혀서 부서졌거든요. 시력 검사를 한 뒤에, 제가 앞으로 쓸 안경테를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안경테를 바라보면서 제가 고르지 못하자, 그 안경점 직원은 저에게 어떤 안경테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기왕이면 가벼운 안경테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그러자 저에게 안경테 하나를 권해줍니다. 정말로 가벼웠습니다. 그런데 옆으로 보이는 가격표. 그 가격이 엄청납니다. 20만원이 넘더군요. ‘Made in Japan’ 이랍니다. 저의 눈을 위해서 자그마치 20만원이 넘는 것을 쓴다는 것이 너무나 호강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말했지요.
“조금 싼 것 없나요?”
그러자 10만 원 정도 되는 안경테를 보여줍니다. 이것 역시 가벼웠습니다. 하지만 10만원도 비싼 느낌이 팍팍 들었습니다.
“혹시 더 싸고 그러면서도 가벼운 것 없나요?”
이번에는 3만 원짜리 안경테를 보여줍니다. 앞에 것에 비해서 무겁기는 했지만, 안경테가 튼튼한 것은 물론 가벼운 축에 속했습니다. 점점 이 3만 원짜리 안경테에 관심을 갖자 그 안경점 직원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손님, 만약 이것(20만원이 넘는 제일 비싼 안경테)을 구입하시면 제가 5만원까지 DC를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것(3만 원짜리 제일 싼 안경테)은 5천까지밖에 DC를 해드릴 수밖에 없네요.”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할인율이 높은 것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격이 저렴한 것을 구입할 것인가를 말이지요. 결국 저는 가격이 저렴한 쪽을 선택했습니다. 아무리 할인율이 높다 하더라도 안경렌즈까지 포함하면 20만원 넘는 비용을 쓴다는 것이 왠지 사치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그리고 의심도 생겼습니다. 이렇게 할인율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안 나간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지금 현재 저는 안경렌즈까지 포함해서 5만 5천 원짜리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전에 쓰던 안경은 무거운 것은 물론, 안경렌즈에 상처가 많이 나 있었거든요. 이런 상태에서 안경을 바꾸니 너무나 가볍다는 느낌과 함께, 흠이 없어서 깨끗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답니다.
이렇게 가격이 저렴해도 제 마음에 딱 맞는 것을 구입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비싼 안경이 다른 안경에 비해서 훨씬 좋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렴한 안경도 전에 쓰던 안경보다는 좋으니까 너무나 마음에 들더군요.
사실 우리들은 고급스러운 것이 달라도 다르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그러다보니 화려한 명품만을 선호하는 명품족이라는 신조어도 생겼고요, 명품을 대여해주는 곳도 생겼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사람들이 선호하는 값비싼 명품보다도 자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이러한 명품족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즉, 외관상으로만 보이는 하느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들이 열심히 한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기도와 단식을 밥 먹듯이 해야 하고 안식일 법은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히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달랐습니다. 오히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안으로 실속을 차리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나요? 겉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명품족은 아니었나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말씀하시듯이, 이웃에게 베푸시는 자선을 가장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치를 부리지 맙시다.
무기수의 자유(박병기, '오늘의 생각' 중에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제 막 감옥에 들어온 무기수였습니다. 언제 나가게 될지, 어떻게 이 좁고 퀘퀘한 공간에서 지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교도 소장에게 간절한 청원을 한 가지 했습니다.
"절대 문제를 안 일으킬 테니 교도소 마당 한 귀퉁이에 정원을 가꾸게 해주십시오."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은 그렇게 하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는 처음엔 손이 많이 가지 않아도 잘 자라는 고추나 양파를 심었습니다. 씨를 심고 그것이 자라감에 따라 그는 작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는 여러 종의 장미도 심어 보고 작은 묘목의 씨앗도 뿌렸습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그는 정성스레 정원을 가꿨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비록 내가 지금은 자유의 몸이 아니지만 이 정원을 돌보듯 나 자신을 돌봐야겠구나. 또 이렇게 씨를 뿌린 다음 지켜보고 경작하고 결과를 추수하는 정원사의 일이 소박한 것이지만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가."
교도소 마당의 작은 땅뙈기에 무언가를 심고 가꾸던 그는 이십칠 년 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바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입니다.
자유하지 않은 몸이었지만 만델라는 자유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감옥을 제한된 공간이 아닌 창조의 공간으로 만들었던 만델라는 그곳에서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유로운 곳에서 살면서도 무엇엔가 묶여있는 듯한 삶을 삽니다. 자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자비는?
여성국 신부님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 6,6). 호세아서의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신학교 때 봉헌 봉투가 생각납니다. 봉헌 봉투에 이 말이 적혀 있었는데, 토요일 저녁기도가 끝나고 봉헌 봉투를 가져와 방안 책상에 올려놓은 순간부터 마음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싸워야 했습니다.
사실 신학생 때 한정된 용돈으로 한 학기를 살다 보면 학기 말 즈음이면 용돈이 거의 바닥이 나고 맙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학기 초에 십일조로 나눠놓았던 봉헌금을 야금야금 털어먹기 시작합니다. 담배 값으로, 외출 때 맥주 한잔 걸치는 가격으로….
그때부터는 저도 ‘어쩔 수 없는 천주교인’(?)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은 결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느님께 나를 봉헌했잖아!’라고 애써 자위해봐도 봉헌 봉투 겉에 쓰인 호세아서의 압박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랬던 제가 지금은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천 원만 내니 천주교인이라고 이죽거리고 있습니다. 봉헌하지 않는다고 큰소리 땅땅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자비의 안경은 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일말의 양심의 안경마저도 벗어던졌나 봅니다. 그래도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한마디 일갈로 가슴에 다가왔으니 다시금 달려야겠습니다. 혹시 지금 저처럼 무딘 가슴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함께 달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정원순 신부님
“아파트 당첨될 가능성이 영순위이기 때문에 유리해.” 지하철 안에서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어느 중년 아주머니들의 대화 내용이었다. 경쟁이 치열한 인생살이에서 남보다 순위가 앞선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좋은 일인가! 남보다 무엇인가를 선점했다는 것은 승부가 속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세상에서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인생살이 가운데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 일이 자주 생기기 마련이다. 우선순위 때문이다.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의 가치관이다. 우리는 가치관에 따라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행동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체로 한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말하자면 가치관은 인생살이에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바꾸기가 힘든 모양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제자들이 하고 있다고 예수님께 따지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12,1-2). 이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마태 12,3-4) 하시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무엇이 앞이고 뒤인지를 바리사이들에게 한 수 가르치시는 대목이다. 신앙생활이 인생살이이고, 인생살이가 신앙생활일진대 나는 어떤 가치관으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음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밀 이삭을 뜯어먹은 제자들
김대성 신부님
스승을 보면 제자를 알 수 있고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은 것을 가지고 바리사이들이 비난하고 있습니다. 안식을 규정은 율법의 여러 규정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규정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하여 하느님을 올바로 섬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안식일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너무도 쉽게 이 규정을 어긴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도무지 이 장면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서인지 제자들은 율법에 그다지 크게 얽매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율법을 하찮게 여기신 것은 분명 아니셨지만, 그분은 율법 규정 그 자체 보다는 율법의 올바른 의미를 강조하셨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종종 율법주의자들을 꾸짖고 그들과 대립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누구를 위한 율법입니까? 무엇을 위한 안식일 규정입니까?
예수님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계속해서 대립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사람을 하찮게 여기고, 하느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철저하게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당신이 베푸시고자 하는 사랑과 자비가 넘쳐흐르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오히려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어야 합니다. 자비를 위한 안식일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시는 사람을 위한 율법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 앞에 머물면서, 단죄하고 판단하는 편에 서 있지는 않았는지 나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이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로 흘러갔듯이,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이웃들에게로 흘러갈 수 있기를 간청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확대해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며칠 전 전철 안에서 겪은 일입니다. 전반적으로 자리가 널널하길래 노약자 석에 앉은 제 잘못이 컸던 것 같습니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한 중년남자가 자기도 거기 앉아있으면서 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더군요.
애써 모른 채 하고 혹시 열차표 살 돈이 남아있는지 용돈을 넣어 다니는 흰 편지봉투를 꺼내 살짝 열어보는 순간, 건너편 아저씨, 가만있지 않고 또 한 마디 건네십니다.
“어허, 저거 봐라. 어디서 뇌물 받았구나. 얼굴은 착하게 생겨가지고 그러면 못써. 이래 뵈도 나는 평생 나쁜 돈 한번 안받아봤어! 얼마나 받았어? 마누라한테 안 갖다 주려고 작전 짜고 있는 중이지?”
기가 차지도 않아서 대답하지 않으려다, 사람 좋게 생기고 주변에 사람도 없어서 이런 저런 농담을 주고받았습니다. “에이, 제대로 들켰네. 어찌 그리도 족집게같이 잡아내버리네.”
제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뒤로 순식간에 따발총 같은 질문공세를 폅니다. 나는 인테리어 하는 사람인데, 그쪽은 뭐하는 사람이냐? 나는 58년 개띤데 그쪽은 몇 년생이냐? 우리 큰 딸애는 올해 고3인데, 그쪽은 어떤가?
그리고 결론, 우리 이렇게 만났으니 앞으로 형 동생하자, 보아하니 내가 몇 살 형 같은데, 오늘부터 내가 형이다. 서울 올라오면 꼭 전화하라며 핸드폰번호도 교환했습니다.
내려오면서 속으로 엄청 웃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여비가 아직 남아있나 확인하려는 제 행동이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웃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답지 않게 엄청 붙임성이 있는 사람, 초스피드로 가까워지려고 기를 쓰는 ‘지하철 형님’ 핸드폰에 제 핸드폰 번호를 찍어주면서, 이거 괜히 나중에 낭패 보는 것 아냐, 얼굴 생긴 것 보니 만만치 않은데 나중에 큰 코 다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엄청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지하철 형님’ 못지않게 확대해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가끔씩 큰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확대해석’ ‘과장된 추측’ ‘억측’입니다.
상대방 의도는 전혀 그게 아닌데,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다보니, 자신의 틀 안에 갇혀 좁게 생각하다보니 사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적정선에서 서로 이해해주고, 서로의 상황을 고려해주는 노력,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내용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팠던 나머지 밀 이삭 몇 개를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비벼서 나온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바리사이들이 득달같이 예수님께로 달려와 따지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심심풀이삼아 밀 이삭 몇 개씩 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식사를 준비하려고 밀을 빻았다 던지, 반죽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물을 끓이기 위해 장작을 패거나 불을 피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밀 이삭 몇 개씩 먹은 것에 불과합니다. 생 밀 이삭 먹어봐야 또 얼마나 먹겠습니까?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제자들의 그 생각 없는 행위, 단순한 행동 하나 조차도 일로 생각했고, 안식일 규정에 어긋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친 확대해석입니다. 억지입니다. 무리한 끼워 맞추기입니다.
안식일 규정의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엿새간의 노동으로 피곤해진 육체에 하루간의 휴식을 제공함으로써 기력을 재충전하고, 활력을 되찾자, 이러한 휴식을 기반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경배하고, 노동에 더욱 열심히 매진하자는 좋은 취지에서 안식일 규정이 설정되었겠지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안식일 규정이 세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인간을 편안히 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육체에 부담을 주는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혹시라도 안식일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조바심 속에 살아가다보니, 안식일 규정이 백성들에게 선물이요 기쁨이 아니라 고통과 부담의 원인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가정공동체, 수도공동체, 교회공동체, 직장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규칙이나 규범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무엇에 앞서 구성원 각자를 위해서입니다. 공동선을 위해서입니다. 인간성 회복과 증진을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자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의 규칙이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까? 죽이는 것입니까? 사람을 성장시키고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까? 사람을 꼼짝 못하게 가두어놓는 족쇄 같은 것입니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이기양 신부님
'딱 걸렸다‘는 말 아시지요? 잔뜩 벼르고 있는데 트집 잡을 거리가 생겨서 한 번 넘어뜨릴 수 있게 된 상황을 두고 재미있게 표현한 말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이 그렇지요. 늘 예수님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리사이들에게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딱 걸린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마태12,1)먹은 것이지요. 이를 본 바리사이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마태12,2)하며 예수님께 따지고 듭니다.
'밀 이삭 몇 개 잘라먹은 것이 무슨 그리 큰 일이라고 비난하고 나서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밀 이삭을 잘라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은 그 당시 안식일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고 죄를 짓는 행위였지요.
바리사이들은 십계명 중 세 번째 계명인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말씀을 근거로 주님의 날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낼 것인가를 심사숙고하였고,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서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조항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될 조항이었지요.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도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 저촉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세 가지씩이나 위배가 되었지요.
첫 번째로, 밀 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에 걸리는 것이고, 두 번째 손으로 비벼서 먹은 것 역시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난 것이며, 세 번째 후후 불어 털어 내어 먹었다는 것 역시 키질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 조항에 어긋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바리사이들은 일상적인 행위 중에 어디까지가 일에 해당되는 것인지를 상세하게 법으로 정해 놓음으로써 안식일 법을 철저하게 지켜나갔는데 안식일에는 산책을 해도 1Km 이상 하면 일에 해당이 되었고,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것도 금지사항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닭이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먹어서도 안 되었지요.
바리사이들이 철저하게 안식일 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사람들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보통의 사람들을 범법자로 몰아가는 바리사이들의 극단의 율법주의를 오늘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12,7)
안식일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법 조항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야단 맞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야단 맞아도 싸지.?‘하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야단을 맞아야 할 사람은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하지요. 하느님의 말씀을 지나치게 철저히 지키려고 해서 문제가 될 바리사이들에 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너무나 소홀히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8)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안식일을 '일요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일요일이 주님의 날이라는 신앙 고백이지요.그런데 실제 내용 면으로도 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내고 있는가 되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날이 아니라 내가 쉬고 내가 놀러가고 나하고 싶은 대로 지내는 나의 날로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지요.
그것은 주님의 날이 아니라 일요일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지요. 하느님을 모르면 주일을 알 리가 없지요. 그러니 주일이 되면 마음대로 놀러가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지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 주님의 날로 기억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일주일 중 육일 동안을 나와 가족을 위해서 썼다면 칠일 째는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내고 이웃을 위해서 자선을 행하는 사랑의 하루를 보냅니다.
자, 여기에 신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토요 특전 미사를 하고 그 날 저녁부터 주일날 늦게까지 매주 산과 계곡을 찾아 놀러 다니느라 바쁘게 지냅니다. 반면에 또 한 사람은 이발사로 가까스로 새벽 미사를 하고 일을 해야 생활이 유지되는 사람인데 쉬는 날이면 양로원에 다니며 하루종일 이발 봉사를 하느라 바쁘게 지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누가 더 안식일을 잘 지내는 사람일까요? 당연히 이발사이지요. 이것이 하느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으로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일요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믿지도 않고 안식일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면 그런 비신자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다가 미사에 빠지고 또 해서 안 될 일을 하는 신자들이 제법 많지요. 바뀌어야 합니다. 오히려 신자들이 비신자들로 하여금 주일을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우리의 방법이고, 또 오늘 예수님의 말씀대로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요일을 즐기듯이 여기저기에서 흥청망청 보내고 자기와 가족만을 위해서 지낸다면 그것은 안식일도, 하느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일날이 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주간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삶의 계기를 만들어냅니다. 주일은 단지 쉬는 날이 아니라 거룩한 주님의 날로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날인 것입니다.
한 번 돌아보십시오. 나는 주일을 나의 날로 보내고 있습니까, 주님의 날로 지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주일은 일요일이 아니라 '주님의 날‘이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단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을 하느님께서 반기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일을 주님의 날로 지내고, 한 주일에 한 번은 남을 도울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의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법을 선행(先行)하는 법제정 정신
박상대 신부님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는 유대교의 핵심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유일신관(唯一神觀)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다신론적인 근동 아시아 세계 안에서 오랜 시간과 노력을 거쳐 얻어낸 그들 신앙의 핵심이다. 신앙은 무릇 내용(contents)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행위(action)를 수반해야 하듯이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유대교 신앙의 내용은 그분이 내려주신 율법(토라, 모세오경)이며, 신앙의 행위는 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실제로 지킨다는 것이 곧 그들 신앙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율법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유대교 안으로 율법의 관리와 해석을 담당하는 그룹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랍비(선생)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사람들이다. 이 선생들이 율법을 관리하고 해석하면서 ‘시행세칙’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이다.
탈무드는 유대교 율법의 시행세칙과도 같은 것으로서 율법의 해설, 구전(口傳, 미슈나), 전통적 관습, 축제, 민간전승 등을 총망라한 책으로서 유대인의 정신적, 문화적인 유산으로 평가된다. 탈무드는 약 1만 2천 권의 엄청난 규모로서 유대인들 지혜의 총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금도 이 책은 계속 기록되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율법과 그 기본적인 정신에 관하여 다시 한번 들려주신다. 마태오복음사가는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참조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는 말을 삭제하였다. 그 이유는 자칫 이 부분이 안식일 법을 폐기하려는 의도로 착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태오는 이미 예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는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을 통하여 율법의 완성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안식일’과 ‘제자들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밀 이삭을 잘라먹는 행위’를 놓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대립상황을 묘사하고 있다.(1-2절) 율법은 ‘이웃집 밭에 서 있는 곡식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신명 23,26)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의 행위는 범법행위가 아니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안식일법과 관련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의 행동(1사무 21,1-10)과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사제들에 대한 안식일의 예외규정(레위 24,9)을 들어 그들의 생각을 흩어버리신다.(3-5절)
오늘 복음의 요점은 사람의 아들이 바로 법(法)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8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지칭한다. 그분은 메시아의 상징인 다윗이나 대사제인 아론보다 크신 분이시며, 유대교 신앙의 요람인 예루살렘 성전(聖殿)보다 크신 분이시며, 율법의 주인이시다. 어떤 법이든 그 법이 제정되기까지의 정신이 있다. 이 말은 법을 제정하는 정신이 제정된 법을 선행(先行)한다는 말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 마태 9,13)는 구약의 인용이 바로 율법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사(祭祀)는 곧 규정된 율법이요 자선(慈善)은 이 율법을 제정한 정신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좋은 양심과 도덕이 법을 앞질러 간다는 말씀이다.
배가 고파서
유광수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입장에서 보면 그런 이의를 제기할만도 하다.
왜냐하면 율법규정을 곧이 곧대로 지키는 것을 생명으로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온 바리사이들이 볼 때에는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의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다. 바리사이들에게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가 분명하다. 어떤 경우라도 절대로 일(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은 해서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이 분명하다. 이런 원칙을 세워 놓고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도 삶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어떤 기준이 없을 때 혼동이 오고 우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혼동이 올 수가 있다. 그러나 삶의 원칙을 정해 놓고 살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고 정말 우리가 지켜야할 삶의 원칙은 어떤 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은 인간이 올바르게 살아가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인간이 법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즉 법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고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지 어떤 특정인만을 위해서 또는 인간을 법이라는 굴레에 메어 놓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삶의 질을 높이고 공동선을 위해 만들어 놓은 법이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공동선을 해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런 일은 법을 만들어 놓은 본래의 취지를 잘 못 알거나 공동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인만을 위해 잘못 이용될 때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인간이 만든 법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해야 하고 올바른 해석이 뒤 따라야 한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 하더라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하게 되면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악법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이의를 들으시고 그들의 이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그래서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레위 24,8과 민수 28,8-9에 나오는 내용을 들어 설명하시는 것이다.
구약의 예를 들어 설명하시면서 "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인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로 바리사이들이 이의에 대답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의 잘못은 인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본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이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도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착가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무시하거나 죄없는 이들을 단죄해버리는 어리석은 일들이 얼마나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일어나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 1-5)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그것이 잘한 일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이 잘한 것인지 아니면 잘 못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만 설명해주셨을 뿐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들의 행동에 가장 큰 잘못은 사랑이 없다는 것이다. 사랑보다는 법을 우선시 하였다는 것이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들이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무엇보다 사랑의 법이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법도 사랑을 막는 법은 없고 사실 사랑의 법보다 우선시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단 한 가지의 법만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법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릉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바오로의 말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제 가장 좋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비록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내가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가실 줄을 모릅니다.(코전 13, 1-7)
이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는데 바리사이들은 그런 행동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를 올바로 알아 들을 수 있다면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그들은 안식일에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한 것이고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라는 말은 단순히 밀 이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밀 이삭이란 예수님의 몸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 미사 참례 때에 밀떡으로 만들어진 성체를 받아 보시듯이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성체를 받아 모셨다는 것이다.
한편 바리사이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였다."는 것은 주일에 성체를 받아보시지는 않고 다시 말해서 주일 미사참례는 하지 않으면서 미사 참례하는 다른 사람들을 잘못했다고 판단는 하는 행위를 하고 있으니 그들이야 말로 안식일에 해야할 주님께 찬미를 드리고 주님을 모시는 일을 하지 않고 있으니 그들이야 말로 안식일(주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주일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 대해서 배가 고픈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먹어야 한다. 매일 먹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주일만이라도 주님을 먹어야 한다.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표현은 성체성사를 표현하는 언어이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면 우리는 늘 주님에 대한 배고픔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주님을 먹어야 한다. 주님에 대한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낀다는 것은 제자들의 참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주님의 제자이면서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전혀 주님에 대한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비의 법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프란치스코와 맛세오 형제가 길을 갔습니다.
낮밥 시간이 되어 둘은 포도밭에 들어가 포도를 따먹었습니다.
마침 주인에게 들켜서 맛세오 형제는 재빨리 도망치고 프란치스코만 붙잡혀서 흠씬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길을 가면서 프란치스코는 즐거워 길 가는 내내 맛세오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맛세오 형제는 잘 먹었네, 프란치스코 형제는 잘 두들겨 맞았네.”
이 이야기는 프란치스코가 얼마나 가난을 즐기고 모욕과 고통 가운데 얼마나 기쁘게 살았는지 보여주는 얘기지만 오늘 복음 묵상을 하다 이 얘기가 불현 듯 생각났습니다.
바리사이가 이 때 있었다면 “보십시오, 수도자라는 작자들이 어떻게 남의 것을 딱 먹습니까?”하고 따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프란치스코는 말할 것입니다.
“남의 것이라뇨?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배고픈 사람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필요성 앞에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준 받지 않은 회칙 9장에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형제들은 ‘사제들밖에는 아무도 먹을 수 없었던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은’ 다윗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필요성이 생길 때마다 어디에 있든지 간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먹을 수 있습니다. 필요성 앞에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것은 가장 필요한 사람의 것입니다.
필요한 사람이 가지는 것, 이것이 하느님의 법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이지 무자비한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법은 자비의 법이지 무자비의 법이 아닙니다.
예전에 어떤 분의 초대로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그러한 호텔 레스토랑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더군다나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지켜야 할 에티켓이 많다면서요? 하지만 어떤 에티켓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저로써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지요. 글쎄 식사를 하는 데에도 갈등을 갖게 하더군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많은 포크와 칼은 도대체 어떤 용도로 써야 하는지요? 포크는 음식을 찍어 먹을 때 쓰는 것이고 칼은 음식을 써는데 쓰는 것이 분명할 텐데, 그냥 하나씩만 있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많이 있어서 저를 헷갈리게 하는지요? 또한 음식도 처음 접하는 것이라서 어떻게 먹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 자리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릅니다. 김치찌개를 잘하는 동네의 백반집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성질이 좀 급한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식사 시간도 남들보다 훨씬 빠르지요.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습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를 모르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먹는지부터 살필 수밖에 없었지요.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가능한 한 다소 느긋한 태도를 가장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저를 초대하신 그 분께서는 무슨 음식이 나오면 항상 저 먼저 먹기를 권하십니다. 따라 하기도 벅찬 저에게, 어떻게 먹어야 하는 지도 모르는 저에게 먼저 권하는 그분이 그렇게 밉게 보이던 지요.
아무튼 그분은 저에게 좋은 음식을 사주시겠다고 그런 것이겠지만, 촌스럽고 무식한 저로써는 그 순간이 최악의 순간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최악의 순간이라는 그때를 떠올리면서 문득 ‘왜 그랬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다 아는 사람은 없지요. 따라서 그 순간 솔직하게 “저 이런 곳에 처음 와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잘 모릅니다.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했다면, 그렇게 땀 흘리면서 식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식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즉 내 자신을 상대방에게 드러내려는 마음에 나의 본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결과 최고의 식당에서 최악의 식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화를 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추수와 타작의 일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밀 이삭을 뜯음은 추수하는 것이고, 먹기 위해서는 밀 이삭을 비벼서 겨를 날려 버려야 하니까 이것이 바로 타작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핵심은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배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에 대한 배려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만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하는 바리사이들을 꾸짖고 계시지요.
바로 그들 앞에 최고의 분이 계시지만, 그들은 자신이 잘 났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그분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그러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느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이 세상은 최고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나 잘났음만을 드러내려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이 최고의 장소를 최악의 장소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은 지금 있는 자리를 최고의 장소로, 지금 만나는 사람을 최고의 분으로 만드는 비결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겸손함을 가지고 계시지요?
모르면 모른다고 합시다. 훨씬 편합니다.
장점을 찾아내는 것도 능력(이택희, '항상 최고가 되는 연습을 하라'중에서)
한 연설자가 청중을 모아 놓고 열심히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재미없는 연설에 청중들은 10분도 채 안 되어 반응을 나타냈다. 다들 몸을 뒤틀며 지루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연설자 입장에선 그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다는 사실에 연설자는 속으로 신바람이 났다.
처음엔 어색하기 짝이 없던 연설도 점차 청중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연설자가 자신감을 갖고 이야기를 전개해 가니 지루했던 장내 분위기가 싹 달라진 것이었다. 연설을 마친 뒤 연설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준 사람 앞으로 다가와 고마운 마음에 악수를 청했다.
모 그룹 고위직 임원인 그 연설자는 훗날, 자신의 유일한 청중이었던 까마득한 후배 직원을 기억해 두었다가 중요 보직에 추천했다. 물론 단 한 번 연설을 경청했다는 이유로 중요 보직을 맡기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후에도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그 사람의 태도가 자주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는 특히 남의 장점 찾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좀 지루하긴 했지만, 듣다 보면 뭔가 흥미로운 내용이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열심히 귀를 기울였더니 그분이 얼마나 열심히 연설 자료를 준비했는지 그 노고가 느껴졌죠. 신입 사원인 저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었고요."
이것이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연설을 경청하게 된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은 별 볼일 없는 이야기로 시간만 질질 끈다고 불평하고 있을 때 그는 연설자의 장점을 본 것이다. 그 결과 그날 연설자였던 그룹 임원의 눈에도 평소엔 보이지 않던 그의 존재가 부각된 것이리라. 상대를 진정으로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며,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면 상대도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며, 좋아할 수밖에 없다.
먼저 오늘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을 한 사람씩 머릿속에 그려 보자. 그 사람의 미소 짓는 얼굴을 생각하자. 그가 가진 장점을 떠올리고 칭찬의 말을 나지막이 되뇌어 보자. 당신은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큰 부자가 된 것처럼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입에서 그를 인정하는 말 한 마디를 던지는 순간, 상대방은 이미 당신 편이 되는 것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하느님까지
남상근 신부님
사사건건 호시탐탐! 예수님이 하시는 일마다 트집 잡으려고 노리는 바리사이들이 그렇습니다. 안 걸릴 재간이 없습니다.
빠져나갈 구석이라곤 없습니다. 살리려고 하지 않고 죽이려고만 들기때문입니다. 부정적 인간의 대명사, 바리사이들입니다.
매사에 부정적이라면 비판적인 것이 아니고 분석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저 부정적인 사람일 따름입니다. 대체로 상황이 괜찮은데도 어느 한 가지라도 어렵다 싶으면 온통 그것 때문에 한 걸음도 못나가는 이, 그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꽤나 좋은 사람이건만 단 하나의 약점이나 결함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이, 그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끝도 없이 스스로를 자책하며 가슴만 치고 있다면 그는 부정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긍정적이셨습니다. 고기 한 마리 안 잡히는 그 밤에도 그분은 긍정적이셨고, 술이 다 떨어진 카나의 잔칫집에서도 그분은 더 좋은 술을 생각하셨고, 온통 죄투성이인 이들의 가능성을 인정하셨습니다.
창조주께서는 당신의 피조물을 바라보시면서 늘 좋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긍정하신 것을 부정하는 나를 향해서도 여전히 괜찮다고 하시는 당신 아니십니까?
무엇이 더 중요한지?
노성호 신부님
최근 인터넷상의 명예훼손이나 개인정보 유출 등 사이버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 ‘인터넷에 올린다.’는 말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사이버 명예훼손과 협박·사이버 스토킹·성폭력 등을 포함한 사이버 범죄가 무려 3배 가까이 늘어서 지난해만 해도 무려 6만 1709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를 대변이라도 해주듯이 내가 평소 좋아하는 가수 성시경의 앨범 속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함께 나눠볼까 한다.
“발라드 가수는 화장실도 못 간다. 학교에서 화장실을 가면 성시경 화장실에서 봤다고 인터넷에 올리고, 사인해 달라고 해서 사인해 줬더니 성시경 손톱에 때꼈다고 다음날 바로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서 며칠 간 머리 몇 번 안 감았더니 냄새 난다고 올리고, 뒤에서 누가 ‘저기요, 저기요.’ 하기에 ‘네?’ 하고 돌아봤더니 ‘실물은 별로였어요.’라는 글이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 나도 사람인데…. 또 한번은 화가 나서 뭐라 그랬더니 이번에는 성격 안 좋다고 올린다. 나는 모든 글 쓰는 사람들을 다 존경하지만 그런 글들은 좀 그렇다. 난 인터넷 가요제 출신 가수지만 인터넷이 싫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가수 해봤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는 비단 가수 성시경의 하소연만은 아닐 것이다. 공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겪어보았을 그런 흔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고, 2천 년 전 예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불쌍한 병자들이나 고아·과부들과 함께 계시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뭐라 하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시거나 밀 이삭 몇 개 뜯으셨을 뿐인데도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책망을 한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만 감시하면서 살아가나 보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 여동생들과 술 한잔 했는데 다음날 ‘우리 신부님 여자랑 술 마시더라.’ 소문나고, 어쩌다 미사 시간에 늦어서 급한 마음에 신호 한 번 무시하고 지나치면 ‘난폭 운전 좀 그만 하세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누군가가 있나 보다.
무엇이 중요한지 제대로 알면 좋겠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아껴주셨던 예수님 마음,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값비싼 희생제물보다는 이웃들에게 베푸는 소박한 관심과 사랑이 더 위대하다는 진리를 모든 이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독서> : 구원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주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오기 위하여 모세와 아론은 파라오 앞에서 여러 가지 이적을 보였지만 파라오는 계속하여 고집을 부렸다. 파라오가 모세의 요구에 따르지 않으리라는 하느님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다(3,19; 4,21; 7,4).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탈출하는 달을 그해 정월로 삼으라고 분부하신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선택되고 구원받은 선택된 민족이 되었으며, 그들은 이제 하느님의 통치 아래 머물게 된다는 구원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흠 없는 1년 된 숫양이나 숫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도록 분부하신다. 그날 밤 이집트 전국에 있는 맏이들을 사람이나 짐승 모두를 치시며, 이집트의 신들을 심판하시리라고 말씀하신다. 다만 피가 묻어 있는 집은 이스라엘의 집임을 알고 넘어감으로써 재앙을 피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이 날이 이스라엘이 기념해야 하는 과월절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장이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실 수 있었지만, 파라오가 계속하여 고집을 피우도록 버려두셨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건히 하고, 그들의 후손들에게 하느님의 능력을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9,16; 10,2). 또한 이집트인들과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널리 알림으로써 오직 참다운 신은 당신뿐임을 선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집트 탈출을 준비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이집트에 열 번째 재앙이 내릴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열 번째 재앙에 대비하여 흠 없는 어린양을 준비하도록 하신다.
1년 된 양은 가장 신체적으로 왕성하다. 너무 어리거나 늙은 것은 제물로서 부적합하다. 하느님께 봉헌할 것은 가장 좋고 완벽한 것이어야 한다(레위 22,20). 또한 과월절 식사는 가족 중심의 공동식사로 이루어졌는데, 그 까닭은 가족은 혈연 공동체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는 신앙 공동체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어린 양은 아빕 월 10일에 준비하여 14일이 되기 전까지 4일 동안 간직해야 했다. 그 까닭은 어린 양의 상태를 충분히 검사하고, 나아가 어린양이 이스라엘의 맏이들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는 대속의 의미를 깊이 새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희생 제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의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상인방에 바르도록 분부하심으로써 맏이가 죽는 재앙을 피하도록 하셨다. 어린양이 대신 죽음으로써 이스라엘의 맏이들이 죽음에서 구원받았으며, 어린양이 하느님께 바쳐졌음을 상징하도록 하신 것이다. 피는 생명으로(창세 9,4) 희생 제사의 주요소이기 때문이다(레위 17,11).
흠이 없는 어린양은 곧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한 1,29). 그리스도께서는 흠도 죄도 없이 순진무구하시지만 인류를 대신하여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셨다(히브 7,26; 1베드 1,19).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맏이들을 죽음에서 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피는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히브 9,22) 열 번째 재앙을 대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마련하도록 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죽음을 대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시고 피를 흘림으로써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하시며 준비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파라오와 같은 악의 세력들이 아무리 방해할지라도, 그 모든 것까지 미리 예비하시고, 대책을 마련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시편 23,4)라고 노래했던 시인처럼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자. 오직 구원자이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신앙인이 되자.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남을우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하느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는 무죄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단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자비의 중요성이잘 드러나 있습니다.
율법도, 인간이 만든 틀도 모두 사랑과 자비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이 억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억울한 사람, 가난한 사람, 불행한 사람들을 버려두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현실을 봅니다.
우리 이웃에도 꼭 돌봐드려야 할 노부부가 살고 계십니다. 자녀는 있지만 형편이 어려워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분들은 사회복지제도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로 인하여 현실적으로는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도 법에 묶여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이웃의 예만이 아닐 것입니다. 사회 법규가 좋은 면도 있지만 이처럼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음을 보면서 어떤 예외 규정의 또 다른 규약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서만은 현 상황 그대로를 인정하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따뜻하고 정이 가득한 곳이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가 만든 틀보다는 선함이 앞선 판단과 이해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본말이 전도되면
장동현 신부님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안식일 날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모든 층마다 서도록 하여 계속 오르내리게 해놓는다고 합니다. 버튼을 누르는 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이랍니다.
물론 율법은 지켜져야겠지만 조금 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효율성과 합리성은 그렇다 치고 응급환자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걱정입니다.
또 손님에 대한 배려와 자기네와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질타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라는 율법정신보다는 율법주의를 택했습니다.
율법준수가 종교생활의 핵심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포장된 선물이 있습니다.
포장을 풀더니 포장지가 예쁘다며 곱게 접어 간직합니다.
그리고 선물은 쓰레기통에 내버립니다.
어이없는 이 행위 속에 율법정신과 율법주의를 혼동한 어리석음이 담겨 있습니다.
법정신과 법조문의 순서가 바뀌면 이처럼 우스운 꼴이 됩니다.
강호성 신부님
지난 날 동생과 게임을 하다보면 동생이 이길 때도 있었고, 제가 이길 때도 있었습니다만 제가 좀 더 많이 이겼더랬습니다. 그때마다 동생이 하는 말이 있었는데, “사람 나고 게임 났지, 게임 나고 사람 났나, 게임 잘하면 뭐해?”라고 하면서 제 속을 긁던 때가 있었는데, 오늘 복음이 그런 식이지 않나 합니다. 우리 스승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사람 나고 법(안식일)이 났지, 법(안식일)이 나고 사람이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의 율법주의와 예수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뭐 조금은 예수님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지 간에 제자들 단속을 잘못하여서 바리사이들에게 빌미를 잡힌 것이니까요. 그래도 역시 우리 스승 그리스도는 마지막까지 가르치는 교사였고, 악재를 호재로 바꾸어 호시탐탐 노리던 바리사이들에게 통렬하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라는 율법을 가지고 율법학자들은 구체적으로 39가지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추수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밀 이삭을 자르는 것도 추수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길을 가면서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은 안식일법을 어기는 것이고 이로 인해 예수님을 공박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민수기 38,9에 나오는 안식일이라도 성전에서 행하는 일을 예로 들어 답변하시면서 또한 하느님 앞에 어떠한 율법보다 사람을 위하는 것이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을 호세아서 6,6을 인용하여 강조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교에서 이해하는 그러한 율법이 더 이상 인간을 통제하는 하느님의 방법이 아님을 깨우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자신은 율법을 넘어서고 있다. “율법과 예언자들은 요한까지입니다. 그 후부터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마태 11,13) 또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법보다 사람을 우위에 두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법으로 우리를 꽁꽁 묶어두면서 당신의 법을 어기는 사람은 즉각 처단해 버리는 독재자가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고 한계상황 속에 처한 인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는 분이며, 하느님처럼 약자들을 돌보아주라는 약자보호법이 바로 율법의 근본이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본래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자비를 사람들이 이웃에게도 베풀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뜻이 어느덧 사라지고 율법학자들은 율법 조항에 매달려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율법을 위해 약자들을 희생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껍데기만 남은 율법을 본래 정신은 되살려 놓고자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어떤 의미에서 율법을 대신하는 새로운 질서가 시작됨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혹시 우리도 바리사이적인 모습을 지니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 인간적 관습에 따른 예의라든지, 성당에서 기도를 오래할 줄 알면서도, 형제와 이웃을 위할 줄 모르고, 이런 경우에는 마땅히 이랬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냉엄하게 판단하고,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늘 복음 앞에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아버지 앞에 오랜 시간, 또 자주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던 표양을 본받아 우리가 하느님 앞에 오랜 시간에 간절한 기도도 바쳐야 하고, 인간 서로의 갖추어야 할 관례적인 예의도 존중하여 행하여야 하지만,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와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권위를 식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체적 삶이 하느님의 뜻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규정에 매여 있는 것인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대해 가엾이 여기고 돌보아주는 행위가 없다면 우리 역시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아멘.
배상희 신부님
주일 날 공원에 가면 놀러 나온 사람들 상대로 아이스크림이나 솜사탕을 팔면서 생계를 꾸려 가는 난전 상인들을 봅니다.
그들에게 ''주일에는 일하면 안 된다. 쉬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는 생계가 걸린 문제입니다.
그래도 ‘굶는 한이 있어도 주일은 쉬어야 한다’ 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들에게 신앙은 구원이 아니라 죽음일 것입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금하는 계명은 사람을 힘든 노동에서 해방시켜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마음껏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과 규칙은 자유와 질서를 보장받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법과 규칙이 그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바리사이처럼 배가 고파서 밀 이삭 하나 잘라먹은 것도 추수한 거라고 우겨대면 할 말 없습니다.
너무 쉽게 내 편한 데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지만 형식적인 규정 준수에만 급급하는 모습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날 안식일 계명은 주일에 관한 계명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복잡하고 바쁜 현대인들을 배려해서 한국 주교회의는 토요일 오후 4시 이후에 바치는 미사는 주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을 자기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를 휴식하면서 하느님을 위한 날로 봉헌하려는 마음은 간데없고 어떻게 해서든 미사에만 참여하면 된다는 때우기 식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건 좀 났습니다. 아예 습관적으로 주일 미사에 빠지고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다음에 성사 보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 스스로 율법의 족쇄에 자신을 옭아매지 맙시다. 오늘 하루 나는 교회의 법 규정 앞에 얼마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안식일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픔이든 기쁨이든 함께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마태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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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 곳곳에 수 많은 강이 흐른다
길고 깊게 흐르는 강 우리를 가른다
서로 물 건너 마주 바라보지만
아~ 만나지 못한 채 그 눈길은 불신으로 가득 차.
어찌 강 위로 다리를 우리 놓지 않는가
어찌 강 위로 다리를 놓지 않는가
어찌 강 위로 다리를 놓아 서로 만나지 않는가
어찌 다리를 놓지 않나 (다리를 놓지 않나)
강은 장벽을 쌓는다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양편 언덕을 갈라선 부자와 가난한 이들
흑인들은 건너편 둑 위에 있는
아~ 백인 형제들을 멀리서 바라다 본다.”
20대 때 통기타와 함께 많이 불렀던 ‘다리’라는 노래의 가사다.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사 내용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세상이다.
아니 오히려 보다 복잡한 종류의 아픔들이 산재해 있는 세상이다.
왜 사람들 사이에는 미움의 강이 항상 존재해야 하는가?
왜 사람들은 이기심이라는 벽을 부수기가 힘든 것일까?
배고파서 밀이삭을 까먹는 이들의 배고픔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법이 만들어졌고 그것이 악법이 아니라 한다면, 그것이 만들어진 데에는 반드시 옳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정신이 아닌 활자에 묶여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어제 뉴스에서 구급차들이 지나갈 때 다른 차들이 길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기심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뉴스에서 좀 신나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 되는 그런 날을 희망하고 있지만, 늘 스트레스와 분노를 느끼고 만다.
대안은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이러한 세상의 모습에 가슴 아파하는 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믿는다.
세상이 늘 악과 싸워야 하는 현실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항상 존재해왔고 그들의 희생적인 싸움 때문에 세상이 유지 된다고 말이다.
세상이 아픈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준 상처의 결과다.
그 상처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 역시 모르는 사이에 선을 그어놓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이들을 멀리하는 모습이 있음을 인정하자.
밀어낸다는 것, 쫓아낸다는 것이 악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더욱 양산해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품어야 한다.
그래야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진다.
허기져 밀알을 까먹는 이들의 마음이 되어보지 않는다면, 그저 모두가 옳지 못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움을 비롯한 온갖 부정적 감정들은 치유되어야 할 무엇이지,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 복음에 대해 묵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판의 피해자는 자신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국에 있는 대형 박물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어떤 젊은 신사가 이 박물관에 들어와 그곳에 진열된 작품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앉은 자세로 그 작품들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노트를 꺼내 이것저것 열심히 적으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습니다. 처음부터 이 청년의 수상한 거동을 지켜보던 수위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 그 젊은 신사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은 작품들 앞에서 이것저것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설명 태도는 너무나 진지했고 어린이들은 아주 잘 이해가 된다는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들었습니다. 관림이 끝나고 돌아가려던 그 신사에게 수위가 궁금했던 것을 물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어제는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작품을 보셨습니까?”
그러자 그 선생은 “바로 이 아이들의 작은 키로 이들이 볼 수 있는 눈높이에서 작품을 보고 이해하기 위해서였죠.”
우리는 우리 판단에 대해 너무 자신 있어 할 때가 많고, 혹은 그것 때문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한 자매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 해 준 것인데 재미있습니다. 자신이 길을 가는데 버버리 코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뒤쫓아 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걸음을 빨리 했는데 그 사람도 빠른 걸음으로 자신을 뒤쫓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막 뛰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의 버버리로 이 자매를 가리면서 귀에 이렇게 속삭이더라는 것입니다.
“치마가 엉덩이에 끼였어요!”
사람을 판단하는 우리 대부분은 크나 작으나 이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병원 봉성체 때 안수를 해 주려고 하면 누워서 침을 뱉고 욕설을 하는 아주머니가 생각납니다. 이 분은 침대에 손이 묶여 있는데 손을 머리 쪽으로 가져가면 머리를 이리 저리로 흔들며 괴로워합니다. 아프게 하려는 것이 아닌데 이전의 기억 때문에 그러는지 복을 주려는 사람도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 안에서 상대를 보면 자기 기준을 벗어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서양 속담에 ‘저녁에 의자를 사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저녁 때 일을 하고 피곤한 상태가 되면 모든 의자가 다 편해 보이게 돼서 아무 것이나 사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는 ‘배고플 때 식료품을 사러가지 말라’고 하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다 맛있어 보이니 과소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는 남자를 다시 고를 때 시간을 좀 두고 골라야지 그 안에 절망과 화가 남아있다면 올바로 남자를 고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마음엔 율법의 의미보다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미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사리분별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대로 보이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 눈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는 관점을 ‘주관’이라고 하고, 제3자가 보는 관점을 ‘객관’이라고 합니다. 주관이란 말 안에는 나의 생각이 개입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즉 이미 나의 판단은 할 때서부터 내 자신의 생각에 의해 오염되어 인식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인식의 순간부터 오류에 빠지는 것이니 그 인식을 통한 판단이야 어떻겠습니까?
사람이 완전히 순결하고 깨끗하고 악한 마음이 하나도 없기 전까지는 누구를 완전히 판단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합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그 믿음에 반하는 것들은 다 틀려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당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하여도 베드로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예수님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어떤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옳게 보고 판단하실 수 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사람을 판단하는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Gibson 박사와 Fink 박사는 다음과 같은 발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 도시에서 잘 알려진 큰 사업가이며 유명인사 한 사람이 이 병원을 찾아와서 핑크 박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주 안절부절 하고 긴장 중에 있습니다. 푹 쉬어서 마음에 안정을 찾으려고 애를 써도 잘 되지 않습니다. 나의 건강상태는 양호합니다. 또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편안히 쉴 수 있는지 좀 알려주시고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핑크 박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근래에 그런 문제를 다룬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미 한 두 권의 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아무 해답도 주지 못했고, 그 사람은 그렇게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간 후에 그의 말은 핑크 박사에게 큰 도전거리를 주었고 또 자기들이 어떤 중요한 포인트를 놓친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브손 박사와 함께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장장 두 시간의 회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과거 2년 동안의 모든 기록을 조사해서 그 사람처럼 긴장과 불안에 싸여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적인 요소나 특징이 혹시 없는가를 찾아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작업에 착수했고, 오랜 작업 끝에 드디어 한 가지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내려는 태도, 즉 남을 비판하는 정신이나 태도였습니다. 무슨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남에게서 찾아내어 책망하고 비판하려는 자세, 남의 잘못을 언제나 말하고 생각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그런 증상의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다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직원들은 스스로 놀라서 한 두 시간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는 것이다.
남의 결점이나 잘못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세는 심적인 불안, 고통과 심지어 정신병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판단 받지 않으려면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기준으로 너희도 판단 받게 될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은 의학적으로 규명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면 자신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두려움도 커진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잘못하다가는 바리사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비판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긴다면 항상 편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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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는 주일 지키기
김권일 신부님
밀 이삭을 뜯어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니,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먹거리가 오늘날처럼 풍부하지 않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보리나 밀에 낟알이 맺히면 동네 아이들은 보리와 밀을 서리하여 그것을 불에 살짝 구워서 손바닥에 비벼 먹고 새까맣게 변한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웃던 시절이 생각난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서른아홉 가지 노동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추수 작업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탈무드와 같은 책에는 밀 이삭을 자르는 것도 추수 작업에 해당된다고 보는 법해석이 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이 항의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먹었다. 이를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따진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밀 이삭을 뜯어먹었겠는가? 바리사이들 눈에는 제자들의 가엾은 처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안식일 법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옭아매어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법규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번제나 속죄의 제사가 아니라 자비의 실천이다. 타인의 딱한 처지나 타인의 고통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휘와 무관한 채 법규나 계명만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인 삶은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허위의식에 빠지게 한다.
그 리고 법의 준수 유무를 들어 타인을 평가하고 단죄하는 습관에 빠지게 한다. 사랑을 담아내지 못한 계명이나 주일 지킴은 하느님 눈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 중국 서주 시대 말기에 당시 사회질서와 규범을 의미했던 예禮가 본래의 취지를 상실하고 변질되자 공자는 예禮에 인仁을 결합시켜 예禮의 참된 의미를 제시한다. 예禮가 인仁(도덕성)에 근거하여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 참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 복음에 등장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한다.
제가 전에 본당신부로 있었던 곳은 재개발로 인해 아파트 단지로 새롭게 조성된 구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개발 과정 안에서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었나 봅니다. 즉, 더 많은 보상을 받으려는 측과 재개발 조합 측에 서서 보상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측의 심한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정방문을 하다 보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계시더군요.
“저는 이제 성당에 안 나갑니다. 재개발 문제로 인해서 가톨릭 신자들 때문에 얼마나 아픔을 많이 겪었는지 몰라요. 돈 앞에서는 신자도 소용없더라고요. 아니 오히려 신자들이 더 열심히 욕하면서 싸웁니다. 가톨릭의 교리와 그 밖의 교육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그때 신앙의 회의가 들어서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성당 안에 더 많은 죄인들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신앙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음의 세 가지 단계까지 나아가야만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앎입니다. 주님을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의 첫째 단계입니다. 다음 두 번째 단계는 이해입니다. 주님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사랑의 일을 본받아 나의 이웃들에게 실천하는 것이 바로 표현의 단계입니다.
바로 이 세 번째 단계까지 가야지만 진정으로 주님과 하나 되는 주님의 제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삼 단계까지 이르지 못하지요. 어쩌면 일 단계인 앎에도 제대로 도달하지 못해서 주님께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물 만난 고기처럼 예수님께 따지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배고파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 발단이 된 것이었지요. 밀 이삭을 뜯었으니 추수이고, 밀을 먹기 위해 손으로 비볐을 테니 이것이 타작의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대 해석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든 예수님을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생각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율법을 공부하고 외우면서 하느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그 모든 행동에 대해 깊은 이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앎과 이해까지만 도달했을 뿐,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이라는 표현이 없었기에 오히려 하느님의 아드님을 고발하는 커다란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우리의 신앙은 과연 몇 번째 단계까지 도달했나요? 마지막 사랑의 표현 단계까지 도달해서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깊게 파기 위해 넓게 파기 시작했다.(스피노자)
모기 퇴치법
여름에 우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더위만이 아니지요. 어쩌면 더위보다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모기의 활동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모기 퇴치제라는 것도 많이 판매가 된다고 합니다. 저 역시 모기에게 많이 잘 물리는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름만 되면 모기의 공격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인터넷에서 ‘모기 퇴치법’이라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최고의 모기퇴치법은 선풍기를 틀어 놓는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모기가 들끓는 곳에 선풍기를 틀어 놓으니 모기들이 더 이상 물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조리기계업체 스위프푸드이퀴프먼트의 프랭크 스위프 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자가 어떻게 이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느냐는 E-Mail을 보내었습니다. 그러자 스위프 사장은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면 모기처럼 생각하면 된다. 내가 모기라면 시속 24km로 불어오는 바람 속으로 뛰어들고 싶진 않을 것이다.”라고 답변한 것입니다.
이 방법은 실제로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고 하더군요. 미국 뉴저지주에 소재한 비영리법인 미국모기관리협회(AMCA)에서는 “모기들은 빠르게 날지 못한다. 기껏해야 시속 1.6~2.4km이다. 따라서 선풍기를 틀어놓는 대단치 않은 기술(low-tech)이 모기를 퇴치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밝힙니다.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면 모기처럼 생각하면 된다는 말. 이 말에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입장 바꿔 생각하라는 옛 말을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들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약속시간을 잘 지키는 편입니다. 늦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먼저 기다릴 생각을 하고 항상 일찍 약속장소로 갑니다. 이러한 저의 습관은 미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미사 시작 30분 전에는 들어가서 고해성사도 주고, 기도도 하면서 미사를 위한 저 나름대로의 준비를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이러한 습관을 전해주셨기에 지금도 잘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인데 어렸을 때 안 좋은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중학교 때로 기억이 됩니다. 그날도 일찌감치 미사를 위해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성당에서 어떤 자매님께서 어떤 짐을 성당의 창고로 옮기는데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미사 시작하려면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다른 분과 함께 짐을 옮겼습니다. 짐을 다 나르고 성당에 들어갔는데, 글쎄 미사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를 시작하신 신부님으로부터 늦었다고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말이지요.
제가 게으름을 피워서 미사에 늦게 참석한 것도 아니었고, 나쁜 일을 하다가 미사에 늦게 참석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습관적으로 미사에 늦는 것도 아닌, 처음으로 미사에 늦게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야단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억울했지요. 그래서 고개를 푹 숙이고 안 좋은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현재 신부가 되어 늦게 미사에 참석하시는 분들을 보면 종종 그때가 떠올려집니다. 사실 저 역시도 미사 도중에 신자들이 뒷문을 열고 들어오면 분심이 생겨 힘듭니다. 그래서 화를 내고 싶은 생각이 생길 때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를 기억하면서 ‘이 분 역시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야.’, ‘올 수 없는 상황인데도 늦게라도 참석하신 거야.’라는 생각을 하니, 괜히 화를 내고 혼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금만 다르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바리사이들이 밀 이삭을 뜯어먹는 제자들을 보면서,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고발합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밀 이삭을 뜯어먹는 것이 무슨 죄가 될까 싶지요. 그러나 밀 이삭을 뜯는 것을 추수하는 것이라고 확대해석하고, 밀 이삭을 먹기 위해 손으로 비벼 겨를 날리는 것을 타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입장에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한 것입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다보니,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내 기준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넓은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죄 없는 사람을 단죄하지 않으며, 주님을 진정한 안식일의 주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욕을 주는 사람은 모래 위에 글을 쓰는 것 같지만, 그 모욕을 받은 사람에게는 청동에 끌로 판 것처럼 새겨진다.(조반니 과레스키)
아들자랑
아주머니 두 분이 자기 아들 자랑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아주머니 1: 우리 아들은 얼마나 착한지~ 반찬 투정하는 일이 전혀 없지 뭐예요~ 또 돈 달라는 소리도 할 줄 모른다니까요~ 호호호
아주머니 2: 어머~ 우리 아들도 정말 착해요... 반항이 뭔지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기는커녕 집안에서만 착하게 있어요~ 호호호
아주머니 1: 그래요? 아드님이 몇 살이에요?
아주머니 2: 이제 돌 지났는데...^^;; 그쪽 아드님은요??
아주머니 1: 이제 막 100일 됐어용~;;;;ㅎㅎㅎㅎㅎㅎㅎ
사실 자식 자랑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자랑하는 그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이 기준입니다. 자신이 보기에 착하고 똑똑한 것이지, 보편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는 별 차이가 없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하는 자녀를 자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자기 자녀에게만 자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준을 적용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기준을 적용시키면 어떨까요? 아마 모든 이가 착하고, 똑똑하게 보이지 않을까요?
남들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내가 아닌, 모두에게 너그러운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학원과 주님의 날!
신재용
세례를 받고 지금까지 주일과 대축일에 미사를 거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주일성화 의무를 다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못함에 언제나 가슴이 아픕니다. 저 자신의 안이함과 편안함을 위해 그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불혹의 나이를 넘으면서 우연히 살아온 길을 되짚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과연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는 것인지 …. 갑자기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2,3년간의 고민 끝에 저로서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살자고 말입니다. 아내도 인생을 살면 얼마나 산다고 가족과 떨어져 살아가느냐며 흔쾌히 동의해 주었습니다.덕분에 결혼 후 지금까지 아내와는 한 번도 떨어져 살지 않았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구상해 두었던 조그만 학원을 개원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주말을 거룩하게 지낼 수만은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일만 되면 아침 일찍 미사를 끝내고 사무실에 돌아와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책상 가운데 적어놓은 말씀 한 줄을 읽습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이 구절이네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 7)
주일성화의 의무는 교회가 만든 법을 수행하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신비를 묵상하는 데 있음을 기억합니다. ‘하느님 없이’ 보내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권고가 다시금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한 연구소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세상 모든 것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 연구소'로, 주로 사람들을 연구하는 곳이라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한 잡지사에서 이 연구소 소장을 인터뷰했지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자가 소장에게 묻습니다.
“소장님께서 보시는 이 시대의 현명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항시 자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어떤 사람에게서든 배울 점을 찾는 사람이지요. 심지어 걸인에게까지 배울 점을 찾는 사람입니다.”
이어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힘이 센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라고 보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자신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지요.”
다시 기자가 묻습니다.
“소장님, 그렇다면 진정으로 행복한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지요.”
기자는 이런 소장의 말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역시 이곳은 다르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인터뷰 시간이 끝나가자 기자는 모든 사람이 궁금해 하고 개인적으로도 궁금했던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소장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저도 ‘모든 것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소장은 짧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에 미치시오.”
맞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해야 할 그 일에 미칠 때, 모든 것을 이루고 사는 사람인 행복한 사람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거의 일에 계속해서 연연하고 있으며, 미래의 일에 대한 걱정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의 일을 놓지 않고 있어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율법을 확대해석하고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엄청난 죄인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따 먹은 것을 추수행위로, 밀 이삭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서 손을 비빈 것을 타작행위 했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결국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되는데 일을 했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인해 새 율법이 선포되었지요. 이 율법은 과거의 시간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닌, 현재의 시간에 내가 해야 할 사랑을 지금 당장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과연 어느 시간을 살고 있나요? 지금 과거의 시간만을 미래의 시간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현재의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주님의 사랑을 나의 사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남에게 어떠한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복도 결정된다. 남에게 행복을 주려고 하였다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행복이 오게 된다.(플라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마더 데레사)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님께 어린이처럼
가까이 가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많은 말들을
극히 단순한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버릇없이 되거나
거짓말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 제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어린이와 같아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너무 완벽하게
기도하려고 애쓴다면
우리가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금방 낙담하고
기도를 포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실패를 허락하시지만
우리가 자포자기하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린이 같아지기를
겸손해지기를 기도 안에서
감사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과거는 하느님 자비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랜 교회 역사 안에 참 회심자의 대표격인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지난 죄로 인해 괴로워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십시오.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십시오. 미래는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의 우위성, 자비의 중요성에서 대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늘을 찌르는 우리 죄 앞에서 그저 참아주시고, 또 다시 용서하시고, 늘 기다려주시는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자비란 단어는 하느님의 속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없는 부드러움의 하느님, 자상하고 든든하신 하느님, 회복시켜주시고 보상해주시는 하느님, 주저앉은 우리 어깨에 손 얹어 주시는 분, 아파 뒹구는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보듬어주시는 하느님...
이처럼 하느님은 더 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늘을 찌르는 죄와 극심한 고통, 다양한 인간적 한계 속에서도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자비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자비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 자비는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늘 안심시키는 진리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자비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아무리 크다 하여도 그 상처를 어루만져주실 하느님 자비의 손길은 그보다 훨씬 부드럽습니다.
자비로 똘똘 뭉쳐진 하느님의 현존, 그 자체로 더 이상 아무런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분 손길 한번이면 세상 모든 시름 다 잊습니다.
결국 거룩하신 하느님과 죄투성이의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인간의 비참과 하느님의 성스러움을 관통하는 축이 하느님 자비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못할 일을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십니다. 우리 인생길을 가로막는 갖은 억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분 자비의 팔은 떨고 있는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실 것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희망에 찬 새아침의 창문을 힘차게 열게 하실 것입니다.
심각한 죄책감에 시달릴 때 역시 하나님의 자비만이 우리를 다시 서게 합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 자비만이 우리를 긴 죄의식의 터널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들어 우리를 치유시킵니다.
우리가 그 어떤 인생의 악천후를 만나더라도 부드럽고 자상하신 자비의 하느님께서 동반하고 계심을 인식하는 것, 참으로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자비를 베푸는 순간은 우리 삶의 질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순간입니다. 우리 삶이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면, 우리 삶이 영롱하게 빛을 발한다면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비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정신
이훈 신부님
오늘 복음을 읽으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밀 이삭을 뜯어 먹을 정도로 배고픈 길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따라 살 것인지 질문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의 사람들 앞에서 들이대는 잣대는 율법이라는 잣대입니다. 우리가 쉽게 걸려 넘어지는 논리입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의무와 책임으로 점철되어버린 신자생활에 대한 도전입니다.
안식일의 정신, 주일의 의미는 사라지고, 의무를 실천하는 데 급급한 우리들에게 던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는 말씀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가 최고의 겸손을 살고자 하는 것은 나의 삶을 고통으로 옭아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희생을 통한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심판자가 되어 타인의 행동과 타인의 신앙생활을 평가하고 단죄하기에 급급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때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느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세상으로 퍼져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자비한 마음
임원지 수녀님
서울 본원에서 잠시 머물며 현관을 본 일이 있다. 지방에 사는 자매들이 다녀간 어느 날, 누군가 약식 성무일도를 현관에 놓고 떠났다. 중요하지 않아서 놓고 갔나보다 싶었고, 여행할 때 안성마춤이다 싶어 내가 가졌다. 그 후, 책을 찾는 알림이 나왔을 때 나는 부끄러워서 잡아떼었다가 못내 부끄러워 이실직고를 했다. 또 한 번은 모임차 본원에 갔는데 로션이 떨어졌다. 마침 복도에 로션이 나와 있길래 잘 되었다 하고 들고 오다가, 지난 부끄러움이 생각나서 다시 제 자리에 놓으며 하느님은 보시겠지 하면서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경리수녀님에게 가서 한 병을 청하니 바로 그 복도에 있는 것을 가져가란다. 허락으로 만사 평안.
우리 수련원에 온 아이들이 물건을 분실하고 자기 것인 줄도 몰라 안 찾아가기도 하고, 남의 것을 가져가도 그것이 왜 잘못인지를 모르는 아이도 있다고 한 자매는 말했다. 몇 해 전에 로마 총본부에 가서 1년을 산 일이 있다. 한국에 전화를 하려면 동전이 딸칵딸칵 쉽게도 내려갔다. 어느 날 재무총평의 원 아스페시 수녀님이 나를 부르셨다. “집으로 전화하고 싶으면, 주일에 내 방에 와서 하세요.” 수도회 재화는 이렇게 쓰는 것이지! 나는 언제 이렇게 감격스러운 관대함을 베풀었을까 싶다. 지구상에 기아로 죽는 이들이 있는 것은 재화를 나누는 손, 하느님 섭리를 대신 베풀고 나눌 사람이 부족해서라고 마더 데레사는 말했다.
“뜻 아니한 허물을 누가 알겠습니까?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주소서. ”(시편 19, 13)기도하며, 안식일의 주인답게 두루두루 넉넉하고 싶다. 나의 인색함으로, 나의 권위로 하마 누가 죄를 짓는 일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