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숫자
박 용 수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 우리 함께 불러보자!
호주머니에서 들려온다. 딸 녀석이 바꿨을 것이다. 신곡 몇 구절만 흥얼거려도 재빠르게 그 곡으로 벨을 울리게 한다. 흥겨운 마음으로 “여보세요” 물으면서도 쑥스럽다. 화면에 뜬 전화번호는 시골, 어머니다.
어머니가 전화를 할 때는 분명하다. 마을 어르신이 작고하셨는지, 반찬거리를 가져가라고 하시는지 첫 음성만으로도 단박에 안다. 어머니는 최근에야 전답을 다 놓으셨다. 그리고 대문 앞에 조그만 텃밭을 당신의 얼마지 않은 삶처럼 소일 삼아 일구신다. 어머니의 남은 기력을 빨아먹고 자란 푸릇푸릇한 채소들. 김장을 담느라 고단도 했으련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당당하다. 어머니는 반찬을 핑계로 자식이 보고싶었던 것이다.
어둠은 적막을 데리고 밤보다 먼저 온다. 어머니는 어느덧 코를 가늘게 골아대고, 나는 정적에 휩싸인다.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혼자의 시간을 어둠으로 목욕을 한다. 어머니가 김치 외에 덤으로 준 선물, 적막함이다.
묵은 때가 낀 낡은 TV, 빛 바랜 대나무 시렁, 그리고 거기에 매달려 어머니의 살결 같은 냄새를 닮아버린 메주, 앙상하게 갈비를 드러낸 서까래, 온통 낡았다. 아니 모든 것이 오래되었다. 어쩜 어머니조차도 잘 어울리는 그 묵정이들처럼 낡은 숨소리를 낸다. 멀뚱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내 눈에 들어온 어색한 풍경 하나, 새로운 전화번호부다. 새 옷을 입은 전화번호부는 지난 해 것을 밀어라도 내려는 듯 짓누르고 있다. 어머니처럼 왜소한 묵은 전화번호부로 손이 간다.
잔디판매, 전원주택, 보일러, 중기와 크레인, 개인용달, 납골묘, 합동 장의사, 초ㆍ재혼 상담소, 지하수 건설, 각종 석재, 화순 병원, 동양 농기계, 오뚝이 사료…….
앞면을 차지한 칼라 광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시골의 일상이 눈에 선하다. 시골인지라 주로 농사일과 실버산업, 특히 장례업과 관련된 사업이다. 그 흔한 산부인과 하나 있었으면 좋으련만, 노령화는 전화번호부조차 비껴가지 못한다. 몇 장 넘기니, 늙은 숫자들이 줄을 선 노인처럼 하나하나 서있다.
마을이름과 성명, 그리고 전화번호와 비고란. 춘양댁, 동촌댁, 하남동댁, 子 박창수, 이발소, 떡 방앗간, 子 박창호, 남도 추어탕, 子 박경방, 평산댁, 산매댁, 경로당……. 듬성듬성 비고란을 채운 메모들. ○○댁의 성명은 자식이고, 자 ○○의 성명은 부모다. 세대교체의 경계인지, 다른 마을 사람들을 위한 배려인지 모르겠지만, 子 ○○는 자식이 대외적으로 더 알려진 사람들이겠고, ○○댁은 남편이 돌아가셨거나 부인의 지명도가 높기 때문일 것이다. 틈틈이 건강상식과 농사정보, 에티켓, 속담풀이, 민간요법, 명심보감이 양념으로 들어있다.
단연, 내 눈에 붙잡는 메모는 마지막 한 장이다. 호미였더라면 한석봉도 능가했겠지만, 어디 볼펜이야 한 해 기껏 조의금이나 축의금 봉투에 이름 석자 쓰시는 것이 전부 아니었겠는가. 이리저리 비틀어지고 뒤틀어져 침이라도 묻어날 듯한 엄마의 숫자들이 궁색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목포 이모, 민수 외가, 준영 외가, 영광 사돈, 서울 누나, 둘째 이모 딸……. 어머니의 명문(名文)이다. 숫제 수없이 바뀌었을지도 모를 오래된 번호, 아니 숫자들. 그 기호들만 세속의 연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리듯 어머니의 기억을 붙잡고 있다. 초등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그 서툰 솜씨에 의지해 뒷자리를 지키고 계신 것이다. 여태껏 사용조차 못 하여본 번호, 아니 대부분 바뀌어 통화조차 되지 않을 숫자들.
하지만, 어머니의 숫자에는 온기가 있다. 숨결이 느껴진다. 번호마다 고유한 목소리, 특유의 표정과 자태, 그 사람만의 성품과 향기가 묻어있다.
그 중, 유독 내 시선을 붙잡는 숫자가 있다. 천만이, 내 오랜 의식을 깨운 명명, 숫자의 주인은 천만이다. 너무 오래되어 지워졌던 인물, 막내 이모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한 청년, 지옥에라도 가서 잡겠다고 분개하던 할아버지, 제발 잡히지만 말고 부디 잘만 살아달라는 할머니. 지금은 어느 산 어느 마을아래 살고 있을까.
어머니의 숫자, 그 지워지지 않는 숫자들도 어머니처럼 꿈을 꿀게다. 마을을 한바퀴 돌기도 하고, 아버지의 산소까지 마실도 간다. 그리움이 깊어 가는 겨울밤은 저 멀리 막내 이모도 만나고 도란도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응어리도 풀어드릴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어둠이 더욱 짙어지면 세월이 흐르고 해가 쌓일수록 어머니의 숫자는 더욱 신바람 날 것이다. 그래서 저리 오래도록 잠들지 않고 어머니의 머리맡에서 동승의 꿈을 꾸고 있을게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핸드폰과 달리 발신자를 알 수 없다. 누구일까. 오늘은 아주 낯설도록 오래된 사람의 목소리를 기대하면서 소중한 사람의 손이라도 잡듯 수화기에 손을 내민다.
따르릉 따르릉
한밤중의 전화소리가 내 무딘 가슴을 두드린다. 집나간 막내 이모였으면 좋겠고, 애면글면 통화가 안 된다며 묵은 번호를 연신 눌러대며 끙끙대던 부산 외숙모여도 좋겠다. 어머니의 은밀한 애인인들 또 어쩌랴.
* 화순 도암 출생
* 전남대 국문학과 졸업
* 전남일보 신춘문예 <아버지의 배코> 당선
* 광주동신고등학교 교사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