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근대사진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회화의 주제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는 이른바 19세기 말 ‘예술사진’ 이후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진사에서는 그 시발점을 스티글릿츠가 스트레이트(순수)한 사진을 제창한 20세기 초부터 카메라의 선명한 기록성으로 모더니즘의 미학을 완성시켜나간 사진가들이 출현하는 1940년대 무렵으로 보고 있다. 현대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컨템포러리’라는 용어가 사진사에 등장하는 것은 사진가의 관심과 시선이 공적인 세계에서 일상적이고 사적인 개인의 현실로 내려서는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한국 사진의 표현사에 있어서 한 시기의 변천과 전개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 기획된 이 전시는, 바로 이 ‘컨템포러리’ 사진이 등장하는 시기와 맞물린 1960년대 이후 들어 활동을 시작한 몇 사람의 사진가들의 활동을 기점으로 삼고 있다. 서양에서 진행된 사진사의 시간이 정상적인 근대사의 과정과 발전의 단계를 거쳐 나오지 않은 우리 사진사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는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들이 어느 의미에서나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사진 활동을 시작한 첫 세대의 사진가들이라는 점에서 크게 잘못된 설정은 아니다.
주명덕, 내설악, 27.5*35cm, 1972
우선 당시의 상황부터 살펴보자. 사진이 도래한 1880년대 중반이래, 한국의 근대사는 오랜 식민지 시대로부터의 해방과 분단, 동족상잔의 전쟁, 빈곤과 폐허, 첨예한 이념 대립과 정치 사회적 혼란, 장기간에 걸친 강압 통치 체제와 민주화 투쟁 등, 연속된 고난과 격동의 시간들로 점철되어 나왔다. 하나의 용암이 분출되고 그것이 채 굳어지기도 전에 다른 용암이 쏟아져 그 위를 덮치는 형국이었다. 그런 현실을 정면에서 기록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진 사진가도 거의 없었고, 그럴 수 있는 정황도 아니었다. 1986년 아시안 게임이 치러지기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5층 건물 이상의 높이에서 밖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진가들은 수백 년 동안 과거 봉건사회의 지혜로운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을 외면하고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에 심취하거나, 아니면 그런 현실에 대항해 나가기 위해서 부당한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진가는 초상사진이나 누드, 자연 풍경을 찍거나 현실대상으로부터 상징적인 조형미를 찾아내는 일에 열심이었고, 어떤 사진가들은 노동자와 거리의 창녀, 빈민촌, 전쟁고아, 농민 등 하층민의 삶과 같은 사회적인 현실에 렌즈의 초점을 맞추었다.
한정식,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2, inkjet print, 100*100cm, 2005
전쟁의 포화가 멎은 부산과 수복 후의 서울에서 그때까지의 예술 지상주의의 아마추어리즘의 꿈에서 깨어나 사진의 독자적인 기록성과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자각을 가진 임석재, 성두경, 이형록 등 몇 사람의 선구자적인 사진가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이 임응식이다. 그의 ‘생활주의 리얼리즘’은 1930년대 러시아 문학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1950년대 일본 사진계의 ‘사회적 리얼리즘’ 사진운동이 이론적인 동기와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임응식이 미국이나 일본의 사진의 움직임을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그런 추론을 가능하게 만든다. ‘생활주의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용어의 불명료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한국 사진의 장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해방과 전쟁, 빈곤과 정치 사회적 혼란 등 가혹한 현실을 전신으로 체험한 그들 세대의 사진가들은 그런 현실을 사진으로 기록해서 남겨 놓지도 못했고, 그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어떤 반성이나 밖으로부터의 비판도 없이 그 시대를 통과했다. 역사의 목격자,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외면하고. 그런 현실에 스스로를 순응시켜버리는 일에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엄격한 통제와 억압을 성립 기반으로 하는 군사지배 체제는 사진가들이 현실에 직접 개입해서 그것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을 원하지도 않았고 용납하지도 않았다. 예술사진가 쪽으로부터 비록 ‘거지사진’이라는 업신여김을 받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민식은 1960년대 중반부터 뚜렷한 사회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시기의 소외된 인간들의 삶의 모습을 줄기차게 천착한 몇 안 되는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프로 사진가의 출현
홍순태, Kingdom of Mustang RP print 85*80cm, 1991
1960년 중반 들어, 리얼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이라는 단순한 구조로 나뉘어 있던 한국의 사진은 공모전이라는 등단 형식과 저널리즘 분야의 경력을 거친 새로운 타입의 사진가들의 출현을 맞게 된다. 이 전시에서 제1세대로 분류된 한정식, 홍순태, 육명심 등이 이 무렵 동아사진살롱 등 콘테스트와 미술 공모전 등을 거쳐 사진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고, 황규태와 주명덕, 강운구, 김수남, 황헌만 등 저널리즘 출신의 사진가들은 그들과 전후한 시기에 각자 재직하고 있던 직장을 뒤로 하고 사진가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후자가 선명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큐멘터리 분야에서 각자의 관심을 일관되게 추구해 나간 한편, 고등학교 교사 출신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1970년대 이후 대학 사진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앉아 예술사진가로서의 작업을 이어갔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 모두 대학에서 정규의 교육과정을 밟았다는 것도 이전 세대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이다. 그것은 적어도 이들 제1세대의 사진가들이 각자 한국의 사진 분야에서 오래 동안 흔들리지 않는 특권적인 자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예술적인 재능과 지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심미와 정서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등장은 그간의 아마추어리즘과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집단적이고 전형적인 틀을 깨고 각자의 개인적인 시점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표현한 첫 세대로 기록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근대사적인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황규태, 만병통치, 디지털 프린트, 165*228cm, 2000
이들이 직업적인 사진가와 교육자로서 활동을 펼쳐나간 1970년대는 정부의 경제개발 정책에 따라 사회와 문화구조에서의 변화가 가장 급격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TV와 자동차, 전자제품 등의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미디어환경과 생활문화 전반에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은 사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제가 활성화되고 소비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사진을 다루는 잡지매체와 신문사, 광고사진 분야 등 전문적인 기능을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의 사진가들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났으며, 서라벌예술대학(1972년 중앙대학교로 편입)에 이어, 신구전문대학과 서울예술전문대학 등 새로 늘어난 사진의 전문 교육기관을 거쳐서 나온 졸업생들이 그 수요를 채워나갔다. 제1세대의 사진가들은 교육과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광고, 사진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지도자로서의 각자의 역할과 위상을 굳혀나갔다.
구본창, 긴 오후의 미행 6, gelatin silver print, 81*114cm, 1985-1990
이 프로 제1세대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인 강운구는 경제개발 논리와 근대화 정책에 의해서 일그러진 시대의 풍경을 바라보는 눈길을 지금까지 흐트러짐 없이 지속시켜 나오고 있다. 뛰어난 다큐멘터리사진이 어떻게 뛰어난 예술적인 수준을 획득할 수 있는가를 실증으로 보여준 그는 지금도 다큐멘터리와 저널리즘을 지향하는 젊은 사진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사진가로 평가되고 있다. 주명덕은 한국사진사에서 다큐멘터리 사진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지는 1966년의 <홀트 씨 고아원> 이래 고건축의 조형미, 누드, 유명 인사들의 초상, 무거운 검은 톤의 명상적인 풍경사진들을 찍어오고 있으며, 크고 작은 사진 이벤트들을 주도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황규태는 이들과 같은 저널 출신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아트를 지향했던 사진가다. 1970년대부터 현대문명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용과 비판을 중심으로 작업해온 그는 사진과 미술과의 접점에서 논의되어야 할 최초의 사진가 세대에 속한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후반에 이르는 한국의 사진은 임응식, 이명동, 문선호, 한영수, 정범태 등 몇 사람의 이전 세대의 사진가와 함께, 1930-40년대에 태어난 이들 사진가들에 의해서 주도되어 나왔다.
1980년대와 90년대를 한국의 현대사진이 열려나가는 출발점으로 보아야 하는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치러지기 얼마 전에 실시한 어느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2%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응답하고 있다. 그 근거나 실체가 어떤 것이건, 1970년대에서 80년대로 이어진 급격한 경제적 성장은 일부의 민권을 제외한 사회와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인의 자신감을 부풀려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진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사진가의 사회와 경제적인 지위도 향상되었다. 사진은 그래픽디자인과 함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가장 인기 있는 전공분야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은 1980대 말까지 사진전공 학과를 둔 각급 대학을 20여 개도 넘게 만들어냈고, 1990년대 말에는 그 숫자를 무려 40여 개까지 늘려 놓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양적인 팽창이 사진의 실질적인 내용의 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은 유학 자유화 정책이 시행된 70년대 중반 이후 해외로 떠난 유학 1세대들이 귀국해서 활동을 시작하는 80년대 중반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약 10여 년에 걸친 기간의 한국의 사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역동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1960년대 이후의 현대미술의 흐름은 팝 아트, 미니멀 아트, 컨셉추얼 아트를 거쳐 80년대에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은 그들에게 있어서 미술적인 전략을 실현시키는 가장 강력한 표현매체로 활용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사진과 현대미술의 움직임에 동조된 최초의 징후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 치러지기 직전에 열린 <사진, 새 시좌> 전(워커힐미술관)과 1991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치러진 <한국사진의 수평> 전에서 나타났다. 특히 1991년(토탈미술관)과 1992년(서울 시립미술관), 1994년(공평 아트센터)의 세 차례에 걸쳐 개최된 ‘수평’ 전은 한국의 사진에서 지금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자유롭고 젊은이다운 호기심으로 충만한 이 전시의 참가자들은 금욕적인 사진의 제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현대미술이라고 하는 넓은 영역에서 찾으려 시도했고, 그런 사정은 미술 전공자들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의 차가운 재현성은 시간과 공간, 평면이라고 하는 제도적인 성립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미술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매체로 인식된 것이다. 이 선언적인 성격의 그룹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1980년대의 고도의 경제성장과 그에 따르는 사회와 의식구조의 변화, 그리고 지구 규모로 진행된 급격한 이데올로기의 해체와 문화적인 변화를 리얼타임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젊은 표현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배병우, 소나무, 디지털 프린트, 260*135cm, 1992
실제로 이들 전시가 일으킨 파장은 「‘93 한국사진의 관점과 중재」(예술의전당)을 비롯해서, 해방 이후 1994년까지의 반세기 동안의 사진을 조망한 「한국사진의 흐름」(1994, 예술의 전당), 「아, 대한민국」(1994, 자하문미술관), 「‘94 사진, 새바람」(1994, 현대 아트 갤러리), 「한국사진의 지평」(1994, 현대아트갤러리), 「사진은 사진이다」(삼성포토갤러리), 「새로운 바람」(1995, 리쿠르트화랑, 동경), 「신체 또는 성」(1995, 갤러리 눈), 「한국사진의 현단계」(1994, 인데코화랑), 「사진-오늘의 위상」(1995, 경주선재미술관), 「사진의 조각」(1996, 금호갤러리), 「젊은 바람」(1996, 대구문화예술회관), 「사진-새로운 시각」(1996, 국립현대미술관) 전 등 수많은 대규모의 그룹전들을 집중적이고 동시 다발적으로 이끌어낸 촉매제로 작용했다. 회화와 조각 같은 다른 장르의 젊은 아티스트들을 대거 사진의 장으로 끌어들인 이 그룹전들은 그때까지 사진에 인색했던 미술관이나 대형 화랑의 벽을 내놓게 만들고, 정체된 한국의 사진의 장면에 즉각적인 반응과 활기를 일으킬 정도의 폭발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한국 현대사진사의 중요한 전기를 만들어낸 1990년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90년대의 주역들과 풍성해진 사진환경
오형근, 호랑이 무늬 옷을 입은 아줌마, gelatin silver print, 92.5*94cm, 1997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그때까지의 품성 바른 사진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이들의 사진이 기성의 사진가들에게는 물론, 동시대의 사진가들에게 조차 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보다 깊은 차원의 리얼리티를 재현해내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사진의 어휘만이 아니라 때로는 현실의 외관을 가공하거나 다른 장르의 예술의 언어와 방법을 사진의 제작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이들의 생각은 폭넓게 수용되어 나갔다. 이들 그룹전은 왕왕 지금까지 사진이 축적시켜온 개념과 기술을 답습하기보다는 그에 대한 부정의 형태로서 나타나는 일이 많았다. 새로운 세대의 사진가들은 그처럼 금욕적이었던 이전의 사진에 반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잡지의 인쇄된 사진이나 문자, 플라스틱, 돌맹이, 천과 나무 조각, 가족사진 같은 바로 가까운 곳에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들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작품 속에 끌어들였다. 유제를 바른 커다란 켄버스에 프린트하거나 등신대의 셀프 누드를 만들어 전시장 입구에 세워두는 등, 보다 직접적으로 감상자들을 자극해서 고상한 사진예술을 통속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모든 가능한 방법들이 시도되었다. 현실과 허구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사진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사진은 그 때까지 믿어왔던 것보다 훨씬 자유로운 매체였고, 사진이 대상으로 삼아야 할 세계가 아직 무한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처녀지로서 대부분 남아 있다는 사실이 젊은 사진가들에게 바르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미증유의 활기를 만든 「한국사진의 수평」전은 2, 30대 젊은이들의 사진에 대한 열정과 억제하기 어려운 욕구들이 하나의 자연발생적인 힘으로 분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회오리와 같은 움직임의 중심에는 1950년을 전후해서 태어난 배병우와 김장섭, 구본창, 이주용 등 몇 사람의 30-40대의 사진 운동가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변화와 자극을 원하는 동시대의 젊은 사진가들이 자신의 예술적 관심과 자유분방한 표현의지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적어도 몇 년은 더 기다려야 했을 지도 모른다.
소나무, 바다 같은 자연풍경에 대한 관조를 통해서 한국인의 정서의 뿌리를 찾아 내려가는 배병우와 탐미적이고 은유적인 사진의 어법을 구사하는 구본창, 시간과 공간이 미묘하게 어긋난 프레임의 병렬이 빚어내는 사진의 지각 구조와 심리적 효과를 다루는 김장섭은 대학과 사진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열린 전시와 평가를 통해서 한국 사진을 현대미술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가장 성공적인 사진가들이다. 이들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독일 현대사진의 정신적인 세례를 받은 유학 1세대라는 점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들 이외에, 극도로 절제된 감수성으로 표백한 듯한 명상적인 자연을 출현시키는 민병헌과 사진유제를 바른 한지 위에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단아하게 풍경과 정물을 정착시키는 이정진, 미확정의 시간과 공간을 정일하면서도 강한 서정적인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이갑철, 인간의 존재와 가족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 내려가는 최광호, 그리고 오형근과 정주하, 미국과 유럽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니키 리와 천경우 등 30-40대의 사진가들이 뚜렷한 개성을 보이며 90년대의 사진의 장면에서 독자적인 표현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구성수, All of the place 1, color print, 150*120cm, 2006
21세기는 착실하게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1998년에 출간된 최초의 이론전문지 계간 <사진비평>은 시야를 사진에 한정시키지 않고 영화와 문학, 회화 등 인접 예술분야는 물론 사회와 역사, 심리, 언어 등,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사진의 언설을 확산시켰다. 또 유일하고 권위 있는 평가 시스템인 <사진비평상>을 제정해서 박경택, 권오상, 김상길, 김옥선, 윤정미, 백승우, 여락(김낙균), 지성배, 강재욱, 방병상, 김화용, 김병훈, 구성수, 신은경, 고현주, 안옥현, 전은선, 권정준, 파야(김상호), 배진희, 김인숙 등 20-30대의 젊은 작가들과 김응수, 배남우, 문혜진 등 평론 부문에서 역량 있는 신인들을 발굴해냈다. 이밖에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박진영과 이윤진, 이선민 등도 이들과 같은 세대의 사진가다.
김옥선, Alex and Eric, C-print, 96*114cm, 2004
2000년대 들어 구미의 대학에서 사진사와 미학 등을 전공하고 돌아온 젊은 이론가들에 의해서 사진평론 분야에도 활기가 일기 시작했다. 이영준, 진동선, 최봉림, 이경률, 박평종, 손영실, 백지숙, 박영택, 강수미, 반이정 등 사진과 미술 분야의 평론가들이 지적인 사고와 언어로 사진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국내 여러 도시들에서 사진전이 빈번하게 열렸고, 인쇄물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해외의 저명한 사진가들의 오리지널 프린트가 미술관과 사진화랑들에 걸리는 일도 잦아졌다. 사진잡지의 숫자가 늘었고 다루는 내용도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했던 이전의 잡지들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2002년 한미사진미술관이 개관된 데 이어 2005년에는 한국 최초의 공립 동강사진박물관이 영월에서 문을 열고 사진 콜랙션을 시작했다. 2006년 한 해 동안 영월과 대구, 서울에서 국제적인 규모의 사진축제들이 잇달아 개최되었다. 또 최근 수년간 배병우를 비롯해서 구본창, 김아타 등의 작품이 외국의 대형 옥션과 아트 페어, 미술관과 콜랙터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해마다 값을 경신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사진의 성격에 대한 자각과 국제화 시대의 과제
방병상, 개울가에서, light jet C-print, 120*157cm, 2004
미디어나 사진가의 관심과 표현방식이 어떻게 바뀌건 사진은 본질적으로 기록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활동을 시작한 사진가들을 기점에 늘어놓은 이 전시는 예술의 변천사와 동시에 전쟁의 폐허와 굶주림과 혼란과 좌절과 분노, 그리고 근대화와 민주화, 경제적인 성취의 과정을 지켜본 사진가들이 그 과격한 변화와 충격들을 어떻게 받아들였으며 현실에 대한 인식을 어떤 식으로 표현에 반영시켜 나왔는가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기획이었어야 했다. 한국의 사진가들은 오래 동안 빈곤과 억압과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모험과 도전 대신 안전한 예술가의 역할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사진사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는 아마추어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진의 장면은 사회적으로 ‘유해한’ 극소수의 사진가가 아니면 수평선 위에 펼쳐진 저녁노을이나 서민들의 감동적인 삶의 모습을 찍는 사진가들로 거의 양분되어 있었다. 1980년 5월의 계엄령 선포로 시작된 광주의 비극도1987년 6월의 항쟁도 신문기자 등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몇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진가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되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으려 하는 보잘 것 없는 것, 버려지는 낡은 것, 시간과 함께 소멸되는 것, 그럼에도 아직 어느 곳인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진정한 가치들…, 1960년대 이후 40여 년간의 한국사진을 말할 때 70-80년대의 한국 사회에 내재된 현실적인 문제들을 사진행위의 중심에 놓고 작업해온 강운구, 그리고 한국과 아시아의 정신문화의 뿌리를 천착해 나온 김수남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의 많은 젊은 사진가들이 조형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성취에 매달려 있을 때, 강홍구, 노순택, 성남훈, 박하선 등 새로운 타입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은 자신의 역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시대의 기록자로서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웠던 전환기의 한국사진에서 균형을 유지시키는 힘으로 작용해 온 것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백승우, Real worldⅡ, C-print, 180*225cm, 2006
급변하는 시대와 문화적인 환경은 어떤 사진가에게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변화시키고, 새롭고 세련된 예술적 전략을 작품에 반영시키지만, 어떤 사진가는 지나치게 안이하게 그들의 방법을 답습하기도 한다. 최근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스팩터클한 플랜트나 이질적인 건축 공간, 도시의 일상, 인테리어 같은 유형학적인 작품의 소재나 접근 방법에서부터 대형 카메라와 대형 프린트과 디아색 페이스라고 하는 디스플레이 방식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진의 특정한 경향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과도기에 일시적으로 나타나기 쉬운 일과성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현상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은 앞으로 이들이 사진이 갖고 태어난 성격과 예술 매체로서의 가능성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가, 또 국제적인 현대미술의 변화의 속도와 엄격한 기준에 견뎌낼 어떤 수준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가에 한국 사진의 미래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