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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향해 떠나며 권한 말
행 20:25-38
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 설 교 >
주는 것이 복이 있다
행 20장 33~35절 / 정필도목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35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는 것과 받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여 받으면 받을수록 부자가 되고, 남에게 주면 줄수록 가난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는 것을 빼앗기는 것, 도적 맞는 것,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유산을 많이 받으면 복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뇌물도 많이 받으면 축복 받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구나 남의 재산을 빼앗거나 남의 기업을 빼앗아서 일단 자기 것으로 만들고서는 마치 자신이 성공한 것처럼 승리를 자축하는 착각에 빠진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만일 이 세상이 이런 사람들로 가득찬다고 하면 이 세상은 곧 망하게 될 것이고,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항상 주면서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
1.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을 좋아하고 대접하는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은 언제나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주심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5:8절과 8:32절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7-1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일서 3:16-19절에서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고 시간을 주고 물질을 주고 나아가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까지라도 바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계명은 한마디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으뜸 계명입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고 하면 이 사람이야말로 모든 계명을 다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모든 복을 다 받는다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뿐만 아니라 모든 복을 다 받게 될 줄 믿습니다.
2. 주는 자에게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공부를 많이 하고 출세를 하면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기가 많을수록 유명해질수록 더욱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시적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 물질 때문에 그 명예 때문에 반드시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행복은 이런 것에 있지 않습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왕으로 지혜와 지식이 뛰어나서 세계각국으로부터 그를 만나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는 여자를 천명이나 데리고 살아보았고, 먹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져보았습니다. 그는 쾌락을 추구하면서 쾌락이 될만한 것은 금하지 않고 무엇이든 다 해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사람이지만 그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이 고통과 허무만 주었을 뿐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노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전 3:12) 사실 솔로몬이 그동안 누린 세상의 낙은 일시적으로 그를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했을지 모르지만, 늘 고통의 무게에 짓눌려 하루도 마음 편안한 날이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한 일을 하는 것만이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이 된다는 것을 인생말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솔로몬의 이러한 깨달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연호 기자는 대학생 때 대표적인 데모꾼으로 늘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대하여 얼마나 잘못하고 있는지 그것들을 찾아서 보도하고, 그 사례들을 모아 4권의 책으로 써낸 극단적인 반미주의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미국에 대하여 좀더 알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가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구 소련도 망하고 구라파도 엉망이고 일본도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유독 미국만은 8년 내리 호황을 누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에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미국이었지만 이 문제를 진지하게 연구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린 결론은 [발렌티어]였습니다. 미국이 타락했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미국을 지탱해나가는 것은 [발렌티어] 즉 [자원봉사 정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공부만 잘하면 얼마든지 인류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중 고등학교 때 자원봉사 한 실적이 없는 사람은 일류대학에서 절대로 받아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원봉사의 정신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머리가 비상해도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일주일에 몇 시간씩 사회에 나가서 남을 돕고 선한 일을 하며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합니다. 이를 위해 스스로 자원하여 봉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년간 40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고 미국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왜 기쁨이 없습니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왜 대접을 받지 못합니까?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일에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항상 대접을 받으면 살려고 한다면 남을 대접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주는 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병 문안을 받는 것과 병 문안을 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플 때 병 문안을 받는 것은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병 문안을 받는 것은 작은 복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병 문안을 가는 것이 더 큰복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은 건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칼 메닝거 박사는 의학 강연 후, 주위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찾아가 도와주는 것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는 처방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신 분 신경쇠약에 걸리신 이런 분들은 집안에 가만히 계시지만 말고 나가서 힘닿는 대로 도울 사람을 찾아서 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4.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을 도울 수 있는 건강과 남에게 줄 수 있는 물질이 남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사실 구제 받는 사람보다 구제하는 사람이 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5. 주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눅 6:38).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가 세계적으로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려서부터 주는 생활을 실천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한 청년이 달려와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다고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도리어 근심이 되어 얼굴에 슬픈 기색을 띠며 돌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영생을 얻고 싶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자신이 소유한 재물이 너무 아까워서 그만 예수님의 권면을 거절하고 근심중에 돌아간 것입니다(막 10:17-22).
잠언 11:24.25절을 보면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했습니다. 요즘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 때에 참으로 의미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잠 28:27).
특별히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한 영혼에게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집을 드리고 땅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백 배의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막 10:28-30). 우리 수영로 교회는 부산을 복음화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때가 되어 [부산 성시화 본부]가 세워지고 부족한 제가 본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부산의 1300여개의 교회가 이 일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좋은 일에 앞장서서 부산 400만 시민을 감동시킬 때 이것이 부산복음화의 첩경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더 좋은 전도법은 없습니다. 사랑은 가장 큰 은사입니다. 이제 남북 정상회담으로 북한의 문이 열리고, 북한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날도 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들을 열심히 도와줌으로 해서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김대규라는 사람은 [사랑과 인생]이라는 책에서 사랑의 십계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① 계산하지 말 것. ② 후회하지 말 것. ③ 되돌려 받으려고 하지 말 것. ④ 조건을 달지 말 것. ⑤ 다짐하지 말 것. ⑥ 기대하지 말 것. ⑦ 의심하지 말 것. ⑧ 비교하지 말 것. ⑨ 확인하지 말 것. ⑩ 상황에 맡길 것.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계산하거나 후회하거나 기대하지 말고 무조건 나누어줄 때 좋은 열매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작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 더 나아가서는 원수까지라도 사랑할 수 있고, 베풀 수 있고,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항상 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복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수영로교인이라면 누구나 자원봉사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작은 선(善)들이 모여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만듭니다.
바울의 마지막 설교
행 20장 33~35절 / 남 호목사
오늘 본문말씀은 바울의 마지막 설교 가운데 마지막 부분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간증하면서 자신은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한 일이 없고, 자기의 생활은 자립했으며, 동료들의 생활까지도 도와주었고, 동료가 아니더라도 약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도움을 주고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설교를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바울은 이 설교를 통해서 자신도 어려운 생활 속에서 나눔의 삶을 살았고, 주님도 주는 삶을 강조하셨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는 삶, 나눔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받는 기쁨과 받는 행복보다 주는 기쁨과 주는 행복이 더 크고 오래 갑니다. 경제적으로 계산했을 때, 나누지 않고 모으고 쌓으면 늘어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서 보통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근검절약하고 모으고 쌓아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으고 쌓는 것보다 주는 일과 나눔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쌓아두는 인생을 살지 말고 나누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 안겨주리라" 이 말씀은 주는 자에게는 후히 되어 흔들어 넘치도록 주지만, 나눔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누지 못하는 사람은 후한 나눔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과부가 2푼의 엽전을 헌금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은 많은 헌금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적은 헌금을 칭찬했습니다. 이유는 바리새인은 많은 것 중 일부를 헌금한 것이고, 과부는 적지만 자기 소유의 전부를 헌금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물질의 양보다 그 사람의 마음과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삼하12:4 어떤 행인이 부잣집에 손님으로 왔습니다. 부자는 자기 소유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아까워서 가난한 집에서 겨우 한마리 먹이고 있는 양새끼를 빼앗아다가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짐승을 빼앗아 대접하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신창원은 부잣집에 물건을 훔쳐다가 가난한자들을 도와주었다는 내용이 씌어 있는 그의 일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을 얻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나누는 일이 좋은 일이고, 선한 일이고, 주님의 뜻이라고 하지만 행위가 불손하면 범죄가 됩니다. 나눔이란 물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마음도 서로 나눌 수 있고, 지혜도, 힘도, 지식도, 재능도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쌓으면서 사는 자보다 나누면서 사는 재물에 복이 있다고 가르쳤고, 나누면서 사는 자는 나눔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은 어떠한 이유로 나누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보고 서로 은혜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Ⅰ. 세상을 살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부모로부터 생명을 받았고 양육을 받았습니다. 형제 자매들로부터 정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들로부터 세상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는 이웃 사람과 친구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삶에 필요한 것은 넉넉히 공급받으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농토에서 농사짓고 농부가 농작물을 재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의사가 없으면 병이 났을 때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살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비나 공기를 공급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21c의 찬란한 문화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에 전화하면 바로 이웃에서 하는 것처럼 통화가 됩니다. 또한 컴퓨터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세계 정보를 버튼 하나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내가 연구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받은 것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조용히 생각해 보면 내것은 조금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은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많이 받았으니 나도 다른 사람을 위해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마18:21-35 어떤 신하가 임금에게 빚을 졌습니다. 신하의 사정이 딱하고 탕감을 요구해 왔기에 임금이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탕감 받은 신하는 동관하나가 빨리 빚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문이 임금에게 들렸고 임금이 탕감해준 신하를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너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너도 동관의 빚을 탕감해주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그 빚을 갚을 때까지 옥졸에게 붙였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은 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가 적은 것 하나 나누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Ⅱ. 나누는 일은 생명을 얻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일정한 배출이 일어야 합니다. 음식을 섭취만 하고 배출하지 않으면 건강이 유지가 안됩니다. 최근에 생기는 많은 병들은 섭취하고 배출이 원활하게 되지 못하여 생긴다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성인병의 원흉인 비만은 받기만 하고 나눔이 일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생기는 병입니다.
이런 반면 굶어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도한 음식 섭취로 한 쪽은 비만으로 죽고, 한쪽은 굶어서 죽습니다.
나눔이란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도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기본적으로 흐름에 있습니다. 활발한 신진대사가 생명을 유지하게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먹는 물도 흐르지 않고 고여있기만 하면 물이 썩고 생명을 위협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사해 바다는 받아들이기만 하고 보내지를 못하기 때문에 물은 물이되 죽은 물이요, 썩은 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으고 쌓기만 좋아하고 나누지 않으니까 강도가 생기고, 도적이 생기고, 사기꾼이 생겨서 사회가 살벌하고 갈수록 무서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누며 사는 사회는 정이 있고, 사랑이 있게 되고,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새롭고 신선한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받은 은혜를 자기만 갖고 있으면 발전이 없지만 전도를 열심히 하면 더 깊은 은혜로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유는 나눔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는 삶, 나눔의 삶은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려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요12:24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썩지 않으면 한일 그대로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썩어진 한알의 밀처럼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Ⅲ. 주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 단체는 서로 나눔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의 나눔, 고통의 나눔, 기쁨의 나눔이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게 합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는 나눔이 있는 곳과 나눔이 없는 곳으로 분류가 된다고 합니다. 지옥은 항상 부족을 느낍니다. 긴장과 경쟁이 있게 됩니다. 반면에 천국은 나누어주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풍족하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사회가 지옥과 같은 분위기가 팽배해 왔습니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해 나눔의 미덕은 특정한 행사 정도로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사회의 빛이 되어야 함에도 교회 자체 확장에만 힘을 쏟고 있을 뿐 교인들과의 나눔, 이웃과의 나눔, 교회와의 나눔이 미비할 때가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뛰어나게 하는 것처럼 하지는 않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신탄진침례교회는 나눔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교헌신예배, 구제헌신예배, 농어촌 개척교회들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농어촌 개척교회 부흥회는 교회와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축복을 나누어 가지는 시간입니다. 어떤 때는 말로 표헌키 어려운 교회도 있는데, 그때마다 교회와 목회자는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부흥회를 인도합니다.
서로 나누어 가지는 사회를 만들어 갈 때, 그 사회가 살아나게 되고, 비로소 교회가 생동감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피려고 하면 우선 나눔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주는 일, 나누어 가지는 일에 익숙할 때,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성도의 삶이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라 그리하면 줄 것인데 흔들어 넘치게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약속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비결이 되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나누어주기를 즐겨하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세계적으로 미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라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는 세계 최대의 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어떤 아주머니가 밤에 식당에 와서 일을 하는데, 이유는 아프리카 선교사를 위해 선교비를 마련키 위해서 입니다. 아주머니는 즐겁고 피곤을 잊은 채 일을 한다고 합니다.
잠19:17 "가난한 자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주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잠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고후9: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씨를 뿌리면 반드시 싹이 나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를 위하여 나누어 가질 때 서로 풍성해지고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스텐드포드 대학생 두 사람이 학비 마련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던 중 초청음악회를 열어 수입으로 학비를 마련키로 하고 폴란드 사람 "파테레프스키" 피아니스트를 초청하고 열심히 선전하고 음악회를 마쳤습니다. 음악회를 마치고 수입을 계산하니 1600불이었는데, 2000불의 강사료도 안돼는 금액이었습니다. 두 학생은 파테레프스키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다음에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파테레프스키는 행사에 든 비용을 떼고 10%씩 학생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난 후 파테레프스키는 폴란드의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폴란드는 식량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수상은 국민을 구하기 위하여 미국 구호청에 원조를 신청했습니다. 이 요청을 받은 청장은 즉시 수만톤의 식량을 보내주어 기아에서 신음하던 폴란드를 건져냈습니다. 파테레프스키 수상은 너무 고마워서 구호청장을 만나 관대한 처사에 감사했습니다. 청장은 겸손하게 "도와드릴 수 있었고 형편이 되어 다행입니다. 제가 스텐드포드 대학에 다닐 때, 수상께서는 매우 관대하게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오히려 그때를 고마워하더라는 것입니다. 불과 몇십불 도와주고 한나라를 살려내고 도움을 입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주라 그리하면 흔들어 넘치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바르게 살고, 생명을 살려내는 아름다운 사회는 서로 나눌 때 만들어집니다. 주님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신탄진침례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귀한 일을 해 내려면
행 20장 33~38절 / 이재철목사
♬ 주의 길을 가리 ♬
1. 비바람이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눈보라가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길
2. 험한 파도 앞길을 막아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모진 바람 앞길을 가려도 나는 가리 주의 길을 가리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후렴)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예수님을 알고 난 후 달려갈 길이 있다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안될 것처럼 보이는 일도 그 사람이 하면 되는 경우가 있고 잘 되는 일도 그 사람이 하면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차이일까요?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은 힘든 상황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의 엄청난 핍박이 있었고, 다른 사람의 병은 고쳤지만 자신의 육신은 건강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도바울은 귀한 일을 거뜬히 해냈습니다.
◈ 어떻게 하면 귀한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① 자기 이익보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33-35절)
바울은 물질을 탐하지 않고,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여 동행하는 이들까지 보살펴주었습니다.
아가는 은, 금에 눈이 어두워서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팠습니다.
게하시는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준 선물에 눈독을 들여서 물질은 가졌으나 몸이 병들어 버렸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요단강으로 물을 흘려 보내기 때문에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해는 받기만 해서 바다가 죽었습니다.
눅 14 : 12-14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적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심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남을 대접할 때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라고 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을 도와서 도와준 만큼 되돌려 받으면 끝이지만,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도와주면 받은 사람은 도와준 사람이 잘 되도록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갚아주십니다. 그것이 복된 것입니다.
자신의 몫을 먼저 챙기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앞서가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옆에 사람이 없어집니다. 반면 남을 행복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주변에 늘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과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② 기도 제목을 솔직하게 내어놓고 함께 기도하십시오. (36절)
사도 바울은 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기도한 후에는 기도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나 기도할 때까지는 기도 이상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신다.
③ 매번 이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마지막 기회다 라고 생각하며 일하십시오. (37-38절)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받은 자로써 최선을 다하십시오.
미루는 사람에게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미루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게으른 사람을 악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위의 사람들은 어떤 일을 맡겨 줘도 능히 해낼 수 있습니다.
주는 자가 복있는 사람
행 20장 35절 / 조상호목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유명한 철학자요, 정치가였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 세상에는 3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거미 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거미는 자기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곤충을 뜯어먹고 삽니다. 거미는 남을 해치면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거미 같은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 사는 유형입니다. 둘째로 ‘개미 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개미는 성실하게 일하면서 자기를 위해 열심히 모아놓습니다. 개미는 자기가 땀을 흘린 만큼 먹습니다. 개미 같은 인간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을 돕지도 않습니다. 자기와 자기 가족밖에 모릅니다. 셋째로 ‘꿀벌 같은 인간’이 있습니다. 꿀벌은 열심히 일하며 모아 들이는 것은 개미와 같습니다. 하지만 개미와 다른 점은 모은 것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나누어 줍니다. 꿀벌은 자기도 먹고, 남에게도 자기가 힘들여서 모아놓은 꿀을 나누어줍니다. 꿀벌 같은 인간은 남을 도와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타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미형 인간입니까? 아니면 개미형 인간입니까? 아니면 꿀벌형 인간입니까?
우리 주님은 2,000년 전 세상에 계셨을 때, 철저하게 꿀벌과 같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아니 더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손해보면서도 베푸는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다투고 있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섬기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병자들의 각종 병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대부분 베푸는 삶을 사셨습니다. 종과 같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등, 친히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면서 생명까지 내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꿀벌과 같이 나눠주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런 값을 치르지도 않고 구원을 받았고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거저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7장 12절에서 굉장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대접 받을 수 있는 비결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접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면 섬김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베푸는 삶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 35절을 보면 사도바울은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3년 동안 사역을 한 후, 그곳을 떠나기 전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것은 세상적인 원리로 보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목사인 저도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보통 주는 것이 복이 아니라, 받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받는 것이 복이 아니라, 주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역설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복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받은 복을 나누지 아니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물이 흘러가지 않으면 썩어버리는 것처럼, 받은 복을 흘려보내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날 중장년층에서 자주 발생하고 돌연사의 주범인 '심근경색'이라는 질병이 있습니다. 이 심근경색의 증상은 가장 먼저 극심한 가슴 통증이 나타납니다. 가슴 한가운데에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30분 이상 지속되면 심근경색을 의심해야 합니다. 식은땀과 함께 구토, 호흡곤란이 나타나고 혈압이 떨어지면서 쇼크에 빠지기도 합니다. 흔히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는 경우는 대개 급성 심근경색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심근경색이 왜 생기는지 아십니까? 저는 지난주 모집사님께서 심장마비로 입원하셨다고 해서 제 나름대로 심장마비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심근경색은 ‘동맥경화’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심장에 산소와 영양분을 날라다주는 관상동맥이 막히면 심장 수축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심장작동에 문제가 생겨 결국에는 심장이 마비가 되는 심근경색 증세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심근경색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놀라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고혈압, 흡연, 당뇨병, 고지혈증, 비만 등이 있는 사람들의 관상동맥이 동맥경화로 인하여 70% 이상 막히면 협심증이 생기고, 심하게 좁아진 혈관 부위를 혈전이 꽉 막아버리면 심근경색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혈관이 막히는 것이 심장마비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심근경색이 확인되면 혈전 용해제나 수술로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막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피가 계속해서 흘러가야지, 흘러가지 않고 막혀서 멈추어 있으면 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못하면 죽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지 않고 나에게 멈춰 있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8월 중순 해피하우스 2기 봉사자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세에 미국에 최대 부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최대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는 한 때 미국 정유소의 95%를 차지하였고, 그의 재산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해보면 빌 게이츠의 재산보다 3배나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미 의회는 독점방지법을 만들어 그가 추진하고 있는 인수합병을 못하게 했고, 사람들이 그를 향해 ‘돈 밖에 모르는 더러운 부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바람에 그는 늘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었습니다. 돈은 어마어마하게 많았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55세가 되었을 때, 기관지 천식과 위궤양에 걸려 1년 이상을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검진을 받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병원으로 들어가다가 로비의 한쪽 벽에 걸린 어느 액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는 그 글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전율이 생기고 눈물이 났습니다. 그가 많은 돈을 버는 동안 한 번도 남을 도와주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돌아본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읽은 그가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허름한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병원 직원과 입원비 문제로 다투는 소리였습니다. 병원 직원은 병원비가 없어 입원이 안 된다고 하고, 환자 어머니인 그 여인은 자기 딸을 입원시켜 달라고 울면서 사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룩펠러는 비서를 시켜 병원비를 지불하게 하되 누가 지불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했습니다. 얼마 후 은밀히 도와준 소녀가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자, 록펠러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의 자서전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는 살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때 그는 그의 남은 생애 동안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을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가 그러한 결심을 하자, 의술로 고치지 못한다고 했던 그의 병들도 감촉같이 사라졌습니다. 그 뒤 그는 98세까지 살며 선한 일에 힘썼습니다. 시카고 대학 등 수많은 학교를 세우고 도서관을 짓고 교회만 무려 4,928개를 세웠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인생 전반기 55년은 늘 쫓기며 살았지만, 나누며 살았던 후반기 43년은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록펠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받는 기쁨도 크지만, 주는 기쁨은 받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나만을 위해서 살 때 느끼지 못했던 기쁨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 때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면 줄수록 우리는 더 기뻐지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주면 줄수록 행복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된 줄로 믿습니다. 다른 사람을 축복하면 도리어 우리가 축복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골프를 치지는 못하지만, ‘골프 황제’라고 불리 우는 타이거 우즈를 좋아합니다. 제가 타이거 우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골프실력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그 선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타이거 우즈는 5살 되던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TV를 보는데, 에디오피아의 가난한 난민들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그들의 굶주리고 어려운 모습을 보고 어린 타이거 우즈는 매우 슬퍼했습니다. 아버지 얼 우즈가 아들 타이거 우즈에게 “아빠 동창 중에 의사 친구가 한 명이 있는데, 지금 에디오피아에서 저런 아이들을 도와주고 있단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타이거 우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더니, 작은 가방을 하나 들고 나왔습니다. 그 가방 안에는 어린 타이거 우즈가 오랫동안 모은 동전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아빠! 이거 아빠 친구에게 보내서 불쌍한 아이들 도와주라고 하세요.” 우즈는 어린 나이에 가진 것들을 나누는 방법을 배웠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즈는 돈이 생기면 쓸 돈과, 저축할 돈, 그리고 남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돈으로 3등분 한다고 합니다. 참 귀한 인생입니다. 타이거 우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난 직업으로 골프를 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행복한 일이라면, 번 돈을 가치 있게 쓰는 일은 더 큰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멋있는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돈 벌어서 가치 있는 일에 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을 가지고만 있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생물체는 안으로 들어가는 ‘In Put’와 밖으로 나가는 ‘Out Put'의 밸런스가 맞아야 합니다. 먹는 양보다 밖으로 방출하는 양이 적으면 살이 찝니다. 들어가기만 하고 나오지 않으면 병에 걸립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으면 받은 은혜는 점점 망각되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면 그 은혜는 망각되지 않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복음을 가지고만 있으면,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만 있고, 전하지 않으면 더 큰 하나님의 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이것은 개인 뿐 아니라, 가정이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하는 가정을 축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하는 교회를 기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스왈드 스미스목사는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석화된다”고 말했고, 에밀 부르너는 “교회는 곧 선교다. 불이 붙는 것으로 존속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로만 존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건물과 음향이나 악기 등의 최신시설과 교인수를 가지고 교회의 사이즈를 판단합니다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하는 교회를 참 교회라고 인정해주시고, 선교하는 교회를 기뻐하십니다. 교회는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친교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선교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를 위해 지난 2001년부터 매년 두 곳을 선정하여 단기 선교팀을 파송했습니다. 그 동안 일본, 대만, 필리핀, 중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의 아시아권과 피지, 솔로몬, 바누아투 등의 남태평양에 파송했습니다. 올해에도 중동의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6명, 남태평양의 바누아투에 7명 등, 총 13명의 단기선교팀원들을 각각 파송합니다. 하지만 직접 현지에 가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여러 가지 물질로 후원해 주신 분들도 이미 선교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또 주일예배나 새벽기도회나 개인기도 시간에 중보기도해주신 분들도 이 미션 2008에 이미 동참하셨습니다. 이제 선교팀은 이번 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이곳을 떠나 현지에서 짧게는 1주일, 길게는 10여 일 정도 체류하며 복음을 전할 예정입니다. 물론 짧은 기간 동안 몇 명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특별히 모슬렘 나라인 이집트에서는 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하면 안 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집트사람이나 유목민족인 베두윈 족속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집트의 권혁기선교사님이 10년 동안 단 한 명의 영혼도 얻지 못하다가, 지난 7월 10년 만에 처음으로 베두윈 족속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했는데, 이것은 베드윈 족속 역사상 최초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합니다. 또 바누아투팀은 이제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타나섬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현지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선교정탐만 하고 중보하며 돌아오게 될지, 아니면 타나섬을 복음으로 흔들어놓고 오게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 바누아투팀과 이집트팀을 위해서 계속적으로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쟁에서 적과 싸워 승리하려면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도 중요하지만 후방에서의 보급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무리 전방에서 힘을 내도, 보급품이 끊어지면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선교는 후방보급부대의 기도후원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선교를 하려면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주님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말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7-8년 동안 깨달은 것은 선교는 지식이나 경험이나 힘이나 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단기선교팀이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직접 파송되는 단기선교팀원들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끝으로 한 편지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탈북자 사역을 하고 있는 중국 OO지역의 이선생을 몇 년 째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수요일 저녁, 이선생이 교회로 전화를 주셨는데, 마침 제가 받았는데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친딸처럼 8년 동안 키우던 주은혜라는 탈북자매를 북한으로 다시 파송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선생 자신도 은혜를 다시 북한으로 파송한다는 것이 너무 고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로 “목사님, 우리 은혜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은혜가 오늘 저녁, 북한으로 돌아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팩스로 이선생의 편지와 주은혜 자매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중에 주은혜 자매의 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사랑의 후원자 귀 교회에 올리는 글>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먼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주은혜입니다. 8년 전에 배가 고파 엄마하고 같이 중국으로 왔는데, 엄마는 다시 붙잡혀가고 저는 고마운 손길들을 통하여 지금 아가페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잡혀간 후 나는 고아가 아닌 고아가 되며 울고만 있을 때, 고아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를 지금 함께 사는 엄마 품으로 보내 주셨는데, 그 때 처음 만났을 때 나를 꼭 꼭 안고 기도하며 눈물 흘리시던 엄마, 그 때의 그 따뜻한 품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엄마는 나를 친딸처럼 키워 주셨고, 귀교회의 사랑의 후원으로 학교공부하게 되었고, 짧고도 긴 8년 동안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니 힘들고 가슴 아픈 일들도 많았지만, 참 좋은 기억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가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나이가 어려서 뭐가 뭔인지 몰라 헤맬 때 엄마는 저에게 “꿈이 있는 사람은 성공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나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단순히 배가 고파 건너 왔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기도제목은 ”1)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돌아가 부모, 형제, 친척들에게 내 입으로 예수 복음 전하게 해주세요. 2) 고향에 돌아가 나같이 버려진 불쌍한 아이들 말씀으로 양육(고아원) 사역. 3) 나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는 삶 살게 해주세요.“ 남들처럼 거창한 기도는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8년 동안 이곳에서 훈련 받으면서 좋고 나쁜 기억들이 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명자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렇게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귀교회의 사랑의 후원 덕분에 곱게 잘 컸습니다. 저는 오늘 밤에 또 다른 하나의 열매를 바라보며 고향으로 떠납니다. 벌써 갈려고 했는데, 엄마가 평양 갔다 온 다음에 갈려고 기도하며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평양 갔다 와서 식사도 못하시고 많이 아픕니다.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며 오로지 외롭게 하나님의 우리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온 엄마, 이런 엄마를 저는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엄마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못난 저희들 위해 몇 번이나 공안국에 잡혀가 온갖 고생 다하시고 그래도 믿음으로 우리를 키우시며 행동으로 본을 보이신 엄마였습니다. 이런 엄마가 아픈데 엄마를 두고 떠나는 이 딸은 엄마 위해 아무 것도 해드릴 것이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것 기도 부탁하는 바입니다. 엄마가 평양가기 전에 집에 돈이 없는 것 내가 뻔히 다 아는데, 어디에서 구해왔는지 1,000달러를 저에게 주면서 제가 갈 때 필요한 것 사고 남은 돈 가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만져보는 이 큰 돈, 내가 이 돈을 받아도 되나 싶어 가슴이 벅차 와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나를 보시던 엄마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신다.’고 했습니다. 하여 저는 감사하는 맘으로 이 돈을 받아가지고 십일조 100달러를 떼어서 엄마 평양 가는데 고추 가루를 사 보냈습니다. 하나님 돈 가지고 인심 한 번 냈습니다. 이렇게 해주고 나니 지금까지 말없이 묵묵히 후원해주신 귀 교회 고마운 손길들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후원해주신 좋은 분들께 실망 끼쳐드리지 않게끔 받은 사랑 감사하며 돌아가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부족한 저위해서도 기도 부탁드립니다. 제가 비록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생사를 예측할 수 없는 길이기에 래일 일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길이기에 모든 것 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므로 출발합니다. 제가 돌아가서도 겸손하므로 지혜있게 복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구요. 아직 아가페 교회에 남아 있는 식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으로 지금까지 후원해주신 사랑의 후원자님들께 큰 절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당신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뛰고 또 뛰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 사랑의 후원의 열매 주은혜 올림 -
저는 주은혜 자매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읽는데 눈물이 나서 멈추었다가 눈물을 닦고 난 후 읽다가, 눈물이 흐르면 멈추고 다시 눈물을 닦으면서 읽었습니다. 어렵게 주은혜 자매의 편지를 읽고 난 후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로 그 자매는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자매였습니다. 그 자매는 다른 탈북자들처럼 얼마든지 태국이나 북경 등에 위치한 한국을 비롯한 서방나라의 공관을 통해 미국이나 유럽이나 대한민국으로 망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망명을 하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그 자매는 편안한 삶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북한에 가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플 것이 뻔한 데도, 붙잡히면 수많은 고초를 당할 것이 뻔한 데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도 지난주 수요일 저녁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배부르게 먹기 위해서일까요? 훌륭한 인민이라고 공산당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그 미화 1,000불을 벌기 위해서 일까요? 아닙니다. 은혜자매가 북한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 자매는 북한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둘째로 받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미화 1,000달러를 받은 은혜자매가 100달러를 떼어 평양 가는 이선생에게 고추 가루 사서 보내면서 주는 자의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베풀면서 주는 기쁨을 맛 본 것입니다.
그래서 폴 투르니에라는 사람은 "선물을 주는 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곧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엘머 타운즈 라는 사람이 쓴 <축복하는 사람이 축복을 받는다>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엘머는 이 책에서 ‘행복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받는 기쁨도 크지만, 주는 기쁨은 받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큰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면 드릴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면 나눠줄수록, 하나님께서는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안겨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 나눌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귀한 것들로 채워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과 사랑을 나누는 기쁨을 맛보고, 받은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고 받는 사랑의 관계
행 20장 35절 / 정언용목사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유럽지역의 전도여행을 마쳤습니다.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럽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도중에 밀레도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밀레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바울이 3년 동안 피땀을 쏟으며 목회를 했던 에베소 교회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그리웠습니다. 그래서 밀레도 항구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유언과 같은 말을 남기게 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에베소 장로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자신이 목회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을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남겨준 것입니다.
바울이 유언처럼 남긴 한마디의 말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의도는 분명히 [주는 생활이 복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하면 [주는 것도 복되고, 받는 것도 복되다. 다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이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주는 것도 복되지만 받는 것도 복되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모두가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주셔도 지치지 않는 분입니다. 받지 않아도 홀로 존재하시면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사랑을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는 것도 복되고 받는 것도 복되지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어릴 때 집에서 떡을 하게 되면 어머니께서 저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접시에다 떡을 담아서 이웃집에 꼭 나누어주십니다. 옛날 어른들이 가르쳤던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떡 담은 접시를 들고 이웃집 사람에게 가면 이웃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떡 접시를 받으면서 좋아합니다.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니 떡을 보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주는 사람도 기쁜 마음이 있습니다. 떡을 받아든 사람이 기쁜 표정을 지으면 어릴 때니까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 때문에 일시적으로 우쭐한 생각도 듭니다. 이웃집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 밖에는 그릇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웃사람들은 [잠깐 기다릴래!]하고 말하면서 [빈 그릇으로야 돌려보낼 수는 없지!] 합니다. 결국은 떡을 담아왔던 그릇에다가 무엇이든지 담아서 되돌려 줍니다. 정은 정으로 갚는다는 것입니다. 받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올바른 이웃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 속에서 사람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주고받는 관계라는 것을 생각해 왔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랑은 꼭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분들은 받지를 못합니다. 꼭 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우리가 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큰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행동을 하면 이웃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전북대학교 공대 학장을 지내신 교수 한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십니다. 어떤 이유에선가 평생을 [집사] 직분 받기를 사양했습니다. 누구보다도 훌륭한 크리스천인데 직분받기를 사양한 것입니다. 물론 천국 가는데 직분 가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훌륭한 분들이 직분을 받아서 모범된 제직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직분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로부터 일체 무엇이든 받는 것을 거부합니다. 가까운 친척이 명절에 사과 한 박스라도 그 집으로 배달해 드리면 그 다음날 뜯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박스를 보낸 집 앞으로 다시 우송해 버립니다. 교인들이 교회를 위해서 수고하시는 분을 위해서 무언가 조그만 선물로 표현을 해도 다시 포장을 해서 본인의 집으로 우송해 버립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 하면 보기에 괜찮은데 너무나 강직하게 받는 것을 거부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너무 어려워합니다. 정을 주지를 못합니다. 나누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결국 교인들과의 관계도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한평생 사시면서 고독하고 외롭게 사셨던 것 같습니다.
올바른 사랑의 관계는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일어납니다. 주는 것도 복이지만 받는 것도 복입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잘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또 자신이 받은 것만큼 어떤 모양으로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 사회가 얼마나 더 밝아지겠습니까? 인간은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받지 않고도 계속 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완벽하신 분, 전능하신 분, 아무 것도 없는 세상에 모든 것을 존재하도록 하신 하나님 한 분만이 받지 않고도 무한하게 줄 수 있는 분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셔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셔서 만물 가운데 두셨습니다. 여자를 만들어서 남자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힘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모든 은총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을 주셨고, 심지어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받지 않고도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인간에게 내어줄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받지 않고도 줄 수 있는 분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받아야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성장한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에 비해서 많은 것들을 이웃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릴 때에도 부모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지 못한 사람들은 나중에 커서도 사랑을 베풀지 못합니다. 성인아이처럼 어른이 되었는데도 늘 받기만 하려고 하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주지 못하는 것은 받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아본 신앙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심판의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받은 경험이 있느냐? 에 따라서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심판의 하나님]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칭찬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들은 커서도 다른 사람을 보면 칭찬을 잘 합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꾸중을 듣고 자란 사람들은 늘 다른 사람들을 꾸중하게 됩니다. 사랑을 받고 컸느냐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컸느냐에 따라서 다르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남녀의 관계도 대등한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정상적인 사랑이 됩니다.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짝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짝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주고받는 관계가 깨진 것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사랑은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짝사랑은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주려고 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관계가 형성되는데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주려고 하니까 한쪽은 도망가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관계가 되면 인간관계는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신랑을 위해서라면 신랑이 시키는 대로 안해 본 것이 없다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시키는 대로 다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가 될 때 사람은 남녀가 서로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을 한 쪽에서 다들어주면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주종의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주종의 관계는 어떤 것을 말합니까? 자기가 필요할 때는 일방적으로 요구를 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에는 일방적으로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이 오래갈 수 있는 관계는 주종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 대등한 관계 속에서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부부 사랑이 꽃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주어서도 안되고 일방적으로 한쪽에서 받기만 하면 사랑의 관계는 깨지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만 목숨과 신명을 다바쳐서 죽어라고 좋아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주종의 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해남에서 목회를 할 때 목회지가 바로 바닷가 옆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약 500M 정도만 내려가면 갯벌이 있는데 교인들이 새벽기도에 올 때에 조그만 그릇에다가 굴을 따서 저희 사택 마루에 가만히 놓고 갑니다. 어떨 때에는 손수 기르는 채소를 조금 놓고 갑니다. 어느 때에는 사택에 보니까 맥주가 한 병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야! 참으로 시험들 일이다. 누가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갖다 놓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날이 밝으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침에 음료수 한 병 놓고 왔는데요] [권사님! 음료수라니요. 웬 맥주가 한 병 있던데요]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무안해 가지고는 [목사님, 어제 추도식을 마치고 음료수 한 병을 갖다 드린다고 새벽에 컴컴한 광에서 음료수를 찾다가 잘못 가져갔네요. 허참!]하면서 무안해 합니다. 그거 값으로 따지면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들의 정성이 고맙게 느껴져서 저는 그들을 위해서 성심을 다해 정열적으로 목회를 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주고받는 목회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다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서 자비량 선교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고받는 목회의 관계를 부인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9 : 7절에서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라고 합니다. 바울은 군인으로 지원하면 군인에 대한 의식주의 문제는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농부가 포도원을 만드는 수고를 하면 당연히 수확된 포도는 농부의 몫이라고 합니다. 목자가 양떼를 기르고 보호하면 그 목자는 양떼의 젖을 짜먹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한 목회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결국 목회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지는 것입니다. 다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교회가 복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열왕기 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서 감동을 느낍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산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러워서 이제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구워먹고 아들과 함께 자살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엘리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찾아와서 명령합니다. [사르밧 여인이여! 내가 지금 시장하니 물 좀 한잔 주십시오] 그 심한 가뭄에 물 한 잔은 아주 값진 것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불만을 표현하지 않고 정성껏 물 한 그릇을 떠다가 엘리야에게 드립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엘리야는 또 부탁을 합니다. [내가 몹시 배가 고픕니다. 내게 떡을 한쪽 만들어 오십시오] 하고 엘리야는 거의 명령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신은 소위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뻔뻔스럽습니까? 지금 이 가뭄 통에 무슨 먹을 것이 있겠습니까? 먹을 것을 구하려면 부자 집에나 가서 구할 일이지, 저와 같은 가난한 과부에게 와서 무슨 먹을 것을 구합니까? 당신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저와 제 아들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데 당신은 너무 뻔뻔스러운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고 이야기 할 만합니다. 그러나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씀에 순종하여 마지막 먹고 죽으려고 남겨둔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구워서 엘리야에게 가져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에서부터 바뀌는 것입니다. 자신도 죽을 처지이지만 남의 필요를 채워줄 때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도 가난하고 먹을 것이 없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종을 섬길 때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고, 생각해보면 비합리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실 때 거기에 순종하면서 따라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로부터 축복을 받아서 그 가뭄이 끝날 때까지 뒤주의 밀가루가 마르지 아니했고 기름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축복을 받은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교인 중의 한 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유순갑 권사님은 앞을 보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답답하시고 힘들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유권사님이 가만히 보면 그래서 신앙 안에서 밝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나올 수 있는 한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손을 의지해서 나오지만 하나님께서 저 유권사님의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권사 임명을 할 때에도 비록 몸은 불편하시지만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기도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해서 권사에 임명했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모습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소홀한데 유권사님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늘 예배자리를 지키시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니다.
소망회 소그룹을 운영하면서 참 잘 만들었다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한가지 기쁜 것은 그 자녀분들이 다들 협조해서 돌아가면서 소망회 회원들을 대접합니다.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유권사님께서 매일 교회 분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보니까 본인도 한번 남을 대접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동생 분이 계시는데 그 동생 분이 유권사님을 대신해서 나도 한번 소망회 회원들을 대접할 기회를 달라고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쾌히 [얼마나 좋은 일이야!]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랑의 관계는 바로 저런 것이다. 내가 받은 만큼 주려고 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주기만 하신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예수님 주위의 사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신 분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특히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과부들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님을 보살펴 드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포함하여 13명이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어떻게 예수공동체가 움직여졌을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바울처럼 돈을 벌어서 자비량 선교를 하신 분들이 아닙니다. 일을 하면서 선교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공동체 속에서 가롯 유다는 회계를 맡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 공동체를 위해서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여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상하고 거룩하게 표현했습니다. 삼 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깨어서 예수님의 발에 붇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최고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인간의 사랑을 먹고 활동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예수님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람들을 위해서 쏱아부으셨습니다. 병울 치유하시고, 상처난 곳을 싸매시며,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소망과 희망을 불어넣으시며, 벳세다 벌판에서 떨고 있는 배고픈 자들의 굶주림을 채워주셨습니다.
주님은 일방적으로 주신 분만이 아니라 인간이 누려야할 사랑의 공백을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채워줄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특히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바닷가로 가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번 물으신 것이 아니라 세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씀으로 베드로의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간의 사랑을 필요로 하신 것입니다. 그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일방적으로 한쪽에서만 베푸는 사랑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마십시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도록 교육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자녀들도 부모의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단순해서 자녀들이 손만 한번 잡아주면서 [어머니 아버지! 저를 위해서 너무 고생이 많으시지요!] 한마디만 하면 그 분들은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주종관계의 사랑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마치 노예를 부리고 종을 부리듯이 아내에게 요구하지 말고 서로 대등한 관계의 사랑을 꽃필 수 있도록 사람의 마당을 넓히시기 바랍니다.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게임을 이끌어 가는 사랑은 깨어지기가 쉽지만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는 더욱 오래 지속되는 사랑의 관계로 유지시켜 주실 것이며 행복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도 여러분의 사랑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자동 판매기처럼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누르기만 하면 언제나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여러분의 정성을 원하십니다. 주일날을 거룩하기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십일조의 헌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도 원하십니다. 사르밧 과부처럼 비록 자신도 어려움 가운데 있지만 선지자를 위해서 마지막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것처럼 주님도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님 앞에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이미 십자가 위해서 우리의 죄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받은 사랑을 우리는 또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따뜻함은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 것입니다.
목회도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끌어가는 목회보다도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가 있는 목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공동체는 끈끈하게 묶여져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목회가 건강한 목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회일 것입니다. 한쪽에서의 사랑과 희생을 막무가내로 요구하게 될 때는 어느 한 쪽이 지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건강한 목회는 주고받는 아름다운 관계가 있는 목회일 것입니다. 저는 가은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진정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서로 끈끈하게 얽혀있는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는 것은 복입니다. 받는 것도 복입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됩니다. 우리 모두 주고받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끈끈한 가을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갑시다] 아멘
행복한 삶의 조건
행 20:35 / 이정익목사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전도했습니다. 바울은 처음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사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울은 일생에 3차에 걸쳐 세계선교여행을 했습니다. 1차는 구부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등을 여행하며 전도했습니다. 2차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을 여행하며 전도했고 3차는 주로 에베소에서 3년 동안 전도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여러 전도지역 중에서도 특히 에베소에 대해서 애착을 많이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지역 가운데 가장 많은 성공을 거둔 지역이 에베소 지역입니다.
이제 바울은 인생도 황혼기에 와 있고 선교할 시간도 얼마나 남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평소 꿈대로 바울은 로마에 가서 전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다시 에베소에 방문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그렇다고 지금 바울은 드로아에 머물고 있는데 약 50km 거리에 있는 에베소를 방문하기가 시간상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기별하기를 중간기착지인 밀레도로 나오라고 기별해 놓았습니다. 밀레도에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반갑게 만나서 해후하고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설교하는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 17-35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3년 동안의 에베소에서의 삶을 결산하는 고별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 설교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이제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전도하려 결심했다, 그런데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분명 순교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죽게 되면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순교하겠다, 그러니 당신들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을 잘 돌보라, 내가 에베소에 있는 동안에 은이나 금 그리고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 나로 인해서 손해보고 억울한 일 당한 사람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고했습니다. 그 말씀이 35절 말씀입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십시오”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근심하며 전송했다고 했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방법과 조건을 제시받게 됩니다. 여기 보면 몇 가지 조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즐거움으로 일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참 즐거운 마음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원해서 아주 즐겁게, 만족하게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고 마지막에 가서 고백하기를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얼마나 만족한 고백입니까. 또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자신이 사역한 것을 평가하면서 만족하게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일을 소중히 알고 열심히 일한 사람은 마지막에 이런 고백할 자격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 삶이 바로 창조주의 사역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바로 이렇게 열심히 일하며 사는 삶입니다.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도우십니다.
성경에 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시간이 모두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윗과 아모스는 들에서 잠자지 않고 양을 치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도 12마리 소에 겨리를 하고 밭을 갈고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형제도 밤새 고기를 잡던 그 시간에 제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열심히 일할 때 부름을 받습니다. 사울은 잃어버린 소를 찾으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도중에 왕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열심히 타작하던 중에 부름을 받습니다. 느혜미야는 왕명을 받들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중히 알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은혜를 입습니다. 그것이 쉼이라는 은혜입니다. 여러분, 일하는 사람에게 이 쉼의 시간이 얼마나 달고 시원하고 상쾌한 시간입니까. 군에 가서 훈련받다가 “10분간 휴식” 이라는 말이 얼마나 신납니까. 군에 가지 않은 분은 이 기분을 모릅니다. 이 기쁨은 일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맛이고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지만 쉼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일 일하고 하루 쉬라고 하셨습니다(출 20:8). 쉬되 종들까지 쉬게 하라고 했습니다. 종들도 이 기쁨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다 그만 죽었습니다. 악보에 쉼표가 없어서 계속 부르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매일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한적한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하는 시간이 영적인 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바로 자신의 사역에 재창조를 이룬 시간입니다.
학교생활을 열심히 하면 학기가 끝나고 곧 방학이 주어집니다. 그 방학을 일컬어 “Vacation"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청소하다, 준비하다”라는 뜻입니다. 방학은 노는 것이 아니고 다음 학기를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또 휴가라는 말을 “Recreation"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Re"는 “다시”라는 뜻이고 “creation"이라는 말은 ”창조한다“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휴가”라는 말은 “재창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휴식이라는 말과 방학이라는 말은 새롭게 일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두 사람이 산으로 일하러 갔습니다. 가서 한사람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10분간 쉬었습니다. 그 10분간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니까 “나는 그 10분 동안 도끼날을 갈았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누가 더 일의 능률이 나타났겠습니까. 바울은 소명 받은 후 주의 일을 참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고백하기를 “나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고백은 할일 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들이 임종시에 가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래서 인생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전하는 일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명을 받은 후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린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나는 죽든지 살든지 예수만 전하노라.” 깨달음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깨달음이 있으면 그 마음에 감사함의 마음이 솟아나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에 이 마음을 품고 살면 그 삶이 행복하게 됩니다. 주어진 현재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은 조건이나 환경이나 소유에서 오는 것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행복하면 무엇이든지 즐겁고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떤 지역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찬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감사는 같은 뜻입니다. 그 감사함의 내용이 그 삶에, 얼굴에, 생각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Charles Spurgeon은 신학생들에게 설교자의 표정을 강의하면서 말하기를 “희망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위를 쳐다보라, 은혜와 감사와 영광을 말할 때는 눈을 크게 뜨고 빛나는 눈동자를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그러면 지옥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스펄젼은 “그 표정은 지금 자네의 그 얼굴이 적당하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는 데는 얼굴 근육이 72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소를 지을 때는 14개만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사는 사람이 주름살이 그만큼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명심하십시오. 사람이 정말 세상을 감사하며 살고 행복해 하며 살 때는 구겨졌던 얼굴의 주름살도 펴지고 마음의 주름살도 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원망도 사라지고 늙음도 방지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삶이 가장 좋은 약이 되고 보약이 되고 화장술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장은 얼굴에 바르고 치장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마음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외모는 왜소했지만 그 마음에는 아주 넓은 천국을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아주 만족하고 행복한 여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 다음 우리들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삶”입니다.
바울은 평생 남을 위해서 베푸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전도자의 삶은 100% 베푸는 삶입니다. 진정한 전도자라면 자신의 삶은 없습니다. 자기 인생을 살다보면 전도자의 길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전도자의 길만 갔던 분들을 보면 그 가족들이 대부분 고난을 받습니다. 이성봉목사님은 부흥회 다니며 받은 사례비로 남들에게는 후하게 나누어 주었지만 가족에게는 참 인색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삶입니다. 내 가족에게 후하게 사용하고 배려하는 것이 죄송하고 죄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삶은 자신에게는 모두가 희생뿐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삶에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게 자신을 다 바쳤습니다. 인생을 바치고 젊음을 바치고 정신과 혼을 송두리째 바쳐 전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바울에게 바리새인들이 “네 많은 학문이 너로 미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누가 뭐래도 자신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이 주는 데서 얻어지는 기쁨이고 행복이고 보람이고 감사함입니다. 그래서 행 20:35를 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낫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주는 삶이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행복한 삶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들을 보십시오. 선교사는 자신의 인생도 젊음도 시간도 자신의 영혼까지도 다 주려고 마음먹고 선교지로 갑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들은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합니다. 다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준다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렇게 당당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얻으려 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없습니다. 때로는 비굴하기 까지 합니다. 돈을 꾸려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없습니다. 빚진 자도 어깨에 힘이 없습니다. 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준다는 것은 반드시 물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 말고도 줄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관심, 기도, 부드러운 조언들은 모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물질보다 더 소중하게 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중보의 기도는 베풀고 나누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나누는 삶입니다. 내가 누군가 병들어 누워있는 이웃의 치유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상당히 소중한 것을 베풀고 주는 삶입니다. 교회에 새신 자가 들어왔습니다. 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처음에 얼마나 어색해 합니까. 그때 누군가 찾아와 반갑게 대해줄 때 얼마나 고맙고 반갑습니까. 그때 먼저 온 사람으로서 내가 처음 교회 왔을 때 어색했던 그 마음을 생각하며 새신자들을 따뜻하게 안내해 주고 인도해 주고 함께 해 주며 배려하는 역할도 상당한 베풂이고 주는 삶입니다. 사실은 그 삶이 그 사람들 보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중보의 삶이고 그것이 주는 삶입니다.
어떤 분이 영적으로 매우 약하고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먼저 믿은 분이 그분을 늘 염려하면서 배후에서 기도해 줍니다. 멀리서 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기도해주고 염려해 주고 지켜줍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에서 점점 이겨나가며 바로 서 나갑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겠습니까. 그것이 신앙인의 중보의 삶이고 기쁨의 삶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으로서 좀 약한 분들을 위해서 늘 기도해 주고 그 신앙이 잘 자라도록 안내해주는 역할, 그것이 주는 생활이고 중보의 생활입니다. 얼마나 귀한 삶입니까. 그 삶에 행복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삶이 가장 많은 것을 주는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주는 사람이 있고 받으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결산할 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동안의 전도자의 삶을 결산합니다. 그래서 귀로에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나와 함께 있는 동안 내게 무슨 하자가 있는가, 내가 떼먹은 것, 원망들을 일이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있습니까. 그렇게 결산하고 바울은 마침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합니다. 그리고 아주 만족하게 헤어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37절을 보면 “다 크게 울고 바울의 목을 안고 입 맞추고 근심하며 배웅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작별입니까.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야 그 삶이 행복이고 성공입니다. 처음도 중요하지만 끝맺음은 더 중요합니다. 저도 이렇게 목회사역을 은혜롭게 끝맺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목회사역을 마치는 날 이렇게 끝맺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목회가 끝나는 날 모든 분들이 “아 시원하다”한다면 침 비참해질 것입니다. 오늘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추한 모습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국회의원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또 생각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일부이기는 하지만 평생 목회한 목사님들이 은퇴하는 시기에 당하는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면 더욱 이 사도바울의 결산하는 모습이 간절해집니다.
사도바울은 끝맺음이 참 은혜롭습니다. 사람이 마지막을 이렇게 끝맺음 하려면 사람들과 관계를 잘 해야 합니다. 살면서 누구 것을 떼먹는 일, 손해 끼치는 일, 빚지는 일들이 없어야 합니다. 또 누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아무리 손해보고 보기 싫어도 원수지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그런 것 있으면 마음에 평화나 복이 없어집니다. 자유함도 없어집니다. 그러면 마지막 나의 삶을 결산하는 시간이 오면 만족한 것은 고사하고 사람이 초라해 집니다. 우리는 사도바울의 삶의 모습과 그의 신앙고백을 보면서 진정으로 행복하고 향기 나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이 같은 은혜가 여러분들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는 자가 행복합니다.
행 20장 35절 / 문기태목사
세계 제일의 부자 워렌 버핏이 자신의 재산의 상당부분을 기부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는 것이 요즘 뉴스거리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는 천문학적인 돈을 어떻게 기꺼이 남을 위해 내어 놓을 수 있었을까요? 아깝지 않았을까요? 왜 그렇게 큰 돈을 선뜻 남에게 주려는 것일까요? 그래서 오늘 저는 주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남에게 주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고 남에게 받으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에게 주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은 계속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만족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탐욕의 노예가 되어 일생을 살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비참한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내어주는 삶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가진 것이 많아도 남에게 전혀 주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주는 자가 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다 받았음을 깨달을 때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내 것이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자'는 마음이 솟아납니다.
은혜를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은혜를 못받으면 남에게 못줍니다. 없어서 못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아까와서 못주는 것입니다. 내것을 주는 것은 손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고서 화가 되는 것도 있고 주고서 복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주는 자도 자기가 준다고 생각할 때는 주고도 불행합니다. 자기 것을 주었을 때는 주어놓고 자기 마음속에 아까운 생각이 들면서 빼앗겼다고 탄식합니다. 또 자기 것을 자기가 준다는 생각 때문에 교만해져서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을 준다는 믿음이 있으면 절대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내가 주었으니 너도 무언가를 주겠지.. 하고 바라다가 맘이 상하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는 자는 은혜로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주고 받는 자만이 행복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거저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값없이 받은 자임을 알아야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내 것이 없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입니다.
받아서는 안될 것 받다가 망한 사람 많이 있습니다. 받아서는 안될 뇌물을 받다가 쇠고랑 찬 사람도 있습니다. 공돈이라고 생각하고 주는대로 받아 쓰다가 검은 돈을 받아 나중에 올무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공짜를 가장하여 준다고 함부로 받으면 함정에 빠져서 망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거져주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되돌아 올것을 기대하는 주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가 준다고해도 다 받기가 겁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주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은혜로 주어야 합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이나, 무엇인가 이용하려고 줄 때는 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아서 하나님의 것으로 주고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설교하는 가운데 자기가 에베소 교회를 어떻게 섬겼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에베소에 들어온 3년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 내가 그 댓가로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내가 친히 일을 하면서 동행자들의 쓸 것을 준비했다. 그리고 너희에게 범사에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약한 사람들, 병들고,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살았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그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이 있는 자가 되고자 주려고 힘썼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역을 하고 그들의 영적인 것을 공급하느라고 수고를 많이 하여 당연히 받을 만한데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주려고 힘썼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주님께서 그의 마음에 감동하신 말씀을 따라 전부 다 주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희생하셨기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하나의 선물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 외에도 롬8:32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생명만 선물로 받았습니까? 성령만 선물로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안에서 모든 것을 다 선물로 받았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은혜를 모를때는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고생해서 쟁취한 것인줄 알았는데 은혜를 받고나니 내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목숨도 내것이 아닙니다. 자식도 내것이 아닙니다. 명예도 내것이 아닙니다. 소유도 내것이 아닙니다. 다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감사할것밖에 없습니다. 언제든지 주라고 하시면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사랑으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받아서 예수의 사랑으로 줄 때 받는 자도 복이 되고 주는 자도 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최후 심판날에 의로운 자는 오른편에 불의한 자는 왼편에 세우고 의로운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헐벗을 때 입혀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봤느니라"
예수님은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먹을 것, 마실 것을 주었고, 입을 것을 주었으며, 반가와하는 마음을 주었고, 찾아가 시간을 함께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준 자는 복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중에서 많이 줄 수 있는 복을 받으십시오. 우리는 준다고 할 때 물질을 먼저 생각합니다. 나중에 사업을 잘해서 큰 돈을 벌게 되어 많이 주리라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이 모두 잘 되어 큰 일을 하는 분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내 손에 있는 작은 것부터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줄 수 잇는 것이 무언인지 살펴보고 지금 작은 것을 나누는 사람이 후에 잘 되었을때 워렌 버핏처럼 큰 것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나라 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흘러가는 물도 떠 주면 적선이 된다." 작은 것이라도 인정을 담아서 줄 때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은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 국밥 한 그릇 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헐벗은 이에게 옷을 한벌 사 입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합니다. 우리는 크게 주는 것만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래 아무것도 주지 않을 사람이 나중에 크게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내가 복권만 당첨되면 절반을 떼어 주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말은 믿을 가치도 없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나중에 하겠다는 것은 별로 실효성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되어서 풍성하게 나눔을 베풀때까지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지금 배고픈 이에게 밥 한그릇 사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지금 헐벗은 이에게 싸구려옷이라도 하나 사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지금 울고 있는 이에게 찾아가 함께 울어주고 함께 있어주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지금 주는 자게 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복음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갇힌 사람을 찾아가 돌아보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 위로하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근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얽눌린 사람은 여전히 눌려서 삽니다. 본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때 사람은 변화됩니다.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새힘이 솟아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데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가 구걸을 합니다. 뭘 얻을까 하고 쳐다보면서 구걸을 하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는 금과 은을 준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예수의 능력을, 예수의 복음을 주었습니다. 그때 그가 일어나서 발목에 힘을 얻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주님, 우리가 전토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사오니 무엇을 얻으리이까"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받고서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주님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했지만 은혜를 받은 후에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주련다"로 바꾸어졌습니다. 은혜를 받고나니까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 온 천하보다 크신 예수님을 소유한 부자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자신에게 있는 예수님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주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주러 왔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딱 한마디로 말합니다. 주는 생애입니다. 주는 자는 하늘에 속한 자가 됩니다. 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의 예수 속에서 자기 죽음을 보았습니다. 예수 생명 속에서 자기 생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저들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난해도 좋았습니다.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찬송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기뻐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도 감옥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예수로 인해 만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로 인해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로 인해 행복이 넘치니까 생명의 위협을 무릎쓰고 사람들에게 찾아가 복음을 나누었습니다. 여러분안에도 예수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누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없이 살며 불행한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만난 예수, 여러분안에 계신 예수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받았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받았으니 주고 살아야지'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주는 자는 부자요, 받는 자는 가난한 자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에 찬란한 업적을 남기고 숭고한 생애를 산 사람들은 거의 다 주고 간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주는 생애였고 주는 자의 복됨에 대하여 우리에게 위대한 진리를 남겨주었습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해서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으로 부족해서 인간들을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우리는 많은 은혜를 받고 살고 있습니다.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는 자가 복됨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받기만 하고 살았습니까 주는 자가 되십시오. 없다고 불평했습니까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 있습니다. 줄 수 있는 재물이 없습니까? 마음을 주면 됩니다. 주는 자가 되면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가 됩니다. 주는 자가 되면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바로 여러분의 삶을 통해 세상에 나타납니다. 어떻게든지 주려고 힘쓰는 삶을 살 때 천국이 시작됩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참된 행복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믿음이 풍성해지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유함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울며 입을 맞추며
행 20장 35-38절 / 김남준목사(열린교회)
Ⅰ.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정도 사역했고, 특별히 두란노에서는 복음을 강론하여 사람들을 굳건히 세워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아마도 그의 생애 중 목회에 가장 집중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바울이 이 기간 동안 안정된 가운데 목회를 했기에 우리는 그의 목회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바울의 술회에 의하면 그곳에서 목회의 기간은 시련들과 함께 한 섬김의 시간들이었다.
Ⅱ. 시련들과 함께한 섬김
A. 유대인의 간계와 시험
끊임없는 유대인의 간계와 시험은 사도 바울의 목회기간 중 최고의 고통거리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진정한 사랑을 깨달은 그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로부터 끊어져 저주를 받을지라도 내 골육지친 중 몇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내가 그것을 원하노라”고 고백할 정도로 동포를 끔찍이 사랑하였다.
B. 겸손과 눈물, 참음과 섬김
그러나 이 사랑은 언제나 간계와 시험으로 되갚아졌다. 그는 이 모든 간계와 시험 앞에서 겸손과 눈물, 참음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섬겼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준 사명을 알기에 그는 인내하며 참음으로 견디면서도 자신의 섬김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Ⅲ. 모든 것을 이기는 사랑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것들을 이기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사랑이 사도 바울을 감화시켰기에, 무엇보다도 탐욕이 없는 섬김으로써 성도들을 위해 봉사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A. 탐욕이 없는 섬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사도의 마음에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탐욕이 없는 마음으로 섬겨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충성스럽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B. 약한 자를 섬김
그는 특별히 약한 자들을 섬기는 일에 탁월한 모본을 보여주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으며,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약한 자들을 돕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을 주님의 든든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함임을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셔서 누리게 하신 모든 자원은 여러분 홀로 누려 행복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종노릇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C. 자기를 주신 섬김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목회하는 동안 모든 것을 이기게 하는 사랑으로 약한 자를 섬겼고, 성도들은 자신의 목자에게서 이 순수한 사랑을 본받음으로 또 그렇게 다른 성도를 위해 헌신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바울이 자신에게서 이끌어 낸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주셔서 섬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운 것이었다,
Ⅳ. 울며 입을 맞춘 작별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에베소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부르셨다. 그곳에서 바울은 환란과 결박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음에도 사람의 정보다 그리스도의 소명에 붙잡혔기에 사랑하는 자녀와 같은 양떼들을 우리 주님과 그분의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고 결박과 환란이 기다리는 소명의 길을 걷기로 작정하였다.
Ⅴ. 결론
신앙의 참된 증거는 사랑이다. 이 사랑의 줄이 성도와 사도 바울을 단단히 묶고 있었기에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며 주님이 교회에 주신 사명을 완수해 갈 수 있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가득해지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의 충만한 사랑을 당신의 교회에 부어주셔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그리스도와 그 은혜의 말씀에 굳게 붙들려 사랑하며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는 사람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여러분 모두 이런 주님의 사랑을 알아서 생명 다하는 날까지 주님의 교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빈다.
나누고 더 풍성해지는 삶
행 20장 35절 / 최병락목사
1. 하나님의 성품: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나누어도 풍성해지는 삶 시리즈 첫 번째, 줄여서 '나도풍' 첫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제목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여러분이 아멘 안 해도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그 사랑의 표현에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 바로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입술의 고백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표현되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무엇이라도 주어야 사랑이 확정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만물을 주셨고, 우리가 타락했을 때 구원을 위해 아들을 주셨으며, 아들을 통해 영생과 풍성한 삶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처럼 독생자를 주시는 것으로 그 사랑을 확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우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주는 삶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죄로 인해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서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성품이 사랑이고 그 방식이 주는 것이라면, 구원받은 우리 안에서도 '주는 것'이 나타나야 합니다. 배고픈 자에게 혀만 차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 말씀처럼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우리의 구원을 확정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20장 35절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전한 고별 설교입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목회자들을 모아놓고 비장한 각오로 유언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주는 자가 되십시오. 우리 주님이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셨으니 이를 늘 기억하십시오." 세상 이치는 받는 것이 복이라 말하지만, 성경은 왜 주는 것이 복이라고 할까요?
3. 왜 주는 것이 더 복된 인생인가?
첫째,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에게 줄 것을 하나도 주시지 않고 무작정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는 반드시 '타인의 몫'이 들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에는 밭 귀퉁이를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과 포도 열매를 줍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와 나그네의 몫입니다. 여러분의 물질, 시간, 재능 중에도 하나님이 타인을 위해 떼어 놓으신 '내 귀퉁이'가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내 앞가림도 힘든데 남을 돕는다는 것은 불안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말씀하시며 그 불안을 잠재우십니다. 내가 네 백(Back)이고 창고인데 무엇을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몫과 타인의 몫을 구별하여 나누는 자의 쓸 것을 하나님이 영광 가운데 풍성히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주고 사람을 얻기 때문입니다.물질을 주고 사람을 얻는 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잠언 11장 26절에 곡식을 내놓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지만, 나누는 자의 머리에는 복이 임한다고 했습니다. 이기적으로 자기 곳간만 채우는 사람은 위기의 때에 민심을 잃고 저주를 받지만,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습니다. 전도서 11장 말씀처럼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면 여러 날 후에 다시 도로 찾게 됩니다. 내가 어려울 때 내가 도와줬던 사람들이 달려와 나를 지켜줄 것입니다.
경주 최부자집이 300년 동안 만석군으로 살 수 있었던 비결도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자가 없게 하라"는 가훈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외적이 쳐들어오고 세상이 바뀌어도 마을 사람들이 그 집 곳간을 지켜주었습니다. 설령 사람이 배신할지라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에 주는 삶은 여전히 복됩니다.
셋째, 주는 것 자체가 이미 복을 받은 증거이기 때문입니다.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라 나누는 자가 부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쌓아두었는가로 결산하지 않으시고 얼마나 나누었는가로 결산하십니다. 나누는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있다는 증거이며,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4. 결론: 코끼리 아저씨의 물동이최근 읽은 동화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가족을 위해 100개의 물방울을 이고 가던 코끼리 아저씨는 길에서 만난 불난 벌집을 끄고, 목마른 기린과 새들에게 물을 다 나누어줍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물동이는 비어 있었고 아저씨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눈물과 같은 소나기가 내려 물동이를 가득 채워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누다가 물동이가 비워지고 통장이 비어 울 때, 하나님이 소나기 같은 은혜로 마중 나오셔서 다시 채워주시는 기적을 맛보시길 바랍니다. 올 한 해 우리 교회와 여러분 모두가 나누고 더 풍성해지는 축복의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는 자의 축복
행 20장 35절 / 김우생목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인격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주는 것은 인간의 필요에 하나님께서 마음으로 반응하신 것입니다. 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Ⅰ. 주시는 하나님
무엇보다 첫째로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원천이십니다. 주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두드러진 성품이십니다.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선하심, 그의 주시는 사랑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그가 지으신 사람을 이 땅에 두셨고 그 사람이 범죄하여 스스로를 멸망시키었을 때 하나님이 사랑하사 주셨다. 이번에는 그 아들을 창조의 에이전트로 주셔서 파괴된 인간성을 재창조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전파할 때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5절에서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요한일서 4장 4절에서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또한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복음의 메시지는 그 핵심이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주심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노라하고 고백하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 주는 것이 없다면 어찌 그 고백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주시는 성품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주는 자가 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8절에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Ⅱ. 주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전략적인 계획
1) 주기 때문에 물질적인 필요가 채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물질적인 필요가 채워지는 그 일을 다른 사람이 주게 하심으로 채우시는 전략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0장 30-37절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는 그를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거의 죽어 가는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갔지만, 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시간과 물질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로 인하여 구조되었습니다. 즉 사마리아인이 주었기 때문에 이 강도 만난 사람은 구조되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실제로 줌으로 채워진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초대 교회의 예에서도 이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에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도 구브로에 있는 좋은 땅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고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즉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물질적인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2) 주기 때문에 영적인 필요가 채워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는 것으로 인하여 영적인 필요도 채워지게 합니다. 우리는 가르치기도 하며 전파하기도 하며 간증하기도 하는 가운데 복음을 전합니다. 이 복음을 받는 이들에게 영적인 필요가 채워지게 되는데, 이것은 주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0-21절에서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에 모든 필요가 채워집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그들 가운데 교만할 것이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Ⅲ. 주는 것의 최고 목적
하나님께서 주게 하시는 그 일에는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1) 이기심을 물리치게 합니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이며 탐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나에게 어떤 유익이 있으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관원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 다 주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슬픈 기색을 띠고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이기심의 뿌리가 되는 탐심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삶은 이기심을 물리치며 이기심을 부인하게 되며 내가 탐심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탐심의 문제를 해결하며 이기심을 억누르는 것이 바로 주는 것입니다.
2) 주는 것은 믿음을 세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는 자에게 엄청난 약속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헤아림의 공식이 있는데, 내가 드리는 것에 대한 헤아림에 의해 비례한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드리면서 그 믿음이 증가하고 믿음이 세워지게 됩니다.
잠언 3장 9-10절에서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11장 25절에서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며 흩어 구제하여도 풍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드리며 물질을 주고 나누는 그는 그의 믿음을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말라기 3장 10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6-7절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 스스로 속이지 말라 !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반응하고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지키시며 드리는 자를 축복하시고 그의 믿음을 증가시킵니다.
3) 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합니다.
주는 것은 하나님의 하신 그 일을 그대로 닮아 나타내 보이는 행위입니다. 마태복음 6장 31-38절은 하나님을 닮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1절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그리고 36절에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자비하심같이 그의 주심같이 주는 것, 바로 이것은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삶 속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4) 주는 것은 좋은 '관계'를 이루게 합니다.
잠언 19장 6절에서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인색한 사람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줄 때 관계가 좋아집니다.
요한일서 3장 17-18절에서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Ⅳ. 주는 것에 영적인 능력이 따릅니다.
즉 주는 자는 그 삶에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특별히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사도 바울이 받치는 은혜를 말할 때 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는 것이 있을 때 그 삶에 변화가 따르고 영적인 능력이 수반되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케도니아 그리스도인들은 극한 가난 속에서 풍성한 연보를 했고 힘에 지나도록 주님께 드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는 삶 속에 영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A. W Tozer는 "세상의 어떤 소유도 영원한 부로 변화될 수 있다.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에게 드린 것은 즉시 불멸의 것으로 변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는데, 그 의가 영원토록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잠깐 없어질 물질을 나누었는데 이것이 영원토록 있는 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는 것에 관한 전략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심으로 우리가 청지기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탐심을 가라앉히고 믿음을 증가시키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 좋은 관계를 이루면서 주는 것에 영적인 능력이 따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고별설교를 하면서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복이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일사각오의 신앙
신성종목사 / 행 20:36~21:16
우리 인생은 그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인생의 목적과 의미와 내용이 결정되고, 그의 인생 전체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종류의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 자신의 신앙의 깊이와 결과 내용을 점검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흔히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일사각오의 신앙’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이 제목으로 여러번 설교를 하였습니다. 일제때에 모든 사람들이 일본 천황 앞에서 절하고 숭배할 때에 “나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습니다. 주기철 목사의 설교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일사각오의 신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제목을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할 때에 우리에게도 이런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신앙의 형태는 아주 다양합니다.
우리가 신앙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신앙에는 여러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1) ‘장식품’으로서의 신앙
마치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여자들이 목에 달고 다니듯이 신앙을 장식품으로 가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식품의 특징은 필요에 의해서 달았다 떼었다 하듯이 자기가 필요하면 믿고, 힘들면 신앙을 버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더욱이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신앙인이라고 하면 사람들에게서 인정도 받기 때문에 교회에 등록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교양’으로서의 신앙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교회에 나오는 것이 하나의 교양처럼 되어 있습니다. ‘제가 우리 민족 서로 돕기’ 상임대표로 일하면서 놀라는 것은 거기에는 신부나 스님들이 있고, 심지어 불신자들이 있지만 시작할 때 기도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관례요 교양이 된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 나오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고, 또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서 좋은 말씀도 듣게 되니까 이러는 가운데 신앙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교양의 정도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위로’를 받기 위해서 가지는 신앙
사실 믿으면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위로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믿는 것이 고통이 될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교인들에게서 “목사님, 이렇게 설교를 하십시오”라는 주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성경적인 설교, 즉 위로되는 설교, 은혜 되는 설교만 하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위로되는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저도 빼고 싶은 구절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으로 편식해서는 안 되듯이 싫은 설교도 들어야 합니다.
(4) ‘생명’으로서의 신앙
참된 생명을 가지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서 믿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생명으로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생명으로서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16)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신앙입니다.
(예 화) 신앙이 무엇인가?
(1) 한번은 눈먼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니?” “볼 수는 없지만 연줄이 팽팽하게 끌어당기는 것을 통해 알지”라고 대답했습니다.
(2) 존 페이톤이란 선교사는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피 선교지의 언어로 신앙이란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디안 하나가 몹시 피곤하다면서 의자에 덥석 몸을 내어 던지면서 너무 좋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에 페이톤 선교사는 신앙이란 말 대신에 ‘온 몸을 기대다’는 말로 번역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신앙이란 온 몸을 주님께 전적으로 기대는 것입니다. 우리도 전적으로 온 몸을 기대는 신앙을 소유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생명으로서의 신앙도 광신적 신앙에 빠지면 자기를 객관화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편견에 빠지게 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고,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고, 오늘의 테러분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2. 바울이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알았는가?
사람은 영적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직감합니다. 다만 영적으로 둔감한 사람은 본인이 깨닫지를 못하는 경우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꿈으로 알고, 또 어떤 사람은 평소에 안 하는 이상한 짓을 통해서 주변사람들에게 암시를 줍니다.
바울은 죽을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간 것을 보면 생명으로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죽을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1) 바울이 죽을 것이란 예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4절, 11절).
4절에 보면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했고, 11절에 보면 아가보라 하는 예언자가 바울이 결박당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7-28절에 보면 아가보가 “천하에 크게 흉년 들리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예언대로 글라우디오 때에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기도할 때에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직감했습니다(5절).
5절에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기 전에 전송을 받을 때에 “바닷가에서 무릎을 굻어 기도하고”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을 밝게 해주고, 뇌의 진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7.5 헬르즈로 변화시켜줍니다. 그래서 깊은 묵상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쉬지 않고 기도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의 신앙 고백입니다. 저는 죄송합니다만 설교를 하지만 못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솔직히 저 자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렇게 힘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3) 바울은 영적으로 그의 ‘느낌’을 통해서 자신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요동함이 없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개미 떼들은 폭풍이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고, 새들은 지진이 날 것을 미리 감지하여 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사람만 이런 위기를 감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이성이 있어서 생각하고 문화를 창조할 뿐 아니라 영혼이 있어서 하나님과 교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동물보다 못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나르면서도 십리밖에 있는 먹이들의 동태를 다 파악하는 밝은 눈이 있습니다. 사슴들은 높은 산에서 뛸 수 있는 가벼운 몸과 발이 있고, 말은 동물 중에 가장 빠른 발이 있습니다. 코끼리의 코는 기중기처럼 무거운 것을 들 수 있는 힘이 있고, 소는 사람이 감당 못할 짐을 옮길만한 힘이 있습니다. 새들은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날개들이 있고 고기들은 물 속에 깊이 헤엄을 칠 수 있는 지느러미와 꼬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동물들은 동물적 직감을 통해서 어떤 위기가 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도 기도와 말씀과 영적인 느낌을 통해서 자신의 죽음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믿습니까?
3. 바울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는가?
(1) 그리스도를 닮은 ‘순교적 신앙’이었습니다.
주님이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순교적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주님의 순교적 신앙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산앙이란 패이톤 선교사가 말한 대로 마치 우리들이 의자에 내 온 몸을 내어 맡기듯이 온 몸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2) 다음으로 바울의 신앙은 주의 뜻대로만 하겠다는 ‘일사각오의 신앙’이었습니다.
성경에 일사각오의 신앙을 가진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에스티를 들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 때에 유대인으로서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총리인 하만이 유대인들을 진멸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기억할 것은 하만은 아말렉의 후예였다는 점입니다. 이때에 왕비의 삼촌인 모르드개가 수산 궁에 있는 왕비인 에스더에게 가서, 왕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규례는 대단히 엄격해서 아무리 왕비라고 해도 왕이 부르기 전에는 함부로 왕을 만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4:16)라고 일사각오를 하고 왕께 나아가 마침내 하만의 유대인 진멸의 음모계획을 사전에 차단하고, 유다를 구원했다는 말씀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죽음을 각오한 말입니다. 물론 주님의 제자들도, 특별히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작은 바람에도 금방 터지는 허풍선이 신앙이었습니다.
저는 터키에서 이슬람교도들이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서 예배처소의 유리창을 다 깨뜨리고, 심지어 폭탄을 던져서 예배실 안이 뻥 뚫려진 가운데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예배를 드리는 신도들을 보면서 저 자신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모릅니다. 내 신앙은 아직도 온실의 신앙이지 광야에서도 넘어지지 않는 그런 신앙이 못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3)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명적 신앙’이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사명감을 가진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를 보아도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수님을 멀리서 따라가다가 계집종에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두려워서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성령의 충만을 받은 뒤에는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서 거꾸로 못 박혀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못된 경우이기는 하지만 이번에 테러리스트들이 어떻게 자살 테러를 할 수 있었는가 하면, 솔직히 그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자기들의 생각으로는 사명적 신앙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고난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잘못된 사명감 때문입니다. 로마가 결국 기독교인들을 5천만 명이나 죽였지만 마침내 기독교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던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명적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솔직히 러시아나 중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전혀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잡히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사명이라도 있기 때문에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 합니다.
맺는 말
오늘 우리의 신앙을 이 시간 검토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장식품으로서의 신앙이나 교양으로서의 신앙이나 위로나 받으려는 신앙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는 참된 신앙, 즉 주님을 닮은 순교적 신앙은 못 되어도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기는 그런 신앙이 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니
양향모목사 / 행 20:36-38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마지막으로 간절한 설교를 하는 장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짧은 한편의 설교였지만 여기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 설교에서 사도바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복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지도자들을 상대로 한 설교였기 때문에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자부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21)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고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되심을 믿는 믿음,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믿음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며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고백함으로서 우리가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말씀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이런 귀한 일을 함에 있어서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노동을 하면서 자신과 동행들이 쓸 것을 충당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을 염려하여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익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복음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강조함으로서 복음을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구원을 받는 일에 우리의 노력이 조금도 필요가 없게 해주셨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선한 일을 하는 힘든 과정을 없애주셨습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교회 안에 한 형제 된 성도들을 위해서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설교를 다 마친 후에 사도바울과 장로들이 함께 기도하며 눈물로 이별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니”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본문 36절에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라고 했습니다.
1) 설교에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설교를 끝낸 후에 기도로 마감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만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설교에 함께 하실 때만 전하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고 듣는 성도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 없이 준비하는 설교도 잘못된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 없이 준비하는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잘못된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머리로 자기의 지식으로 설교를 준비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 인간의 뜻을 전하기 쉽기 때문에 철저하게 기도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하지 않는 많은 설교들이 기도에서 나온 하나님의 뜻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머리 인간의 생각으로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설교가 많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기도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할 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고 그 말씀에 은혜와 믿음이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재미로 듣기 좋은 말을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도록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2) 기도의 형식도 중요합니다.
흔히 기도는 기도의 형식이나 내용보다는 얼마만큼 질실 되게 기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이 옳은 말씀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기도의 형식도 중요합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손을 들고 기도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두 손을 꼭 모으고 기도하는 이런 형식들도 중요합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을 주석하면서 기도의 형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 유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지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의 정신이 깊이 박혀 있어서 얌전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합니다. 또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기뻐도 기쁘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하는 것이 유교의 정신이고 양반들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를 할 때나 찬송을 부를 때 얌전하게 조용하게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손을 들거나 박수를 치거나 감정을 나타내서 눈물을 흘리거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무릎을 꿇거나 손을 드는 것과 같은 외적인 행동들이 온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온 몸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 때문에 이런 외형적인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익은 이러한 외적인 상징들의 도움을 받을 때에 우리의 나태함을 일깨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런 행동이 없이 조용하게 마음만 가지고 기도를 하거나 예배를 드릴 때 나름대로 의미도 있겠지만 때로는 육체적으로 나태함을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이 귀찮다는 듯이 나태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온 몸으로 기도하고 온몸으로 예배를 드릴 때 이러한 나태한 모습에서 벗어나서 열심히 기도하고 열정적으로 예배드리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최고의 것을 드리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지 않는 무성의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저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믿음을 진실 되게 고백하는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가 이렇게 소중한 것이지만 자주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교회가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새벽기도회나 수요기도회나 금요기도회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은 예배는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번을 드려도 최선을 다해서 드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주일 낮 예배 한번을 드려도 그 한번 예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데에 마음을 두면 안 됩니다. 집중하여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손뼉을 치고 일어나서 춤을 추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서 최고의 것을 드려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세 번째 유익이 있는데 그것은 이러한 외적인 상징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온몸을 다 사용하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 자신의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중요한 행동이 된다고 했습니다. 마음으로만 믿는다고 얌전하게 앉아 있으면 그가 믿음이 있는 것인지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 몸을 다해서 신앙을 고백하면 진정한 고백이 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창피합니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아직도 자신이 가진 믿음이 그렇게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격스러운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온몸을 다해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뜨거운 마음과 몸짓으로 예배를 드릴 때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성도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그날까지 우리가 먼저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손도 드시고 무릎도 꿇으시고 일어나 뛰기도 하면서 온 마음과 온 몸으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7절-38절에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설교가 다 끝이 나고 이제 정말로 헤어져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정말로 안타깝고 아쉬운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크게 울고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작별인사를 하면서 헤어지는 아쉬움을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이제 사도바울을 마지막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죽음의 길로 보내는 마지막 순간임을 알았기 때문에 더욱 그 서글픔이 컷을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사도바울이 그들을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있는 최고의 보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려고 몸부림을 쳤던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마지막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 헤어지는 순간을 보면 그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하는 척 하다가도 마지막이 되면 본심을 드러내고 감추었던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사람이고 참 좋은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이 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기를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거짓 선생을 구별하는 방법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6-18)라고 하셨습니다.
나무만 볼 때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그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가시나무일 때 그 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 나무가 엉겅퀴 나무일 때 그 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그 열매를 보아야 그가 정말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착한 사람인척 좋은 일 하는 사람인척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인척 좋은 사람인척 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정말로 좋은 일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정말로 위대한 것이며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도 바라지도 않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 많은 교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그들이 사도바울의 모습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들로 유혹을 하고 이런저런 즐거운 프로그램으로 재미있게 하지만 그들에게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곳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없는 곳에는 영생의 열매가 없습니다. 복음이 없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서의 즐거움일 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이 중요한 것이 없는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설교 자 중 한 사람인 A. W. 토저가 남긴 10가지 명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만약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을 뺀다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의 95%가 계속될 것이고 아무도 차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신약 교회에서 성령을 뺀다면, 그들이 행했던 일의 95%는 멈췄을 것이고 모두 그 차이를 알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것이 오늘날의 교회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님의 역사가 없었다면 그들이 행한 일들의 95%가 멈췄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성령님의 역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는 잘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하나님의 뜻과 관계가 없는 인간들 마음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교회들이 교회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차이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열매가 없는 곳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믿음보다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 인간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허상일 뿐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아닌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가르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사도바울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에베소교회 장로들과의 이별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이별을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이 복음의 열매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최후의 열매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과 기도의 교제
김영규목사 / 20:36-38, 21:1-6
밀레도에서 두로까지
밀레도를 떠난 바울은 에게해 동쪽의 해안을 따라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바울이 통과한 행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밀레도에서 두로까지(1-6), 둘째는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7-14)의 항로이고, 셋째는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15-16)의 육로입니다. 본문은 그 첫 부분으로 밀레도에서 두로까지의 행로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21:1-3) 밀레도를 출발하여, 고스, 로도, 바다라, 구브로 우편 항로를 거쳐서 두로에 상륙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거쳐간 지역은 특별한 전도 활동이 없습니다. 단지 지나가는 길목에서 몇몇 성도들을 만나서 인사를 나눈 정도입니다. 오늘 먼저, 바울이 거쳐 간 지역을 지도를 보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고스는 밀레도 남쪽 68km 지점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와인과 양잠으로 알려진 곳이며,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으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로도는 고스 동남쪽 85km 지점에 있는 섬입니다. 에게해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매일 태양 빛이 밝게 비추는 곳입니다. 로도라는 이름은 장미가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BC 280년 경에 태양신상이 건립되었다가 56년이 경과된 시점에서 지진으로 파괴되었습니다. 바다라는 로도 섬 동쪽으로 85km 떨어진 루기아 해안의 중요 항구입니다. 아폴로의 유명한 신탁소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통과한 이 항로는 매일 수 백 척의 배가 다녔던 익숙한 항로입니다. 바다라에서 두로까지는 지중해를 통과하여 거의 직선으로 갔습니다. 이 항로로 가게 되면 구브로 섬의 서남단을 지나게 됩니다.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의 중요 항구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바울과 성도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이고, 둘째는, 함께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사랑의 교제
첫 번째로 주목할 것은 바울과 성도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행로에서 성도들에게 매우 인상적인 대접을 받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평소 얼마나 진심어린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했는가 하는 산 증거입니다. 흔히 바울은 논리적이고 비타협적인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선 것이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날선 공격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중심이 뜨겁고 따스한 사람입니다.
사랑은 베푼 만큼 받습니다. 바울이 받은 사랑은 바울이 베푼 사랑의 반응입니다. 바울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많은 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많은 교인들과 교제를 나눴습니다. 그가 개척한 교회는 수 십 곳에 이릅니다. 바울은 이 많은 교회들 가운데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고린도나 에베소 같은 곳에서는 일 년, 혹은 2년 이상 머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몇 달, 혹은 몇 주간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들과 보낸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성도들은 깊은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건성건성 대하지 않고 중심으로 대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사랑의 교제입니다.
사랑의 증표는 눈물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바울과 헤어지면서 함께 붙잡고 크게 울었습니다. 두로 지역에서 만난 성도들 역시 마찬가집니다. 우는 것은 가슴으로 사랑한다는 표식입니다. 바울을 만난 사람들은 다 눈물로 맞이하고, 눈물로 이별했습니다. 마치 요셉이 13년 동안 헤어졌던 혈육을 만나서 통곡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창45:1-2, 46:29) 교회는 혈육보다 더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저는 지난 26년 동안 이 교회를 섬기면서 특별히 머리속에 남은 기억은 눈물 흘렸던 기억뿐입니다. 갑자기 병들어서 울고, 이별하면서 울고, 사고 당해서 울고, 실패해서 울고, 그와 반대로 합격해서 울고, 승진해서 울고, 자식 때문에 울고, 성령 충만 은혜 받고 울고, 운 기억 속에 사람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떤 때는 실족한 사람 때문에, 혹은 기대했던 사람에게 실망을 느끼면서, 때로는 내 곁을 떠나는 성도 한 사람 때문에 밤새 뒤척거리기도 합니다. 목회의 후반부가 되면서 내 자신에게 이런 다짐도 합니다. 이제는 사람에게 너무 정을 두지 말자! 좀 초연해보자! 그러나 심장이 약해지면서도 마음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것이 목회자로서의 심정입니다.
다시 바울 얘기를 할까요? 바울은 여러 곳을 지나면서 성도들에게 각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성도들이 바울을 대접하는 모습을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로, 성도들은 바울을 껴안았습니다.(Hugg)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바울을 품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성도들은 바울을 호위했습니다. (Escort) 그렇게 많은 훼방과, 위험 속에 있으면서도 바울이 항상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목숨을 걸고 바울을 돕는 보호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성도들은 바울을 끝까지 돌봐줬습니다.(Looked out for) 그들은 바울의 전도 사역을 위해, 또는 생활비를 위해 바울을 물질적으로 도왔습니다. 바울이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바울을 도왔습니다. 넷째로, 성도들은 바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Prayer) 이 부분은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들이 바울을 대한 이 네 가지, 끌어안기(Hugg), 호위하기(Escort), 돌봐주기(Looked out for), 기도하기(Prayer)를 각 영어 단어의 첫 글자를 따면 HELP라는 단어가 됩니다. 즉, 도왔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도우미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복음의 도우미, 영적 도우미가 되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성도들은 육신적인, 혹은 물질적인 도우미가 되어 줬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과 목회자 사이의 사랑이며, 성도 사이의 교제입니다. 바울은 교회에 보낸 편지마다 이런 권면을 합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롬16:16, 고전16:20) 사랑은 주는 만큼 받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중심으로 사랑했고, 성도들은 바울의 사랑에 응답했습니다. 바울의 모범이 오늘 우리의 모범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도행전은 기도 행전
본문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장면은 기도 장면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특별히 기도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보면 기도에 대한 교훈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기도 모범과, 기도에 대한 교훈들이 많습니다.(눅5:16, 6:12, 9:18,28, 11:1, 18:1, 21:36, 22:32,40,44,44)
사도행전 역시 마찬가집니다. 기도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전도 행전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복음을 땅 끝까지!”입니다. 동시에 사도행전은 기도행전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건들이 기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주님의 지시를 받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3-14) 승천하신 날부터 오순절까지 열흘동안이나 열심히 기도하다가 성령 강림을 체험했습니다.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행1:24-25) 가룟 유다 대신 새로운 사도를 뽑을 때에 기도했습니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기도하기에 전념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2:42)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칠 때도, 매일 일과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행3:1) 교회 최초로 일곱 집사를 세울 때에, 기도하고 안수하는 것은 물론, 기도를 사도들의 가장 중요한 직무로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6:4,6)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방문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행8:15)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바울이 맨 처음 한 일은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행9:11) 베드로가 죽은 다비다를 살릴 때에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9:40) 이방인 고넬료는 기도 생활 중에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10:2,4, 30-31) 베드로는 기도하다가 고넬료 집에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 시더라”(행10:9)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행11:5)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것도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12:12)
바울이 선교사로 임직 받을 때에도 온 교회가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3) 바울은 각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울 때에 기도했습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행14:23) 바울이 빌립보에서 전도한 것고, 점치는 귀신 들린 여자를 고쳐준 것도 기도처를 찾아가는 도중입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행16:13,16)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한 밤중에 기도했습니다.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16:25)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 멜리데 섬에서 많은 환자들을 고친 것도 기도였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행28:8)
사도행전의 모든 기적은 기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의 모든 전도는 기도에서 시작되고, 기도로 마쳐졌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기적이 없는 것은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 삶에 사도행전적인 역사들이 일어가기를 기대한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삶의 매 순간에 기도하세요. 어떤 일이든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하고, 기도로 마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속한 교회에, 가정에, 일터에, 사도행전의 기적들이 나타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의 교제
다시 본문으로 돌와와서 기도 장면을 봅시다. 바울을 만난 성도들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기도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근심하고 크게 울면서도 기도했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말을 듣고 슬퍼했습니다. 세상에서 이별하는 자리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함께 기도했습니다. 죽음이 다가와도, 세상 떠날 날이 와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인 이상 근심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근심을 하면서도 기도는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받아주실 분이 오직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20:36-38)
둘째로, 그들은 성령의 고난 예언 속에서도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4-6) 바울은 두로에서 약 한 주일을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의 앞날을 예언했습니다. 바울 사도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면 큰 고난을 당합니다! 가지 마십시오! 이런 예언은 다음 장면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흔들림이 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고난이 온다면,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도는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평안할 때는 기도하고, 막상 고난이 오면 낙심하여 기도를 멈추지는 않습니까? 고난 속에 있을수록, 일이 힘들수록, 어려울수록,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바울을 위해서 최후까지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바울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기도를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 기도를 받는 것은 그만큼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받는 특권입니다. 기도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러면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기도로 돕는 도우미가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