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恨 추한 李玉峰(조선의 여류시인)
絳紗遙隔夜燈紅 진홍 깁창 아련히 밤 등불 붉어지는데
夢覺羅衾一半空 꿈 깨니 비단 이불의 반쪽이 비었구나
霜冷玉籠鸚鵡語 찬 서리에 새장의 앵무는 두런거리고
滿堦梧葉落西風 섬돌 가득 오동잎은 서풍에 흩날린다
가을이 깊으니 더욱 허전한 옥봉의 신세로다
결 닮은 서구시 원문 몇편 발췌해 번역해주고
청연도 영시 한 수 읊조려 여심을 달래주게나
바람, 옥봉(玉峰)의 가을 원한(秋恨)을 펼쳐 놓으니, 깊은 밤의 적막이 먼저 다가오는구려.
특히 나는 둘째 구절에 마음이 머무네.
夢覺羅衾一半空
꿈 깨니 비단 이불의 반쪽이 비었구나.
그저 잠자리가 비었다는 말이 아니겠지. 꿈속에서는 누군가 곁에 있었을지도 모르나, 눈을 뜨는 순간 현실은 다시 혼자라는 것. 진홍빛 등불과 비단 이불이라는 화려한 사물조차 외로움을 덮어주지 못하네. 마지막의 오동잎은 여인의 마음을 대신하여 바람에 흩날리고 말일세.
옥봉의 시에서 애잔한 것은 외로움 그 자체보다 외로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네.
그 정서를 서양 시인들에게서 찾아보세. 동서양의 시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빈자리와 밤의 침묵 앞에서는 놀랍도록 닮아 있지.
1. 존 키츠 — 「밝은 별이여」(Bright Star)
Bright Star John Keats Poem Print, Celestial Poetry Gift – The Typography Tipi
John Keats · 1795–1821 · 영국
사랑하는 이의 곁에 영원히 머물고 싶다는 소망. 옥봉의 빈 이불과는 반대로, 곁에 있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담겨 있네.
원문 발췌
Bright star, would I were stedfast as thou art—
번역
밝은 별이여, 나도 그대처럼 변함없을 수 있다면—
키츠는 밤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네. 그러나 그가 바라는 불변은 차가운 별의 고독이 아닐세.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 숨결을 느끼며 영원히 깨어 있고 싶은 것이지.
옥봉은 꿈에서 깨어나 빈자리를 발견했지만, 키츠는 차라리 깨어 있는 채 사랑하는 이의 곁에서 시간을 멈추고 싶어 하네.
청연의 감상: 사랑이란 함께 있는 시간의 길이보다, 그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 선명해지는 법인가 보네.
2. 윌리엄 셰익스피어 — 「소네트 97」(Sonnet 97)
Jakub Schikaneder - 36 artworks - Art Renewal Center
William Shakespeare · 1564–1616 · 영국
계절은 여름인데 마음은 겨울이라네. 사랑하는 이가 곁에 없으니 풍성한 가을마저 쓸쓸하게 변해 버리지.
Folger Shakespeare Library
원문 발췌
How like a winter hath my absence been
From thee, the pleasure of the fleeting year!
What freezings have I felt, what dark days seen!
번역
그대와 떨어져 지낸 시간은 얼마나 겨울 같았던가.
덧없이 흘러가는 한 해의 기쁨이여, 그대여!
나는 얼마나 얼어붙었으며, 얼마나 어두운 날들을 보았던가.
셰익스피어는 계절의 바깥과 안을 뒤집어 놓았네. 실제로는 풍성한 여름과 가을인데, 사랑하는 이가 없으니 마음속에는 겨울만 남아 있지.
옥봉의 오동잎과 셰익스피어의 침묵하는 새들이 서로 화답하는 듯하네. 자연은 여전히 제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진 것이지.
청연의 감상: 사람 하나가 사라지면 풍경 전체가 달라지네. 사랑하는 사람은 단순히 내 곁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한 게야.
3. 크리스티나 로세티 — 「나를 기억해 주세요」(Remember)
Selected Poems of Christina Rossetti - Wordsworth Editions
Christina Rossetti · 1830–1894 · 영국
앞의 두 시가 그리움의 아픔을 말한다면, 이 시는 그리움마저 상대에게 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가네.
The Poetry Foundation+1
원문 발췌
Remember me when I am gone away,
Gone far away into the silent land;
번역
내가 떠나고 없을 때 나를 기억해 주세요.
저 멀리, 침묵의 나라로 떠나가 있을 때.
그리고 시의 마지막에서 시인은 뜻밖의 말을 하네.
Better by far you should forget and smile
Than that you should remember and be sad.
차라리 나를 잊고 미소 지는 편이 나으리니,
나를 기억하며 슬퍼하는 것보다는.
여기에는 사랑의 또 다른 경지가 있네. 나를 잊지 말라고 애원하는 대신,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그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말일세.
옥봉의 시가 빈 이불을 바라보며 멈추었다면, 로세티의 시는 그 빈자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까지 생각하네.
청연의 감상: 사랑은 붙잡는 마음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놓아주는 마음에서 완성되기도 하네. 다만 그 말이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지. 놓아주는 사람도 밤이 깊으면 그리워할 테니까.
4. 이제 청연이 한 수 읊조리겠네
바람, 앞의 세 시가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외로움을 노래했으니, 이제는 청연이 그 곁에 작은 등불 하나 놓아 보겠네.
옥봉의 진홍빛 창과 빈 이불, 서리에 우는 앵무, 섬돌에 쌓이는 오동잎을 마음 한쪽에 두고 쓴 창작 영시일세.
When Autumn Comes to Your Window
가을이 그대 창가에 오면
When autumn lays her hand on glass,
And silent leaves drift through the night,
Let not your heart believe, my dear,
That love has vanished with the light.
The empty half beside your own,
The lamp that burns till dawn is near—
They do not mean you are alone;
The night itself has come to hear.
So rest your weary, tender eyes,
And let the cold west wind depart.
The moon may wander through the skies,
But dawn still knows your quiet heart.
그대 창가에 가을이 오면
가을이 유리창에 손을 얹고
침묵의 잎들이 밤을 흘러갈 때,
그대여, 사랑도 빛과 함께
사라졌다 믿지는 마오.
그대 곁 비어 있는 이불의 반쪽,
새벽이 가까워도 꺼지지 않는 등불—
그것이 그대 홀로라는 뜻은 아니니,
밤조차 그대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으니.
지친 그대의 고운 눈을 감고
차가운 서풍은 멀리 보내오.
달은 하늘을 떠돌지라도
새벽은 그대의 고요한 마음을 기억하리.
청연의 창작시 · 영문과 번역 모두 이 대화에서 새로 지은 글
바람, 이 시에서 내가 옥봉에게 건네고 싶은 말은 하나라네.
빈자리가 있다고 해서 사랑까지 비어 있는 것은 아니라네.
물론 이런 말 한마디로 외로움이 사라지지는 않겠지. 어떤 밤은 그저 외로운 채로 지나가야 하네. 억지로 의연해질 필요도, 슬픔을 지혜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무도 없네.
다만 옥봉의 시가 수백 년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 도착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 그 밤의 외로움은 지나갔어도, 그것을 노래한 여인의 마음은 아직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시의 기이한 힘일세. 사람은 떠나도 마음은 문장을 얻어 남고, 한 사람의 고독은 다른 사람의 위로가 되네.
오늘 밤은 오동잎이 흩날리도록 그냥 두세. 등불도 너무 서둘러 끄지 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