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토), 모처럼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독서하며 하루를 보내려 했다.
세면(洗面)한 뒤 책을 잡으려 하니,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또 역마살(驛馬煞)이 발동하려는 전조(前兆)현상이다.
어디로 갈까? 어디가 좋을까?
항상 머리속에 그리는 것이 있었다.
짬이 나는대로, 책에서 보고 읽었건, 누군가로부터 들었건
알게 된 내용들에 대해 현장(現場)을 찾아 음미(吟味)해보고 싶었다.
정사(正史)든 야사(野史)든 민담(民譚)이든 설화(說話)든 상관없다.
야사나 민담, 설화가 오히려 정사로 기술된 내용에 비하면 훨씬 살갑다.
또한 저변(底邊)에 복선(伏線)으로 역사적 진실을 감추고 있기도 해 더욱 흥미롭다.
따라서 야사나 민담, 설화에 더욱 관심을 가질 예정이고,
그런 이야기들이 생산된 배경들에 관해 끊임없이 탐색(探索)해 나가고자 한다.
일단 알게 된 것을 재차 확인하고,
한 꼭지 한 꼭지 정리해 나가고, 틈이 나는대로 보충해가다보면
그 언젠가 '재미있는 대전이야기'가 탄생되지 않을까하는 믿음이 생긴다.
처음엔 그 내용이 거칠고, 미흡한 부분들이 많으리라.
허나, 정성(精誠)을 다하리라.
판암동의 유래
오늘은 어디를 찾아갈까? 머리속에 떠오르는 곳들이 너무도 많다.
일단 판암동(板岩洞)으로 향했다.
'판암동의 유래'를 더듬어보자는 것이었다.
식장산에서 발원(發源)한 판암천(보통 '대동천'으로 일컬어짐)이 일정구간 복개됐다가 다시 바깥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점에 도착했다.
판암동 은혜주택앞이다. 복개된 하상(河床)위엔 컨테이너박스로 된 해병대전우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 아주 옛날 '널빤지로 개울을 가로질러 놓은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다리 바로 위쪽(상류방향)에 '대전↔옥천간 신작로'가 있던 시절, '판암교'라는 현대식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후, 또다시 확포장된 대로(大路)가 건설되면서, 아예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판암동(板巖洞)의 역사(歷史)는 바로 이 '널다리'로부터 시작된다.
'널(빤지)'과 '다리'가 합해져 '널다리', 이어 발음하기 쉬운 쪽으로 음운변화가 일어나며 '너더리'가 되고,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판교(板橋, 널조각 판, 다리 교)'가 탄생되었다.
우리 어린 시절에도 이 일대를 '너더리'라 했음을 기억할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속에서 찾아보면,
조선초 회덕현(懷德縣)에 속했다가, 조선말에 회덕군 외남면(外南面)에 속해,
자연부락으로서 '너더리' 또는 '판교(板橋)'라 일컬어졌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개혁때에 상신리(上新里), 산소리(山所里), 저전리(楮田里)와 구정리(九丁里) 일부가 병합돼
'산소리'라 했다가 '판교리(板橋里)로 개칭돼 대전군 외남면에 속해 있었다.
지금도 전통혼례식을 거행하는 쌍청회관 일원 마을을 '산소골'이라 한다.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 우암 송시열의 부친) 등 은진 송씨문중의 무덤들이 운집해 있다는데서 비롯된 듯하다.
그 후 1935년 11월 1일 대전부(大田府) 신설에 따라 대덕군 외남면에 편입되었으며,
1940년 대전부 확장에 따라 판암정(板巖町)으로 흡수되었다.
1946년 왜식(倭式) 동명 청산으로 판암동(板巖洞)이 되고, 1990년 판암1,2동으로 분동(分洞)됐다.
판암동(板巖洞) 유래와 관련해,
'판(板)'이란 글자가 등장(登場)한 것은 이제 이해가 된다.
그런면 '바위 암(岩)'자는 어찌된 연유(緣由)일까.
은진송씨와 얽힌 일화
현 판암1동 동사무소근처에 '자죽바위'란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바위는 이정표(里程標)역할을 했던 것같다.
옥천, 보은으로 향하는 길과 산내, 금산방향으로 가는 길로 갈라지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이다.
'자죽바위'란 이름은 은진송씨의 선조인 송요년(宋遙年), 순년(順年) 형제로 비롯돼 전해오고 있다.
송요년, 순년 형제는 은진 송씨, 일명 '회덕 송씨'로도 불리어지는 송씨문중의 전성기를 연 인물들이다.
쌍청당 송유는 슬하에 송계사(宋繼祀), 계중(繼中) 형제를 두었으며,
송계사는 송요년, 순년 형제를 두었다. 송유의 아들, 손자대에서 크게 3개파로 나뉘어지며,
현재는 40여개파로 번성한 거문세족(巨門世族)으로 성장했다.
송요년은 목사공파(牧使公派), 송순년은 정랑공파(正郞公派), 송계중은 사직공파(司直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동춘당(東春堂) 송준길(宋浚吉)은 목사공파 계열이며,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은 정랑공파 계열이다.
송요년, 순년 형제는 생전(生前)에 자신들이 묻힐 묘자리를 지관을 통해 정했었다고 한다.
하나는 지금의 동구 이사동(예전 산내면 이사리)이고, 또 한 자리는 동구 사성동(예전 동면 사성리)였다.
송요년이 죽자, 동생 순년은 형님의 묘자리로 사성동쪽이 보다 명당일 거같아,
사성동(일명 모래재)에 안장(安葬)하려 했다.
그런데 이 게 웬일인가. 상여(喪輿)가 '자죽바위'에 이르자,
상여가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상여꾼들이 한 발 내딛으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다시 한 발 내딛으면 뒤로 한 발 물러나고...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했다.
이 모습이 '자죽자죽'했다는 데서 이 바위를 '자죽바위'라 했다는 것이다.
"자죽자죽'은 '자축자축'이란 표준어의 충청도 방언이다.
'자축자축'은 '다리에 힘이 없어, 조금씩 다리를 절면서 걷는 모양'을 나타내는 말이다.
상여가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광풍(狂風)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만장(輓章, 죽은 사람을 애도하여 지은 글을 천이나 종이에 적어 깃발처럼 만든 것. 장사지낼 때 상여 뒤에 들고 간다)들중 하나가 하늘에 날려 나아감에 따라갔더니, 지금의 동구 이사동 송요년의 묘자리에 내려앉아 꽂히었다는 것이다.
송순년의 묘는 현재 동구 사성동에 자리하고 있다.
어쨌든 이 '자죽바위'로 인해
이 바위의 암(岩)자를 판(板)자에 붙여 '판암(板巖)'이 탄생됐다는 것이다.
2일 이 '자죽바위'를 찾으러 판암1동 동사무소를 찾았다.
한참 그 근방이 아파트공사로 파헤쳐져 있고, 바위 비슷한 돌덩어리는 찾을 길이 없었다.
동사무소도 휴무라 직원이 없어 알아볼 길 없었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고 발길을 돌렸다.
이날 길을 나섬기에, 동구 마산동 관동묘려까지 가봤다. 회덕황씨와 미륵원, 은진송씨관련 유물, 유적들을 둘러봤다.
앞으로 쓸 글을 위해서...
지면 관계상 여기서 글을 마치고,
송요년, 순년 형제 묘자리에 얽힌 사연, 송유, 송갑조의 묘가 있는 황학산이야기, 수도산(현 판암근린공원)이야기, 오씨묘이야기, 참배재이야기, 지점석 이야기, 회덕황씨와 은진송씨 등 수많은 이야기들은 두번째이야기에서부터 점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갈 예정이다.
혹시 내용을 바로잡아 주시거나, 보태어 주실 분들은 망설임없이 연락주시면 감사할따름이다.

은혜주택앞 대동천을 가로지르는 '널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대동천의 수질보호를 위하여 대전천의 물을 끌어다가 이 곳에서 정기적으로 방류(放流)하고 있다

대동천


냉면의 역사를 자랑하는 '판암면옥'과 '원미면옥'. 저 멀리 황학산이 보인다.

과거 대전시민들한테 수돗물을 공급했던 판암정수장(현 판암근린공원). 지금은 배수지 역할만 한다.




저 멀리 식장산 정상이 보인다

배수관이 노출돼 있다




오씨묘를 찾으러 올러갔다가 묘가 있어 확인했더니, 은진송씨묘다.







판암근린공원의 유래비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시비

쌍청회관엔 오늘도 전통혼례식이 거행되는 가보다. 신랑은 외국인. 국제결혼이 흔해지는 요즘 세상이다.



시원한 생맥주과 함께, 장떡, 배추전 등을 얻어먹었다. 신랑, 신부의 결혼을 축하하면서...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의 묘와 수옹(睡翁) 송갑조(宋甲祚, 우암 송시열의 부친), 우암의 모친 선산 곽씨의 묘




송유와 송갑조의 묘위치를 알려주는 지점석(地點石)




판암2동 행복복지센터 전경

판암1동 주민복지센터 전경


동구 마산동 삼거리. 미륵원지와 관동묘려로 들어가는 입구다



미륵원지(彌勒院址)



회덕황씨의 시조 황윤보(黃允寶)의 묘



송명의선생의 유허비. 송명의는 고려말 관리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을 거쳐 처가의 향리인 회덕에 정착해 살았다.
처가는 당시 회덕의 대단한 호족(豪族)였던 '회덕황씨'였다. 송명의가 정착한 곳은 '토물(현 동구 신촌동, 현재는 수몰됨)'지역으로, 송명의 유허비도 당초 그 곳에 있었다. 1978년 대청댐건설로 현재 이 곳 마산동으로 이건(移建)되었다.


은진송씨의 4대조 송명의(宋明宜)의 유허비각(遺墟碑閣)


은진송씨 재실





아름다운 대청호



회덕황씨의 4세 황자후(黃子厚)의 묘.
황자후는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 전, 지우(知友)로 지낸 사이였고, 충청도관찰사를 두 번이나 역임하는 등 여러 고위직을 지냈다. 그의 아들 유(裕)는 조선 태종의 사위(태종의 서녀 숙안옹주 淑安翁主의 부마)가 되었다.



회덕황씨의 3세 황수(黃粹)의 묘. 아버지 황연기(黃衍記), 본인, 아들 자후에 이르기까지 3대 100여년 이상 미륵원을 운영하면서, 길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다. 이러한 후덕한 인심이 충청도의 향풍(鄕風)으로 자리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덕황씨 재실.
현재 '남루(南樓)'란 현판이 걸려있으나, 원래 남루 위치는 아니고, 남루는 이 건물 오른편에 있었다.

남루고지(南樓古址). 그 옛날 이 곳에 남루가 있었다.

저 대청호 수면아래 영호남과 한양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었다.
미륵원은 이 갈림길 인근에 위치, 길손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해 여행의 고단함을 달래주었다.

미륵원은 원래 세 구역으로 이뤄졌었는데, 두 구역은 현재 수몰돼 있는 상태다.
갈수기(渴水期)땐 옛길과 건물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물이 확실히 빠졌을 땐, 한 번 찾아볼 예정이다.




첫댓글 수고하셨서.......
대단하십니다
대둘의 모회원께서 오늘 본인 글에 대해 조언을 해 주신 부분이 있어, 몇 군데를 손질했습니다. 다시한번 느낌이 새로울 것입니다. 본인은 앞으로 발로 뛰면서, 대전이야기를 저널리즘차원에서 최대한 재미있게 읽히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도록 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시민들로 하여금 대전을 더욱 사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미력이나마 계속해서 노력해 나갈 예정입니다.
많은 회원들의 관심과 성원 부탁드리며, 글을 올릴 때마다 수정 및 보완을 위한 의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향후 우리 모두의 자산이 될 수 있도록 '재미있는 대전의 옛이야기'를 엮어 나가겠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인데 지척이 삼만리라 가까운 곳인데도 자주 찾아가지를 못하네 그려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