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신비, 지혜의 은총, 지혜의 훈련 -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뿐이다 -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
2023.2.20.연중 제7주간 월요일 집회1,1-10 마르9,14-29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2티모1,10)
어제는 봄빛 완연한 참 평화롭게 느껴지는 날이었고,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오후 잠시 화창한 봄날이 좋아 잠시 뒷 불암산 중턱 천보사까지 갔다가 수녀원 옆담을 끼고 걸어서 수도원에 돌아 왔습니다. 첫눈에 들어온 곳곳의 삼엄한 경계의 울타리에 담이요 벽들이었습니다. 하늘 위에서 보면 산산히 조각난 땅이겠지 싶었습니다.
문득 경계없는, 울타리없는, 담이 없는, 벽이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있다면 내적 울타리, 덕德의 울타리를 지닌, 예수님처럼 좌우사방 모두에게 활짝 열린 문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 불암산처럼 넉넉하고 편안한 배경의 품이, 침묵의 품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희귀식물을 찾아 백두대간을 누비는 식물분류학자 허태임 박사의 인터뷰 한 대목도 떠올랐습니다.
“저는 사람보다 식물이 좋아요. 이 친구들과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어요. 사람의 삶속에서는 사사로운 감정이나 작은 일에 매여 있을 때가 많잖아요. 그런데 식물들을 만나면 경계같은 게 허물어져요.”
예수님처럼 만나면 저절로 경계를 허물게 하는 사람, 무장해제시키는 사람, 가면을 벗고 참 나를 살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지혜로운 사람, 자유로운 사람, 하느님의 사람,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마침 등산후 집무실에 있을 때 갑작스레 찾아왔던 자매가 생각납니다.
“밤잠을 잘 못자요. 자꾸 불안하고 우울해져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호소하기에 잠시 대화를 나눈후 주일 강론과 더불어 전전날의 강론을 소리내어 읽도록 했습니다. 고립단절되어 자기 감옥에 갇혀 지내다 보면 날로 정신 질환에 우울증 환자도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자기 감옥에 갇힌 수인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도 이념도 너무 극단적으로 굳어져 서로간의 내적 담이, 벽이, 울타리가 참 험악합니다. 이 극단의 내적 분열의 골을, 벽을 어떻게 치유할지 참 어려우나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참으로 내적으로 활짝 열려 있는 지혜롭고 자유로운 사람들로 산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도 절실했습니다. 새삼 인간 무지에 대한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에 대한 자각입니다. 대부분 병이나 죄악도 눈먼 무지의 탐욕이나 어리석음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 답은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과의 만남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지혜롭고 자유롭게 하는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집회서 말씀이 반갑습니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빠진 지혜문학에 속하는 집회서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지혜의 신비’에 대한 금과옥조의 설명들입니다. 흡사 지혜의 찬가처럼 들립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창조되었고, 명철한 지각도 영원으로부터 창조되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지극히 경외해야 할 지혜로운 이 한 분 계시니, 당신의 옥좌에 앉으신 분이시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주님께서는 이 지혜를 만드시고, 알아보며 헤아리실 뿐 아니라, 그것을 당신의 모든 일에, 모든 피조물에게 후한 마음으로 쏟아부으셨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흡사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두고 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어지는 주제는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임을 알립니다. 지혜의 신비, 지혜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답은 하나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며 지혜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훈련에 욥기, 요나서, 코헬렛, 시편, 잠언, 지혜서, 집회서의 부단한 독서와 묵상이 참 좋겠습니다.
지혜의 사랑, 지혜의 선물, 지혜의 훈련이 우리를 무지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활짝 열린 사람, 경계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살게 합니다. 그러니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며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그분과의 신뢰와 사랑을 깊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하느님 지혜의 화신인 예수님께서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를 치유시켜주는 일화입니다. 그 옛날에는 간질병자 역시 악령의, 마귀의 소행으로 여겼습니다.
바로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가 상징하는 바, 무지의 악, 무지의 병에 들린 현대인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지의 병, 무지의 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요! 모든 병이나 죄악의 뿌리에는 무지의 어둠이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마침내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악령들린 아이를 주님께 데려 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여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예수님은 예나 이제나 사람들을 대하면 여전히 믿음이 없는 세대라 개탄하실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는 그대로 무지의 세대, 지혜가 없는 세대, 그리하여 병이 많은 세대입니다.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사 간청합니다. 이에 대한 주님과 오고가는 대화가 참 반갑고 고맙고 은혜롭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우리를 참으로 지혜롭고 자유롭게 하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이 되는 대목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께 우리가 청할 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바로 이 겸손한 기도 하나뿐입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 나가라.”
이어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 구원되어, 다시 일어나 부활의 삶을 살게 된 아이입니다. 그러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더러운 영에 걸려 병이 들기전 하느님의 지혜이신 주님과의 부단한 만남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고 영혼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물음과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이고 지혜의 힘이며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치유하여 자유롭게 하는 기도의 힘, 믿음의 힘, 지혜의 힘, 예수님의 힘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사며, 우리를 참으로 지혜롭고 자유롭게 하십니다.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리이다.”(시편9,2-3).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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