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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두로에 머물다
행 21:1-6
1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2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4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5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행 21:1-6 /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한 우리는 배를 타고 고스로 직행하여 이튿날 로도에 들렀다가 기기서 바다라로 갔다. 2) 바다라에서는 수리아 지방의 베니게로 가는 배를 바꾸어 타고 3) 멀리 바라보이는 구브로 섬을 왼편에 끼고 수리아를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두로에 닿았다. 거기서 그 배는 짐을 풀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4) 우리는 배에서 내리자 신도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한 주일을 지냈다. 그 신도들은 성령께서 이르신 대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5) 한 주일이 지나서 우리가 배로 되돌아가게 되자 온 교회는 물론 심지어 부인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바닷가에 나와서 우리를 전송해 주었다. 우리는 거기서 다같이 기도를 드렸다. 6)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가 배에 오른 뒤에야 그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밀레도를 떠난 사도 바울 일행이 잠시 두로에 머물며 성도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두로의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고난 받을 것을 전합니다.
밀레도에서의 작별(1-2) 바울과 누가, 드로비모와 아리스다고 등의 사도 바울 일행은 밀레도의 성도들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헤어짐의 인사를 나눕니다. 이 헤어짐은 사도 바울과 그의 제자들에게는 매우 어렵고 아쉬운 작별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그 길이 고난의 길인 것을 알았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밀레도의 성도들도 사도 바울이 가는 길이 고난의 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서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마지막 인사인 것입니다. 바울은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를 거쳐 바다라에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에 승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두로의 제자들(3-4) 사도 바울의 일행이 탄 배는 수로를 따라 순항하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가나안 서북방 두로에 도달하게 됩니다. 두로는 시돈과 함께 베니게의 오랜 항구 도시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교도의 도시로 번영과 부패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책망의 대상이었습니다(눅 10:13). 이러한 도시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씨앗이 되는 성도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흩어진 성도들과 사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이레를 머물게 됩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가 받을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알게 되어 만류한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합심기도(5-6) 마치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류하였던 베드로의 인간적인 염려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서 두로의 제자들이 믿음이 없이 인간적인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이제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만류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광의 길이 아닌 고난의 길인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도바울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행 20:22).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아름답게 보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적용: 당신을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고 있나요? 당신은 지금 누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나요? 중보기도의 동역자가 되길 바랍니다.
연예인이나 아이돌에겐 그들을 추종하는 팬클럽이 있습니다. 연예인들의 동선과 그들이 무엇을 할 지,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 자주 들르는 장소,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사람들, 바로 사생 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것, 싫어하시는 것, 그분께서 하실 일을 알고 싶어 하며, 그분께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하여 아예 그분 거처에 들어가려는 하나님의 사생 팬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생 팬은 24시간 그분과 함께 동거해도 지탄은 커녕, 그분께 칭찬을 받는데도 그렇습니다.
호크마 주석
=====21:1
우리가 - 본서에서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곳은 모두 네 곳인데(16:10-17;20:5-15;21:1-18;27:1-28:16) 본 단락은 그 중 하나이다. 여기서 '우리'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의 차이가 있다. 혹자는 '우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바울, 누가, 드로비모, 아리스다고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바울과 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20:4에서 부로의 아들 소바더,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아리스다고에 대해 언급한 이후 지금까지 그들 중 누구와도 헤어졌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과 헌금 전달자의 명단위에 열거된 이름 외에 다른 이름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들 외에도 다른 동행자들이 함께 했으리라 짐작된다(Haenchen). 저희를 - '저희'는 밀레도의 회중들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가리킨다(20:17, 18). 작별하고 - 헬라어 '아포스파스덴타스'(* )는 동사 '아포스파오'(* )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인데, 이 말은 어떤 사람 또는 물건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아포'(* )와 '끌다', '당기다'의 뜻인 '스파오'(* )의 합성어로 '찢어놓는다'는 의미로서 매우 어렵고도 아쉬운 이별의 장면을 묘사해 주고 있다. 이것은 교역자로서의 바울과 그로부터 양육을 받는 성도들 사이가 매우 친밀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고스 - 밀레도 남쪽 68km 지점에 있는 작고 비옥한 섬으로 명주, 솜, 고약의 산지로 유명하며 또한 전설적인 의학자인 히포크라테스의 고장으로 규모가 큰 의학교가 있었다. 로도 - 이 지명은 '도데케네스'(Dodecanese)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을 가리키며 더 구체적으로는 이섬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를 가리킨다. 이곳은 소아시아 대륙에서 19.2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장미의 섬으로 불리울 만큼, 피부한 일조량으로 하여 장미가 만발하는 섬이다. 또한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태양의 상징 아폴로 신상이 크게 서 있는데 당시에는 넘어져 있었다. 바다라 - 이곳은 소아시아의 남서 해안에 위치한 루시아의 도시였다. 당시 '바다라'는 수리아, 팔레스틴 및 애굽 동쪽연안의 지중해 항구들과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의 항구들을 왕복하던 큰 배들의 정박지로서,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자 거대한 상업 도시였다. 한편 한때 이곳에는 델피(Delphi)에 견줄만한 아폴로 신의 신탁소가 있었다.
=====21:2
베니게로 건너가는 - 베니게는 팔레스틴 북쪽 두로나 시돈이 위치한 지역을 포괄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제는 에게해를 완전히 빠져나와 지중해를 가로질러 두로에 이르는 항로에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들은 바다라에서 두로로 직항(直航)하는 큰 배로 갈아탔을 것이다.
=====21:3
구브로를 바라보고...왼편에 두고 - 구브로는 바다라와 두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지중 해상의 섬으로 과거에 바울과 바나바가 바보에서 바예수의 훼방을 물리친 바 있다(13:4-12). 바다라에서 두로 방향으로 항해를 하자면 이 구브로섬의 남단을 지나가게 되는데,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라는 표현은 이 항로를 따라 배가 움직여갔음을 말해주며 동시에 이 배가 순항하였음을 암시한다. 수리아 - 이 지역은 팔레스틴 서북방의 지중해에 접한 지역으로 이 지역의 남쪽에 두로가 위치해 있다. 행선하여 - 헬라어 '에플레오멘'(* )은 '항해하다'의 뜻인 '플레오'(* )의 미완료과거형으로서 구브로에 머무르지 않고 수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항해하였음을 시사한다. 두로 - 이 도시는 바로 위에 위치한 시돈과 함께 베니게의 오랜 항구 도시이다. 대표적 이교 도시로 번영과 부패(腐敗)의 표본이었으며 늘 책망의 대상이었다(눅 10:13). 이 두로는 바다라에서 닷새의 항해 거리에 있었다고 하는데(Chrysostom, Bruce), 이곳에 배가 정박한 것은 배의 짐을 내리기 위함이었다. 아마 이 짐은 과일이나 곡물이었을 것이다(Robertson).
=====21:4
제자들을 찾아 - 이 진술은 두로에도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언제, 어떤 경로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11:19에 의거하여 스데반의 순교 후 각지로 흩어진 교인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본다(Bruce, Lenski). 또한 이들 중에는 바울과 실라의 2차 전도 여행시 전한 말씀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한편 본문의 '찾아'(* , 아뉴론테스)는 '수색하여 발견하다'는 뜻을 내포하는데, 이는 두로에 있던 교인들과 바울의 만남이 사전에 약속된 것이 아니라 수소문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으며 그곳에 있던 교인들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5절 주석 참조). 이레를 머물더니 - 바울 일행이 두로에 머문 것은 일주일 간이었다. 바울이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두른 것에 비하면(20:16) 상당히 여유있는 행동으로 보이는데, 이는 바다라에서 출발한 배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는 배가 아니라 지중해를 가로질러 가는 배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많이 단축(短縮)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두로에 일주일간 머물러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의 일정에는 별로 차질이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배편을 찾지 않고 그냥 머물러 있었던 데서도 드러난다. 한편 바울 일행이 일주일간 머물러야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는데, 헨헨(Haenchen)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타고온 배는 두로가 종착지였기 때문에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배를 기다려야 했다고 보며, 이에 반해 벤트(Bent)나 람세이(Ramsay)에 의하면 바울 일행이 다른 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 배의 짐을 풀고 다시 싣는데 이레가 걸렸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3절의 문맥상 배를 갈아탄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짐을 내리고 싣는 동안 기다려야 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 성령의 감동으로 -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였고(19:21), 그의 의도와 행동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었다(20:22-24). 그런데 여기서는 두로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이것은 일견 성령의 역사가모순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면 그러한 오해는 해소될 수 있다. 즉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생겨난 결과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내용이지 바울로 하여
=====21:5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 바울 일행이 이레를 머물고 떠나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밀레도 해변에서 그곳의 성도들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이별할 때에 비해서는 덜 애절하지만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다. 비록 일주일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하나님과 성령안에서의 그들의 교제는 매우 강한 사랑과 신앙의 유대를 만들어 냈다. 아내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동행하여 바울을 전송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인데 이것은 두로의 신앙 공동체가 상당히 소규모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구절이다. 또한 이 구절은 사도 시대에 교회와 관련하여 어린이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시된다(Vincent). 한편 '성문 밖'은 구체적으로 배가 정박하고 있는 부두를 가리키는 것같다.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 이 모습은 밀레도에서의 이별 장면과 동일하다(20:36). 서서 기도해도 무방할 터인데 사람들의 이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진지한 신앙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러한 기도는 그들의 교제가 온전히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의 고난을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잘 견디어 낼 수 있도록 그리고 두로의 성도들이 타락한 이방의 도시에서 신앙의 순결을 잘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한 목소리로 간구했을 것이다.
=====21:6
우리는 배에...저희는 집으로 - 누가는 이별의 장면을 세세한 부분까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배에'라는 문구의 헬라어 표현에는 정관사 '토'(* )가 첨가되어 있어 이 배가 처음 타고 온 배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배임을 말해준다.
< 설 교 >
일사각오의 신앙
행 20:1-16 / 김 조 목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주어진 삶이 보다 값지고 은혜로우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성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고기를 먹되 피는 먹지 말라고(레17:11-14) 여러 번 반복하신 것은 피는 생명이기에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생명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어려움도 이기지 못하여 자살을 하여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 자살 2위라고 합니다. 한다는 연예인, 정치가, 사업가들이 오죽하면 죽었겠는가 할 수도 있겠으나 죽을 각오로 하면 무엇을 못하겠고 안 될 것이 있겠습니까?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무서운 범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것 불순종입니다. 보이는 세상이끝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는 한 여자 에스더의 부르짖음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조국을 구했습니다.(에7:3, 4:16)죽기를 각오했다는 것은 분명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는 것으로 바울사도가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하신 말씀을 보니 그는 죽기를 각오한 신앙이었기에 “일사각오의 신앙”이라 제목하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바울사도가 전도여행을 마치고 밀레도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곳을 거쳐 갈 때에 바울사도를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두 번씩이나(4~12)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하였으나 “너희가 어찌하여 울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나무라시면서 죽을 각오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도 성령의 인도로 (19:21, 20:22,23)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운데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로 올라가지 말라 하시니 서로 다른 것 같으나 믿음의 형제들은 존경하는 사도를 위함이요 바울사도는 성령의 지시를 순종하는 것이라 다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13-14절)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하니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셨으니 예루살렘에 가서 교회를 돕고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서이기에 이것이 자기의 생각이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을 각오를 하였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신 것 아시고 호산나 찬송 소리 들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내 원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지기 원하고 기도하셨던(마26:39)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성령께서 미리 가르쳐 주셨으니 피하거나 도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기에 죽어도 해야 한다는 일사 각오의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성도여!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살아가게 하시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평안과 안일만 위해 산다면 당장은 좋을 수 있겠으나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없습니다. 적당한 핑계 대지 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을 각오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은혜 베푸실 줄 믿습니다.
2. 사명의식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13, 20:24)
바울 사도는 한 마디로 사명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명 위해 생명도 버리겠다는(20:24)것입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더 귀하고 값진 것이기에 죽을 각오도 한 것입니다. 사람이 오래 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것 많이 가졌다는 것이 귀한 것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얼마나 했느냐는 것이 귀합니다. 왜 살아야 하느냐는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할 때에 그 삶이 보람 있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먹다 죽다”하는 인생 되지 말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하신 말씀 기억하고 다 자신의 욕망과 욕심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사43:7,21)내게 맡겨진 사명 위해 일사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명예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 위해 애굽 왕궁의 낙도 버리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사명 다하고 받을 상을 바라보며 세상 것 버림으로(히11:24~26)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사도도 그 좋은 가문, 학벌, 명예, 권세를 배설물처럼(빌3:8)여겼던 것이 사명 때문이었기에 그는 크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명의식 분명히 하고 일사각오 함으로 하나님의 더 크신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3. 자신의 희생하는 것이었습니다.(12-14절)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적인 의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며 죽기까지 희생하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라 되게 하셨으니(롬5:10) 이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이요 헌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란 결박이 기다린다 함에도 올라가기로 결심한 것은 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한 자신의 희생을 들어낸 것이요 울며 간권하는 믿음의 형제들의 만류를 “어찌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나무라신 것은 일시적인 자기감정이나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사명 다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하심으로 자기희생적인 의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스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육신의 생명을 더 연장하는 보다 귀한 것인 줄 알면 주를 위해 희생함으로 더 큰 복 받읍시다. 한 교회를 30년 넘게 섬기며 어려울 때 마다 큰 교회에 청빙 고 거절 할 때마다 손해 보고 바보 같았으나 오늘날 삼락교회가 있게 되고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자 하는 자 하나님이 살리시고 복주십니다. 큰 복 받으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려 합니다.
신사참배 옥고를 치루시고 순교한 분들이 더 좋은 것 귀한 것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며 하나님이 명하시고 맡겨 주신 사명이 생명보다 귀하기에 자기 좋은 것 버리는 희생과 헌신으로 죽을 각오로 신앙 되시고 죽고자 하면 살려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시고 큰 복 누리시기를 소원합니다.
생명이냐? 사명이냐?
사도행전 21:1-16 / 서금석 목사
작가 에도슈샤쿠가 쓴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기독교 탄압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던 17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선교사였던 페라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에 접한 포르투칼의 예수회에서 다시 세바스챤 로드리코 신부를 몰래 일본에 잠입시킵니다. 삼엄한 단속과 엄청난 박해 속에서 결국 로드리코 신부도 일본에 상륙한 지 한달 여만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체포되면서 "결코 배교하지 않고 장렬하게 순교하리라" 다짐하였습니다. 로드리코는 이미 일본에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이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뜨거운 열탕에 며칠이고 빠뜨린다든지, 귓불에 구멍을 뚫어 거꾸로 매어 단다든지 하는 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드리코는 순교를 다짐하고 밤을 지새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밤새도록 고문당하는 신도들의 신음 소리만 듣게 되었습니다. 고문하는 사람이 로드리코 신부에게 속삭입니다. "너도 배교해라. 만일 네가 배교를 하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저렇게 죽어갈 것이다" 그래도 로드리코 신부가 배교를 하지 않자 고문하던 사람이 한 수 더 떠 얘기했습니다. "그래 너는 신앙의 지조를 잘 지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하자. 네가 배교를 한다면 저 사람들이 놓여 날 수가 있는데, 너는 너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고통 속에 있는 저들의 비명 소리를 외면한다는 말이냐?" 저는 여기서 「침묵」이라는 소설의 이야기를 계속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로드리코 신부의 고민을 다시 한 번 생각하려고 합니다. 로드리코는 그토록 많은 신도들이 신앙을 위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배교한 신도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배교를 함으로써 그들을 살려야 하는가?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길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하면서 간혹 어떤 것이 진정한 신앙의 길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 되지 않아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으시지요? 오늘 말씀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밀레도에서 두로까지(1-6)
"1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Gos)로 가서 이튿날 로도(Rhodes)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Patara)로 가서 2베니게(Phoenicia)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3구브로(Cyprus)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Syria)로 행선하여 두로(Tyre)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바울은 이 당시 제3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기에 바울은 매일 배로 힘든 항해를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고스는 비옥한 작은 섬으로 의사가 될 때 누구나 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Hoppocratic Oath)"로 우리에게 알려진 의사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으로 큰 규모의 의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로도는 섬이름도 로도이고 그 섬의 항구 이름도 로도인데 장미가 많이 나서 장미의 섬으로 불리울 정도였습니다.
바다라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이자 거대한 상업 도시였습니다.
두로는 베니게의 오랜 항구도시로 대표적 이교(異敎)도시요, 번영과 부패의 표본으로 성경에 시돈과 함께 늘 책망의 대상이 되었던 도시였습니다.
1.'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 작별의 의미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간곡한 고별 설교로 권면을 마친 후 작별합니다. 여기서 작별하고의 헬라어 '아포스파스덴타스(?ποσπασθ?νταs)'는 어떤 사람 또는 물건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아포(?π?)'와 '끌다', '당기다'의 뜻은 '스파오(σπαω)'의 합성어로 '찢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두 사람이 붙어 있는 것을 억지로 떼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과 에베소 교회 장로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헤아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불확실했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 접하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역시 바울의 이 힘든 여정을 짐작하고 있었을텐데, 작별하는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바울은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매일 매일 여정을 강행합니다. 밀레도에서 고스로, 고스에서 로도로, 로도에서 바다라로 바다라에서 두로까지 배타고 계속 예루살렘으로의 길을 재촉했습니다.
2. '제자들을 찾아' -제자들을 찾는 의미
"4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오랜 항구도시 두로에서 배의 짐을 내리기 위해 배가 항구에 머무는 동안 바울은 제자들을 찾아나섰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란 바울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믿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두로에 있는 제자들과 약속해서 만난 것 같지는 않고 어디에 있든지 전도하고 양육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바울은 배가 머무는 동안 여기 저기 수소문하여 찾아내어 평소대로 양육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는데 어디를 가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저기에 예수 믿는 사람 많이 있는데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되면 뭔가 속으로 통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여행하다가 예수 믿는 사람 만나면 뭔가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또 하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말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그냥 왔겠습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도중에 배의 형편이 좋지 않아 할 수 없이 두로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로에서도 바울은 쉬지 않고 말씀 가르치고 기도하며 양육하는 일에 전심을 다했습니다. 이런 바울을 지켜보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간이 있을 때마다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는 일에 관심을 가집시다. 딴 재미보다 사람키우는 일에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제구실하는 성도로 잘 이끌어 주는 일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3. 바울과 제자들의 작별
"5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 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6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작별할 때도 무릎꿇고 기도했는데 여기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대체로 서서 기도했는데 왜 무릎꿇고 기도 했을까요? 의식화한 기도 보다 더 절실한 기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 길을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을 보면서 제자들은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여겼을 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의 마음 역시 간절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을 위해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었겠습니까?
2.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7-14) -생명(生命)이냐? 사명(使命)이냐?
"7두로로부터 수로(水路)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이튿날 떠나 가이샤라에 이르러 일곱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9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두로에서 가이샤라 방면으로 35km 지점에 위치한 소항구가 돌레마이입니다. 돌레마이에서 가이샤라까지 육로로 갔는지 배로 갔는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배로 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이샤라는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50-60km 지점에 위치한, 로마치하에서 유대지방의 행정 장관이 거주하는 정치적 도시로 거대한 항구도시이기도 합니다. 가이샤라에서 바울은 일곱 집사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유하게 됩니다. 전도자 빌립은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최초로 전도했던 사람아닙니까? 그에게 딸 넷이 있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v8) 했습니다. 여기서 처녀란 결혼하지 않은 여자지요. 이 당시 대부분 교회 봉사를 과부들이 했던 것을 비추어 보면 대단히 이례적인 일입니다. 지금은 예언 은사가진 사람들이 드물지요.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예언 은사를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처럼 떠 받들려고 하는 부패된 호기심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한 가정에 전도하는 아버지와 예언하는 딸이 있으니 얼마나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가정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 목회자가 되었든, 평신도가 되었든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정과 후손을 축복해 주십니다.
1. 아가보의 예언과 의미
"10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바울이 빌립의 집에 상당기간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에서 여행을 급히 서두른 까닭에 심신이 피곤했기도 했고, 오순절까지는 시간의 여유도 있었기에 휴식을 겸해서 빌립의 집에 머물며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을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선지자 아가보가 다시 등장합니다. 이미 사도행전 11:28에서 온 세계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예언하던 예언자입니다.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된다'고 예언합니다. 아가보는 자기의 손과 발을 바울의 허리 띠로 묶으면서 이 허리따의 주인이 이처럼 될 것이라고 실연(實演)으로 보여 줍니다. 바울 자신도 밀레도 교회의 장로들에게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행 20:23)고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을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2. 가지 말아라 - 생명을 지켜라
아가보의 예언을 전해들은 바울 일행과 가이샤라에 있던 성도들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2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현지의 성도들과 바울을 수행중이던 사람들이 합세하여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권하다'는 말은 표준새번역에서는 '간곡하게 만류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두로에 있던 성도들도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말렸습니다. 가이샤라에 오니 선지자 아가보가 실제 연기까지 하면서 예루살렘에 가면 만나게 될 체포사건에 대하여 보여주면서 모두들 만류하고 있습니다.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여러분이 만일 바울이었다면 가야 한다고 하시겠습니까? 주위에서 모두들 만류하니 못이기는 체 하고 주저 앉겠습니까? 예루살렘에 가기만 하면 붙잡혀 감옥에 넣어지는 것은 물론 생명까지 어찌 될른지 모르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말리는 사람들이 단순히 '가지 말라' 한 마디만 했겠습니까?
만일 붙잡혀 감옥간다면 복음 전하는 것도 끝장 아닙니까? 바울 사도여 당신은 아직 더 일하셔야 합니다. 로마에도 가셔야 하고 스페인도 가셔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직접 로마로 가십시다. 이렇게 설득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여 고집 고만 좀 부리세요. 예루살렘에 가지 않는다고 당신이 평안한 내일을 살려고 한다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당신도 예루살렘에 가지 말아야 해요. 가서 붙잡히는 것이 능사가 아니지 않아요.
사도 바울도 갈등 많이 했을 것입니다. 과연 어느 것이 하나님 뜻일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처럼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어느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일까? 예루살렘에 가서 투옥 되는 것이냐? 아니면 비켜 가는 것이냐? 누구인들 스스로 감옥가는 것 원할 사람 있겠어요? 제 발로 가는 것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선 생명을 지켜야 사명도 감당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3.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 사명이다.
"13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나는 간다.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사명을 위하여,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체포는 물론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 사명 내가 꼭 감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사도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고백한 말이 있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바울은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생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을지언정, 생명을 위하여 사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전하는 사명은 꼭 감당해야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했습니다. 바울이라고 생명 귀한 줄 몰랐겠습니까? 예루살렘 가지 않는다고 주의 일 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른 곳에 가서 복음 전한다고 주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의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이 주의 뜻으로 믿었습니다.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서 네 몸으로 나실 것이라 알려줍니다. 마리아는 깜짝 놀라 사내도 알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아기를 낳겠습니까? 반문하자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 보세요. 아무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정혼한 남자가 있는데 결혼 전에 처녀가 정혼한 남자의 아이도 아닌 아이를 낳는다는 일 - 얼마나 수치스럽고 곤욕스런 일입니까? 그래도 마리아는 말합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개인적으로는 곤욕스럽긴 해도 하나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개인적으로 볼 때 입장이 난처하고 형편이 곤욕스러워도 하나님 뜻이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믿음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존심이 믿음보다 강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쉽게 믿음을 던져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내 자존심이 좀 구겨져도, 내가 환난을 좀 당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인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뜻 이루려면 환난도 각오해야 합니다. 환난 당합니까? 역경이 있습니까? 문제는 내가 믿음 가운데 있기만 하면 됩니다. 왜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성도 여러분, 생명보다 사명을 귀히 여겼던 사도 바울에게서 귀한 믿음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매일 매일 무엇을 위해 사십니까? 우리 중에 한가하게 사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그 바쁨이 주님 주신 사명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평생 아침부터 밤까지 나 하나, 내 가족 하나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바쁘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평생 예수 믿을 텐데, 언제인가 하나님과 마주 앉아 지나온 삶을 결산할 때가 분명히 올터인데, '너는 내 가 준 생명, 내가 준 인생, 나를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왔느냐?' 물으신다면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우리 삶을 통해 무엇하기를 원하시는 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러한 영적인 사명을 깨닫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100년만에 주신 새 성전에서 무엇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새 성전을 통해 무엇 하시기를 원하시는지 이것을 모른다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오래 살고, 짧게 살고가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모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한 목숨 언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 이것만 이룬다면 미련이 없다는 바로 그 사명 - 무엇입니까? 이것 아셔야 해요. 그래야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지 않아요.
성도 여러분. 내게 주신 사명(mission)이 무엇입니까? - 평생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며 살겠다. 남에게 사랑하며 베풀며 살겠다. 성전에서 봉사하며 살겠다. 한 곳이라도 내 손으로 가꾸며 살겠다. 댓가를 바라지 않고 헌신하며 살겠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 사랑 느끼게 하며 살겠다. 사명을 다 하려면 손해 볼 수도 있어요. 신변에 불이익, 위험이 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명이기에,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기꺼이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직도 그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기도하세요. 말씀보세요. '평생 이것이 사명이다' 가슴에 확신이 올 때까지 기도하세요. 새벽기도하세요. 이것 모르면 평생 믿었다 해도 빈 그릇 가지고 하나님 만나게 됩니다. 우리 춘천 중앙의 성도들은 사명 위해 기도하시고 바울처럼 목숨까지는 못 받치더라도 최선을 다 합시다. 그러면 내 인생이 달라져요. 가정과 직장이 달라져요. 교회가 달라져요. 교회의 일거리가 내 눈에 보이십니까? 이것이 사명이다 내가 하세요. 땀 흘려하시고 내 주머니 털어 하세요. 하나님 하는 것 기쁨이요 영광이 아닙니까? 사명을 앞세우며 사시기 바랍니다.
3.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15-16)
"15이 여러날 후에 행장(行裝))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새 16가이샤라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가이샤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0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요즈음은 100km정도는 한 시간이면 갈 수가 있겠지만 당시의 도로 사정이나 교통수단을 생각하면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전할 구제금과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말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16절의 나손은 바나바와 같은 고향 구브로 사람으로 예루살렘에 큰 집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정리하면서
생명이냐? 사명이냐? 바울은 생명보다 사명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사명- 무엇입니까? 사명을 모른다면 곤란합니다. 답답한 삶입니다. 죄송하지만 멍청한 삶입니다. '누가 뭐라해도 이것이 내게 주신 사명이다'- 이 사명이 먼저 분명해야 합니다. 사명 위해 때로 신변의 불이익과 손해가 온다해도, 환난과 곤욕스러움이 온다해도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을 이루어 주실줄 믿습니다.
1.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기 위해 말씀보고, 기도드리는 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2.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어떻게 하든 담대하게 그 사명 이루도록 달려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행 20:1-14 / 박근호 목사
'2002 한일 월드컵'이 만들어낸 말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은 한국과 스페인의 8강전에서 사용된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일 것입니다. 월드컵 이후 정치, 경제, 문화 등등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꿈 깨'라는 말도 그 못지 않게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꿈 깨'라고 일침을 놓는 것은 유머적인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모든 꿈이 다 이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경계적 표현도 되겠습니다.
'이루어져야할 꿈'이 있는가 하면 '이루어져선 안될 꿈'도 있습니다. 모든 꿈이 다 이루어져야할 현실일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꿈 속에는 바람직하지 못한 인간의 허상과 욕망이 배어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이 말은 신앙적 입장에서 볼 때 그렇게 바람직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걸러짐없이 그냥 사용하기에는 그리 적절한 말은 아닌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말은 따로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는 말일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우리 다같이 한번 외쳐보십시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드와이트 무디에게 어느날 짓궂은 교인이 찾아와서는 그가 읽는 성경책을 좀 보자고 요구해왔습니다. 무디는 그 사람에게 너무 오래 봐서 이제는 다 헤져버린 자신의 낡은 성경책을 보여줬습니다. 그 성경책은 무디가 읽으면서 줄치고 표시하고 글도 써놓고 해서 여간 지저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리저리 뒤적거려보던 그 교인이 무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여기 써놓은 T, P라는 글자가 무슨 뜻인가요?' 그 질문에 무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T자는 Tried의 약자이고, P자는 Proved의 약자입니다...' Tried는 '시험해 보다. 연습해 보다'는 뜻이고 Proved는 '확인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가다가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 Tried 라고 써놓고 시행을 하고, 또 그 실천으로 인해 성경이 약속한 결과에 이르게 되면 Proved라고 써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확증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 글자들은 무디 스스로 생활 속에서 말씀을 실천해 봄으로써 정말 그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했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니 무디의 삶이 어떠했겠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성경 말씀 하나하나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그것이 그런가 안그런가 확인을 했다니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까 짐작되는 일화입니다. 내 뜻이나, 내 바람이나, 내 꿈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함으로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과 바람과 꿈을 이루어드렸던 자가 무디였던 것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꿈은 내가 꾸는 게 아닙니다. 만약 내 마음대로 꿈을 꿀 수 있다면 TV도 필요 없고, 영화관도 필요 없을 겁니다. 진정한 꿈은 내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요 부여되는 것입니다. 그게 참 꿈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도 야곱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이었습니다. 요셉의 꿈도 마찬가지이고 요엘 선지가 '말세에 늙은이들이 꾸게 될 것'이라고 한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는 꿈이 진짜 꿈입니다.
그러나 어디 그렇습니까? 대부분의 인간의 꿈이라고 하는 게 자기 욕망의 분출이거나 자기 욕구의 변형임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실 오늘 이 땅의 혼돈과 무질서와 공허는 바로 그러한 변질된 꿈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어지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결코 꿈같은 세상이 아니라 더욱 처절하고 냉엄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꿈을 이루어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은 얘기입니다. 내 뜻보다 하나님 뜻을 앞세우고 내 꿈보다 하나님 꿈을 먼저 꿈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호가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 장로도 자기 계획을 세우고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골몰하는 인생들을 향해서 '너희가 도리어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이라고 말하라'고 권면하지 않습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외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호를 그 누군들 외치지 못하겠습니까? 문제는 무디처럼 'Tried 하고 Proved 하느냐 하는 겁니다. 실천하고 확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구체적으로 오늘 여기에 실현되어가는 하나님의 뜻, 그러한 삶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비롯한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자기들의 꿈을 이루어간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믿음의 조상들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도 그러한 위대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 차례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이방땅에 생명의 복음을 증거한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아 복음 전파를 위해 세 번씩이나 소아시아 지방으로, 유럽으로 전도 여행을 다닙니다. 그때의 전도여행이란 것이 어떠했겠는지는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날과 같은 여행이 아닌 온갖 위험과 불확실함이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그런 고행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난 주간에 제가 휴가를 보내면서 한 사흘 여정으로 안가본 우리 땅을 밟고 왔습니다. 구미를 출발해서 경남 진주로, 통영으로, 거제로, 그리도 다시 진주로 나와 전남 순천, 보성, 벌교, 광주 그리고 전북 전주를 거쳐 구미로 돌아왔습니다. 경북, 경남, 전남, 전북, 충남... 이렇게 5개도를 돌아오니 자동차 주행 메타기가 1000Km를 가리켰습니다. 4Km를 10리로 치는 우리 식으로 환산을 해보면 2500리 길을 다녀온 셈입니다.
만약 그 정도의 길을 2천년 전 바울이 여행했다면 얼마나 걸렸을까요? 그의 세 차례 전도여행은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후11:23절 이하의 그의 간증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이렇게 자신이 여행 중에 당한 일들을 열거합니다.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도 하였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태장으로 세 번, 돌로 한번 맞았고... 또 세 번 배가 파선해서 밤낮을 암흑 속에서 지낸 적도 있었고 여러 번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고... 거기다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었었노라...' 그러나 그런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이 이방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비로소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뻗어가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러한 이방을 향한 기독교 복음을 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준비를 합니다. 자기의 이방 사역을 예루살렘 모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인준받아야 그의 선교적 열매가 공식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도 만나고 또 여러 교회에서 연보한 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필요도 있고 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복음을 위해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며 헌신한 바울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를 미워하고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유대인들의 적대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왠지 바울의 신상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 새벽말씀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유대인들의 손에 고초를 당하셨듯이 그렇게 바울 또한 고난받게 되리라는 것을 감지헸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본문 4절에 보니 "바울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제자들이 바울을 향해 '예루살렘행을 금지하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 과연 이런 처지에서 바울은 어떻게 처신할까요?... 가야할까요, 가지 말아야할까요? 가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가지 않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당사자 바울로서는 갈등하고 번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20:22절에 보면 그는 이미 단단한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나왔었습니다. '보시오, 나는 이제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오. 그러나 성령께서 내게 알려주시기를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오. 하지만 나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오...' 그런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면서 3년 동안 정들었던 에베소를 떠나왔습니다. 그런데 두로에 도착하자 이번엔 이곳의 제자들이 바울의 여정을 가로 막고 나서는 겁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두로에서 이레를 그렇게 시달리며 머문 후에 겨우 저들을 떨치고 가이사랴로 갔더니 이번에는 아가보라는 한 예언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저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 하고 또 그 말을 들은 여러 사람들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강권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바울은 여기서 하나의 딜렘마를 경험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내 발걸음이 과연 주의 뜻인가, 아니면 나의 고집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예루살렘행을 막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그가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은 뭡니까? 자기 고집을 세워 가는 겁니까?
행20:22절에 보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노라... 그곳에 가면 내게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주셨다...' 그리고 21: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그곳에서 결박만이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노라...' 가면 환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고 성령께서 자기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온통 가지 말라고 난리입니다. 이 상충된 현실 속에서 과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는가 말입니다.
헷갈리지 않습니까? 같은 성령께서 바울에게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뜻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일까요 안가는 것일까요? 성령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바울을 지지하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는 제자들을 지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이게 참 묘한 국면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결정하시겠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쫓을 때 다윗이 역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씩이나 맞게 됩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얼마나 절묘한지 모릅니다. 정말 얼핏 생각하면 '야, 이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절호의 기회야'라고 쾌재를 부를만 합니다. 그런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윗은 한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만납니다.
하나님이 사울의 군사들을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은 '이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수 갚을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자기가 애를 쓰거나 손에 피를 묻힐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냥 말 한마디면, 아니 그냥 모른 채 가만히 있기만 해도 팔자가 뒤집힐 순간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정말 기막힌 찬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려도 좋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에게 너무도 좋은 그 기회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리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다윗을 남달리 아끼시고 사랑하신 까닭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유리한 순간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해버리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같은 것과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하고는 욥바 항구로 도망칩니다. 그런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요나는 얼른 그 배에 올라 다시스로 내뺍니다. 그럼 그게 하나님의 뜻일까요?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합니다. 상황이 절묘하다고 하는 것과 자기가 따라야할 하나님의 뜻과는 전적으로 다른 겁니다.
우리가 한해의 2/3를 살아오면서 이런 어리석음을 저질렀던 적은 없었는지 한번 되돌아보십시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요. 결코 지혜롭고 바람직한 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윗같은 성숙한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런 영성을 갖지 않고서는 이 세상을 올바로 분별하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복잡 다단하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구별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성령이 막으시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단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받을 것을 알려주고 계실 뿐입니다. 바울에게도 그것을 알려주셨고, 또 바울을 아끼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것은 그 길을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고난을 예고하는 것은 그러니 그 길을 가지 말라고 막는 것과는 다른 겁니다.
그럼 왜 성령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걸까요? 성령의 그러한 역사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의 각오와 헌신을 더욱 다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가는 길은 전보다 더한 그의 헌신과 각오 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동료들의 기도와 후원없이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아는 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도 모든 걸 다 가르쳐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냥 모르는 건 모르는 겁니다. 20:22절에 보면 바울은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21:11절에도 보면 성령께서 그냥 막연하게 '체포당하여 고난 당할 것'만을 암시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다 낱낱이 샅샅이 알아서 이루어드리는 게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 밖에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겁니까?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꿈을 당신의 종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그들의 기도와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가십니다. 그러기에 성령께서는 저들에게 미래에 대한 암시를 통해 저들의 입을 통해 신앙고백이 쏟아지게 만드시는 겁니다.
이 현실 속에서 바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신앙고백을 더듬어 보십시다. 20:22절 이하에서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해도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또 21:13절 이하에서는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면서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고 제자들을 독려합니다. 그러자 저들 모두는 다같이 한 목소리로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기도하고 이 일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해의 2/3를 보내고 1/3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날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앞으로 남은 날의 삶의 목표는 또 무엇입니까? 내 꿈, 내 소원, 내 뜻을 이루려 살았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살아가십시다. 내가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고자 살면 하나님은 우리의 꿈을 이루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꿈은 내가 꿀 수도 이룰 수도 없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시고 이루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참 지혜이겠습니까? 내가 내 뜻을 이루어가는 게 지혜로운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이 내 뜻을 이루어주시도록 하는 게 지혜로운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후자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거느리고 있는 병사 중에 알렉산더 대왕과 꼭 같은 이름을 가진 졸병이 있었습니다. 동명이인이지요. 그런데 이 졸병이 아주 문제가 많은 사고뭉치 고문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졸병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 왕의 이름에 수없는 누가 끼쳐지고 욕이 돌아가곤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졸병이 실수할 때마다 상관들은 기합을 주면서 '알렉산더, 이놈!'하고 매질을 하곤 하니 그 이름으로 인해 왕에게 늘 불명예가 돌아가곤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들은 황제가 어느 날 조용히 막사를 찾아옵니다. 마침 그날도 아니나 다를까 졸병 알렉산더는 술에 만취되어서는 물건을 때려부수고 행패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대왕은 조용한 곳으로 그를 불러내어서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제서야 정신이 든 병사 알렉산더는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대왕 알렉산더가 사고뭉치 병사 알렉산더에게 묻습니다. '자네 이름이 분명 알렉산더인가?' '예, 그렇습니다.' '언제부터?' '저의 아버지가 제 어렸을 때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제가 알렉산더가 분명합니다.' '그렇군. 그런데 자네의 그 이름 때문에 내게 누가 돌아오고 내 이름이 욕되게 될 때가 많은가 보더구먼...' 그리고 끝으로 정색을 하고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알렉산더! 이제 내가 네게 명령한다. 네 이름을 바꿔라! 만일 그렇지 않으려거든 네 행실을 바꿔라! 알겠느냐!...'
이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갖고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행실을 바꾸든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믿는 사람의 소행 하나하나에 따라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기도 하고 영광이 돌아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남아있는 이 석달 동안만이라도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인생들이 되십시다. 그게 바로 내 뜻, 내 꿈을 이루는 지름길입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에게 2002년도 남은 날들, 아니 남은 여생의 아름다운 표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외침은 '꿈은 이루어진다'에 앞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꿈도 아름답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행 21:1-14 / 김진홍 목사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하나 해드리면서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6월 런던 광장에서 육군 중령 브라운은 시계탑을 보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브라운은 우연한 기회에 젊은 여성작가 주디스의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전쟁 속에서 그녀의 글은 한 줄기 빛처럼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용기를 내어 작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2주 후에 왔고, 두 사람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튼 브라운은 주디스에게 사진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사진 대신 질책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제 얼굴이 보고 싶으신가요? 당신이 말해왔듯이 당신이 정말로 저를 사랑한다면 제 얼굴이 아름답던 그렇지 못하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나요?” 자신의 요청에 이런 반응을 보인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이상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나서 귀국하는 브라운은 주디스와 만날 약속을 했습니다. “런던 전철역 1번 출구에서 제 책을 들고 서 계세요. 저는 가슴에 빨간 장미꽃을 꽂고 나갈 거예요. 하지만 제가 먼저 당신을 아는 척 하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이 먼저 저를 알아보고 만약 제가 당신의 연인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모른 척하셔도 됩니다.” 브라운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디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금발의 전형적인 앵글로 색슨계의 미인(美人)이 나타났습니다. 브라운은 녹색 옷을 입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지나갔습니다. 순간 브라운은 그녀의 가슴에 장미꽃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6시. 멀리서 가슴에 장미꽃을 단 여인이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브라운의 머리속은 백지장처럼 하얘졌습니다. 다가오는 여인은 못생기다 못해 흉측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녀는 한쪽 팔만으로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얼굴 반쪽은 심한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짧은 순간 브라운은 심한 갈등을 느꼈습니다. ‘그녀가 자신을 모른 척 해도 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군. 정말 그녀를 모른 척 해야 하나?’ ‘아니야. 원망해야 할 상대는 독일군이야. 이 여인 역시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고… 3년 동안 난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녀를 사랑했어. 이건 변할 수 없어. 이제 와서 그녀를 모른 척 하는 것은 비겁하고 함께 했던 시간을 배신하는 거야.’ 브라운은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잠깐만요!” 그녀가 돌아보자 브라운은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녀의 책을 들어 올렸습니다. “제가 브라운입니다. 당신은 주디스이지요?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브라운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니에요… 전 주디스가 아니고 페니예요…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조금 전에 녹색 옷을 입은 여자분에게 부탁을 받았어요. 장미꽃을 달고 이 앞을 지나가 달라는… 그리고 저에게 말을 거는 분을 식당으로 모셔오라고 하더군요.” 식당에 들어서자 녹색 옷을 입었던 주디스가 환한 웃음으로 브라운을 반겨주었습니다. 브라운과 주디스의 가교 역활을 하였던 페니가 “감동적인 사랑의 실화”라는 제목으로 영국 '타임즈 지'에 이 이야기를 게재했고, 곧 영국 전역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저가 설교를 시작하면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하나님도 때로는 우리에게 이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진심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축복의 하나님은 때론 시련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때론 아픔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가 있습니다.
주고 싶어 어쩔 줄 모르시는 하나님은 때론 우리에게 달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심을 보고 싶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시험(t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언제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께 여러분의 신실한 믿음을 보여드리십시오.
사도행전 21장부터는 새로운 주제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제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21장부터 새롭게 전개되는 주제는 사도 바울이 겪을 핍박과 환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부터 사도 바울은 죄수의 몸이 됩니다.
이제 본문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오직 복음만이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의 발걸음이 닿은 곳마다의 지명들이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었습니다.
행 21:1-3절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본문에 나오는 ‘고스 섬’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치료의 신 에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의 신전과 그것에 부속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흔히 의학의 원조라고 일컫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곳에서 약 70마일 정도 떨어진 ‘로도'에는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알려진 높이 150피트의 거대한 태양신 콜로수스(Colossus)라고 불려지는 아폴로 석상이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 일행이 이곳을 지날 때는 이 거대한 석상이 지진으로 파괴된 지 오랜 후였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주전 224년에 파괴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찬란한 희랍 문화가 여전히 숨 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바울 일행이 바다라로 가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섬을 바라보며 시리아로 항해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바울 일행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그 지명을 기록한 내용을 읽으면서 의아한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왜 바울은 그 당시 희랍 문화가 숨쉬고, 로마 문화가 움트는 지역을 방문했으면서도, 그가 경험한 그 곳의 문화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느냐는 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지 순례 등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그곳의 사람들, 건축물, 음식 대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본문에서 그런 묘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말로도 한마디 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혹자는 바울이 문화 예술적인 안목이 없기 때문이라고 혹평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바울만한 문화에 대한 식견을 가진 사람도 쉽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것은 바울의 관심이 오직 복음 전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그가 입을 열어 말하고자 하는 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이별할 때 한 ‘고별설교’를 통해서 그의 결심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 말씀을 영어 번역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 아니면 나의 생명은 가치가 없습니다.(my life is worth nothing unless I use it for the work assigned me........)”
여러분은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을 할 때에 여러분의 생명이 가치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라고 했습니다.
복음전하는 일!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논할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만이 직장도 의미가 있고, 직업도 의미가 있고, 재산도 의미가 있고, 성공도 의미가 있고, 결혼도 의미가 있고, 학문도 의미가 있고, 잘 난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 점을 확실히 하십시오.
모든 것은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은 영원합니다.
죤 웨슬리 목사님은 그의 후예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이 일로 시간을 보내고, 이 일에 당신이 쓰임 받도록 하시오. 보시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설교를 했느냐, 또 얼마나 많은 일에 관심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했느냐 못 구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데려와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시오.”
2.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면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에 걸쳐 듣게 됩니다.
밀레도에서 예언을 들었을 때입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두로에서 성도들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행 21:4)”
가이사랴에서는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실제로 행동을 해보이면서 예루살렘에서 될 일을 예언합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 21:11-13)”
이에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13절을 다 같이 읽읍시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는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만일 내가 바울과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누군가가 거기에 가면 손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해준다면 나는 복음을 위하여 그곳에 갈 수 있을까?’
갑자기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모르고 갈 수는 있었습니다.
저가 25년 전 이집트에 온 가족을 이끌고 선교사로 갈 때에는 그 땅이 그렇게 어려운 이슬람지역인지 모르고 갔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슬람 근본주의가 무엇인지?’ ‘무슬림 형제단이 무엇인지?’ ‘압둘 라흐만이 누군지?’ 모르고 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가야한다면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믿음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생각에 속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진심을 보려고 때론 손해를, 때론 고난을, 때론 목숨까지 요구하신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진심을 보여 달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주님, 번지수가 틀리네요. 저는 저의 소원과 뜻을 이루는데 도움을 얻기 위하여 왔을 뿐입니다. 주님의 뜻은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실 겁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의 믿음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믿음을 갖게 되길 열망합니다.
3.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행 21:14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림살이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계획이 있습니다.
목회 계획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길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꼭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생은 실수도 불운도 우연도 아닙니다.
혹 부모님은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시139:13-1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 보다 많도소이다.”
그렇습니다.
부도덕한 부모는 있을지라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계획과 상관없이 태어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목적 없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도 우연히 하지 않으시고, 절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부단히 알려고 해야 합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상충될 때는 내 뜻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일평생 살아가면서 배우는 것은 바로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란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나를 죽이는 고통입니다.
■ 찬송가 425장을 작사한 폴라드(Adelaside A. Pollard)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폴라드 양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는 것이 꿈에도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뇨와 신경 계통의 병을 안고 병상에 뒹굴어야만 했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기도모임에서 옆에서 기도하는 한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님이시여, 저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사오니 주님의 뜻과 섭리만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듣는 순간 그의 마음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고집이 부서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집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계획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선교사로 나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것이지만, 거기에 자기의 뜻이 온통 지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소 마음에 평안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이때의 경험을 찬송시로 적은 것이 바로 425장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고요한 중에 기다리니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으리니 나의 맘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병들어 몸이 피곤 할 때 권능의 손을 내게 펴사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온전히 나를 주장하사 주님과 함께 동거함을 만민이 알게 하옵소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성도가 마지막 해야 할 말은 바로 이것이어야 합니다.
건강하든 병이 들든, 일이 잘 되든 잘 안 되든, 순풍을 만나든 풍랑을 만나든, 이 땅에 더 살도록 생명을 연장하시든 우리를 그의 품으로 불러 가시든 우리가 해야 할 신앙고백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에게 최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절대로 손해 보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결코 섭섭하게 대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사랑하는 백성을 차선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9)”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오직 복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알고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모든 논의를 종결지었습니다.
본문이 주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양향모목사 / 행 21:1-6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중요한 일이 우리 눈에 잘 보이도록 가장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하시고 충만하게 하시고 특별하게 역사를 진행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실 구원을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진행하게 하시고 그 일이 완성될 때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는 일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사도행전은 그 일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수천 년 동안 이 일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시고 그들을 가나안 땅에 살게 하시고 다윗 왕을 시작으로 왕정을 이루고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그 다윗왕의 왕위를 이어서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오시게 하셨는데 그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님께서 구약시대의 역사를 진행하시는 일에도 관여를 하셨고 예수님께서 잉태 되시는 일이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하시는 모든 일에 관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세상에 전파되는 모든 일에도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셨습니다.
때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보편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충만하게 때로는 보통으로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게 하는 일까지 이 모든 일들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이별을 한 후에 배를 타고 여러 도시들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살펴보고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본문 1-3절에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도시들은 대부분 지중해의 섬이나 연안의 도시들입니다. 고스, 로도, 바다랴, 베니게, 구브로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남쪽 도시인 밀레도 항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지나온 섬들입니다.
구브로는 지금의 키프러스(Cyprus)라는 지중해의 큰 섬인데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선교사로 안수를 받고 처음 배를 타고 건너와서 선교한 최초의 선교지입니다. 구브로에는 항구에 배가 입항한 것은 아니고 구브로를 왼쪽에 두고 보면서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수리아와 바울 일행이 내린 두로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입니다. 두로 항구에서 내릴 때는 예루살렘까지 24km 정도만 가면 되기 때문에 아마도 육지로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비교적 세심하게 사도 바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의 기록만 보아도 기록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일행들이 그냥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만 기록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어디 어디로 진행을 했는지를 자세히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런 일들까지 기록을 했을까요? 사도 바울 일행이 밀레도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했다고만 기록을 해도 될 일을 일일이 기록을 했을까요?
물론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 사실대로 기록을 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 미루어 보아서 사도행전이나 모든 성경의 기록들이 어떤 개인이 쓴 소설이나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난 일들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섬과 도시들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도시들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모든 지명과 인명들은 실제로 있었던 도시들이고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들입니다. 가끔은 성경에 기록된 지명들이 현존하지 않아서 의아해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지명들도 고고학 발굴을 통해서 존재했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로 미루어 보아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때도 실제로 있었던 장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을 기록함으로 성경이 사실의 기록이며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교훈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이 특별한 경우에는 기적적인 방법을 동원하시지만 보통은 보편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행동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평범한 삶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으로 가게 하시면서 축지법을 쓰거나 구름을 타고 가게 하시거나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가는 방법으로 가는 통로를 통하여 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보편적인 일에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가야하는 목적지에 갈수가 없게 되거나 가다가 큰 사고를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이런 것을 말씀 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는 삶이 복이 있는 삶이라는 것을 말씀 드렸는데 그 동행하심이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보편적인 삶 속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살아나거나 왕창 망했다가 회복이 되거나 흉악한 죄의 길에서 기적적으로 새 사람이 되거나 이런 특별한 일에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거나 우리가 특별히 느낄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보편적인 삶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시면서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지 않도록 역사하시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곤란한 일을 당했을 때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더 보람된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기적적인 방법이나 보편적인 삶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에서는 최선의 삶을 살게 해 주시고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나라 천국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고 계심을 인식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시도록 맡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내 욕심 내생각대로 하지 마시고 성령님을 뜻을 따르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4절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두로에 상륙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은 그곳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이 두로라는 도시에 어떻게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는지 성경에 기록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마도 스데반이 순교하고 기독교가 박해를 당할 때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닌가라고 역사가들이 추측을 합니다. 혹은 사도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제자’라는 말은 예수님의 열두제자나 특별한 일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제자도 특별한 훈련을 받거나 특별한 사명을 받아서 일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 삶을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를 제자라고 합니다.
바울 일행이 두로에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일주일동안을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일주일동안을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복음을 다시 한 번 가르쳤을 것입니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사도 바울과 함께 있었던 그 일주일동안이 꿈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한두 번 듣고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귀한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확신이 없었던 사람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기는 했지만 복음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확신이 없었던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었고 그들이 가진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설교를 듣고 그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자세히 배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잘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맨날 들어도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잘 느끼지 못하실 것입니다. 설교를 들으시면서 내가 참 귀한 것을 가지게 되었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정말로 큰 은혜를 베푸셨구나 하는 것을 가슴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설교에서 특별히 성령님의 역사에 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4절 말씀에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라고 했기 때문에 성령님의 역사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일주일 동안 사도 바울의 설교를 잘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두로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자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그냥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잘 살펴본 대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가는 것이었고 성령님의 특별하신 인도하심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이 만류를 한다고 생각하면 사도바울에게 임하신 성령님과 두로의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다른 분이신가 하는 오해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감동하셨을 때도 사도 바울에게 감동하신 성령님과 동일하신 분이시고 동일한 뜻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할 때는 자신이 고생을 하는 길이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길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가려고 결심을 한 것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이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받았을 때는 역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고 역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죽음의 길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로의 제자들은 사도 바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만류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만류애도 불구하고 주저앉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도 바울을 죽음의 길로 보내야 하는 인간적인 안타까움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성경에는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여러 가지 단어들이 나옵니다.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란 성령님께서 임재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때 받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님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하심으로 인해서 성도들이 감동을 받거나 강건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전적으로 그 역사하심을 따라 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은사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성도들에게 특별히 부여되는 예언이나, 방언이나, 신유 등의 은사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부여되는 가르침이나, 구제나, 다스림이나, 사랑 등의 은사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란 성령 충만한 삶을 삶으로서 우리의 삶에 나타나는 성품들을 말합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을 말합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수록 우리의 성품 이렇게 변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성령님의 역사에 있어서도 같은 한분 성령님이 역사하시지만 사람에 따라 사안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지만 성령의 충만도 각 사람에 따라 다르고 받은 은사들도 다릅니다. 그리고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들도 다양합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충만한 삶을 사시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들을 잘 활용하여 교회를 위해서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삶에서 성품에서 아름다운 열매들을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본문 5-6절 말씀에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다 만날 때는 기쁘지만 헤어질 때는 섭섭합니다.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란 늘 슬프기 마련입니다. 사도 바울과의 만나는 사람들이 늘 그랬습니다. 만날 때는 너무 반갑고 기뻤지만 헤어질 때는 늘 슬픈 마음이었습니다.
지난번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헤어질 때도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이별을 슬퍼했습니다. 오늘 두로의 제자들과의 만남도 비록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의 만남이었지만 헤어지는 것은 매우 큰 슬픔이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다 처자식들을 데리고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서 환송을 하고 바닷가의 항구까지 나와서 이별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고 서로 작별을 했습니다.
오늘 설교가 성령님의 역사를 주제로 한 설교였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주제로 볼 때 성령 충만한 사람의 특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낼 뿐만 아니라 수시로 무시로 기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도할 때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힘과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교회를 위해서 충성할 수 있고, 기도할 때 선한 열매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주제로 말씀 드렸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고 했습니다. 각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역사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늘 수시로 기도하면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에 강하게 역사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많이 맺히시기 바랍니다.
밀레도스에서 가이사리아까지
정용섭목사 / 행 21:1-14
성령의 지시와 역사 해석
밀레도스에서 행한 바울의 고별설교는 핵심적으로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바울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1세기 후반 초기 공동체에서 불거졌던 사이비 이단 문제의 책임이 바울에게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곧 누가의 바울 해석이다. 누가는 바울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온몸을 던진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정통이라고 보았다. 누가의 이런 해석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간혹 ‘예수 세미나’ 계통의 학자들은 바울에 의해서 역사적 예수가 훼손되고 대신 헬라화한 예수가 등장했다고 비판하지만 이런 주장은 자칫 역사 실증주의에 빠질 염려가 있다. 사도들의 예수 증언인 성서 텍스트는 이미 그들의 예수 해석이며, 그런 해석을 통해서 2천 년 전의 역사적 예수를 그대로 복원해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설령 상당한 부분에서 그런 작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나온 결과들은 일종의 역사학으로서의 가치만 있을 뿐이지 궁극적인 진리와 연결된 종교로서의 가치는 없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예수가 혁명가이기 때문에, 또는 평화주의자이기 때문에 믿고 따르는 게 아니라 궁극적인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이다.
바울이 밀레도스에서 행한 고별설교의 기조는 그 이후로 몇 번 반복된다. 그들은 밀레도스에서 코스로, 코스에서 도로스를 거쳐 바다라로 항해했다. 소아시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항구 도시 바다라에서 이들은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인 페니키아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2절). 거기서 이스라엘의 북서쪽 항구도시인 띠로까지의 항해는 이틀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예루살렘이 최종 목표였지만 이 배는 띠로에서 짐을 풀어야 했기 때문에 바울 일행도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띠로 공동체의 신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바울을 말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인데, 바울은 밀레도스에서 ‘성령의 지시’를 받아 예루살렘에 올라간다고 설교한 적이(20:22) 있다. 한쪽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게 성령의 지시라고 생각하고, 다른 한쪽은 올라가지 않는 게 성령의 지시라고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접근하는 게 좋겠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지시라는 바울의 설명은 예루살렘 방문을 중심으로, 그리고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말린 띠로 신자들의 생각은 바울이 당하게 될 시련을 중심으로 성령의 지시를 이해한 것이다. 어디에 무게를 놓는가에 따라서 하나의 사건이 서로 상반된 결론으로 도출된 셈이다.
둘째, 우리는 성령의 지시를 직접적인 게 아니라 간접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성서를 읽어야 한다. 아무리 영에 밝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성령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는 없다. 해외 선교사로 떠나는 게 바로 성령의 뜻이라고 설교하거나 그렇게 간증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해석했다는 것이지 성령의 뜻을 직접적으로 확인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뜻을 분간할 수 있을까? 일단 성서 텍스트의 지평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의 해석인 기독교 역사를 바로 알고,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차원들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심화함으로써 성령의 뜻에 조금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성령의 뜻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 판단은 역사적으로 가능하다. 바울의 신학이 정당했다는 사실이 바울 시대는 인정받지 못하다가 훗날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것처럼 말이다.
전도자 필립보
바울 일행은 띠로 신자들의 간곡한 만류를 뒤로 하고 다시 배를 타고 다시 항해하여 프톨레마이스로 내려와 일박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결국 예루살렘의 관문인 가이사리아 항구에 입항했다. 이 가이사리아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에는 몇 사람들이 연루되어 있다.
가이사리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필립보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필립보는 원시 예루살렘 공동체의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이었다.(6:5). 사도행전 기자는 이 일곱 명의 지도자를 집사라고 이름 붙였지만 실제로는 사도 못지않은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히브리파 기독교인들을 대표하는 열 두 사도만으로 헬라파 기독교인들의 요구까지 해결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히브리파와 헬라파 사이에 적지 않은 신앙적 긴장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일곱 명의 사도적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독교 분파가 형성된 것이다. 그중의 한 사람이 필립보였는데, 그가 스데파노 다음으로 거명되었다는 것은 그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필립보의 활동은 8장에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케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다. 8장에 서술된 필립보의 선교활동에는 그 어떤 사도들 못지않은 영적인 능력이 넘쳤다. “군중들은 필립보의 말을 듣고 또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보고는 모두 하나같이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행 8:6). 누가는 필립보의 선교활동을 자세하게 언급한 다음에 그가 마침내 가이사리아에 이르렀다는 말로 그 이야기를 접었다.(행 8:40). 필립보는 아마 이곳 가이사리아에 공동체를 설립했을 것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다음, 이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필립보가 다시 등장했다.
필립보의 딸들
누가는 필립보를 거명할 뿐이지 그가 바울 일행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대신 누가는 필립보에게 결혼하지 않은 네 명의 딸들이 있었다는 사실만 지적한다. 그런데 그 딸들은 예언자였다고 한다. 예언자라고 한다면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과 연관해서 무언가 역할을 했을 법한데도 누가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고, 몇 가지의 추정만 가능하다. 우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교회의 전승을 그대로 옮겨 적었는지 모른다. 누가가 썩 괜찮은 역사가이며 문필가였다고 하더라도 사도행전의 분량으로 본다면 글의 완성도가 부분적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또는 이 딸들이 바울에 관해서 예언했지만 그 당시에 처녀들의 예언이 별로 덕스럽지 않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내용을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후에 등장하는 하가보의 예언이 바로 이 딸들의 예언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언은 둘째 치고, 우리가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이 딸들을 중심으로 바울의 이 사건을 조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네 명의 딸들이 귀한 손님들을 맞이하고 시중드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더구나 그들은 영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처녀들이었다. 그들은 바울이 며칠 머무는 동안에 바울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수도 있고, 또는 앞으로 가이사리아 공동체에서 할 일에 대한 부탁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예언자였다는 누가의 보도를 감안한다면 바울의 운명과 교회의 미래에 대해서 영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하가보
누가는 필립보와 그 딸들에 관해서 한 마디로 정리한 다음에 갑자기 등장한 하가보에 관한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전달한다. 이 사람은 유다에서 내려온 예언자였다고 한다. 하가보는 바울 일행 앞에서 무당들의 살풀이 같은 일종의 퍼포먼스를 펼쳤다.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의 손발을 묶고 이렇게 말했다. “성령께서 ‘이 허리띠의 주인을 유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묶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1절). 하가보의 이런 예술적 행위가 사실적인가 아닌가 하는 건 여기서 질문할 필요가 없다. 누가는 지금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점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키려는 것뿐이다.
누가에 따르면 하가보는 자기가 보인 상징적 행위를 곧 성령의 말씀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지금 누가는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이 성령의 뜻이라는 점을 수차에 걸쳐서 강조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서 성령의 뜻이 조금씩 발전해나간다. 밀레도스의 고별설교에서는 단순히 예루살렘 방문이, 띠로의 신자들에게서는 예루살렘 방문을 말리는 것이, 지금 하가보에게서는 구체적으로 바울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사실이 성령의 뜻과 연결되어 있다.
하가보가 바울에게 닥쳐오게 될 위험을 적나라하게 알린 탓인지 가이사리아 신자들만이 아니라 바울 일행도 덩달아 울면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말리는 일이 벌어진다. 지금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으로 묘사되는 이 여행일지에 동참한 사람들은 구호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아카이아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부터 바울과 함께 여행한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들까지 나서서 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을 만류했다는 장면은 바로 사도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만류했던 장면과 오버랩 되어있다.
바울의 고난
누가는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에 품었을만한 바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겁니까? 주 예수를 위해서 나는 예루살렘에 가서 묶일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도 되어 있습니다.”(13절). 이미 24절에서도 바울은 자기 목숨을 조금도 아끼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바울을 변호하고 있는 누가의 절절한 심정이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오늘 우리는 약간 객관적인 태도로 이 문제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예루살렘 방문이 생명을 담보해야 할 만큼의 실제적인 위협이었을까?
물론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일부 황제들에 의해서 순교의 피를 흘린 건 분명하지만 그런 게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보다는 정치적으로 민감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도 로마정권에 대해서는 호의적이다. “유다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는(고후 11:24) 진술을 보면 바울의 고난은 주로 유대인들에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루살렘 교회로부터도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 누가는 지금 바울의 인생 전체를 예루살렘 입성이라는 상징적인 사건과 연결해서 극대화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
조에스라목사 / 행 21:1~22:29
오늘 사도행전 말씀은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후 예루살렘 입성까지 2주일간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10여 년을 한두 줄로 기록한 내용이 있는가 하면, 오늘 말씀은 너무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말씀을 자세히 기록한 것처럼 너무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표면적인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고자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이방지역 교회 개척역사 보고입니다. 둘째는 이방지역 개척교회에서 예루살렘 본부교회를 위해 드린 헌금을 전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예루살렘 방문의 두 가지 목적은 사도바울에게는 10% 정도의 명분일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동족인 유대인 전도와 로마에 대한 비전의 실현에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동족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당시 패권 국가인 로마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은혜의 복음이 바울과 오늘날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바울은 자기 생명조차 바치겠다고 결단하였습니다. 이 시간 바울과 같이 생명을 바칠만한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비전을 영접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I.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에 가고자 하였습니다. 에베소에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후 모금된 헌금을 예루살렘에 드리고 성령의 역사를 보고하고자 작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 갔다가 후에 오늘날 G1인 로마도 보아야 한다는 믿음과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은 1차 전도 여행과 다르게 육로로 시작하여 바다를 통해 배로 복귀하는 형태입니다. 사도행전 20장 16절에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이를 보면 구약의 절기를 신실하게 지키는 사도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도를 보겠습니다. 바닷길은 고스, 로도, 바다라, 두로,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특별히 로마 개척의 비전을 덧입었던 에베소교회와 자신의 모 교회인 안디옥도 들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 도착 여정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0:25b) 이 말을 하고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고 울며 바울과 작별하였습니다. 정든 안디옥 교회와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키프러스)를 왼편에 두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항해하였습니다. 두로에서 7일간 머물렀습니다. 이때도 사도바울은 제자들을 불러서 교제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님!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사도님의 신상에 좋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말에도 개의치 않고 그들과 바닷가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 배는 다시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도착하여 하루를 묵고 다시 종착점인 가이사랴 항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에는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이 정착하여 20년 동안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여러 날 머물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로부터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내려왔습니다. 아가보는(행11:28)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의 흉년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였습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은 반복되는 바울의 잡힘과 고난받는다는 예언의 말로 인하여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요절 말씀인 1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과 교제할 때도 자신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종합하면 바울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변고가 생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왜 극구 말리는 일행과 예언자들의 고난을 예언하는데도 예루살렘에 가고자 할까요?
성령에 민감한 바울이 오히려 성령을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체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행적 전체를 요약해 돌아보겠습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습니다. 특히 다메섹에서 아나니아에게 주신 말씀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15절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리고 사도바울은 주로 회당 전도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보다 이스라엘 자손에 관심이 많았음을 봅니다. 이 마음이 로마서 9장 3절에 잘 나타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바울은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소원과 다르게 유대인 회당의 복음 전파는 분쟁과 배척이 심했습니다. 그럴지라도 바울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많이 사는 아시아 전도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는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를 썼습니다. 2차 전도 여행 중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행16:6~7) 사도바울은 동쪽으로, 하나님의 성령은 서쪽으로 가길 원하셨습니다. 드로아에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임했습니다. 서쪽 지역의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환상입니다. 바울은 순종하여 유럽의 첫성 빌립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은 유대인의 회당도 없는 낯선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자주 옷감 장사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또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밤중 감옥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갑자기 옥터가 움직이고 족쇄와 수갑이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빌립보 감옥의 간수 가정이 구원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 고린도에 이르러 로마에서 쫓겨나온 유대인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납니다. 이들을 통해 로마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웠을지 모릅니다. 사도바울은 일찍이 서원한 것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여기서 서원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로마 개척의 비전을 보고 하나님께 나실인의 서원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에베소에서 현재 시가 50억 정도의 마술책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9:21절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이 사건이 복음으로 로마정복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덧입게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일련의 과정을 요약하여 돌아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비전과 소망이 예루살렘 입성 후 받을 고난이나 목숨의 위협도 막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주신 마지막 유언의 말씀 중 선교 역사의 종점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언급한 땅끝입니다. 바울은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당시의 땅끝인 오늘날 스페인(서바나)까지 전파될 것을 믿었습니다. 사도바울의 불타는 동족 구원과 복음의 로마정복의 비전이 1,2차 전도여행 시 형성되었고 3차 전도여행은 이 소망을 확증시켜주었습니다. 이렇게 선교 정점이 안디옥교회가 아니라 동족이 거하는 예루살렘이요 더 나아가 복음의 로마정복이었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의 복귀는 자신에게 비전을 주었던 에베소 교회도 그리고 안디옥 모 교회도 들르지 않았습니다. 오직 불타는 선교 열정으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중간 기착지마다 만나는 성도들이 그것도 성령으로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큰 고난을 받고 잡혀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성령에 민감한 사도바울이 성령 충만한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예루살렘 입성이 이해됩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선지자 예언의 말이 로마 입성의 기회임을 직감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고난과 목숨보다 소망과 비전이 더 컸습니다. 고난은 사도바울의 불타는 비전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면 오늘 사도행전은 사도바울의 예루살렘 입성을 자세히 기록하는 원인일 겁니다. 음악이든 문학이든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과정을 거치듯 예루살렘 입성과 십자가는 예수님께나 바울에게 절정의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절정은 산 정상에 비유됩니다. 산 정상까지는 자기 의지로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숨차게 오르는 구간입니다. 정상을 지나고 산을 내려갈 때는 중력의 작용으로 자연스럽게 내려가집니다. 이런 과정은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과정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 병사들에게 잡힌 후부터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인도하셨습니다. 사회학자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티핑포인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인생도 절정 곧 티핑포인트(Tipping Point)가 있습니다. 번역한다면 국면 전환입니다. 예를 든다면, 아브라함의 티핑포인트는 이삭을 바친 부분입니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 후 얍복강 나루터를 건너는 순간입니다. 요셉은 바로왕의 부름을 받아 왕 앞에 섰던 순간이 티핑포인트입니다. 바울도 예루살렘 입성 후 로마 병사들에게 체포됨으로 선교의 국면이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사도바울이 의지적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구간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지루하고 장황하게 이 내용을 썼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사도행전 기자는 이를 자세히 기록한 이유는 예루살렘 입성이 로마로 가는 절정의 티핑포인트임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불타는 동족 구원을 위한 행동으로 인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 이후로는 사도바울의 의지는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국면 전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도 동일하게 죽을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럼 21장 13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렇습니다. 국면 전환에 도달하기까지는 사도바울처럼 죽을 것도 각오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각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은 이 티핑포인트에 이르기까지 힘을 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검증되면 그 믿음을 축사하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사명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은 용광로 같은 불시험을 하십니다. 영적으로 비전이 없는 자는 바울의 뜻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고난을 안타까워하며 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보고 여인들이 울었습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들은 십자가의 참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만이 그들이 죄로 심판 받지 않음을 몰랐습니다. 다만 연민으로 울고 있는 그들에게 닥칠 환란은 감당하기 어려울 것인데 예수님의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일행도 예루살렘의 고난의 길을 가려 하는 바울을 말리며 울었습니다. 이에 바울의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과 역사의 국면전환에 이르기까지 바울과 같이 죽을 것도 각오하는 믿음으로 축복받을 수 있길 기도합니다.
II.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형제들이 기꺼이 영접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야고보에게로 가니 장로들도 다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방교회 가운데 이루신 역사를 낱낱이 보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믿게 되어 이제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방 교회가 예루살렘 모 교회를 생각하여 보내준 사랑의 구제 헌금으로 인하여 더욱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안에 있는 믿는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라고 가르쳤다 오해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허위 선전에 불과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수를 가르쳤을 뿐이었습니다.(13:39) 당시 예루살렘총회 회장 야고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에 반드시 이 오해를 풀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그때 4명의 서원한 이방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바울이 이들과 함께 율법을 좇아 결례를 행하도록 하고 이 결례 의식에 들어가는 비용을 다 대어주도록 권면하였습니다. 결례 예식을 치를 때 머리도 깎고, 또 마지막 날에 속죄제나 화목제를 드릴 때 비용이 듭니다. 만일 바울이 이렇게만 해준다면 사람들은 바울이 율법과 전통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알고 오해를 풀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야고보 회장의 조언을 받아드렸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같이 행한 것입니다.(26)
그런데 결례의 마지막 때에 공교롭게도 이때 아시아로부터 온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핍박하던 자들로서 바울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이 에베소에서 데리고 온 드로비모 라는 사람과 시내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그들은 바울이 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와서 성전까지 더럽혔다는 것입니다(28). 이에 아시아에서 온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분노가 가득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바울을 비난하고 선동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달려들어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 죽이려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뭇매를 맞았습니다. 이때 마침 소요 소식을 듣고 천부장이 군대를 거느리고 달려와 유대인들을 제지하고 바울을 쇠사슬로 결박해 체포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선교 비전을 이룰 하나님의 개입이셨습니다. 그리고 천부장은 이 소요의 진상을 알고자 바울을 군 영내로 데려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이 순간에도 그 이름을 위해 이 무지몽매한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영내에 들어가는 층대에 이르자 말씀 전하기 딱 좋아 보였습니다. 층대에 올랐을 때 헬라 말로 천부장에게 요청해 변명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무리는 바울을 따라서 오며 ‘죽여라! 죽여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옛날 자기와 같이 무지한 이 유대인들에게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고자 하는 데는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층대 위에서 쇠사슬로 결박된 채 손짓하며 백성들을 조용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 방언, 즉 아람어로 자기의 간증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메시지는 어찌하든지 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자 하는 바울의 동족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가 유대교인이고, 가말리엘 문하생이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서 다메섹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해 와서 형벌을 받게 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내용을 유대인 무리에게 간증합니다. 자신이 무지한 열심 속에서 아주 큰 잘못을 하였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을 뜨고 보니 예수가 곧 나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때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 박해자 바울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메섹에 들어가 내가 보내는 아나니아의 말을 듣고 그에게 순종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후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는데 이때 주께서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은 네가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8) 바울의 반응은 ‘아니 제 말을 안 듣기는요.’ 바울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21). 바울은 마지막으로 힘을 다해 ‘유대인 여러분, 이제 나처럼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죽을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외쳤습니다.
이때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바울의 말에 유대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이때까지 말을 잘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즉시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이런 놈은 세상에서 없애야한다”며 자기들의 옷을 벗어던지고 티끌을 뿌리며 더 이상 바울의 말을 듣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천부장은 바울을 영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이렇게 바울에 대해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백부장에게 그를 채찍질 해 심문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바울은 자기가 로마시민인데 재판하여 죄로 정하지 않고 치려고 하느냐며 항의 했습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채찍질에서 벗어나 자기를 지켰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사도바울의 전도 열정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 빌립보1장 20,21절 바울의 순교 신앙이 잘 드러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나님은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는데도 동족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죽음 앞에서도 동족 사랑의 지극한 마음으로 “부형들아” 부르며 침착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후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땅끝에 복음을 전한 것과 같습니다. 사도바울의 동족 사랑은 알 수 있지만, 그 꿈은 다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현대의 신학자 중에는 복음 전파의 땅끝은 서바나가 아니라 유대인 곧 이스라엘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영적인 땅끝 예루살렘에서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 2년 동안 5번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제 바울의 소망을 하나님께서 받으셔서 로마 개척의 비전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뤄가십니다. 사도바울의 선교 비전의 새 국면은 동족에게 잡혀 이방에게 넘겨지는 순간입니다. 사도바울에게는 복음 전파의 티핑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하셨지만, 이때부터는 친히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복음은 로마를 거쳐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 사는 저희에게까지 전해 졌습니다. 믿음과 비전과 소망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면 이렇게 반드시 이루십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90년대를 기점으로 성서 한국의 하나님역사가 시들 해지지 않았나 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잠들어버리면 유럽의 교회처럼 될까 두려워졌습니다. 고난이 없이 물질적 풍요로움이 오히려 한국 교회를 잠들게 하지나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최근의 캠퍼스에서 젊은이들을 얻기가 어려워지니 더욱 그러했습니다. 성서 한국의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믿는 자들의 영향력이 없어지지나 않았나 근심이 되었습니다. 저희는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복음을 심고 믿음을 심었는데 믿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이르자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입니다. 신앙 초기 아버님께서 나의 이름을 호적에서 빼신다는 협박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믿음, 은혜로운 추석 가정 예배 중 눈물의 간증을 하고 있는데 작은어머니께서 예배 장소의 주변을 맴도시면서 예배 때려치우라고 소리 소리 지름심을 아랑곳 하지 않았던 담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포도주 틀에 밀 타작하는 기드온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그리 말라 아들아 하며 엘리 제사장처럼 자녀교육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저희들과 가정예배 드릴때에 1:3으로 불신의 말로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다고 자녀의 마음을 우리의 말로는 되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이제 빠른 날을 정하여 저희 부부가 금식을 선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의 기도를 하겠습니다. 가정이 살면 사회가 살고, 사회가 살면 국가와 민족이 살아남을 믿습니다. 다시금 조나단 에드워드 믿음의 명문 가정의 꿈과 소원을 바울처럼 붙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소개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당신을 자랑하셨습니다. 반면 저에게는 조에스라의 하나님으로 끝나버리면 어떨까 두려움을 갖습니다. 우리 민족과 자녀들에게 자자손손 믿음의 물줄기가 이어져 가도록 목숨을 거는 기도를 하고자 방향을 잡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인가 비전과 소원을 이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새국면, 곧 티핑포인트에 오르기까지 목숨을 건 기도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 소원을 받으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심을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선교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행을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하였습니다. 저도 가정과 캠퍼스와 대한민국과 세계선교를 위하여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목숨을 거는 기도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방인의 사도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잡혀 이해할 수 없는 로마 군대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바울의 사명을 걸어 주셨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장 8절 땅끝까지 하나님의 소원과 사도바울의 소원을 일치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배우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원을 받으시고 죄수의 몸으로라도 로마 선교의 꿈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하나님은 사도바울의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심령을 받으셨습니다. 교회사에서 바울을 능가한 주의 일꾼을 찾기 어렵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을 것도 각오한 사도 바울의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바울의 이런 소망과 믿음을 허락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럼 사도행전 21장 13절 말씀을 한목소리 읽고 제가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유민용목사 / 사도행전 21:1-14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려 할 자리에 서게 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네이게이션 안내에 비유하기도 하는데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가도 언제든 안내해 주실꺼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가면서 업데이트가 되어 있지 않은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은 마치 어제의 은혜로 살아가려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매일의 은혜가 없다면 낭떠러지로 인도하는 과거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목회현장은 우리 때 보다 더 어려울꺼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지나온 목회를 돌아보시며 해주시는 짧은 말씀 안에 이제는 설교자의 삶이 중요한 시대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복음의 전달자는 떨림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지요.
지난 수요일 새벽기도 설교를 준비하는데 애통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4장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증인이 어떤 사람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차별을 두신 이유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납득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십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후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게 너는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지만 아벨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는 삶이었습니다. 아벨의 삶이 참 덧없이 보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동생을 미워하여 죽이고 난 후에도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만 호소합니다. 공평하지 않는 세상을 하나님의 탓으로 여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의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단절되고 영적인 생명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의 기자가 초점을 두는 것이 아벨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더 나은 제사는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성경의 기자는 믿음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11: 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는 자신이 충분히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은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벨의 제사만 받는 하나님이 공평해 보이지 않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일들이 세상에 참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정말 공평하지 않으신 분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의 기준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가는 대로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이들을 통해서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기에 인도함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살아가고, 세상의 즐거움과 사회속에서 성공과 명예,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부터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과 그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부지런히 돌아갑니다. 그 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희생과 고난도 통과해야 할 문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어려움도 없고 평탄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의 영에 매여 인도함을 받았지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하는데 장애가 되어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했지만 주님은 너의 약함이 나의 자랑이라, 오히려 너의 실패가 나의 간증이니 너의 모습 그대로 사용하시겠다고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바울이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수천년 동안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믿고 살았는데 그들도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복음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당시 이방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이방인들 위한 서신서들을 전도여행 중에 썼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 여겼던 유대인들은 예수로 인해서 거듭나지 않으면 죄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복음이 유대인들의 감정을 거슬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서 체포되고, 감금되며, 다양한 재판을 받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보내질 상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눈물 어린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배를 타고 다소간 남쪽인 고스(Cos) 섬으로 가서, 하루 후에 로도(Rhodes)라는 이름을 가진 섬의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시점까지 그들은 소아시아의 남서쪽 끝을 돌아서 남쪽 해안을 따라 바다라(Patara)까지 동쪽으로 항해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바울은 두로까지 가기 위한 또 다른 배로 갈아 탔습니다. 약 400마일(644km)의 여행을 위해, 직접 가로질러 항해할 무역선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두로는 페니키아 지역으로 해양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조선업으로 유명하여 큰 선박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무역선을 타고 와서 두로에서 짐을 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역사 속에서 페니키아 지역의 해상 무역과 교통을 정비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 배는 구브로 끼고 직진하여 화물을 내리게 될 두로에 도착하였습니다. 두로에서 7일을 머물게 됩니다. 학자들은 바울인 탄 배가 곡물이나 과일 같은 짐들을 내리는 큰 배였을꺼라 추정합니다. 바울은 닷새동안 무역선을 타고 와서 도착한 뒤에 사도행전 15장 3절에 보면 2차 전도여행시에 페니키아(베니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 교제하였습니다. 피곤했을텐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로에서 만난 제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과 두로에 살던 제자들이 깨달은 성령의 뜻이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뜻을 해석하는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어디에 무게를 놓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7일 동안 성령에 뜻에 매여 가는 이유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내딪습니다. 바울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 이곳에서도 형제들에게 안부하고 하루를 그들과 있다가 다음날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게 됩니다.
이후 10절부터 누가는 아가보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의 손발을 묶고 성령께서 이 허리띠의 주인을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묶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절) 바울 일행 앞에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띠는 짧은 가죽 허리띠가 아니라 당시 허리띠로 사용되던 긴 천 조각이었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무당이 살풀이라도 하듯이 생생하게 몸으로 표현하면서 예언의 내용을 보여 줍니다. 바울과 함께했던 일행들은 아가보의 예언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니까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깨닫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더 강권적으로 권유합니다. ‘권하다’라고 하는 ‘파레칼루멘’은 몇번이고 거듭하여 만류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일행은 밀레도에서 바울이 말한 예루살렘에서 당할 결박과 환난을 이야기하였을 때 (20:23), 이 말을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듣고 보게 되니까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되어 로마인들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예루살렘행을 더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족이 하나님의 뜻으로 선교지에 들어 가야만 하는데 그 지역에 지진으로 피해가 있다면 선뜻 가라고 하겠습니까? 계속되는 여진이 그 지역에 예상 된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류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일행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좋은 길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길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고난이 없는 길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분별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다면 어려움이 없는 길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소망에 비교 할 수 없기에 이방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땅끝까지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1세기 동안 충분하게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후대에 와서 그의 사역과 바울의 신학이 우리들에게는 온전한 복음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구원 사역과 연결된 예언적 말씀들은 대부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철저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지를 인식하게 될 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어린 나귀 같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주님을 생각하며 그 부르심 따라 걸었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에 품었을 만한 바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겁니까? 이후 바울의 일행들은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노라”(14절)
바울은 아가보의 예언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가는 성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성도들이 하는 예언을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결박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좋은 은사이지만 교회를 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이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 깊은 기도하는 자리에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현실을 넘어 뜻을 이루는 삶도,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들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명감으로 묵묵히 걷게 될때에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결국 결박 당한 채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의 황제 앞에 서는 것은 죄수의 신분이어야만 가능했습니다. 바울이 입게 될 옷은 죄수의 옷이 아니라 바울을 보호하시는 은혜의 옷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고난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로 인도함 받는 것에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즐거움과 사람의 말을 앞세우는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고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와 같으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눈물과 쓰러짐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되고, 눈물의 자리를 통하여 외로움과 씨름했던 시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않았습니까? 가난의 자리를 통하여 이 세상의 전부를 통해서 ‘주(主)되심’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길을 가야할지 판단하기 힘들다면 성령님께 어떤 길이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이번주 제 마음에 은혜를 주었던 찬양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1절만 함께 들어보고 싶습니다.
참 고마운 친구 나의 예수님 / 나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때론 낙심해도 포기치 않음은 /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내 삶의 동행자 나의 예수님 / 나는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 같으나
늘 쓰러지나 다시 일어남도 /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 나의 실패는 나의 간증이요
나의 아픔은 나의 영광이니 /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나 가난함은 나의 상급이요 / 나 미련함은 나의 자랑이요
나 쓰러짐이 나의 고백이니 /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한주도 허락해 주신 그 부르심 따라 믿음의 여정 걸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고의 미래 준비
이한배목사 / 행 21:1-14.
ㅇ 질 문 - 천국 들어갈 자신 있습니까 ?
I. 서 론
다양한 삶을 경험한 USA Today의 베스트 작가인 G. Michael Hopt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려운 때는 강한 자들을 만들고(Hard times create strong men)
강한 자들은 좋은 시절을 만들고(Strong men create good times)
좋은 시절은 약한 자들을 만들고(Good times create weak men)
약한 자들은 어려운 때를 만든다.(Weak men create hard times.)
사실 역사는 이런 순환을 계속 반복하여 왔으면, 앞으로도 계속 반복할겁니다.
부인하고 싶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일본도 지난날 너무 잘 살아서 그것이 젊은이들을 다 연약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나라를 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나에게도, 우리나라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살기 좋은 시대는 젊은이들을 약하게 만들고, 젊은이들의 약함은 어려운 시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아는 은밀한 세력들은 이미 어려운 시대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래를 전망하고 은밀한 중에 미리 준비하는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이며 미래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지금 세계는 매우 위험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① 세상은 비극과 위기가 닥쳐올 것 같이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다.
②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잘 못 가고 있다고 한다.
③ 가스 전기 등 에너지의 미래가 불안하다.
④ 경제가 망할 수 있다.
⑤ 식량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⑥ 사회안전망이 무의미하다.
⑦ 테러와 전쟁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세계에서 핵무기 개발에 가장 열을 올리고, 핵무기 장난을 하는 가장 비이성적인 자들이 가장 가까이 있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⑧ 가정이 매우 위태롭다.
우리는 소멸학교, 소멸지역을 걱정하나, 그 근본은 가정이 소멸되는 겁니다.
그래서 미래를 준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① 어떤 사람은 은신처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② 어떤 사람은 핵폭탄을 피할 방공호와 물과 음식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③ 위기의 때를 위하여 금이나 현금과 같은 안전자산을 비밀리에 쌓아두고 있습니다.
올해 우리나라 상반기 무역흑자가 6년 만에 최고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달라 환율을 1,400대의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흑자가 나면 환율이 내려와야 하는데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위기의 때를 내다보고 안전자산인 달러를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방글라데시에 갔다 오다가 공항에서 보니까, 방글라데시 화폐 따카가 전에는 1달러에 70따카였는데, 지금은 1달러에 118따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글라데시가 경제가 놀랍게 성장하고 있지만 그들도 안전 자산을 선호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④ 자연재해에 의하여 없어질 전기나 가스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자연인처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는 자들은 정말로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바로 미래를 내다보는 눈에 있으며, 그것을 준비하느냐 안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미래를 잘 준비하는 것일까요 ?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보다 자녀들의 미래를 걱정하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우리 자녀들이 살 미래를 내다보고 준비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미래를 걱정한다고 다들 떠들어대고 있지만, 정말로 이 나라가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외웠던 국민교육헌장의 내용 중에 다음 구절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습니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후손들에게 영광스러운 나라를 물려주려고 준비하는 나라가 정말로 좋은 나라입니다.
자녀들에게 정말로 좋은 삶의 자세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부모입니다.
II. 본 문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를 잘 준비하는 것일까요 ?
본문의 사도 바울을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죽음이 앞에 있다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2-23)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각성에 있는 교회에서 예언하는 자들이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면서, 거기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가는 앞길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죽음이 앞에 기다리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이 미래를 준비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사도 바울은 미래를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v. 13)
여기에서 “각오하다”는 말은 ἑτοίμως(헤토이모스)라는 말인데, “준비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죽을 준비를 다 하였습니다.
죽음이 앞에 있다는 예언을 들었는데, 죽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보다 미래를 더 잘 준비한 경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
이것은 인간이 미래를 준비한 것 중에 가장 잘 준비한 것입니다.
우리도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렇게 미래를 준비하였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각오가 되어있다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렇게 미래를 준비하였을까요 ?
1. 성도들이 미래를 준비하게 하였습니다.(vs. 1-4)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소아시아에서 페니키아 두로에 왔을 때 두로교회의 성도들이 성령에 감동되어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어떤 미래가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즉 바울에게 결박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임박한 죽음을 미리 알게 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일 겁니다.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충격적이겠습니까 ?
그런데 이 말을 들을 때 바울은 자기 앞에 다가오고 있는 미래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준비를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는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1) 이렇게 성도들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게 합니다.
그런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면 두로의 교인들은 어떤 자들이기에 바울로 죽음을 준비하게 했을까요 ?
(2) 이들은 성령에 감동된 자들입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성령에 감동된 성도들만이 우리로 미래를 준비하게 합니다.
성령에 감동되지 않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늘 성령충만을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와 성도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3) 말씀을 공부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자들이 우리로 미래를 준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늘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새벽기도하고 수요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배우고 그런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들이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게 합니다.
2. 기도로 미래를 준비하였습니다.(v. 5-6)
두로에 도착한 배는 짐을 내리라고 7일을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로에서 7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로교인들은 바울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바울과 같이 있는 동안에 두로교인들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 사도 바울과 사랑하는 사도 바울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 두로교인들은 무엇을 하였을까요 ?
그것은 7일 동안 있다가 떠나가는 모습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 새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 가니라.”
①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따라왔습니다.
②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① 그러므로 이들은 7일 동안 있을 때 같이 기도했습니다.
② 떠날 때 기도했습니다.
③ 바울이 떠난 후에도 더욱 열심히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배가 두로에서 짐을 내리느라고 7일 동안 기다리는 동안 사도 바울과 두로의 교인들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길을 가야하는 사도 바울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미래를 가장 잘 준비한 자가 되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렇게 완벽하게 미래를 준비하였습니다.
미래를 가장 준비하는 자세는 기도입니다.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녀와 부모님과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신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가장 귀한 특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은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다같이 힘써서 기도해야 할 것은 죽음을 앞드신 어르신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의 보혈의 피와 십자가를 붙드시도록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지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나 우리의 상황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기도한다고 나쁜 상황이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바꿔서 우리 앞에 있는 문제를 넉넉히 해결하게 합니다.
바울과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기도해도 바울 앞에 있는 결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일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바울이 바뀌어서 그 문제들을 넉넉히 이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v. 13)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정 무서운 죽음을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인생을 망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을 더욱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이런 삶이 가장 훌륭하게 산 삶입니다.
기도는 우리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어떤 일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넉넉하게 이기게 합니다.
죽음도 이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개인기도할뿐 아니라, 모든 성도님들이 열심히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들었습니다.(vs. 7-12)
사도 바울은 두로에서 출발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들과 하루를 있다가 떠나서 다음날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1) 그에게 딸이 4명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빌립의 딸들은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예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도 바울에게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2)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선지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 아가보 선지자는 퍼포먼스를 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계속 들었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① 집사 빌립의 4명의 딸들로부터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 사방에서 온통 바울의 죽음을 예언을 하는데, 이 집사의 딸들은 예언하는 자들인데 왜 이것을 예언하지 않았겠습니까 ?
② 유다에서 내려온 아가보라는 선지가가 퍼포먼스를 행하며 바울의 결박과 고난을 예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퍼포먼스를 통하여 전하는 말씀은 더욱 힘이 있습니다.
더욱 분명하게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① 이들은 다 성령충만하여 예언하는 자들입니다.
② 그러므로 바울은 이 예언을 들을 때마다 반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③ 바울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 조금도 두렵지 않을 때까지 말씀을 듣고 기도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 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v. 13)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것은 그래야 우리의 미래를 잘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죽음도 완벽하게 준비하였노라.
말씀을 계속 들어야 영생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미래 준비는 이렇게 죽을 준비를 완벽하게 하는 것입니다.
III. 결 론
혼자 살고 있던 Mike Hanzas라는 사람이 죽기 2년 전에 그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는 공원묘지에 자기가 묻힐 자리를 샀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이 묻힐 그곳을 매주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곳에 잔디를 심고 규칙적으로 잔디를 깎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념일에는 무덤 자리에 꽃을 두었습니다.
왜 꽃을 두느냐고 묻자 그녀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 무덤에 꽃을 놓아둘 자가 없기 때문에 지금 그 꽃을 보기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장의사가게에 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새로운 집이 될 관을 사기를 원한다고 하며 관을 샀습니다.
그리고는 장의사가게를 지날 때마다 그는 그곳에 들어가서 자기가 들어가게 될 관 옆에 서서는 이 집이 내가 언젠가 들어가게 될 집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마이크는 그의 조카와 그의 가족들을 다 오라고 했습니다.
식사를 잘 대접한 후에 마이크는 미리 준비한 물건들과 소지품들을 방문한 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조카에게 그의 유언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유언을 말하고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마이크 한짜스는 그의 육신의 죽음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최고의 준비는 영생을 준비하는 것과 천국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고, 천국 들어갈 준비를 한 자는 어떤 일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줄 믿습니다.
두로에서의 귀한 만남
행 21장 1~6절 /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쁘게 만나는가 하면 슬프게 헤어지고, 또 기쁘게 만났다가 헤어집니다.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슬픈 작별은 언제였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마도 미국에 이민 올 때가 아니었는가 생각됩니다. 그때는 1986년으로 아주 오래 전입니다. 그때는 김포공항에서 떠났는데, 가족 이민으로 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떠나던 날,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배웅을 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제 가면 언제 보냐? 살아서 볼 수 있을까?’라고 하던 때였습니다.
정말 슬펐지만 공항에서 친구들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행기에 타서 제 자리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하려고 활주로를 가고 있을 때, 꼭 비행기 안에서 읽어보라고 주었던 제 친구의 편지를 보고 정말 눈물이 펑펑 났습니다. ‘지금 네 마음은 두 가지일 것 같다. 미국에 가서 산다는 기대감도 있을 것이고, 또 고국을 떠나는 안타까움도 있을 거다. 잘 가라. 건강하고 행복해라. 언젠가 또 보자.’
그때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언제 친구들을 또 볼 수 있을지 너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헤어졌는데, 바로 몇 년 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어서 한국과 미국 사이에 여행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그때는 ‘천국 가서 보자’라고 하며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정말 민망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의 이별은 정말 슬픈 이별이었습니다. 고대사회 당시,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볼지 기약할 수 없는, 실제로도 보지 못했던,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마지막 작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바울은 계속해서 또 다른 성도들과 마지막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1. 밀레도에서 두로까지의 여정
1) 유명한 곳들을 거쳐가다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1절)
20장 마지막 부분에 밀레도라는 곳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눈물의 작별을 한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밀레도 남쪽 40마일이 넘는 거리에 위치한 섬인 고스(Kos)로 갔습니다. 그 당시 무역의 중심지였던 고스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유명한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Hippocretes)의 고향이었습니다. 바울 당시에도 고스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의사로부터 육체의 질병을 고치기 원하는 병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고스를 찾았습니다.
이처럼 의학으로 명성을 떨치던 고스에는, 그리스 신화에 ‘의술의 신’으로 등장하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us)’ 신전도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궁중화가였던 아펠레스(Apelles)가 그 신전에 <바다에서 올라오는 아프로디테(Aphrodite Anadyomene)>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고대세계의 명화로 꼽혔습니다. 2000년 전 바울이 고스 섬에 도착했을 때,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는 바로 그 그림이 계속 전시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고스는 의학의 섬이자 무역의 섬이자 예술의 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유명한 것에도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날이 밝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배로 고스를 출발하여, 동남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져 있는 또 다른 유명한 섬인 로도로 갑니다. 영어로 Rhodes인 이 섬은 지금도 유명한데, 헬리어로는 ‘로도스’입니다. 소아시아 반도 해안의 섬들 중 가장 큰 섬인 로도는 ‘장미의 섬’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태양의 일조량이 많아서 가는 곳마다 화려한 장미꽃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서를 연결하는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던 로도스에는 수사학과 웅변으로 유명한 대학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도 섬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헬리오스 콜로서스(Helios Colossus)’라는 것이었습니다. ‘헬리오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태양의 신’이고, ‘콜로서스’는 ‘거대한 조각상’입니다. BC 305년 마케도니아의 공격을 막아 낸 로도 시민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청동으로 ‘헬리오스 콜로서스’를 만들어 세웠는데, 그 높이가 무려 36미터(118피트)나 되었습니다. 이 헬리오스 콜로서스는 완공과 동시에, 전에 살펴보았던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과 함께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렸습니다.
그런 로도에서 다시 배를 갈아탄 바울 일행은 동쪽으로 약 53마일에 떨어져 있는 바다라로 갑니다. 고스와 로도는 섬이고, 바다라는 항구도시입니다. 당시 중요한 무역 항구도시였던 바다라는, 그 지정학적 이점 때문에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수백 척의 상선들이 거쳐 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리스 본토의 델피 신전에 필적하는 아폴로 신전이 있어서 유명했습니다.
이처럼 밀레도를 출발한 바울이 거친 곳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곳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처음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이 고스나 로도라고 하면 ‘와, 유명한 데 갔네’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모두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서해안에서 중요한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훌륭한 장소들을 단지 거쳐만 갔습니다. 어느 곳에도 집착하거나, 둘러보거나,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2절)
바울 일행은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바다라에서 지중해를 횡단하여 팔레스타인의 베니게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베니게는 역사의 페니키아로, 지금의 레바논 지역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으로는 수리아 주에 속해 있었습니다.
바다라에서 이 베니게까지는 뱃길로 약 400마일이었는데, 당시 약 일주일 정도 걸려야 갈 수 있는 먼 거리였습니다. 그 먼 거리를 가기 위해서는 작은 배가 아니라 큰 배라야 했습니다. 밀레도에서 작은 연안선으로 고스와 로도스를 거친 바울은, 당시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던 바다라에 도착해서 지중해를 횡단하여 베니게로 직행하는 큰 상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배를 타고 가게 됩니다.
2) 구브로를 바라보다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3절)
지금도 터키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는 큰 섬이 사이프러스(구브로)입니다. 바울 일행이 탄 배는 지중해를 횡단하여 화물을 풀기 위해 베니게의 두로에 정박합니다. 그런데 그 배가 지중해를 횡단하는 동안에, 바울이 ‘구브로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멍청하게 보고 있던 게 아니라 주목해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라보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원래 ‘나타나다’는 뜻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 보면 섬들이 앞에 굉장히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금방 나타났다가 옆으로 스치며 지나가지 않습니까?
본문은 그런 상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니게를 향해 지중해를 헤치고 나아가는 바울이 승선하고 있는 배 앞으로 구브로 섬이 나타났습니다. 구브로 섬, 즉 동서로 120마일 길이로 뻗어 있는 섬이 배 왼편으로 나타나 계속 보였습니다. 구브로를 왼편에 두고 배가 항해를 했다는 겁니다. 120마일이나 되는 섬을 완전히 지나가려면 하루 이상을 지나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배 위에서 그 섬을 하루 이상 계속 볼 수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뭔가 생각을 가지고 구브로 섬을 하루 이상 보면서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지금의 터키 즉 소아시아 반도와 접하고 있는 에게 해와 지중해 연안에는 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지금도 지도를 찾아보시면 섬들이 아주 많은데 대부분 그리스에 속한 섬들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탄 배 앞에 나타났다 사라진 섬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쪽에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섬이 산토리니(Santorini)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를 정말 아는 사람들은 다른 섬을 갑니다.
어쨌든 그렇게 많은 지중해의 섬들 중에, 성경이 지금까지 이름을 밝힌 섬은 20:15절의 기오(키오스)와 사모(사모스) 외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사이프러스) 섬이 바울 앞에 나타났고, 바울이 구브로를 계속 바라보았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그냥 지나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사실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120마일이나 되는 그 섬이 지중해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기 때문에 계속 바라보았겠습니까? 아니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아무 의미 없이 그냥 바울이 바라보았다고 썼겠습니까?
구브로 섬이 어떤 섬입니까? 제1차 전도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목적지로 삼은 곳이었습니다. 바나바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13년 정도에 걸친 세 번의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이 시점에, 바울 앞에 자기가 제일 처음 전도여행을 갔던 곳, 첫 번째 목적지였던 그곳이 탁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은 13년 만에 전도여행의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상륙하지는 않고 지나가면서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배 위에서 하루 이상 그 섬을 바라보면서, 바나바와 마가와 같이 갔던 1차 전도여행 때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며 회상에 젖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의 히브리식 이름이 사울 아닙니까. 그런데 로마 세계에 나와 보니까, 사울이라는 히브리식 이름보다는 바울이라는 헬라식 또는 라틴식(로마식) 이름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총독 이름이 서기오 바울이었고, 그는 ‘어, 나도 바울인데?’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려면, 로마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식 이름인 사울보다는 바울이 더 좋겠다.’라고 하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바나바와 사울’로서 바나바가 리더였는데, 그 섬에서부터 ‘바울과 바나바’라고 되면서 자기가 리더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뜻깊은 곳이 바로 이 구브로입니다. 그러니까 구브로 섬을 보며 경관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바로 저곳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를 해주셨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13년이 흘렀는데, 마침 자기가 1차 전도여행 때 갔던 그 섬을 지나가면서 지금 바라보고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향하고 있는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 가서 잡힐 것이고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여러 번 들어 알고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며 가고 있는 길입니다. 비장한 각오로 가는 그 배 위에서 자기가 첫 번째로 갔던 구브로 섬을 보며, 하나님이 13년 전에도 신실하게 역사해주셨고, 지난 13년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지켜주시고 예루살렘까지 나를 인도하고 계시다.‘ 하는 감회에 젖어서, 큰 은혜와 감동 가운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2. 두로에서 일어난 일
1) 두로에서 제자들을 만나다
바울이 탄 배는 약 일주일 만에 지중해를 횡단하여, 화물을 풀기 위해 베니게의 두로에 정박하게 됩니다. 거기서 배의 짐을 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두로가 나옵니다. 항상 ’두로와 시돈‘이라고 같이 나오는데, 두로는 그 지역에서 최대의 해양 도시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두로 왕이 이스라엘과 우호조약을 맺고, 궁전과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는 데 필요한 백향목들과 기술자들을 이스라엘에 보내서 짓는 것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주전 65년 로마제국의 자유무역 도시로 편입된 이후에 두로는 로마제국의 번영과 더불어 더 큰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해지는 동시에 타락했습니다. 인간은 돈이 많아지면 타락하고 이상한 데에 돈을 쓰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해지면 부해질수록 더 타락하는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4절)
나중에 7절에서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바울이 타고 온 배의 최종 목적지는 두로 남쪽의 돌레마이였다는 1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20장 16절에서 본 것처럼, 바울이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라에서 두로까지 직행하는 배를 탄 바울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계속 작은 배를 바꾸어 타면서 두로에 가는 것보다 훨씬 시간을 벌면서 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타고 온 배가 두로에서 화물을 내리고 새 화물을 싣고 돌레마이로 갈 때까지 이레 동안 두로에서 머물기로 합니다. 그렇다고 편안하게 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일행과 함께 타락의 도시, 두로에 살고 있는 제자들, 즉 크리스천들을 찾아 나섭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이 바로 이 두로를 방문하셨습니다. 그곳의 귀신 들린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두로에는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북쪽 수리아 안디옥으로부터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중간에 있는 두로를 거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로에서 제자들, 즉 믿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부귀영화가 넘치지만 타락의 도시인 두로에 살고 있던 그들의 믿음을 격려해줍니다. 또 주님께서 이방인들에게 1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갈라디아 지역에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는가를 그들과 나누며 간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오늘의 본문에서 두로에 잠시 머물게 된 바울은, 약 10년 정도 만에 그때의 그 제자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7일 동안 머물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두로의 제자들이 ‘위대하신 사도 바울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다.’라며 예상하고 있었겠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이메일이나 텍스트나 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혀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바울이 나타나서 자기들을 찾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로의 제자들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뜻밖에 이 귀한 분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기뻤냐 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큰 은혜를 끼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준 사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려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믿음을 북돋워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그들에게 사기를 치고 떠났었는데 이제 나타났다면, 그들의 반응이 기뻐한 것이었겠습니까? 물론 기뻐했을 겁니다. ‘너, 잘 만났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의미의 기쁨입니다. 10년 만에 나타난 바울이 그들에게 이전에 해를 끼치고 떠났다면, 이번에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거나, 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알고도 모른 척하거나, 문전박대했을 것입니다. 아니면 치를 떨면서 몰려왔든지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10년 전쯤에 서로 헤어졌던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10년 후인 지금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습니까? ‘너 잘 만났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주 감격스러워하고 기뻐하며 만나시겠습니까? 내가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인 2029년에 누군가를 어디서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만났을 때, 그 사람과의 만남을 진심으로 기뻐할 것인가, 슬쩍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치를 떨며 이를 갈 것인가? 이것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제 내 삶의 결과가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의 결과는 내일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입니다. 특별히 우리 믿는 사람들은 헤어짐을 잘해야 합니다. 이제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니까 탁 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시 안 볼지 어떻게 압니까? 10년 후에 어디서 탁 만날지 어떻게 압니까?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선수를 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평소에 잘하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도 기쁘고 감사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고 이상하게 끝나버리면 그것이 반드시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고, 항상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함께 있는 동안 사랑하라고 함께 있게 해주시는 겁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서로 격려해주고 북돋워주는 우리 관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두로의 제자들이 아름다운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다
4절을 다시 보면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전에도 그랬지만, 두로의 제자들도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권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명령을 하는 겁니다. 성령님께서 두로의 제자들에게도, 바울이 가려는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이라고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이 그 사실을 몰랐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성령님이 알려주셨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저라도 바울이 가는데 성령님께서 바울이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알려주셨다면 붙들고 애원하지 않았겠습니까?
10년 전에 바울을 잠깐 만나서 교제했던 이들이니까 바울과 친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계속적인 교류가 있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안에서 위대한 사도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마음은 에베소의 장로들과 성도들 못지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있으니까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바울이 안 갈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로의 제자들 앞에서도 자신의 굳은 결심을 분명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똑같이 말했을 텐데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때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2-24)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바울이 이런 믿음의 고백과 선포를 할 때, 두로의 제자들이 어떻게 계속 그에게 가지 말라고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5절)
마침내 7일이 지나고 배가 다시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여기 보면 두로의 제자들도 성문 밖까지 나와서 바울 일행을 전송합니다. 항구까지 따라 나갔다는 말입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최대의 해운도시였던 두로의 항구에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특히 이렇게 큰 상선이 출항하는 시간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붐볐습니다. 물건을 싣고 내리고 작별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할 때처럼,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두로의 제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바닷가에서 기도했습니다.
서로 무슨 기도를 해주었겠습니까?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그가 거기서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보호해주시도록 축복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들을 위해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고린도도 그랬고 에베소도 그랬지만, 그에 못지않은 타락의 도시 두로, 구약에서부터 악명이 높았던 두로는 바로 구약의 최대 악녀 이세벨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구약시대 때부터 타락의 도시였던 두로에서 제자들이 악한 영향에 놓이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승리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5)라는 표현입니다. 다른 데서는 ‘처자와 함께 다 나와 전송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일하게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 전송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로에 있는 남자 제자들(형제들)만 항구까지 바울 일행을 따라 나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데리고 함께 항구까지 나가서 바울을 전송했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자들과 함께 바닷가에 무릎을 꿇고 바울 일행과 기도했습니다. 자기들만 기도한 게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어떻게 보면 두로 교회 전체가 다 함께 모여 기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처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는 바울 일행을 끝까지 전송했습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이렇게 중요한 현장에 처자들을 다 동원하여 같이 나왔다는 것은 여기에 유일하게 나옵니다. 그 정도로 두로의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다 데리고 항구까지 나가서 바울을 전송했다는 것은, 지난 7일 동안 온 가족 즉 아내와 자녀들이 다 함께 모여서 부흥회를 했다는 겁니다. 집회를 하며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길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두로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거듭하여 바울을 말렸지만, 그렇게 말릴 때도 그들의 처자들이 함께 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려도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을 끝까지 갑니다. 내 사명을 다함에 있어서는 내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는 귀한 선포를 가족들이 다 같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떤 말보다도 자녀들에게 큰 영적 교훈을 주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 교육이었습니다.
이제 7일이 지나고 바울이 두로를 떠나는 날이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과 헤어지면 살아서 다시 바울을 못 볼 가능성이 거의 100%입니다. 그래서 두로의 제자들은 처자들을 다 데리고 항구로 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바울과 영원히 작별하는 그 마지막 현장을 자기들만이 아니라 자기들의 가족들까지 다 함께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과 작별하는 마지막 현장을 지금 아내와 자녀와 함께 지켜봄으로써, 두로의 제자들 자신들이 먼저 바울과 같이 저런 헌신과 믿음을 본받고, 사랑하는 가족들 역시 저런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며 함께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두로의 제자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 모두 바닷가에서 바울과 또 그의 일행과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계속 ‘우리’라고 나오니까 누가를 비롯해서 다른 제자들도 바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함께 무릎을 꿇고 바닷가에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때 두로의 제자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자녀들이 얼마나 큰 은혜와 도전과 감동을 받았겠습니까?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6절)
서로 작별을 나누고, 마침내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에 오릅니다. 바울이 지금 크루즈를 타는 게 아닙니다. 결국은 죽음으로 끝날 결박과 환난의 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얼굴 표정은 일그러졌을 리가 없습니다. 아주 평안했습니다. 바울의 그 얼굴은 두로의 제자들과 그들의 아내들과 또 자녀들의 마음속에 어떤 것으로도 지울 수 없는 분명한 그림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처럼 그들도 바울 일행이 탄 배가 떠날 때 손을 흔들고,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면서 평안히 가라고 하며 ‘주님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하고 계속 기도하고 축복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배가 안 보이게 되었을 때 뒤를 돌아 자기 집으로 가면서 가족들끼리 무슨 대화를 했겠습니까? ‘자, 이제 우리 어디 가서 회식할까? 뭐 먹을까? 짜장면? 짬뽕?’ 절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에 큰 감동과 은혜가 있었겠습니까?
부부끼리는 서로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여보, 내가 그 동안 너무 잘못 살았어. 바울 선생님을 보니까 내가 정말 제대로 살아야겠어.’라고 서로 이야기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부모는 자녀에게 ‘얘야, 내가 그 동안 너에게 너무 믿음의 본을 잘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는 저 바울 선생님처럼 나도 복음을 위해 살겠다.’ 하고 이야기해주었을 것입니다. 또 자녀는 부모에게 ‘아빠, 엄마, 바울 선생님과 만나는 자리에 나를 데려와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정말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나도 바울 선생님처럼 저렇게 살래요.’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 역사나 성경에 일일이 다 나오지 않아도, 무명의 크리스천들의 헌신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 저희까지 다 믿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과 헤어지는 마지막 작별 현장에 아내와 자녀까지 다 데리고 온 이 형제들의 결단이 참 귀한 결단입니다.
여러분, 항상 영적인 곳, 주님이 기뻐하실 만한 자리에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주님과 함께 하며 가장 좋은 곳,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복된 그 자리에 피곤하니까 안 데려오고, 바쁘니까 안 데려오고, 나는 내 할 일 하고 너는 네 할 일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복된 자리에 배우자도 자녀도 다 데려오고 부모님도 다 모시고 와서 함께 해야 하는데, 조금 바쁘다고 하면 안 와도 된다 하고 다른 일이 있으면 그리 가도 되고 그러다 보니까, 세상 복은 조금 받을지 모르겠는데 진짜 복, 하나님의 복은 다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영원한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복들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다 끝나 버립니다. 길어야 100년이면 다 끝납니다. 그런데 100년, 200년, 300년이 아니라 영원, 우리가 가늠할 수도 없는 그 영원히 함께 하는 그 복, 하나님의 복을 받고 누릴 수 있는 그 자리로 우리 가족을, 자녀를 데리고 와야만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 동안 무엇을 주었습니까? 또 앞으로 무엇을 남겨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까?
참 안타까운 경우가 많은데, 오래 전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옆 사람과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 기도해주라고 했습니다. 거기 한 중년 부부가 있었고 옆에 청년이 있어서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었습니다. 그 남편은 대기업의 임원이었고, 평소에 많은 교인들이 존경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분들이 내놓은 기도제목이 뭐였냐 하면, 자기들의 외아들이 군대 면제를 받을 수 있도록 40일 작정기도 중이라고 하면서 기도를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 부부의 아들이 신체검사에서 체중 미달로 불합격 판정을 받기 위해 굶식(?) 또는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제목을 들은 몇몇 교우들이 기도하는 시늉은 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부를 더 이상 존경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그것은 바른 기도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결국 그 부부의 아들은 불의한 방법으로 군 입대를 면제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또래보다 당시에 3년 더 빨리 사회에 ‘합법적으로’ 진출했습니다. 그 후 20년 정도 지났는데, 그 가정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아들은 홀로 남은 어머니를 전혀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40일 작정기도까지 군 입대 면제를 위해 하면서 그 외아들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 부모님은 나를 정말 사랑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철저한 이기심이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머니에게 그냥 되돌아가버린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그토록 정성을 다해 심어준 것,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기심이었던 것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자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 아들은 자기가 자녀를 낳으면 또 자녀에게 어떤 대우를 받겠습니까? 또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인 사람들, 철저히 자기 위주로 사는 사람들, 자기에게 유익이 될 것 같으면 끌어안고 유익이 없는 것 같으면 쳐내는 사람들, 그렇게 철저히 자기만 위해서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사실 세상에서 더 빨리 출세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될 수 있고, 떵떵 거리며 살 수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불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에게 남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만을 심어주는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일들이 분명히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세상에서는 떵떵 거리고 높이 올라가고 돈 많이 벌지는 몰라도,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삶이 되고 맙니다. 정말 안타까운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하지만,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을 슬쩍 제쳐놓고 저리로 가라고 합니다. 당장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관점으로 볼 때 그것은 정말 안타까운 비극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자기의 처자와 함께 바울이 떠나는 곳까지 갔던 두로의 제자들,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도 가족들과 함께 했던 두로의 제자들의 선택은 정말 영적으로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들의 인생을 위해서도 탁월한 선택입니다. 이들이라고 안 바빴겠습니까? 배우자에게 다른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자녀가 공부를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일을 하든지 다른 일이 있어서 ‘그래, 피곤할 테니 쉬어라.’라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배우자와 자녀를 다 데리고 바울이 떠날 때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들을 본받기 원합니다. 두로의 제자들처럼, 특별히 그들이 본을 받아 따랐던 바울처럼,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에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바울의 믿음을 우리가 본받기 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손에 나 자신을 맡기고 내 가족을 맡기는 우리의 믿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실은 그것이 나 자신과 내 가족과 이웃을 정말 사랑하고 위하는 참된 길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일어날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우리 인생이 매일매일 상황은 각자 다 다르지만,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상관없이 바로 이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로 나아가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상한 양을 품으시는 목자의 마음
이 40:11 / by 고동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이 가장 지치는 순간은 바깥바람이 거셀 때가 아니라, 마음 안에서 “나는 이제 끝이야”라는 속삭임이 들릴 때입니다. 몸은 아직 걸을 힘이 남아 있어도, 영혼이 주저앉아 버리면 한 걸음이 천 리처럼 무겁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 주저앉은 영혼을 향해 다가오시는 “목자의 심장”입니다. 이사야 40장은 포로의 어둠, 실패의 재, 죄책의 먼지 속에서 떨고 있는 백성에게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훈계만 던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가까이 오셔서, 상한 자의 호흡을 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위로의 정점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한 장면으로 보여 주십니다. 거대한 우주의 창조주, 열방을 한 방울 물처럼 여기시는 지존자께서 “목자”로 서 계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낮아지심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그의 팔로 어린 양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 한 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논리로만 말하지 않고, 우리 가슴에 그림처럼 새겨 주십니다. 목자는 먹이십니다. 모으십니다. 안으십니다. 인도하십니다. 그 동사들 사이에는 꾸짖음이 아니라 돌봄이 흐르고, 심판의 채찍이 아니라 생명의 온기가 흐릅니다.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목자의 마음은 단순한 ‘따뜻한 감정’이 아니라, 죄인을 끝까지 살리시는 언약의 사랑이며, 십자가로 성취되는 복음의 능력이며, 성도를 거룩으로 이끄는 성령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감상으로만 듣고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의 중심부, 개혁주의가 붙드는 은혜의 본질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붙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 우리가 지키는 구원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시는 구원. 우리가 겨우겨우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우리를 품고 가시는 길입니다.
먼저,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만 책임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양은 스스로 먹이를 찾는 동물이 아닙니다. 길을 잘못 들면 가시덤불에 걸리고, 물을 잘못 마시면 병이 나며, 한 번 공포에 사로잡히면 떼를 이루어 절벽으로도 달려갑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얼마나 어리석어졌는지를, 양의 습성이 거울처럼 비춥니다. 죄는 단지 나쁜 행동 몇 가지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마음의 병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꾸만 자기 영혼의 허기를 다른 것으로 메우려 합니다. 인정으로, 성취로, 관계로, 심지어 종교적 열심으로도 허기를 달래려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허기는 하나님으로만 채워집니다. 목자 되신 주께서 양 떼를 먹이신다는 말은, 주께서 당신의 말씀과 은혜로 우리를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여기서 분명합니다. 양이 들판을 창조하지 않습니다. 양이 목자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양은 그저 먹임을 받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자력갱생이 아닙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공급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믿음이 약할 때마다 “내가 더 강해져야 한다”만 되뇌지 마시고, “주님, 저를 먹이소서”라고 고백하십시오. 말씀으로, 성례로, 공동체의 권면으로, 기도의 호흡으로 주께서 우리를 먹이십니다. 그리고 그 먹이심은 죄인을 정죄로 눌러 죽이는 방식이 아니라, 진리로 살려 일으키는 방식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잘해 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생명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으로, “그의 팔로 어린 양을 모아”라는 구절은, 흩어진 자들을 찾아 한데 묶으시는 주님의 구원 방식을 보여 줍니다. 어린 양은 특별히 연약합니다. 늑대가 오기 전부터 두려워 떱니다. 가파른 바위 앞에서 주저앉습니다. 조금만 뒤처져도 금세 길을 잃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강한 양만 모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멀쩡한 양만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장 뒤에 처진 작은 생명들을 팔로 모으십니다. 여기서 ‘모은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으로 데려온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의 부르심, 효과적 소명, 성령의 내적 역사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는 일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로 된 마음을 풀어 주시고, 죄에 묶인 양심을 해방시키시며, 절망에 고정된 시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려 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고, 감정의 파도만도 아니며, 우리의 결단만도 아닙니다. 주님의 팔이 우리를 모으신 것입니다. 그 팔은 연약한 팔이 아닙니다. 그 팔은 출애굽의 팔이며, 홍해를 가르신 팔이며, 무엇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팔입니다. 죄인을 모으기 위해 내어 주신 팔. 우리를 정죄에서 건지기 위해 찢기신 팔. 그 팔로 주님이 우리를 끌어안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제목의 심장부가 여기 있습니다. “품에 안으시며.” 상한 양을 품으시는 목자의 마음이 여기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품’이라는 말은 단순한 포옹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자리, 가장 안전한 자리, 심장이 뛰는 자리입니다. 상한 양은 누구입니까. 넘어져 다친 양입니다. 길을 잃고 겁에 질린 양입니다. 자기 실수로 가시덤불에 찔린 양입니다. 더 나아가 죄와 후회로 마음이 찢어진 양입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선택이 가슴에 못처럼 박혀 “나는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가족과의 관계, 세상의 상처, 오래된 아픔 때문에 영혼이 절뚝거립니다. 어떤 분은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도 아직도 자기를 미워하는 습관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목자는 그런 양을 뒤에서 밀어붙이지 않으십니다. “빨리 걸어!”라고 호통치지 않으십니다. 품에 안으십니다. 그 뜻은, 주께서 우리의 속도를 존중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당신의 속도로 이루시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자주 자기 속도를 하나님께 강요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이만큼 주셔야 한다.” 혹은 “내가 이 정도밖에 못 했으니 하나님도 나를 버리실 것이다.” 둘 다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의 속도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피로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품’은 감성의 위로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칭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신 그 안정감, 그 확정성, 그 평강이 바로 품의 따뜻함으로 경험됩니다. 주님 품 안에서는 정죄가 최종 판단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 품 안에서는 실패가 결론이 되지 못합니다. 주님 품 안에서는 사탄의 고소가 최종 판결이 되지 못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라는 로마서의 외침이, 이사야의 “품”으로 번역되어 우리에게 옵니다. 주님은 상한 양을 품으시되, 그 상함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치유하십니다. 품은 도피처가 아니라 회복의 자리입니다. 죄를 숨기는 은신처가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씻김 받는 성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복음의 깊이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품으실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상처가 예뻐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눈물이 가치가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는 반드시 다루어져야 합니다. 공의가 흔들리면 사랑도 허물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의를 버리지 않고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그 방식이 십자가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은 양을 품기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0:11의 품은, 이사야 53장의 상처를 통과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라는 말씀을 지나, “그가 목자 같이” 품으십니다. 그러므로 상한 양을 품으시는 목자의 마음은 값싼 동정이 아닙니다. 피 값으로 산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시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짊어지되, 죄를 승인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품 안에서 안심할 뿐 아니라, 동시에 회개하게 됩니다. 참된 위로는 죄를 무마하지 않고, 죄를 용서하여 새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은혜는 방종이 아니라 거룩을 낳는 은혜입니다. 칭의는 성화의 적이 아니라, 성화의 뿌리입니다. 품에 안긴 양은 그 품의 향기를 닮아갑니다.
또한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신다”는 대목은, 주님의 목양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보여 줍니다. 젖 먹이는 암컷은 단지 약한 존재가 아니라, 다른 생명을 품고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그들에게는 속도가 아니라 배려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더 얹는 것이 아니라, 짐의 무게를 나누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의 시기와 형편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성도는 지금 사방이 바쁘고, 몸이 약하고, 마음이 예민하고, 책임이 많아 신앙의 호흡이 짧아진 것 같아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양은 잔혹한 훈련이 아닙니다. 주님은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를 나약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지 않고 살리시는 방식으로 강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성품이 여기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기까지, 기다리실 줄 아시는 분이십니다. 기다리심은 방치가 아니라 인도입니다. 그 온순한 인도는 말씀으로 방향을 주고, 성령으로 마음을 붙들며, 공동체로 어깨를 세워 주고, 섭리로 길을 열어 주는 인도입니다.
이제 한 가지 예화를 나누겠습니다. 어떤 목회자가 한 번은 산길을 따라 양 떼를 몰던 목자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목자는 양 가운데 유난히 한 마리를 자주 품에 안고 다녔습니다. “저 양이 특별히 비싼 양입니까?”라고 묻자 목자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 양은 자꾸만 혼자 앞서가다가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다리를 자주 다칩니다. 그래서 걷게 두면 또 다칠까 봐, 한동안은 제가 품에 안고 갑니다.” 목회자가 “그럼 저 양은 계속 품에만 안겨 가다가 스스로 걷지 못하게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목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품에 안는 것은 영원히 걷지 못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다시 걷게 하려는 것입니다. 상처가 낫기 전에는 품이 약이 됩니다. 낫고 나면, 다시 땅을 밟고 걷게 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품으시는 것은, 우리를 영원히 유아로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다시 걷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넘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어섬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품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는, “나는 너무 상해서 주님께 갈 수 없다”는 거짓입니다. 상했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상했기 때문에 품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는 스스로 강해져야 주님 품에 안길 자격이 생긴다”는 거짓입니다. 품은 자격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은혜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목자 되신 주님은 양을 평가표로 세우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피로 사신 양을, 당신의 어깨로 옮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자꾸만 조건을 세우는 종교가 아니라, 은혜에 붙드는 복음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교회가 어떤 공동체여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의 전시장이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상처를 숨기는 가면무도회여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상한 양이 숨을 돌릴 수 있는 품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품은 진리를 버린 관용이 아니라, 진리로 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되, 죄인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자리. 회개를 요구하되, 회개하는 자를 따뜻하게 일으켜 세우는 자리. 넘어짐을 꾸짖되, 넘어짐의 자리에서 손을 잡아 주는 자리. 우리가 목자의 양 떼라면, 목자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누군가 쓰러졌을 때 “왜 그랬느냐”만 묻지 말고, “어디가 아프냐”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누군가 지쳐 있을 때 “더 해라”만 말하지 말고, “함께 가자”를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목자 되신 주님의 마음이 교회 안에서 육화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개인에게 이 말씀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첫째로, 자신의 상함을 인정하고 주님께 가져오라는 요구입니다. 우리는 자주 상처를 숨깁니다. 신앙이 강한 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연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괜찮다’고 말하는 입술보다, 우리가 숨기려는 떨림을 더 정확히 아십니다. 그러니 차라리 정직하게 고백하십시오. “주님, 저는 상했습니다. 주님, 저는 두렵습니다. 주님, 저는 지쳤습니다.” 그 고백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둘째로, 품에 안긴 자리에서 죄를 미워하라는 요구입니다. 품은 죄를 사랑하는 자의 은신처가 아니라, 죄를 버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피난처입니다. 주님의 품은 우리에게 “괜찮아, 그대로 살아”가 아니라, “괜찮아, 내가 너를 새롭게 할게”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습관을 합리화하지 마십시오. 품 안에서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벌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를 쫓아내는 문이 아니라, 다시 안아 올리시는 문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온순한 인도에 자신을 맡기라는 요구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빠른 길이 아닙니다.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때로 느리고, 때로 우회하며, 때로 기다림이 길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온순히 인도하신다는 말은, 주님이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느린 걸음 속에도 손길이 있습니다. 정체된 것 같은 시간 속에도 섭리가 있습니다. 밤이 길어도 목자는 잠들지 않으십니다.
마침내 이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데려갑니다. 이사야가 보았던 목자의 형상은, 세월이 흘러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살과 피를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목자이십니다. 그는 잃은 양을 찾아 광야로 나가셨고,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품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안기 위해 무덤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품으로 오십시오. 자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상함이 깊을수록, 목자의 품은 더 깊게 여러분을 감쌉니다. 여러분의 눈물이 많을수록, 주님의 손길은 더 세밀하게 여러분을 만지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여러분을 품에 안고 끝내 목적지까지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주님이었듯, 우리 구원의 완성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떨리는 마음을 그 팔에 맡기십시오. 주님은 결코 떨어뜨리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품은 안전하고, 주님의 인도는 선하며, 주님의 사랑은 끝까지 갑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