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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탐이 나면 밭과 집을 차지해 버린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1-5
1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2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읊으리라.
‘우리는 완전히 망했네. 그분께서 내 백성의 몫을 바꾸어 버리셨네.
어떻게 우리 밭을 빼앗으시어 변절자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단 말인가?’
5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고 줄을 드리워 줄 이가
주님의 회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는,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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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악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예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당신을 없앨 모의를 하자 그곳을 피하시고, 따라 온 군중을 고쳐 주시며,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없애 버릴 모의를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얼핏 보면 도망이나 회피처럼 비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를 피하여 달아나신 것이 아니라 상한 갈대와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이들에게 다가가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물러가셨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적인 행동이셨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을 폭력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많은 이를 고쳐 주시는, 곧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이 모습 안에서 이사야가 예언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종의 모습이 실현되었음을 확신합니다. 바리사이들과의 관계에서는 다투지도 소리치지도 않으시는 모습을 보았고, 군중을 고쳐 주시는 모습에서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 보면 때때로 우리를 향한 폭력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주한 그 폭력이 ‘하느님의 일’을 위한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또한 ‘하느님의 일’을 하면서 상한 갈대는 꺾고, 연기만 내는 심지는 꺼 버리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갈대와 심지를 포기하지 않고 돌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임을 보여 주십니다.(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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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이미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마음먹습니다.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죽음을 넘어선 부활은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예언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은 그것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들 가운데에 오셔서 평화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을 통하여 더욱 잘 드러납니다.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계셨고 하나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분의 업적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자이고 희망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거짓말쟁이이며 신을 모독하고 군중을 선동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그 말씀은 기쁜 소식이었지만, 들으려 하지 않는 이들에게 그 말씀은 그저 지나가는 말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하늘 나라를 드러내는 표징이었지만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는 선동일 뿐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은 이들의 결단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이들은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받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이미 우리는 결단을 통하여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분명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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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현실은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나온다고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하느님의 완전함은 악의 실재와 어울리지 않지만, 인간이 겪는 세상 속의 죄와 죽음 때문에 우리는 악을 생생한 현실로 느낍니다. 미카 예언자는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이 “하느님은 벌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없다!”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며, 세속에서 악과 타협하여 얻은 능력으로 약탈과 기만을 일삼으며, 불공정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지만, 언젠가 이 불의한 현실을 치유해 줄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기다립니다.
율법과 계명을 무기로 사람들과 차별된 인생을 산다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걸림돌이었습니다.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며, 사회적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악에 타협하는 이들로 말미암아 십자가라는 운명의 길을 가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자기 탓 없이 율법의 굴레에 갇혀 살지만, 메시아의 도래를 희망하는 성경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한 대속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선택된 종, 그분께서 사랑하시고 그분 마음에 드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으시고 당신의 방식이 아닌 아버지의 방식으로 인류의 십자가를 짊어지십니다. 인류는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었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말입니다. 우리는 고백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 너머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음을. 세상 것이 전부인 듯 악과 타협하는 이들이 결코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을 피해 갈 수 없으며, 결국 의인이 살고, 선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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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신앙 안에서 기적을 바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적은 하느님의 은총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지요. 예수님 시대에는 기적을 체험할 기회가 많았는데, 오늘날에도 그때처럼 기적이 많다면 하느님을 훨씬 더 잘 믿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기적이 마치 신앙의 징표인 것처럼 말이죠. 오늘 복음 안에서도 많은 군중이 자신들의 병을 치유해 주시는 주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의 은총을 체험합니다.
반면 똑같은 기적을 보고도 이를 질시하고,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것으로 느끼는 자들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기득권에 방해가 되고, 그들의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시는 분입니다.
선한 사람은 무엇을 보든 선한 것을 발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선한 것에서도 불편함을 느낍니다. 우리의 신앙도 내 자신의 마음가짐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좀 더 정돈된 마음으로, 좀 더 정성스러운 기도로, 좀 더 희생하는 봉사의 자세로 나의 신앙을 이끌어 나가면, 하느님의 은총은 그에 따라 저절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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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가 떠올리게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예언자의 언어는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있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유일무이한 ‘현재적 시점’에서 대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예언자의 말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시급성을 지니는 이유입니다. 예언자의 언어는 그의 존재와 삶 모두를 지극히 생생하게 간직하는 육신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더없이 투명합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정화되어 오롯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담는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말을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지금 여기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음성’과 ‘얼굴’에 사로잡히는 것을 뜻합니다. 예언자의 말은 육신을 취하신 말씀을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탁월하게 밝혀 주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복음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당신께서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고 계십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있으나, 다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그분의 얼굴은 우리의 파악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의 목소리가 전해 주는 하느님의 얼굴은 여러 모습인 듯하고, 모순적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자비와 정의, 심판과 용서의 말씀이 한꺼번에 우리에게 쏟아집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모순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예언자의 말을 인간의 말로만 알아들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언어를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대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의 습관적인 삶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하는 삶을 체험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에게 모순으로 보였던 하느님 얼굴의 살아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바로 지금, 예언자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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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버림받은 이들을 안아 주시고, 상처 입은 이들의 상처를 싸매 주셨습니다. 또한 용기를 잃은 이들을 격려하시어 일으키셨으며, 죄인들을 사랑으로 맞아 주시어 그들이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는 예언대로 마음이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의 본성에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슨 좋은 일을 하면 다른 이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반대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하고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면서도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숨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오셨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목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지향한 것은 화려하고 힘이 있는 세상의 권력가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종의 길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길이 나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분은 바로 그러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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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세 가지 눈길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리사이들의 눈길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바로 살인의 눈길입니다. 그러한 눈길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행동이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의 눈길입니다. 부러진 갈대처럼, 연기 나는 심지처럼 아파하는 눈길이며, 그래서 치유를 바라는 절실한 눈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병이 낫게 되리라는 믿음의 눈길입니다. 그러나 병만 나으면 그만이라는 자기중심적인 눈길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바로 예수님의 눈길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온갖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용기와 신념의 눈길입니다. 또한 병든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동정과 연민의 눈길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다른 이들에게 영웅으로 대접받으시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에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십니다. 곧 오로지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시는 눈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사이들과 군중은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준과 상황에만 매달리는 눈길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만을 바라보시며 아픈 이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의 눈길을 지니고 계십니다.
우리는 어떤 눈길을 가지고 있습니까?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좋은 관계 나쁜 관계가 있을 뿐이다.”
사람 자체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 대한 비난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참 나쁜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비난하는 대상은 제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과 너무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저와의 관계 안에서는 아주 좋은 사람입니다.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살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복잡한 것이 싫다며, 상처받기 싫다면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또 관계를 맺지 않아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큰 착각입니다. 이 관계의 단절을 통해 ‘좋은 사람’ 한 명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따지기 전에 좋은 관계를 맺으려는 나부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관계를 만들지 못하면서 세상과도 단절되게 되고, 결국 주님과도 단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어지는 것은 ‘나’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좋은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 비결은 사랑하는 이, 그리고 내 마음에 드는 이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투지도 또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셨습니다. 그 결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와도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을 따르면 됩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이로 또 마음에 드는 이로 살면 됩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관계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얻어야 할 것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얻는 것이 있어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얻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에 있을 때는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 관계에서 희망이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있을 때는 어떤 것 같습니까? 절대로 후회하지 않습니다. 지금 후회하고 있는 것은 함께하고 있지 않아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어떠어떠하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할 때, 그것은 실제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생각이다(스즈키 순류).
행복
세계의 유명 대학에서 ‘행복학’ 강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이 강의에는 많은 학생이 수강해서 듣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행복에 관한 연구를 정리해보면, 행복의 비결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 행복은 우연히 얻는 행운이 아니라 훈련과 습관으로 얻을 수 있는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운동하기, TV 안 보기, 감사 편지 쓰기 등, 자신의 생활 습관을 바꿔서 행복해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국 BBC 방송에서 행복 실험을 통해 ‘연습할수록 느는 것, 행복은 삶의 습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둘째, 행복은 삶에서 만나는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즐거움만을 추구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스러운 것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받아들일 때 온다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사람의 훈련과 성장의 결과로 누리는 것이지, 뜻밖의 행운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행복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며 성장하고 계십니까?
인간의 악행에 대한 하느님의 단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과 구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미카 예언서는 12 소예언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소 예언서의 예언자라고 해서 이사야나 예레미야처럼 대 예언서의 예언자들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위대하다는 것을 결코 아닙니다.
소예언서란 칭호는 예언서의 길이가 짧다는 것 이상의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열두 소 예언자들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8세기부터 5세기 사이 300여년간입니다.
미카 예언자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모레셋이라는 시골 출신 예언자였습니다. 남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로 유다 임금 요탐, 아하즈, 히즈키야에 걸쳐 활동했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시골 출신 예언자답게 서민 편에서, 서민의 관점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활동 장소도 왕궁이나 성전보다는 서민들이 많이 왕래하는 시장이나 도심 거리였습니다.
미카 예언자의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힘과 권위를 향유했던 예루살렘의 고관대작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지배 세력들이 주님께서 세워주신 규정들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사욕만을 추구하고 있다면서 그들의 악행을 신랄하게 고발했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왕과 지도자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재물로 삼아 그들의 피로 예루살렘을 세우고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예언자들과 사제들은 자신의 직분을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악행들과 죄악들은 주로 고대 근동의 주변 민족들이 채택한 왕정 제도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의 절대 군주들은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자신이 왕으로 선택된 것을 주님의 뜻으로 돌리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왕권을 특권으로 여겼을 뿐, 봉사나 섬김의 직무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왕을 비롯한 주변 소수 특권층을 위한 강제 노역에 동원되었고, 그 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이집트에서의 강제 노역에서 해방되면서 ‘이제는 삶이 좀 나아지겠지?’ 기대했었는데, 웬걸!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나서, 왕정 제도가 자리잡으면서 그 정도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임금들은 앞다투어 자신의 임기내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짓기 위해 발버둥쳤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봉헌하고 경신례를 성대하게 봉헌하기만 하면 주님의 축복이 자동적으로 뒤따르리라 착각했습니다. 고대 근동의 풍산신(豐産神)들은 왕정 제도의 폐습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이런 그릇된 풍조를 거슬러 미카 예언자는 외친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평등과 정의입니다. 여러분들이 끝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의 진노를 피할 길 없을 것입니다. 악행과 오만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지난 악행을 크게 뉘우치고 지금이라도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그분께서는 여러분들을 죽음의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이 족속을 거슬러 재앙을 내리려고 하니, 너희는 거기에서, 목을 빼내지 못하고, 으스대며 걷지도 못하리라. 재앙의 때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너희는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조롱의 노래를 부르고, 너희는 서럽게 애가를 읆으리라.”(미카 2장 3~4절)
미카 예언서를 읽고 묵상하다보니 하나의 사이클이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악행에 대한 하느님의 단죄와 심판, 그리고 회복과 구원!
주님께서는 공정하시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비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악인의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반드시 따지시지만, 결국 인간이 회개하고 당신께로 돌아와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옳은 말만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듀크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앤지와 퍼시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말하다가 퍼시가 앤지에게 대학교 때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앤지가 퍼시에게 “그러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야?”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퍼시에게서 앤지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지와 퍼시는 아파트를 떠나 리치몬드 처치 힐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도심지로 이사했습니다. 처치 힐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쇠퇴한 소위 할렘가였고 흑인들만 거주했으며 많은 이들이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퍼시와 앤지는 먼저 어린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퍼시는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에게 농구를 시작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조금씩 처치 힐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들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퍼시의 뒤를 따라왔고,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15명이나 퍼시의 귀가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은 퍼시와 앤지가 자신들의 숙제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집을 개방하여 아이들이 원할 땐 언제든지 그 집에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은 퍼시와 앤지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백인 커플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는 퍼시를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경찰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퍼시와 앤지는 굽히지 않고 자원봉사자까지 구해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CH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CHAT은 상주직원 45명과 자원봉사자 수백 명, 운영예산 25억 원의 기관으로 성장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으로 처치 힐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참조: ‘유쾌함의 기술’, 앤서니 T. 디베네뎃, 유튜브 ‘책한민국’]
앤지와 퍼시는 소위 사회적 ‘루저’(Looser)가 되어버린 동네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백인사회에 속해있으며 그들에게 설교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들도 우리 백인들의 도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어!”
퍼시와 앤지 커플은 말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용기를 줄 수도, 재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류의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들의 박해에 대해 “감히 하늘의 왕에게 이런 대접을?” 하며 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숨고 숨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박해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분명 올바름을 선포하셨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말이 아닌,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말을 많이 하므로 재수 없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접속’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의 속도가 빠르지만 그때는 동영상을 볼 수 없었고, 음악을 다운 받는 것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당시에는 천리안, 유니텔, 나우누리, 하이텔과 같은 접속의 창구가 있었습니다. 이런 창구를 통해서 동창을 만나고, 취미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나이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종교가 같은 사람이 만나고, 직업이 같은 사람이 만났습니다. 주인공들은 컴퓨터를 통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주인공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만나다가 현실의 공간에서 만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났습니다.
당시에 저도 천리안이라는 통신을 이용해서 가톨릭 동아리에 참여했었습니다. 지금은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텔레그램과 같이 전 세계의 모든 이들과 연결이 되는 접속의 창구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접속’의 일상화인 것 같습니다. 자동차도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운전하기가 수월해졌습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이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코로나19와 같은 상황에서는 영상으로 미사를 볼 수도 있습니다. 미주지역의 사제 모임도 화상으로 했습니다. 접속하기만 하면 서부에 있는 사제도, 남부에 있는 사제도, 동부에 있는 사제도 쉽게 얼굴을 볼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접속에는 부정적인 요인도 있습니다. 해킹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신부님도 핸드폰이 해킹되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번호로 광고 문자가 대량으로 발송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아야 했고, 본의 아니게 사과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심어지기도 합니다. 원하지 않는 광고를 봐야하고, 잘못하면 금전적인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던 보이스 피싱도 있습니다. 저도 보이스 피싱에 속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단계에서 눈치를 챘습니다. 아이들이 게임에 접속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감당할 수 없는 요금이 청구되기도 합니다. 접속의 시대를 피할 수 없다면, 지혜로운 접속, 슬기로운 접속을 하면 좋겠습니다. 찾아보면 영적으로 도움이 되는 곳이 많습니다. 가톨릭 굿뉴스도 신앙에 도움이 되는 접속 창구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어 주었던 ‘헨리 나웬’신부님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고, 많은 보수와 명예가 보장되는 교수직을 제안 받았지만 장애인들을 위한 공동체로 가셔서 장애인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사람들이 신부님께 어째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을 포기하시고,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신부님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제가 높은 곳을 찾고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는데, 낮은 곳을 향해 내려오니까 더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은 어쩌면 엉뚱한 곳에서 진리의 보물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작은 마트에서 일하는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 역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제가 장사를 잘하고, 돈을 많이 벌었을 때는 하느님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이 힘들어지고 부도가 나니까,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신을 원망하면서 오히려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물질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마음이 더 편안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하니까 미웠던 사람도 용서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권력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향해서 날아가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늘 미가 예언자도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악을 일삼는 자들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결코 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이 눈앞에 있어도, 진리와 정의가 눈앞에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순수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보였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는 참된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 기도로 접속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재앙과 재난을 보시고, 손수 나서시려 살피고 계시나이다. 힘없는 이가 당신께 몸을 맡기고, 당신은 친히 고아를 돌보시나이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힘 있는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홀로 선 그분을 따랐다
그분을 따르다가
그분과 함께 죽을 수도 있을 텐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분을 붙잡아
바리사이들에게 넘기면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분과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하며
제 것 챙길 수도 있을 텐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분이야 죽든 말든
바리사이야 죽이든 말든
저만 살면 될 텐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렇다면 나는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면서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셨지만 바리사이들은 그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욕심이 앞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등 자신들이 지켜오면서 만들어 왔던 율법적인 삶의 기득권을 흔들었고, 백성들을 선동하는 메시아로 여겨지면서 로마로부터 더 많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인간적인 욕심이 앞서게 될 때 어쩌면 다가온 구원의 기회마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늘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삶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진정한 주님의 공동체라면 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도직에 함께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이루어가시게 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잃어버린 사람이 희망의 이름을 듣고 한 둘이 일어나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 따라 나섰다. 그분을 따라 나서다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병이 나았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고 그럴 때마다 희망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일렀다.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치유받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 일이던가?
부러진 갈대 신세, 심지의 불이 꺼질려고 깜박거리는 신세, 잃어버린 사람들이 낫기를 바라며 무리지어 따라 나섰다. 잃어버린 사람이 군중을 이루며 희망의 이름을 부르며 따라 나섰다. 그분은 동방의 박사들이 먼 길을 걸어 찾아와 예물을 드렸던 희망의 이름, 예수님이다. 헤로데가 물었다. 그분이 태어나신 곳을 알게 되면 나에게 꼭 알려주시오. 그것은 음모였다. 희망의 이름을 시작부터 없애 버리려 했었다. 요즘에 복음은 심상치 않다. 헤로데 숫자가 군사를 이루고 나타났다. 바리사이였다. 잃어버린 군중들이 생명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바리사이가 놀라서 물었다. ‘그분이 어디 계시냐? 알려주면 우리도 찾아 인사하겠다. 그것은 음모였다. 구실을 잡아서 또 희망의 이름 예수를 중도막에서 없애버릴 방도를 찾기 위함이었다.
전통은 좋은 것이다. 전통은 말한다. 복고풍이 좋다고 말이다. 그러나 복고는 좋은 것은 아니다. 세월 속에 너무 고루하게 되었다. 복고는 희망의 이름 때문에 자기것 부러지고 불이 꺼져 존재감 없어질까 봐 다시 중도막에서 희망을 자르려 한다. 보수와 진보는 하나이다. 복고와 급진은 좋은 것이 아니어서 지키고 새롭게 나아가려 함께 희망아어야 한다. 병고 중에 신음하는 잃어버린 사람이 너무 많은데 복고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모두 희망의 이름을 불러보자.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20-21)
군중은 바리사이를 떠나고 희망의 이름 예수께 길을 묻는다. 그러나 군중은 여전히 어리석다. 마귀는 그것을 노리고 군중과 합세하여 희망을 없앨 방도를 찾는다. 그럴때면 부활은 멀게만 보이지만 언제나 우리 가운데 부활이 있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건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인간의 지도자들과 예수님과의 대비가 두드러집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사회적 불의에 대한 주님의 노여움을 날 선 언어로 전달합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미카 2,1-2).
이스라엘은 왕정이 들어서면서 차츰 계급적 구조가 선명해집니다. 야곱의 열두 형제에서 출발한 형제적이고 동맹적인 질서는 왕궁을 둘러싼 권력과 기득권, 재산에 따른 서열로 재편되지요. 그 과정에서 빈부의 차가 심해지고, 소위 부유층 지도자들은 약한 이를 착취하고 억압하여 가진 것을 더 불려나갑니다. 주님은 미카 예언자를 통해 이를 격렬히 비난하시지요.
우리는 복음에서 완전히 다른 모습의 지도자, 메시아를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마태 12,15).
예수님을 없애자고 모의가 시작되자 예수님께서 조용히 물러나십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아닌 까닭이지요. 그런데 많은 군중이 굳이 물러나시는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왜 원래의 기득권 세력인 바리사이나 최고의회 구성원을 추종하지 않고 힘 없이 피하시는 예수님을 따를까요? 자칫 줄을 잘못 서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바로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힘 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 진리를 갈망하는 이들이 그분께 모여드는 것입니다. 제도적 정식 계보나 연줄도 없고 요란한 제스춰나 인기영합적 마케팅도 할 줄 모르는 분이지만, 가난과 연약함과 부족함을 포용하고 일으켜 주시는 분이기에 군중은 예수님께 끌립니다.
군중은 권력자나 부자들에게는 의무를 이행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는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드립니다. 인생사 산전수전 겪다보니 저 위에서 떵떵거리고 큰소리치는 이들에게 더는 희망을 걸 수 없다는 걸, 아프게 당하면서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군중은 그렇게 거두어들인 믿음과 희망을 새로 등장한 가난뱅이 설교가에게 쏟으며 간청하고 매달립니다. 그러니 외적으로는 권력자와 부자가 구원자처럼 보이지만 실상 민중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그들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이는 예수님이시지요. 바로 진정한 메시아십니다.
사회 계층 간의 격차는 오늘날이나 그 옛날 성경의 시대나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겠습니다. 세상에서 가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들을 착취해 부를 축적하는 기득권 세력 또한 함께 이어질 겁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이 더 무게감을 가지고 다가오십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네"(복음 환호송).
먼저 우리 사이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상급자와 하급자, 남성과 여성,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의 구분이 없어져야 합니다. 구분은 대립과 분열을 야기해 결국 서로 적대하는 문화를 만들고야 말지요. 그건 분명 악의 짓입니다.
우리 모두가 생명을 부여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 하느님 모상으로 지음받은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반해 타인을 대하며 살아간다면 온갖 차별과 착취, 혐오, 무시 등의 악마적 자취는 우리 사이에 발을 들이밀 수 없을 겁니다. 우리가 서로를 조심히 대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마태 12,19).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에게서 배웁시다. 그분의 온유함, 평화, 자비, 인내는, 거친 고함이나 자극적 공격, 조롱과 비난 따위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조심스레 마음을 다해 미소하고 약하고 가난한 이를 돌보고 보호하시는 주님과 함께 우리도 서로를 포용하고 지켜주면서 함께 성장할 것입니다.
세속적 손해를 감수하면서 이미 예수님의 온화하고 자애로운 사랑의 길을 걷고 있는 벗님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받는 성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성사론’에서 (Nn. 52-54. 58: SCh 25 bis, 186-188. 190)
우리는 은총이 자연보다 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예언자의 축성이 지니는 은총만을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는 축성이 자연을 변화시킬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성사를 이루는 구세주 자신의 말씀으로 행하는 신적 축성은 얼마나 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받는 성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엘리야의 말이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자연물의 본성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지 않겠습니까? 온 우주의 창조에 대해 “주의 말씀 계시자 이루어졌고, 주의 명이 계시자 존재했나이다.”라는 성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무에서 창조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그전과 다른 것으로 변화시킬 능력이 없었겠습니까? 사물에다 존재를 부여하는 것은 사물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철학적 논증을 사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 친히 보여 주신 예, 특히 그분의 육화 신비의 예를 들어 이 성사 신비의 진리를 증명해 봅시다. 주 예수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을 때 그것은 일반적 자연의 이치에 따라 된 것입니까? 자연의 이치에 따르면 여자는 정상적으로 남자와 관계를 가진 후에 잉태합니다. 그런데 동정녀께서는 자연의 질서를 넘어 잉태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서 이루는 것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몸입니다. 주 예수께서 자연의 질서를 넘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면 왜 성체에서 자연의 질서를 찾아야 한단 말입니까? 성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신 그리스도의 참된 살입니다. 즉 그분의 몸의 성사입니다.
주 예수 친히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상의 말씀으로 축성하기 전에는 하나의 자연물에 불과하지만 축성 후에는 그분의 몸을 뜻합니다. 주님 친히 “이는 내 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축성 전에는 자연물에 불과하지만 축성 후에는 피라고 불리웁니다. 여러분은 “아멘.” 즉 “정말 그렇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을 마음으로 고백하고 말이 뜻하는 것을 마음이 느끼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이다지도 큰 은총을 보는 교회는 자기 자녀들과 이웃들에게 “벗들아, 먹어라. 술을 마셔라. 사랑하는 사람들아, 취해들 보라.” 하고 말하며 함께 성사로 달려갈 것을 권고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무엇이고 마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령께서 예언자의 말씀을 통하여 제시하십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님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이 성사는 그리스도의 몸의 성사이기 때문에 이 성사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십니다. 이것은 물질적 양식이 아니라 영적 양식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구약에서 나오는 성체의 예표에 대해 “우리 선조들은 모두 영적 양식을 먹었고 또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몸은 영적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느님의 영의 몸입니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시는 영”이시라는 성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전서에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언자가 기록한 대로, 이 양식은 “심기 돋우어 주고” 이 음료는 “마음을 흥겹게 해줍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저의 지난 날을 되돌아보면, 저는 객관식 시험을 잘 못보았던 같습니다. 주관식 시험은 제가 알고 있는 것과 하고 싶은 말을 다 쓸 수가 있어서 좋았는데, 객관식 시험은 이것도 답인 것 같고 저것도 답인 것 같고 해서 그런지 잘 맞추지 못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제가 생각이 많아서 그럴 수도 있다고들 합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오는 메시아의 표상을 예수님께 맞춰서 이야기 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8-21; 이사 42,1-4 참조)
예수님을 가리켜 한 이 예언에서 특별히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20절)라는 글귀가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어딘지 모르게 저같이 모자란 사람, 부족한 사람, 잘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내치지 않으시고 받아주신다는 소식이 너무나 위안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도 성 베드로가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라고 하신 말도 이해가 되고, 진정 우리 모두를 하나도 잃지 않고 다 감싸안으시는 주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함승수 신부님
요즘 길을 걷다가 보면 '향'(香)이 나지 않는 빈 껍데기 같은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소설 <향수>에 나오는 '그루누이'도 아니고, 이 세상에 아예 향이 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정말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향'(香)이란 코로 맡는 '냄새'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말과 행동으로 향기처럼 내뿜는 고유한 인품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번화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멋쟁이'들, 고급 브랜드가 박힌 멋진 옷을 입고 군살 없는 근육질 몸매를 자랑하는 남자들이나, 저같은 사람은 그 이름조차 제대로 외우기 힘든 미묘한 컬러로 화장을 짙게 하고, 명품 향수를 잔뜩 뿌린 여자들에게서는 '향'(香)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아무런 향도 없이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박제'되어있는 조화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안에 내뿜을 무언가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에, 그 헛헛함을 채워보고자 겉모습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일테지요.
그런가하면 평범한 외모에 옷도 수수하게 입고 다니지만,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눠보면 속이 아주 깊은 사람이 있습니다.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상대방을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집중하며 듣는 진지한 태도,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해 깊은 소양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것을 자랑하듯 뽐내지 않는 겸손함,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라는 독선이나 고집에 빠지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두루 관심을 가지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유연함과 성실함. 그런 모습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 겉모습만으로 다 규정하거나 담을 수 없는 깊은 매력이 뿜어져 나옴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내적인 '향'(香)을 갖추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지만, 그러기는 참 어렵지요.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분의 '종'으로서 예수님이 걷고자 하시는 소명이 어떤 모습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지양'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언성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모습, 말로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다른 이들 앞에서 떠들고 다니지만 실제 모습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언행 불일치'된 모습은 예수님이 걷고자 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지향'하시는 모습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인지를 생각하며 그런 것을 선택하고자 하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게 되더라도 그들을 섣불리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자비'임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을 지니고,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사랑을 실천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희망을 걸고,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우리가 지녀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라는 존재가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향'(香)처럼 내뿜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종. -예수님처럼 한결같이 삽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사랑 우리 위에 굳건하시고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
아침 시편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 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참나의 참사람에 참행복입니다. 제가 요즘 참 행복한 일은 예수님과 함께 형제자매들 사진을 찍어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진 찍고 은혜받으세요” 권고와 더불어 집무실에 면담차 들리는 대부분 분들에게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한결같이 걸려있는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 서게 한 다음 ‘사랑의 사진사’가 되어 사진을 찍어 드립니다.
아주 예전 교대시절 친구가 교장으로 마지막으로 봉직했던 서울교대 부국 조그만 동산에 묘비석 비슷한 돌판에 새겨진 “한결같이”란 글자가 눈에 선합니다. 평생 많은 이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한결같이 살아 온 삶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분도회 정주서원 역시 초지일관, 시종여일의 한결같은 삶을 목표로합니다. 바로 이런 삶이 가장 확실한 구원의 표지입니다. 얼마전 써놓은 글이 생각납니다.
-“수십년
평생을 함께 살아왔어도
덥든 춥든 흐리든 맑든 비오든 눈오든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는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늘 한결같다
불암산!
주님의 종 예수님이 그러하셨다
나도 그렇다”-
늘 거기 그 자리 변화무쌍한 하늘 배경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불암산은 정주의 표상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일이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성실한 정주의 삶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이웃에겐 위로와 평화, 치유의 구원이 됩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습니다. 참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는 늘 적대자들의 사면초가의 위험속에 지내셨지만 한결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그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정면 대결을 피하시고 잠시 물러나 기도로 충전하신후 지혜로이 제 길을 가시곤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의 한결같은 모습에서 제자들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님의 종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일 뿐 아니라 주님의 종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 한결같은 삶입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18-21)
그대로 예수님의 한곁같은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결코 일희일비함이 없이 주어진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조용히 소리없이 충실하신 모습입니다. 배려와 존중, 겸손과 지혜, 고요와 침착, 연민과 인내의 주님의 종 예수님의 한결같은 모습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참으로 이런 한결같은 삶이 있기까지 성령의 은총은 물론 얼마나 항구한 노력이 있었겠는지요. 무엇보다 간절하고 절실한 끊임없는 기도의 수행입니다. 저절로 주님의 종이 아니라 이런 한결같은 기도의 삶중에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한결같은 주님의 종,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이런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가 됩니다. 언제나 이런 예수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가능한 한결같은 성실과 진실, 절실의 삼실의 정주의 삶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을 잊을 때, 잃을 때 무지의 어둠, 절망의 어둠에 휘말립니다. 희망의 빛이 사라지면 절망과 허무의 어둠입니다. 탐진치貪瞋癡의 무지의 삶에 자기를 잃습니다. 바로 미카 예언자기 개탄하는 현실이 됩니다. 예나 이제나 계속되는 불의와 탐욕의 악순환입니다. 미카 예언자의 절규와 같은 다음 말씀은 저주가 아니라 회개의 촉구입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 마자 실행에 옮긴다.”
‘행복하여라’라는 행복 선언과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사필귀정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어김없이 재앙을 선포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즉각적인 회개로 불의의 삶에서, 무지와 탐욕의 어리석은 삶에서 탈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무엇보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을 통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주님의 빛속에 사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알려준 주님의 종 예수님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과 함께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은 정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필립2,15). 아멘.
하느님의 참된 아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구약의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긍심을 잃지 않기 위해 유배 시절의 쓰라림을 딛고 다윗의 영광을 재현해줄 메시아를 애타게 갈망했습니다. 마치 일제 식민 시대에 해방을 갈망했던 우리 민족의 역사와 비슷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업적을 지켜보던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추앙하고 싶은 바람이 강렬하게 타올랐을 것입니다. 열두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바라던 힘과 권력의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예수님의 행보에 당혹해했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군중들은 자신들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몰아세우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분을 신성모독으로 옭아매 죽일 결심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하느님의 선택된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라며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고 선포합니다. 이 선포는 결국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제자들의 열정적인 복음 선포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고 있는 바로 이 현실이 복음의 진리를 밝혀줍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기로 약속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삶으로 증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워지려거든 침묵해라 <마태 12, 14-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말을 서둘러서 하고,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여 가짜 뉴스에 속고 실없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잘 모르고 함부로 말해서 많은 오해를 만드는 것보다 때가 되어 확실히 알려지기까지 침묵을 지키라는 말씀은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하심입니다. “당신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하십니다.
과장법이 심해서 하나 알면 열을 안다고 떠벌려서 실수하고, 본질을 거스르는 일이 있습니다. 유튜브에 몇 달 전부터 이북의 김정은이 “죽었다. 병들었다.” 야단들인데 침묵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 말을 받아 떠버리는 사람은 똑같이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떠들고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기다리며 결과를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고 침묵 속에 깊이 생각하고, 알아보고, 판단하는 습성을 키워야 합니다. 바른 판단은 오랜 경험에서 나옵니다. 교과서적 판단, 편견을 가진 사람의 말에 따라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말할 때가 있고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분별이 없으면 해야 할 말을 하지 않아서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올바른 성장을 방해할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함으로써 분열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말하기 전 침묵은 지혜의 원천이 됩니다.
할 말을 하기 위해서 침묵은 하느님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침묵 중에 계시다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서히 말씀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완전한 뜻을 주님을 통해 전달하셨으며, 못하신 말은 성인 성녀들 통해 전달하고, 교회의 권위 있는 지도자나 학자들 통해 전달합니다. 하느님은 아직도 말씀을 준비하시며 전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너무나 성급하게 생각하고 말하면서 자기를 드러내고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말의 실수는 조급함, 성급함, 자기 자랑에서 나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급한 사람이어서 주님의 말씀에 앞질러 말하다가 마지막에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는 말을 하게 됩니다. 말과 같이 행동도 생각 없이 행하면 다른 이의 빈축을 사고, 신용을 잃고, 세상을 분열시킵니다.
그러나 지도자나 말을 듣는 사람은 겸손하게 경청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진, 선, 미의 근원이신 하느님 말씀을 지나가는 물결이나 바람으로 알고 들으면 믿음을 굳게 하지 못합니다.
깊은 말, 지혜로운 말을 하고자 하면 “나 다 알아. 너보다 더 잘 알아” 하면서 귓등으로 들으면 안 되는 것같이 침묵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말과 함께 지혜롭게 듣는 자세도 갖고 있습니다. 대화시간에 자기 말을 더 많이 하거나 상대의 말을 귓등으로 듣는 사람은 침묵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저는 요사이 상담도 없고, 말하는 시간이 없어서 다시 깨닫게 된 것은 공동기도 시간 전 30분 침묵시간, 잠들기 전 깊은 침묵시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말을 하고, 듣기 위해 침묵의 시간을 사랑하도록 기도합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희망해야 할
희망이 여기에
있습니다.
유일한 희망이
우리를 살립니다.
가장 힘든 때
가장 절박한
희망을 만납니다.
희망은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놓는
희망입니다.
희망을 힘차게
선포하십니다.
희망은
희망을 믿고
실천할 때
더욱 풍요롭습니다.
희망의 중심에는
나눔이 있습니다.
나눔이신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다시 희망을
나눕시다.
희망의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필요한
희망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희망과 더불어
희망을 향해
나아나는 참된
희망의 날
되십시오.
종종 신부님의 강론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계신 분들을 만납니다. 강론 시간이 너무 짧거나 길다는 불만, 강론 내용에 대한 불만, 강론 할 때의 신부님 자세에 대한 불만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신부님의 강론에 대해 좋다 나쁘다 등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강론을 하는 사제이다 보니, 강론을 준비하고 또 신자들 앞에서 강론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런 경험도 해보지 않은 사람일수록 그 일에 대해 남에 대한 판단을 많이 하게 됩니다. 권투 경기를 보면서 한 번도 링 위에 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누구보다 흥분해서 그 선수에 대한 욕을 많이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권투를 해 본 사람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선수를 향한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잘 모르기 때문에 남에 대한 판단을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알려고 하는 노력도 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어리석은 사람의 길을 쫓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더 함부로 주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합니다.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성경을 읽어보았을까요? 또한 가톨릭 교리와 교회법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 또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작은 판단을 내세워서 하느님이 없다고 쉽게 말할 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앨까를 모의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쁜 행동을 하신 적도 없었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잘못된 말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어렵고 힘든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말씀이었고, 기쁨 안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행적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는데 모의를 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판단만을 내세우면서 감히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판단하고 단죄하려는 것입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불평불만을 가지면서 원망을 자주하고 있다면 분명 또 다른 모습으로 주님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 성경이나 영적독서 읽기,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는 것 등 우리의 노력들이 주님을 환하게 알 수 있게 하며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에 희망을 거는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오늘의 명언: 어떠한 일도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알의 과일, 한 송이의 꽃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무의 열매조차 금방 맺히지 않는데 하물며 인생의 열매를 노력도 하지 않고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다(에픽테토스).
지금과 다른 미래를 만나기 위해....
지금과 똑같이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이상한 점 하나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미래를 꿈꾸고 또 기대하면서 지금 우리는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살고 있으면서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 과연 합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한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바꿔야 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아닌 다른 지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바뀌기를 기대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뀐다고 해도 스스로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바뀐 것도 모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다른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까? 그 미래를 구체적으로 떠올려보고 이를 위해 지금 내가 어제와 다르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지금과 다른 멋진 미래를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분노에 더디시고 인내에 충만하신 분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인간이 자신의 근본인 주님으로부터 나왔다가, 다시금 자신의 원천인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신앙 여정 안에서, 참으로 다행스럽고 은혜로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하늘을 찌르는 배은망덕과 불충실, 그 큰 배신과 반역 앞에서도,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보여주시는 인내의 한계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 아이들이나 형제들의 부족함과 미성숙으로 인해 벌어지는 안타까운 일들 앞에 때로 분노하고 때로 인내하면서, 손톱 만큼이나마 우리 인간을 향한 주님의 크신 자비와 인내를 헤아려 보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인내에 충만하신 분, 벌하시려다가도 우리를 향한 측은지심으로 크게 마음을 바꾸시는 분, 그저 인내하시고 또 참아내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주님 두려운 줄 모르는 사람들, 별 것도 없으면서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사람들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얼마나 기막혀하실까 걱정됩니다. 난다 긴다 기고만장한 우리들이지만, 사실 속빈 깡통같은 우리들의 모습 앞에 주님께서 느끼시는 슬픔은 크실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솔직히 우리는 주님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 손바닥 위에 놓인 존재들입니다. 그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왔고, 그분의 크신 은혜 속에 하루하루 연명해갑니다. 그분 한 말씀으로 펼쳐져있던 파라솔 접히듯 우리네 인생은 순식간에 끝나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분, 이 세상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분,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반역과 배신 앞에 그때 그때 분노하시고, 순간 순간 우리의 죄대로 처벌하시려 한다면,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멀쩡하게 남아있을 사람 없을 것입니다.
마치 먹잇감을 눈 앞에 둔 하이에나 떼처럼, 살기 등등한 눈초리로, 사사건건 트집잡고, 수시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폭력을 행사했던 율법학자들•바리사이들의 모습과, 한없이 조용하고 순박한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비교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오 복음 12장 19~21절)
감사하게도 우리의 주님은 적대자들의 비열하고 졸렬한 모습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의 초라함 앞에 예수님은 위대하십니다. 그들의 편협함과 예수님의 관대함이 두드러집니다. 그들의 극에 달한 증오와 예수님의 한량없는 사랑이 비교됩니다. 외적으로는 조용하고 굴복하는 듯 하지만 사실 빛나는 승리의 길을 걸으신 분, 그분은 모든 민족들이 희망을 거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이 보는 희망은 나의 투쟁의 열매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돈 부부에게는 로렌조라는 5살 난 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불행이 닥쳐오는데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ALD라는 진단을 받게 되고 2년 안에 죽게 된다는 비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치명적인 죽음의 질병 앞에 오돈 부부는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돈 부부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ALD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관련된 서적도 적고 전문의들은 조직화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ALD 심포지엄을 조직하기에 이르고 그들이 전문가가 됩니다.
오돈 부부는 ALD가 나쁜 지방산이 배출되지 않아 뇌에 축적되며 생기는 병이므로 나쁜 지방산을 제거해 주면 되지 않겠냐는 논리에 다다릅니다. 효과는 있었지만 나쁜 지방간 수치가 절반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쳐갔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1984년 4월, 로렌조 아버지는 식용이 가능한 불포화 지방산을 발견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고 생화학자에게 의뢰하여 하루도 쉬지 않고 연구한 끝에 1kg의 소중한 기름이 오돈 가족에게 보내집니다. 그 이후로 이 기름은 ‘로렌조 오일’이라 불리고 ALD를 앓고 있는 모든 소년들에게도 공급되고 있습니다.
이 기적을 탄생시킨 오돈 부부는 의학지식은 전혀 없는 부부이지만 아들에 대한 깊은 사랑 하나로 전문의도 해낼 수 없었던 의료 역사상 길이 기억될 업적을 탄생시켰고 로렌조는 호흡기를 떼고 눈 깜빡임으로 의견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호전되어 30살까지 생존하였습니다.
[참조: 영화 ‘로렌조 오일’(1992)]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는 나의 절망과 싸워야합니다. 내 절망은 ‘너는 안 될 거야.’란 생각입니다. 그 생각과 끊임없이 싸워야 상대에게 ‘넌 할 수 있어.’란 말을 해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의 부모가 한 아이를 위해 저런 큰 싸움을 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실까요? 죽음도 불사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신 희망을 우리는 저버리지 말아야합니다. 그분이 주신 희망은 그분의 죽음과도 같은 싸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큰 희망을 가지고 계신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블랙’이란 영화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해 짐승처럼 사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종을 달아줍니다. 어디에서 사고 치는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를 고쳐보겠다고 온 선생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가 아이를 짐승 취급하는데, 누가 아이를 존중해주겠습니까?”
이 영화는 헬렌 켈러를 모티브로 합니다. 헬렌 켈러에게 희망을 가졌던 이는 자신이 그런 비슷한 경험에서 빠져나왔던 설리반 선생이었습니다. 설리반 선생은 아이였을 때 정신병원에서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건들기만 해도 발작을 하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병원에서는 ‘로라’라는 할머니에게 그 아이를 맡깁니다. 그 할머니는 애니(설리반)가 동생이 죽은 후 그런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애니는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지만 병원은 무관심합니다. 로라는 애니를 집으로 데려가 엄마처럼 돌보아줍니다. 애니는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남은 건 동생뿐이었는데 동생마저 죽자 너무나 무서웠다고 합니다. 로라는 애니를 안아줍니다. 애니는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은인을 만나 눈을 치료하게 되었고 48년 동안 헬렌 켈러의 스승이 됩니다.
상처받은 치유자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은 치유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투쟁으로 우리가 희망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 희망은 내 안의 절망을 이길 때 발산됩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타인에게 힘을 줄 수 없습니다. 기적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희망을 가진 자만이 줄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은 누군가의 희망으로 내 절망이 치유되었을 때 가지게 됩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희망은 내 안의 절망과 싸우게 만듭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싸우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누구든 불가능은 없다고 믿어줍시다. 우리도 많이 변했습니다.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구원될 거라는 희망을 가집시다. 나도 구원받았지 않았습니까? 마더 데레사는 온 천국을 가난한 사람으로 가득 채우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면 희망합니다. 희망하는 만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대를 놓게 될 때 사랑도 놓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랑도 절대 꺼지지 않습니다. 스와일리 전사의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투쟁하는 삶만이 의미가 있다. 승리냐 패배냐는 신이 결정할 일이니, 투쟁을 축하하자.”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랜 시간 사찰에서 염불하고, 목탁을 치고, 설법하던 스님이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주막에서 오랜 시간 웃음을 팔고, 술을 팔고, 안주를 팔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죽었을 때 스님은 극락으로 가고, 여인은 지옥으로 갔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스님은 지옥으로 갔고, 여인은 극락으로 갔습니다. 두 사람의 지향과 갈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목탁을 치지만 마음은 주막에 가서 술을 먹고 싶었고, 여인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여인은 술은 팔지만, 마음은 스님을 부러워했습니다. 스님처럼 염불을 외우고, 사찰에 머물고 싶어 했습니다. 스님의 염불은 공염불이 되었지만, 여인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가르치고, 성전에서 지내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자신들의 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단식은 하지만 단식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세리들을 받아 주셨고, 복음을 전하는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생각과 기준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의를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성서를 어떤 분들은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세상을 다스릴 사람을 당신의 모습을 닮도록 만드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고, 그로 인해 죄와 죽음이 생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의 결과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때로는 직접 사람들을 고통과 절망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인도하셨으며, 때로는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역사의 순간에 함께 한 사건이 모세를 통한 이집트의 탈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였습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틀을 벗어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의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제물이 되셨고, 우리에게 성사를 남겨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표지인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구체적인 표지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바로 하느님 백성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다른 의미로 ‘신비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다른 교회 모두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한 몸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각 교회는 다른 교회를 위해서 도움을 주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몸이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고, 치료하듯이 신비체인 교회는 다른 교회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런 신비체인 교회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게 됩니다. 그로 인해 가톨릭 사회교리가 생겼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연대성의 원리, 보조성의 원리를 통해서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를 위해서, 도시 빈민을 위해서, 장애인을 위해서 교회가 함께 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한 몸을 이룬다는 신비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파스카’라는 말은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절망, 고통, 좌절, 슬픔에서 기쁨, 희망, 위로, 행복으로 건너간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파스카’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는 파스카의 신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함께해야 할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편에 계셨습니까? 낮아지지 않는 영광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아들이는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 후반부에
“그는 ...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 중에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는 것, 그리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다음의 두 가지 이야기가 생각나서 옮겨봅니다.
【어느 작은 소녀가 엄마와 길을 걷다 동물 병원 안에 강아지들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해맑은 표정을 본 엄마가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이 중에서 어느 강아지가 제일 마음에 드니?”
소녀는 엄마의 질문에 싱긋 웃고는 가장 볼품 없고 힘 없어 보이는 강아지를 가리켰습니다.
“저는 이 강아지가 가장 사랑스러워요.”
그러자 엄마가 “왜 하필 이 강아지니? 이 강아지는 못생긴데다 곧 죽을 것처럼 힘이 없어 보이는구나.”
그러자 소녀가 말했습니다.
“왜냐면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이 불쌍한 강아지를 사랑해 주지 않을테니까요...”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해 겨울, 캘리포니아의 노숙자 수용소에 추위를 피해 몰려든 노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자원 봉사자 로드니는 물품을 구하러 동분서주했습니다. 하지만 노숙자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물품은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운 좋게 마지막 담요를 얻은 노숙자 호세가 수용소 구석에서 잠이 들었는데, 주위 사람들의 불평이 대단했습니다. 오랜 시간 노숙하며 지낸 그에게서 나는 악취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로드니가 따뜻한 물을 담은 세숫대야를 가져와 잠든 호세의 발을 씻겨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갈며 호세를 노려보던 사람들 모두 로드니의 모습에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호세의 머리맡에는 누군가 가져다 놓은 새 양말이 놓여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부러진 갈대와 같은 사람, 그리고 연기 나는 심지처럼 약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몸이 불편하거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상처나 열등감 때문에 방어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작은 관심과 도움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움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거저거 계산하고 따져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 사람을 도와주면 나한테 너무 의지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나와 특별히 연관된 사람도 아닌데...
나도 힘들고 피곤한데 누굴 돕겠어...
다가갔다가 오히려 내가 상처를 받을지도 몰라...’
라는 생각 때문에 작은 관심과 도움을 주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그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면 어떻겠습니까?
부러진 갈대와 같은 사람들은 꺾여 나가고,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사람들은 꺼져 버릴 겁니다.
그러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점점 줄어들고, 새로운 사람들도 모여들지 않겠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에 희망을 걸고 모여드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러진 갈대를 꺾어 버리지 않으셨고, 연기 나는 심지를 꺼트리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흩어버리는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셔서 많은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좋은 일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바리사이들은 도대체 왜 그랬는지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 때 까지 율법의 기득권자들로서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화된 삶을 산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러한 차별화를 무시한 도전이었을 테고 율법적으로 벌을 받는 병자들과 죄인들을 감싸 안으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가로막아야 하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악에 동조하고 타협하는 이들로 인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셔야 하셨습니다.
예전에 천만 관객이 본 친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친구 동수를 죽이고 말았던 사형수 준석이에게 친구 상택이가 가서 왜 그렇게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를 물어보자 준석이의 대답이 자신이 건달이기 때문에 쪽팔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의 건달 세계의 규칙을 지켜야만 했던 준석이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의 모습과 연결이 됩니다.
사랑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수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고 한다. 악한 일을 모의하는 사람들은 빛을, 바른 길을, 생명을, 보물을, 진주를, 사랑 그 자체와 평화를 없앨 모의를 한다. 이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다고 한다.
그분이 물러가신 것은 그들의 모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악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즉 당신을 자랑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어서 이사 42,1-4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지도자들로부터 조용히 물러나신다. 그들 안에 있는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라도 파멸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들이 언제나 당신께로 회개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참아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하신 분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참아주시는 분이다. 이로써 모든 민족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 말씀은 이것들을 쉽게 하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온유함을 뜻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주실 수 있는가? 이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참아주셨듯이, 그분의 구원업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다 이루시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때에는 터무니없고 모순되는 논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선언을 주님께로부터 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앎의 욕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즘 없는 시간을 쪼개어 20세기 최고의 천재 철학자로 평가되는 비타인쉬타인 평전을 읽었습니다. 정말 치열한 진리추구의 삶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인생에 아름다운 초상화같은 평전이었습니다. 마지막 임종어는 물론 그의 장례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의사로부터 암선고에 이어 며칠 만 살 수 있으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좋습니다!” 외쳤고, 죽음에 임박했을 때 의식을 잃기전 그의 임종을 지키고 있던 자매에게 남긴 말이 감동적입니다.
“그들에게 전해 주시오. 나는 멋진 삶을 살았다고.”
흡사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중,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마지막 연을 연상케하는 비트겐 슈타인의 임종어입니다. 남은 자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이런 아름다운 임종어입니다.
이어지는 묘사에도 공감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톨릭교도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장례식이 가톨릭종교의식으로 치러진 것은 어느 면에서 타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독실하게 종교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것은 그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얼마전 어느 자매의 카톡을 통해 보내준 메시지도 반가웠습니다.
“오늘 올리신 시 3편이 너무 아름답게 와 닿아서 카페 블러그로 옮겼습니다. 언제나 늘 그 자리, 지금 여기에서 늘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제 강론에 인용된 시 하나에 다음 짧은 두 시입니다.
-“소나무에는/솔향香
꽃에는/꽃향
먹에는/묵향墨香
글에는/문향文香
사람에게도/향香이 있겠네“-
-“꼭 하늘비 내려야
맑게/흐르는 시냇물인가
비 안와도/늘 맑게 흐르는/시냇물이고 싶다”-
늘 하느님을 찾을 때 아름다운 삶, 향기로운 삶, 늘 맑게 흐르는 시냇물같은 삶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의 평생 화두입니다. 평생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미카 예언서 시작입니다. 사회적 불의에 대한 미카예언자의 맹렬한 단죄는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들, 곧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와 맥을 같이합니다. 그대로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예언자의 질책입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여전히 반복되는 불의와 불평등의 사회현실입니다. 공정과 정의의 현실은 여전히 요원합니다. 어제 일간신문 만화도 ‘방치된 아이/방치된 젊은이들/방치된 자영업자들/방치된 탐욕’이란 그림으로 불공정과 불의의 사회현실을 풍자하고 있었습니다. 때로 문명의 진보가 아니라 문명의 야만시대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탐욕의 인간본질은 변함없는 듯 합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의,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격렬한 단죄와 심판예고는 그대로 오늘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비상한 회개가 아니라 본연의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분수대로 사는 평범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앎의 욕구와 함께 가는 회개입니다. 얼마전 ‘삶의 욕구’는 ‘앎의 욕구’임을 깨달았습니다. 끝없는 삶의 욕구에 끝없는 앎의 욕구입니다. 알고 싶어 공부하는 것입니다. 공부에 대한 앎의 욕구는 본능적입니다. 앎의 욕구중의 욕구가 자기를 아는 욕구입니다. 사실 자기를 아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습니다. 앎의 공부에 치유되는 무지의 병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알아야 예수님을 알수 있고, 예수님 공부와 나공부는 맞물려 있습니다. 하여 예수님과 나를 알아가는 데 끊임없는 회개는 필수입니다.
초대교회 신도들 또한 ‘예수님이 누구인가?’ 알고 싶은 욕구에 치열하게 주님을 찾았음이 분명합니다. 마침내 발견한 이사야서 42장1-4절에서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을 롤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으려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삶의 이론이나 지식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천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그대로 본받아야할 이사야가 전하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침내 주님의 종,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된 이사야 예언입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며, 섬세하고 자비로우며, 지혜롭고 강인한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빛이자 희망이신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궁극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우리의 근본적 앎의 욕구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알아야 예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 당신과 앎의 관계를 깊게 하시며 날로 당신을 닮게 해주십니다. 아멘.
<그리스도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18. 07. 21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하느님께 사랑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을 곱게 품고
하느님의 영에 이끌려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탐욕스런 사익(私益)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의(公義)를 추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느님을 누리에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칠고 소란스런 외침 없이
삶으로 하느님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묵묵히 주저함 없이
하느님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상처 입은 세상을
부드럽게 보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망 가득한 세상에
정성껏 희망을 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여기 있는 또 하나의
작지만 귀한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절망이 없다. <마태 12, 14-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희망은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기대하는 사람에게 있으나 절망은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은 사람의 몫입니다. 참 희망은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하고 절망을 느낄 때 희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주님은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고,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 안에 희망을 심어주어 듣고 믿는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크지 않고, 시끄러운 시장터 가운데서 들리지 않고,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으로 오로지 잔잔한 후수를 가르며 앞으로 나가는 희망의 돛단배와 같습니다. 준비된 희망의 나라로 전진하며 나아갑니다.
“너에게 이제 희망이 없다. 너를 따를 수 없다.” 서로 큰소리치며 싸우고 “너는 틀렸다. 너는 부정행위를 하였다.”고 세상에 소리치고, 알리고, 소리를 분간 못하게 하는 시끄러운 소리 가운데 희망이 없어집니다.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게 다루고, 식어가는 열정을 더 뜨겁게 하며 서로 빛이 되고 따뜻함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의 은사 속에 매일 새로운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분주하게 할 일을 찾아 헤매는 삶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주님의 말씀과 마음과 생각에 따라 살려고 할 때 난세에 난제를 풀며, 모든 이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바라는 목적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주님 앞에 살려는 사람에게 “너는 틀려먹었다. 너는 안되 희망이 없다.” 하고 단정 짓지 말고 봄에 농부가 씨앗을 땅에 심어 솜털 같은 싹이 큰 푸성귀 되어 결실을 얻듯이 주님의 말씀을 내 안에 깊이 간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실망과 절망보다 희망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작든지 크든지 문제의 인물이 있어 희망을 꺾으려 하지만 주님 사랑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살면 아무도 구원의 길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믿는 이 안에 살아 움직이듯이 의지하고, 기대하고 희망찬 날을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성모신심미사 12 누가 내 어머니냐
’18. 7. 21(토)
말씀 아들 예수에 대한 소문(마르 3,30-35)
3 30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31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내 어머니
뒤돌아보면, 저를 걱정해주시는 어머니의 염려를 귀찮아하며 불평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입을 것, 먹을 것을 비롯하여, 제 생활의 거의 전부를 챙겨주시고 보듬어주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정성과 애정의 덕으로 살아가면서도, 분에 넘쳐서 부담스러워했던 기억이 송구스럽고 죄스럽기만 합니다. 감사하고 고마운 줄은 알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내 마음도 알아주셨으면 했나 봅니다.
우리 어머니
예수님의 일행은,
“군중이 모여들어 음식을 들 수조차 없”(마르 3,20)을 정도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환우들을 치료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를 시기하고 질투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르 3,22)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를 가리켜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 3,30)
고 하자,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고 전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예수가 사람들에게서 오해와 비난을 받자, 어서 빨리 쫓아가서 집으로 데려가고만 싶었는지 모릅니다.
허겁지겁 아들 예수를 찾아 온 어머니 마리아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예수에게 전갈을 보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전했습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 3,32)
이게 아닌데
다른 사람이 다 자신을 못 믿고 미워해도 부모님만은 자신을 이해해 주고 자신의 편을 들어주시리라고 믿었던 자식들은 실제로 그렇지 않은 반응을 내보이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내심 섭섭해 합니다. 마리아의 아들 예수도 반발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카인이 동생을 죽이고 나서, 하느님께서 동생의 안부를 묻자 반발하며 외쳤던 볼멘소리가 갑자기 떠오릅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아들 예수의 외침과 카인의 외침은 둘 다 부정과 반발의 표현입니다. 어쩌면 답답하고 씁쓸하지만 마주쳐야만 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몸부림.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의 외침은 안타까움과 섭섭함의 표시였을 것이고, 카인의 외침은 자기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한 표시였을 것입니다.
두 경우 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사람들의 반향에 대한 대응이었고, 가족과 정겨웠던 인간관계를 떼 내어야만 하는 아픔을 동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에게는 그동안 믿고 의지해왔던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족을 만나고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카인은 가족과 형제들을 떠나야만 하는 추방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몰이해
예수의 기준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어머니와 친척 형제들에게는 오만불손한 배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수 있었을 텐데 그에 굴하지 않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35)
예수님께서 굳이 버리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이들이 떠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또 다른 이들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자신과 ‘생명의 빵’에 비유하시면서 이야기 하셨을 때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27.33.35.40)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말씀대로 따라 살지 못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66절)
그 순간 당대의 지식과 경험과 상식에 어긋나며, 마치 저버리기라도 하는 듯한 예수님의 기준과 행동 때문에 몇몇은 이의를 제기하고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하고 물으실 때의, 베드로처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8-69절)
라고 답하며, 계속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주님의 뒤를 따를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예수 아기를 낳은 후 여러 번 박해의 위기를 겪었던 때와는 또 다르게, 이번에는 정작 아들 예수에게서 괄시와 버림을 받았다고 느껴졌을 때의 기분이 어떠셨을까?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라는 시메온의 예언을 기억하게 됩니다.
가끔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며, 피부로 느끼는 우리의 감각이 정확치 않고 확실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오감으로 전달되어 내 안에 흡수된 정보가 내 가슴과 머리와 마음의 기관 안에서 인식하는 것과는 또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여러 사람들이 원하는 공통의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 즉 ‘상식’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사고, 다른 말, 다른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이해하거나 따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런 결정을 내리면, 뭇사람들의 갖은 비난과 손가락질이 뒤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그런 비난과 손가락질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기우들을 뒤로 하고, 다른 행동을 취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공통의 사유와 문화, 그 너머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닌 무엇을 지향하고 염두에 두었을 때 나타나는 제 삼의 행위가 있다고나 할까! 예수님 사고와 행동의 결정 기준은 인간 사회의 상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택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 순간에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은 무엇일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 순간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아버지의 뜻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천륜과 인륜을 저버린다는 비난이라도 받을 수 있는 말을 던지십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4-35)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혈육의 어머니와 친척 형제자매들 대신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을 새로운 가족으로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흔히 사회에서 평가하고 말하는 ‘좋지 않은 혈통에서 난 사람들’이 ‘좋은 혈통에서 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통념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이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소리로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루카 11,27)
그 어머니의 아들이 되지 못한 이들의 처지는 자신들의 선택도 자신들의 탓도 아닙니다. 주어진 출생 관계를 아쉬워하고 섭섭해 하며 부정하고 싶기까지 한 이들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실까? 예수님께서는 가문이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남녀 성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을 위로라도 하시려는 듯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28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누구냐?’가 아니고, ‘어떻게 사느냐?’를 물으십니다. 누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는 어느 가문의 누구에게서 났느냐 여부가 아니라, 누구든지 그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느냐 여부를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각자의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원의를 가지고 실제로 하느님 말씀을 실현하는 열정을 가진 모든 이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이룰 수 있도록 함께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시어 이룰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주실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4,16; 15,26; 16,13)
마침내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 몸소 이루어 내심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기도
‘신분과 성별의 차별 없이 우리 모두를 주님의 가족으로 받아 주신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현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초대해 주신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주신 주님, 찬미와 영광을 받으소서. 아멘.’
‘주님의 뜻을 찾고 이루려는 저희를 지지해 주시는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 12, 21)
김웅태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 13, 17~21)는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 적용된 이사야 예언이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가 왜 이사야 예언자의 이 구절을 예수님께 적용 하였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많은 군중이 따랐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복음에서 보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였다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군중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을 고쳐 주셨는데, 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앨려고 하였을까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고 대단히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님을 없애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고, 또 자신들이 가졌던 메시아관이 달랐다고도 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종이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을 받으신 분이시고, 모두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진정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도 끄지 않을 정도로 순박하시고 어지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서 하느님께로 가는 참된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신 분이십니다.
이 지구상에 오늘날 수십 억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세주로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들이죠. 수많은 민족들이 그분 이름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우리 희망이 있고 우리의 구원이 있음을 믿읍시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지금 나는 누구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며 그분께 희망을 걸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연중 제 15주간 토요일 2018-07-21)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치유해주시면서도 그로 인해 당신이 알려지는 것을 엄히 금하시는 얘기는 그 올바른 뜻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묵상을 하게도하고, 많은 도전을 주기도하며 부끄럽게도 합니다.
먼저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 생각게 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복음을 선포하실 주님께서 당신이 알려지지 않으면서 어떻게 복음을 선포하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약장수가 약을 팔아야 하는데 알려지지 않고 어떻게 약을 팔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복음장수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이 알려지지 않고 어떻게 복음을 팔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신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은 그것이 복음 선포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지장이 될까봐 원치 않으시는 것일 겁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준비하게 한 다음 메시아가 오셨을 때는 이분이 메시아라고 사람들에게 가리키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불교의 비유에서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우매한 사람들처럼 주님이 아니라 자신을 볼 수도 있기에 자신은 작아져야 하고 사라져야 한다고 하였지요.
주님께서도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바라시고, 아버지께서 사람들의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시는데 사람들이 아버지는 보지 않고 당신만 볼까봐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시는 겁니다.
이것이 완전한 사랑이고 완전한 비움입니다.
이에 비해 저를 비롯하여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자기가 영광 받고 하느님께 가야 할 사랑을 자기가 가로채려 하거나 그 정도는 아니어도 하느님 때문에 자기 이름도 올라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복음이 전해지고 하느님께서 사랑을 받으시기만 하면 당신은 잊히고 묻혀버려도 좋다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나는 사랑 받지 않아도 아버지만 사랑 받으시면 되고, 나는 잊혀 져도 아버지만 영광 받으시면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참되고 완전한 사랑이라야 가능합니다.
하느님 사랑만으로 충분한 사랑과 그런 사랑의 소유자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다른 곳에서 기도와 자선과 단식을 사람 보이게끔 하지 말고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 앞에서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셨는데 말로만 그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그런 사랑을 사신 겁니다.
이와 비슷한 것을 저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서 봅니다.
한창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 외에 다른 사랑은 필요 없고 오직 연인의 사랑만으로 충분하다하고 그래서 심지어는 지금까지 나를 지탱케 한 부모의 사랑마저 없어도 된다는 식입니다.
물론 주님의 사랑, 그리고 우리가 본받아야 참되고 완전한 사랑은 다른 사랑을 배제하고 자기들의 사랑에 만족하고 마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사랑이면서도 사랑 아닌 이기적이고 젖비린내 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 그래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분하고 아버지의 사랑에서 힘을 얻는, 그래서 다른 사랑 없어도 사랑하고 다른 사랑 기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며 오직 그들이 살게 되는 것으로만 만족을 삼을 수 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가 살게 되는 것과 나의 만족 사이에서 나의 만족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어야 합니다.
살기 위해 안간힘쓰는 사람 앞에서 만족이나 찾는 사랑은 사랑 아니겠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태 12, 1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에게서 우린
무얼 만나고 있는지를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드러내는
자기자랑의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영험한 효능만을
좇는 표피적인
우리의 신앙입니다.
허상을 좇는
악순환을
멈출 때입니다.
삶의 본질을 아직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삶의 본질은
안으로 깊어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어떤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자기의 방식을
내려놓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정말이지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닌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병원 가는 것을 꺼려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가기 싫은 병원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치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치아를 치료하면서 내는 날카로운 기계음은 정말로 듣기 싫습니다. 특히 이 소리는 공포영화 볼 때와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 줍니다. 저 역시 이 ‘소리’ 때문에 치과 가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치료 때문에 치과에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긴장한다는 것을 아셔서 그런지, 의사 선생님께서는 너무나 친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시작하면서 “아프죠? 너무 아프면 손을 드세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나기는 했지만 그렇게 참을만해서 가만히 있었지요. 그런데 잠시 뒤에 “안 아파요? 아프면 손을 드세요.”라고 또 말씀하십니다. 역시 참을만해서 가만히 있는데, 곧바로 다시 “안 아파요?”라고 묻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아프지 않냐고 묻는 의사 선생님께 “아프다.”고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들은 생각은 ‘아프다고 하면 뭐가 달라질까? 어차피 치료하는 것인데...’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프다고 하면 잠시 치료를 멈추고 쉬는 시간을 주는 것뿐이지요. 치료 방법을 달리 할 것도 아니라면 그냥 참는 것이 더 낫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아프냐고 묻지 말고, 그냥 치료나 빨리 끝내줬으면 좋겠어요.’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다른 이들에게는 의사 선생님의 배려 섞인 이 말이 큰 위로가 될 수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에 저를 향한 진정한 배려는 말이 아니라 치료를 빨리 끝내는 것뿐이지요.
배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나의 이웃들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또한 이 배려를 실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배려하고 있을까요? 정말로 상대방이 원하는 배려를 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나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배려를 하면서 할 도리를 다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에게 오셨지만, 정작 바리사이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목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하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미리 알아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사람들의 심판이 두려워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을 배척하는 그들에게 큰 벌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을 배려하십니다. 즉, 그들이 죄를 짓지 않게 하시기 위해 일부러 그 자리를 피하십니다.
진정한 배려란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루어져 합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을 향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수라고 말할 수 있는 내 적대자까지도 배려할 수 있는 사랑, 이 사랑을 주님께서는 보여주셨고 우리 역시 그 사랑의 삶을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주님 마음에 드는 이가 되며, 이런 이의 이름에 온 민족들이 희망을 걸게 될 것입니다.
나의 배려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또 그 대상은 어떠했을까요?
오늘의 명언: 소통의 비결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아서 쇼펜하우어).
실천이 먼저입니다.
어제 전국성지전담사제회의를 마치고 갑곶성지에서 담당 주교님의 주례와 전국성지전담사제들이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 미사 때에 주교님께서는 아주 재미있는 말씀 하나를 해주시더군요.
어느 본당의 사목회장님께서 죽음을 맞이해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는 아주 열심히 살았구나. 따라서 하늘 나라에 빨리 갈 수 있도록 차를 한 대 주마.”하면서 최신형 SUV 차를 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이 사목회장님의 본당신부님께서 계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사목회장님께서 최신형 SUV차를 얻었으니 자신 역시 여기에 준하는 차를 얻겠지 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이 신부님을 보고서 베드로 사도는 “너도 아주 열심히 살았구나.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도록 너에게도 차를 한 대 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신부님이 받은 차는 아주 조그마한 티코인 것입니다. 실망을 한 본당신부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왜 저는 티코입니까?”라고 불만을 담아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명령만 하지 않았느냐? 그러나 사목회장은 직접 몸으로 실천했느니라.”
결국 본당신부님은 불편한 마음을 갖고 티코를 운전하면서 하늘 나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휴게소를 지나서부터는 너무 신나 보이는 것입니다. 노래도 부르고 함성도 지르면서 운전을 합니다. 갑자기 바뀐 모습이 너무 이상해서 베드로 사도가 왜 불편했던 마음이 바뀌었냐고 묻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글쎄, 저희 주교님께서 자전거를 타고 오십니다.”
사랑은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명령만 내리는 것으로는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명령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 그 사랑이 가장 먼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 나라로 가는 길에 무엇을 타고 가실 것 같습니까?
제발 언어 사용을 신중하고 차분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히 ‘막말 제조기’라고 별명을 붙여도 이의가 없을 한 고위공무원의 또 다른 막말을 들으며 어이없어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뽑은 심부름꾼으로서 국민들을 섬기고 존중하고 배려해야할 사람이 어찌 그런 표현을 다 쓰는지? 말 한 마디를 해도 어찌 그리 없는 사람들 마음을 후벼 파는 독설만을 골라하는지? 국민들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들고 행복지수를 높여줘야 할 사람이 틈만 나면 스트레스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국민들이 실망하고 좌절하는 큰 원인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신뢰가 가고 마음이 든든해지고 그래서 존경심을 유발시켜야 하는 것이 리더들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가는 지도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틈만 나면 갑질과 막말입니다. 밥 먹듯이 저질스러운 비리를 저지르고 안하무인의 행동을 일삼습니다.
종들의 종으로서 겸손과 온유는 어디로 사라지고 폭군도 그런 폭군이 없습니다. 인성과 덕성을 쌓는 노력은 뒷전이고 권모술수와 줄서기 능력만을 쌓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입니다. 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내면의 상처 치유 작업은 필수입니다. 내면의 지속적인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공을 닦는 노력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 작업은 뒷전이고 자신의 야욕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을 치니 그 얼굴에 남아 있는 것은 야수의 섬뜩함뿐입니다.
윗자리로 올라갈수록 더욱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적합한 사람인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언어 사용을 신중히 하는 일입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말로 인해 단 한사람이라도 상처받고 괴로워하지는 않을지 돌아보는 일입니다. 자신과 다른 의견 앞에서도 분노하지 않은 일입니다. 언제나 한 템포 늦춰서 생각하고 큰 틀 안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정말 아니라고 판단되면, 뭔 대단한 자리도 아닌데...있는 욕, 없는 욕 다 듣기 전에 미련 없이 물러나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상의 모든 리더들이 틈만 나면 바라봐야 할 롤 모델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그분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일부몰지각한 우리 지도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는 언제 어느 때나 차분했습니다. 목숨을 건 긴장된 설전 속에서도 내면의 평화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함부로 다투지도 않으셨습니다. 틈만 나면 고래고래 소리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하고 싶은 말씀을 논리정연하게, 예의바르게, 핵심과 본질만을 요약해서 정확하게 표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개돼지, 인간쓰레기로 몰고 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이루어질 때 까지, 다시 말해서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셨습니다.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그분의 모습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망을 봤습니다. 그분의 이름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거룩한 부드러움과 따뜻한 사랑으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논쟁에서, 바리사이들이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없애려고 모의하시는 것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12,14-15). 그분께서는 분개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하시지 않고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하느님의 올바름을 선포하고 희망의 빛을 보여주시려고 그곳을 떠나십니다.
‘다투지도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받은 이들과 함께 하고, 병자를 치유해 주며 죄인과 함께 음식을 드셨습니다. 박해나 시련 앞에서도 생명을 쏟아 붓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거룩한 부드러움’은 분명 ‘하느님의 얼'입니다. 이 거룩한 부드러움과 사랑 때문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던 것입니다(12,15).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격렬한 논쟁을 하는 때가 있습니다. 신심활동이나 봉사를 하면서, 그리고 일터에서 서로 비판하고 옳음을 주장하고 다투며 미움을 뿌리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말할 때와 침묵할 때,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나아갈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분별하여 유연하게 처신할 필요가 있겠지요.
복음적인 유연함은 비굴함이 아니라 엄격함과 냉정함, 부정적인 사고방식, 편견과 고정관념, 공격적인 태도 등을 말씀의 빛으로 삭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서나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부드러움과 약함이야말로 예수님의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바리사이적인 경직된 마음’을 비움으로써 예수님의 부드러움을 풍기는 얼굴을 지니도록 해야겠습니다.
나아가 바리사이들처럼 다른 이들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善)에 대하여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다른 이들의 인격과 의견을 존중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건네주어야겠지요.
오늘날 수많은 사상과 이념들이 난무하고 종교도 다원화 하면서 진정한 권위가 무엇인지 묻게 됩니다. 권위란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군가를 성장시켜주는 힘을 말합니다.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바리사이들과는 달리 많은 군중은그분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진정한 권위를 지니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진정한 권위는 어떤 것일까요? 그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하느님의 권위여야 합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의 권위는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거룩한 부드러움의 힘’ 곧 ‘하느님의 얼’을 지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힘이요, 사랑 때문에 끝까지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연민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진정한 권위를 지니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하느님의 얼을 지니고 사랑이 되어 한마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차별받고 고통 중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가가도록 해야겠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권위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거기에 행복의 열쇠가 있음을 기억해야겠지요.
오늘도 거룩한 부드러움과 따뜻한 사랑으로 묵묵히 주님의 일을 실행하는 멋진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현종 시인의 ‘비스듬히’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
사제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중에 함께 하는 교우들과 있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충실히 전하는 동료 사제들과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지구는 달에 기대고 있습니다. 형제들인 행성에 기대고 있습니다. 빛을 주는 태양에 기대고 있습니다. 우리의 태양계는 은하계에 기대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렇게 더불어 기대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외로워서 가끔은 우리들에게 기대시는 것 같습니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생각한 대로 사는 사람은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치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은 삶을 살 것입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의 파도에 이끌려 살기 마련입니다. 마치 강물 위를 떠밀려 가는 나뭇잎과 같습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한의사의 부모님과 대화를 하면서 새로운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모유의 힘입니다. 할머니는 대전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며느리를 위해서 손녀를 키워주고 있었습니다. 며느리는 대전에서 지내면서도 매주 모유를 얼려서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모유를 먹지 않고 분유를 먹었습니다. 냉장고에 가득한 모유 때문에 할머니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아기는 먹지 않고, 모유는 계속 냉장고를 채웠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아기에게 심한 아토피가 찾아왔습니다. 한의사인 며느리는 어머니에게 모유를 목욕물에 풀어서 아이를 씻겨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반신반의 하면서 모유를 목욕물에 풀어서 아이를 씻겨 주었습니다.그렇게 20일 정도 하니 아이의 아토피가 깨끗하게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이에게는 모유가 정말 좋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가장 든든한 보호막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면 삶의 어떤 고난도, 아픔도, 괴로움도 모두 깨끗하게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아픈 사람들은 치유해 주시고, 굶주린 사람들은 배불리 먹이시고, 외로운 이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시고,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이 주님께서는 그렇게 아픈 사람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 생각한 대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려는 사랑입니다.
우리 삶의 指標. -주님의 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는 위기 상황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주님은 묵묵히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십니다. 이들과 정면 대결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십니다만 많은 군중은 그분를 따랐고 주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바로 복음 전반부의 예수님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서 마태복음 사가는 이사야에 나오는 주님의 종을 연상했습니다.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인 이사42,1-4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신원을 확인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종을 예수 메시아로 간주하고 신봉했습니다. 오늘 주님의 종에 대한 묘사는 예수님의 모습이지만 그대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도 삶의 지표가 됩니다. 진정 주님이 선택한, 사랑하는, 마음에 드는 종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이런 당신의 종들인 우리에게 당신 영을 주시어 우리 모두 그 사명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게 하십니다. 저는 주님의 종으로서 우리 삶의 지표를 세 측면에 걸쳐 확인했습니다.
첫째, 주님의 종은 ‘침묵의 사람’입니다.
닫힌 침묵이 아니라 주님께 활짝 열린 깨어있는 침묵입니다. 이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선동가가 아닌 깊은 침묵의 관상가였습니다. 관상과 활동이 이상적 조화를 이룬 분이셨습니다. 낮의 활동에는 아버지와 일치했던 밤의 관상의 기도가 늘 받침이 되어 주셨습니다. 밤의 침묵과 관상을 잃으면 삶의 깊이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에 충실하셨던 주님의 종입니다. 하여 예수님은 싸우기보다는 물러나셨고 당신을 선전하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참으로 조용한 중에 묵묵히 그의 사명을 수행하셨던 주님의 종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삶의 영원한 지표가 됩니다.
둘째, 주님은 종은 선하고 자비로운 분입니다.
주님의 종, 예수님은 거칠고 떠들썩하고 성급한 분이 아니라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셨고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분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묘사가 바로 이를 입증합니다. 하여 주님은 구마이적과 치유이적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치유의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이런 섬세함과 자비로움은 관상가의 특질이자 우리 삶의 영원한 지표가 됩니다.
셋째, 주님의 종은 모든 이의 빛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오늘 마지막 인용어귀가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의 종만이 희망의 빛입니다. 이사42장 6절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나 주님이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그대로 주님의 종인 예수님께 대한 묘사입니다. 새삼 우리 삶의 영원한 지표는 희망의 빛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주님의 빛을 잘 반사하는 우리의 삶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주님의 종인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지표도 환히 계시되었습니다. 침묵의 사람, 선하고 자비로운 사람,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입니다. 이런 삶의 지표를 잃어버릴 때 무질서한 삶에 탐욕에 휘말리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미카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을 떠나 삶의 지표를 잃는 인간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 안을, 임자와 재산을 유린하다.”
삶의 지표를 잃었을 때 탐욕은 기승을 부리고 무질서한 방종의 삶이 펼쳐집니다.
“경계석을 옮긴 자는 사형에 처한다.”라는 옛 로마법이 있었다 합니다. 사람간의 경계를 유린하여 정의와 질서를 무너뜨림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표현하는 법조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삶의 지표를 새로이 확인시켜 주시어, 우리 모두 주님의 종으로서 ‘조용하고 자비로운 사람, 희망의 빛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만남을 ‘기회’로 삼는 사람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인생은 만남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만남이 인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건의 연속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어떤 만남들은 거부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나를 힘들게 하는 만남들입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사람이나, 혹은 함께 있으면 더 힘들어질 때 상대를 밀어내거나 내가 숨어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만나고 싶은 대상이시기는 하셨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밀어내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리사이들만 뭐라 할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어떤 사람들은 사라져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아” 모든 민족과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만남에서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아프게 하는 이들까지도 주님의 뜻이라면 내치지 않고 품어 안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가리옷 유다이고, 예수님은 실제로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을 위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라몬 막사이사이는 그가 세상을 태어난 지 16개월 만에 비율빈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괴질에 걸려 그를 치료하던 의사가 그의 어머니에게 생명을 포기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어린 생명을 단념하지 않고 치료를 정성껏 하였습니다.
마침 약 광고를 보고 병 하나를 가지고 자기 집에서 127마일이나 떨어진 마닐라까지 도보로 약을 사다가 치료한 결과 기적적으로 나았습니다. 만일 그 어머니와 같이 정성스런 마음을 가진 어머니가 아니었던들 세계적인 민주주의적 통치자를 만나보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이 사람들을 없애버리려는 이유는 바로 이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사람을 가려서 만나거나 어떤 사람을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은 바로 이런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하는 우리는 구별하여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관계를 ‘기회’로 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로 내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합니다. 내 자신의 사랑을 시험하고 인내를 시험하는 기회가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로 삼으려 하는 이에게는 어떠한 만남도 두려움이 아니라 ‘기다려짐’으로 다가옵니다.
많은 사람을 태우고 바다를 건너던 배가 갑자기 불어오는 거센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비바람에 흔들리던 배는 그만 뒤집히려는 듯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배안의 사람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중 노인 한사람은 아주 평화로운 얼굴로 기도를 드리는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혀 다 죽게 되었는데 당신은 두렵지 않느냐고. 그 노인이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나에게는 딸이 둘 있습니다. 큰 딸은 몇 년 전에 잃고 지금은 작은 딸을 찾아가고 있는 길입니다. 만약 이 배가 뒤집혀 죽게 되면 천국에 있는 큰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이고 다행히 배가 무사히 항구에 닿게 되면 작은 딸을 먼저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만남의 소망을 가지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군요.”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마태 12,20)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당신은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시고
신실하심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마태 12,15-16)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묵상을 나누면서도 저는 늘 댓글을 달지 말아주십사 당부합니다. 또 제 이름을 밝히며 말씀을 전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댓글 다는 게 뭐 어때서 저러시나 하실 겁니다. 또 실명을 밝혀 누구의 글인지 알면 더 좋지 않겠냐고도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늘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하느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과 감사가 자신에게 행여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담겨 있답니다.
예수님이 그러할 진대 저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줍잖은 저의 생활말씀 묵상 나눔이 오로지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도구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오늘 내가 한 보잘 것 없는 말과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 감사와 칭찬으로 돌아오면 그것을 즐기기보다 하느님께 돌려드림으로써 참으로 나의 주인이신 분이 영광 받으시도록 해보면 어떨까요?
그래야 내가 바치는 영광송이 참으로 훌륭한 기도가 될 겁니다.
"영광이 나에게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리스도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먹고
하느님께 사랑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영을 곱게 품고
하느님의 영에 이끌려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탐욕스런 사익(私益)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의(公義)를 추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느님을 누리에 드러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칠고 소란스런 외침 없이
삶으로 하느님을 선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묵묵히 주저함 없이
하느님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상처 입은 세상을
부드럽게 보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망 가득한 세상에
정성껏 희망을 심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지금여기 있는 또 하나의
작지만 귀한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나의 희망<마태,12/14-2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바리사이들에게 미움을 받고 죽음에 직면한 주님에게 “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심 같이 오늘 우리도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에게 희망을 걸고 믿음의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고통에 시달려도 이 몸이 피할 곳은 주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희망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희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길을 잃고 해매며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길을 찾게 하시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찾는 이 없는 사람에게 벗이 되어 주시고, 생명을 잃은 사람에게 생명이 되어 주시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눈과 귀가 되어 주시고, 걷지도 못하고 움직일 수 없는 사람에게 손잡아주시고, 주님을 떠나 숨은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빛 가운데 나오도록 이끌어 주시고, 고통 중에, 시련 중에,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에게, 죽음에 임박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주님의 진실과 사랑은 어는 신이나 어는 위인이나 가지지 못한 것을 기지고 계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의 삶을 보여 주시였기에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이같이 세상에 희망을 주는 사람은 사랑과 진실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사람이고 생명이 없는 곳에 생명을 심어주고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어주는 사람입니다.
어제 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수사님이 원장책임이 3년 기간이 다된 저에게 신부님 더 해야 합니다. 네 장상에게 순명할 뿐입니다. 수사님이 죽기 까지 일을 하시는 것처럼 저도 죽기까지 순종하며 하겠습니다. 저는 나이가 80이 넘었으나 순명으로 더 하는 것은 주님 안에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로써 아무 힘도 능력도 없지만 주님의 힘과 능력을 희망하며 살아가려고 하니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살아갑니다.
저는 하느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은 행복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여 모든 이가 행복하기 위하여 주님에게 희망을 두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를 변화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이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십니다.
오늘이
그 희망의
날입니다.
참된 희망의
이름은 결코
지워지지 않습니다.
희망을 반복하면
어느새 우리도
희망을 닮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바라봅니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우리들 삶에
친히 희망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패배속에서도
부러진 갈대속에서도
꺼져가는 심지에서도
희망은 새어 나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희망의 이름과 함께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희망은
알고있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희망은 희망으로
사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마지막까지
희망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힘들수록 올바른 정도를 추구해야합니다.
그래서 올바름은 언제나 건강한 우리의 희망입니다.
올바름은 오늘을 지향합니다.
오늘을 가꾸는 것입니다.
실행하지 않는 올바름은 진정한 올바름이 아닙니다.
서로를 원망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희망은 항구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올바름이란 다름아닌 주님 자체입니다.
올바름은 언제나 선을 지향합니다.
올바름이신 주님을 중심으로 할 때,
우리는 더불어 사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주님과 함께 올바름을 추구할 때
주어지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올바름을 위해서는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정의를 선포할 수 있는 용기와
어둠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올바름에도 이렇듯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드디어 희망에 도달하게 만들며
묵묵히 우리 성소에 충실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의지가 올바름을 위한 희망이 되고
우리의 선포가 새로운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은총의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 그것은
올바른 길을 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먼저 올바름을 실천하는
희망의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분의 이름에 희망을 거는 사람
나명옥 신부님
‘예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쳐주시고 당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셨다.’ 라고 오늘 복음은 알려줍니다. 당시 예수께서는 당신이 행한 기적과 당신의 신비에 대해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활동하신 것이 아니라 겸손한 가운데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려고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좋은 점만 알리려 함으로써 약점은 감추고, 장점은 과대 포장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가르침과 우리가 살아가는 기준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늘 많은 잘못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반성하고 용서를 청하며 산다면 삶이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내세우는 삶은 공허한 삶의 연속일 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으로서 타인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타인 역시 아무런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자신보다 나으면 나은 대로 배울 점을 찾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도움을 베풀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결코 환경이나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능력 밖의 것에 대해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이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분의 이름에 희망을 거는 사람으로 하느님의 귀염둥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짧지만 재미있는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제목이 ‘부자 아빠가 되는 법’인데요. 어떻습니까? 관심이 확 가지 않습니까?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상속을 받아라.
둘째, 부자와 결혼해라.
셋째, 자식 이름을 ‘부자’로 지어라.
아주 간단한 방법들이지요? 그러나 이 방법으로 과연 진정한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 만약 이렇게 된다면야 쉽게 부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부자라기보다는 부자인 척만 하다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늘 간단하고 편한 방법만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하는 척’만 하다 끝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당신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기를 간절하게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속 좁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쉽게만 해결되길 바라는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주님께 불평을 던지고 원망을 하는 우리들이지요. 자기 뜻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차별하시는 주님이라면서 거부하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이 모습이 과거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거부했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과 뜻에 반대되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즉, 그들은 쉽고 편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올바른 척’만 했던 것이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살짜리 꼬마가 볼 일을 보고 난 뒤 엄마를 부르며 말했습니다.
“엄마 똥~~~”
그러자 엄마는 이제 습관을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안 돼! 이제부터 혼자서 닦아야 돼!”라고 하셨지요. 이에 꼬마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럼……. 이제부터 똥은 셀프야?”
스스로 해야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스스로 할 것도 주님께 미루면서 불평불만만을 간직하고 살아갔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쉽고 편한 방법만을 찾지 맙시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을 찾아 나서고, 그 방법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들의 희망이며 참 기쁨이 되시는 주님을 진정으로 내 마음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혼돈도 누군가 잘 들어 주면 맑은 시냇물 흐르듯 풀린다(마셜 로젠버그).
칭찬합시다(강봉중, ‘해피데이스’ 중에서)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한 친구는 진돗개 한 마리를 기른다. 그런데 그 개가 어찌나 영리한지, 수돗가에서 쌀을 씻다가 흩어진 쌀을 주워 먹는 새를 잡아서 물고 왔는데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쥐를 잡어서는 마당에 놓고 친구가 출근할 때, “오! 착하구나. 쥐를 잡았구나. 퇴근할 때 맛있는 것 사다 줄게.”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꼬리를 치고 좋아하며 그때서야 그것을 치운다고 한다.
한번은 쥐를 잡아서 마당에 놓고 있는 것을 너무 바빠서 칭찬을 하지 못하고 그냥 나온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 또 한 마리의 쥐를 잡아서 마루 앞 댓돌 위에 놓고 기다리고 있더란다. 그제야 어제 칭찬 못한 것을 깨닫고 ‘아이고, 우리 누렁이 또 쥐 잡았구나. 착하다. 어제는 깜빡하는 바람에 칭찬을 못해서 미안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더니 꼬리를 수없이 흔들었다고 한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이렇게 칭찬에 민감한데 사람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한 화가가 해바라기 그림을 봐달라는 어린이에게 “참, 잘 그렸구나. 다음에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는 말을 했더니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한 아이가 집 자랑을 하라는 글짓기 시간에 하도 자랑할 것이 없어서 유리창 너머 들어오는 햇살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너무도 좋은 칭찬을 해주어서 그 아이는 그때부터 용기를 얻고 긍정적 자세를 갖게 되어 커서 유명한 사업가가 되었다는 외국의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작은 칭찬 한 마디 한 마디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큰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자녀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높다. 하지만 그 어떤 뒷받침보다도 부모님이나 주위 어른들이 자녀들의 구체적인 장점을 찾아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이에게 가장 큰 교육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물러감 그리고 쉼
신효원
피정이라는 말의 의미를 좋아합니다. 번잡한 세상 일을 떠나 고요한 곳으로 물러가서 하느님 안에서 쉬는 시간은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합니다. 피정의 집이라면 어쩐지 고향집 같은 느낌이 듭니다. 사실 하느님 앞이야말로 우리가 이전에 있었던 곳이고 언젠가 돌아가야 할 진정한 고향이겠지요. 특별한 피정이 아니더라도 날마다 주님 앞에서 잠시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주 골방이나 외딴곳으로 물러가셔서 홀로 머무셨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하느님으로 채우는 시간이었겠지요. 물러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후퇴가 아니라 쉼이고 채움이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나아갈 때와 물러나실 때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거리낌이 없었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앉아야 할 자리에 앉아 있으면 아무도 일어나라고 하지 않습니다. 떠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습니다. 앉을 자리와 설 자리를 분별할 수 있는 이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일상에서 관계에서 소유에서 현재의 위치에서 자주 물러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 나라로 향하는 순례자인 우리를 가볍게 할 것입니다. 천사가 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가볍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논쟁하지 말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학교 때 저의 입학 동기와 우연찮게 별것도 아닌 것에 관해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바다를 보고 있었는데 파도가 거세게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파도가 치는 이유가 달의 인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신학생은 바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도에 비해선 바람이 그렇게 세게 불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구과학 시간에 파도의 원인 중에 달의 인력이 가장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래사장 위에 그림을 그려가며 달의 인력 때문에 밀물과 썰물이 생기고 그 이유 때문에 파도가 생기는 것이며 바람도 물론 파도에 영향을 미치지만 달의 인력만큼은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친구는 바람 때문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저의 논리적인 설명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는 설득을 당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신학생이, "둘 다 맞아."라고 하며 중재를 해 주었고 저는 완승을 거두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그렇게 토론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어느 날 본당 신학생들끼리 섬에 놀러갔습니다. 나오려는 날 일기예보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높겠습니다."
그 날 머리 위로 솟구치는 파도 속에서 작은 통통배에 몸을 맡기고 그 섬에서 빠져나오며 달의 인력보다는 바람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논쟁에서 반드시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찾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숨기십니다. 왜냐하면 유대 지도자들이 그 분을 죽이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논쟁 하셔야 할 때는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본 생각은 논쟁이나 박해를 우선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어리석은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받거든 우선 그 곳을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마을로 도망쳐라. 사람의 아들이 오기 전까지 너희는 온 이스라엘을 돌 수 없을 것이다." (마태 10,24)
만약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망치지 않고 모두 잡혀 죽었다면 교회는 그렇게 온전한 빛도 못 보고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박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당히 그 곳에서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사도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못하고 교회가 위태로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 때 사도들은 인도,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지로 퍼져나가 각자 전도하는 곳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마치 모닥불을 흩어놓은 것과 같이 그 불씨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각 지역에서 불을 지피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로마의 박해를 피해 달아날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 순교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순교하기 겁나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이후 완전해졌습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평생을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수장으로써 자신이 죽으면 교회가 위태로워질 것을 생각하여 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이 순교해야 할 때임을 가르쳐주셨고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순교해야 할 때를 일러주신다면 우선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을 피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개신교 신자들이 여러 가지 천주교 교리로 논쟁을 하자고 덤벼들지 모릅니다. 논리적으로 하자면 그 사람들이 이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하면 논쟁은 피하십시오. 어차피 그렇게 달려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의 스트레스만 쌓일 뿐입니다. 논쟁을 피하는 것도 어쩌면 지혜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박해하는 자들을 피해 조용히 산골로 들어가셨고 그 분을 따를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나 자전거, 리어카 등의 바퀴에는 바람을 넣습니다. 충격을 흡수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공기는 충격을 흡수해 줍니다. 자동차의 바퀴에 바람을 넣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굳이 이득 없을 논쟁을 하여 불필요한 충격을 자신에게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태리에 처음 유학 가서 말도 잘 못 할 때, 이태리 신학생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네 나라 기차 있어? 니네 나라 차 만들어?"
저는 기차도 있다고 하고 이태리에 많이 다니는 한국 차의 이름도 몇 개 대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였습니다. 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해도 받아들일 의지가 전혀 없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신학생들도 그 이후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피할 땐 피하는 것이 어쩌면 뱀처럼 지혜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논쟁은 피하십시오. 논쟁은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강요는 사랑이 아닙니다. 복음은 선포되어지고 나머지는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자유에 맡겨져야 합니다.
논쟁하지 말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신학교 때 저의 입학 동기와 우연찮게 별것도 아닌 것에 관해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바다를 보고 있었는데 파도가 거세게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파도가 치는 이유가 달의 인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그 신학생은 바람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도에 비해선 바람이 그렇게 세게 불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구과학 시간에 파도의 원인 중 달의 인력이 가장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래사장 위에 그림을 그려가며 달의 인력 때문에 밀물과 썰물이 생기고 그 이유 때문에 파도가 생기는 것이며 바람도 물론 파도에 영향을 미치지만 달의 인력만큼은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친구는 바람 때문이라는 확신은 있었지만 저의 논리적인 설명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는 설득을 당하였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신학생이, "둘 다 맞아."라고 하며 중재를 해 주었고 저는 완승을 거두지 못해 안타까웠지만 그렇게 토론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어느 날 본당 신학생들끼리 섬에 놀러갔습니다. 나오려는 날 일기예보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어 파도가 높겠습니다."
그 날 머리 위로 솟구치는 파도 속에 몸을 맡긴 작은 통통배를 타고 그 섬에서 빠져나오며 달의 인력보다는 바람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논쟁에서 반드시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잘 찾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을 숨기십니다. 왜냐하면 유대 지도자들이 그 분을 죽이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논쟁 하셔야 할 때는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본 생각은 논쟁이나 박해를 우선은 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겁해서가 아니라 어리석은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받거든 우선 그 곳을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마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마을로 도망쳐라. 사람의 아들이 오기 전까지 너희는 온 이스라엘을 돌 수 없을 것이다." (마태 10,24)
만약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망치지 않고 모두 잡혀 죽었다면 교회는 그렇게 온전한 빛도 못 보고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의 박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당당히 그 곳에서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사도들이 한 명도 남아있지 못하고 교회가 위태로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 때 사도들은 인도,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지로 퍼져나가 각자 전도하는 곳에서 순교하셨습니다. 마치 모닥불을 흩어놓은 것과 같이 그 불씨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 각 지역에서 불을 지피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께서 로마의 박해를 피해 달아날 때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다시 돌아가 순교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베드로가 순교하기 겁나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이후 완전해 지셨습니다. 다시는 그런 죄를 번복하지 않으리라 평생을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수장으로써 자신이 죽으면 교회가 위태로워질 것을 생각하여 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이 순교해야 할 때임을 가르쳐주셨고 베드로는 그렇게 예수님의 뜻을 따라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개신교 신자들이 여러 가지 천주교 교리로 논쟁을 하자고 덤벼들지 모릅니다. 논리적으로 하자면 그 사람들이 이길 수도 있습니다. 웬만하면 논쟁은 피하십시오. 어차피 그렇게 달려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꿀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의 스트레스만 쌓일 뿐입니다. 논쟁을 피하는 것도 어쩌면 지혜입니다.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박해하는 자들을 피해 조용히 산골로 들어가셨고 그 분을 따를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어제 자동차의 바퀴가 펑크가 났습니다. 바람은 충격을 흡수해 줍니다. 자동차의 바퀴에 바람을 넣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굳이 이득 없을 논쟁을 하여 불필요한 충격을 자신에게 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태리에 처음 유학 가서 말도 잘 못 할 때, 이태리 신학생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니네 나라 기차 있어? 니네 나라 차 만들어?"
저는 기차도 있다고 하고 이태리에 많이 다니는 한국 차의 이름도 몇 개 대어 보았습니다.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였습니다.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해도 받아들일 의지가 전혀 없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신학생들도 그 이후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피할 땐 피하는 것이 어쩌면 뱀처럼 지혜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선택한 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은 욕망의 절제에 달려 있습니다. 상대적 욕망을 조절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절제한 탐욕이 불행의 근원입니다. 탐욕과 무지, 교만은 악한 삼형제입니다. 탐욕에 마음의 눈이 가려질 때, 저절로 뒤따르는 무지와 교만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그대로 통합니다. 무욕과 지혜, 겸손입니다. 전자가 악한 삼형제라면 후자는 하느님만을 찾는 이들이 지니는 착한 삼형제입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예언자 미카가 불행을 선언하는 악인들은 바로 탐욕과 무지, 교만의 악한 삼형제에 포로 된 이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현실입니다. 불의한 빈부의 양극화로 인해 얼마나 약하고 힘없는 이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요.
어느 분의 통찰에도 공감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욕망으로 나눌 때 행복지수가 나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욕망이 많으면 행복지수가 낮아 불행감을 느끼고 가진 것이 적어도 욕망이 적으면 행복지수가 높아 행복감을 느낍니다. 생존과 관련된 절대적 욕망은 가지고 태어나지만 상대적 욕망은 사회화되는 것입니다. 이 상대적 욕망에 제동을 걸면 걸수록 행복해 집니다.”
이 상대적 욕망의 자연스런 제동을 위해 영성생활입니다. 영혼이 충만할 때 저절로 해소되는 욕망입니다. 무절제한 탐욕은 치유 받아야 할 상처 받은 욕망이요 이래서 끊임없는 영성훈련의 필요성입니다.
“애타는 영혼을 흐뭇하게 하시고, 굶주린 영혼을 복으로 채우셨도다.”
아침 성무일도 시 시편 한 구절입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 영혼을 흐뭇하게 하시고 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영혼의 치유에 하느님과 더불어 제2성경인 자연의 도움도 절대적입니다. 어느 분의 고백입니다.
“저는 원래 자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그런데 끝없이 이어지는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마음이 치유되는 걸 느꼈어요. 어느 순간 내재해 있던 갈등과 상처, 미움과 증오, 원한과 집착이 다 사라져 버리더군요. 제가 이 길을 걸으면서 체중이 6kg쯤 줄었는데 단순히 몸의 비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비계도 함께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어느 분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사람들 백 마디 천 마디 위로보다 파도소리가 내 마음을 씻어줬고 꽃과 구름이 나를 위로해줬습니다. 그런 후에야 사람들의 위로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피조물 자연입니다. 우리 수도원에는 수려한 배경의 불암산이 큰 축복입니다. 불암산이나 주변의 크고 작은 산들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고 늘 평화로이 공존합니다. 언젠가 저녁 불암산을 보며 쓴 짤막한 시입니다.
“저녁 불암산, 참 고요하다. 깊다. 크다.”
마음이 고요하고 깊고 큰 사람이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바로 그러합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깊고 큰 사람이 될 때 저절로 절제되는 욕망이요 바로 이게 우리 영성생활의 목표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이들을 당신 종으로 삼으시어 당신의 영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을, 또 당신을 충실히 따르는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이 택한 종에 대해 그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마음이 고요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말씀처럼 고요한 중에 소리 없이 할 일 다 하시는 주님이시며 이런 주님을 체험해갈 때 저절로 마음이 고요한 사람입니다.
둘째, 마음이 깊은 사람입니다.
자비의 깊이이자 지혜의 깊이를 뜻합니다. 진정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마음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말씀처럼 주변에 대한 섬세하고 자상한 배려를 지닌 자비와 지혜의 사람이 진정 깊은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이 큰 사람입니다.
마음이 큰 사람은 빛나는 희망이신 주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세상 보이는 것들이 아닌 늘 생생히 현존하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살 때 큰 사람입니다.
아침 성무일도 중 시편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 앉히사, 바다의 물결이 잔잔해지니, 잔잔해져 좋아라 날뛰는 그들을 희망의 포구로 이끄셨도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이 택한 종인 우리를 희망의 포구로 이끄시고 당신의 영으로 충만케 하시어 고요하고 깊은 자비의 사람, 당신께 희망을 둔 큰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강태공이 주나라 문왕과 처음 만났을 때, 문왕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저의 할아버지께서 자주 말씀하시기를 머지않아 성인이 나타나 주나라를 번영케 하리라 하셨는데 선생님이야말로 그 분이십니다.”
강태공은 식견이 높고 지혜가 깊으며 인간의 심리와 정치는 물론 병법까지도 통달한 인걸이었습니다. 그는 문왕과 그를 뒤이은 무왕을 도와 은나라 주왕을 몰아내고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고, 그 공으로 제의 후에 봉해졌지요.
그러나 그것은 뒷날의 일이고, 젊었을 때 그는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낚시는 고기를 낚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고, 세월을 보내면서 때를 기다려 현군에게 등용되려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고기가 잡히지 않는 곧은 낚시 바늘을 드리웠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기를 잡을 수 없었고, 늘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궁핍한 가난을 견디다 못한 그의 아내는 그만 집을 나가고 말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강태공이 높은 자리에 올라서 수레를 타고 길을 가는 중에, 옛 부인이 앞을 가로막고서 강태공과 다시 합쳐지기를 청했답니다. 그러자 강태공이 말했다고 해요.
“그렇다면 어디 가서 물 한 그릇을 가지고 오시오.”
부인은 부리나케 물 한 그릇을 떠 가지고 돌아오자 강태공은 그 물을 길바닥에 쏟아 버리고는 말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는 이제 이렇게 되었다오.”
쏟아 부은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강태공과 그의 부인은 다시 합쳐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가톨릭 교리와는 맞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풀 수 없다는 불가해소성과 크게 어긋나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예를 들은 이유는 이 불가해소성이 깨져도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할 짓은 아예 하지 말자는 의미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서 후회할 짓을 끊임없이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회할 행동들은 쏟아 부은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이 역시도 다시 무를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천년 전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지요. 당시의 소외받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전해준 예수님을 왜 제거하려고 했을까요? 바로 자신들의 기준과 예수님의 행동이 맞지 않는다는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잘못된 판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으며, 이 잘못된 판단이 결국은 크게 후회할 행동이 되고 만 것이지요.
지금 혹시 후회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최대한 줄여나갈 때 진정한 행복이 우리 곁에서 자리 잡을 것입니다.
후회할 행동을 하나라도 줄입시다.
현명함은 경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비례한다(버나드 쇼).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쉬운 것(김홍식, ‘더 가깝지도 더 멀지도 않게’ 중에서)
어느 날, 고흐가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하는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사람의 가슴에는 포장용 천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는데 바로 천에 새겨진 글자 때문이었습니다.
‘Breakable(잘 깨짐)’ 그 문구를 보며 고흐는 자신의 무릎을 쳤습니다. “아하! 사람은 깨지기 쉬운 존재로구나!”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앞을 지나쳐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다시 보았는데, 그의 등에도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Be Careful(취급 주의)’ 고흐는 등에 새겨진 글을 보고 다시 한 번 무릎을 두드렸습니다. “맞아, 사람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는 거야!”
우리 주변에서 가장 잘 깨지는 것은 유리병입니다. 유리병은 쉽게 깨지고 한 번 깨지면 못 쓰게 됩니다. 그리고 깨진 조각은 사람을 다치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 유리병보다도 더 역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온도가 조금만 달라져도 깨지고 서운한 말 한마디에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 입은 마음은 깨진 유리 조각처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관계는 사람들의 마음이 연결될 때 형성되는 것입니다. 관계도 마음처럼 약하기 때문에 유리병처럼 쉽게 깨지고 상처를 입습니다. 특별히 조심해서 다루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립니다. 절대 깨지지 않는 관계란 없습니다. 모든 관계는 특별한 보호를 통해 관리될 때만 지속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관계는 관심과 배려에 의해 만들어지고, 부드러운 관계는 부드러운 미소를 통해 만들어지며, 좋은 관계는 좋은 것들이 투자되어야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제는 대부분 깨진 관계로 인해 생기는 것들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도, 사회적인 문제도 관계 형성의 실패로 인해 생겨납니다. 관계는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적당한 온도와 관심, 각자의 개성에 어울리는 대접을 통해 성숙하게 됩니다. 한 번 놓치면 떨어져서 깨지는 유리병처럼 조심하지 않으면 쉬이 깨지는 것이 우리들의 관계입니다.
‘Breakable(잘 깨짐), Be Careful(취급 주의)’ 잊지 마세요. 관계는 잘 깨집니다! 조심하세요!
연약함의 신비
조성숙 수녀님
어릴 때 본 영화 ‘쿼바디스’에서 나오는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군중들의 구경거리로 사자 밥이 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반항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서로 안고서 조용히 평화롭게 성가를 부르며 죽음을 기다리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한없이 무력하면서 동시에 강한 힘이 느껴지는 모습이었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해하는 열쇠를 이 말씀에다 두고 있는 듯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자신을 없애려고 모의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도 그냥 무력하게 물러나시는 예수님은 연약해보입니다. 그나마 조금은 제자들을 안심시켜준 것이 오늘 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미 이에 관한 예언자의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는’ 악과 정면으로 겨루지 않는 분,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군중의 이목을 끌려고 하지 않는 분,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꺾어지는 온유한 분. 바로 이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무지와 죄가 지금도 당신을 조롱하도록 버려두시는 연약한 하느님이십니다.
그 이름에 희망을
기정희 수녀님
하느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 다르고 하느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 십자가 사건이 그것이고, 미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날마다 새롭게 체험한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신다, 얼마나 쉽게 변화되고 상반된 감정을 가진 인간인지. 당신께 향한 열정이 있는가 하면 당신께 대한 배반이 있고, 당신을 섬기며 기쁨을 느끼는 반면 고통과 불편을 호소하고, 진실이 있는 반면 폐쇄적인 면도 있는 인간성 전체를 아신다. 끊임없이 환호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죽을 처지에 직면하는 예수님의 삶은 그분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사람들한테 버림받으신 예수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상처 입으신 하느님은 그럼에도 결코 복수하는 분이 아니시다. 병든 이들을 어루만져 치유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오늘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의 영이 머무는 사람,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알리는 사람, 너무나 온유하여 다툼도 소리 높임도 없는 사람,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사람,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에 민족들이 희망을 걸리라고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부른다. 불가에서 자(慈)는 사랑의 마음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을 말하고, 비(悲)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을 뜻한다. 산스크리트어 ‘카루나(karuna)’는 공감·동정·연민·함께 슬퍼함 등을 뜻한다. 그렇다면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동정과 연민과 슬픔을 함께해 주시며 없애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고 믿고 우리는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나 오해를 받을 때 나는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3)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린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시며 기꺼이 당신 목숨이라도 내주는 분이시다.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마음, 온유하신 예수님의 마음, 인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눈을 떠야 한다. 그분의 자비가 세상의 악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이름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남에게 알리지 말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남에게 알리지 마라.”
이 말 안에는 나를 알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 것이며 알리려는 노력도 하지 말 것이며 그래서 남이 모르게 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왜 알리려 하지 않을까?
영웅적으로 알리지 말라는 경우와 소시민적으로 알리지 말라는 경우와 겸손하여 알리지 말라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경우는 영웅적인 불고지입니다.
죽을 때까지도 자기를 생각지 않고 겨레를 위하여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합니다.
소시민적으로 자기가 한 일을 알리지 말라는 경우는 잘한 것이건, 못한 것이건 자기가 한 것이 알려지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기를 극복 못한 사람이 자기 안에 숨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오늘 복음과 복음의 여러 곳에서 당신이 하신 기적을 알리지 말라고 엄명하십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알려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결국 알려질 것을 알면서 겸손을 떠는 것이고 의도를 가지고 전술적으로 알리지 말라고 한 것일까요?
그럴리 없으시겠지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제가 그러하기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라는 인간은 도저히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나라의 선을 담을 큰 그릇이 못되기에 제가 한 작은 선도 담아두지 못하고 드러내고자 하는데 드러날 것을 알고 드러내지 않고, 그러므로 드러내지 않는 척하면서 드러냅니다.
왜 이럽니까?
내놓고 드러내면 다른 사람의 웃음꺼리가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러한 제가 저 자신에게 역겹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고차원적인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만큼 겸손하시기에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나라의 선을 담으십니다.
간장 종지의 물은 그 크기만큼 하늘을 비추고 담지만 큰 호수는 온 하늘을 비추고 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그 선을 당신 안에 담고 계시지 결코 헐값에 내놓지도 팔아버리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는 순간 하느님 나라와 그 선은 하느님 성을 상실합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 선은 누가 드러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드러납니다.
참된 계명의 실천을!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하시면서 계명이 아닌 율법에 매여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소홀히 하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 참조) 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무안을 당하게 되니까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지적 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고치려 할 때는 물론 처음에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자신의 더 큰 발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발전을 고사하고 퇴보하거나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드러나게 되고, 더군다나 하느님 앞에 감추어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는 입을 다물게 해도 알려지는 것이다. 진리는 침묵을 강요당할 수 있지만, 결코 침묵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냄을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남에게 알리지 말아달라고 명하시지만 그럴수록 더 그분의 명성은 펴졌던 것이다. 그러시면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따르셨던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면서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시면서 이렇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고 참된 길로 돌아오기를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에수님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분은 결국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의 사명을 이루시는 분임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과 비평은 우리 공동체에서도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며, 사회와 국가 안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태도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생각하고 실천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기 전에 나 자신을 성찰하고, 먼저 베풀고 사랑하는 삶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택한 종이신 예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그분이 주신 가르침을 먼저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한 은총을 구하면서 기도하자.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에 어떤 형제님께서 자신의 아내를 고속도로 휴게소에 그대로 둔 채, 차를 한참 몬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아내가 승용차에 타지도 않았는데 떠날 수 있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저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깊은 공감이 가더군요.
사제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제 동창들과 함께 쉬는 날, 어느 한적한 테니스장에서 운동을 하기로 했지요. 한 동기의 집에서 모여서 옷을 갈아입고서는 차로 테니스장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마치고서 뒷정리를 하고는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차가 없는 것입니다. 저를 이곳에 두고서 떠났습니다. 저는 장난 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아마도 이 근처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제가 타고 온 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믿었습니다. 내가 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저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10분, 20분……. 하지만 다시 오지 않더군요.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보편화 되어 있던 시절도 아닌지라, 연락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외진 곳이라 택시도 지나가지 않습니다. 배신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타지 않은 것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있으나 마나 한 존재인가?’
다행히 30분이 넘어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을 수가 있었고, 저는 그 택시를 타고서 동기들이 있는 사제관으로 갈 수가 있었지요. 그리고는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같이 제가 그곳에 혼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제가 느꼈던 서운함을 떠올리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남겨진 아내의 서운함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문득 우리들에 대한 주님의 서운함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즉,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나만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주님께서는 무척이나 서운하실 것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열차 안에 주님을 태우지 않고, 나만 목적지에 가면 그만이라는 착각을 하고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에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끼시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합니다. 그에 반해서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렇게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인생이라는 열차에 예수님을 태우려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 모습을 다시금 점검하여 보십시오. 과연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는지 아니면 나만 가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주님과 함께 가야 참된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만 바라보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할 일을 남겨 주어라('행복한 동행'중에서)
어느 유명한 중국인 기업가가 강연 중에 청중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은 훌륭한 성과를 이루셨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 기업가는 대답 대신 분필을 들더니 칠판 위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원을 완전히 다 그리지 않고 청중에게 되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에 사람들이 앞 다투어 대답했다.
"숫자 '0'이요."
"동그라미 아닌가요?"
"미완성된 일을 뜻합니다."
"성공이요!"
사람들의 대답을 한동안 조용히 듣고 있던 기업가가 다시 말했다.
"이것은 아직 다 그리지 않은 마침표(중국의 마침표는 검은 점이 아니라 작은 동그라미)입니다. 저에게 어떻게 이런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냐고 물어보셨죠? 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저는 일을 완벽하게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미완성된 마침표처럼 반드시 빈틈을 남겨 놓지요. 그리고 직원들에게 그 빈틈을 채우도록 했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는 빈틈을 남겨 아랫사람이 마무리하도록 해라. 이는 리더의 능력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성과를 높이면서 완벽한 결과를 이끌어 내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얼마 전, 동창 모임이 인천에서 있었습니다. 축일 날 따로 모이기가 힘들었기에 동창 모임을 통해서 서로 축하를 해주었답니다. 저희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한 잔, 두 잔……. 이제 그 잔 수가 늘어나면서 저의 체력도 점점 힘을 잃더군요. 왜냐하면 저는 술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관계로 남들보다 일찍 잠들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평소에 거의 술을 먹지 않는 저로써는 엄청난 무리를 해서 술을 마셨지요. 그리고 한 동창의 집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몸이 가렵기 시작합니다. 아마 모기가 있어서 저를 물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술을 마셨고, 늦은 시각이라 너무나 피곤했습니다. 그 모기를 잡고서 자는 것도 귀찮았습니다(술 많이 드시고 그냥 주무신 경험이 있으신 분은 저의 마음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잤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또 가렵습니다. 아마 또 물린 것 같습니다. 모기에게 물린 부분이 너무나 가려웠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짜증을 내면서 물린 부위를 박박 긁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너무나 시원했습니다. 하지만 긁는 것을 멈추는 순간 더 가려웠습니다. 그리고 모기에게 물린 부분이 뽈록 부어올랐습니다.
사실 모기한테 물리면 가려운 것이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가렵다고 박박 긁으면 어떻게 될까요? 더 가렵고, 그 부위가 부어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술김에 가렵다고 한참을 긁었던 것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에서도 이런 식으로 나도 모르는 무의식중에 긁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박박 긁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그래서 더 힘들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남에 대한 판단 섞인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들은 남에 대한 말을 너무나 쉽게 내뱉습니다. 그리고 남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이로부터 듣게 되면,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상관없이 또 다른 사람에게 건넬 때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들은 그대로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이야기에 자신의 어떤 사견도 포함되어 없는 이야기까지 추측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남에 대한 판단 섞인 말들이 바로 나도 모르는 무의식중에 나오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마치 모기한테 물렀을 때 긁어서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것처럼,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들고 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고쳐주신 뒤에,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릇된 판단을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요. 그리고 그 판단을 밀고 나갑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고 자신들의 삶에 유익한 말씀을 해주시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죄인으로 판단합니다. 또한 그 판단을 다시 번복할 수가 없어서 확실한 죄인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지요.
앞서 모기 물린 부위를 긁으면 긁을수록 그 부위가 부어오르고, 더 간지러워지는 것처럼 이들 역시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 것은 아닐까요?
나의 판단에 대해서 우리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무조건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그릇된 판단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모습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남에 대해서 말하지 맙시다.
웃음은 좋은 화장이다('좋은 글' 중에서)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 중에 사람만 웃고 살아간다
웃음은 곧 행복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요즘 사람들은 웃음이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좀더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힘차게 웃을 수 있다면 모든 일에도 능률이 오를 것이다
유쾌한 웃음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건강과 행복의 상징이라고 한다
여섯 살난 아이는 하루에 삼백 번 웃고 정상적인 성인은 하루에 겨우 열일곱 번 웃는다고 한다
바로 체면을 차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쾌한 웃음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웃음은 좋은 화장이다
웃음보다 우리의 얼굴 모습을 밝게 해주는 화장품은 없다
그리고 웃음은 생리적으로도 피를 잘 순화시켜주니 소화도 잘되고 혈액순환도 물론 잘된다
우리의 삶은 짧고도 짧다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남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 남도 행복하게 해누는 사람이다
신나게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신다면
남상근 신부님
끝까지 믿어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한 번 더 기다려주시기에 하느님께서는 내게 실망하지 않으시나 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포기하시지 않는데,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시는데 내가 먼저 포기한다면, 내가 지레 실망한다면 그것은 너무 앞질러가고 있는 것입니다.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앞질러서야 되겠습니까? 하느님만이 마지막이라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 틀렸어, 다 끝났어, 길이 없어, 되는 일이 없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꺾지 않으셨는데 꺾였다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끄지 않으셨는데 물을 부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여전히 내게 희망을 걸고 계시는 한 아무것도 끝난 것이 아닙니다. 왜 걱정하십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근심하십니까? 근심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십니까? 두려워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부족할 따름입니다.
봉사는 주님이 주신 기쁜 상
임인자
제가 다니는 성당은 참 작은 곳입니다. 주일미사에 나오는 신자들은 100명 남짓 되고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어느 형제님이 아픈지, 어느 자매님이 누구랑 친한지 단박에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이처럼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폐광촌에 들어선 카지노로 인해 열악한 교육환경에 놓여진 청소년들을 위해 신자들이 기도하며 모은 정성으로 ‘흑빛 청소년 문화센터’를 건립·개관했고 매달 지역주민들과 음악회를 엽니다. 매년 7월이 되면 본당의 날을 맞이하여 이곳에서 살다가 외지로 이사 간 교우들을 초청해 본당이 세워진 것을 함께 감사하며 축제를 합니다. 나눔의 잔치가 있을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는데 누구보다 열심인 분들은 성모회 회원입니다. 60세 이하는 청년이라고 할 정도로 연세 드신 분들이 많지만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봉사해 주십니다.
작년 12월 본당 설정 30주년을 맞아 문집을 만들었습니다. 이 문집을 보고 기뻐할 사람들을 떠올리면 밤을 새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30주년 기념사업에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나 문집이 나오자 난리가 났습니다. 글을 좀더 고치지 않았다거나 문집에 나온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등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연세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저에게 다가와 “마리아, 정말 고생 많았어. 내가 언제 책에 나오겠어? 정말 고마워.” 하며 손을 꼭 잡아주셨을 때 내 마음속의 잘난 척하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건강이 별로 안 좋은데도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부침개를 만들고 홍어회를 무치고 튀김도 맛있게 하는 분입니다. “힘드시죠?” 하면 “이렇게라도 불러주니 감사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린 봉사를 할 때 이왕이면 폼 나는 것을 좋아하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때론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것이 큰 권력이라도 되는 양 군림하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4)라는 말씀대로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봉사하는 사람은 벌써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 그것 자체가 기쁨이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상이기 때문입니다.
측은지심
김권일 신부님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하여 시비를 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행을 해도 된다는 설명을 하시며 안식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신다.
이와 같은 내용 다음에 오늘 복음이 위치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한다. 그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셨지만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라고 말한 이사야 예언처럼, 사람들을 섬기러 오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이들을 안아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셨으며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바리사이들에게 반대를 받으면서도 그리고 심지어 바리사이들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예수님 모습을 통해 측은지심을 생각해 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보존성의 욕구가 있다. 이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배고프면 내가 먼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어하고, 추우면 내가 먼저 몸을 따뜻이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기 보존성의 욕구 외에도 타인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측은지심이 있다. 측은지심이 있기에 인간은 자기 보존성의 욕구를 지녔음에도 동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자연적 욕구를 넘어설 수 있는 위대함을 지닌다.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휘는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성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자기 보존성의 욕구에 눈이 가려 자기만의 만족에 함닉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 안에 있는 측은지심을 무한히 발휘하여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제가 처음에 ‘빠다킹’이라는 별명을 중학교 학생들에게 들었을 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여러분에게 “왜 이렇게 목소리가 느끼해요?”라고 말하면 기분이 좋겠습니까? 저 역시 그랬습니다. 목소리가 느끼하다고 ‘빠다킹’이라고 별명을 지어주니 좋게 받아들일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들아! 신부님이 목소리가 조금 느끼할지는 몰라도 잘 생겼잖아. 뭐 ‘장동건 같다’ 식의 별명은 없니?”
그랬더니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냥 ‘빠다킹’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별명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솔직히 저의 외모에 대해서 불만이 전혀 없습니다. 이 정도면 제게 과분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만들어주신 부모님께 너무나 감사하고 있지요. 그런데 외모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조각 미남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배우들도 스스로를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미남배우의 선두주자 장동건 씨는 인터뷰 중에 “내가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했고, 원빈 씨 역시 스스로의 얼굴을 가리키면서 “그다지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여성 팬을 가지고 있는 강동원 씨는 “내 얼굴 너무 못생겼어.”라는 막말까지 하지요. 현빈 역시 인터뷰 중에 “연기를 하면서 하루에도 수백 번 씩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보지만, 잘 생겼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답니다.
저는 제 얼굴이 이 정도면 아주 만족하고 있는데, 제가 봐도 너무나도 멋지고 잘 생긴 사람들이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 아닐까요?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을 우리는 겉모습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더 보기에도 좋을까요? 당연히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그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불평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지금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면서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나를 지으셨으니 귀한 나라는 자신감을 갖는다면 우리들은 더 큰 기쁨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모든 민족들이 희망을 거는 이름입니다. 우리를 더욱 더 큰 기쁨과 행복 속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부정적인 생각과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힘들게 사십니까?
주님과 함께 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 속에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의 이름이 바로 우리에게 커다란 희망의 이름이 될 것입니다.
현명함은 경험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비례한다(버나드 쇼).
미인이란?
2,000년 전에 만들어진 부조가 발굴되었는데, 이 부조에는 당시의 미인 얼굴이 새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묘사된 얼굴은 현재의 미인과 너무 다른 것입니다.
이중 턱이고, 목에 살이 많은 것을 볼 때 분명히 체중이 엄청나게 나갈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이 어떻게 미인일까 싶지만, 2,000년 당시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라고 하네요.
당시에는 통통한 얼굴과 몸매가 다산성과 모성을 상징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오히려 과체중인 여인이 아름다운 여인의 평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미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바뀝니다. 지금 현재는 마르고 호리호리한 사람이 멋있고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과거 뚱뚱한 사람들이 인정받던 시대처럼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변하는 이러한 흐름에 우리가 굳이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지금의 모습이면 충분하다는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그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내면입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나라의 기준을 따르는 우리들의 마음이 될 때, 가장 올바르고 기쁠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밤늦게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면 종종 포장마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 포장마차에 들어가서 어묵을 꼭 사 먹습니다. 이 어묵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단순히 기분이나 분위기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만들면 거리 포장마차 같은 어묵 맛이 도대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요리 전문가의 말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기분이나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어묵 맛이 좋은 것이랍니다.
어묵은 은근한 불에 오래 익혀야 제 맛이 나는데, 집에서는 그렇게 오랫동안 익힐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어묵 한 그릇 먹겠다고 집에서 하루 종일 끓일 수 없지요. 그래서 30분가량이면 먹을 수 있도록 센 불에 빨리 익히는데, 이 상태에서는 그 맛을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빨리하면 무엇이든 좋은 것 같습니다. 시간은 금이라고 하니까 금 같은 시간을 통해서 빨리 해결을 하면 돈 버는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기다림의 시간, 느림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무조건 ‘빨리빨리’, 무조건 성급하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은 큰 잘못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이집트 시나이 산을 새벽에 등반했던 기억이 납니다. 동트는 해를 바라보기 위해 새벽 일찍 산 정상을 향해 걸어갔지요. 그런데 막상 정상에 도착하니 해가 뜨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고, 정상이 너무나 추운 것입니다. 빨리 해가 뜨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 추위에서 벗어나길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렇게 마음먹었다고 해가 빨리 떴을까요? 아닙니다. 해는 강제로 솟구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서두른다고 해가 뜨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역시 때로는 기다려야 할 때가 있으며 또한 느리게 가야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서두르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들을 고쳐주면서 군중들에게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왜냐하면 아직 당신을 알릴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일분일초라도 빨리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음을 알리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아직 당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알린다는 것은 잘못된 믿음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만약 함구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 명이라도 더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자로 만들었다면, 어쩌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완수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 진정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렇게 느린 길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너무 ‘빨리빨리’를 외치다가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조심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산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헤아리는 것이다.(에릭 호퍼)
괜찮아요
언젠가 어느 성당에서 강의를 마친 뒤, 신자들로부터 함께 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로 사진을 찍기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성당이 더워서 땀으로 범벅이 되어 제 모습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지요. 또한 몸 컨디션도 좋지 않아서 사진을 찍으면 별로 좋은 모습이 나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중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자매님, 제가 지금 꼴이 말이 아니라서요. 나중에 찍으면 안 될까요?”
이 말에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괜찮아요.”
이분에게 ‘자매님은 괜찮을지 몰라도, 저는 괜찮지가 않아요.’라고 화를 내고 싶었습니다.
결국 형편없는 모습을 하고서 사진을 찍기는 했지만,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기왕이면 괜찮은 모습이 찍히는 것을 원하지, 형편없는 모습이 찍히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문득 저 역시 남들의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나만 괜찮다는 생각으로 말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나만 괜찮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괜찮은 것’을 먼저 생각해야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세요? 나만 괜찮은 것... 너무 이기적인 것 같지 않나요?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존재 자체로 선물이요 희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주 우울해집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젊은이들의 어깨가 무겁습니다. 축 쳐져 있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젊은이들만 그런가요? 연세 드신 분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고인지 모르지만 우리의 이 시대 절망과 좌절과 환멸의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마냥 주저앉아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이럴 때 일수록, 특히 희망의 종교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일수록 희망의 전도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절망이 깊어갈수록 더 추구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비행기 타고 10시간은 족히 걸리는 희망의 땅 미국일까요? 지구 반대편인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 위치한 희망봉에서일까요?
그리고 그 희망은 언제 찾아야 할까요? 세월이 흐르고 흐른 먼 훗날 백년 뒤, 천년 뒤에? 우리의 젊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호호백발이 다 되어 죽음을 앞두고서?
절대 아니겠지요. 희망은 멀리서, 어느 다른 하늘 아래서 찾을 일이 절대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서,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내 가족들 안에서, 내 직장 안에서, 내가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 찾을 일입니다. 그 희망은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서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 만나다보면 참으로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그야말로 고통덩어리입니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인이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실감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타인 없는 나야말로 지옥입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힘차게 살아갈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사람, 비록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다할지라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살아볼만한 세상임을 알려주는 사람, 존재 자체로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비록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다보니 갖은 상처를 주고받지만, 매일 티격태격 매순간 좌충우돌하는 피붙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보루로 남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시름과 한숨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언을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오늘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다시 선물로 베푸시는 희망의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존재 자체로 그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선물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투신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분
이영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대조적인 두 모습이 보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없애 버리려고 조용히 숨어서 모의하는 바리사이, 또 하나는 꺾인 갈대도 살리려고 조용히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시는 예수님입니다. 한편은 죽이기 위해서, 다른 한편은 살리기 위해서 둘 다 조용히 활동합니다. 바리사이는 성한 갈대를 부러뜨리려 하고 타는 불을 꺼 버리려 합니다. 예수님은 부러진 갈대를 살리려 하고 연기 나는 심지를 다시 태우려고 합니다. 집 짓는 자들이 필요 없다고 내버린 돌을 예수님은 모퉁이 돌로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성령도 악령도 우리 안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살리기 위해서 또 하나는 죽이기 위해서…
그러나 마지막에 승리하는 것은 성령이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께 희망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서 하시는 일에 나를 맡겨 드려야 합니다. ‘성령님 나를 도우소서.’라는 마음보다는 ‘당신 성령이 하시는 일에 나를 맡겨 드리나이다.’라는 마음으로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부러진 갈대’ 같은 나는 ‘불이 꺼져 연기만 나는 심지’ 같은 내 마음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오소서! 성령님. 어서 오시어 제 마음 안에서 당신의 일을 하소서.’ 우리는 서로에게 보내진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등산로에서
신재용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렇게 자신하던 건강에도 문제가 저절로 생겼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목욕탕에서 체중계 위에 올라선 순간 경악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겨우 170센티미터쯤 되는 키에 86킬로그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숫자. 그래서 시작한 것이 등산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힘들었지만 주위에 산이라고 생긴 곳은 모두 올랐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와 함께 성경 한 구절을 읽고 난 다음, 등산배낭을 메고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하느님을 알고 인생을 배웠습니다. 편안한 길이라고 너무 기뻐하지 말아야 하며 자신감에 넘쳐 주위를 무시하는 일은 절대 금물이고 항상 겸손해야 함을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활동하신 것이 아님을 등산로 묵상에서 알았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겸손한 가운데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려고 활동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러지 못했음을, 저 자신을 세상에 알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음을 인정하며 회개합니다. 저는 그래야만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귀가 너무 얇아 남들이 지금 세상은 자기광고 시대라고 말하는 것을 믿고 저의 좋은 점만 알리려 무척 노력했기에, 약점은 감추고 장점만 과대 포장한 지난 시절이 밉기만 합니다.
겸손이란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웃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아야 하며,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도움을 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그래야 주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음도 배웠습니다. 오늘도 정상에서 천국을 보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내 몸의 살아 있는 반응을 느끼며 산을 내려옵니다.
회사와 집을 오가는 일상의 반복에 지친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회사 안에서의 업무,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역할 등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던 그는 점점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의 상담을 받았지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 형제님을 데리고 병원을 빠져나와 병원 옆의 자갈길로 갔습니다. 의사는 어리둥절해 하는 남자의 어깨에 큰 광주리 하나를 얹어 주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돌을 한 개씩 주워 담으세요. 그리고 어떤 기분인지 느껴보세요.”
남자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의사 선생님의 말씀처럼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돌멩이를 광주리 안에 주워 담았습니다. 이윽고 길 끝에 이르자 쌓인 돌의 무게가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지요. 돌덩이라고 가득 찬 광주리를 짊어진 남자는 자갈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의사를 보자마자 어깨가 무거워 죽겠다며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것이 바로 삶을 힘겹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빈 광주리를 지고 오지만 인생을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세상에 있는 돌을 하나씩 주워 담아야 합니다. 광주리에 담긴 돌은 당신이 얻은 재산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어깨를 누르는 책임이 되기도 하지요. 책임이 큰 사람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어깨의 돌이 무겁다며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돌을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광주리가 가벼워져서 신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길의 끝에 설 때는 어떨까요? 텅 빈 광주리만 어깨에 짊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편한 길. 그러나 인생의 끝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든 길이 인생의 끝에서 커다란 선물이라는 행복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십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편하게 모든 것을 이루실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반대의 야유가 아닌 찬성의 환호를 받으면서, 편하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편한 길을 선택하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생사권을 쥐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타협하기 보다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직접 보여주셨고, 그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증명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분 사랑의 삶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 과정은 쉽지 않겠지만, 바로 그때 우리 역시 인생의 끝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나 그 사랑을 성장시키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랑도 결혼후 반세기가 지나기 전까지는 완벽한 사랑이 무엇인지 말할 수가 없다.(마크 트웨인)
희망
넬슨 만데라, 그는 D급 죄수였다. 최악의 정치범인 D급 죄수의 면회는 6개월에 한 번, 편지도 한 통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시계라는 건 있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었으며 갈수록 죄책감만 늘어갔다. 간수는 일부러 그 신문기사를 오려 그가 보도록 했다. 그를 더욱 괴롭히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겠지 여기며. 독방에 갇힌 지 4년째 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듬해에는 큰아들마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조차 없었다. 가족 역시 14년째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와 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로 집에서 쫓겨나, 고립된 흑인 거주 지역으로 끌려갔다. 둘째 딸은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라는 하소연뿐이었다.
누군가 자신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삶은 절망 그 자체다. 이 끔찍한 무력감 앞에서 그는 아직도 더 견뎌야 하는 것인지, 얼마나 더 이대로 견뎌야 하는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14년 동안이나 보지 못한 맏딸이 자식을 낳았다고 찾아왔다. 면회가 고통스러울 법했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 그때 편지로 말씀드린 제 딸의 이름은 정하셨나요?"
그들에게는 할아버지가 손자의 이름을 지어주는 풍습이 있었다. 맏딸은 그 무수한 고난의 시간을 견뎌 어른으로 성장했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이렇게 딸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쪽지를 내밀었다. 딸은 그 쪽지를 조심스럽게 펼쳐서 보고는 종이에 얼굴을 묻고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겨우 참아냈다. 종이에 묻은 잉크가 눈물로 얼룩지고 있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아즈위(Azwie, 희망).'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언젠가 바람이 불어오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쩌면 우리 인간은 상처투성이뿐인 갈대, 세찬 바람이 불어오면 어쩔 수 없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너무도 쉽게 상처 받습니다.너무도 쉽게 기가 꺾입니다. 너무도 쉽게 넘어져 버립니다.
오늘 복음도 인간을 ‘부러진 갈대’로 비유합니다. 인간을 갈대로 비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약하다는 것입니다. 약한 갈대가 부러지기까지 했으니, 이는 구제불능이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뜻입니다. 갈 데 까지 갔다는 표현입니다.
‘부러진 갈대’는 다름 아닌 오늘의 우리들입니다.
이런 구제불능인 우리, 부러진 갈대인 우리, 삶이 산산조각 난 우리이지만, 자비의 하느님께서 계시니 절망하지 않습니다. 치유자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손길이 부러진 우리를 고쳐주실 것이니 슬퍼하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로 일어설 수 없는 나약한 우리들이지만, 언젠가 하느님 사랑의 바람이 불어오면 설레는 마음으로 다시 설수 있는 우리들이기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씩씩한 척 하지만, 겉으로는 강한 척 하지만, 사랑에 목말라, 사람이 그리워, 심연의 외로움에, 돌아서서 눈물 흘리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비의 하느님께서는 부러진 갈대인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당신 사랑의 손길로 내 상처를 싸매주시고 낳게 하시며, 언젠가 따뜻한 봄바람을 보내시어 나를 다시 서게 하실 것입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한 하늘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부러진 갈대였습니다. 인생길 굽이굽이 허물로 수놓아져 있습니다.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떠올리기만 하면 그저 ‘아!’하는 탄성만이 절로 나옵니다.
그분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듯 수도 없이 넘어지는 나를 내치지 않고 그저 끝없는 연민의 눈길만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듯, 생과 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땅과 생명의 땅의 교차로에서 서성거리던 저를 재빨리 낚아채셔서 당신 사랑의 울타리로 건너오게 하셨습니다.
상처뿐인 가련한 새 한 마리 그분께서 마련하신 둥지 안으로 내려앉으니 안심하고 날개를 접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고 또 묘하신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부서진 갈대는 꺾지 않으시나, 뻣뻣한 갈대는 꺾으십니다. 부서진 마음은 어떻게 해서든 감싸주시며 보살펴주시나 완고한 마음은 인정사정없이 쳐부수십니다.
오늘 내가 ‘부러진 갈대’라고 절대로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치유의 손길이 멀지 않았습니다.
오늘 내가 불이 다 꺼져 ‘연기 나는 심지’라 할지라도 결코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불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희망을 걸어라.
이훈 신부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현대 세상도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의하는 그 순간에도 많은 군중은 희망을 그분께 걸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희망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세상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없애고, 사랑의 길을 가리고, 예수님을 고통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착각입니다. 예수님 고통의 길만을 가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의 길이 구원을 준다면 예수님은 고통의 길만을 걸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자비의 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의 길도 사랑 때문에 걸으셨습니다. 사랑이 없는 십자가의 길은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현대 세상은 어느 곳에 희망을 두는지요? 경제, 학식, 명예 등등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이 제외될 때 세속적이 됩니다.
아무리 세속적인 것이라도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면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에 희망을 두고 있는지,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하는 세상에 희망을 두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정 우리는 세속의 그 무엇인가에 희망을 두고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자문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하심
임원지 수녀님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어디를 간 것인가? 좋은 일 하라는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예수님이 좋은 일 하시는 것을 보고 회당을 나가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했단다. 나쁜 일을 했으면 시기 질투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좋은 일을 자기들보다 더 잘하는 것이 샘이 나서 그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나쁜 일을 했으면 떳떳이 죽일 수도 있을 텐데 좋은 일을 하셨기에 떳떳이 죽일 수가 없으니 모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물러가시어, 알리지도 못하게 하시면서도 올바름을 선포할 예언자의 말씀을 이루시겠다고 하신다.그분이 강하다는 표시는 부러진 갈대를 마저 꺾지 않으시는 데, 꺼져가는 심지를 마저 끄지 않으시는 거기에 오묘하게 존재하지 않는가?
존경하는 사진작가의 블로그에 들어가니, 자기소개에 ‘likes 풍경, dislikes 질투, 시기, 모략’이라 올라 있었다. 그 표현에 나는 기쁘기도 했지만 잠시 슬프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찾아 나누는 그분의 맑은 마음, 그동안의 내가 모르는 아픈 사연, 그리고 해방이 보였다.
7월의숲이 조용하다. 봄철에지줄 대며 짝을 찾았으니지금 쯤 어린 새들이 태어나 자라느라고 조용한가? 지난봄 우리 집 앞산에서 호랑지빠귀(혼새)가 이른 새벽에 울었다. 무슨 소리인가 두루 물었더니, 뱀이 운다고 했다.
뱀이?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호랑지빠귀 바로 그 새인 것을 알아냈다. 보이지 않으니 짐작으로 뱀 소리가 된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보는 십자가의 부활을 거친 역사의 확신이자 믿음이다. 우리 삶에 주님 계심을 믿고 희망하자. 깜깜할 때는 기도하자.기도하는 자는 이기리라.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공동체의 품격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09년도도 반을 보내고 저희 정동 수도원은 지난 6월에 같이 피정을 하며 전반기 평가를 했습니다.
기도와 전례 생활, 형제적인 공동체 생활, 사도적 활동 그리고 가난 생활에 대해 공동 평가를 하였는데 대다수 형제들이 형제적인 공동체 생활에 대해 좋게 평가를 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도우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 전체적으로 친교와 소통이 잘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었으며 공동체가 매우 품격이 있는데, 특히 잘못하고 약한 형제를 공격하지 않고 감싸는 면에서 품격이 있는 공동체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자기가 사는 공동체에 대해 불만이 있기 마련인데 저희 공동체는 이 면에서 놀랍게도 좋게 평가를 한 것입니다.
실제로 기도와 전례 생활에서는 그리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고 불만족스러운 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도 실제로 나왔습니다.
공동체의 품격은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품격이 높은 공동체란 앞서 보았듯이 잘못하고 약한 형제를 소외시키거나 제거하려들지 않고 오히려 감싸고 북돋우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용한 이사야서의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처럼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부러진 갈대는 쓸모없다 아예 꺾어버리고 연기 나는 심지는 성가시다 아예 꺼버리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얼마나 야비하고 천박합니까?
이런 공동체는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지극히 가혹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 공동체가 바로 이러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매우 약하고 오히려 참혹하게 짓밟습니다.
용산에서 일어난 참사로 가족들이 죽었는데도 정부 차원에서 잘못했다는 사과 한 마디 없고 시민 차원에서 안 됐다고 위로를 전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성가시게 군다고 억압을 합니다.
그러니 서민에게 다가간다고 대통령이 시장에 가 떡볶이를 아무리 먹어도 이렇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성이 떨어집니다.
아름다운 서울시를 위해 노숙자, 세입자, 노점상을 쓰레기 취급하는 그런 공동체는 겉으론 아름다워도 속으로 악취가 나는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있습니다.
앞서 본 노숙자, 세입자, 노점상은 물론 장애인들과 성적 소수자들, 더 이상 가정의 문제가 아닌 노인들과 어린이들, 외국인 노동자와 새터민들, 이들을 우리 공동체가 방기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우리가 얼마나 품어주고 보듬어주느냐, 또 이들을 위한 사회적 기업이 얼마나 늘어나느냐, 그만큼 우리 사회는 품격 있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서> : 오직 은총으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느님
경규봉 신부님
하느님께서 이집트인의 맏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시자 파라오는 눈물을 머금고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보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나일 강 동쪽 삼각주에 있는 도시 라므세스(이스라엘의 강제노동으로 건축된 도시 : 1,11)를 떠나 에담으로 가는 길목인 수꼿으로 갔다.
장정만 60만 가량(민수 1,46-47)이었으니 여자와 어린이들, 그 밖의 많은 잡식구들까지 계산한다면 대단한 수효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났다. 야곱이 가나안에서 이주한 때부터 시작하여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창세 15,13) 400년 이상 이집트에서 압제를 받다가 떠난 것이다.
그날 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내시려고 밤새워 지켜주셨다. 이 밤은 오랜 고통과 속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기쁨의 밤이다. 이스라엘의 후손은 모두 다 이 밤을 대대로 지켜야 한다(12,14).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이들을 모조리 쳐 죽이셨다. 왕위에 오를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땅굴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에 이르기까지 다 쳐 죽이셨다. 그러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한밤중에 모두 일어났다. 이집트에서는 곡성이 터졌다. 초상나지 않은 집은 한 집도 없었던 것이다.”(출애 12,29-30)
하느님께 대항하고 거부하며 완고하게 고집을 피우는 파라오로 인하여 이집트에는 전에 없던 대재앙이 일어났다. 파라오는 하느님을 믿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한다고 하여 그 대가를 치를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느님께 있어서 당신 백성은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며, 당신 백성을 박해하고 억압하는 것은 곧 당신을 박해하고 억압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때문에 이집트에는 모든 맏이들이 죽는 대재앙이 그날 밤에 일어난 것이다.
그 밤은 곧 과월절 밤이다. 이 밤에 이집트인에게는 하느님의 심판이 내리고, 이스라엘인에게는 하느님의 보호가 있었다. 과월절은 이스라엘 모든 절기 중 밤에 지키는 유일한 절기로서 이 밤은 아빕월 14일 저녁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시어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신 이 날을 기념하여 대대로 후손들에게 이 사건을 들려주었으며, 7일 동안 이 날을 기념하며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13,6). 또한 사람의 맏이와 짐승의 맏배를 하느님의 몫으로 돌렸다(13,12).
동시에 이 밤은 구세사 안에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을 미리 보여주는 밤이기도 하다. 주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요한 6,51)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3-5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한 잔을 드시고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1고린 11,23-25).
주님께서는 최후만찬을 하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셨던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풀려나와 자유를 얻고 새로운 삶을 얻었듯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기 위하여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어린양의 고기마저도 가족끼리 나누어 먹었다. 하느님께 바친 것도 전혀 없다. 다만 그들은 모세의 지시에 따라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랐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선조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만,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오직 아버지의 은총으로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상한 갈대에 대한 연민
오늘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상한 갈대라고 하셨습니다. 무수한 갈대를 바라보시며 저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심판의 그 날까지 아무리 상한 영혼일지라도 우리를 사랑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갈대는 아주 연약하며 쉽게 변합니다. 우리 인생 역시 갈대처럼 변하기만 할 뿐 아니라 매우 연약하여 쉽게 쓰러집니다. 그러한 우리일지라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1. 주님은 상한 갈대에 대한 큰 기대를 갖고 계신다.
공부를 못하는 자녀를 보고도 부모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인 우리지만, 그런 우리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대나무 갈대는 속은 비었으나 곧게 자랍니다. 이 곧게 자란 갈대는 잡초와는 달리 약하지만 쓸모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같은 상한 갈대를 인정하시어 도구로 사용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갈대를 가지고 피리를 만들어 노래를 부르듯 우리 역시 상한 갈대지만 주님께 시와 노래로 찬미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상한 갈대를 소생시키셔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주님을 높이며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2. 갈대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가만히 갈대를 바라보면 매듭이 있습니다. 이 매듭이 있음으로 해서 옛날부터 길이를 재는 자로써 사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캐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경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바로 잣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한 갈대지만 하느님의 도구로써 모든 것의 잣대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습니다.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모든 것의 표준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3. 상한 갈대는 주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쓰임받을 수 있다.
이 상한 갈대는 주님의 손에 붙잡힐 때 비로소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홍포를 입고 머리에는 가시 월계관을 손에는 갈대를 들고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 말해줍니다. 홍포는 왕이 입는 것이며 갈대는 왕이 쥐고 있는 포를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임금으로써 임금의 권세를 쥐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상한 갈대지만 주님께서 왕이심을 증거하는 권세의 갈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갈대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야할 것입니다.
묵상종합입니다.
모두가 상하고 죄로 인해 얼룩진 갈대입니다. 비통과 파탄으로 우리는 모두 상한 갈대처럼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붙잡아주시는 갈대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갈대임을 아는 신자는 그렇기에 겸손하며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연약하고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하느님 손에 붙잡힌 갈대로서 겸손의 머리띠를 두르고 하느님께 쓰임받는 잣대가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우리는 늘 많은 잘못을 합니다.
남을우
제가 사는 곳은 어떤 도회지보다도 자연과 가깝습니다. 봄이 되면 텃밭에 밭을 일구고, 쑥도 뜯고, 나물도 캐고 그리고 만든 음식을 다정한 이웃들과 나누며 정겹게 살아갑니다.
주일 미사가 끝나면 교우들끼리 모여 하느님을 향한 이야기도 나누지요. 지난주에는 연령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염하면서 느낀 감동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생전에 술만 먹고 나쁜 짓은 다 했을 거라던 어떤 사람이 세상을 떠나 염을 하게 되었을 때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고 평화로운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죽을 때 통회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보시는 기준과 우리가 보는 기준은 다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늘 많은 잘못을 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성과 용서를 청하며 사는 삶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타당성만을 찾는 삶은 아무리 하느님을 믿는 자녀라 하더라도 건조한 삶의 연속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방인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마태 12,21)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전통적인 의미로는 유다인이 아닌 사람들을 이방인이라고 말하지만 오늘날엔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 하느님을 알아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 아닐는지요? 생전에 술만 먹고 나쁜 짓을 하던 그 사람은 한때 ‘이방인’이었지만 하느님의 품에 안겨 용서를 청한 그 순간부터 이방인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회개하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분의 이름에 희망을 거는 사람이 하느님의 귀염둥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러나시는 예수
강호성 신부님
우리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배고픔과 어려움보다 문자만 남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힘쓰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보다도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호세아 6:6)이라고 하시면서, 율법에 매여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소홀히 하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분에서 무안을 당하고 물러나서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합니다. 이는 단지 무안을 당해서 만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자신 있어 하며, 평생을 살며 연구하고 가르치던 율법의 근간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지식이 참 지식이며 결코 바뀔 수 없는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그것을 흔들고 참된 의미를 이야기했을 때 이들은 위기의식까지 느꼈을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있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처럼 대를 이어오며 율법을 연구하던 사람도 아니고 힘이 있거나 재물이 많은 존재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들보다 더 의미 있고 권위 있는 이야기들 해대니 당해낼 재간이 없고 이는 곧 자신들이 밥그릇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으면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 법입니다. 기득권을 잃을 수는 없으니 대안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없앨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잘못이 있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지적 받았을 때 있는 그대로 솔직히 인정하며, 더 나은 진실을 따르려고 하면 한 때는 어렵지만 크나큰 발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은폐하려고 하면 더 큰 잘못을 꾸미게 되고 그것으로 안될 때, 또 다른 흉악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다 드러나게 되고, 더욱이 하느님 앞에 감추어질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 무죄한 자의 고통과 억울함은 언제나 하느님께서 드러내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밀고 당기기의 명수이신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채시고 그 자리를 물러나십니다. 아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으시기에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기와 무모함을 혼동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충동할 십자가의 죽음 전에 해야 할 일을 위해 그곳을 떠나셨다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모이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어떻게 처신했었고, 군중들은 얼마나 흥분을 잘 하는 가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메시아는 힘으로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사랑의 봉사자요, 왕위에 올라앉아 있는 이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자 임을 가르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야 만 참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널리 세상에 퍼져야 했던 것이기에 예수께서는 그곳을 떠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다보면, 굳이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도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흔히 겪을 수 있는 그런 충돌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 사이에서도 있을 수 있고, 형제 자매들 사이에도, 교회 단체 모임 속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것이고, 사회와 국가 안에서도 그 모습을 종종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바라보도록 합시다. 혹시 스스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느 곳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닌지 잘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율사들처럼 그렇게 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부분은 과감하게 떨쳐낼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된 전통은 지키기보다는 깨트리는 데 맛이 있다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만이 모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하느님 안에 올바른 것들을 겸허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살아야겠습니다.
아이들아, 너희 잘못이 아니란다.
장동현 신부님
학교폭력관련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사정을 알아보니 대충 사실이었습니다.
피해학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가해학생이 미웠습니다.
그가 미웠던 이유는, 고백하건대, ‘어찌 우리 학교에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하는 생각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다른 학교도 아니고 우리 학교에서, 그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썼는데 말입니다.
엄벌에 처하리라 다짐하면서 가해학생을 불렀습니다.
그가 쓴 진술서를 보았습니다. 자기가 한 행동을 기술하며 팔꿈치로 때린 것을 요즘 유행하는 격투기 용어를 써가며 설명합니다. 일상화된 폭력에 직간접적으로 물들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대목이 군데군데 발견됩니다.
그도 역시 피해자였습니다.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부정적 시각에 젖은 교사와 부모로부터 꿈을 박탈당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업주의에 의해 영혼과 육체가 산산이 부서진 젊은이들이 산을 이룹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우리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겠습니다.
배상희 신부님
언젠가 투병중인 한 젊은 환자를 방문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환자는 안타깝게도 이제 한창 꽃피어야 할 스물다섯 먹은 처녀였습니다.
동행했던 자매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게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남부럽지 않게 단란했던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갓 스물에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의 교통사고로 온 가족들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우울 증세에 빠진 가족들은 모두 넋 나간 사람들처럼 몇 년을 살아왔다고 합니다.
의식불명 상태가 길어지면서 식물인간이 된 딸을 두고 동네 사람들도 말들이 많았습니다.
"딸도 딸이지만 이러다 식구들 다 죽겠으니, 이쯤에서 그만 포기해라."
"이만큼 노력했으니 저도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교리나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쉽지만 생각을 바꾸자."
그러나 딸을 향한 어머니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호전기미만 보이면 뛸 듯이 기뻐하며 "저것 보세요. 이제 점점 좋아지고 있다구요. 반드시 의식이 돌아올 겁니다"
어머니는 딸을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지극정성으로 간병에 매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극진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기억해 봅니다.
물론 그 뒤로 딸의 병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딸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지금쯤 그 딸은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금은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예수님은 연민 가득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모습이 아무리 당신 마음에 안 들고 비참해 보일지라도 그저 참아주십니다.
늘 속으면서도 "이번 한번만 딱!"하면서 인내하십니다.
제 인생도 뒤돌아보니 마치도 살얼음판 위를 걸어온 아슬아슬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아찔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측량할 길 없는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가
제 삶의 구비 구비에 깃들여져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분
강영구 신부님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으리니,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 없으리라.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그대에게
새소리에 눈을 뜨니 창밖은 여명으로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렇게 열립니다.
온 세상을 밝혀주는 태양이 솟아오르지만 고요하기만 합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사위(四圍)가 밝아오면 살아있는 것들은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새 날이 왔기 때문입니다.
복음사가 마태오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빌려 나자렛 사람 예수는 태양이라 합니다.
환한 밝음으로 어둠을 물러가게 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온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예수는 태양입니다. 새 날은 밝음과 따뜻함으로 시작됩니다.
사랑과 자비, 용서와 품어줌은 병든 것을 낫게 하고 죽어가던 것을 살려냅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이렇게 치유와 거듭남, 용서와 화해로 시작됩니다.
때 묻고 병들고 시들어가는 것들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새 날을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 묻은 것은 씻어주고, 병든 사람은 낫게 하고, 시들어가는 것들은 다시 살려내어 새 날을 시작합니다. 그분은 태양이기 때문입니다.
소리 없이 온 세상을 밝히는 태양처럼,
당신도 한 자루의 촛불처럼 자신을 태워서 주위의 어둠을 밝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따뜻한 미소가 이웃과 형제들에게 힘이 되고,
당신의 사랑담긴 손길이 작고 가난한 형제들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그는 다투지도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으리니,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 없으리라.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저는 오직 부족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의 스승이자 아버지이신 돈보스코 성인(1815-1888)의 영성을 주제로 한 문헌을 영적독서로 읽으면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비오 11세 교황님께서는 돈보스코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셨습니다.
“돈보스코의 삶은 한 마디로 순교의 삶이었습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막중한 일에 둘러싸인 순교자로서의 삶이었습니다. 혼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의심이 갑니다. 그 많은 일을 동시에 해냈다는 것은 정말 믿기가 힘듭니다.”
카빌리아 신부님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돈보스코 안에는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돈보스코가 맡았던 직책이나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습니다.
사제, 교육자, 교육학자, 자선사업가, 초대형 보육원 원장, 수도회 창립자, 수녀회 창립자, 협력자회 창립자, 도움이신 마리아 신심의 전파자, 평신도 협회 창립자, 선교사업 창립자, 베스트셀러 작가, 저술가, 가톨릭 출판사 사장, 공장장,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의 아버지...
이 모든 것이 돈보스코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돈보스코는 이 모든 일을 충실히 해나가면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는 일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요란스럽게 떠벌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야단스런 몸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스스로에 대해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서 단 한 번도 그럴듯한 미사여구를 끌여 들여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한 어조로 그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면 그것은 모두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직 부족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참된 복음 선포자는 많은 말을 떠벌이지 않습니다.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시끄럽고 말 많은 사람일수록 실속이 없습니다. 이런 저런 많은 말들로 상대방을 정신이 하나도 없게 만들지만 요란스럽기만 하지 전혀 도움도 안 됩니다. 내용도 부실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도 않습니다.
반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는 내면이 안정되어 있고 평화롭습니다. 진중합니다. 겸손합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깊이 있는 숙고의 결과이기에 통찰력이 있으며, 또한 말한 바를 그대로 실행에 옮깁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다투지도 아니하고 큰소리치지도 않습니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듣기가 힘듭니다.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고 나지막합니다.
그러나 신중한 그의 말은 힘이 있습니다. 에너지가 넘칩니다.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결국 그가 선포하는 말은 정의의 말, 승리의 말, 구원의 말입니다.
갈 곳 까지 간 사람들,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사람들, 완전히 ‘맛이 간’ 사람들, 별의 별 말을 다 써도 제대로 표현 못할 사람들을 어쩌다 만납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런 사람 안 잡아가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착하디 착한 사람은 저리 빨리 데려가시고, 저런 인간들은 어찌 저리 두시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강조를 하시는군요.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아무리 부족한 인생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심을 오늘 다시 한 번 되새깁니다.
판단이나 단죄, 선고는 하느님의 몫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몫은 이런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신다는 표시로 그들을 ‘꺾지 않으시고, 끄지 않으시니’ 우리도 열심히 그들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표시로 새 삶을 주셨으니, 우리도 부지런히 그들을 새롭게 보는 일입니다.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
<이건 도저히 아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세 자녀와 함께 고층 아파트에서 동반 투신 자살한 한 어머니 소식을 듣고 너무도 가슴이 아파 왔습니다. 아무리 험한 세상이라고 해도 "이건 도저히 아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투신 자살하기 직전 어머니의 의도를 알아차린 아이들은 "엄마 나는 죽기 싫어!"라고 절규했다고 합니다.
까마득한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자는 엄마, 너무나 두려워 울며불며 살려달라던 아이들, "그 누구도 관심 가져주는 사람 없는 이 세상에 사느니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더 낫다"며 아이들을 허공으로 날려보낸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비정한 엄마이기에 앞서 비정한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 챙기려 하지말고, 조금만 더 함께 견뎌나가려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의 엄마가 자살을 선택할 때까지 "나 몰라라"하며 수수방관한 우리 사회가 참으로 무섭고도 부끄럽습니다.
우리 사회,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하기 그지없는 사회, 극단의 위기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지극히 부족한 사회가 분명합니다. 그 가엾은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나 시스템이 거의 전무한 부끄러운 사회입니다.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는 이웃들, 특별히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이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라고 보내신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작은 손길이나마 건네 천국에 보화를 쌓으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천사들입니다.
아이들과 한번 살아보려고 이 세상에서 죽을 고생을 다했던 가련한 엄마, 채 피어나지도 못한 채 꽃잎처럼 아파트 주차장으로 떨어져 내린 어린 영혼들이 이제 더 이상 외로움도 슬픔도 없는 세상에서 편안한 안식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내 인생의 결론은 주님 자비>
늘 생각하는 바지만 돌아본 지난 세월, 제 인생의 결론은 "한없는 주님 자비"입니다.
주님 그분께서는 상할 대로 상한 갈대와 같은 제 인생을 한번도 완전히 꺾지 않으시고 늘 부드러운 새살이 돋아나도록 영양분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주님 그분께서는 꺼져 가는 심지 같아 늘 조마조마하던 제 인생을 한번도 완전히 꺼트리지 않으시고 희미한 불꽃이 다시 살아나도록 바람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 그분은 오직 자비 그 자체란 사실을 제 삶을 통해 입증해주셨습니다.
그 많은 허물과 실수, 오류 투성이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기다려주셨습니다.
그 숱한 불신과 배반의 나날들을 오직 인내로 견뎌주셨습니다.
그 오랜 방황과 갈등의 세월 속에서도 늘 저를 붙들어주시던 분, 이런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오직 "감사"뿐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상처, 혼돈 앞에서도 결국 우리가 드려야 할 최종적인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 메시아적 예언자인 이사야
박상대 신부님
오늘 복음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어제 복음과의 중간 부분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윗보다 더 나은 분, 예루살렘 성전(聖殿)보다 더 높은 분, 안식일의 주인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께서는 곧이어 어느 한 회당에서 오그라든 손을 가진 불쌍한 사람을 치유해 주신다.(마태 12,9-13) 물론 그날 또한 안식일이었다. 예수님의 상대자들이 먼저 예수를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회당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어도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까?”(10절) 하고 묻는다.
이 대목의 원전(原典)인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께서 먼저 사람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시자 모두들 말문이 막혔다고 한다.
(3,4)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입을 닫고 있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에 탄식하시고 노기에 찬 얼굴로 둘러보시며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시면서 그를 고쳐주셨다.(3,5) 그러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서 예수를 제거할 방도를 모색한다.(3,6)
마태오복음서는 약간 다른 뉘앙스를 보인다. 마태오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어려움에 처한 사람과 비교하면서 사람이 양보다 훨씬 더 귀하기 때문에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11-12절) 이어서 예수께서는 병자의 손을 고쳐주신다.(13절) 치유를 목격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는 마르코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를 제거할 모의로 치닫는다.(14절) 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함으로써 안식일 법을 또 다시 어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줄곧 병으로 고생한 병자 측에서 관찰한다면, 그가 오늘(안식일) 치유되는 것과 내일 치유되는 것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은 예수께서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착한 일을 해야 할 경우를 만나서 그 일을 회피하면 곧 악한 일이라고 보고 있으며,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경우를 만나서 그 일을 회피하면 곧 사람을 죽이는 일로 본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반면 마태오복음은 이 내용을 “안식일에라도 착한 일을 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12절)는 말로 고쳤다. 이는 어제 복음묵상에서 언급한 대로 마르코와 마태오의 시각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마르코는 착한 일을 위해서 안식일 법은 폐기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마태오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것으로 보는 미소한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결국 마태오의 의도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신 메시아 예수의 지상사명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40,1-4)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이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곧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사랑하는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 성령을 부어 이방들에게 정의를 선포하는 사람,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는 사람, 정의를 승리로 이끌어 가시는 분, 이방인들이 희망을 거는 이름을 가진 분, 바로 메시아이신 것이다.(18-21절)
마태오에게 있어서 이사야는 메시아적 예언자이다. 마태오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시기적절하게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실존(實存)을 점층적으로 제고(提高)하고 있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마태오복음을 면밀히 살펴보면,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는 곳에서(1,23), 세례자 요한의 광야선포에서(3,3), 예수의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함에서(4,15-16),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대목에서(8,17), 그리고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고쳐주신 예수를 따르는 모든 병자들을 또한 고쳐 주시는 오늘 복음의 대목에서(12,18-21)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이제 마태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메시아는 거리에서 그의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19절) 조용한 가운데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봉사하는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이신 것이다.
‘관심’과 ‘사랑’의 차이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남자 청년이 고민이 있다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와 헤어질 처지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지금 대기업에 취직하였지만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직장도 다니랴 시험공부도 동시에 하다보니까 자연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어 조금씩 소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포기할 수 없고, 저것도 포기할 수 없어서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김창옥 교수의 강의에서 들은 것인데, ‘좋아하는 것’과 ‘관심 있는 것’의 차이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지불(pay)’할 수 있는 것이고, 무언가를 지불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냥 ‘관심만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좋아한다면 그것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은 가차 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관심만 있는 것입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교육학을 전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졸업 때 성악을 해 볼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의자 두 개를 서로 떨어뜨려 놓은 다음 말하였습니다.
“사람은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다. 한 의자에만 앉을 수 있고 한 의자에 앉으면 다른 의자는 비워놓아야 한다. 두 의자를 놓고 갈등하지 말고, 네가 다른 의자를 버려도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려무나.”
파바로티는 교육을 내려놓고 성악을 잡았습니다. 교육을 버렸으니 이젠 성악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저도 그 청년에게 ‘너는 꿈이 더 소중하냐, 아니면 여자가 더 소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다면, 어쩌면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치는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에게 오는 사람에게도 이런 어정쩡한 모습의 사람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바리사이들은 그 두려움과 질투의 대상을 없앨 궁리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아차리시고 한적한 곳으로 숨어드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예수님을 찾아왔고, 예수님은 당신이 있는 곳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알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찾아올 수 있었겠습니까? 알지 못해서 찾아오지 못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다리는 사람은 당신을 찾아오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관심’있는 미지근한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후에 당신을 쫓아온 사람들에게 성체성사의 신비를 설명해 주십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말씀이 어렵다고 다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저 예수님께 관심만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돼도 믿을 마음이 있는 사도들만이 그분과 함께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관심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모바일에서 작성된 글인데 소개하겠습니다.
경남 함양에 성수스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토굴을 지어서 도를 닦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수행자와 지인들이 너무 자주 찾아 와서, 그 분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혼자 조용히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일 높은 산골짜기에 칩거해 좌선을 하니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어떤 여자가 나물을 캐러 왔다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깊은 산중에 왜 혼자 와서 사십니까?”
스님이 답했습니다.
“조용한 곳에서 공부 좀 실컷 하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되물었습니다.
“물소리는 안 시끄럽습니까?”
스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여자가 가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물소리, 새소리는 안 시끄러운가? 이 세상 어딘들 시끄럽지 않는 곳이 있겠는가?’
산꼭대기에 숨는다고 시끄러움을 벗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곳이더라도 내가 정하면 고요한 것이고, 아무리 조용한 곳이더라도 마음이 번잡하면 시끄러운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스님은 다시 하산하여 누가 뭐라 하건 자신의 일에 정진하여 큰 스님이 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여인의 ‘물소리, 새소리는 안 시끄럽습니까?’라는 말은 평생의 스승이 되었다 고 합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더 좋은 조건이 만들어지면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지만 환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거나, 일 때문에 바빠서 미사에 빠졌다거나, 같은 신자나 성직자 수도자에게 상처 받아서 성당에 못 나오겠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시골에 들어가서도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의도를 잘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결국 그분은 당신께 흔한 관심만 두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을 지닌 사람을 기다리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