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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가이사랴 빌립의 집에 머물다
행 21:7-14
7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9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10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1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행 21:8-14 / 그리고 이튿날 그곳을 떠나 가이사랴로 가서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다.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9) 그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받은 딸이 4명이나 있었는데 모두가 미혼이었다. 10) 우리가 그곳에 며칠 머물러 있는 동안에 역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아가보라는 사람이 유대에서 와서 11) 우리를 방문하였다.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 손발을 묶더니 말하였다. `이 허리띠의 주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묶여 로마로 끌려갈 것이다'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12) 이 말을 들은 그 도시의 신도들이나 바울과 동행한 우리 모두는 예루살렘에 가지 말 것을 바울에게 울면서 간곡히 권하였다. 13) 그러나 바울이 말하였다. `왜 이렇게 모두들 울고 있습니까? 내 결심을 꺾지 마십시오. 주님 예수를 위해서라면 나는 투옥은 물론이고 죽을 각오도 이미 서 있습니다.' 14) 아무리 권해도 소용 없다는 걸 알고 우리는 단념하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의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서 예언자 아가보는 사도 바울의 수난을 예언합니다.
전도자 빌립(7-9) 사도 바울은 시리아 지역인 두로를 떠나 가나안 지역인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가이사랴는 로마인들이 욥바를 대신하여 세운 항구 도시이자, 로마시대에 종교적인 도시 예루살렘에 대항하여 유대지역을 통치하는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전도자 빌립에 의하여 이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 8:40). 전도자 빌립은 가이사랴 교회의 지도자이자 말씀 선포자로서 지역교회를 섬기며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초대 교회 헬라파 일곱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그의 딸들도 초대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들이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의 딸들 가운데 몇 명은 오랜 기간 동안 초대 교회의 사건이나 인물들에 대한 자료를 전하여 주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선지자 아가보(10-12) 사도 바울은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서둘렀습니다(행 20:16). 그런데 가이사랴에 이르러 여러 날 머무르게 되는데, 이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여정을 서둘렀고, 배가 순항을 하여 생각보다 일찍 가이사랴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이사랴에 머물던 바울은 유대 지역 즉,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선지자 아가보를 만나게 됩니다. 선지자 아가보는 천하에 큰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한 선지자로서 글라우디오 때에 그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행 11:28-29). 아가보는 사도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잡아매고 예언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유대인들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관한 아가보의 예언은 마치 유월절 전날 유대 병정에게 잡혀서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바울과 함께 많은 고난을 겪은 누가 및 그의 일행조차도 바울을 만류합니다. 사도 바울을 향한 이들의 깊은 애정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결심(13-14) 이러한 성도들의 깊은 사랑에서 나온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오히려 더욱 그의 사명에 대한 결심을 확고히 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을 만류하던 사람들도 인간적인 애정에서 돌아와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들도 바울이 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공동체는 마치 겟세마네 언덕에서의 예수님처럼 온전하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이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적용: 당신에게 고난이 다가올 때 당신은 무엇을 구합니까? 주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지 성경을 통하여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표면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항상 상황을 초월하십니다. 이 시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교회에게 저울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좋든 싫든 저마다의 기준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즉 ‘저울에 달아보아 부족함이 드러남’이 되는 순간, 그 후에 오는 것은 "우바르신(베레스)”,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 바 됨’입니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현재의 사건은 다양한 의미로 다가가지만,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교회에게 이 일은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의 알곡과 쭉정이의 구별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21:8
가이사랴 - 이 도시는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50-60k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였는데 로마 치하에서는 유대 지방의 행정 장관이 거주하는 정치적 수도였다. 이 도시는 헤롯에 의해 건설되고 아우구스투스(Augustus)를 높이기 위하여 '가이사랴'로 명명되었다(Robertson). 또한 이곳은 거대한 항구 도시로도 유명한데, 바울은 그의 선교 여행 중 이 도시를 세번째로 방문하는 셈이다. 한번은 예루살렘에서 다소로 여행하는 중에 방문했고(9:30) 두번째는 2차전도 여행 말기에 안디옥에서 돌아오는 길에 방문했으며(18:22) 지금이 그 세번째이다. 한편 여기에는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까지 이르는 교통편(交通便)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 학자들 간에는 육상과 해상에 대한 견해가 갈리고 있다. 로버트슨(Robertson)같은 학자는 7절의 '수로를 다 행하여'라는 문구를 근거로 하여 해상을 통한 여행은 돌레마이에서 끝났으며 거기서부터 가이사랴까지는 육로로 여행했으리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에 반해 브루스(Bruce), 렌스키(Lenski), 헨헨(Haenchen) 같은 학자들은 돌레마이에서 가이사랴까지의 거리가 50-60km에 이르므로 결코 걷기에 가깝지 않으며 더구나 가이사랴까지 가자면 갈멜산을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육로로 갔을 가능성이 없고 해상으로 이동했리라는 주장을 편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후자의 주장이 타당한 듯하다. 빌립 -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일곱 집사 중 하나', '전도자'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그가 일곱 집사 중의 하나임은 6:1-5에 잘 나타나 있으며, 그를 또한 '전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재정을 담당하는 본래의 기능을 넘어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 음을 말해준다. 그렇지만 그에게 '전도자'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그와 '사도 빌립'을 구분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Bruce). 이 빌립이 본서에 등장하기로는 스데반 사후 사마리아에서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였다는 기록(8:5-40) 이후 여기가 처음이다. 브루스(Bruce)는 이 기간을 20년으로 잡기도 하는데, 하여튼 빌립은 8:40 이후 이곳 가이사랴에 정착하여 살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아마 이 곳에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였을 것이다(Haenchen).
=====21:9
그에게 딸 넷이...처녀로 예언하는 자 - 빌립은 그 자신이 복음을 전파하는 은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네 딸이 예언하는 은사를 받는 축복까지 누렸다. 여기서 '처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교회에서 봉사하는 여자들은 대개 과부들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딤전 5:9-15) 이례적(異例的)이라 하겠다. 아무튼 예언하는 은사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고전 12:4-27, 주제 강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비교 연구' 참조) 이를 방언의 은사보다 높이 평가했다(고전 14:1-33). 따라서 본문은 빌립의 딸들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중요한 은사를 가지고 초대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녀들의 예언 활동이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한편 아시아에 있는 히에폴라리스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Papias)의 말에 의하면, 빌립과 그의 딸들은 몇 년 후에 소아시아의 히에라블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 딸들 가운데 몇은 상당히 늙도록 생존하여 초기기독교 시대에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들에 관한 자료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Eusebius).
=====21:10
여러 날 있더니...선지자 아가보 - 바울은 빌립의 집에서 상당 기간을 머물고 있는데 이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는 마음에서 여행을 급히 서두른 결과 심신이 피로했으며 오순절까지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이사랴에 머물면서 육신의 휴식과 아울러 예루살렘에서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고 고난에 대한 나름대로의 각오를 새로이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선지자 아가보는 과거에 몇몇 선지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와 유대에 기근이 들 것을 예언하였었는데 그 예언이 A.D. 46년 글라우디오 때에 성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1:27, 28). 이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아가보와 동일 인물이라는 데에 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한다(Robertson, Bruce, Lenski). 유대로부터 내려와 - 이 표현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 하에 있는 당시 상황의 관점에서 쓴 것이 아니라 옛날 유다의 관점이서 서술한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당시에는 가이사랴가 행정 구분상 유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유대로부터 가이사랴로 내려왔다는 식의 문장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유대로부터'라는 표현의 실제 의미는 '예루살렘으로부터'로 보아야 한다(Haenchen).
=====21:11
띠를...수족을 잡아매고 - 여기서 '띠'는 폭이 약간 넓고 길이가 길어 허리에 여러번 둘러감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들고 은실이나 금실로 수놓는 경우도 있었다(삼상 15:27;왕상 11:30). 아가보는 이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는 행위로써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말로써가 아니라 행위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 행위는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상으로, 자기의 새 옷을 찢어 솔로몬 왕국의 분열을 예언했던 아히야(왕상 11:29, 30), 벗은 몸과 발로 행하여 애굽인들이 앗수르인들에 포로로 끌려갈 것을 예언한 이사야(사 20:2)와 같은 인물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렘 13:1-11;27:2;겔 4:1-3 참조). 아가보의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울의 결박과 투옥을 가리킨다(30, 33절). 성령이 말씀하시되 - 바울의 고난을 예언하는 아가보의 예언이 온전히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말해주는 이 장엄한 표현은, 구약성경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표현에 상응한다(민 14:28;왕하 9:26). 바울에게 닥칠 고난은 유대인들에 의해 도발(挑發)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점에서 예수의 수난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었다(막 10:33;15:1).
=====21:12
우리가...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 두로에서와는 달리 이곳 가이사랴에서는 현지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수행했던 누가 일행도 합세하여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했었다. 그러나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뜻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의 뜻이었다(4절 주석 참조). 여하튼 여기서는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는 정도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공동번역에서는 '간곡히 전하였다'로 옮겨 그 분위기를 더욱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바울 주변에 있던 성도들이 그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듣고 그 행로를 만류하려 했던 점에 대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바울의 사역을 방해(妨害)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해서는 안된다. 베드로 또한 예수의 수난에 대해 이와 유사한 행동을 보여준 경우가 있거니와(마 16:22), 지금의 경우도 바울에 대한 그들의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21:13
상하게 하느냐 - 헬라어 '쉰드뤼프톤테스'(* )는 '두들겨 깨뜨린다'의 뜻을 갖는데, 이는 주위 사람들의 애정에 가득찬 눈물의 만류가 마치 바울의 마음을 부수어버릴 정도로 간곡했음을 나타낸다. 이 표현 속에는 성령의 일을 거역하게 하는 것에 대한 책망보다는 그들의 충정어린 애정을 마음 깊이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 엿보인다. 결박받을 뿐 아니라...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성도들의 애정어린 만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결의를 더욱 강하게 천명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께서 죽임을 당했던 바로 그 도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죽임을 당하는 것도 피하지 않겠다고 한다. 바울이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예루살렘에 가려고 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추측된다. 바울은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Bruce). 그는 이방 교회의 성금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교회의 단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였음에 분명하다(롬 15:25-32). 예루살렘에는 유대계 신자들과 이방 신자들 사이에 소원(疏遠)한 관계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원만한 연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러한 연합의 당위성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며(갈 3:28), 이 진리를 바르게 깨달은 바울은 바로 이 연합을 위해 죽음까지도 무릅쓰려고 한 것이다.
=====21:14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 헬라어 구문 '메 페이도메누 아우투'(* )는 '설득하다'는 의미를 갖는 '페이도'(* )의 현재 수동태 분사의 문장으로 직역하면 '저가 설득되지 아니하므로'(when he would not be persuaded, KJV)가 된다. 아마 그들은 바울의 신변의 안전을 이유로,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수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이 많다는 식의 그럴듯한 명분(名分)으로 바울을 설득하여 그의 예루살렘행을 포기시키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때가 아니라 '지금', 다른 곳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설득을 뿌리칠 수 있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은 그의 의지를 꺾는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에게 닥쳐올 불행을 넘어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본문은 바울을 설득하려던 사람들이 바울에 대한 잘못된 충정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신앙의 자세로 되돌아와 있음을 보여주는데, 허비(Hervey) 같은 학자는 이 문구가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응용한 것으로 보며, 브루스(Bruce)의 경우는 본문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를 상기시켜 준다고 보기도 한다.
< 설 교 >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양향모 목사 / 행 21:7-14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가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냥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별 의미 없이 사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특별한 일을 좋아하거나 특별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일평생을 바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일에 장인이 되고 인간문화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사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큰 보람을 느낄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고 싶고,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잘 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면서 삽니다. 그런 사랑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겠지만 사랑을 하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면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고 가장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도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도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최고로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최고의 일이며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바로 그런 고백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너무나 귀한 이름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각오를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은 너무나 고귀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사는 일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 빌립의 집에 가서 머무르니라.
본문 7-9절에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라고 했습니다.
두로를 떠난 바울 일행이 역시 배를 타고 내려와서 돌레마이에 이르러 하루를 지내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돌레마이나 가이사랴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들입니다. 두로에서 육로로 올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좀 더 편리한 배를 타고 가이사랴까지 온 것으로 보입니다. 돌레마이나 가이사랴에 어떻게 복음이 전해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 가운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이사랴에는 빌립이라는 사람과 그의 가족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빌립이라는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 여러 명 등장하지만 특별히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빌립과 예루살렘교회에서 집사로 안수를 받았던 빌립집사 이 두 사람을 들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은 사도 빌립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고 이 빌립 집사가 지금은 전도자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가 예루살렘 교회에 있을 때는 집사로 임직을 받아서 집사로 봉사를 했지만 그 후에 전도자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전도자라고 하니까 요즈음의 전도사로 생각하여서 목사를 도와서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시의 전도자는 오늘날 전도사와 다릅니다. 목사는 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전도자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를 말합니다. 오늘날의 선교사나 순회 목사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목사 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실제로 빌립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인해서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당하자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다른 지방으로 흩어져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빌립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서 전도를 합니다. 사마리아 지방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이미 혼혈족이 되어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곳이었지만 빌립은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은 전도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곳에서 머무르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광야로 나아가서 저 이방인 이디오피아의 여왕 간디게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가이샤라까지 와서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에서는 그의 네 딸과 같이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네 딸이 결혼도 하지 않고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었으며 특별히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다 완성되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복음을 더 효과적으로 전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믿을 수 있게 하였을 것입니다.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본문 10-12절에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선지자가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머물고 있는 가이사랴로 내려와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아가보 선지자의 행동입니다. 그냥 말로만 해도 될 것인데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발을 묶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이렇게 묶어서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선지자들이 가끔은 이런 행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아히야라는 선지자가 자기가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으로 찢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두 나라로 갈라질 것을 예언했습니다.(왕상 11:29-30 참조) 열두 지파 중에서 두 지파가 유다가 되고 나머지 열 지파가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이런 자신의 행위와 예언을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자꾸 반복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위험한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이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놀라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막상 가서 그런 험한 일을 당하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시는가? 라고 원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런 고난을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충성스럽게 일을 하고 있는 바울에게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강요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자원을 하여 이런 일을 감당하였을 때 그것이 바울에게 더 큰 충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자원해서 하는 것이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은 강제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구원받는 일에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죽도록 충성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본문 13-14절 말씀에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감당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만류를 하니까 마음이 상하였다고 했습니다.
바울을 만류하는 그들도 결국은 성령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었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고의 적임자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만류를 하였습니다.
그런 사실을 아는 사도 바울은 그들의 충정어린 만류에 그 부탁을 들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 할 때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자신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예루살렘에 가서 결박을 당할 것을 이미 각오하고 있고 그보다 더 나아가서 죽음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다 각오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고난의 길을 마다합니다. 심지어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까지도 편안하고 행복하고 사람들에게 박수 받는 길을 가려고 하지 고난의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박을 당하거나 죽음의 길로 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뜻 있는 사람들은 좁을 길로 가고 고난의 길로 가고 십자가의 길로 가야 한다고 외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최저의 삶을 살면서 이 세상이 나그네 길이며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믿고 그 천국을 향하여 간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이 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고난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고난이 고난을 위한 고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은 그것이 아무리 엄청난 고난이라고 할지라도 고난 자체는 별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그 자체만 가지고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보다 더 흉악한 벌을 받아야 만하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죽을 사람이 죽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고난 자체를 평가절하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왜 고난을 당하느냐 무엇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대답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임을 당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그 예수님의 이름이란 어떤 이름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말할 때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이기에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해도 좋고 죽임을 당해도 좋다고 당당하게 말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요13:14)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예수님께서 다 행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좋아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배운 말씀 가운데 가장 신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들라고 하면 사도행전 3장에 기록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앉은뱅이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운 일일 것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외쳤더니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서서 걸으며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고 목숨을 버린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서 응답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일도 아주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목숨을 걸고자 했던 예수님의 이름은 그런 정도의 뜻을 가진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시면서 그 이름을 직접 지어 주셨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의 구체적인 뜻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 3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 즉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고 그 이름을 힘입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이름이 엄청난 이름이요 그 이름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11-12절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이름이요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사랑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후일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모든 사람들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잘못을 알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던 거짓선생들이 똑바로 살자고 외치던 교만한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자고 외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외치던 어리석은 목회자들이 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던 많은 목사들이 복음에다가 온갖 잡탕을 섞어서 그것을 설교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장사치 같이 잘못된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이름의 뜻을 바르게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산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서 기뻐 춤을 추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고 기뻐 뛰며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위대한 이름이며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위하여 결박을 당하여도 죽임을 당하여도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우리도 예수님 그 이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그 이름을 위해서 충성하고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이 되는 평신도
행 21:7-9 / 김광일 목사
주식회사 위맥스 비앤씨(WEMAX BNC) 대표 김청하 집사의 별명은 ‘오뚝이’입니다. 사업이 무너질 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일어났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재기했습니다. 경남 고성에서 자란 김 대표는 중학생 시절 아버지를 여읜 뒤 미국 유학의 꿈을 접었습니다. 홀로 계신 어머니와 여동생들의 생계와 공부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대기업에 취직해 품질관리 분야에서 성실하게 일했지만 직장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월급으로 꿈을 이루기엔 너무 미흡했기 때문입니다. 20대 초반 서울에 올라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선교센터를 바라보고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전도와 선교에 대한 열망이 일었던 겁니다. 그때 평신도 선교사 1,000명을 파송하겠다고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 주경야독으로 경영학을 공부했습니다. 건강식품, 화장품 등 여러 사업을 벌였으나 세상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사업에 계속 실패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 한국기독교 부활절 연합단체에 120만장을 납품하는 전도용 CD카드 사업을 맡았습니다. 빈소년합창단이 부른 ‘헨델의 메시아’ 5곡, ‘마태복음’ 동영상을 7분으로 압축해 CD에 담았습니다. 그는 CD카드를 초신자와 불신자를 대상으로 교인 1명이 3명을 전도하면 4천만이 복음화되는 ‘1·3·4000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습니다. 전도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카드는 몇몇 교회와 단체에 제공되고 더 이상 팔리지 않았습니다. 판매대금 회수도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제가 교계를 잘 몰랐어요. 그냥 폼만 재는 전도활동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러나 CD카드 사업은 잘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더 많은 지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 후 사업은 번창하였습니다. 차량용 냉각수 첨가물 ‘위맥스’가 인기를 끌며 판매되었습니다. 김집사는 강조합니다. “위맥스는 다량의 음이온과 원적외선을 방출하는 광물질인 미네랄을 함유한 액상 물질입니다. 차 안으로 유입되는 공기를 정화하고 찌든 냄새가 제거되지요. 중국에 수출하고 있고 현지 공장도 세울 예정입니다. 판매 수익금으로 소외 장애인을 돕고 있습니다.” 회사명 위맥스(WEMAX)는 ‘우리가 최고다’라는 뜻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업으로 성장하기를 직원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가대와 교회학교 교사로 섬깁니다.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대한민국 신문기자협회, 언론인 연합협의회가 수여하는 ‘위대한 한국인 100인 대상’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계획을 묻자 “바울 사도처럼 전도와 자비량 선교를 융합한 ‘비즈니스 선교’를 지향하고 수익금으로 국내외 평신도 선교사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지금 심정은 주님만 의지하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자녀로 살겠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평생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김청하 집사 그 분이야말로 본이 되는 평신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폴 스티븐스 (R. Paul Stevens)는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컨대 보통 평신도는, 골프나 텔레비전 혹은 주식 시장에 더 관심이 있어서 못살게 굴어야만 예배에 참석하는 게으르고 다루기 힘든 교회 구성원은 아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가르침과 반 해방적인 교회 환경으로 말미암아,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목회자의 역할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평신도의 사역은 그것이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서 더 중요하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목회자들의 손에만 있었던 사역을 평신도의 손에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평신도 사역자의 대표적인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립 집사입니다. 빌립은 성령 충만을 받음으로 본이 되는 평신도가 되었습니다. 빌립의 모습을 통해 본이 되는 평신도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본이 되는 평신도의 정체성은 과연 어떠합니까?
첫째로 사명자이어야
미국의 애즈베리 대학 채플 시간에 생긴 일입니다. 목사님이 열정적으로 설교하는데 학생들은 졸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헌신하려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때 예수 믿고 헌신하기로 작정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습니다. 그가 바로 인도 선교에 평생을 바친 스탠리 존스(E. Stanley Jones)입니다. 스탠리 선교사는 1920년 간디와 함께 기독교 피정의 집 ‘애슈람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8년에 타임지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선정되었고, 2회나 노벨평화상 후보자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스탠리는 철저한 복음주의자로 살면서 열린 마음으로 인도인들에게 다가 갔으며,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는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바른 삶 그 자체가 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한 삶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만 하면 삶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탠리는 기독교적인 삶을 살라고 하지 않고, 예수의 삶을 사는 사명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여기의 집사는 ‘디아코노스’인데 ‘먼지를 뚫고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스데반 다음으로 기록된 집사였습니다. 빌립이 집사가 된 것은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명자로 셰움받았습니다. 교회에는 직분자보다 사명자가 더 필요합니다.
이 시대는 사람은 많으나 일군은 적고, 믿는 자는 많으나 제자는 적습니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교회에 사람이 많으니 나는 일을 안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일군이 적습니다. 평신도는 많으나 일을 맡길 사명이 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 사명자가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립이 사명을 맡은 자가 된 것은 그의 삶이 누구에게나 본이 되었는지를 잘 알게 해 줍니다.
둘째로 전도자이어야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이 떨어지는 날까지 성문에서 말씀을 외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노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르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는데 왜 날마다 외치고 계십니까?” 그 말을 들은 노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계속 외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악한 도성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도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노인은 자기가 가만히 있다가는 소돔 사람들처럼 변질될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더 힘써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전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내가 외치고 있는 이상, 나는 소돔 사람이 되지 않는다.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이상, 세상 사람들은 변화를 받지 않을지라도 나는 결코 그들을 닮지 않을 것이다. 복음을 외치고 있는 이상 나는 건재하다.” 잠잠한 신자는 세상에 물들기 쉽고, 잠잠한 교회는 세속화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8절입니다.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여기의 ‘전도자’는 원어로 ‘유앙겔리스투’인데 ‘복음전파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이는 사도와 구별되었습니다. 당시 전도자들의 임무는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빌립도 가이샤라 지역을 개척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은 오직 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에서 전도는 능력 전도가 되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떠나가고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낫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능력을 행하는 전도일지라도 주님의 음성에 순종할 때 생명이 있는 전도자가 될 것입니다. 빌립은 주님이 이끄는 대로 순종하면서 동에서, 서에서 오로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본이 되는 평신도의 모습입니다.
셋째로 전수자이어야
김재헌 목사의 저서 ‘신앙 명문가의 자녀교육’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가문이 나옵니다. 백정 출신이면서 우리나라 최초 의사가 된 박서양의 가문, 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부자가 된 록펠러의 가문, 목사, 장로, 교수, 대법관 등 신앙 명문가를 이룬 이경직 목사의 가문, 4대째 장로 집안이 되어 한 교회를 섬기는 이철상 장로의 가문, 8명의 목사와 30명의 장로를 배출한 김덕호 장로의 가문, 매년 자손들이 단기 선교 여행을 떠나는 박용묵 목사의 가문 등 여러 가문이 나옵니다. 신앙 명문가란 자녀교육에 헌신한 신앙 1세대를 통해 믿음을 낳는 가정이 되면서 2세대, 3세대, 4세대에 걸쳐 신앙을 전승하고 축복받는 가문을 말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신앙 전승이 1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 세대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자식, 손자대로 이어지면서 신앙의 전승이 안 됩니다. 수평 문화는 발달되었지만 수직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노벨상과 세계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은 수직 문화가 잘 발달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3대, 4대가 같이 교회에 나가는 집안이 많지 않습니다. 교회학교마다 감소하여 거의 반 정도의 교회가 교회학교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일에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것이 자녀가 잘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나와 신앙 교육, 인성 교육, 말씀 교육, 기도 훈련하는 것보다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다니는 부모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부모가 되지 않는 겁니다. 빌립처럼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하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바른 그리스도인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빌립은 자녀에게 신앙을 전수한 사람입니다. 네 딸이 예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영성의 전수입니까?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은사입니다. 이런 은사가 자녀에게 있다는 것은 빌립의 신앙이 바르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의 모범이 될것인가” 의식하며 살기보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신앙의 삶이 딸들에게 그대로 전수된 것입니다. 빌립은 신앙을 차세대에 전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부모들은 신앙의 전수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을 유산으로 넘기는 것을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가치가 최고인 것을 외면하고 물질적인 것만 전수하려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삶의 진정한 복이 되는 신앙을 전수하여야 합니다. 빌립처럼 신앙의 전수자가 되기 위하여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네 딸에게 믿음을 전수한 빌립이야말로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요, 바른 평신도의 신앙입니다.
위그노(Huguenot)는 프랑스 개신교인들 즉 평신도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400년 동안 왕정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끔찍한 박해를 받았지만 감사함으로 고난을 받아들었습니다. 위그노는 예배드리는 것에 목숨 바칠 정도로 예배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라는 성경적 명령을 따랐으며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기고 근면한 삶을 살았습니다. 종교걔혁을 통해 왕과 가톨릭 사제를 위해 존재하는 일꾼이자 노예로만 자신들을 알았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위그노운동은 지도자 몇 사람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민중의 자각으로 이뤄진 평신도운동이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일어났던 위그노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점점 어려워지고 외부의 공격은 거세져 고난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때 위그노 신앙 즉 평신도 신앙을 회복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동력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우개만은 주시지 않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우개가 있으면 인생을 살아가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지우고 다시 그리거나 쓰면 됩니다. 그러나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다시 쓰거나 그릴 수 없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을 적당하게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헌신하겠습니까?
부디 세상을 변화시키는 귀한 일에 쓰임 받는 평신도가되시기 바랍니다. 삶의 자리에서 ‘사명자요, 전도자요, 전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본이 되는 평신도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김영규 목사 / 행 21:7-14
두로에서 가이사랴까지
두로에 상륙한 바울은 잠간 머물면서 성도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7) 두로는 고대 페니키아의 중요 항구로, BC 65년경까지 자유도시 국가로 번성하다가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된 곳입니다. 두로를 떠난 바울 일행은 배로 돌레마이까지 이르러 하루를 머물렀습니다. 돌레마이는 두로와 가이사랴 중간에 위치한 항구입니다. 돌레마이란 이름은 알렉산더 제국이 넷으로 나뉜 후에 그 한 후계자였던 프톨레미를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악고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현대에는 아크레라고 하는데, 하이파 항 근처에 있는 인구 만 명 정도의 도시입니다.
바울은 해로의 마지막인 가이사랴에 상륙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8) 가이사랴에 대해서는 앞서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군이 주둔하고, 총독이 머물던 당대에는 유대 땅에서 가장 발전 된 대도시였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바울은 전도자 빌립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빌립은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전도자로 활동했습니다.(행8장)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당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빌립은 늦게까지 활동했습니다. 빌립이 어떤 경로로 가이사랴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의 박해를 피하여 여러 곳으로 다니며 전도를 하다가 가이사랴에 정착한 것 같습니다.
빌립에게는 네 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9) 빌립이 전도자로 헌신한 것처럼 네 딸들도 주님께 헌신했습니다. 아마 결혼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해 결혼하지 않고 교회를 섬긴 것 같습니다. 빌립의 네 딸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본문에서 특기할 사건은 바울의 신상에 관한 아가보의 예언과 바울의 반응입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10-11)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붙잡혀서 이방인에게 넘겨지리라!
이 예언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신약 교회 안에 있었던 선지자, 혹은 예언자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의 은사 설명에 보면 신약 교회 안에 몇 가지 특이한 직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입니다. 이 두 직책은 항상 교회 직분의 첫 머리에 언급됩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고전12:28)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4:11) 사도와 선지자는 오직 초대 교회 안에만 있었던 특별한 직책입니다. 그러면 선지자는 어떤 직책인가요?
신약 교회 안에서 선지자 직책은 구약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는 장차 나타나실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을 했습니다. 때로는 왕이나 백성들의 불신앙과 타락을 책망하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했습니다.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우상과 대결을 하고, 큰 기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의 직책은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신약 교회에서 선지자는 드러난 활동이 거의 없습니다. 직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거론하면서도 어떤 일을 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선지자 직책은 사도직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직책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식적인 직책임은 분명합니다. 둘째로, 사도시대 이후로 선지자 직책은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처럼 선지자는 최초 창설 교회에만 있었던 단회적인 직책으로 생각됩니다. 셋째로, 선지자가 사도와 함께 언급된 것을 보면 사도를 돕는 직책으로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사도의 진정성을 증명한다든지, 혹은 사도가 전한 말씀의 진정성을 변호하는 역할입니다. 왜 이런 직칙이 필요했을까? 당시에는 신약 성경이 다 완성되기 전이기 때문에 누가 진정한 사도인지, 혹은 참 하나님 말씀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정도의 예언은 아니지만, 미래사에 대한 예언을 하기도 했습니다.(롬12:6,고전13:2, 14:1,3,22-32)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가보의 활동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아가보는 예루살렘 교회 출신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안디옥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을 때에, 사도들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그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을 했습니다.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11:25-28) 아가보의 예언은 적중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AD41-54) 황제 때(AD46)에 성취되었습니다. 이 아가보가 어떤 연유로 사도 바울의 귀로에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성령께서 주신 예언 때문에 바울에게 온 것 같습니다. 성령께서 분명하게 바울이 체포당하여 로마 정부에 넘겨지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고,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적개심도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미리 바울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그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갈 때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아 바울에게 왔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아가보의 예언은 바울 일행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누가를 비롯한 측근들은 앞 다투어 바울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12) 어쩌면 바울의 안전을 위하는 것은 동료들의 입장에서 본다는 최대의 책임이었을 겁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처럼 중요한 일군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영접한 이후로, 남은 생애 전부를 전도에 바쳤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세계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3권을 썼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같이 교리적으로나 목회적으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혹은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이런 바울을 모든 위험에서 항상 피하도록 돌봐 주셨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이제 위험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피해야지요. 바울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예언도 있으니,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결정을 내렸나요?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예언과 주변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13) 바울은 예언자와 동료들의 충고를 듣고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마음을 굳게 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14상) 아가보가 한 예언이 사실이라 해도, 동료들의 충고가 진심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판단과 결심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결정 원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조언자, 혹은 충고자로서의 역할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아가보가 바울에게 권고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다가올 위험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21:4) 그러나 바울은 끝내 거절했습니다. 이럴 때에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강제로 막았나요? 아닙니다. 본문에 보세요.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4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카운슬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카운슬링은 사실을 알려주는 선에서 끝내야 합니다. 비록 初信者라 해도 그 삶을 이래라저래라 결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저런 사유로 심방도 많이 하고, 상담도 많이 합니다. 때로는 사업상의 문제 때문에 상담합니다. 때로는 부부관계나, 가정사 때문에 상담합니다. 자녀 문제, 대인관계, 진로 문제 등등. 여러 가지 일로 대화를 나눕니다. 그러나 제가 하는 일은 무엇을 결정해 주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사실을 알려주고, 성경의 원리를 알려주는 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심리가 이상해서 무엇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상하게 족집게 식의 조언을 좋아합니다. 과에 공부를 해도 “족집게 과외”를 합니다. 지구상의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이상한 학습법입니다. 점쟁이에게 갈 때도 “족집게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정초에 토정비결 보면 어떤 내용이 나옵니까? “7월에는 동쪽으로 가지 마라!” 아니, 사람이 동쪽으로 가지 않고 어떻게 삽니까? “1월에는 불을 가까이 말라!” 아니, 겨울에 불을 가까이 않고 어떻게 삽니다. 아무튼 그 내용이 두루뭉실 합니다. 그러나 족집게 점쟁이는 맞든지 틀리든지 확실하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좋아합니다.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족집게처럼 이래라 저래라 말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건 하라, 저건 하지 말라!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좋은 권고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의지와 양심, 그리고 인격을 가진 결정권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고, 구원 받고 거듭 난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자유의지야말로 인간을 가장 고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노예를 만들려 하고, 다시 노예가 되려고 합니까? 서로 얽매려고 하지 말고, 자유 의지를 존중하는 좋은 상담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의사 결정의 최종 결정권입니다. 모든 사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런 저런 좋은 충고를 한다 해도 결정은 본인이 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 바로 이점입니다. 결정과 결심은 바울이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직후부터 예수님을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독신으로 살 것도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부르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을 위해 결박당할 각오를 했습니다. 죽을 것까지, 순교까지 결심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고, 로마까지 가는 것은 일찍이 하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충고는 다만 참고 사항일 뿐입니다.
오늘 내 인생에 다가오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 누구에게든지 상담도 할 수 있고, 자문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됩니다. 결정은 내가 합니다. 결정을 내가 한다는 것은 책임도 내가 진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은 결정을 남에게 맡기고 책임을 떠넘기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이 최종 판단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14하)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왜 예루살렘에 가면 붙잡히고 이방인에게 넘겨진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셨을까요? 성령의 예언은 사실이긴 합니다. 예언대로 바울은 붙잡히고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될지라도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과연 위험한 일을 당할지라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신상의 위험 때문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올라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판단의 기준입니다. 내 신상의 이해상관이 판단의 기준이 아닙니다. 바로 이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내 신상의 이해상관에 따라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게 손해나는 일이라면 죽어도 안 합니다. 돈 손해나면 안 합니다. 육체가 고단하면 안 합니다. 싫증나면 안 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편하게 믿자! 이래저래 내가 얼마나 편할 수 있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타락하고, 물질주의, 물량주의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청년들이, 목사님 아들딸까지 전부 대교회로 몰립니다. 힘든 개척교회에 가서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충성 안한다고 누가 뭐래지도 않습니다. 대교회에 가면 좋은 점이 많아요. 프로그램 잘 돼 있습니다. 어울릴 남녀가 많습니다. 임도 보고 뽕도 따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일석 이조입니다. 편하게 믿는 세대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내 신상 위주로 판단하고 결정하지 마세요! 저는 지금도 생각합니다. 내가 만일 편한 길 때문에 교회 개척을 마다했다면, 일곱 식구 때문에 교회 개척을 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매일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10) 하늘에서는 천사들이나 성도들이 하나님 뜻에 백 퍼센트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땅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의 따르지 않습니다. 내 뜻대로 결정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세상 불신자들 얘기는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내 신상의 이해상관에 따라 모든 일을 결정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내가 내 편의 대로 결정하는데, 내가 내 생각대로 결정하는데, 어떻게 내 가정을 통해서, 어떻게 내 자녀들을 통해서, 내 사업을 통해서,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습니까?
오늘 내 인생사를 결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세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내게 결박이 다가오고, 죽음이 다가온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단호하게 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세요. 그래야 내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야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제대로 세워집니다. 그래야 영적 부흥이 있고, 성숙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의 아주 특별한 여행
행 21장 7~14절 / 박봉수목사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승천이후 복음이 어떻게 전파됐는지를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한 마디로 사도들에 의해서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책 제목을 ‘사도행전’이라고 지었습니다.
누가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의 예언과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풀어갑니다. 행 1:8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예언대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이제 사도들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루살렘에서 유다지역으로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전해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여행 이야기인 ‘기행문학’(travel literature)형식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행 13장부터 마지막 28장까지 절반이 훨씬 넘는 부분이 사도바울의 전도여행 이야기입니다. 즉 1차, 2차, 3차 전도여행과 마지막 로마로의 여행 이야기입니다.
제가 즐겨보는 TV프로그램 가운데 KBS의 ‘걸어서 세계 속으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여행전문교양프로그램입니다. 한 사람이 외국의 특정 지역을 여행합니다. 멋진 경치도 구경하고, 그 지역의 음식도 먹어보고, 사람들을 만나 대화도 나누고, 그리고 갖가지 체험을 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자기가 겪었던 것들을 소개하고 소감을 나눕니다.
제가 즐겨보는 이유는 마치 제가 그 지역을 여행하며 체험을 하는 것처럼 많은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제가 가본 곳이 나올 때면 그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금 그 때의 여행체험을 회상하게 됩니다.
사도행전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바울의 전도여행 이야기는 바울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여행하며 체험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여기서 저자인 누가는 마치 이 TV프로그램의 카메라 감독처럼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바울의 전도여행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으며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영적체험을 공유하면서 많은 도전과 교훈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나이 약 52세쯤 되었을 때, 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파송교회인 안디옥교회를 떠나 1차와 2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교회들을 두루 돌아보고, 에베소에 머물며 3년간 사역을 펼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이어갑니다. 이 3차 전도여행은 무려 5년이나 소요되었습니다. 이동 거리만 5천 킬로미터 정도나 됩니다. 참 길고도 머나먼 여행이었습니다.
본문은 이 3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부분의 여정입니다. 밀레도라는 곳에서 3년 동안 동역하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이별을 하고, 배를 타고 출발합니다. 고스, 로도, 두로, 돌레마이를 거쳐 예루살렘의 관문 항구인 가이사랴까지 여행하며 겪었던 일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수 닮음
본문의 이 여행은 목적지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까 본문 이야기는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이야기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심한 내용이 닮았습니다. 눅 9:5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의 사역을 마무리하실 때가 다가온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입니다.
행 19:21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서 고난을 받을 것을 알고도 간 것도 닮았습니다. 눅 18:31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면 큰 고난을 겪게 될 것이고, 마침내 죽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가시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도 큰 고난을 겪게 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나섰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누가는 바울의 예루살렘 여행을 기록할 때 이미 누가복음에서 기록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을 떠올리며 기록한 것 같습니다. 독자들에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모습이 참 예수님을 많이 닮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바로 이 여행이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참 많은 여행 이야기가 나오고, 전도여행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여행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과 닮은 여행은 없습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 가는 여행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여행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참 많이 닮은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사역초기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예수를 닮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2차 전도여행을 출발할 때 1차 전도여행을 함께 다녀온 동역자 바나바와 심하게 다툽니다. 그래서 갈라섭니다. 여행을 성공하겠다는 일념에 너그럽게 마가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오늘의 자기를 있게 이끌어 준 바나바와 심하게 싸우고 갈라섭니다. 어떻게 보면 바울의 감추고 싶은 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바울은 점차 예수님을 닮아갔습니다. 그렇게 책망하고 거부하던 마가를 받아들여 동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살아서 더 많은 일을 하려는 생각보다는 고난당하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까지 순종하겠다고 지금 이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처럼 말입니다.
돌이켜보니 저도 사역 초창기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역을 잘해보려는 욕심, 교회를 부흥시켜보려는 생각에만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닮지 못한 채 말 실수도 많이 하고, 동역자들이나 교인들 마음 상하게 한 일도 많았습니다. 이제 세월이 지나다 보니 사역도 중요하지만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잘 믿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에 순종하고 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 물론이겠죠. 믿음으로 기도해서 풍성한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 당연히 포함될 것입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주께로 인도하고, 헌신적으로 맡겨주신 사역을 잘 감당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도 손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다 이루었다고 해도 예수 닮은 모습이 없다면 결코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빼놓지 말고 힘써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예수 냄새가 나야하고, 예수 닮은 모습이 보여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분별력
오늘 본문 4절을 보면 잘 분별해 봐야 할 말씀이 나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말씀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두로에 갔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한 주동안 함께 하며 영적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성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위해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울이 이 권면을 듣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해 여행을 계속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한 권면을 어긴 것이 되고, 자칫 성령의 지시를 어긴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또 비슷한 사건이 가이사랴에서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때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로마군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그리고 바울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던 일행, 그 중에는 누가까지도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잘못하면 바울이 예언을 무시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성령의 공동체의 권면을 저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소통할 줄 모르고,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고집불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바울은 그 누구보다도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로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예언을 받은 사람들 그들이 만류하는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상황을 분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성령은 예루살렘의 여행에 큰 고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도 들었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두로의 형제들, 그리고 예언의 말씀을 들은 가이사랴의 형제들도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한 번도 고난이 있으니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일은 없습니다. 저들이 만류한 것은 바울을 위해서 인간적인 생각으로 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여행을 강행하게 됐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바울의 이 냉철한 분별력에 크게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면 자기가 큰 고난을 겪을 것이고,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도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고, 여러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또 예언으로 말씀하는 것으로 확인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이 그렇게 눈물로 가지 말라고 말릴 때, 마음이 약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자기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저 못이기는 척하고 여행을 중단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이고 성령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들의 권면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흔들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의 흔들리지 않는 분별력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얼음처럼 차가운 영적 분별력으로 성령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분별해 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바람을 분별해 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모두가 눈물로 막을 때 혼자서 가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분별력,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분별력을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마음의 욕망과 감정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 분별력을 배워야 합니다.
일사각오
본문 13절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일사각오’의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트롯가요 가운데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미아리 눈물고개 임이 넘던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이 노래는 6.25 한국전쟁시 북한 인민군이 후퇴하며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갈 때, 남편과 생이별을 하는 한 많은 여인의 아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번에 끌려가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비통하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 죽을 줄 알며 가는 여행은 이렇게 끌려가는 여행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울은 자발적으로 이 여행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모두가 말려도 뿌리치며 이 여행을 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은 왜 이런 여행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바울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밝힌 바가 있습니다. 위의 20:22를 보면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자신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며 가는 여행을 포승줄에, 철사줄에, 수갑에 매여 하지만, 바울은 성령에 매여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억지로 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 여행을 하지만, 바울은 자발적으로 감사함으로 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사각오의 자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평안한 일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그저 위인전을 읽듯 감동만 받고 끝내도 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이 예루살렘 여행에서만 일사각오의 자세를 보인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 선교현장에서도 이 자세를 보여 왔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늘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는 주를 위해, 주님의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고전 10:23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그리고 31절에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바울은 이 말씀대로 평상시 먹고 마시는 일에서도 자기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영광을 앞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일상에서의 일사각오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사각오 하면 떠오르는 분이 주기철목사님입니다. 일제의 혹독한 박해시기 일사각오의 자세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은 평소에도 늘 그런 자세로 사셨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시고는 자기가 원하는 목회지를 찾지 않고,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을 찾았습니다. 부산초량교회를 목회하고 있을 때 마산 문창교회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교회에 큰 시련이 닥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계선배들도 이분이 가서 교회를 안정시키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이분이 흔쾌히 안정되고 부흥하고 있는 교회를 두고, 마산문창교회로 부임을 했습니다. 이분은 이렇게 자기가 원하는 목회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을 찾았습니다. 바로 이런 태도가 일사각오의 신앙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순교할 때가 찾아온다면 성령에 매여 일사각오의 자세로 순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안한 시기 일상 속에서도 일사각오의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성경본문|
행21장 10절 ~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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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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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피종진목사
>비 고|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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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구 문사도행전 21:10~14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두 번이나 박해 당할 것을 예언 받았습니다. 처음엔 두로의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박해 당할 것을 알고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였습니다(행 21:4). 두 번째는 빌립 집사의 집에서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바울이 결박당할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11절). 이때에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바울과 동행하던 동역자들까지 모두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만류하였습니다(12절).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신앙으로 오히려 만류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박해에 대한 염려에서 승리했습니다(13절).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의 이름을 위한 참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①구원을 주시는 이름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됩니다(롬 10:13). ②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이름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절대로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응답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사람의 이름을 앞세우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십시오. 확실한 응답을 보장받습니다. ③귀신들도 항복하는 이름입니다.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 귀신들은 예수의 이름에 항복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④모든 질병을 치유해주시는 이름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요즘 신종 플루가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주시고, 기도의 응답을 주시며, 귀신들도 항복하고, 모든 질병을 치유해주시는 이름, 즉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았던 사도 바울은
첫째, 결박과 핍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 마태복음 5장 11,12절을 보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핍박은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행 7:54~60).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들과 항상 함께 하십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도 각오하며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죽음도 각오했습니다(13절). 빌립보서 1장 20절을 보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을 보면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담대하여 몸으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해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처럼 빛의 열매를 맺어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고, 소금처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의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로마서 14장 8절을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씀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성도라 이름하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이 주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먹어도 자기를 위해 먹고, 먹지 않아도 자기를 위해 먹지 않습니다. 성도는 자기를 위해 살도록 정해진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주를 위해 살도록 구별된 자입니다.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행해야 합니다(고전 10:31).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즉 주님께서 부르신 사명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기도의 응답을 주시며, 귀신들도 항복하고, 모든 질병을 치유해주시는 ‘예수의 이름’ 권세를 힘입어 결박과 핍박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음도 각오하는 신앙으로 일평생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계시하시는 이유
전승문목사 / 행 21:10~16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입니다. 단 한 번밖에 없는 너무너무 중요한 기회입니다. 그러니까 잘 살아야 합니다. 딱 한 번밖에 없는 중요한 기회니까 반드시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생은 잘 살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잘 죽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사는 것보다도 죽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는 우리의 죽음을 더 중요하게 여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시편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시 90:10~12)” 인생은 아무리 건강하게 아무리 행복하게 아무리 잘 살아도 70년에서 80년이면 끝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중 대부분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그마저도 날아가듯 지나가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그렇게 인생이 지나가고 나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가득한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그 심판의 날을 계수할 줄 아는 사람,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심판대에 서게 될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걸 알아야, 죽는 날을 알아야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죽을 준비를 할 수 있고 그래야 심판 받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비결입니다. 살아갈 날을 계수하고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비결입니다.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겁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준비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거니까 잘 대비해야 하는 겁니다.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은 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은 사실은 잘 죽은 사람입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고 맞이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잘 살았어도, 건강하게 즐겁게 풍요롭게 무병장수하며 행복하게 살았어도 죽음이 복 되지 못하면 그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음이 복 되지 못하다면 그는 심판대에서 인정하심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힘겨운 인생을 살았어도, 병약하고 고단하고 가난하게 살았어도 그 죽음이 복되다면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심판대에서 하나님께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기회는 잘 살아낼 수 있는 기회이며 동시에 잘 죽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예감하십니까? 여러분도 잘 죽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바울은 사실 인생 자체를 잘 살아내신 분은 아닙니다. 객관적으로 비교적인 관점에서 바울의 인생을 바라보면 그다지 행복한 인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평생을 편안하게 쉬어본 적이 거의 없는 분이었습니다. 어려서는 예루살렘에서 유학을 하느라 참 힘들었을 겁니다. 최고의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던 분이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던 분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어도 정작 출세는 하지 못했습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며 무엇보다도 로마시민권자였지만 출세는 하지 못했습니다. 출세는 고사하고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는지 모릅니다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바울이 당한 고난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입니다. 물론 이 모든 고난은 다 주를 위한 고난, 사명을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느라 선교를 하시다가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복을 받았을까요? 물질의 복을 받았을까요? 건강의 복을 받았을까요? 가정의 복을 받았을까요?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복은 단 한 가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평생 가난했습니다. 누구보다 많은 선교를 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많은 교회를 세웠지만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항상 일을 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했고 선교하기 위해서 일을 했고 평생토록 일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늘 가난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평생 병약했습니다. 특히 선교여행을 하시는 기간 내내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그 병은 아마도 제1차 전도여행 기간에 그러니까 선교를 시작하자마자 얻은 질병이었을 겁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말라리아에 감염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합니다.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 선교를 마친 후에 밤빌리아나 버가에서 감염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무튼 바울에게는 고통스러운 질병이 있었습니다. 육체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가시를 빼달라고 그 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고후 12:7~9). 하지만 주님은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통해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주님이신데 정작 바울의 병은 고쳐주시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가족도 없었습니다(고전 7:7). 성서학자들에 따라 결혼은 했지만 함께 살지 못했다고 하기도 하고 아예 결혼을 하지 못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바울에게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자식도 없었습니다. 또한 부모와 형제들에게도 버림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가정의 복을 받지 못한 겁니다. 물질의 복도 건강의 복도 가정의 복도 받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의 일생을 객관적인 눈으로만 볼 때는 그다지 행복한 삶이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바울의 인생은 행복하지 못한 인생이었을까요? 아니지요! 절대로 아닙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기뻐하라고, 항상 기뻐하라고 가장 많이 말씀하신 분이 바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던 분이 바로 바울인 겁니다. 바울의 인생은 목적이 있는 인생이었습니다. 그 목적이 이끌어가는, 그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그 목적은, 바울의 인생 그 인생의 목적은 오직 십자가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인생은 오직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향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달려가는 인생이었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인생, 정말 위대한 인생, 정말 놀라운 인생이었습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었고 무엇도 막아설 수 없었던 정말 대단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사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목표로 삼고 달려간 인생의 끝에는 십자가 곧 죽음이 있었던 겁니다. 사실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는 것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그 죽음을 피하려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안 죽으려고, 어떻게든 오래 살려고 발버둥 치며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 중 대다수가 그렇게 삽니다.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려고 애를 쓰며 도망 다니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인생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 있습니다. 바울이 바로 그런 인생을 사신 분입니다.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죽음을 피해 도망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사도행전은 총 28장으로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21장부터 마지막 28장까지 다 바울의 죽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 위대한 죽음에 대한 기록인 겁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에 대한 말씀은 13장부터 시작됩니다. 8장과 9장에도 일부가 나오기는 하지만 주된 말씀은 13장 이후의 말씀입니다. 1장에서 12장까지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사도들에 대한 말씀이고 13장부터 28장까지가 바울에 대한 말씀입니다. 총 16장에 걸쳐 바울에 대해 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중에 바울의 죽음에 대한 말씀이 8장이나 됩니다.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죽음을 대하는 바울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겁니다.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한 바울은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바울은 사실 그 여행에 어떤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2~24)”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달려가는 겁니다. 십자가를 향해서, 죽음을 향해서, 죽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지혜로운 겁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겁니다. 왜냐면 이것이 바로 주님처럼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도 예수님도 이렇게 사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겁니다. 그게 지혜로운 겁니다. 그게 인생을 잘 살아내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바울의 그 여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밀레도에서 출발한 배는 고스 – 로도 – 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상륙했습니다. 두로는 일찍이 예수님도 찾으셨던 중요한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두로에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두로에서 일주일간 머물게 된 바울은 그곳에 있는 그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 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로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성령님께서 계시를 주신 겁니다. 바울이 당할 일을 미리 알려주신 겁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바울을 말리라고 알려주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누구보다도 바울이 먼저 그 뜻을 알았을 겁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바울이 당할 일을 계시하신 이유는 기도해주라고 하신 겁니다. 바울이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바울이 끝까지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고 알려주신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만 바울을 만류했던 겁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주님을 말리다가 큰 야단을 맞았던 것처럼 그들도 그랬던 겁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들의 만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바울의 사명이기에, 목적이기에, 달려가기를 멈출 수가 없었던 겁니다.
두로를 떠난 배는 돌레마이를 거쳐 마침내 가이사랴에 도착했습니다. 가이사랴! 드디어 바울이 이스라엘에 들어온 겁니다. 가이사랴에는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이 네 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 그가 바울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인 겁니다. 정말 은혜로운 장면입니다. 일곱 집사는 스데반과 함께 집사로 선출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했을 사람이 빌립인 겁니다. 바울은 그때 스데반이 죽어갈 때 그 자리에서 함께 돌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직접 돌을 던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그들과 함께 스데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장본인입니다. 그랬던 사람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인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는 눈물로 바울을 붙잡기까지 했습니다. 아가보는 일찍이 이스라엘의 가뭄을 예언했던 선지자인데(11:28) 이번에는 바울이 당할 일을 예언했습니다. 바울의 띠로 자신의 수족을 잡아매고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당할 거라고 예언한 겁니다. 그러자 빌립이 네 딸과 함께 눈물로 바울을 만류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이분이 바울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달려가는, 사명을 향해 달려가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멋진 인생 바울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발포했습니다. 곧바로 체포된 안중근의사는 감옥에서 형식적인 재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안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수의와 함께 편지 한통을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안의사의 어머니는 이렇게 썼습니다 :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인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중요한 기회입니다. 그러니까 잘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겁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의 죽음을 계시합니다. 종말을 계시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의 죽음을 계시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어째서 죽음을 종말을 계시하는 것일까요? 준비하라고! 대비하라고!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말고 승리하라고! 계시하는 겁니다. 딱 한 번 사는 인생, 잘 삽시다. 그리고 우리 잘 죽읍시다. 죽음이 두려워 평생을 죽음에서 도망만 다니다 비참하게 끌려가지 말고,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오히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멋진 인생을 삽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 16:24)”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행 21장 10~14절 / 이재철목사
♬ 이제 내가 살아도 ♬
1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2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 천사 나팔불며 마중 나오네
(후렴)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공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공이란 세상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 둘째,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유익(복)을 주는 삶입니다.
☞ 셋째,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보람과 기쁨이 있는 삶입니다.
사도행전 21, 22장에서는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고 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보며 "저 사람을 만난 것이 복되도다. 저 사람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역경을 피하려고 하지말고(불평하지 말고, 마지못해 하지말고) 기쁘게 받아들이십시오.
행 21 : 4절 말씀에 보면 사도바울이 두로에 들러 일주일을 함께 머무를 때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10절 이하의 말씀에도 이가보라는 선지자가 와서 예수님이 어떻게 잡히시는 지를 직접 보여주며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반대합니다.
하지만 13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사도바울의 이런 각오를 보며 사람들은 주님의 뜻대로 잘 되기를 원하며 바울을 보내줍니다.
여기서 의문이 있습니다.
4절과 11절에 보면 사람들에게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행 20 :22-23절 말씀에도 성령께서 사도바울에게 증거 하여 알려주었습니다.
같은 성령이 말씀하셨는데 서로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옳고 사람들이 틀린 것입니다.
왜 성령을 받으면서도 틀릴까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역경이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편한 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어려움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좋아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이 더 기쁘기 때문에 그것을 감수하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결혼 생활도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사업도 고비가 있기 마련입니다.
저희 교회도 처음에 가정교회를 시작할 때 고난을 감수했기 때문에 지금의 가정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를 이겨낼 자가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 감수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감사하십시오. 나만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자신의 희생이 따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난과 희생을 감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역경이 있었기 때문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못할 때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역경을 피해만 다니는 사람은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역경을 피하지 말고 기뻐하십시오.
2025년, 성도로서의 나의 각오
행 21장 13절 / 김창환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이유는 3가지였다. 오순절을 맞이하기 위함이었다. 또 예루살렘교회가 가뭄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는데 구제헌금을 빨리 전해주기 위함이요, 더 큰 이유는 이제 로마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바울의 일행들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생명에 큰 위험이 있다며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를 받았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죽음을 각오하고 오순절을 지키고, 구제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게 전하고, 로마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무슨 일은 하든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다. 2025년 새해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성도로서의 나의 각오와 결단을 새롭게 다지는 시간을 가지자.
1. 주일을 성수하겠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0-11).
*주일 성수(출 20:8)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안식일을 어길 경우에는 장대사형, 돌처형을 하였다(신 21:22-23).
주일 성수는 모든 예배생활의 기본이다. 주일이란 "주의 날"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이다.
* 주일 : 창조의 첫날, 주님의 날, 부활하신 날, 성령이 오신 날이다.
1)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날이다.
2) 하나님께 감사 예배드리는 날이다.
3) 부활에 참여할 것을 믿고 결단하는 날이다.
2.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3:10-12).
십일조는 자기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성경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했다. 십일조는 신앙생활을 하려는 자가 물질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고백의 표현이며 세상을 향했던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표시이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 온전한 십일조 드리면 복된 복을 누리게 하신다.
1) 하늘 문을 열고 축복하신다. - 닫히면 망한다
2) 황충을 금한다. - 질병과 마귀의 역사를 막는다.
3)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 - 사업, 출산, 추수의 복을 주신다.
3.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묵상하겠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성경은 성령에 의해 감동된 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말씀에 권위를 주어야 하며, 인정해야 하며, 경건함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계획이 있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상고하는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 성경은 영혼의 양식(구약 929장, 신약 260장, 1189장)이다.
1) 매일 3장씩, 주일에 5장씩을 읽겠다. 그렇게 하면 1년에 일독을 할 수 있다.
2) 성경 필사하겠다. 성경 필사는 단순히 글씨를 옮겨 적는 행위를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는 특별한 영적 경험이다. 손으로 직접 성경 구절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말씀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고, 마음에 새겨지며, 삶에 적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4. 쉬지 말고 기도하겠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 116:1-2).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3-14).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하셨으며 기도하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합당한 것으로 응답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다. 기도는 쉬면 영혼이 병들고 결국에는 죽게 된다.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끊임없는 간구와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게 한다. 사무엘처럼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지자.
1) 새벽을 깨우는 기도를 하겠다. -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2) 남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겠다. -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5.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 43:10).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 증인(전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는 일이다. 증인(전도)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며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1) 국내 전도 : 올해는 반드시 한 명 이상 전도하겠다.
2)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지겠다(방송선교, 문서선교, 봉사선교)
6. 나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헌신)로 드리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 헌신은 하나님께 내 뜻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헌신은 나 자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바치는 것이다.
1) 헌신은 나의 재능(달란트)을 드리는 것이다.
2) 헌신은 나의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3) 헌신은 나의 물질을 드리는 것이다.
결론. 2025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위에 6가지의 신앙의 각오와 결단을 내리자.
성경을 보면 다양한 각오와 결단과 결심한 내용들이 있었다.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룻 1:18).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왕위를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대하 2:1).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복음을 위하여
행 21장 13절 / 김남준목사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 가운데 가장 커다란 명령이 너희는 만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상명령이라고 말합니다. 최고로 높은 위치에 있는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헌신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도 이 복음전파에 대한 부채의식들이 없는 것을 오늘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바로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 장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던 것은 성지 순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때 예언이 있었는데 그 예언은 말로 하는 예언이 아니라 행동 예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바울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풀어 가지고 그것으로 자기 손을 묶으면서 말하기를 "내게 성령이 이르시기를 이 띠의 임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렇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체포되어서 심문을 받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모든 교우들이 힘을 합해서 바울을 말렸습니다. 절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성령이 그곳에서 자신을 유대인들로 인하여 체포되게 하시고 심문을 받게 하시고 고난을 받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성령이 거기에 오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20장에서 언급한 동일한 마음으로 동일한 고백을 여기에서 합니다.
먼저 믿은 사람들도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환난과 핍박이 기다린다고 증거 하는 명백한 성령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가야되겠다고 결심하게 만들었습니까? 그는 순교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예수의 구원의 복음이 시작되고 교회가 시작된 그 곳에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고 여전히 유대교의 편견에 가려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예루살렘의 본토박이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사도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가게 만들었던 것은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죽어가고 있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의 영혼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우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먼저 들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먼저 복음을 듣고 자기가 믿고 있는 이 신앙, 이렇게 믿는 것이 과연 참다운 복음에 입각해 있는 신앙인지를 점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도 선교의 대상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교적부에 등록이 되고 인사를 하고 집사로 승진을 하고 하는 것들이 곧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됩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진정한 변화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붙잡힌 사람들로 변하기 전에는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 주시는 이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교회가 성령의 권능으로 놀랍게 무장되어야 할 필요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놀라운 능력으로 무장되기 위해서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면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묻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간절히 기도하게 하고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권능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 가운데 사랑을 주셔서 모든 성도들이 교회에 나올 때마다 놀라운 기쁨과 은혜로 충만해지게 되면 그 다음에 우리는 무슨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의 일생을 위해서 재물을 모으고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일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만드셨습니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는 들어주지 않는 놀라운 응답들을 들어주셔서 하나님이야말로 살아 계셔서 이 시간에도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고 움직이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 복음 전파에 기여하지 않으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며 인생에 있어서 이보다 절박한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를 믿게 하는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을 허비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이런 순수함들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와서 교회를 맡고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 세상의 죽어 가는 영혼들에 대한 구원의 다급함, 복음전파의 다급함에 불타지 않은 가운데 오랫동안 신학을 하고 공부한 사람들이 나가서 무엇으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불을 붙여서 그들로 하여금 그 불이 뜨거워서 복음전파를 위해서 이 세상을 향하여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교회는 기도할 것이 없는 겁니다. 복음전파를 제외해 놓으면 교회는 별로 기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속에 복음을 전하고 죄인을 깨닫게 하고 그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깨닫게 하는 요소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모인 사람들이 즐기는 요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구원의 열망
사도를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가지 마십시오. 당신은 우리의 목회자입니다. 거기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사도는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만 너희들을 향한 그 사랑도 가로막을 수 없는 사명이 나에게는 있다. 예루살렘에로도 가서 하나님의 복음, 은혜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이 일을 위해서 나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가장 타락한 형태의 교회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을 주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 돈을 내는 것으로 만족하며 자기들은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극히 타락한 교회의 형태입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는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도시에 사도들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폭탄이 터지고 나서 수많은 특공대들이 그 도시를 휩쓸고 다니면서 각개전투를 하면서 하나씩 처치해서 그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메어 왔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사도행전이 그 이름을 기록하기도 잊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 속에 있었던 열망은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교회가 키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을 향한 간절한 사모함, 그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 이것들이 바로 그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동기였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 놀라운 구원을 깊이 느끼고 이 구원의 복음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이런 것들이 없으니까 교회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명과 함께 한 은혜
오늘 이 사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으려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우선은 그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지만 또 하나는 이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던 사명입니다.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 그것은 사도에게 있어서 인생의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자기의 편견과 잘못 알고 있었던 구약의 모든 지식들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로만 다가오지 않고 그 은혜는 사명과 함께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내가 네게 나타난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들에 사환과 증인을 삼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반드시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다름 아니라 내가 만난 그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던 그 시기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울과 만나주신 이 놀라운 것이 단순한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 주실 때 구원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싶으셨던 겁니다.
가슴속에 영혼을 향한 그 구령의 뜨거운 갈망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혼탁한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가장 확실히 느껴보고 싶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을 때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서 복음전파의 삶을 살 때 그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 누구에게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너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분부한 것들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다시 말하면 만천하에 다니며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의 마음으로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예수와 함께 고난을 받으며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유일한 구원을 전파할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고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자랑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하지 않고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고 전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 감격이 더 오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고 주저앉는 것 같을 때도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자랑 할 때 새 힘이 생깁니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사도는 오해와 편견 가운데 살아가며 멸망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자기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오늘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런 놀라운 사랑은 사도에게만 미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비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도 받았습니다. 남이 못 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지식들을 주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남이 감격 할 수 없는 그 말씀을 인해서 우리는 감격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바울이 그렇게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에게는 닫혔던 구약이 열렸습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수많은 서신서들을 쓰면서 결국은 거의 그 사도 바울 한 사람에 의해서 오늘날의 기독교의 형태가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은혜가 깊어지자 하나님은 더 크게 보였고 자기는 더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고 복음의 깊이와 예수의 넓은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점점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도 자기에게는 조금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신앙의 겸손과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아는 인식의 지평, 그리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분간해낼 수 있는 놀라운 영적인 깊이들이 산 속에서 얻어진 것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거의 도시를 떠난 적이 없을 정도로 혹은 아테네에서 혹은 예루살렘에서 혹은 안다옥에서, 에베소에서, 고린도에서, 골로새에서 수많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만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모욕을 받았습니다. 부끄러움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매맞고 옥에 갇히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순교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수고하지 않는다면 마지막날에 우리에게 무슨 상급이 있겠습니까? 예수 믿고 은혜 받아서 그 은혜가 떨어지면 다시 그 은혜를 받아서 기분 좋아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래서 은혜를 받고 교회의 제도 속에 묶여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상급들이 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맺는 말
여러분들은 성경책의 모서리가 왜 빨간 색으로 되어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어 간 순교자들의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금박이 아닙니다. 성경에 금박을 발라놓은 정신이 교회를 지배하니까 복음전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순교자들을, 사람들이 성경을 펼 때마다 기념하게 하기 위해서 선조들이 이 성경을 빨간 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어느 곳에서든지 순교가 있었고, 그 순교의 시체의 피를 타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곳에서 구원을 받고 이곳에 있는 것, 이곳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힘을 다해서 우리가 이 복음 전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서 고난을 받고 시련을 당할 때 비로소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런 고백을 가슴에 안고 주께서 우리의 혀가 굳어지게 하시기까지 이 땅에서 예수의 넓은 사랑을 전파하고, 우리의 심장에 피가 멎을 때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삶에 헌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언,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행 21장 7~14절 / 콜럼버스한인장로교회
여러분은 혹시 예언기도를 받아본 적이 있으십니까? 예언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은사를 받은 분이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알려주셔서 전해주는 것입니다. 잘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잘못 가서 이단 비슷한 데로 빠지는 사람도 있고, 마치 점집을 운영하며 점을 치는 것처럼 예언기도를 하고 돈을 받으며 사업처럼 운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잘못된 경우이지만, 예언이라는 것은 특별한 예언의 은사를 받아 직통계시를 받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목장에서 나눔을 하다가 어떤 지체가 아주 큰 어려움에 닥쳤을 때, 마음이 아프고 간절해지면서 하나님 앞에 속으로 ‘하나님, 이분을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나눔을 듣는 중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무심코 “힘내세요.”라고 한마디 던지면서 이전에 힘들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 생각나 그것을 잠깐 나누었는데, 나중에 그분이 와서 “형제님(자매님)의 그 한마디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언도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언기도라고 하면 조심할 필요도 있지만, 또 동시에 사랑으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직통계시내지 은사를 받은 분들이 예언해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제 곧 우리가 가정교회 간증집회를 하는데, 이번에 오는 강사님은 평신도 사역자로 여자 목자님이십니다. 바로 그런 은사를 받은 분이셔서, 한국과 호주와 미주 등 여러 곳들의 집회에 초청을 받아 다니는 분이십니다. 물론 자기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은 ‘예언’이라고 내세우지 않고 ‘상담’이라고 하면서, 질문하고 기도하며 격려해주고 바른 길로 가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집회 때 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집회 때도 그런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예언의 은사를 가진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앞길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예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점에 대해 우리에게 잘 알려줍니다.
어떤 분은 그런 집회나 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아유 무서워. 내 과거를 다 알면 큰일이지.’라고 하며 ‘나는 안 하겠다.’라고 하고, 어떤 분은 너무 좋아하면서 ‘나는 하겠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너무 좋아할 것도 없고 너무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예언,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예언은 항상 우리를 격려합니다. 물론 책망할 때도 있지만, 책망은 우리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잘못 가니까 바로 세워주기 위한 것이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니고 과거를 까발려서 창피를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번에 많은 분들이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1. 가이사랴에서 빌립과의 만남
지난주에 1~6절을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일행과 함께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두로를 떠나는 날, 두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처자들을 항구까지 데리고 나가 배에 오르는 바울 일행을 마지막 순간까지 전송했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헌신하여 나아가는 바울의 귀한 믿음을 자신의 배우자와 자녀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7절)
바울 일행이 두로에서 타고 떠나는 배는 그 배의 최종 목적지이자 이 두로에서부터 남쪽 20마일 정도 지점에 위치한 돌레마이(Ptolemais)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두로에서와 마찬가지로 돌레마이에서도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찾습니다. 여기서 ‘안부를 묻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환영하다’, ‘영접하다’, ‘포옹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돌레마이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찾아 그저 형식적으로 ‘잘 지내냐?’라고 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과 일행히 다 같이 포옹하고 깊은 교제와 인사를 나누면서 하룻밤 동안 믿음의 역사를 함께 나눈 것입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8절)
다음 날 바울은 일행과 함께 돌레마이에서 남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졌으며,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가이사랴로 갑니다. 돌레마이로부터 걸어서 이틀 길이었습니다. 돌레마이가 배의 마지막 목적지였기 때문에,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내려갑니다.
헤롯 대왕에 의해 건설된 가이사랴는, 로마에서 온 유대 총독이 거주하며 정치적 수도로 삼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도시 이름이 가이사랴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한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훨씬 북쪽에 있는 산지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가이사랴’라는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곳입니다.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헤롯 대왕이 만든 도시입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가이사랴 빌립보도 가보았고 이 가이사랴도 방문했는데, 가이사랴 빌립보는 산지에 있는 도시이고 이 가이사랴는 바닷가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닷물이 정말 깨끗하고 여러 고대 건물 유적들이 아직도 육지와 바닷물 속에 흔적이 남아 있는 곳입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바울은 일행과 함께 빌립의 집을 숙소로 정하여 머물게 됩니다. 나중에 이 가이사랴에 바울이 잡힌 몸으로 오게 되는데, 이때는 거기 살고 있던 빌립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도 빌립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이 빌립은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으로 뽑은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빌립입니다. 본문에서 빌립을 “전도자”라고 묘사하는 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사도 빌립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8장 40절을 보면, 약 20년 전에 빌립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이 가이사랴에 와 정착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빌립이 사라졌는데 이때 다시 나옵니다.
7장에서 교회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이 죽고, 8장 초반부에는 당시 사울로 불리던 바울이 교회를 잔멸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감옥에 넘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큰 박해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다 흩어집니다. 그 중 한 명이었던 빌립은 예루살렘에서 약간 북쪽인 사마리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후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광야로 나가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집으로 가던 것을 만나서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당시 전도자 빌립이 교회 역사상 최초의 집사로 선출된 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던 바로 그때, 바울은 살기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감옥에 쳐 넣는 일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던 박해자요 폭도였습니다. 그러니까 빌립과 바울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원래 서로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이 두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주님 안에서 교제를 해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이사랴를 방문한 바울이 여러 명의 일행과 함께 아무 스스럼없이 빌립의 집에 불쑥 찾아와서 ‘여기서 잡시다’ 하며 숙소로 삼을 정도로, 이때 바울과 빌립은 친한 사이였다는 것을 또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도행전은 빌립의 자녀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9절)
빌립이 가이사랴에 정착한 후 세월이 흘러 20년 정도 되었는데, 그 사이 그의 가족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전에도 자녀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에게는 딸 넷이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처녀였고 예언자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면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자기 자녀가 영적으로 은사를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부모인 빌립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분들은 자녀를 생각해보십시오. 내 자녀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하면 좋아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새로운 영어권 교역자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교회들마나 영어권 교역자가 없어서 찾느라고 난리들입니다. 한국어권 목회자들은 차고 넘치고 교회 사역 자리는 별로 없는데, 영어권은 찾는 교회가 많은 반면 영어권 교역자는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우리 자녀들은 다 영어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아들이나 내 딸이 “아빠 엄마, 나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될래요.”라고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좋아하시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영어권 교역자를 찾고 있는데 정작 내 아들은 안 되고 내 딸은 안 된다는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영어권 교역자를 모실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갑자기 내 자녀가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목회자나 선교사는 무슨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다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입니다. 물론 목회자나 선교사만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목회자나 선교사가 아니더라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왜 그런 데 시간을 보내냐? 공부해라.’라고 하는 부모가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쓰려고 하실 때 기꺼이 ‘내 아들이, 내 딸이 주님께 쓰임을 받다니 너무 감사하다.’ 하며 내어줄 것인지 미리 결단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고, 평신도로 열심히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억지로 부담이 되는 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천국에 상급을 쌓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입니다. 가장 복된 일을 하겠다는데 막고 말리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오히려 더 격려해주고 기도해주며 하라고 서포트해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아가보의 예언과 그에 대한 해석
1) 아가보의 예언과 사람들의 만류
바울과 그의 일행이 정확하게 얼마나 오랫동안 가이사랴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 머물렀던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10절)
바울과 그 일행은 오래 머물며 빌립과 그의 딸들과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마 이때 빌립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이라서 잘 모르고 있었던 자신과 스데반의 이야기, 또 초기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이야기, 특히 내 것 네 것 없이 다 나눠 쓰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던 모습들을 자세히 말해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때 그 자리에 누가 같이 있었습니까? 바로 누가가 같이 있었습니다. 누가가 그것을 듣고 메모해놓았다가 나중에 사도행전 6~8장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머물고 있던 이 빌립의 집에 선지가 아가보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아가보는 11장에서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황제 때 대흉년이 일어날 것을 정확히 예언했던 사람입니다(11:28). 그런 능력 있는 아가보가 빌립의 집에 나타나서 일종의 무언극 형식으로 예언을 전해줍니다.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11절)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지고 오게 해서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한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고발로 로마군대의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을 예언합니다. 성령님께서 선지자 아가보를 통해 빌립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12절)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자신을 포함한 바울 일행을 말합니다. “그곳 사람들”은 빌립과 그의 네 딸들을 가리킵니다. 그 유명한 선지자 아가보가 예언하기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감옥에 갇힐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자 바울과 함께 하고 있던 누가를 비롯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아시아에서 온 각 교회 대표들, 즉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금을 전해주기 위해 함께 가고 있던 그들도, 또 빌립 가족들도 모두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들이 말로만 말린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은 모두 함께 울면서 말렸습니다. 우리말 ‘권하다’(12)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가 원문에 미완료형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바울 일행과 빌립 가족들이 울면서 계속하여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말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에게 몇 명의 자녀가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례적으로 빌립에게 네 명의 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9절에서 ‘처녀’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의 딸 네 명은 모두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이고 네 명 모두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선지자 아가보가 그 집에 왔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1장에 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예루살렘에서 여러 선지자들이 왔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이 아가보였고, 그는 당시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일어날 대흉년을 안디옥에서 정확하게 예언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예언자 아가보가 왜 이때 빌립의 집을 방문했겠습니까? 아가보는 바울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거기 있었는지 알지도 못했을지 모릅니다.
11장에서 아가보가 안디옥으로 온 것을 보면, 바울과 아가보는 그때 처음 만났다고 볼 수 있는데, 그 후에 그들이 서로 교제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볼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언의 은사를 받아 사역하던 선지자 아가보는, 역시 예언의 은사를 받은 빌립의 네 딸들과 평소에 친분을 맺고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날도 아가보는 가이사랴를 방문한 길에 자기가 평소에 친분이 있는 빌립의 네 딸들을 만나러 빌립의 집에 왔다가, 마침 거기 머물고 있던 바울과 일행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 바울을 만나자마자 성령님이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긴 천으로 된 띠)를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손과 발을 묶은 다음에 ‘이 띠의 임자’ 즉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묶이고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을 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청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이 그렇게 잡혀서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데 누가 빨리 가라고 하겠습니까? 안 가는 좋겠다고, 가지 말라고 말리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예루살렘 길이 결박과 환난의 길이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지금까지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간청하며 말렸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살펴보았던 두로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렸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잘 아는 사람들이지만 실제로 바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눈물로 바울을 말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울이 왜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바울의 동역자들이 눈물로 바울을 말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전도자 빌립과 그의 네 딸들과 함께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말립니다.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예언의 은사를 받은 빌립의 네 딸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길을 말리니까, 그들의 아버지인 빌립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함께 생명을 걸고 여행해 온 바울의 동역자들도 그렇게 합니다.
만약 빌립의 네 딸들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나 두로의 제자들처럼 예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그 네 명의 처녀들이 아무리 말렸어도 바울 일행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받은 빌립의 네 딸들과 이전 예언이 정확하게 맞은 아가보가 예언하고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바울을 말리니까, 생명까지 나눈 바울의 동역자들도 함께 바울을 말리게 되었습니다.
2) 바울의 사명 선언 13-14
그때 바울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13절)
자기 일행과 빌립 가족들의 거듭된 눈물의 만류에 바울이 도리어 그들에게 반문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이 말이 <새번역> 성경에는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무 우니까 바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동역자들과 빌립 가족들의 거듭되는 눈물의 요청을 보며, 바울의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한 것입니다.
자신이 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동역자들마저 울면서 자신을 말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믿음에 관한 한 바울보다 대선배인 전도자 빌립마저 네 딸들과 함께 눈물로 말리고 있습니다. 전도자로 불리는 빌립이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려고 하는 바울의 앞길을 가로막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전도자인데 전도자를 말리는데, 얼마나 마음이 간절했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성령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예언을 주셔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바울이 황소고집(요즘 전문용어(?)로 ‘똥고집’)을 피우면서 ‘나는 그래도 간다.’라고 하는 겁니까? 객기를 부리고 혈기를 부리는 겁니까? ‘왜 이렇게 울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느냐?’라고 화를 내는 겁니까? 두로에서도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4) 바울을 말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도 고집을 피우며 떠났고, 여기서도 아가보가 예언하고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나는 예루살렘에 기필코 간다.’라고 우기며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잘 보시면 그것이 아닙니다. 아가보가 뭐라고 합니까? 그는 단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당하여 로마군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한 것뿐입니다. 로마군이라고 이야기는 안 했지만 ‘이방인’이 로마군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게 넘겨질 것이라고 사실을 예언한 것뿐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안 된다거나 가야 한다는 식으로 자기 개인 의견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투옥을 당할 것이라고, 이전에 이미 성령님이 바울에게 여러 성들을 거칠 때마다 알려주셨던 똑같은 내용을 아가보는 그대로 전한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이것은 예언의 문제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입니다. 예언은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아무리 예언을 받아도 제대로 해석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제대로 해석하며 나아갈 때 정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지난번 16장을 보았을 때, 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은 원래 1차 때 전했던 갈라디아(지금의 터키 중부) 지역 중심으로 계속 복음을 전하고, 이미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들을 돌보는 것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계속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그쪽에서 다른 데로 가려고 하면 막고 또 다른 데로 가려고 하면 막고, 그렇게 막히고 막히다 도착한 곳이 드로아입니다. 어쩔 수 없이 소아시아(터키)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 드로아에 왔는데, 거기서 그날 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그 당시 선교 팀은 예루살렘에서 온 실라, 루스드라에서 합류한 디모데, 또 드로아에서 합류한 누가, 그리고 바울까지 네 명입니다. 바울은 선교 팀과 함께 그것을 나눕니다. 거기도 “우리가”라고 나옵니다. 주님께서 자기들을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줄로 “인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석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바울의 동역자들과 빌립과 딸들이 모두 눈물로 바울을 말리는 이 장면은 아주 가슴 뭉클하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누가 어려운 길을 가겠다는 것을 말리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입니까? 그들이 얼마나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꼈으면, 바울이 이제 가면 고난을 당한다니까 울면서까지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거듭하여 요청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울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의 사명을 망칠 뿐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비록 지금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위험한 길이라도, 그 길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에 바울이 순종할 때 바울을 통해 주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몰랐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거쳐 나중에는 로마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해서 이때 안 갔으면 어떻게 됩니까? 유대인들에게 잡힐 일도 없고, 잡힐 일이 없으면 나중에 로마까지 가는 계획이 바뀌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막히는 겁니다. 이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좋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말씀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고 만 것입니다. ‘이 띠의 임자가 결박당하고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사실인데 그들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그러니까 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바울 입장에서 사실 자신을 눈물로 말려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질타하며 단호히 선언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다.” 이 선언은 주님의 손길에 자신을 맡긴 바울의 굳은 결심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앞길을 결코 막아서는 안 될 자신의 동역자들과 빌립에 대한 질타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결박과 환난을 뛰어넘어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왜 자꾸 복음을 전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려고만 하느냐?’ 하고 야단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까? 예루살렘에 가면 무슨 돈이 나옵니까? 권력이 나옵니까? 사람들의 칭찬을 받게 됩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건강하게 장수를 누리며 성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꾸 무모하게 자기가 죽겠다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합니까? 그것은 오직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것이 이해가 안 갈 수 있습니다. ‘아니, 그래도 사는 게 낫지, 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자꾸 죽겠다고 하는가?’ 그런데 이것은 이전에 그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0장에서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마지막 유언으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4)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게 사명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신 사명이라는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마게도냐와 드로아를 거쳐 밀레도에 이르기까지, 각 성을 거칠 때마다 성령님이 바울에게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고 계속 알려주셨습니다.
그럼 바울이 그런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서 ‘아, 이것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아주시려는 주님의 뜻이구나. 가지 말라는 거구나. 가면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하시는구나.’라고 해석하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포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성령님의 말씀을, 오히려 모든 사람이 가기를 꺼려하는 그 길,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자신을 부르시는 사명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때 바울이 ‘그렇지. 예루살렘으로 가면 위험하지.’ 하고 안 갔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지금 성경에 어떻게 기록이 되었겠습니까?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를 받겠습니까? ‘자기가 살려고 꽁무니를 뺐다.’라는 식으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죽음마저 각오할 정도로 완수하려고 했던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복음’이 키입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정말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지금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를 불러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사실 구원해주신 것만도 충분한데, 사도로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라고,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 앞에,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이 사랑 앞에 ‘나는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도 좋다. 결박은 당연한 것이고, 죽을 것도 각오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눈물로 자기를 만류하고 있는 동역자들과 빌립과 그의 네 딸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라고 한 바울의 용기의 근원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복음입니다.
교회를 짓밟던 바울에게 사실 사도가 될 자격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무리 고난이 있어도 은혜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사실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나를 구원해주셨을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해주셨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감사함 때문에 그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14절)
여기서 “우리”는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바울의 예루살렘 길을 눈물로 말리던 빌립과 그의 네 딸들과 바울의 동역자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자신들의 눈물의 요청에도 설득을 당하지 않으니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바울을 말리기를 그칩니다.
이슬람에서 무슬림들이 많이 쓰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까 할 때 ‘인샬라’ 즉 ‘알라의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의 뜻대로 된다는 이 말은 그냥 입에 붙은 형식적인 말입니다. 진짜로 신이 해줄 거라는 말이 아니라 될 대로 되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그런 식으로 여기 있는 사람들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인샬라.’라는 의미로 하는 게 절대 아닙니다. 또 그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말을 안 들으니까 기분이 나빠서 ‘에이, 알아서 해, 그럼!’이라는 식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인 축복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맡기며 그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가는 말]
이번에 유럽에 다녀온 분들이 계신데, 원래 프랑스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의해서 결국 프랑스 문화부가 2014년부터 자국 내 모든 미술관과 유적지에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게 결정했습니다. 파리에는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과 오랑주리(Musee de l’Orangerie)라는 작은 미술관이 있습니다. 오랑주리에는 모네의 <수련(Water Lilies)>이 있습니다. 오르세에 가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에서 어릴 때 학창시절 배웠던 미술교과서에 나온 그림들이 거기 다 있는 겁니다. 고흐의 <자화상>, <이삭줍기>, <만종> 등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오르세와 오랑주리는 사진을 못 찍게 했습니다. 당시 오르세 미술관 공식 사이트에는 “미술관 내에서 사진 및 영상을 찍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는 관람객 편의 도모와 미술 작품 보존을 위해서입니다.”라고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렇게 꿋꿋하게 자기들의 철학을 밀고 나가던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이었는데, 마침 제가 안식월을 얻어 파리를 방문했던 2015년에 너무나도 다행하게 금지령이 풀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 찍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금지령이 풀린 데에는 놀랍게도 우리 한국과 연결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출신의 프랑스 입양자 한 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이라는 여자 장관 때문입니다. 한국계 입양아 출신입니다. 플뢰르 펠르랭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나 6개월 만에 프랑스에 입양을 가게 됩니다. 이후 프랑스 정치 엘리트가 거쳐야 할 모든 명문학교를 다 졸업하게 되는데, 프랑스 엘리트들과의 경쟁을 뚫고 초고속 승진을 함으로써 정계에 진출하여, 그 당시 대통령이던 프랑수아 올랑드의 오른팔이 되어 문화부 장관에 임명됩니다. 유럽을 통틀어서 최초의 한국계 장관입니다. 물론 속은 다 프랑스 사람이지만 겉으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펠르랭이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2015년 3월(제가 간 게 6월입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오르세 미술관에서 열린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특별전>에 초청됩니다. 문제가 터진 게 바로 그날 밤인데, 플뢰르 펠르랭의 공식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그날 찍은 작품 사진들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사이트들이 막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장관은 되고 왜 우리는 안 되냐? 장관은 찍어서 올리고 왜 우리는 못 찍게 하느냐?’ 하며 막 비난이 올라왔습니다. ‘일반 방문객은 못 찍고 장관은 찍어 올리니 특혜다.’라고 하니까, 결국은 오르세 미술관과 오랑주리 미술관도 이제 찍어도 좋다고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 찍어왔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제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가 6개월 만에 어느 프랑스 부부의 양녀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에서 프랑스인으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기 노력으로 그 신분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한 부부가 그녀를 입양함으로써 한국인이었던 그 아이에게 새로운 신분이 거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거저 주어진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이 아이가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조금만 자라면 자기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데, 얼굴 모양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자기가 성공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노력을 했기 때문에 신분이 주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분이 주어진 다음에, 거기에 맞는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사실 상상할 수 없는 신분이 주어져서, 그 뒤에 열심히 노력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젊은 나이에 강대국 중 하나인 프랑스의 장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어느 버려진 어린 아기가 프랑스의 장관으로 신분이 바뀐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신분의 수직 상승입니다.
이 세상 어느 나라든 장관의 신분을 얻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지만, 길어야 몇 년 하고 나서 그냥 다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새로운 신분은 몇 년 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 무슨 제한이 있는 게 아닙니다. 무슨 시효가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은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된 우리의 신분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그 신분을 얻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가 입양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입양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의 신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신 그 은혜의 신분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를 안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생활입니다.
바로 이것을 바울이 깊이 깨달았습니다. ‘내 힘으로 바뀔 수 없는 신분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내가 이렇게 바뀌고 이 신분을 얻었다’라고 아주 깊이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바울은, 그래서 ‘나는 복음을 전하다 죽어도 괜찮다. 오직 주 예수를 위하여, 그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다 죽어도 괜찮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바로 이 바울처럼 은혜로 그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우리가 살 책임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한 바울처럼, 우리도 그를 본받아 나아가기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죽으면 오히려 삽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영원한 천국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지금 나의 삶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