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히11:7)
우리 시대는 눈으로 보는 것을 중시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터넷 온라인 커뮤니티와 영상문화, 영화, TV CF, 뮤직비디오 산업, 성형수술 유행 등등,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눈으로 보는 행위에 호소합니다. 그리고 이 눈으로 접수된 정보, 지식, 영상이 사람들의 행동과 판단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믿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입니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확인할 수 있고 검증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이렇게 우리가 보고 듣고 감각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전부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가치와 영적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가치관과 세계관이 지극히 물질적이고 현세적이고 쾌락적이 되어 버립니다. 이로인해서 인간성의 파괴와 황폐화가 진행되며 온갖 탐욕과 불의, 추악과 부패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절대적 존재와 가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악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이 살기 힘든, 삭막하고도 부도덕하고 불의한 세상이 되어 버립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세상의 위기는 바로 이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존중히 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초월하여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병들고, 사업이 부진해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신다는 믿음 때문에 내 마음 중심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갖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우리에게 구원 역사가 이루어지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신자의 삶의 내용은 무엇으로 채워져야 할까요? 믿음이 살아있는 신앙생활은 아주 다이내믹합니다.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반면에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성숙도, 변화도 없이 그대로 화석화된 모습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바리새인적인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잘못된 믿음, 죽은 믿음, 헛된 믿음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살아있는 신앙생활에는 항상 성장과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이 성장과 성숙의 변화에 믿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그 믿음 속에서 관계가 깊어지고, 강해지며, 성장하며 성숙해져 갑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이는 신앙생활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의 믿음에 대하여 7절 한 구절에 압축해 놓았습니다. 히11:7“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비록 한 구절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올바르고 온전한 믿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 말씀이 믿음의 근거되고. 둘째로, 믿음에는 그 반응이 뒤따른다는 사실, 그리고 셋째로 믿음에는 시련이 따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믿음에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노아가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그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다에 경고를 받았습니다. 한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가 더 이상 존속해야 할 최소한의 가치조차 상실해 버릴 때 하나님은 마침내 심판하십니다. 노아의 시대에 온 땅에 가득 찬 그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불러온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든지 망하지 않고 존속되려면 최소한의 정의와 자비를 반드시 유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정의와 자비가 없는 첫 번째 증상이 강포, 폭력입니다. 노아시대의 죄의 성격은 강포였습니다. 자기 마음에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폭력으로 늑탈하고, 착취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런 강포로 땅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철저히 상실했을 때,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어 두고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홍수로 온 지면을 쓸어버리는 참으로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이 심판의 메시지를 노아는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7: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그 분 자신의 신실한 인격과 거룩한 성품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이 미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미쁘다”는 말은 영어로 Trustworthy" 신뢰할만하고, 믿을만하고,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빛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둠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언제나 진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은 반드시 실행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다는 말이고, 그 분의 성품을 믿는다는 다른 표현은 그 분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근거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발생합니다(롬10:17) 우리 자신의 경험과 체험, 그리고 학식과 지식이 먼저 가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말씀 뒤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믿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악한 세대에서 구하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하나님 말씀 듣고 믿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믿음이 발생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였다고 표현합니다.(롬10:9-10)
둘째, 믿음에는 반드시 변화를 동반합니다.
즉 인격적(지정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역사에 멈추지 않고 생활 속에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말씀을 듣고 믿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이로써 우리 삶에 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인격의 변화란 우리의 지적 변화, 정서적 변화, 그리고 의지적 변화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은 7절 한 구절에 불과하지만 이 구절에서 우리는 노아의 삶 가운데 일어난 변화, 특히 그의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을 경외(두려움)하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노아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의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합니다. 자기 생각과 판단, 그리고 처세술을 더 앞세웁니다. 자신을 하나님 보다 더 지혜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때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을 좇아갑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늘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반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하는 소원하는 마음 있습니다. 선한 일에 대한 거룩한 열망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반면에 악한 일이나 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노아는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히11:7“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고 했습니다.오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 할 분으로 믿고 있는 지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곳에는 죄악이 만연하게 됩니다. 결국 말과 행동으로 그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지요. 창세기 4장 에 보면 가인이 동생아벨을 죽인 사건 역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치밀어 오르는 욕정 앞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 범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다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히10: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경외심으로 나타납니다.
2. 믿음의 반응이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창6:14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홍수로 세상을 멸할 것이니 대비하여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노아는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노아의 단순함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온전한 믿음은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셋째. 믿음에는 시련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살려면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믿음의 시련이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노아의 여덟 식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매일같이 방주를 만들었어요.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노아와 가족들을 놀려대며 조롱하였을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짓는 긴세월은 자기 자신과의 엄청난 내적 싸움이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지요. 믿음의 시련을 노아는 묵묵히 다 감당했습니다.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잘 견디어 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넷째. 믿음에는 반드시 그 보상이 따릅니다.
히11:6.“...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보상을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도 꿋꿋이 믿음을 지켰을 때 어떤 상이 있었을까요?
1. 먼저 자신과 가족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120년의 긴 세월이 흘러서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노아 나이 600세 되던해 2월 12일, 방주가 완성되자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노아의 가족 8식구와, 공중의 새와 정결한 짐승 일곱 쌍 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두쌍 씩 방주 안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드디어 노아의 가족과 모든 짐승들이 방주로 들어가자, 창7:16 하나님이 직접 방주의 문을 맏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방주안에 있다는 사실 하나로 다 구원 받은 것입니다. 여기 방주는 하나님이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모형입니다(행16:31).
2.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노아는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믿음으로 방주를 짓는 행위를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것입니다. 맑은 날씨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보았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저 방주가 완성되는 순간 홍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이미 정죄를 받았습니다.
3.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함을 받은 것은 믿음을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노아는 이것을 모범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의의 후사가 되어 오늘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길에 대한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 결론 / 우리 모두 이 믿음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고, 더욱 장성하는 믿음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