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광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꼭 영화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를 가나 이렇게 말한다.
처음 문장을 들을 때는 듣는 이 모두가 귀를 쫑긋하며 솔깃하게 듣는다.
갑자기 눈망울도 키운다.
그런데 뒤의 문장을 듣는 순간 허탈하다는 듯 원망의 소리를 낸다.
"에이~!" 혹은, "우우"하고 말이다.
내가 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때 벗씨와 연애하면서 <사관과 신사>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다.
그 전에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안동 예안이라는 시골 백사장에서 한여름 밤에 천막을 치고 가설극장이라는 형태로 영화가 뭔지는 접하긴 했다.
그리고 현대식 건물에서 영화를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쯤 지금은 돌아가신 큰형님께서 안동시내에서 <돌아돌아돌아>라는 영화를 보여 줄 때였다.
그리고 대구로 중학교 2학년 때 전학 와서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고 나면 문화교실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자주 접하기도 했다.
그 시절 영화관은 지금처럼 멀티플렉스가 아닌 단일극장이었으므로, 1류 극장으로는 대구극장, 만경관, 아카데미극장, 그리고 한일극장들이 유명했다.
그 때까지는 영화를 돈 주고 왜 보는지 진정으로 몰랐다.
사람들이 비비안 리 같은 영화배우를 외우고, 스필버그 같은 제작자와 콜롬비아 영화사를 암기하고 다닐 때는 정말로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대학교 때 벗씨와 연애하면서 보낸 시간 중에서 최대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영화 보는 것이었다.
그 때 인상에 남은 것이 <사관과 신사>였고, 그 주인공 리차드기어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나도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 벗씨가 지금까지도 외모나 정신적으로 반해서는 헤어나지도 못 하고(?) 있는 배우가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기회만 되면 영화를 보려고 노력해 왔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그리고 명절 등의 특별한 날엔 영화를 꼭 봤던 것이다.
그것이 습관화 되어 이젠 아이들이 다 크고 시간이 많이 생기게 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영화를 보는 것이 일과가 되어 버렸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영화를 보게 되었으니까.
농담이 정말로 광으로 바뀌어 가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는 데는 원칙이 있다.
첫째, 우리가 도착한 시간에 가장 가까이 잡혀 있는 것으로 표를 무조건 끊는다.
둘째, 비슷한 시간이라면 남들이 공인하는 대작 위주로 표를 산다.
셋째, 누가 공짜로 보여 주는 것 있으면 내용을 따지지 않고 먼저 본다.
넷째, 매진이라서 한 타임 걸러서 있는 영화는 기다려서까지 절대로 보지 않는다.
이 네 가지 원칙하에 어제도 영화를 보러 갔다.
우선 첫 번째 원칙이 바로 맞아떨어졌다.
그것이 <캐러비안의 해적>이었다.
이 영화는 사실 내 장르하고는 안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용 면에서 본다면 난 스피디하게 진도가 나가고, 스케일이 크고, 돈이 많이 들어가고, 그리고 역전에 역전을 거듭해서 끝을 알 수 없게 할 정도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영화를 좋아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헐리우드식 영화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축에 들어가지 못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것 같은 영화이니 말이다.
그래도 세 시간 동안이나 꾹 참고 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무슨 얘긴지 몰라도 내용이 장대하게 진행되었다.
장면이 넘어가고 또 넘어가고, 주인공들의 말들이 오가고, 이것이 번역이 되어 자막으로 넘어가고 또 넘어가고 있었다.
한 10분쯤 지나자 벗씨가 벌써 졸기 시작했다.
흔들어 깨웠다.
눈을 뜨게 해 놓으면 어느새 또 감고, 또 뜨게 해 놓으면 또 감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시끄럽고 스펙터클하게 넘어가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내 눈도 어느새 벗씨를 닮아가고 있었다.
반대로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어떤 초등학생 남매는 깔깔깔 거리고 있었다.
내 뒤에 앉아서 보고 있는 중고등학생들도 '와와' 하면서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럴 적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잠을 깨어 일어나 봤지만 뜻 모를 장면만이 계속 연출되고 있었다.
파도가 넘실대고, 배가 일렁대고, 괴물이 나와서 서로 싸우고, 그리고 대포를 마구 쏘아댔다.
처음부터 무슨 내용인지 몰랐지만 끝까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것 같고, 산 사람이 죽은 것 같기도 해서 뭐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 갈까?"
앞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하도 시끄럽게 놀라길래 자다가 일어난 벗씨가 이렇게 제의했다.
나도 자다가 일어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아니, 끝이 어떻게 되는지 봐야지."
끝을 봐서 무얼 어떻게 하려는 것도 없으면서 고집을 부렸다.
이렇게 그저 끝까지 앉아서는 반은 졸면서 반은 보면서 시간을 다 보냈던 것이다.
"비싼 돈 주고 이처럼 잠자리 불편하게 자기는 처음이다."
이건 벗씨가 한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봐야 이 영화가 안 궁금하지. 나중에 후회를 안 한다고."
이건 내가 한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취미도 참 이상하다.
아무리 취미 생활 중에서 돈이 제일 안 들어간다는 영화구경이었지만, 꼭 이렇게라도 영화를 봐야 할까?
집에 와서는 다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바로 물어봤다.
"자랑스러운 다래야, 니도 오전에 친구하고 캐러비안 영화 봤지? 내용이 뭐야?"
"몰라요."
대답이 쉽게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 다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최단시일 내에 신기록을 세우고 있단다.
하기야 북구 칠성동 메가박스 열 개 관 중에서 일곱 개 관을 이 영화로 도배하고 있으니 할 말은 없다만 그래도 도저히 난 이해를 못 하겠다.
나도 이제 젊지는 않는가 보다.
2007년 5월 28일
멋진욱 김지욱 서.
첫댓글 하하하 다래가 '몰라요' 하는 것은 1,2편 내용도 기억 못하는 아부지와 이야기할 공통꺼리가 없기때문에 설명하려면 힘들어서 그랬는데..어쨋튼 주윤발이 얼굴은 본 기억도 없으니 허~ 참~! 에어콘은 빵빵하게 틀어놔서 자는데 추워 죽는 줄 알았구만. 목도 아파 죽겠고.. 에고고
난 주윤발이 봤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히히.
저도 예전엔 영화 엄청 봤는데.... 지금도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거 혼자서 영화보기입니다. (한가할 때 면 살며시...ㅎㅎ)
이 영화는 수민이와 도영이 하고 같이 봐야 합니다. 어른은 자고. 히히.
요즘 영화관 갈때 꼭 숄 하나 준비해야되요.잠들어버리면 돈 주고 감기 사가져 옵니다(이해 되는분만준비하3)
우리도 닮아 가면 안 되는뎅...... 히히.
정말이어요. 환절기에 영화관가서 감기 걸려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답니다.힝.
대장님! 여러가지로 즐기면서 잘 사십니당. 부지런하니까 삶이 참 풍요로운 것 같습니당.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