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하순에서 구월 초순이 되면 야생이 숨 쉬는 풀숲이나 척박한 길바닥까지도 겉모습과는 달리 생명의 기운이 분주하다. 마라톤의 후미그룹같이 뒤처진 생명들이 마무리 노래가 한창이기 때문이다. 식물은 눈만 떠도 씨앗을 달고 벌레는 결미의 가락을 엮는다.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이 놀랍다고는 하지만 배려하는 마음이 적은 사람의 눈길과 발길이 훑고간 흔적은 안쓰럽다. 밟히고 찢기는 일이 다반사여서 성한 곳이 없다. 제때 꽃 피우고 열매를 달지 못하다가 오가는 사람이 뜸해지고 날씨가 선선해지면 바빠지는 것이다.
시골에 사는지라 쉬는 날이면 그들을 쉽게 만난다. 구월 초만 되어도 서늘바람이 일어 지쳤던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건성으로 보던 야생초들의 사는 모습이 세세한 곳까지 보이고 그들의 이야기가 속귀에 들어온다. 누구 한 사람 그들의 가락에 귀 기울여 주지 않아도 계절의 행간을 알뜰하게 메운다. 마치 자신들이 생태계를 받치고 있는 굄돌인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지난 일요일 해 질 녘에 정원에서 잡초를 뽑다 늦자라 손가락 한 마디쯤 되어 보이는 큰금매화를 만났다. 도리암직한 모습에서 꽃의 한생을 보았다. 본래 이 야생화는 키가 60~80센티미터쯤 자라고 우리나라 북쪽지방의 고산지대에 많이 서식한다.
내가 사는 곳도 산악지대에 가까워서인지 큰금매화는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러니 제가 살기에는 거칠고 메마르지만 자연스럽게 정원 귀퉁이까지 내려와 터를 잡은 듯하다.
나는 성품이 곧고 행실이 깨끗한 사람을 만난 듯 반가우면서도 내 모습이 발뒤꿈치를 들고 사는 사람 같아 기가 꺾였다. 호미를 든 손을 슬그머니 뒷짐 지며 한 발 물러서서 맑고 당당한 모습에 경의를 표했다.
흔히 볼 수 있는 야생초의 늦은 마무리로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건강한 사회를 괴고 있는 소박한 이웃 같아서였다.
얼마 전 일터에서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신문을 읽고 있던 나에게 사람은 보이지 않고 덧버선을 사라는 소리만 들렸다. 두리번거리는 내 앞에 여자 아이 머리가 나타났다.
유심히 보니 아이가 아니라 휴대폰으로 딸과 통화를 하고 있는 사십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따뜻하고 다감함은 물론 더할 나위 없이 당찬 모습은 일전에 정원에서 만난 큰금매화를 보는 듯했다.
그녀는 키가 자라지 않는 특별한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행상을 하고 있었다. 다섯 켤레에 만 원이라며 사라고 했지만 필요한 물건이 아니어서 망설이다가 결국 샀다. 딸과 통화할 때 보인 당당함도 한몫을 했지만 무엇보다 좁아터진 내 국량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다지 검소한 사람도 못 되면서 때와 장소를 잊고 마음과는 달리 인색한 태도를 취할 때는 나 스스로도 민망하다. 동정이 아닌 거래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그냥 웃기만 했다. 그녀도 웃었다.
웃음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아름다운 기호이다. 그녀가 귀한 존재로 다가온 것은 평생 밥그릇을 화두로 살아가는 변변하지 못한 나에 대한 자괴지심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요즘 젊은이들 중에 좋은 조건을 많이 갖추고도 혼자 편하게 살려고 하는 이기심에 대한 서운함도 작용했던 것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돌담을 쌓는 일과 닮은 점이 많다. 튼튼하게 쌓기 위해서는 반듯하고 큼직한 돌도 필요하지만 모양과 크기가 제멋대로인 막돌도 필요하다.
막돌은 볼품은 없지만 빈틈을 메우거나 큰 돌을 받쳐주어 흔들림을 막아 준다. 담다운 담을 이루어내는 것은 큰돌과 막돌의 격의 없는 어우러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생태계를 받쳐주는 생명체들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늦은 마무리를 하는 야생초와 늦더위에 덧버선을 팔던 어느 키 작은 여인의 삶의 노래가 굄돌이 된 막돌의 이야기일 것이다. 세상을 괴어 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과 귀를 모아 들어봐야 하리라.
나는 막돌이면서 언제나 반반하고 빛나는 자리를 탐했다. 굄돌이어야 하는 순간 기꺼이 그 역할에 최선을 다했는지 자문해 보면 자신이 없다.
해 질녘에 정원 귀퉁이에서 짧은 다리로 바쁜 길을 가던 큰금매화는 내가 만난 가장 아름다운 굄돌이다
(윤경화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