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부터 나온 이야기
'슬'로부터 나온 말들
‘혼백’魂魄이란 한자어를
우리말로 옮기라고 하면 흔히 ‘넋’이라고 합니다. 옳게 옮긴 것일까요? 그것이 옳게 옮긴 것이라면, 왜 한자에는 굳이 ‘혼’魂이라는
말과 ‘백’魄이라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넋이라는 우리말은 혼백이라는 한자어 가운데 ‘백’을 옮긴 것입니다. 따라서 혼이라는 한자어와 통하는 우리말은 ‘넋’이 아닌 다른 어떤 말이어야 합니다. 아니면 거기에 어울리는 우리말이 아예 없든가 말입니다.
허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혼’에 어울리는 우리말로 ‘슬’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아직 그럭저럭 살아있습니다. ‘슬’을 뿌리로 삼아 생겨난 말들이 더러 남아있는 탓입니다. ‘슬기롭다’, ‘슬프다’ (옛-슬푸다), ‘쓸개’ (옛-슬애), ‘싫다 (옛-슬히다), ‘스러지다’ (옛-슬어지다) 따위가 그런 것들입니다.
이번에는 바로 이런 말들을 나란히 짚어보려고 하는데, 먼저
이 말들의 ‘최대공약수’인 ‘슬’을 살펴보겠습니다.
‘넋’의 주인은 ‘슬’
슬은 넋의 주인입니다.
“삶이 ‘빛’과 ‘닷’의 하나됨으로 말미암은 것”(전
글 참조)이라면, 또 ‘빛’이 ‘하늘의 참모양이고 ‘닷’이 ‘땅’의 알맹이라면, ‘슬’은 빛에 견줄 수 있고 ‘넋’은 ‘닷’에 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슬’은 수많은 갈래의 ‘닷’을 하나로 뭉쳐냈을 뿐 아니라 오르고 내리며 움츠리고 퍼질 따름인 ‘닷’의 ‘다섯 갈래 원시적인 움직임’을
하나의 총체적 운동체로 만들어내는 ‘창조적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닷’은 ‘슬’을 담고있는 그릇이며, ‘슬’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의 운동성을 드러내는 삶의 질료라고 하겠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혼(슬)은
하늘로 뜨고 백(넋)은 땅으로 가라앉는다”는 옛말도 이런 까닭에서 나온 말입니다.
실제 ‘슬’이 빠져나가면 넋은 흩어져서 그 운동체는 죽음에 이릅니다. 허나 넋이 다 흩어질 때까지는 슬이 다스릴 때의 습성을 웬만큼 따르게 됩니다.
다만 넋의 본능적 운동이 차츰 거세지면서 전체적 어울림이 어그러지고 닷들의 갈라섬이 빨라질 따름입니다. 그리고 넋은 마침내 슬과 마찬가지로 원시 그대로의 ‘우주적 미세
질료’(이른바 요소존재)로 돌아갑니다.
‘슬’도 마찬가지입니다. 넋(닷)을 떠나온 뒤에도 ‘슬’은 ‘닷’들의 운동성으로부터
받는 영향을 거의 그대로 간직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영향은 ‘슬’이 다시 ‘닷’들을 뭉쳐
새로운 삶을 이루었을 때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른바 ‘생사유전生死流轉의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바로 그것입니다.
가슴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
옛 분들은 사람의 몸이 크게 세 덩어리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는 힘을 만들어내는 ‘배 덩어리’이고, 다른 하나는 그 힘을 사람에게 맞도록 바꾸어서 머리로 옮겨주는
‘가슴 덩어리’이며, 마지막
하나는 그 힘을 다스리고 꾸려내는 ‘머리 덩어리’ 입니다. 그래서 배는 인간적이기보다 우주적이고, 가슴은 인간적인 본능 및
감정과 많이 엮여 있으며, 머리는 욕망과 많이 엮여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의 감정을 다스리는 기관은 가슴 덩어리인데, 때로 감정이 거세게 일어나서 그것을 다스려내지 못하면 머리로 옮겨지는 기운이 끊겨 졸도를 하기도 합니다. 때로 술을 많이 마시거나 약물을 많이 먹어도 졸도를 하거나 비뚤어진 감정을 드러냅니다. 아무튼 ‘가슴앓이’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옛 분들은 이처럼 가슴이 감정과 엮여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가운데 ‘슬’과 관련된 곳이 바로 쓸개입니다. 옛말로 쓸개는 ‘쓸애’인데, 이때 ‘애’(또는 에)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즉 쓸개는 ‘생명을 가진 슬’ 또는 ‘육체에 스며든 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쓸개 빠진 사람’이 ‘혼 없는 인간’과 같은 말로 쓰인 것은 그런 까닭이었습니다. 쓸개는 오늘날의 상식과는 달리 간肝까지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황제내경영추≫ 黃帝內經靈樞에서 “간은 혼을 담고있다”(肝藏魂)고 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습니다.
슬이 지어내는
것들
그런데 쓸개는 핏집과 짝을 이룹니다. 그리고 ‘다쉬’(心包, 심포)는 그것을 아울러서 둘의 짜임새가 무너지지 않도록 맞춥니다. 달리 말하자면 핏집은 사람의 말기(末氣, 육체적인 기운) 가운데 분기(憤氣, 풀림의 기운)를 맡고 있으며, 쓸개는
겁기(怯氣, 움츠림의 기운)를
맡고 있고, ‘다쉬’는 생기(生氣, 어울림의 기운)를
맡고 있는 것입니다.
감정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핏집은 풀어지고 늘어나는
따위의 감정을 맡고, 쓸개는 움츠리고 줄어드는 따위의 감정을 맡으며,
‘다쉬’는 그것을 잘 아울러 짜임새 갖추는 이을 맡습니다.
예를 들어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따위의 감정은 핏집이 맡으며, 싫어하거나 슬퍼하는 따위의
감정은 쓸개가 맡습니다.
허나 굳이 따져서 말하자면 그 가운데 감정이라 할만한 것은 모두 쓸개가 맡습니다. 다시 말해서 좋아하는 것이나 즐거워하는 따위는 엄밀한 뜻에서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좀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이기에, 아무튼 여기서는
쓸개와 관련된 감정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먼저 ‘싫다’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싫다’의 옛말은 ‘슬히다’(17세기)인데, 옛 만주어와 견주어보면 ‘슬히다’는
‘슬외다’와 통합니다. 또
‘외다’는 ‘여이다’와 같은 말로서 ‘떠나다’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곧 ‘슬히다’는 ‘슬이 떠나다’는 뜻으로서, ‘어떤 것을 슬이 받아들이지 않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싫다’는 말에서 꽉 막힌 담벼락을 떠올리게 되는 까닭도 그래서일까요?
다음으로 ‘슬프다’의
옛말은 ‘슬푸다’인데, ‘푸다’는 ‘아프다’와 뜻이 맞닿는
바, ‘슬프다’는 ‘슬이
아픔을 느끼다’는 뜻으로서, 어떤 일로 말미암아 슬이 힘들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아픔이 이어지면 탈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깊어지거나 길게 이어지면 탈이 나리니, ≪논어≫論語에 나오는 “슬프지만 다치지는 않는다”(哀而不傷)는
말도 한번 그런 이치로 헤아려봄 직 합니다.
슬기로움과
스러짐
슬픔이 깊어지면 탈이 나고 탈이 오래되면 마침내 ‘슬은 지게’될 것입니다. 슬이
지면 그 삶도 한 매듭을 지으리니, 이것이 바로 ‘스러짐’입니다. 그 옛말인 ‘슬지다’를 소리바꿈으로 살펴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스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슬의 짜임새가 잘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일러 ‘슬기’라고 합니다. ‘기’라는
우리말은 여러 갈래로 쓰이고 있지만, 그 가운데 ‘매듭’이나 ‘돌림’이나 ‘짜임새’로 쓰이는 때가 자주 있는데,
여기서도 슬기는 곧 ‘슬의 돌림’이나 ‘슬의 짜임새’를 가리킵니다. 즉
‘슬기로움’은 그 짜임새를 잘 돌리는 것으로서, 감정을 잘 다스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사람의
몸 가운데 쓸개는 ‘겁기’(움츠림의 풀)와 이어지고 핏집은 ‘분기’(풀림의풀)와 이어진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겁 없는 사람과는 일하지 말라, 그는 슬기롭지 못하다”고 한 우리 옛 분들의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가
슬기와 이어지는 말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알맞게 움츠리는 일! 오늘
우리들의 ‘슬’은 잘 놀고 있습니까?
- 모울도뷔 제 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