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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희 엮음, <인생예보>, 연인 M&B, 2021년 4월 10일.
솟대 시인들의 사랑 노래
맹문재(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1.
구상솟대문학상 수상 작품들에 나타난 사랑은 자신의 신체장애로 인한 고통과 사회로부터의 편견을 극복하려는 표상이다. 장애의 조건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은 물론 다른 존재들을 포옹하는 성숙한 인간 정신인 것이다. 사랑은 인간 존재로서 갖는 근원적인 감정이면서 이성적인 존재로서 추구하는 의지인데, 솟대 시인들이 추구하는 사랑은 더욱 그러하다.
이와 같은 면은 일반 서점, 인터넷 검색, 『솟대문학』에서 추천한 시, 수필, 소설, 수기, 자서전, 번역 등을 담은 190권의 지체 장애 관련 도서를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 제목에서 사랑에 관한 것이 23권이나 된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희망에 관한 제목이 14권, 휠체어에 관한 제목이 10권, 발에 관한 제목이 8권, 손에 관한 제목이 4권인 것에 비해 사랑에 관한 제목이 월등하게 많은 것이다. 비장애인들이 간행한 도서에도 사랑에 관한 제목이 많지만, 장애인들의 작품집에서 훨씬 두드러지는 것이다.
솟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사랑은 “그리움 사이를 배회하는/시심의 조각들”(이남로, 「섬」)을 빛나게 꿰기 위해 컴퓨터의 자판기를 “꾹꾹,/콱콱,/가, 나, 다”(우창수, 「키보드 두들기기」)를 두들기는 글쓰기에 대해서부터, “나무에서 가을이” 져도 “산은 말이 없”(주치명, 「낙엽」)는 모습을 발견하거나 “언제나 너의 손을 놓”(백국호, 「해넘이」)는 것을 아쉬워하는 자연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데, 이 글에서는 자기애와 대상애로 분류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자기애는 자신을 사랑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솟대 시인들의 시에서 특히 주목된다. 장애를 겪는 자신을 포옹하는 것이 힘든데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솟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자기애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배타하는 이기적인 사랑과는 다르다. 오히려 자기 이외의 대상들도 기꺼이 포옹하는 대상애로 확장된다. 대상애는 성애(性愛), 가족애, 사회애, 인류애, 자연애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2.
나는 달개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갓진 구석에서
얼크러져 산다
지나쳐 버리는 곳
버림받은 들판에서
모양새 없이 자유로이
거드름이나 꾸밈없이
잡초라 잡초와 어우러져
한목숨 열심히 산다
고운 눈길 반가운 손길
이제는 기다리지 않는다
버려진 이곳에서
더 이상 무엇을 기다리랴
거친 땅 뒤덮고
오직 초록으로 자란다
공평한 햇살만 쏟아진다면야
나는 신이나 꽃을 피운다
겨우 세 장 꽃잎이지만
일 원짜리 동전보다 작은 꽃을
정성으로 피워낸다
땅에서 받은 사랑은
초록으로 땅에 갚고
하늘에서 받은 사랑은
쪽빛 꽃잎으로 하늘에 바친다
다만 내게도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버려진
잡초 같은 존재에게
작디작은 꽃술처럼
진노랑 희망으로
작은 미소를 보내고 싶다.
― 김종태, 「달개비」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자신을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한갓진 구석에서/얼크러져” 사는 “달개비”로 그리고 있다. 누구나 “지나쳐 버리는 곳/버림받은 들판에서/모양새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달개비”는 “자유로이/거드름이나 꾸밈없이”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잡초와 어우러져 한목숨 열심히” 영위하고 있다. “잡초”에 불과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다른 “잡초”와 어울려 살아가는 것이다. “거친 땅 뒤덮고/오직 초록으로 자”라나 신나게 “꽃을 피”우는 것이 그 모습이다. “겨우 세 장 꽃잎이지만/일 원짜리 동전보다 작은 꽃을/정성으로 피워”내는 모습도 그러하다.
“달개비”가 “땅에서 받은 사랑은/초록으로 땅에 갚고/하늘에서 받은 사랑은/쪽빛 꽃잎으로 하늘에 바”치려고 하는 마음은 그지없이 성숙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거나 상대적 박탈감을 가지는 것을 극복하고 “진노랑 희망으로/작은 미소를 보내”는 것으로, 자기애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은 “조그만 바람에도/서럽다, 서럽다고/속울음을”(김옥순, 「늙은 풍차」) 우는 것을 숨기지 않고, “하늘 신 땅이 울고 백합 장미도 눈물 흘리는데/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울지 못하겠는가”(심철수, 「살아 있는 것은 다 운다」)라고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는 역설적인 태도에서도 볼 수 있다. 결국 “바람과 갈매기들을 친구 하면/세상의 그 무엇도 부러울 게/없을 것 같”(김준엽, 「파도를 베개 삼아」)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돌들도/있어야 할 곳을 찾아 제 몸 뒤척이듯”(김판길, 「흔들림에 대하여」)이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눈보라 매섭던 섣달그믐께
누구인가 갖다 버린
주인도 모를 난초 한 포기를 안아다가
남동향으로 나 있는 창가에 두었다
꺾인 가지는 동상마저 걸려 진물이 흐르고
바람결에 야윈 살이 트는 천덕꾸러기를
겨울 볕을 좋아하는 소망으로
들녘에 아지랑이 피기를 기다리는 봄누리로
보듬고 감싸주었더니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열리는
세월을 잇는 해거름 녘에
아아, 이 어찌된 해탈인가
눈물 나도록 청아한 화관을 두르고
내 앞에 일어서더니
날카로운 듯 부드럽게 휘어지고
정갈한 듯 수더분한 그 자태
어느 게 이토록 고결한 환생을 이루었는가
어느 게 이처럼 위풍당당한 풍모를 가졌는가
한 생의 기쁨은
숱한 인연의 고해를 건넌 후에야
한결같은 마음으로 보듬어진 보람으로
마침내 새살이 돋아 피어났구나.
― 최명숙, 「난을 위한 노래」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눈보라 매섭던 섣달그믐께/누구인가 갖다 버린/주인도 모를 난초 한 포기를 안아다가/남동향으로 나 있는 창가에” 놓았다. 그리고 “겨울 볕을 좋아하는 소망으로/들녘에 아지랑이 피기를 기다리는 봄누리로/보듬고 감싸주었”다. 그 결과 “해가 저물고 또 한 해가 열리는” 때에 이르러 “난”은 “청아한 화관을 두르고” 화자의 “앞에 일어”섰다. 화자는 “날카로운 듯 부드럽게 휘어지고/정갈한 듯 수더분한 그 자태”에 놀랐다. 그리하여 “위풍당당한 풍모”를 바라보며 “고결한 환생”은 아닐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한 생의 기쁨은/숱한 인연의 고해를 건넌 후에야” “새살이 돋아 피어”난다는 진리를 확인한 것이다.
작품의 화자가 “난”을 통해 자기애를 심화하고 있는 것은 “속이 익은 모과 한 개로 익고자/그 긴 가뭄에도/내 눈물 길어내어/물을 주”(남인우, 「모과 하나 키우며」)는 모습이기도 하다. “온몸을 비틀어 남긴/무수한 상처 위에” “마침내/찬연한 꽃사태로 눈부”(최종진, 「등꽃」)신 날이 올 것이라는, “한 녀석 활짝/기쁨의 눈물을 터뜨리자/여기저기 터지는 눈부신 울음”(문영열, 「동백의 분만」)이 터질 것이라는 희망이기도 하다. 장애인으로서 겪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마음도/새로 사”(심금, 「마음을 파는 가게」)려는 각오를 실현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온몸으로 천천히 흔들리다”가 보면 “모질도록 동여맨 겨울나기 끝”(장진순, 「겨울나기」)나고,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빛을 뿌”(김명희, 「아침」)릴 날을 품고 대상애를 추구하는 것이다.
3.
그대가 매어 놓은 그리움 때문에
콩나물을 다듬다가
CD를 올려놓다가
털썩 주저앉는
애처로움으로 나는
해장국도 먹지 못하고
연주곡도 듣지 못하네
창문 밖에는
멀리 도망가자고
아무도 없는 데서 살자고
내 손을 잡아당기던,
그대 모습으로 뒤덮이고
또다시
콩나물을 다듬다가
CD를 올려놓다가
털썩 주저앉는 나는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건조한 날씨 때문에
외출하지 않은 거라고 울먹이고
털썩
털썩
주저앉는 날들을 휘둘러
내 마음으로 엮은
그리움의 고리를
풀어 떨칠 수만 있다면
어느
건조한 하루쯤은
술 없이
음악 없이
견딜 수도 있겠네
그러나
창틀에서 흥얼거리는 손가락도
덤덤하게 길게 뻗은 발뒤축도
모두
그대가 매어 놓은 그리움들
그리움들이네.
― 김시경, 「그대가 매어 놓은 그리움」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그대가 매어 놓은 그리움 때문에/콩나물을 다듬다가/CD를 올려놓다가/털썩 주저앉는”다. “해장국도 먹지 못하고/연주곡도 듣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처로움에 휩싸인다. 화자가 내다보는 “창문”은 “멀리 도망가자고/아무도 없는 데서 살자고/내 손을 잡아당기던,/그대 모습으로 뒤덮”여 있다.
화자는 “또다시/콩나물을 다듬다가/CD를 올려놓다가/털썩 주저앉는”다. 자신의 행동이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건조한 날씨 때문에/외출하지 않은 거라고” 애써 변명해보지만, 사랑하는 이를 향한 그리움을 버릴 수 없다. “마음으로 엮은/그리움의 고리를/풀어 떨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술 없이/음악 없이/견딜 수” 없다. “창틀에서 흥얼거리는 손가락도/덤덤하게 길게 뻗은 발뒤축도/모두/그대가 매어 놓은 그리움”에 묶여 있는 것이다.
화자가 위와 같이 그리워하는 모습이 낭만적 사랑(romantic love)이다. 낭만적 사랑은 예감되고 변화될 수 있는 미래로 지향하는 삶의 궤적을 제공한다. ‘공유된 역사’를 창조함으로써 개인을 더 넓은 사회적 상황에서 떼어내고 사랑의 특수한 우월성을 부여한다. 낭만적 사랑은 기원에서부터 욕정이나 노골적인 섹슈얼리티와 양립이 불가능하다. 단지 사랑의 대상을 이상화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정신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낭만적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상대는 단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자신의 결여를 메워준다. 불완전한 개인을 완전한 전체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은 비극으로 끝날 수 있고 위반을 통해 성장할 수도 있지만 승리를 이루어낸다. 세상을 살아가는 처방과 타협을 이루어 사랑하는 상대방을 이상화하는 의미를 표출하는 것이다. “배추 아가씨와 무 총각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설렘으로 물든 그 음성에 별이 핑그르르 돌아앉”(한상식, 「어떤 중매」)는 것도 그 모습이다.
누군가를 시리도록 사랑한다는 것이
이토록 설운 것이라면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그대를
그냥 이대로 가슴에 묻으렵니다
오늘도 님이 놀던 그곳을 보며
사무친 그리움에 몸서리치다
이내 몸 한 사랑이 여의만 할까
애써 애써 아닐 거라 고개만 젓다
애꿎게 옷매만 적셔냅니다
기다립니다
말없이 그냥 기다립니다
언젠가 이곳을 쳐다봐 줄 당신이기에
눈길 쉽게 닿을 이곳에서
오늘도 당신을 기다립니다
해반천 줄기 물이 그어 놓은 그 금도
흥부암 종루(鐘楼)에 걸려 제 곡조를 이기지 못하듯
기다린다는, 언제까지 기다린다는
내 사랑의 여운은
언제나 봉황대(鳳凰台)를 싸고 돕니다.
― 허성욱, 「유민공주의 사랑」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유민공주”의 사랑 이야기를 인유하며 자신의 낭만적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누군가를 시리도록 사랑한다는 것이/이토록 설운 것이라면/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그대를/그냥 이대로 가슴에 묻으”려는 마음을 “유민공주”의 심정을 빌려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오늘도 님이 놀던 그곳을 보며/사무친 그리움에 몸서리”친다. 그리하여 “기다립니다/말없이 그냥 기다립니다”라고, “언젠가 이곳을 쳐다봐 줄 당신이기에/눈길 쉽게 닿을 이곳에서/오늘도 당신을 기다립니다”라고 노래한다. 자신이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상대가 자신을 인정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경상남도 김해시의 사적지인 “봉황대”에는 “유민공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락국 제9대 겸지왕 때 출정승의 딸 여의와 황정승의 아들 황세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이었다. 그런데 신라군이 가락국을 침공하는 일이 일어나자 황세는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겸지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칭호를 내렸고 자신의 딸인 유민공주와 결혼하라고 명령했다. 황세는 약혼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나, 왕이 뜻을 거두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이에 여의는 슬퍼하다가 24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황세도 여의를 잊지 못해 마음의 병을 얻어 세상을 떴다. 사람들은 황세와 여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놀던 바위에 작은 바위를 얹어주었다. 홀로 남게 된 유민공주도 황세와 여의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경운도사와 함께 임호산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세상을 떴다.
“유민공주”의 안타까운 사랑은 견우와 직녀의 슬픈 사랑을 인유해 “이리도 짧은 만남 위해/그리도 긴 기다림/차라리 영겁을 못 만날 절망의 운명보다/더 절망스런 안타까움”(정중규, 「견우와 직녀」)을 나타낸 데서 만날 수 있다. “내가 어둠이라면/당신은 별”이기에 “우리는 따로 떨어져서는/아름다울 수 없”(김대원, 「내가 어둠이라면 당신은 별입니다」)다고 노래한 데서도 볼 수 있다.
4.
솟대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또 다른 대상애는 가족애이다. 한국 사람들은 가족이란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이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같은 피로 맺어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응답한 경우가 다른 나라보다 높고(한국 48.8%, 미국 9.4%), 성인이 된 자녀가 진 부채에 대하여 부모가 모두 갚아주어야 한다는 응답도 높으며(한국 50.8%, 미국 23.7%), 부부가 이혼을 하고 싶어도 자녀의 장래를 생각해서 그냥 같이 사는 것이 좋다는 의견도 높다(한국 91.6%, 미국 30.4%). 그만큼 한국인들은 가족을 혈연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여긴다. 부모는 자식에게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함을 미안해하고, 자식은 부모님께 제대로 보답해드리지 못함을 죄송스러워한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의 동향을 보면 전통적인 가족관계는 급속하게 무너지고 있다. 1인 가구 및 한 부모 가구의 증가, 미혼 및 이혼의 증가, 주말 부부 증가 등으로 가족관계는 와해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 시장의 불안도 원만한 가족관계를 어렵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솟대 시인들의 시가 가족애를 추구한 것은 의미가 크다. 장애를 겪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가족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받은 사랑을 가족에게 되돌려주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고
손톱 발톱이 자란다
여자라고
달거리가 달마다 온다
종일 엎드려만 있어도
때 되면 배가 고프다
일주일분 창자가 찼다고
어머니 손가락은 똥구멍을 후벼판다
살에 박힌 삽날을 뽑아
훨훨 34도에 묻는다.
― 김옥진, 「무덤새」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종일 엎드려만 있어”야 하는 지체장애자이기 때문에 “살아 있다고/손톱발톱이 자란다”라거나 “여자라고/달거리가 달마다 온다”라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종일 엎드려만 있어도/때 되면 배가 고프다”라고 자신의 생리적 현상을 비하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화자를 살려주는 이는 “일주일분 창자가 찼다고” “손가락”으로 “똥구멍을 후벼”파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당신의 딸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살에 박힌 삽날을 뽑아/훨훨 34도에 묻는다”. “무덤새”가 새끼들이 제대로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헌신적으로 둥지를 돌보듯 “어머니”는 온몸을 다해 자식을 돌보는 것이다. “무덤새”는 다른 새들보다 튼튼한 다리를 이용해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알을 낳은 뒤 품는 방식으로 새끼를 부화한다. 암수가 함께 땅을 판 뒤 지열을 이용해 알을 부화시키는 것이다. 암컷은 수시로 부리를 이용해 온도를 확인하는데, 적당한 “34도”가 되면 알을 낳고 흙으로 덮는다. 태양빛이 너무 강하면 흙으로 덮고, 지온이 낮으면 흙을 파내 태양열이 잘 전달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침략자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항시 긴장하며 둥지를 지킨다. 극진한 보호를 받고 태어난 “무덤새”는 다른 새들과 달리 깃털을 보유해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 있다.
구상솟대문학상 수상작 중에는 어머니를 노래한 작품들이 많다. “온몸이 마비된 아들 때문에/골이 깊게 주름진 어머니 모습”(이상규, 「목욕탕에서」)을 바라보며 죄송스러워하고, “가끔 검게 타들어 간 어머니의 가슴이 세상을 향해/얼굴을 내”(강동수, 「감자의 이력」)미는 모습을 안타까워한다. 또한 “곰쥐는 저처럼 질긴 상처는 먹지 않는대요/그러니 아무 걱정 마세요/어머니”(김민, 「심부름하는 아이」)라고 당신을 안심시키고, “어머니! 나는 오늘에야 내게도 빛이 비추고 있음을 알았습니다”(이종형, 「어머니! 시방 하늘빛이 어떻습니까?」)라고 당신을 거울로 삼는다. 그리하여 “어무이요,/웅굴재 봄보리도 푸르고/홍골 샛골에는/땔감나무도 많은데/갈밭골 등천에는 우예 누웠능교//재 너머 서낭디/물 좋은 방뜰 논 사서/이밥 실컷 해 줄 거라며/몸빼 고기비린내 끊일 날 없이/그리도 알뜰하시더니만/우예면 좋능교/어무이요.”(김석수, 「사모곡」 전문)라는 사모곡은 심금을 울린다.
모든 물질들은 때가 되면 떨어지고
떨어지는 그 힘으로 우리는 일어난다
그때도 그랬다, 천수답 소작농으로
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쌀독 탓에
수백 미터 갱 속, 아버지의 곡괭이질과
시래기 곶감 담은 대야 이고 눈길을 헤치던 어머니의 힘으로
우리 남매는 교복을 입고 푸르른 칠판을 바라보며
김이 오르는 밥상 앞에 앉아 왔다
어느덧, 딸내미 책가방도 무거워 가는데
떨어지고 떨어지는 허기진 살림 탓에
아내는 새벽부터 출근을 서두르고, 나는
채 익숙지 않은 흰 지팡이를 펴고
늘, 시큰둥한 면접관을 만나러 간다
떨어지는 힘으로 제자리를 잡는 일이
어디 우리네 살아가는 일뿐일까
이를 악물고 비바람을 견뎌 온
꽃봉오리가 펼친 꽃잎이 떨어지는 힘으로
덜 여문 열매가 익어가고, 땅은 또 씨앗을 품듯
떨어진 이파리가 겨울나무의 발목을 덮어주며
기꺼이 썩어주는 열기로 봄은 돌아오는 것
보라, 떨어지는 별들의 힘으로
못내 구천을 떠돌던 가난한 영혼들이
하늘에 내어 준 빈자리에 자리를 잡듯
그 순간, 별똥에 소원을 비는 것도
다들 낙하의 힘을 믿고 있는 탓이다.
― 손병걸, 「낙하의 힘」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떨어지는 그 힘으로 우리는 일어난다”며 자신의 의지를 가족애에서 찾고 있다. 예를 들어 “천수답 소작농으로/시도 때도 없이 떨어지는 쌀독”이 있었기에 “수백 미터 갱 속, 아버지의 곡괭이질과/시래기 곶감 담은 대야 이고 눈길을 헤치던 어머니의 힘”이 생길 수 있었고, 부모님의 그 힘 덕분에 “우리 남매는 교복을 입고 푸르른 칠판을 바라보며/김이 오르는 밥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가슴속에 넣고 자식에게 전하고 있다. “어느덧, 딸내미 책가방도 무거워 가는데/떨어지고 떨어지는 허기진 살림 탓에/아내는 새벽부터 출근을 서두르고, 나는/채 익숙지 않은 흰 지팡이를 펴고/늘, 시큰둥한 면접관을 만나러” 간다. 화자는 “흰 지팡이를” 짚었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장애인이다. 그런데도 화자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솟대 시인들 시의 가족애는 “링게르병 움켜쥐고 사색이 된/아내 얼굴 쳐다보고/아차!/처자식 땜에 정신차려야제”(이상열, 「앰브란스」)라는 부부애나, 다음의 작품에서 보듯이 형제애로도 나타나고 있다.
잔치 소식 신명 올라
큰 계집애 동생 치마저고리 입히고
꽃분홍 머리에 꽂고
엄마 아부지보다 먼저 나선 길
번데기공장 엄마는
공원(工員)들 밥 준비에
동동걸음치는데
얼굴이 까만 계집애
동생을 치켜 업고 길을 떠났다
네댓 살 되도록
걷기는커녕
일어서지도 못하는 동생을 업는 일이야
동네 숨바꼭질보다 더 흔한 일
갑사 치마저고리 곱게 입힌 동생을 업고
예닐곱 살 언니가 길 위에 올라섰다
가다가 쉬고
가다가 쉬고
쉬다가 또 가고
전라도 황톳길 걸어 걸어가다가
발가락 하나 빠지고 또 빠지던 문둥이 시인 한하운처럼
두 살 더 먹은 계집애가
두 살 더 어린 계집아이를 업고
몇 걸음 걷다가 궁뎅이 쑥 빠지고
몇 걸음 걷다 궁뎅이 아래로 빠지는 동생을 업고
외갓집 이모 혼례식에 가는 길
자갈밭 신작로 먼지 풀풀 날리고
미루나무 꼭대기엔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올랐다.
―김미선, 「바리데기 언니」(전체 15연 중) 10~15연
“바리데기”(바리공주) 설화는 전승 지역에 따라 다소 내용의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 줄거리는 유사하다. 옛날에 혼례를 일 년 미루어야 아들을 낳고 길할 수 있다는 예언을 무시하고 결혼한 탓에 딸만 낳은 왕이 있었다. 일곱째도 딸이 태어나자 왕은 그 바리공주를 버렸는데, 한 노부부에 의해 구해져 양육되었다. 훗날 왕 부부가 죽을병이 들어 점을 쳐보니 저승에 있는 생명수를 구해 와 마시면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여섯 공주 모두 부모를 위해 저승에 가기를 거부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바리공주는 부모를 구하려고 저승에 갔다. 그런데 저승의 수문장이 자신과 일곱 해를 살고 일곱 아들을 낳아야 생명수를 주겠다고 했다. 바리공주는 그 조건을 채운 뒤 생명수를 가지고 이승에 돌아와 부모를 살렸다.
위의 작품은 그 “바리데기” 설화를 인유해 장애가 있는 동생에게 헌신한 언니를 그리고 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았으면서도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바치면서 생명수를 구해 온 바리공주의 효녀담을 자매애로 응용한 것이다. “외갓집 이모 혼례식”이라는 “잔치 소식”에 신명 난 언니는 “큰 계집애 동생 치마저고리 입히고/꽃분홍 머리에 꽂고/엄마 아부지보다 먼저” 집을 나섰다. 당연히 부모의 손을 잡고 가야 했지만, “번데기공장 엄마는/공원(工員)들 밥 준비에/동동걸음”쳐야 했기 때문에 언니가 대신 “얼굴이 까만 계집애/동생을 치켜 업고 길을 떠”난 것이다.
그 동생은 “네댓 살 되도록/걷기는커녕/일어서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렇지만 “예닐곱 살”밖에 안 된 언니는 장애를 지닌 동생을 귀찮아하거나 구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생을 업는 일”을 “동네 숨바꼭질보다 더 흔한 일”로 여기고 보살펴주었다. 외갓집 이모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 “갑사 치마저고리 곱게 입힌 동생을 업고” 길을 나선 것이 그 한 모습이다. “두 살 더 먹은 계집애가/두 살 더 어린 계집아이를 업고” “가다가 쉬고/쉬다가 또 가”는 언니의 모습에서 무한한 자매애를 볼 수 있다.
5.
솟대 시인들의 시에서 추구하는 사회인식은 중요하다. 장애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차별당하고 소외당하는데 불구하고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주체성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장애인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지닌 사회의 한 구성원이다. 따라서 권리와 의무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물론 참여할 필요가 있는데, 다음의 시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그렇다
고통과 아름다움은 주로 산 위에 산다
남산타워를 똑바로 응시했던
창신동 산꼭대기 시민아파트
중세의 성처럼 늠름한 아파트는
끝내 사람 손으로 부서지고
나도 머리 둘 곳이 없구나
그래도 여태껏
시계노점 성희 아버지, 중동에 간 건주 아버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산 위의 벌집에서
엄마는 손가락을 찍어가며
몇백 원 하는 머리카락 정리하는 일을 하고
온 식구가 손가락 다치며 몇천 원짜리
잣을 까는 부업의 시간
때때로 바람이 집을 흔들었고
별빛 몇 개 흔들려
그냥 어둠이 될 때 산 하나가 날마다 솟고
산 하나가 날마다 무너지는데
지린내 나는 층마다 흘러나오는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늘 취해 있는 401호 아저씨는 으악새만
불러들이고
서정적으로 헤엄치는 창신동 사람 나는
땀에 절어 소금밭 그려진 옷을 입고
낙산 허리 옛 성터에서
삼거리 윷놀이판과 깡통 돌리기를 뒤로 하고
웃풍 센 겨울밤을 기도하듯 넘기는데
고통과 아름다움은 주로 산 위에서 산다.
― 김율도, 「고통과 아름다움은 산 위에 산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한때 “남산타워를 똑바로 응시했던/창신동 산꼭대기 시민아파트”에 거주했다. 그곳은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등장하는 난쟁이 가족이 살아가는 낙원동 행복동에서 맡은 역겨운 냄새처럼 “지린내”가 났다. 또한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늘 취해 있는 401호 아저씨는 으악새만/불”렀듯이 주거 환경이 조용하거나 편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이 재개발되는 바람에 “중세의 성처럼 늠름한 아파트는/끝내 사람 손으로 부서”져 “머리 둘 곳이 없”게 되었다. 실제로는 허름한 “창신동 산꼭대기 시민아파트”에 불과했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화자에게는 “중세의 성처럼” 여겨졌던 곳이다. 화자는 그곳을 “아름다움”의 장소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래도 여태껏/시계노점 성희 아버지, 중동에 간 건주 아버지”가 “산 위의 벌집에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엄마는 손가락을 찍어가며/몇백 원 하는 머리카락 정리하는 일을 하고/온 식구가 손가락 다치며 몇천 원짜리/잣을 까는 부업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낙산 허리 옛 성터에서/삼거리 윷놀이 판과 깡통 돌리기”가 이루어진 데서 보듯이 공동체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가 “고통과 아름다움은 주로 산 위에서 산다”고 노래한 것은 주목된다. “고통”과 “아름다움”은 모순된 개념이지만 서로 결합시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실제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달팽이가 느린 건 집이 있어서예요
집을 사려고 바삐 뛰지 않아도 되니까요
느리게 움직이면 보이지 않던 게 보인다고 해요
폐지의 무게로 헉헉거리는
할머니의 활기찬 호흡과
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뿜어대는
노동자의 굵직한 땀방울
그리고 저 너머의 금이 간
아파트 베란다 건조대에서
자신을 보며 방긋 인사하는 형형색색의
빨래가 꽃 무리처럼 아름답다고 해요
그러면 꺽꺽거리는
감동의 울음소리가 나오고
그제야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해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네요
보글보글 톡톡, 보글보글 톡톡
구수한 된장국 소리 따르는 달팽이를
별 등 켜는 아이가 하나, 둘 불을 밝히며 따라가요
그 모습, 소독차 쫓아가는 아이 같아요.
― 손성일 「달팽이」 전문
1801년 프랑스에서 발명된 증기기관이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데서 증명되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은 속도이다. 만약 증기기관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에 필요한 연료 수송에 관련된 기술은 물론 생산성을 구축하는 토대를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기술을 개발하고 공장을 경영하는 속도를 높여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봉건체제를 무너뜨렸다. 또한 생산체제와 새로운 사회 조직의 이데올로기로도 구체화 시켰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하는 속도에 밀려나면 “문패 하나 세우지 못한 죄로 대문은 충혈되어/세월의 녹만 멍처럼 번”(김민수, 「빈집」)지거나, “수북하게 쌓인 짐짝, 그 짐짝들이 먼지 뒤집어쓴 채 문을 못 열고 있”(권주열, 「학성문집」)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성원들은 속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동료 간에도 이웃 간에도 경쟁한다. 그에 따라 사랑, 양보, 봉사 같은 가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인간 가치를 상실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지극히도 고요한 휴식을” 취하거나 “기막힌 자유로움”(최림, 「나무는 스스로에게 기대어 잠을 잔다」)을 누릴 수 없다. “좀처럼/자리를 떠나지 않”(김종선, 「동지(冬至)」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속도에 무조건 순응할 것이 아니라 주체성을 가지고 맞서는 것이 필요하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달팽이가 느린 건 집이 있어서”라고, “집을 사려고 바삐 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집”은 실제의 거주지를 의미하기보다는 시적인 상징체로, 즉 주체성을 지닌 화자의 마음으로 읽힌다. 화자는 “느리게 움직”인 결과 “보이지 않던 게 보”이는 것을 경험한다. “폐지의 무게로 헉헉거리는/할머니의 활기찬 호흡과/햇빛에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뿜어대는/노동자의 굵직한 땀방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 너머의 금이 간/아파트 베란다 건조대에서/자신을 보며 방긋 인사하는 형형색색의/빨래가 꽃 무리처럼 아름”다운 것도 바라본다. 결국 “꺽꺽거리는/감동의 울음소리가 나오고/그제야 살아 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보글보글 톡톡, 보글보글 톡톡/구수한 된장국 소리”를 마음속으로 들으며 간다. 그 화자를 “별 등 켜는 아이가 하나, 둘 불을 밝히며” 따르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속도의 경쟁에 맞서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는 화자를 응원하는 것이다.
이번엔 불닭집이 문을 열었다
닭 초상이 활활 타오르는 사각 화장지가
집집마다 배달되었다
더이상 느끼한 입맛을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공익적 문구를 실은 행사용 트럭이 학교 입구에서
닭튀김 한 조각씩 나눠 주었다
아이들은 불닭집 주인의 화끈한 기대를
와와, 맛깔나게 뜯어 먹는다
삽시간에 매운바람이 불고 꿈은 이리저리 뜬구름으로 떠다닌다
낙엽, 전단지처럼 어지럽게 쌓여가는 십일월
벌써 여러 치킨집들이 문을 닫았다
패션쇼 같은 동네였다. 가게는 부지런히 새 간판을 걸었고
새 주인은 늘 친절했고 건강한 모험심이 가득했으므로
동네 입맛은 자주 바뀌어 갔다
다음은 어느 집 차례
다음은 어느 집 차례
질문이 꼬리를 물고 꼬꼬댁거렸다
졸음으로 파삭하게 튀겨진 아이들은 종종 묻는다
아버지는 왜 아직 안 와
파다닥, 지붕에서 다리 따로 날개 따로
경쾌하게 굴러떨어지는 소리
아버진 저 높은 하늘을 훨훨 나는 신기술을 개발 중이란다
어둠의 두 눈가에 올리브유 쭈르르 흐르고
일수쟁이처럼 떠오르는 해가
새벽의 모가질 사정없이 비튼다
온 동네가 푸다닥,
홰를 친다.
― 이명윤, 「안녕, 치킨」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가 살아가는 동네에 “불닭집이 문을 열었다”. “닭 초상이 활활 타오르는 사각 화장지가/집집마다 배달되었”고, “더 이상 느끼한 입맛을 방치하지 않겠습니다/공익적 문구를 실은 행사용 트럭이 학교 입구에서/닭튀김 한 조각씩 나눠”줄 정도로 적극적으로 광고를 했다. “아이들은 불닭집 주인의 화끈한 기대를/와와, 맛깔나게 뜯어 먹”으며 좋아했다. 그렇지만 “삽시간에 매운바람이 불고 꿈은 이리저리 뜬구름으로 떠다”니다가 “낙엽”이 “전단지처럼 어지럽게 쌓여가는 십일월”에 “문을 닫고” 말았다. 동네의 다른 “치킨집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서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가게는 부지런히 새 간판을 걸었고/새 주인은 늘 친절했고 건강한 모험심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이 성실하지 않거나 창의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쌀 반 가마니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 메고/청년은 자신의 나이보다 어쩌면 많을/마천루 계단을 오르며 붉으락푸르락/가스통이 쿵쾅쿵쾅 엉덩이는 실룩샐룩/풋사과 같은 얼굴이 휴지 뭉치처럼 구겨”(김윤진, 「케이블카를 꿈꾸는 마천루의 폐하」)져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상황과 같다. 경쟁에서 뒤진 당사자는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이 심화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구상솟대문학상 수상 작품들 중에서 인류애를 노래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인류애란 인간 존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인본주의 및 평화주의의 토대이다. 국적, 인종, 민족, 종교 등의 차이를 초월해 사랑, 자유, 평등, 평화 등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전쟁이 났다 한다
하늘엔 바벨탑, 바빌론의 공중정원
떠다니는 곳
꽃비처럼 터지는 공습경보 속을
달려가는 알리, 알리는 열세 살
두 볼이 통통한 이라크 소년
열화우라늄탄 쏟아지는 사막
더러는 잘리고 더러는 뒹구는
팔, 다리, 화상 입은
알리들이 운다
나는 울지 않는다. 무력하게
TV앞에서
다만 기억할 뿐이다
진흙판에 새겨진 이 세상 맨 처음 법이
검은 연기로 타오르는 장관을
역사의 강 건너는 미제 군화를
지켜볼 뿐이다. 인류가 믿었던 마지막
질서마저 짓밟힌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두 줄기 눈물 사이로
밤을 새운 기도는 한갓 덧없고
버리지 못한 습관인 양 아직도 내 손 안엔
지구를 돌고 있는 바빌론의 묵주,
귓바퀴를 후려치는 때늦은 공습경보.
― 최현숙, 「내 손안의 묵주」 전문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열화우라늄탄 쏟아지는 사막”에서 “더러는 잘리고 더러는 뒹구는/팔, 다리, 화상 입은/알리들이” 고통스러워하며 울부짖는다. “꽃비처럼 터지는 공습경보 속을/달려가는 알리”를 비롯해 “두 볼이 통통한 이라크 소년”들도 다쳤거나 목숨을 잃었다. 작품의 화자는 “무력하게/TV 앞에서” 그 상황을 바라볼 뿐이다. “진흙판에 새겨진/이 세상 맨 처음 법이/검은 연기로 타오르는 장관을/역사의 강 건너는 미제 군화를/지켜볼 뿐”인 것이다.
“이 세상 맨 처음 법”이란 함무라비 법전을 지칭한다.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법전은 인류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4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로 현재의 이라크 내에 위치한다. 화자는 그 유서 깊은 곳을 “미제 군화”가 짓밟는 침략전쟁 앞에서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인류가 믿었던 마지막/질서마저 짓밟힌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의 운명을 되살리기 위해 밤새워 기도한다.
1차 이라크전쟁은 1988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공화당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아버지) 정권에 일어났다. 1990년 6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풍부한 석유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는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1991년 1월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과 함께 이라크를 공격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냉전 종결을 선언하면서 소련이 붕괴한 상황에서 발생한 전쟁이어서 동맹국이 없던 이라크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3월 3일 정전협정으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2차 이라크전쟁은 조지 워커 부시(아들) 정권에서 일어났다. 이라크가 미국에 적대적인 탈레반 같은 테러 조직을 지원하고 있고, 이라크가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를 포함한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거나 은닉하고 있으며, 후세인 정권이 인권 침해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후세인을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2003년 3월 미국은 영국을 제외하고 프랑스, 독일 등 전 세계의 많은 나라가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5월 1일 종전을 발표할 정도로 미국은 일방적으로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렇지만 2011년 12월 15일이 되어서야 실제로 종전되었다. 전쟁 동안 이라크의 군인과 민간인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쳤거나 사망했고, 미군의 사망자 수도 4천 명에 이르렀다.
이라크전쟁에서 증명되듯이 이 세계의 그 어떤 전쟁도 인정할 수 없다. 전쟁은 비이성적인 인간들이 가하는 잔인한 폭력일 뿐이다. 미국이 이라크가 은닉한 핵무기와 생화학 무기 같은 대량 살상무기를 찾아내어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명분은 모두 허위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위의 작품의 화자는 이라크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손안의 묵주”를 돌리고 있는 것이 그 모습으로 국적은 물론 인종, 민족, 종교 등의 차별을 넘어 인류애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