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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에서 승리하는」개발자가 되려면? |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사용법을 착각하여 특정 영역에만 타당한 어법을 마구 다른 영역에 옮겨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요술’이라고 한다. 철학적 문제까지 가지 않더라도 토론 과정에서 레토릭(rhetoric)의 오/남용으로 전혀 합리적이지 않고 현명하지 않은 결론(혹은 타협)이 도출되는 현상을 지양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본다. |
2004/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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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는 의외로 토론을 많이 합니다. 각종 워크샵과 리뷰 그리고 일정 회의, 브레인 스토밍 등 개발 공정 과정과 업무 사이에 수많은 토론을 거쳐 해결책과 정책, 과제들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현명한 결정을 유도하는 토론 방법에 대해서는 미숙한 점이 많습니다. 물론 ‘좋은 알고리즘을 찾는 문제’라든가 ‘데이터베이스 튜닝’ 같이 검증하기 쉽고 명백한 답안이 존재하는 경우는 토론 내용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개개인의 성향이나 기호의 차이, 다른 가치관과 의식 수준 등이 개입된 토론은 극렬하지만 영양가 없이 지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토론은 어떤 문제를 두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통해 시비를 따져 논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의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지나쳐 호승심이 발동하게 하여 바른 논리적 결론을 흐리게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선호하는 언어라든가 방법론, 패러다임, 테크닉을 경쟁우위에 놓기 위해 갑론을박하는 경우는 지나친 종교전쟁이 되어 토론 내용은 엉망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인격을 은닉, 변형할 수 있는 사이버 상의 토론은 엽기적이기까지 합니다. 양질의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해 좋은 방법론을 잘 따라야 하듯 최고의 결론을 유도하고 합의하기 위해서는 좋은 토론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필자는 달변가도 아니고 토론에 능한 사람도 아니지만 여러 토론을 통해 관찰한 토론에서의 안티 패턴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민했던 방법들을 여기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안티 패턴들 많은 토론에서 적절한 논리 전개와 논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받아 결론을 유도하는 경우보다 곤란한 방법들로 토론이 아닌 말싸움에서 이겨 결론을 지워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토론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패널들이 토론하는 TV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이와 같은 오류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헤겔과의 논쟁에서 패한 후 「논쟁에서 이기는 37가지 기술」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몇 가지 기술을 안티 패턴으로 소개하겠지만 필자는 이 ‘논쟁에서 이기는 기술’을 ‘토론에서의 안티 패턴’으로 생각합니다. 똑같은 ‘기술’이 토론과 논쟁이라는 다른 광장에서 사용될 때 그 용도가 180도 달라지는 이유는 토론과 논쟁의 목적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기술들이 토론을 위해 전적으로 사악한(?) 것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닙니다. 즉 토론은 어떤 주제에 대해 시비와 우열, 최선책을 구하는 데 있지만 논쟁은 본질상 승리를 위해 그 과정에서 서로의 주장에 다름과 우열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의 타당성, 정당성을 강요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담론의 광장은 더 나은 결론, 더 바람직한 합의가 그 목적에 있으므로 필자는 쇼펜하우어의 기술을 토론장에서 안티 패턴으로 분류하고 「논쟁에서 이기는 37가지 기술」을 토대로 토론에서 지양해야 할 습관으로 차용해 이를 극복하는 방법과 함께 다음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물 타기 “상대적으로 제기된 주장을 절대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인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다.” “과장된 반대 명제를 제시한다.” “특화된 사안을 일반적인 일로 돌려서 이의를 제기한다.” “옳기는 하지만 아리송한 명제를 이용한다.” 상대의 주장을 왜곡하거나 범주의 오류적 해석, 불순한 논리 전개로 주장의 논지를 희석하는 방법을 소위 ‘물 타기’라고 한다. 초점을 흐리게 만들어 무엇이 근본인지를 모르게 만드는 방법입니다. 개발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표적인 사례가 메타포어의 잘못된 인용과 해석입니다. XP나 RUP에서 아키텍처를 설명할 때 또는 자신의 생각을 개념적으로 일반화하여 설명하는 방법으로 은유(메타포어)를 통해 설명하곤 합니다. 메타포어 사용은 이렇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을 위해 개념적으로 유사하며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다른 개념을 이용해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토론할 때 논지의 도구로 사용되는 이 메타포어가 물 타기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가령 프레드릭 브룩스(Frederick P. Brooks)의 ‘No silver Bullet’은 늑대인간으로 비유되는 소프트웨어 공정 과정에서의 난점을 단방에 해결할 은탄환 같은 방법은 없다는 것이 ‘은탄환’ 메타포어의 논지입니다. 하지만 개발상의 문제들과 늑대인간과의 다른 점을 들어 공격한다면 토론 욕구를 사라지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지난 총선 때 한나라당 대변인 전여옥 씨가 유시민 의원과 토론 중에 기염(?)을 토한 ‘미숙아’ 메타포어의 ‘비열한 인용방식’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대통령은 시대적 미숙아다. 좀 일찍 나왔다”란 메타포어에 “미숙아는 인큐베이터에 보내야 한다”로 인용한 경우는 감정까지 상하게 합니다. 이런 물 타기 방법을 피하는 것은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상대적으로 제기된 주장을 절대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인다’면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주장임을 증명합니다. ‘과장된 반대 명제를 제시한다’면 즉, 나의 논지를 과장되게 비약하거나 나의 논지의 반론으로 너무 과장된 사실과 가정들로 공격한다면 그 반론이 과장되고 터무니없음을 납득시키고 상식의 범주에서 논의를 종용합니다. ‘특화된 사안을 일반적인 일로 돌려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특화된 사안과 일반적 사안이 다름을 납득시킵니다. 예외적인 작업은 예외처리 루틴을 통해 동작하는 것이지 베이직 플로우가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옳기는 하지만 아리송한 명제를 이용한다’면 아리송하지 않도록 명제를 재단하고 본론으로 도입해야 합니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하여 논지를 바꾸고자 한다면 중의적 표현을 명백하게 식별하고 들어갑니다. 반대로 이음동의어에 의한 오해로 불필요한 토론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사로웠지만 필자도 Wrapper와 Adapter의 상호표현의 이해부족으로(정확히 말하자면 용어 정의를 못했기 때문에) 짧지 않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열띤 논쟁을 하며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표현(관심 영역)의 차이로 의사소통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데 「Agile Database Technique」에서는 객체지향 개발자와 DBA의 의사소통 문제를 지적합니다. 개발자는 오브젝트/컴포넌트 다이어그램을 준비하고 DBA는 ERD를 가지고 시스템에 대해 논의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는 시스템은 동일합니다. 문제는 자신의 특화된 부분을 주로 설명하려 하지만 상대의 특화된 부분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 자세 때문에 논의의 장애를 가져옵니다. 대부분 이런 토론의 말미는 장시간 첨예한 논쟁을 했다가도 결국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네가 말하려고 했던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키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Agile Database Technique」에서는 각 업무 영역에서의(자신의 특화된 분야로 접근하려는)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보다는 일반적인 공감대를 기반으로 접근하려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로서 대화에 임하는 자세를 갖고, 표준화된 언어형식을 따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관용까지 가지 않더라도 양질의 토론을 위해 상대방의 용어, 관심 분야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공회대학교 교수를 지내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인 신영복 선생은 ‘분쟁이나 논쟁의 원인이 본질의 차이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각의 차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는데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부분입니다. 사실 이 간단하고 단순한 방법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주로 경험상 앞에서 말한 전술을 펼치는 사람은 상술한 방패로 접근할 때, 방패에 또 칼을 들이대는 꼬리의 꼬리를 무는 성향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토론에 집중하다 보면 잘못된 접근법을 포착 못하고 함정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즉 고약한 접근법이 들어오지 않도록 토론 내용을 자주 확인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재 뿌리기 “상대가 틀린 증거를 택했다면, 그것이 상대의 명제가 틀렸다는 논거로 삼는다.” “불합리한 결론을 내린다.” “두서없이 질문을 던진다.” “궤변” “반대 사례를 제시한다.” “상대의 개인적인 일을 공격한다.” ‘다 된 밥에 재 뿌리기’처럼 궤변과 비약으로 상대의 주장을 엉망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방법으로 ‘아님 말고’ 식으로 끝나 인격적 모독감까지 느끼게 하는 이 방법은 ‘흠집내기’와도 유사하며 ‘당신은 안 돼 !’ 식의 논리 전개가 대부분입니다. 즉, 성급한 일반화나 아전인수식의 논리비약으로 논지를 망가뜨리는 방법입니다. 이런 환경에서의 토론은 제법 감정까지 개입되기 마련인데, 감정이 개입된 논리는 논리로서 끝장난 상태에서 토론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하면 “기실은 그 사람의 의견에 반론도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그 사람의 말하는 태도가 기분 나빠서 논쟁을 벌인다”라고 이런 논쟁의 조악한 의도를 꼬집고 있습니다. 토론은 비록 상반된 입장과 주장을 가지고 있더라고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결론 내지는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장입니다. 토론의 무기는 탄탄한 논리와 강력한 논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 객관적이고 납득할 만한 상대방의 논지를 부정한다거나 비약한다면 토론자로서 자세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이런 태도들은 토론을 토론이 아닌 말싸움이나 논쟁으로 전이시키고 곧 토론의 목적과 순수성을 잃게 만듭니다. 토론에는 논제가 있습니다. 논제와 상관없는 혹은 억지로 개연성을 찾아서 상대의 개인적인 일을 공격하거나 상대의 틀린 증거를 상대의 명제가 틀렸다는 논거로 삼는 식의 행위는 비신사적입니다. 방법이 잘못됐다고 선의까지 저버려서는 안 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증거가 잘못된 논거’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교육 평준화 문제로 한창 의견이 나뉘었을 때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서로 상반된 교육정책들로 서로의 주장을 부정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착안해야 할 것은 ‘반대 사례가 현안에 적용될 수 있는가’입니다. 강남에 있는 귤이 장강을 넘어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되고 마는 이유는 그 토질과 환경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즉 반대 사례를 제시할 때는 현안과 같은 상황, 조건, 전제인가도 증명해야 설득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잦은 변경에도 일관된 형상을 유지하며 관리되기 위해서는 유연하고 탄탄한 아키텍처가 필요하듯 두서없는 질문을 판별하거나 막기 위해서는 확실한 논지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궤변은 토론 상황을 홀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토론 중에 수긍했지만 토론 뒤에 찜찜한 느낌이 있다면 이 궤변이 원인일 확률이 큽니다. 궤변으로 나의 주장을 무력화한다면 똑같이 궤변으로 상대방의 궤변을 무력화시키는 방법이 멋지겠지만 가능하지 않을 때는 궤변을 논리로 인정하지 않고 궤변의 논리적 모순을 식별하는 게 최선책입니다. 물론 궤변 식별도 타이밍을 포착하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상대방의 주장에 항상 귀 기울이고 논지를 성찰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그 밖의 것들 이기기 위한 논쟁 특히 프로젝트 초기에 코딩 규칙 표준화 회의는 쓸데없이(?) 치열합니다. 흔히 cruelly brace war 혹은 키보드 위의 전쟁이라고 불리는 코드 규칙에 대한 싸움은 종교전쟁을 연상케 합니다. 즉 시비와 우열, 합리적이고 적합한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호나 개인적인 가치에 기인하기 때문에 ‘자신이 옳으니까 옳다’는 식의 동어반복적인 논리 전개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메쏘드 시그니처 표현 규칙은 어떤 것이 좋다’라거나 심지어 ‘int i’를 표기하는 데 있어서 다른 표현 차이를 양보하려 하지 않는 태도는 거의 ‘신앙의 문제’에 가깝기 때문에 곤란하면서도 영양가 없이 심각해집니다. 필자가 애용하는 방법은 극선(極善)이 아닌 차선, 불평스럽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각 언어에서 정의하는 표준 코딩 규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 합의에 의해 정의된 코딩 규칙은 내 주장이 섞인 것도, 상대 주장이 섞인 것도 있어 모두가 만족하는 규칙이 나오지 않을 뿐더러 모두가 불평하는 규칙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업계 표준으로 정의된 규칙을 정하는 것이 적을 없애는 방법이며, 또 가장 많은 사람이 합의한 방법이기 때문에 객관성이 인정된 규칙입니다. 이기기 위한 자신의 가치관이 개입된 신앙의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의 싸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옳고 그름이 합리적, 객관적으로 명백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기호, 선호(방법론, 언어, 툴, 패러다임, 기술 등)를 기반으로 논쟁이 시작되기 때문압니다. 코딩 규칙 표준화 회의처럼 필자는 아예 이런 토론 자체를 안 하기를 권하고 싶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상황이면 주관성이 배제된 제 3자에게 결정을 맡기는 게 낫다고 봅니다. 권력에 의지한 논쟁 토론장에서 나이, 직급, 이익 관계 그리고 물리적인 힘 등 권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토론하는 데 주의사항이 필요합니다. 일단 이런 것들을 가진 사람을 기득권이라 하고, 기득권을 가진 자는 기득권을 내세우지 않아야 하며 그렇지 않은 자는 예의 차원에서 의견을 존중해 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권력의 관계가 토론에 직접적으로 개입되면 곤란해집니다. 이것은 토론이 명령, 권유, 이해시키는 도구로 윤색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권력이 지식이 되는 경우도 심각합니다. 가령 자신의 객체지향적 의견의 근거로 여러 대가들의 책이나 글, 말을 제시하므로 승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객관성의 호소에 의한 방법으로 탓할 바 아니지만 방대한 자료들과 자신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추가해야 합니다. 즉 이 객관성이 나의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정당한 자료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앞에서 예로 든 ‘강북의 탱자’ 비유와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좋은 습관 제안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토론술이 안티 패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추천할 만한 긍정적인 방법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답니다. “상대의 사고방식을 이용한다.” “모순되는 것이 있는지 찾아본다.” “반격당한 부분을 세밀하게 구별한다.” “맞받아친다.” “상대가 회피하는 사항을 파고든다.” “반대 사례를 제시한다.” 토론은 적절한 논리 전개와 강력한 논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받아 결론을 유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토론에서 제일 강력한 무기는 화술도 권력도 아닌 논리와 지식 그리고 교양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토론문화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원칙을 지키기를 제안합니다. 하지만 토론이 아름답게 논리와 논증으로 치장되어 진행되지만은 않습니다. 가령 일정 회의나 책임 소재를 찾는 회의, 작업 분담 회의 등의 살기(?) 위해 본의 아니게 다소 치사할 수밖에 없는 토론을 우리는 많이 하게 됩니다. 이렇게 첨예한 이해관계의 대립에서의 토론술은 역으로 쇼펜하우어의 토론술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필자는 이런 토론을 토론으로 분류하지 않습니다). 토론의 목적을 명확히 합의, 확인하고 들어가기 토론이 우왕좌왕하는 이유는 토론의 목적을 잃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참여자가 토론이 아닌 설득, 강요, 논쟁을 목적하고 시작한다면 알찬 토론의 장을 만들기 힘들겠지요. 한 사람은 설득을 위해 토론하고, 한 사람은 영업을 위해 토론하고, 한 사람은 좋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토론하는 부적절한 관계가 쉽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 서로간에 토론의 목적과 주제를 명확히 합의한 후 이를 전제로 토론에 임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토론을 위한 전제는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논리와 논증으로 토론하자는 전제와 토론의 주제에 대한 전제입니다. 이런 전제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노트하는 습관이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토론시 결정사항을 주로 노트하지만 토론의 화제 및 이슈까지 노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는 이슈, 히스토리를 노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후자의 노트 습관이 필요한데 첫째는 토론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의 논리 전개로 인해 토론 내용이 흐려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좋습니다. 마치 코드를 해킹할 때 여러 함수 호출로 인해 즉, 함수 호출의 깊이(depth)가 너무 깊어서 다시 메인 함수로 돌아오는 경로를 잃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호출한 함수들을 순서적으로 메모 남겨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같은 목적으로 토론시 다시 원래의 주제로 롤백하기 위해 노트를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토론 traceability!!). 둘째는 토론이 무의미한 주제로 흘러가는 데 제동장치 역할을 합니다. 현재 토론 주제는 어떤데 이 주제와 상관없는 다른 주제가 나오고 은연중에 다른 주제로 토론이 전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행되는 이슈까지 노트하는 것은 이렇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발견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 명확히 하기 전술한 「Agile Database Technique」의 예처럼 현재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부분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 부분이 단지 본질이 아닌 시각의 차이는 아닌지 명백히 성찰하면서 토론해야 합니다. 논리적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여러 이슈들을 만들다 보면 그 이슈가 쟁점이 돼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바른 논쟁을 위해서 현재 쟁점의 핵심에 대한 이해를 명확히 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논쟁의 핵심을 잃지 않기 위해 사회자를 두는 것도 효과적입니다. 여기서의 사회자는 되도록이면 의견을 정리하고 주제에 맞지 않는 의견은 통제해야 하므로 현안에 대해 전문지식이 없거나 중립적 입장을 갖는 사람이 적절합니다. 다른 팀의 인원을 도움 받는 것이 효과적이며 토론 진행을 위한 권한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반증 가능성, 오류 가능성을 열어 놓기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란 책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판단 기준을 반증 가능성, 오류 가능성에 두고 있습니다. 그 책에서 아인슈타인의 예를 들고 있는데,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 논문을 증명하기 위해 빛이 중력장 속에서 휘는 현상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만약 중력장 속에서 빛이 휘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자신의 이론은 참이 되며 그렇지 못하다면 거짓이 된다고 오류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며 개기일식 때 이 논증이 증명되어 일반 상대성 이론이 학계에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개기일식 때 빛이 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칼 포퍼는 반증 가능성, 오류 가능성을 전제해야 과학이고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논지를 주장할 때 반증과 오류의 여지를 제거하는 작업부터 하기에 급급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틀릴 수도 있으며 상대가 옳을 수도 있는 관용(똘레랑스)의 자세가 삭막한 논리의 지대인 토론장을 더욱 아름답게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의 필드도 과학입니다. 과학적 자기주장의 정당성, 합리성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반증 가능성, 오류 가능성을 담보해야 더 진화된 결론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대안 없는 반론, 자기 성찰 없는 비판 지양하기 어떤 주장은 그 내용의 풍부함과 예리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비난, 독설, 괴변 같은 느낌을 떨치기 힘듭니다. 대안이 없이 반론만 있는 경우입니다. 대안 없는 반론은 허무하고 반론 없는 토론은 고리타분합니다. 대안 없는 안티의 텍스트는 ‘토론’이 아닌 ‘주장’으로 성격이 비껴집니다. 때로는 텍스트의 내용에 따라서 ‘주장’도 안 되는 ‘신념’, ‘신앙’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문제는 이 주장이나 신념, 신앙들이 논리체계를 갖춘 논지로 포장된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비판 이전에 그 비판의 대상에 자신을 놓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비판은 인격자로서 비판으로 보기 힘들며 자기성찰을 전제한 비판은 인격자로서 자신을 품위 있게 만드는 조건이 됩니다. 또한 양시론, 양비론을 통해 자기만 쏙 빠진 타인들, 현상에 대한 비판도 지양해야 합니다. 일단 비판의 대상 설정에는 ‘우리’로 시작한 후 그 ‘우리’ 중에 옥석을 가려 진짜 비판할 대상을 식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여집합으로 둔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의 비판은 비열한 방법입니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만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누구나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옳은 소리를 할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논리적인 주제가 아닌 도덕적인 주제의 토의에선 자기성찰이 필수 요소입니다. 단지 남의 위선에 대한 비판에는 겸허한 자기성찰이 필요하고 자기성찰이 없는 비판은 또 다른 위선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비판을 하는 데 있어 냉전주의식으로 사태를 이분법적으로 설정하는 것도 지양해야 합니다. 이분법적 분석보다는 정교화, 세분화, 구체화하여 논지를 따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로직, 로직, 로직 필자는 개인적으로 논리적인 사고, 논리적인 칼과 방패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다시 논리학 개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토론을 잘 하기 위한 왕도는 역시 논리입니다. 논리는 자신과 타자에 대한 창과 방패의 역할을 합니다. 자신의 오류를 식별하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 있는 논리 전개를 유도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그것들을 식별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논리입니다. 토론에서 논리는 자신이나 타자에 대한 창과 방패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창으로서의 역할은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정합적, 합리적으로 만들어 정당성, 우위성을 부각시킵니다. 이것은 타자에게 그대로 공격용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즉, 상대의 논리적 모순을 측정하는 도구로서 논리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방패로서의 역할은 자기 오류를 검사하는 도구로서 논리가 중요합니다. 전술했던 내용은 논리의 지향점인 반면 모순, 오류는 논리의 지양점입니다. 역시 이 방패로서의 용도는 타자의 모순과 오류 식별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논리적 오류들을 공부하고 오류 식별을 연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필자는 좋은 소프트웨어는 좋은 방법론을 통하듯 좋은 토론 결과는 좋은 토론 방법, 습관을 통한다고 했습니다. 필자가 토론 방법에 관심을 갖은 이유는 보다 양질의 지식 형성 과정 내지는 개발을 위한 좋은 결론 도출에서 바른 토론 방법이 필요하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통해 좋은 토론 습관으로 더 나은 의사 결정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
첫댓글 정치카페에서 논쟁은 필수 이겠고 그렇지만 진정한토론 문화 정착을 위해서 참고해야 할 글이라 생각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