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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익한의 사당에 세워져 있는 포의각 |
인물은 어떻게 읽혀야 할까?
평택시는 올해 평택의 정체성(正體性)확립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평택시교육청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서 한 해 동안 ‘정체성’이란 단어가 귓전에 맴돌 것 같다. 정체성은 국어사전에서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한문사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전적 의미대로라면 평택의 정체성 확립이란 ‘우리고장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나와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 공동체가 속한 시간과 공간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평택시는 정체성 확립을 위해 우리고장의 ‘인물’에 주목하고 있다.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과 시공(時空)을 넘어 함께 공유하고 호흡한다는 것은 무한한 자긍심을 갖게 한다. 나도 선조들처럼 훌륭하게 살 수 있다는 희망도 솟아난다. 하지만 인물로 정체성을 세우는 일은 많은 준비와 노력이 요구된다. 오랫동안 사료(史料)를 수집하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현실의 필요성에 의해 특정인물이 과대 포장되거나 지나치게 긍정적인 부분만 부각시켜 객관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주의사항이다. 누구한테 이야기해도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 다른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만의 장점을 발굴하여 소개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다. 인물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문화를 통해서도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오늘 역사산책은 우리고장의 인물 가운데 역사적 중요성에 비하여 덜 부각된 홍익한을 찾아가려고 한다. 그의 삶을 통하여 우리시대를 비춰보자.
젊은 시절엔 때 못만나 좌절 겪어
얼마 전 홍익한의 후손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후손은 우리고장에서 정도전과 원균은 널리 선양되면서도 자신의 조상은 소외되는 것에 불만을 터뜨렸다.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시대와 맞지 않으면 덜 부각되는 것이라고 해명을 했어도 못내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고장의 인물들 중에는 홍익한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많다. 시대를 앞서갔던 선각자들도 때를 만나지 못해 선양되지 못하는 사례도 있다.
홍익한은 1586년 팽성읍 함정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훈구세력 중에서도 명문가에 속했다. 고조부 홍숙은 중종 때의 공신(功臣)으로 도승지와 좌찬성을 지냈으며, 조부와 생부도 공신의 후손으로 관직에 올랐다. 홍익한의 선대들은 유력한 훈구파였음에도 일찍부터 사림파와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신흠, 장유,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칭송받던 월사 이정구에게 수학(修學)할 수 있었던 것도 선대의 인연 때문이었다.
홍익한은 30세의 늦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성균관 생원으로 6년을 공부하여 광해군 13년(1621)에는 알성시에도 급제하였다. 사마시에서는 장원을 하였고 알성시에서도 합격하였으니 뛰어난 수재였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때는 홍익한이 뜻을 펼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었다. 집권세력은 북인들이었고, 그가 속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과 인목대비 문제로 집권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홍익한이 알성시에 급제하고도 취소당했던 것도 시대상황과 관련 있을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출세길…요직 두루 거쳐
1623년 서인(西人) 일부세력이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은 정권욕에 불타고 있던 서인(西人)이 왕을 갈아치운 명분 없는 쿠데타였다. 쿠데타는 집권세력 내에서도 비판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민심의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북인정권에서 파방을 당했던 홍익한에게 반정은 출세의 기회였다. 인조 즉위년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난한 인조는 충청도 선비들을 대상으로 과거(科擧)를 실시하였다. 민심안정용으로 치러진 공주행제정시문과에서 홍익한은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홍익한의 관직생활은 순탄하였다. 청요직(淸要職)이었던 삼사에 기용되어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고, 정승을 지낸 스승 이정구도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었다. 홍익한이 관직에 진출한 무렵 국외정세는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서인들이 사대의 의리로 맺어진 혈맹국가라고 떠받들던 명나라는 국운이 기울대로 기울었으며, 여진족이 세운 청(淸)은 중국본토를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집권서인세력은 잃어버린 10년 운운했던 현 정권처럼 광해군과 북인 정치를 의리도 없고 명분도 상실한 잃어버린 15년이라고 주장하며 반청(反淸)의 기치만 높였다. 홍익한도 친명반청(親明反淸)은 포기할 수 없는 대의(大義)로 인식하였다. 그는 조선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버리고 오랑캐인 청을 받드는 것은 금수(禽獸)만도 못한 행동이라고 주장하였다.
인조15년(1636)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고 항명대의를 세우라는 홍익한의 상소는 파란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군사를 국경부근으로 이동시키며 압박하였고, 최명길과 김류 등은 사직보존을 위해 홍익한을 청나라로 압송하자고 주장하였다. 명분을 앞세운 척화파와 현실론을 주장하는 주화파 사이의 논쟁은 피난지 남한산성까지 이어졌다.
항전 초기에는 원칙론을 주장하는 척화파가 분위기를 이끌었다. 척화(斥和)는 광해군의 실리외교노선을 부인하고 집권한 서인 주류의 입장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항전이 40일을 넘어가고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세자와 대군들이 포로로 잡히자 사태가 급변하였다. 인조는 청의 굴욕적인 항복요구를 받아들였다. 홍익한은 윤집, 오달제와 함께 여러 척화파를 대신하여 청나라에 압송되었다. 압송된 처지였지만 홍익한은 친명(親明)의 대의(大義)를 굽히지 않았다. 삼학사 가운데서 홍익한이 가장 먼저 참살을 당했던 것은 끝까지 강경했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청 주장하다 청나라로 압송돼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홍익한의 집은 강화도에 있었다. 남한산성과 함께 또 다른 항전지였던 강화도가 함락되자 홍익한의 가족들도 화를 면치 못하였다. 둘째 부인 허씨를 보호하려다 아들 홍수원은 칼에 맞아 죽었고, 허씨 부인은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것을 본 홍수원의 처도 혀를 깨물어 죽어버렸다. 다행히 평택 본가에는 어머니와 자녀들이 남아 있어서 처형소식을 듣고 의복으로 허장(虛葬)을 하였고,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묘비를 찬(撰)하여 뜻을 기렸다.
성리학적 논리에 충실하였고 서인 주류였던 척화파를 대표하여 죽었지만 조정은 청나라의 눈치만 볼 뿐 존숭(尊崇)을 꺼렸다. 심지어 포로로 잡혀가는 삼학사의 손을 잡고 가족과 후손들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였던 인조마저도 자신의 안위만 살필 뿐이었다. 인조가 취한 유일한 조처가 평택현(팽성읍)에 거주하고 있었던 노모에게 월름(월급)을 지급한 것이었다. 북벌을 준비하며 숭명반청의 기치를 높였던 효종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남인 영수 허적은 ‘나라에 이로운지 해로운지도 생각하지 않고 분위기에 휩쓸려 과격한 주장만 하였다’고 폄하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살아남은 아들과 후손들이 일찍 죽고 가세마저 기울면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효종 때 증직이 이뤄졌다. 현종 때에는 후손들에게 벼슬과 경제적 지원이 내려졌으며, 숙종 때에야 충정이라는 시호가 하사되고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효열정문이 내려졌다. 홍익한을 비롯한 삼학사가 크게 존숭되게 된 것은 송시열의 공이 컸다. 송시열은 홍익한의 묘비를 찬(撰)하였을 뿐 아니라 나중에 삼학사전을 지어 홍익한을 충절의 상징을 격상시켰다. 숙종13년에는 숭명반청의 대의를 지키고 군신의 의리를 드러낸 인물이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함정리에 포의사가 건립되었고 손자 홍우석에게는 증직의 은사가 내려졌다. 이 같은 송시열의 평가 덕에 영조 이후 200년 동안 홍익한은 충절의 상징처럼 떠받들어졌다.
조선후기 200년 넘는 세월동안 충렬의 상징으로 존숭되었던 홍익한은 현대사회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실존마저 불분명한 임팔급의 묘까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 홍익한의 사당 포의사를 복원하자는 후손들조차 없다. 그것은 충(忠)이라는 봉건적 이데올로기가 민주주의와 상충된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고, 척화(斥和)의 입장이 지나치게 사대적이고 보수적이라는 이유도 작용했을 것이다.
▲ 김해규 한광중학교 교사 평택지역사연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