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칙[雲門話墮(운문화타)/말에 떨어지다]
雲門 因 僧問, 光明寂照遍河沙. 一句未絶, 門遽曰, 豈不是張拙秀才語. 僧云, 是. 門云, 話墮也. 後來死心 拈云, 且道, 那裡是者僧
운문 인 승문 광명적조편하사 일구미절 문거왈 기불시장졸수재어 승운 시 문운 화타야 후래사심 점운 차도 나리시자승
話墮處.
화타야
운문 문언 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모래와 같은 세계에 광명이 고요히 두루 비침이여...”
하고 다음 귀절을 아직 채 읽기도 전에 운문 선사께서 급히 말하였다.
“아니 그것은 장졸수재의 말이 아니냐.”
선승이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운문 선사가 말하였다.
“말에 떨어졌느니라.”
후에 사심 선사가 이 일에 대하여 말하였다.
“일러라. 어디가 이 선승이 말에 떨어진 곳인가?”
[評唱]
無門曰, 若向者裡 見得 雲門用處孤危, 者僧因甚話墮, 堪與人天爲師. 若也未明, 自救 不了.
무문왈 약향자리 견득 운문용처고위 자승인심화타 감여인천위사 약야미명 자구 불료
만약 이에 대하여 홀로 높은 운문 선사의 용처와 이 선승이 무슨 말에 떨어졌는가를 보아 얻으면 충분히 인간과 천상의 스승이 되겠지만 만약 밝히지 못한다면 자신도 구하지 못하리라.
[頌]
頌曰. 急流垂釣, 貪餌者著, 口縫재開, 性命喪却.
송왈 급류수조 탐이자착 구봉재개 성명상각
급류에 낚시를 드리우니
먹이를 탐하는 놈들이 걸린다
입을 조금이라도 벌리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蛇足]
死心은 死心悟新선사를 말하며 장졸수재는 석상선사에게 서 得悟한 사람으로 '광명적조변화사 ~...'는 그의 득오후의 偈頌이다. 운문선사는 장졸수재의 偈를 다 읊기도 전에 잘못되었다며 말문을 막아버렸다. 말에 떨어진 곳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 절대평등지에서는 분별이 없음은 익히 아는바이나 체험하여 얻어보라.
孤危란 험준한 산꼭대기에 앉은 자세를 말하는데 백척간두에 선것과 같은 말로 진퇴유곡의 위험천만이지만 최고 정상의 자리로 굳건히 자리한 상태다. 운문의 용처와 배속을 알면 대도사요 모르면 자신도 구제못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마 이 승은 얕은 지식으로 운문선사와 법거량 할 요양 이었던 모양이다. 운문선사가 누군가... 되려 운문의 낚시에 걸렸으니.....
첫댓글 知로 智를 대할 수 없고 識으로 慧를 대할 수 없다. 자칫 말에 떨어지기 쉽다. 서로 의존적이되 독립적이다. 특히 독립적인 것은 선문답에서 질문과 답이 서로 논리적으로나 서술적으로 연관이 없는 것을 말한다. 부처가 뭐냐고 물으면 똥막대기인 간시궐(乾屎厥)이라 답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문답은 독립적인데 묻는자와 답하는 자는 서로 의존적이다. 이렇게 선의 세계는 의존과 독립이라는 상관관계 구조를 가지고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질문 속에 답이 들어있지 않고 답속에 질문이 들어 있지 않아 오로지 '이 뭤고'를 화두로 들고 참구하고 질문으로 가르침을 청하면 그 답이 할이나 방 또는 다른 질문으로 돌아온다. 분별하는 말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