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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류영모(柳永模, 1890-1981)의 통전적 영성(Holistic Spirituality):
기독교와 불교의 만남
류기종
다석(多夕) 류영모는 젊은 시절 한 평번함 과학도로 시작하여, 끊임없는 연구(진리탐구)와 스스로의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통해서 세계(인류) 정신문화의 원천인 유, 불, 선, 기(기독교)의 회통과 창조적 조화를 이룩해 낸 인물로서, 20세기의 탁월한 통섭의 사상가인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에 비견될만한 특유의 사상가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접한 기독교 신앙을 일생동안 자신의 삶의 근거로 견지 하면서도, 단순한 교리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동양의 전통 종교 사상들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서, 그리고 그것들의 창조적 만남과 상호조명을 통해서, 한층 더 깊은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심층적으로 이해한 참으로 독특한 사상가이다. 그런 점에서 다석은 20세기의 대표적 통전적(전 인류를 포괄하는) 사상가 혹은 영성가 3인 즉 A. N. Whitehead(과학/철학/종교/동서의 통섭), 류영모(유불선기의 통섭), Bede Griffiths(기불힌두이슬람의 통섭)중 하나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류영모와 연경반: 류영모는 서울 YMCA 총무였던 현동안의 초청으로 일종의 종교 강좌에 해당하는 “연경반” 강좌를 맞게 되었는데, 1928년에 시작하여 1963년 까지 35년간 지속되었다. 류영모는 이 연경반에서 기독교의 성경(특히 요한복음을 많이 강의함)뿐 아니라, 유불선의 경전들 즉 동양의 고전들도 강의하였으며, 따라서 그는 기독교를 그 자체에 의해서만 이해하려 하지 않고, 동양의 지혜를 통해서 이해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 류영모는 1959년에 영경반에서 <노자>를 강의했고 같은 해에 불교의 중요 경전인 <반야심경>을 강의하였다.
류영모의 실천적 삶: 류영모의 탁월한 점은 그가 창조적 통섭의 사상가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철저한 영성적 삶의 실천성에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그를 성인으로 존경했다. 그는 기독교와 불교의 진리를 삶으로 실천해 낸 도인 혹은 진인/성인(道人/眞人/聖人)이셨다. 다석은 기독교의 성경과 불교의 중요 경전들을 깊이 연구해본 결과 두 종교가 근본에 있어서 같은 진리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으로서의 하나님과 만유의 본래 모습으로서의 공(순야타)사상이다. 다석은 공(空) 사상에 기초해서 만물을 공으로 보고 하느님의 본성도 공으로 보았다. 그는 23세 때부터 빔(空)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늘 "빈탕한테"를 말한 것도 불교적이고, 해혼 후 하루 한 끼 먹은 것도 금욕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다. 모든 집착과 욕심을 끊고 자유로운 삶을 살려는 것은 불교의 해탈을 추구한 것이다. 날마다 무릎 꿇고 앉아서 생각과 명상에 잠긴 것은 불교의 선(禪)을 수행한 것이다,...사람 노릇을 하려면 불교를 알아야 한다고 했고 불교를 모르고는 이 세상을 바로 살 수 없다고도 했다. 다석은 자주 예수와 석가를 나란히 언급했다. 다석은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진리인 불성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보았고, 하느님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기독교와 불교를 연결시켰다. (박재순, 다석 유영모, 현암사, pp. 313-314). 그러나 다석은 불교의 경전에 우리 민족의 근원적 종교성인 하나님 혹은 한얼님이란 말이 없음을 아주 아쉽게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점에서 류영모는 단순히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나 만남의 차원을 넘어서, 두 종교를 자신의 삶으로 직접 실천한, 다시 말하면 기독교와 불교 두 종교의 창조적 일치를 실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기독교를 통해서 불교를 보고 불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그리스도와 불타가 따로 있지 않고 진리의 스승인 점에서 그 두 분은 둘이면서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둘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통찰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필자는 류영모의 이러한 통섭의 정신은 바로 우리 한국인의 고유 철학인 “한사상”(韓思想) 즉 일즉다(一卽多)의 궁극적 조화와 일치의 원리인 “한사상”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참조, 류기종, 기독교와 동양사상, 황소와 소나무, pp. 12-37)
탐진치 3독과 인간의 죄성: 류영모는 인간의 실존 이해에 있어서도 불교와 기독교의 양측의 입장을 함께 종합해서 본 듯하다. 즉 기독교는 인간의 현존재를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에 의한 원죄의 유전으로 인한 죄성이 만인에 보편적으로 깃드려 있다고 보는데 대해서 불교는 인간이해의 핵심으로서 탐(貪,탐욕), 진(瞋,분노/시기/질투/미움), 치(痴,무지/어리석음/치정-성적충동) 3독을 보편적 성질로 이해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탐진치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동물이나 생물들의 삶의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모습이다. 우리 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탐진치 3독의 내재성으로 보는 불교적 인간 이해는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언급한 인간의 죄성(롬1:29-31,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거림, 우매, 배약, 무정함, 무자비)에 대한 진술과 매우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참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 동물적 요소인 탐진치의 속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참조, 박영호 풀이, 다석 류영모 명상록, 두레, pp. 472 이하). 따라서 류영모는 우리 인간이 득도 해탈의 경지에 이른 참 자유인 즉 요8:32의 진리를 깨달아서 참 자유함을 얻은 “얼나” 곧 영적인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 3독을 제거하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류영모의 인간실존 이해에 있어서도 불교적 요소와 기독교적 요소가 함께 공재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없이 계시는 하나님: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ohne Gott, vor Gott)
류영모의 기독교와 불교의 친밀성(공통점) 이해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바로 불교의 공(空/빔/없음)과 기독교의 하나님(하느님/한님/한얼)을 그 근본(본질)에 있어서 매우 밀접한, 어떤 의미로는 동일한 내용(개념)으로 이해한 점이다. 류영모에 따르면 허공(空)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지칭한다. 즉 허공의 상징은 진선미 곧 순수하고/깨끗하고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허공을 알고 허공을 존중하여 맘에 품고 살 때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류영모는 공(空)을 참된 실재로 보는 불교의 공의 철학 곧 공의 신비와 의미를 깊이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석가는 “빔”(공)이 맘 안에, 맘이 “빔” 안에 있음을 깨달았고, 예수는 내가 아버지(하나님) 안에 아버지(하나님)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여, 석가의 공 이해와 예수의 하나님(아버지) 이해를 대비시키고 있다. 즉 류영모는 공 혹은 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신령한 허공을 하느님으로 이해했으며, 허공, 마음(얼) 혹은 영(靈), 또는 절대자가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인 허공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붓다(불교)의 공사상을 가장 잘 설명해 준 사람이 바로 2세기의 인도의 대철학자로서 대승불교의 이론체계 수립자며 또한 탁월한 신비가인 나가주나(Nagarjuna/龍樹)이다. 나가주나 철학의 독보적 연구가인 물티(T.R.V. Murti)는 <불교의 중심철학>이란 책에서 불교(붓다)의 무/공(Sunyata)이란 "있다 없다"는 상대적 개념을 무한히 초월하는 개념으로서, 정확하게 말하면 (필자 주, 예수가 정의내린 하나님인, 요4:24) "영"(靈/Pneuma/Spirit)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요컨대, 류영모가 이해한 불교의 핵심은 마음의 욕심(3독)을 뽑아내서 “빔”에 이르러 공색일여(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진리를 깨달음에서 오는 참 자유 곧 궁극적인 자유(해탈) 즉 니르바라에 이르는 것이며, 예수/기독교의 핵심은 "영"(Pneuma)이신 하나님을 올바로 깨닫고, 또한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있음을 올바로 깨달아서, 영적인 존재인 "얼나"로 거듭나서 영원한 생명 혹은 하늘나라가(니르바나)가 바로 내 안에 실현됨과 동시에 시공 즉 생과사 시간 영원의 분별을 초월하는 온전한 자유인이 됨에 있다. 즉 류영모에 따르면 두 종교의 목표는 바로 우리 인간이 "제나"에서 "얼나"로 태어나게 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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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록에 나타난 다석의 글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사람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으러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 노릇을 하러 나온 것이다.
죽음이란 없다. 그런데 죽음이 있는 것처럼 무서워한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인 생각을 내던져야 한다. 죽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죽기가 무서워 몸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이를 놓아 주려 하는 것이 하느님/예수의 말씀이다.(다석어록)
니르바나/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혹은 니르바나는 개체가 아니라 전체, 상대적 세계가 아니라 절대의 세계이다.
얼나(靈我, 法我)는 전체인 니르바나님(하느님)으로 개체란 없다. 유일절대의 존재/세계이기 때문이다. 전체 앞에 개체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전체의 한 부분이며 부속물이다. 따라서 여래/영아(로고스/신성)는 전체이기 때문에 개체가 아니다. 고로 여래가 "나"가 있다고 하면 "전체"(니르바나 혹은 얼나)가 있는 것이고, 범부가 "나"가 있다고 하면 (사멸될) 탐진치의 "제나"가 있는 것이다.
얼나로 거듭난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에 들어갔으므로 제나(몸나)의 죽음은 아무러치도 않다.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고 죽고 싶어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산다. 몸 삶이란 행복 불행을 불문하고 다 같이 꿈과 같은 것이다.
금강경: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all existences/beings(현상존재들) or forms/images(相,像) must be seen just like dreams, illusions, bubbles, shadows, and fogs and thunder-lights)
다석의 공의 이해: 다석은 불교의 공이란 없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있는 것 곧 진유(眞有/妙有) 즉 기독교의 영적 실재로서의 하나님 혹은 성령과 같이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몸은 어머니의 태에서 나왔다. 땅에서 나왔으니 땅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에서 온 몸인 얼나는 위로 간다. 하나님이 영원하면, 우리의 얼생명도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보내는 성령이 우리의 얼이다"(다석어록)
Gregory Palamus(14세기 동방교회 영성가: Spirit is the divine energy(Hindu, shaki).
Maximus Confessor: Every person is a part of God(a moira theou/신의 분깃)
붓다의 대각: 석가는 6년의 고행(명상/사색) 끝에(36세때). 2월 8일 새벽에 대각 했다.그는 우리 인간의 나고 죽음의 근본종자인 무명(無明/무지)의 뿌리가 끊어지면서 동쪽하늘에 샛별이 떠오르듯, 모든 진리(법)의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하였다. 따라서 붓다(Buddha)란 말은 깨달은 자(the Enlightened One)란 뜻이다.
깨달음의 내용: 붓다는 모든 고통과 불행의 근본원인은 "무명/무지"와 "집착/애욕"에서 온다는 사실, 즉 현상세계의 허상에 대한 무지와 그것에 대한 애욕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法/靈, Dharma/Pneuma-불성과 신성)과 얼나:
얼은 개체가 아니라, 전체이며, 무소부재며, 따라서 왔다 갔다 하는 상대적 존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불성 곧 얼나/신성/신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불성인 얼나는 없는 곳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나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 고 있을 뿐이다. 불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악업(karma)을 저지르는 것이다. 제나가 죽고 없어질 때, 철저히 회개/회심하고 새로 태어날 때 "얼나"가 탄생하게 된다.
얼나와 하나님의 아들
인생의 의미란 내가 깨달은 얼나로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것을 깨달으면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내 속에 벌써 영원한 생명(얼나)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얼나는 죽지 않는 생명이기에 이 몸은 아무 때나 죽어도 좋습니다. 밥 먹고 똥누고 하는 일을 얼마나 더 보자고 애쓰는 일은 참 우스운 일입니다. 얼나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것이지 참 나인 얼(얼나)은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이 몸이 퍽 쓰러져 못 일어나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껍데기가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진리(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는 영원한 것입니다.
류영모의 기도:
옳은 이를 뵙자고 참을 찾자고 반백년 동안 목이 말랐습니다.
누리를 하나 되게 하실 이가 과연 누구일까요 옳으신 그 어른이시니
우리 님이시여 꼭 한 가지만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 나란 맘을, 이 만물보다 거짓된 나란 맘을 뿌리채 뽑아주옵소서
그리 되오면 그 뿌리 뽑힌 속의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산물(생수)이
강이 되어 흐를 줄 믿습니다.
나오는 말: 류영모의 평생의 모토: 참을 찾고, 참을 만나고, 참을 갖고, 참으로 돌아가자! 이것은 온 인류를 참(진리/궁극적 실재/참사랑)이신 하나님(靈/pneuma) 께로 돌아가 그분 안에서 하나 되게 하는 예수의 궁극적 사랑과 평화와 놓임(해방)의 영성의 핵심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다석은 불교의 진리 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안에 머물러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다석은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를 태극 안의 음양의 관계처럼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이해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는 불교를 모르고는 기독교를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은 그가 불교의 진리를 깊이 연구하고 사색하고 또한 실천한 것은 결국 기독교 신앙의 진수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신앙의 심연에 잠기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14세기의 독일의 영성가며 신비 철학자인 니코라스 쿠자누스는 "반대의 일치"
(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원리를 말해 주었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는 쿠자누스가 말한 반대의 일치의 관계에 해당한다고 보여진다. 다석 류영모는 바로 기독교와 불교의 이 반대의 일치의 관계를 깊이 또는 정확히 파악한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