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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11 - 3월 혁명이 일어나 멘세비키등 부르주아지 공화국이 세워지다!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 편에서 참전했지만, 전쟁에서 독일군에 패배하자 황제에 대한
러시아 민중의 반감은 고조되었으니 1917년 2월, 대규모 소요 사태와 군대내 반란이 2월 혁명을
촉발시켰고 뒤이어 니콜라이 2세의 퇴위, 러시아 임시정부의 수립과 러시아 공화국 선포로 이어집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 혁명으로 전제 군주국 이었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하게 되는데, 카를 맑스의 이론에 의하면 선진 공업국가
에서 다음 단계로 혁명이 일어난다고 했으나 이론과 다르게 농업국이자 초기 공업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2월(3월) 혁명에서 승리한 여러 정당들은 모여서 러시아 공화국을 선포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했지만 볼셰비키
가 10월(11월) 혁명을 일으키면서...... 러시아 공화국 마저 무너뜨리고 혁명의 과실을 독점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온건한 비둘기파인 멘셰비키 등 반대파들이 무력 대항을 시작하면서 러시아 내전으로 이어졌으며
그 결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동유럽에 볼셰비키 독재가 퍼졌고 그보다 앞서
러시아 제국이 뛰어들었다가 1917년에는 패색이 짙었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러시아가 발을 빼게 됩니다.
한 사건을 2월 또는 3월 혁명이라고 함께 쓰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가 율리우스력을 공식
역법으로 사용해서 범세계적으로 쓰이던 그레고리력과 날짜가 달랐기 때문인데,
13일 차이라 10월 혁명은 10월 25일(율리우스력) 이지만 동시에 11월 7일(그레고리력) 입니다.
현재 두 표현 모두 인정되는데 보통은 전세계적으로 쓰는 그레고리력을 먼저 쓰고 당사국
인 러시아 달력의 날자는 괄호 안데 넣는데,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6월 모의고사의 사회탐구 세계사 시험에서...... 20번 문제의 주제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 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만나 프랑스군에 대해 협동작전을 하기로 했는데
서로 만나지 못하고 프랑스군에 패한 것은 만나기로 한 날자가 각자의 달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달랐던 것이고... 1차 대전 갈리폴리 전투에서도 해군과 육군의 시계가 달라 함포 사격후 아직 포연이
있을때 돌격해야 하는데.... 조금 지나 포연이 걷혔을 때 공격하다가 노출되어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19세기 중엽 이후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빠른 성장세를 보였으니, 1860년대부터 1900년까지 공업 생산량은
7배 이상 증가했는데 대규모 공장제 공업과 중공업 분야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으니 그 결과 러시아는
광물 채굴, 철강 생산, 운송, 제조 등의 면에서 서유럽에 뒤지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하는데 기어이 성공합니다.
1870년대 후반 오데사와 키예프의 남부동맹,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북부동맹 등의 정치조직이 연달아
탄생하였으니 이에 발맞추어 1870년대 부터 파업이 시작되어 널리 번졌으며 이는 더욱
과격해져 마침내 1885년 주에보에서 섬유노동자 주도하에 1만명 이상이 참여한 파업 사태가 터집니다.
이는 당시까지 일어난 파업 중에서 최대 규모였으니.... 처음에 정부는 이러한 노동
운동 자체를 무시했으나.... 결국 이에 굴복해 노동자 보호법이 마련되었고,
여자와 미성년자의 노동이 보호되고 노동 시간도 다소 줄어드는 모양새가 됩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여전히 편법을 저지르고 있었고 작업과 임금 상황도 개선되지 않자 러시아 노동자
들의 불만은 늘어날수밖에 없었고 로마노프 왕조에 대한 불신도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으니
이러한 가혹한 노동환경은 훗날 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러시아가 공산화되는 밑바탕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1840년대에 서유럽에서 러시아에 들어온 공산주의는 위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 지식인에게 많은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으니..... 1869년 미하일 바쿠닌이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자본주의를 분석한 경제이론으로 공산주의가 소개되면서 이와 같은 관심은 증폭됩니다.
또한 농업국이던 러시아가 점차 산업화되면서 농촌에서의 혁명을 주창한 인민주의에서 도시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가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오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같은 관심을 반영하듯 1883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주도하에 제네바에서 러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 조직인 '노동자 해방단' 이 결성되었으니,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이른바
'2단계 혁명론' 을 주창하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책을 러시아어로 번역, 보급합니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1883년 '블라고예프단' 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1885년 노동자들의 주도로 '토치키스 그룹', 1889년에는
'브루스네프단' 이 조직되었으니 이들은 노동자들의 계몽을 돕는 한편 공산주의를 선전했습니다.
위와 같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조직과 활동은 해외의 노동자 해방단과는 별개로 진행되었으나, 노동자
해방단이 번역한 공산주의 서적들과 출판물들이 러시아에 유입되면서 간접적인 유대관계를 맺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서적의 유입은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을 더욱 활성화시켜 1890년대에 이르면 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소규모 조직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분열되었던
농촌에서의 인민주의는 몰락하고 공산주의가 혁명의 이념으로 완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1895년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 을 결성하고 이에 대항하는 제스쳐를
적극적으로 취했는데 이 조직에는 블라디미르 레닌, 율리 마르토프, 크룹스카야
(레닌의 부인), 라첸코, 포트레소프 등 훗날 혁명을 이끌 지도자들이 핵심 멤버로 참가합니다.
그러나 투쟁 동맹은 12월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다른 지도자들과 체포되어 투옥된후
1900년까지 수감 생활을 하게 되며, 한편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는데 이들은 유형중이던 레닌을 팜플렛 편집자로, 제네바의 플레하노프를 해외 대표로 임명합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제1차 창당대회 직후 당국에 의해 해산되면서 사실상 창립선언만 한채 괴멸
되었지만 이 사건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다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선언문 중 한 구절입니다.
“유럽의 동쪽으로 갈수록 부르주아지는 정치 감각이 뒤떨어지고 나약해지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과되는 문화적, 정치적 임무는 막중해진다. 러시아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 자유의 획득이라는
임무를 어깨에 짊어지고 수행해야만 하며,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고, 인간에 의한 착취가 남아 있지않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이며 첫 걸음이다.”
레닌은 형기가 끝나고 출소하자마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마르토프, 플레하노프와
함께 혁명적 공산주의 신문 <이스크라> 를 창간했으나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 제2차 당대회에서는 분열이 일어납니다.
표면적인 원인은 <이스크라> 의 편집진을 누구로 구성할 것인가 였지만 실은 혁명노선의 차이
로 인한 대립이었으니, 레닌은 혁명은 오로지 노동자와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해서만
추진되어야 하며 무장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제정을 타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해 마르토프는 폭력적인 방법이 사용되어서는 안 되며 서유럽의 사회주의 정당처럼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소 (小) 부르주아도 정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의 안건은 투표에 부쳐졌고 레닌의 파벌은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 마르토프의 파벌은 소수파
라는 뜻의 '멘셰비키' 로 불리게 되었는데, 두 파벌은 한동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안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되었지만 1912년 프라하 대회에서 레닌은 멘셰비키와 완전히 결별하고 볼셰비키당을 만듭니다.
러시아 국내에서 20세기에 노동자들의 정치파업과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으니 1901년 2~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하르코프 등지에서 수만의 시위대가 '전제 타도' 의 기치를 내걸고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같은해 7~ 8월의 남러시아 노동자 총파업에는 20만 노동자가 참여해 황제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정부는 탄압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혁명에서 분리하려는 정책을 썼으니 노동자 사이에 간첩을 투입하거나 관제
노동조합을 설립하기도 했으며 '오흐라나' 라 불리는 비밀경찰을 운영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탄압이 심해
질수록 오히려 불붙을 뿐이었으니 1901년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 '사회혁명당 (SR)' 이 결성됩니다.
사회혁명당은 기관지 <혁명 러시아> 를 발간하여 전제정권에 대해 투쟁을 열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또 이들은 테러를 통해 전제정권과 투쟁할
것을 주장하며 당 전투단을 조직했고 반동적인 관료들을 암살하면서 차리즘에 저항합니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 무렵 유럽의 자유주의 흐름은 거세어져서 옆나라 독일 제국
이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마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하며
전제군주의 힘이 강하더라도 국민들을 달래기 위해 외견상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게 됩니다.
러일전쟁 때문에 인플레가 일어나고 수탈이 심해지자 도시의 임금 노동자들에게 치명타로 작용했으니, 불만을
품은 자유주의자들은 1905년, 전제정을 타파하고 인권, 노동권, 기본권의 개념이 담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고 농민과 노동자도 열악한 경제상황을 개선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황제의 총칼뿐이었으니, 농민과 노동자들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수백년간 러시아 국민들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있었던 황제 숭배사상이 무너져내렸으니, 전제정에
반하던 투쟁의 목적이 이 사건 이후 군주정을 아예 부정하고 황제의 퇴위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여름까지 농민들은 전 러시아의 1/5 를 장악했고 가을에는 절반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으니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은 전제정권의 기둥이었던 군대마저
흔들어 놓았으니 러일전쟁의 패전과 혁명 세력의 공작이 군대의 동요를 가속화 합니다.
결국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박중이던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되었는데, 비록 반란은 실패했으나 노동자와 군대의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이는 훗날 2월 혁명이 성공하는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됩니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더 이상의 혼란을 막고 군주정을 지키기 위해 1905년 10월 선언을 발표했으니,
입법권을 가진 두마(국회) 의 개설, 헌법 제정, 투표권 확대를 약속하였으며
언론·출판·결사·조합 결성의 자유·인권보장이 발표되었고 11월에는 두마 선거법이 공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선거법은 많은 국민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으니 여성은 물론 25세 미만,
군인, 학생, 종업원 50인 미만의 소기업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소규모 수공업자,
농업 노동자에게는 선거권이 없었으며 선거권이 주어진 사람들도 불평등이 심했습니다.
국민 전체를 지주, 도시민, 농민, 노동자의 네 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선거인을
선출했는데...... 선거인 1명을 선출하는 사람 수가 각각 달랐으니
지주의 1표는 도시민의 2표, 농민의 15표 그리고 노동자의 45표에 해당했습니다.
1906년에는 헌법이 공포되고 전제군주가 두마(하원)와 국가평의회(상원)의 협조를 얻어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가 선언되었지만, 황제가 행정과 군사, 외교 실권은 물론 법률 거부권, 비상시 입법권, 두마
해산권까지 장악하고 두마에서 통과된 법안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국가평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사이비 입헌 체제' 였는데.... 무엇보다 니콜라이 2세는 공식적으로 전제군주의 직함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총리를 맡았던 표트르 스톨리핀은 경제운용에 있어서 제법 유능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개혁
아래에서 농업 생산성은 크게 향상되었고 중산층들이 어느정도 육성되면서 경제는 차츰 안정을
찾았으니..... 블라디미르 레닌이 스톨리핀의 개혁 때문에 "혁명은 글렀다" 고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911년 스톨리핀은 암살당했고 니콜라이 2세도 긴장감을 풀면서 라스푸틴을 감싸고
돌던 와중에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는데.... 초기에는
슬라브 민족주의에 고무된 러시아 민중은 황제를 지지하며 독일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합니다.
그러나 독일제국은 예상외로 강력했으며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12만 5천 명의 러시아 제국군이
전사하면서 패퇴하고 1915년 초여름 러시아령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되었으며
벨로루시와 발트해 연안까지 독일 제국군이 진주하는등 러시아가 열세에 놓이는 상황에 이릅니다.
위에서 폴란드 라는 나라의 수도 "바르샤바를 러시아령" 이라고 표현한 것은 폴란드를 프로이센
(독일) 과 오스트리아 및 러시아가 3차례에 걸쳐 칼로 잘라 서로 나누어 먹었으니 폴란드
나라는 지도에서 사라졌고 바르샤바는 러시아가 지배했던 것인데.... 이때 프랑스로 망명한
음악가가 쇼팽이며, 이런 예에는 2차대전후 한반도를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에서 갈라 먹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이 모든 물자와 병력을 몰빵해 준비한 브루실로프 공세 까지 좋지않은 결과로 종결
되자 러시아에선 차츰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기 시작했으니, 1916년 말까지 러시아는
900만 병력을 투입했지만 무려 500만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니콜라이 2세
가 1915년 부터는 직접 군사작전을 통제했기 때문에 전투 패배는 짜르의 잘못으로 여겨집니다.
농촌의 남성들이 징집되어 농산물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공업 생산시설을 쥐어짜서 군수품 생산에 몰두
하자 철도 부품 부족이 심화되어 도시로 향하는 물류수송 능력이 저하되었고, 전쟁으로
해외로 부터의 해상 수송이 끊기자 영국산 석탄등 필수품도 부족해졌으며전선의 군대도
만성적인 보급 부족에 시달렸고, 독일의 압도적인 포병 화력에 두들겨 맞으면서 사기도 저하되었습니다.
게다가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을때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전비를 감당하지 못해 러시아 정부는 전비 충당
을 위해 막대한 루블을 찍어내니..... 화폐가치가 하락했으며 물가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게 됩니다.
특히 빵을 비롯한 생필품의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았으니 나중엔 거의 모든 국민이 전쟁을 혐오했고
반전 감정은 차리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으며, 노동운동도 다시 급격히 고조되어
1916년에 100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고 전쟁터에서도 병사들의 탈영도빈번해집니다.
1917년 들어서는 파업이 더욱 빈번해져 1월에 25만, 2월에는 40만의 노동자가 참여했고 이를 진압해야
할 군대까지 전쟁에 지치면서 진압을 거부하고 파업에 호의적으로 반응하기까지 했으니 1917년초
페트로그라드는 점점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니콜라이 2세와 정부는 상황을 수습할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 황실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지방 중소 귀족들은 1861년의 농노 해방으로 소유했던
토지를 매각한 뒤에 그 자본으로 서구적인 부르주아 사업가가 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쇠퇴하게 됩니다.
비록 스톨리핀이 뒤늦게 우크라이나와 남부 러시아에서 중산층 농부들을 육성하는 정책을 펴면서 황실의
견실한 지지자로 성장하기를 바랬지만, 1917년에는 중산층 농부들의 수는 충분하지 못했으며 또한
도시의 지식인 계층에서 이루어지던 담론도 반독재와 사회주의가 주류였기에 황실에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부터 페트로그라드 (상트 페테르부르크) 는 계속 혼란스러운
상황이오. 불행하게도, 군대 마저 여기에 합류해버렸소. - 니콜라이 2세
결국 1917년 3월 8일 (율리우스력 2월 23일) '세계 여성의 날' 을 맞아 비보르크의 방직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전제타도', '빵을 달라',
'전쟁 반대' 등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 이후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표기합니다..
25일에는 페트로그라드 전 도시에서 총파업이 발생해 군경과 시위대의 충격이 본격화되었고 127과 13일에는
볼린스키 연대등 진압을 명령받은 병사들이 혁명세력 편에 가담하니 러시아 제국은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3월 8일 비보로크 지구 여성 노동자들이 총파업 돌입. 시위대, 다리 건너 시내 중심부 진입 시도. 다리에서
경찰에 저지됐으나 일부는 얼어붙은 네바강을 건너 시 중심부 진출. 오후 5시, 본대도 다리 돌파해
넵스키대로 행진.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도 합류. 슬로건은 주로 '빵을 달라'. 파업 참가자는 13만이었다.
3월 9일 파업이 확대. 21만명이 파업에 참가하고 학생들도 개별 참가. 카자크 기병이 출동했음에도
넵스키 대로에서 시위는 계속되었으며 슬로건은 '빵' 이외에도 '전쟁 반대', '전제 타도' 까지 나타났다.
3월 10일 파업이 전 도시로 확대되어 총파업 시작. 30만명이 파업 참가. 신문도 안 나오고 전차도 운휴.
대학과 전문학교가 수업거부 돌입. 시위대와 군경의 충돌 격화. 노동자들도 무기 사용. 카자크 병사가
시위대와 함께 경찰을 습격해 경찰서장 살해. 군대 발포로 4명 사망. 슬로건은 '전제 타도' 였고 '노동자
소비에트 만세!' 도 등장. 비보로크의 전 경찰서가 파괴되고 경찰관 도망. 26일 새벽까지 100명 체포되었다.
3월 11일 일요일. 시위 재개. 군경이 시위대에 사격해 다수 사상. 파블롭스키 연대 4중대가 시위대 발포 저지
위해 넵스키 대로로 향함. 병영으로 돌아와 반란을 선언했으나 다른 연대 병사들에게 무장해제 당했다.
3월 12일 볼린스키 연대 교도대, 하사관 지휘하에 출동명령 거부하고 장교 살해후 반란선언. 근위보병 2개 연대와
공병 제6예비대대도 반란 가담. 병사들이 감옥과 구치소 해방시키고 정치범 3,358명 석방했고 재판소 불타다.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소총 40,000정, 권총 30,000정 탈취. 오후 3시 비보로크의 모스크바
연대, 저녁때 장갑차 부대, 밤에 시 남부 3개 연대가 반란 가담. 총 66,700명이
반란 가담.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사령관 하바로프 진압부대 편성해 출동했으나 도중 해체.
대중들의 열망으로 혁명을 완수할 기구가 시급히 조직되었으니 12일(27일) 저녁, 타브리다 궁전에서
공장과 군대에서 선출된 대표가 모여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 를 결성했으니 3월초 구성이 완료된 소비에트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합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사회혁명당이, 노동자들 사이에선 멘셰비키가 주로 선출되었으니, 농촌
출신인 병사들은 사회혁명당의 오랜 뿌리와 포괄적인 주장에 친근감을 느꼈고,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의 전투성 보다는 느슨하고 부담 없는 멘셰비키에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거나 아니면 1차대전에서 독일군에게 승리했다면
러시아에서는 거대한 민족주의 감정과 애국주의 열풍이 일어나.....
저런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짜르 군주제는 당분간 유지됐을 것으로 여겨 집니다?
짜르와 귀족들이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받아주지 못하고 경찰과 군대를 동원한 폭압적인
강경 진압만 고집하다가 결국 혁명을 막지 못했는데....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
한다는 것은 곧 짜르와 귀족등 지배층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불가능했다는?
조선이 망하지 않을 방법은 2가지가 있었으니 하나는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승리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조선은 속국으로 청나라의 보호 아래 임진왜란이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처럼 중국군의 출동으로 위기를
넘겻을 것이나, 동학농민군도 청나라군대에 진압을 요청했다가 일본군의 출동으로 청일전쟁이 벌어져 망합니다.
두 번째 방법은 왕과 사대부 양반들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니 1866년 병인양요때 전쟁 대신에 프랑스
와 국교를 수립하고 프랑스인 신부와 예수교도 1만여명을 처형한 것을 사죄, 보상하고 유교를
국교에서 폐하고 예수교를 받아들이며 과거제를 철폐하고 청년 100여명을 뽑아 프랑스에 유학 시킵니다.
반상의 차별을 없애고 천민제도를 철폐하며 양반들의 1등 재산인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반값에 농민들에게
분배하며 지주들은 공업 사업가로 변신하게 하고, 5백년 내려온 과부재혼금지제도를 폐하고 경찰과
법원을 설치하며 선거로 의회를 개설해 입헌군주제로 가며 유학에서 돌아온 청년들이 서구문명을 도입합니다.
농업국가에서 변신해 상공업을 장려해 국부를 늘리고 사대부 양반 자제들이 붓을 놓고 앞장서 군대에 지원하며,
서양의 군사력을 도입하는데 이 모든게 기득권을 없애는 것이라! 조선과 러시아 불가능했으니 일본과
전쟁도 못했을 뿐만아니라 조선군은 일본군과 공식 전투 조차 단 한차례도 하지 못하고 무느져 버린 것입니다.
1842년 하늘같던 상국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지니 조선은 청나라
관보를 보고, 베이징에 다녀온 사신이 거리가 평온하다는 말에 헌종 이하 대신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없었던 일이 되었으며, 권력투쟁에 들어가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되니 과거시험 치르기도 전에 합격자
명단이 작성되고.... 급제해도 뇌물을 바쳐야 지방관으로 나가는지라 가렴주구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킵니다.
일본은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네델란드 상인을 통해 싱가폴에서 발행된 영자신문을 구해 본데다가 중국 상인들을
통해 현지 사정을 파악하는등 정확한 실상을 알고는 서양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방책을 쇼군부터 말단
무사까지 진지하게 연구하고 대비책을 세우기 시작했으니 이게 한 나라는 망하고 다른 나라는 흥한 분기점 입니다.
3월 혁명의 성공은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퍼져 한 달도 되지 않아 전국의 모든 현과 군에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 가 구성되었으니..... 공업지역에서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혁명 수호를 위해 적위대를 조직했으며, 제국 정부의 판사는 파면되고 인민 판사를 뽑았습니다.
소비에트와 더불어 자본가와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탄생했으니 12일(27일) 밤, 두마는 임시
위원회를 선출하고 위원회에 수도의 질서확립을 요청했으며 또한 전선에 나가있던 니콜라이 2세에게
대표단을 파견해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에게 재위를 양위하고 퇴위할 것을 설득 합니다.
아들의 혈우병을 염려한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 남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양위할 것을
선언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사태의 위중함을 파악하고 재위 계승을 거부하면서 니콜라이 2세는 폐위
되었고 3월 17일 공화국이 선포되어 304년간 이어져온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 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집니다.
한편, 두마 임시위원회와 소비에트의 협정하에 구력 3월 2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니 입헌민주주의자
로서 젬스트보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리보프가 정부 수반이 되었으며 이후
'카데츠' 라고 불리는 입헌민주당과 진보당, 10월 17일 연합(10월당)이 임시정부의 세력을 잡게 됩니다.
사회주의자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유일하게 개인자격으로 입각했는데 신생 러시아 공화국에는
임시정부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의'이중 권력' 이 탄생하였으니, 소비에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들은 '2단계 혁명론' 에 따라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양도했고 임시정부도 소비에트 승인 없이는 중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할수 없었습니다.
3월 혁명의 성공으로 인한 러시아 민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고무적이었으니.... 300년 동안 민중을
억압했던 차리즘이 불과 2, 3주 사이에 사라졌고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만끽했는데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가르쳤고 학생들이 교수에게 강의를 주문합니다.
문화계도 혁명의 영향으로 배우들이 극장을 인수해 대본을 직접 선택하는가 하면 극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그동안 차리즘에 억눌린 민중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으니.... 훗날 케렌스키는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 “2월에서 10월 사이에 혁명은 밀물이 되어 우리는 그것을 중지시킬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민주노동당이 있었으니 볼셰비키 와 멘셰비키이고 인민주의는 사회혁명당
으로 좌파와 우파(트루도비키· 민중사회주의)로 나뉬고 자유주의로는 입헌민주당
과 진보당이 있었으며 자유보수주의로는 10월 17일 연합으로 좌파와 우파로 나윘습니다.
입헌민주당과 진보당은 10월당 좌파가 결성한 진보블록에 참여하지 않고 10월당 우파
(right-wingof octobrists) 라는 이름의 당파를 결성해 독자적으로 선거에
출마했으며 타협파, 또는 타협파 사회주의는 케렌스키와 임시정부를 지지한
멘셰비키 우파 및 사회혁명당 좌파를 제외한 나머지 사회혁명당을 이르는 말입니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민중들이 보기에 근본적인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았으니.... 1차 세계대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굶주림과 기아는 여전했으며 노동자는 여전히 착취당했고
토지는 지주들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도 여전했으니 이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였지만 문제를 해결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들 생각에 계속되는 전쟁은 임시정부의 자본가로서는 오히려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고 군의
위계 질서를 확립해 반란을 방지할수 있었으며,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고려해
서유럽과 연대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유리했으니, 결국 임시정부는 제국 정부가
협상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인정하고 '최후의 승리까지 전쟁을!' 이라는 슬로건을 내겁니다.
노동자들은 점차 미온적인 모습을 보이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에서 멀어졌고, 다시 그들
만의 군위원회와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농민위원회를 만들었으니.... 3개의 사회주의
정당 중에서도 가장 소수였던 “볼셰비키” 만이 이러한 도시인들의 불만을 간파했습니다.
그들은 임시정부와의 협력에 반대하고 전쟁반대와 평화조약 체결, 공산주의 혁명을 주창했는데,
스위스에서 망명중이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러시아 후방전선 교란을 목적으로 한 독일의
지원으로 4월 16일 귀국했으니, 레닌의 의중은 독일의 의도와는 정반대에 있었지만
독일이 제공한 열차에 탑승햇기에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레닌을 독일의 첩자라며 공격합니다.
이때 독일에서 레닌에게 봉인열차를 타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일반 전세 열차를
타고 독일에서 스웨덴, 러시아령 핀란드를 거쳐서 평범하게 귀국했는데.... 독일측에서는
열차 배차에서 우선권을 주고, 독일 국내에서 감시 인원을 붙이는 정도의 조치만 취했습니다.
그는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연설했으니.... “사랑하는 동지, 병사,
노동자 여러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여러분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
입니다. 강도들의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입니다. 머지않아 유럽의
자본주의는 무너질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 시작입니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만세!”
- 이렇게 전제 황제국 러시아 나라에서 공산주의 정부 수립이라는 세계사적 불행이 시작된 것 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