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주일학교 없는 교회가 늘고 있다
사람은 투자의 1순위다
(본고는 앞글에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펄젼과 무디의 투자 방식
19세기 기독교계에 영국과 미국에 양대 거성(巨星)이 있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와 미국의 무디 선생이다.
스펄젼 목사는 설교자의 황태자라고 할 만큼 설교를 잘 했다. 그의 설교는 복음적이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었다. 그의 설교에 엄청나게 많은 헌금들이 쏟아졌다. 스펄젼 목사는 그 돈으로 메트로폴리탄 터버너클이라는 예배당을 건축했다. 당시 5천명 회중들이 동시에 예배할 수 있는 예배당이었다. 그들 세대에는 그 예배당이 영국교회의 자랑이었고 부흥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예배당에만 들어가도 은혜를 받고 자긍심을 가졌다.
그러나 스펄젼도 떠나가고 영국신자들의 영성도 약화되면서 사람들은 교회 출입을 멀리했다. 교회는 사람의 숫자에 따라 절반으로 줄었다가 칸막이하는 교회가 되었다. 1세기가 지난 지금은 1백 명도 제대로 모이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 1백 명조차 노약자들로 국가에서 주는 연금 혜택으로 겨우 살아가는 옛날 교인들이다. 연금을 수령해서 드린 헌금으로 예배당 수리하고 전기세, 수도세 내다보면 남는 게 없다. 그들은 예배당 건물에 치여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 예배당 건물이 오히려 그들의 신앙생활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다.
무디 선생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얼마나 강하게 붙드셨는지 그가 설교하면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 무디 선생의 헌금함에도 헌금들이 몰렸다.
그 헌금으로 무엇을 했을까? 예배당을 지었을까? 무디 선생도 대형예배당에 대한 꿈과 야망이 있었을 것이다. 5천명이나 모이는 대형교회를 짓고 그 강단에서 설교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교회는 부흥된다는 것을 알았다.
무디는 대형 예배당을 짓는 대신 성경학교를 세웠다. 무디성경학교는 지난 1백 년 동안 수많은 목회자들을 배출했다.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 중 50%가 이 학교 출신이다. 그들은 세계 곳곳으로 나가서 선교하고 복음을 확장하고 있다.
스펄젼 목사나 무디 선생, 두 분은 모두 신령한 주의 종들이다. 능력이 있었고 한 시대를 쓰임 받았던 사역자들이다. 복음주의자 입장에서는 스펄젼이 더 복음주의였고 성경 중심의 목회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투자의 방법과 대상은 달랐다. 스펄젼 목사는 그 시대를 향해서 투자했고 건물에 투자했다. 그의 영향력은 영국과 그 시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무디는 다음세대를 위해서 투자했다. 건물보다는 사람에게 투자했다. 그분의 영향력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분은 후손들에게 대형예배당 보존이라는 무거운 짐을 맡기지 않았다. 그분의 사역은 지금도 무디 성경학교와 그곳에서 배출된 사람들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 갈 찌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예배당 건물보다 미래가 더 아름다운 교회
로마의 콜로세움은 당시 100만 명 인구에 5만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다. 누가 그런 아이디어를 냈을까? 인구수에 비해 그게 필요한 건축이며 투자일까?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생산적인 투자였을까? 로마제국은 다음세대를 바라보지 못했던 지도자들의 그릇된 영웅심, 이로 인한 부질없는 투자 때문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솔로몬 왕국의 멸망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성전을 짓는데 7년, 자기의 왕궁을 짓는데 13년을 소요했다(왕상 6:38, 7:1). 도시를 건설하는데 13년이 아니라 자신의 왕궁을 건축하는데 그만한 세월과 재정이 필요했을까? 그의 멸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건물 앞에 서서 건물을 바라볼 때는 그 크기를 보기 전에 먼저 그것이 무엇을 위한 건물인가, 누구를 위한 건물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로마의 콜로세움. 100만 인구에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거대한 건축물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내던졌던 물음이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 역시 거대한 예배당을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도자들의 개인적 영성이나 한 교회를 부흥시키는 지도력도 중요하지만 다음세대를 향하여 투자의 대상을 바르게 선택하는 미래의 눈은 더 중요하다. 지도자들의 영향력은 개인적 영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을 바르게 선택하는 혜안(慧眼)에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투자의 1순위를 바르게 선택해야 한다. 예배당을 짓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서 예배드릴 사람들을 키우고 교육시키는 일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너도 나도 앞 다투어 기도원을 짓는데 헌금을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기도원에서 ‘기도할 사람들’을 양성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그럼에도 교회들은 기도할 사람들이 아니라 기도원을 짓는 데만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조그만 나라에 정식으로 등록된 기도원의 숫자만 850개 된다고 한다. 비 등록의 숫자까지 합하면 아마 1,000개가 넘을 것이다(몇 년 전 통계이다).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제 몫을 감당하고는 있겠지만 그만한 숫자의 기도원이 필요할까?
(본지 발행인 강정훈 목사 ‘주일학교 새롭게 디자인하라’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생략) 9월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