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傳燈寺)
내가 맨 처음으로 강화도를 찾은 것은 4학년인 1974년도 3월 말경이다. 마침 졸업식 행사를 마치고 짧은 외박을 얻어 동기생 셋이서 무작정 강화도를 찾아갔다. 당시에는 신촌 부근에 버스정류장이 있어서 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사복이 아닌 생도 제복 차림인지라 매사에 조심하면서 초행길에 도착하니 어스름한 초저녁이었다.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인근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는데 맥주 3병을 사서 여관방에서 새우깡을 안주로 나누어 마시던 기억이 난다. 졸업식 행사를 준비한다고 모두 기운이 빠져있는 상태라 어떻게 하면 숙면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누구 하나 만류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의기가 투합하였다.
다음날 도착한 곳이 전등사(傳燈寺)였다. 이제 막 봄기운이 솟아나는 시기라 모든 나무와 이름 모를 화초들이 마음껏 새 생명의 환희를 전해주고 있었다. 경내의 여기저기를 돌아보며 약수를 마시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일행에게 말을 걸어오면서 친절하게 사찰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그는 주지 스님으로 인상이 매우 후덕하고 학식이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마치 유명한 국사(國師)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점심 공양을 함께 했는데 알고 보니 이 사찰에 종종 다니던 유모 동기생과 매우 절친하여 아끼는 사이였다. 당시 불교회장을 하던 동기생이 이곳에 연을 맺어 부주지 스님이란 별칭을 받았다고 하였다.
당시 전혀 강화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과거 고려 시대에 원나라의 침공을 피해 개성에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저항했다는 역사적 사실뿐 이었다. 다만 어렴풋이 전등사는 기억하고 있었는데 병인양요 때에 양헌수(梁憲洙) 장군이 결사 항전하여 외세를 물리쳤다는 ‘애국 항쟁의 땅’이라는 사실 정도였다.
그런데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천년 고찰로 대웅보전, 약사전, 전등사 범종, 대웅전 삼존불, 명부전 시왕상 등의 보물과 정족산 사고, 양헌수 장군 전적비, 강화 의병 전투지와 목수와 주막집 여주인과의 사연이 깃든 대웅전 건물의 나부상(裸婦像)이 있다. 동시에 정족산을 에워싼 주변의 자연 풍광은 매우 빼어나 문화 관광과 힐링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사찰 뒤편으로 올라가 서해를 보고, 잘 다듬어진 산책길을 돌아보면 아늑한 전등사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강화도는 대몽항쟁의 주 무대였으며, 서양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격전지이다. 특히 전등사가 위치한 정족산성은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가 있던 곳이다. 장사각(藏史閣)에는 왕조실록이, 선원보각(璿源寶閣)에는 왕실의 족보와 의궤 등이 보관되었던 장소다.
조선 전기에는 왕조실록을 한양, 충주, 성주, 전주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란 시에 전주사고 외에는 소실되었다. 임란 이후 한양에 춘추관을 두고,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강화 마니산에 실록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시에 마니산의 사고가 파괴되어 이후에 정족산 사고를 추가한 것이다. 여기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현재는 서울대학교의 규장각에 보존되고 있다. 실록은 조선의 제1대 왕 태조로부터 제25대 왕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로 1997년에는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다행히 연구용으로 영인본이 출간되어 선친이 수집한 조선왕조실록을 잘 보관하고 있다.
1866년 프랑스 함대는 당시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강화도를 점령, 강화읍성과 외규장각을 불태웠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547명을 이끌고 정족산성과 전등사를 주둔지로 정하고, 이곳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가까스로 정족산 사고를 지키게 된 것이다. 그런데 관군 외에 승려와 농민들도 관군과 함께 싸웠다. 화려하고 웅장한 대웅전(보물 178호) 불상 옆의 낡은 벽과 기둥을 보면 여기저기 먹으로 써 놓은 글씨들이 보인다. 이는 관광객의 낙서가 아니라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강화를 지키던 병사들이 남긴 전투 승리와 안위를 기원하는 기도문과 이름들이다. 이후 승리한 양헌수장군을 기리는 승전비가 세워진 것이다.
이때 프랑스는 강화도에서 퇴각하면서 조선왕조 왕실 의궤를 약탈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이 책들을 가져갈 때, 그냥 가져간 것이 아니라 나머지 4천여 책을 모두 외규장각 건물과 함께 방화하고 갔다. 당시 프랑스의 「로즈」제독이 해군 장관에게 강화도에서 노획한 보고서에 의하면 의궤 340권을 비롯하여 지도, 족자, 대리석 판, 갑옷, 은괴 등이 기록되어 있다. 왕실 전통 예식들을 기록한 이 의궤들은 그 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채 잊혀 있었다.
그런데 강화도에서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았던 외규장각 도서를 처음으로 발견한 분은 「박병선」 박사(1923~2011)다. 박 여사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임시 사서로 근무하던 1975년이었다. 그녀는 10년 넘게 도서관, 박물관 등을 뒤진 끝에 의궤를 국립도서관 베르사이유 별관 창고에서 찾아낸 것이다. 박 여사가 찾아낸 것은 의궤도서 297권이었다. 이 도서들은 모두 국왕이 친히 열람하기 위해 제작된 어람용(御覽用)으로서 도서의 표지편철과 종이의 재질 그리고 그림에 사용된 물감이 뛰어나 일반 의궤와 크게 구별되었다. 그중에서 30권은 한국에 전혀 복본이 존재하지 않는 유일본으로서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전주에서 태어나 2, 3대 국회의원과 9대 전북 도지사를 역임한 분이었다. 한국 여성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 되었고, 그 후 프랑스에 남아 평생 직지(直指)와 외규장각 도서의 연구에 매진하였다. 그녀는 직지가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앞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임을 밝혔다.
당시 국력이 미약한 우리로서는 소중한 문화재를 반환할 교섭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박 여사가 1989년 외규장각 의궤에 대한 해제(解題) 연구작업을 다 마치고 출간을 추진하면서 한국 내 관련 기관이 이를 출판해 주도록 청원하였다. 이때 서울대 규장각 도서 관리 실장이 「이태진」 교수(1학년 시 역사 교수)였다. 이 교수는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 교섭을 추진해 줄 것을 정부에 요청하여 1991년도에 프랑스에 공식 교섭을 한 것이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어려운 협상을 통해 145년 만인 2011년에 고국 땅으로 반환이 된 것이다.
이를 실질적으로 추진했던 사람은 고향 친구인 「박흥신」 대사다.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를 바탕으로 국립행정학교(ENA) 유학을 통해 구축된 프랑스 정관계의 주요 ENA 출신 인사들과의 인간적 유대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성사를 이끌었다. 국립행정학교(ENA)를 마치면 프랑스에서는 최고위급 관리로 등용되는 최상의 엘리트 코스이다. 박 대사는 이들 ENA 출신 인사들을 설득하여 「사르코지」 대통령이 G-20 회의에 참석하는 계기에 한불 양국의 오랜 현안을 해결하는 용기 있는 결단을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과정을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이라는 책으로 남겨 공직자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처럼 애국은 다방면으로 이루어진다. 민주사회의 최대 강점은 다양성의 확보에 있다. 다방면으로 진짜 알찬 지식을 갖춘 인재양성이 이루어져야만 제대로 국익을 보호할 수 있다. 조국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신 박 여사는 평생의 연구 성과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는 쾌거를 남기고, 지금은 대전 국립 현충원에 잠들어 계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박 대사와 같은 전문 외교관은 하루아침에 양성되지 않는다. 사명감이 투철한 우수 인재를 발탁, 충분한 투자로 장기간 현지에서 교육을 받고 한 분야에서 활용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우리가 말로는 한미 동맹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하지만 미국의 정계 핵심 인물들과 직접 담판하고 교류하는 인간적인 신뢰의 관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세계 각국에 인재를 골고루 배치하여 완전히 현지화를 시키는 장기 투자가 필요한 이유를 인식해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교력이 가장 월등하고 유효한 국력의 밑바탕임을 망각해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지금 우리에게는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사회가 중단없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계층에서 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탄생해야 한다. 이들을 발탁하여 아낌없이 성원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가, 경제가, 과학자와 문화 예술가 등 각 분야에서 창조적 천재가 등장해 새로운 미래의 역동적인 비전을 제시하여 민족의 번영과 자부심을 고양(高揚)시키게 된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염원인 통일을 달성하고 세계 무대에 우뚝 선 자랑스러운 나라가 된다.
결국, 인재양성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인재의 발탁에 노력해야 한다. 하물며 국가를 대표하는 공직자는 그 누구보다도 능력과 지식을 겸비해야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국민이 사소한 각 개인의 이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가 대립하면서, 무엇이 후대를 위한 길인지 외면하여 도도한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서서히 나락(奈落)으로 떨어질 것이다. 호국의 사찰로 유서 깊은 전등사의 경내를 산책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한겨울 속에서도 새 생명을 깨우는 봄의 기운에 한껏 취하여 돌아오니 매우 상쾌한 하루였다. 다만 코로나 여파로 약수 한 잔을 마시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머지않아 진달래가 핏빛 울음을 토해내는 봄이 오면 강화도의 백련사와 고려산을 들리면서 다시 찾아오마는 다짐을 하였다. 동시에 하루를 함께해준 벗에게도 너무나 고마운 시간이었다. (2022. 2.12 작성/ 3.9 발표)
첫댓글 강화도, 이를 통해 우리 역사와 애국활동을 되새겨 보네요.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우리들이 가다듬고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많은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남당친구의 전등사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네요.저도 전등사를 두번 가봤는데 오래되어 특별히 기억나는게 없는데, 잘 상기시켜 주셨네요.프랑스 함대와의 전쟁에서 양헌수장군을 도와싸운 승려와 농민들이 참여 하였음은 요즘 우크라이나의 해외에서 돌아와 싸우는 젊은이들을 생각할 때,본받을만 일이네요. '박병선박사님'과 '이태진교수님' ,'박홍신대사님'으로 이어지는 연구와 노력,헌신 덕분에
"외교장각 의궤의 귀환"이 이루어졌음은이 분들을 공로를 가슴깊이 새겨야 되겠네요.'소수의 창조적 천재'가 과학기술분야에서는 특히중요함을 생각할 때,오명선배님께서 체신부 장.차관시절에 전국토에 광케이블 깔아 IT분야를 세계 최고의 금자탑을 쌓는데 초석이 되었음은,그 분의 겸손함과 자애로운 인품과 더불어 찬연히 빛날 것입니다.깊이가 있는 좋은 내용의 글,감사해요.
강화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두 개: 개국과 호국. 마니산과 고려산이 있고 전등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차례 강화도를 방문한 적이 있어 그 일대는 눈에 선합니다. 고향 친구 한 분이 지금 그쪽에서 살고 있어 관심이 많이 가기도 합니다.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전문인재 양성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근자에 펼쳐지고 있는 정부의 교육정책은 그 반대로 가고 있어 여간 실망스럽지 않습니다. 개인의 무한한 발전을 저해하는 교육정책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남당이 존경하는 박사, 대사, 학자가 태어나 나라의 대들보가 되리라. 전등사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역사의 숨결과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곳과 많은 인연을 가지고 계시군요.
강화도의 마니산, 전등사 등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지였지만, 가보지 못 한 곳입니다. 중대장시절 호국장교단 일원으로 단체로 잠깐 들렀던 일이 있기는 한데요.
무모했지만 나라를 지키고 우리의 수구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피 흘려 싸웠던 아픈 역사의 현장, 미국의 외교관 등이 한국에 부임을 하면 가장 처음으로 방문하는 상징적인 장소가 양화진과 신미양요 격전의 현장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역사를 상기하고 오늘을 사는 교육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 또한 부도덕한 야만 강대국의 침략을 기억하고 세계 정세에 어둡기만 하고 만용으로 가득찼던 우리의 무능을 되돌아보는 역사의 현장으로 강화도를 보듬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봄이 무르익으면 아름다운 풍경도 돌아볼겸 강화도 한번 꼭 가 볼 참입니다~
사실 나는 오늘 친구랑 전등사ᆞ석모도를 갈여고
했는데 친구의 컨디션이 안좋아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병인양요때 양헌수 장군등 승병ᆞ농
민등이 가담했는데 거국적인 의병
활동은 임진왜란부터 였습니다.
고구려와 고려때도 부분적인 의병
활동은 있었고요
경찰대 폐지, 서울대 폐지 등등을 주장하면서 포퓰리즘에 따라 각 분야 인재양성 아니라 우중화를 지향하려던 그간의 정책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사회 각 분야에 인재가 골고루 분포되어 그 집단을 앞에서 선도하여야만 선진강국이 될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