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요한 14,18; 16,22참조)
부활 제 6 주간 목요일인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독서와 복음 모두 공통되게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들의 완고한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우선 이번 주간 계속되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기 전 제자들에게 전하시는 예수님의 세 번째 고별사로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몰이해를 넘어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들의 솔직한 마음이 제자들끼리 나누는 다음의 말로 잘 표현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저희들끼리 이렇게 수군거립니다.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하고 말하였다.” (요한 16,18)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건네시는 그 절절하고도 애절한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자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어디를 가시는건지 그런데 왜 갑자기 그렇게 가시는지 가면 언제쯤 오시는지 제자들은 그저 예수님이 어디를 가시나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을 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 안에 담겨있는 십자가상 죽음과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오랜 시간을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이었지만 정작 제자들의 눈과 귀, 그리고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께 대하여 아직 완전히 열려 있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는커녕 예수님의 말씀의 문자적 의미조차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편 오늘 독서의 사도행전의 말씀 역시 오늘 복음과 같은 의미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코린토인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로 전도 여행을 떠난 바오로는 그곳에서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열렬히 선포합니다. 그러나 코린토인들은 바오로가 전하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이에 반대하며 심지어 바오로를 모독하는 말을 퍼붓기에 이릅니다. 이들 역시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에게 그리고 복음의 말씀에 아직 그들의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의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오늘 말씀이 전하는 공통적인 모습, 곧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에게 들려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열려져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귀가 닫혀 버려 자신의 두 귀로 생생히 듣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 그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과연 지금 이 순간, 내 귀로 듣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게 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선포된다면 그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이 같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신앙의 실존적 질문을 낳습니다. 그 질문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만 닫힌 우리의 눈과 귀가 열려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복음환호송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요한 14,18; 16,22 참조)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제자들이 답답했지만, 아니 답답함을 넘어 안타깝고 마음 시리게 걱정되고 불안하였지만 자신의 그 같은 모든 마음을 하느님 아버지께 맡겨드립니다. 예수님은 비록 그들 곁을 떠나시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진리의 영이 성령을 보내주시어 그들과 언제나 함께 하며 그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아버지의 곁으로 가 그들이 함께 할 곳을 마련하고 그들과 아버지와 함께 언제나 함께 할 것을 약속해 주시면서 오늘 복음의 말미에 제자들을 향한 기쁨과 희망의 약속을 건네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또한 그분은 슬퍼하며 애통해하는 우리들을 그저 지켜만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영성체송의 말씀처럼 언제나,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은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힘든 하느님의 말씀, 그 분의 뜻이라 할지라도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하느님을 믿는 순수한 믿음, 곧 하느님의 큰 뜻을 인간의 이해와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가지려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생겨날 때, 비로소 이해하기 힘든 그리고 받아들이기 힘든 하느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 믿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뀌고 우리 눈에 맺혀진 모든 눈물은 기쁨의 눈물로 변화될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며,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구원받고 기쁨을 선물로 얻게 된다는 진리를 이야기하는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그 믿음으로 여러분 모두가 구원을 얻어 언제나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아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요한 14,18; 16,22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