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와 비빔밥, 그리고 '조연'
새로 가정을 꾸려 한참 신혼인 연구실의 막내 연구원이 무엇인가 잔뜩 싸들고 연구실에 들어섭니다.
"오늘 점심은 제가 비빔밥을 준비했어요. 사실 미나리와 삼겹살을 함께 구워먹고 싶었는데, 기름 냄새때문에...."
그 친구의 이런 '선심'은 재미교포 정이삭 감독이 만든 가족의 소중함과 이민자의 삶을 다룬 따뜻한 영화 <미나리>의 윤여정씨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함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한국인 배우가 수상할 수 있다는 것이...."
저 또한 윤여정씨를 좋아하고, 그의 뭔가 투박하고 밋밋하지만 그런 연기를 통해 뭔가 분명한 메시지를 늘 담고 있기에 팬까지는 아니어도 늘 친숙한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전문가들이 바라보는 눈은 정확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서대문에 경찰청 자리주변에는 예전에 아주 넓은 미나리 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동네의 이름이 미근동인데, '미'는 삼수변에 아름다울 미자를 쓰고, 근(芹)이 미나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신촌쪽으로 난 큰 길가에 한 초등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는 역사가 100년이 넘는 '미동초등학교'입니다. 이 학교의 교가는 이렇습니다.
"추위를 물리치고 이른 봄철에
새싹이 돋아나는 사철 미나리
그옛날 미나리꽃 살던 동네에
세워진 우리학교 우리 미동초등학교"
별걸 다 기억하죠. 제가 이 학교 출신이거든요....
미나리는 향이 강한 다년생 식물로 탄력이 있고, 다소 거칠기에 생으로 먹거나 메인 요리에 곁들여 먹는다고 합니다. 유부주머니나 소고기 계란지단을 돌돌 말아서 초고추장에 찍어먹기도 하는데 이때 묶는 끈 역할을 하는 것이 미나리입니다. 고추장보다 더 강한 향이 음식의 맛을 든든히 받쳐주어 궁중요리에도 미나리가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생미나리를 삼겹살에 싸먹는 맛은 다 아시겠지만 정말 일품입니다.
미나리는 벌레와 질병에 저항력이 강하고, 생명력이 끈질길 뿐 아니라 물을 정화하기도 한답니다. 영화 <미나리>에서 조연 윤여정씨의 "미나리는 어디에서나 잘 자라"라는 대사처럼 스스로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을 더 감칠맛나고, 두드러지게 하는 훌륭한 보조를 하는 식물임에는 분명합니다.
더우기 미나리는 각종 비타민과 철분, 칼슘, 인이 다량함유되어 있고 섬유질과 무기질이 풍부해서 콜레스테롤을 낮춰주며, 열을 내리고 피를 맑게 해주고, 머리를 상쾌하게 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성균관 주변에 미나리를 다량 재배 했기에 성균관을 '근궁'이라고 불렸다고도 합니다. 아마 성균관에서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들에게 미나리가 꼭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한 제자의 '넉넉한 마음'으로 시작된 '미나리'의 이야기와 푸짐한 봄나물로 제공된 비빔밥을 먹으며, 사마천의 열전 중 포숙아를 떠올린 것은 포숙아의 삶이 미나리와 너무나 닯았기 때문입니다.
<관안열전>에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로 지낸 이 두 사람은 함께 동업을 하여 사업을 하기도 하고, 병사로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고, 후에는 왕실에서 각기 서로 다른 왕자들을 섬기는 관직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이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쓰면서 누구에게 더 초점을 두고 있는지 면밀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업을 할때도 늘 관중은 잔머리를 써서 더 많은 이익을 챙겼지만 포숙아는 이를 알고도 돈이 더 필요한 그를 이해해줍니다. 관중의 형편없는 행동에 대해 늘 그를 이해하고 두둔하였으며, 무엇보다 그의 진가를 잘 알아 나라의 중직에 천거하는 멋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마천은 이러한 점을 아주 면밀하게 기술하고 있고, 평에서도 그의 가치를 인정해줍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서는, 그리고 현실에서는 늘 관중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관중이 누린 부귀와 권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최고권력자조차 그를 '중보'라고 부르며 마치 부친을 대하듯 했습니다.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관중은 '명재상'의 한 명으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중이 빛나는 것에 비례하여 늘 포숙아는 감춰져 있었습니다. 철저한 조연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는 늘 주연을 하고 싶어하고, 주인공에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죠. 조연이나 그 외에 극을 구성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단역들은 애써 무시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조연이나 단역을 배정받으면 실망스럽고 화가나고 힘이빠지죠.
하지만 우리는 잘 압니다. 주연이 빛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조연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중국역사에 관중이 받고 있는 조명과 관심은 '포숙아'라는 사실상 그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한참 해외 출장을 다니던 시절, 어느 날 국적기에서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해도 전 비빔밥은 시간이 부족한 머슴들이 큰 양푼에 반찬을 이것저것 넣어 비벼먹는 음식으로 알았습니다.
'기내식에 비빔밥이 뭐람?'
그런데 오늘날의 현실을 생각해보십시오. 전 세계의 미식가들이 한국의 '비빔밥'에 극찬을 보내고 있고, 주요 도시에는 매우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비빔밥을 팔고 있습니다.
독립된 요리보다 보조자로 메인을 빛나게 하는 역할의 미나리와 제자가 정성껏 준비한 비빔밥에 얹혀진 고만고만한 다양한 채소들이 서로 어우러져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마치 포숙아와 같이 주연 관중을 더 빛나게 하는 멋진 조연과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윤여정씨가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꼭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