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한남 금북정맥(속리산 천황봉) 2011년 9월 22일, 1,361회 산행
구간 ; 대목리 천황사 주차장-천황봉(1,057.7m)-667.3봉-638봉-불목이재-갈목재(505도로, 390m) (13,6km, 5시간 50분)
윗대목리에 9시 50분 출발 천황봉에 11시 20분 도착,
중간에 점심먹고 갈목재에 3시 40분 도착, (5시간 50분)
산행지(대목리)를 향해 버스로 이동하던중 바라보이는 전경,
산을 감싼 구름이 평화로워 보이기만 한 시골풍경,
비룡지라고도 하는 삼가저수지 곁으로 오른다,(차에서 이동중 포착)
조자용선생 추모비
세칭 '도깨비 할아버지'로 불리던故 대갈(大葛) 조자용(趙子庸) 박사
그를 따르며 그와 함께 공부했던 한국민화학회 회원 1백여 명은
지난 13~14일 선생을 기리며 보은문화원에서 학술세미나를 가진데 이어
속리산 천왕봉 자락 대목리, 양지바른 곳에 묻힌 선생의 유택에서
10주기를 맞아 조자용 박사 추모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고건축을 전공한 장현석 청주문화원장이 설계를 하고
시인 홍강리 씨가 비문을 지었으며 서예가 김동연 씨가 글씨를 썼다.
대한 강토 큰 인물로 황주 땅에 태어나
갈매기 빛 꿈을 이뤄 하버드대 학위 받고
조선얼 기리고자 민화세상 섭렵하며
자강불식 연마하여 건축사 새로 쓰니
용솟는 그 기개가 온 누리에 가득차매
선생께서 남긴 업적 후세에 빛이 될 터
생전에 못다 이룬 청사진 가슴 품고
송덕찬사 뒤로한 채 천왕봉 신선됐네.
(추모비문 전문)
추모비문에서 보듯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하버드대에서 공학박사(전공, 구조역학) 학위를 받은 고 조자용 박사는 우리나라 근·현대 건축의 선구자였으나 만년에 이르러 전공과 달리 보은 속리산 자락서 민화와 도깨비에 심취하여
에밀레 박물관을 짓고 우리의 얼과 문화를 연구하다 지난 2000년 1월30일,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데에다 타계한 날이 세밑이어서 다소 쓸쓸한 장례식이 됐다.
대구 청구대 교수로 있으면서 계성고교의 다릿발 없는 강당을 짓고 경북대 본관건물을 설계하는 등
건축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가 돌연 속리산 자락으로 숨어든 것은 무슨 이유일까.
조 박사는 개인적으로는 속리산과 인연이 없다.
일가붙이가 사는 곳도 아니요, 그리운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도 아니다.
다만 지병 치료차 속리산을 찾았을 때,
웅장한 산 모양과 삼신(三神)이 내려올 듯한 천왕봉의 기세에 반해 여기서 그냥 눌러 살았다.
정이품송이 고고하게 서 있는 속리산 초입에 에밀레 박물관과 초막을 짓고 민화와 도깨비 연구에 몰두하던 그였다.
에밀레 박물관은민화와 도깨비 기와로 가득 찼다.
'까치 호랑이' 등 민화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 에밀레 박물관이 가장 많고 진귀한 작품을 소장했다.
한번은 전라도 어디서 까치 호랑이 병풍이 나왔는데 조 박사는 달라는 대로 다 주고 너무 기뻐
손목에 차고 있던 롤렉스 시계와 타고 간 지프를 덤으로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이야기는 골동품업계의 전설로 남아있다.
그는 학문 연구에만 매진한 것이 아니라 개천절인 10월3일을 택하여 고대의 국중대회(國中大會)를 재현했다.
이를테면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같은 제천의식을 행한 것이다.
마당을 중심으로 초막을 짓고 참석자들이 술 마시며 밤새도록 노는 국중대회를 매년 열어왔다.
춤춰, 춤춰... 하며 놀기를 권유하는데
난 춤 못춰요. 하고 슬쩍 꽁무니를 빼는 사람이 있으면
이봐 도깨비가 춤 레슨을 받아서 춤을 추느냐?하며
어스름 달빛을 조명 삼아 너울너울 막춤을 추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월제천(十月祭天)하고,
남녀철야음주가무(男女徹夜飮酒歌舞)를 했다는 옛 기록대로 열린
신명나는 도깨비 한마당 축제에는 인간 문화재 김금화의 작두거리가 펼쳐졌고,
김덕수 사물놀이 패나 심지어 제주도 오돌또기 패까지 초청되었다.
이 전통놀이 마당에는 우리나라사람 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다수 참석하였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에,
조 박사의 외국인 친구에 도깨비 한마당은 국경을 초월한 놀이마당으로 언제나 초만원을 이뤘다.
더러 탐방객이 찾아오면
청자대접에다 막걸리를 따라 벌컥벌컥 마시던 서민적 학자였다.
큰 키에 백발과 흰 수염을 휘날리며 겅중겅중 걷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도깨비 할아버지다.
한 번은 충북대 박물관에 느티나무를 거꾸로 세워 만든 도깨비 장승을 기증했다.
때가 윤달이라 나무를 거꾸로 세워 놓아도 아무 탈이 없다는 것이다.
그 도깨비 장승은
지금도 구 박물관(전자계산소)앞에서 아침저녁으로 학생들과 인사를 나눈다.
민화와 도깨비, 그리고 삼신(三神)사상에 심취했던 그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에밀레박물관을 꽉 채웠던 민화 등도 어디론지 거의 사라지고 도깨비 놀이마당은 폐허로 변했다.
아무래도 보은군에서 거리가 가까우니 고 조 박사의 유지를 이어나갔으면 한다.
[출처] 도깨비 할아버지 故 조자용 박사|작성자 보은군속리산아침지기
지도에는 보은군 외속리면 대목리인데 (윗대목골) 도화리란 마을 표지석?
속리산 천왕봉이 맞는지 천황봉인지는 잘 모르지만 정상까지 2,7km의 이정표를 보고 출발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해바라기꽃에 누가되지는 않을런지!
세실님 많이 이뻐진것 같습니다.
올라가는길 왼쪽에 있는 무슨 신단?
천하대장군 은 알겠는데 지하여장군이란 말인가? 글자가 이상해서리.....
이렇게 잘 정비된 길이지만 조금 오르자 폭우에 길의 흔적이 없어지기도 하여
예상외로 다른길을 따라 오르기도 했다.
오르는길 만수동 넘어 형제봉(809,3m)쪽 산너울,
오르다 뒤돌아본 삼가저수지와 구병산(876,5m)의 모습.
천황봉 정상석이 한동안 없어졌다가 다시 세운 천왕봉 정상석,
산경표엔 천황봉으로 되어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 있는 1등 삼각점은 변함이 없구나.
오랜만에 만나는 그리운 얼굴들입니다.
날씨가 좋으니 멀리 문장대(1,054m)도 잘 보입니다.
윗 사진, 산행안내를 총괄하는 산향님,
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 103호)
법주사 아래에 있으며 조선 세조 행차때 연이 걸리지 않도록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렸다하여
세조로부터 정2품의 벼슬을 받게된 소나무,(연걸이 소나무(연송)이라고도 한다.
俗離란 속세를 떠난다는 뜻인데 속리산에는 法주寺가있다.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조사가 천축에서 불법을 구해와 창건 하였고
720년에 크게 중건 하였는데 지금 남아있는 쌍사자석등, 석련지, 사천왕석등 희견보살상, 석조,석등 등이 이때 조성 되었으며
현재의 법주사는임진왜란때 불타버린것을 1626년 (이조 4년)벽암대사가 복원했다고 한다.
남쪽으로 뻗어내린 백두대간의 주릉이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에 힘이 솟는듯 한데
이마져 마음대로 종주할수 없으니......그 氣를 어디서 받지?
없어진 천황봉 정상석.
언제 또 올지 모르지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우리부부도 인증샷,
고희를 넘기신 우리 이상기 총무님께서 준비해온 막걸리로 안전산행을 기원한다.
이제 이곳에서 분기하는 한남금북정맥의 첫발을 올린다.(11시 40분)
오래전 남해산악회에서 왔을때 이곳에서 점심 먹은 그리운 얼굴들이 생각난다.
먼저가신, 김인성, 김영태, 정귀랑님의 명복을 빌며 잠시 쉬었다 간다.
유일한 바윗길은 이곳 뿐이다.
약간 사납긴 해도 위험하진 않은길이다.
어릴때 소먹이러가면 많이 있던 버섯들이다.
소금을 뿌려 호박잎에 싸서 구워 먹으면 쫄깃한것이 맛있다.
제일 후미 총무님조,(점심식사중이시다)
아주 경사진 바윗길인데 사진으로는 별거 아니네,
멀리 보이는 관음봉(985m)능선, 꼭 한번 가보고 싶은곳이다.
백두대간 능선,
삼가저수지 넘어로 보이는 충북 알프스(구병산,876.5m)
형제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667.3봉 삼각점,
갈수록 구병산이 가까워지네.
커다란 소나무들의 향연,
윗 대목리를 바라보며......
무인 산불감시탑(2시 31분 통과)
불목이재(2시 41분)
투자한 흔적은 보이나 밭 같은곳엔 메밀이 심어져 있었지만 작황은 별로 신통치 않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곳에 그물망은 한없이 쳐저있었다.
드디어 오늘의 산행 종점인 갈목이재.
관리공단직원들이 네명이나 나와 단속을 한다.
사정하여 별일은 없었지만 왜 단속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수없다.3시 40분 산행종료.
(산행후기)
한남금북정맥의 시작점인 속리산 천황봉에 이르는 길은 법주사에서 태봉을 거쳐 오르는 길과, 정각동에서 오르는 길도 있지만 제일 쉽고 많이 이용하는 길은 윗대목리에서 백두대간으로 통하는 접근방법일 것이다.
오늘 우리도 이 길을 선택하여 초입에 있는 이정표 (삼가리 3.9km, 천황봉 2,7km)를 뒤로하고 한남금북정맥 표지기 들이 붙어있는 들머리를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아직 몸에 열이 나지 않아 그런지 약간 스산한 가을 냄새를 풍기는 시원함을 느끼며 잘 나있는 길을 앞사람 따라 있는 힘을 다해 따라간다.
그러나 계곡에 접어들자 폭우로 인한 도로 유실로 본의 아니게 왼쪽으로 올라 정맥능선을 타게 되었다.
처음부터 알바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있어 아무소리 안하고 천황봉에 오른다,
평일이다 보니 우리들뿐이라 조용해서 좋았고 무엇보다도 맑은 날씨에 시계가 좋아서 온 세상을 모두 바라보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좋았다,
미리 준비해간 제물은 없었지만 그냥 왔다 간다는 것에 허전한 생각이 드는지 고희를 넘긴 총무님께서 막걸리 한 병과 사과를 정상석 옆에 차리고 예를 갖춘다.
우리는 단순히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 목적을 두고 오르는 산행이니 만큼 심적인 도움을 스스로 얻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등산이란 한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지속되는 산악운동이기도 하며 우리같이 특별한 목적을 두고 하는 것과 그냥 목적 없이 어울리는 sports와는 별개의 의미 없는 산행도 있는 것이다.
전자는 정신적 운동도 포함된 것이요, 후자는 육체적 운동과 즐기는 운동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러니 누구든 어떤 방식이던 도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큰 실패는 도전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아울러 산에서의 예절도 일반 사회에서의 예절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아주 평범한 것이다,
그러면서 산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별도로 가진다면 더할 나이 없이 좋을 것이다.
결국 산을 대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따라 산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인 것이다.
정상에서의 여유 있는 시간 보다는 이제 시작이다 보니 모두 바쁘게 사진 한 장 씩 찍고는 정맥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다.
807봉에서 점심을 먹는다.
산에서 제일 즐거운 것 중 하나가 먹는 재미일 것이다.
계속 내리막이다,
경사도 심하지만 밤자갈길이 많아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구간이 많아 조심에 조심을 한다.
667.3봉 삼각점을 보고는 계속 오르내린다.
무인 감시 카메라가 있는 574봉에서 내려가는 길은 조금 혼돈스럽기도 했다.
다 내려온 뒤에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길이 잘못 난건 사실이다.
불목이 재에서는 지금도 넘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지만 이용하는 자 없으니 많이도 희미해 보인다.
관리하지 않는 헬기장을 지나 다시 오르는 길이 제법 힘이 든다.
580봉은 어깨로 지나간다,
정상까지 왕복 1km정도는 될 것 같아 그냥 직진하는데 몇 사람은 가보고 오겠다며 배낭을 내려놓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산길은 거리가 길거나 짧아도 종점이 가까워지면 피곤한건 매 한가지다.
몇 번의 오르내림이 끝나자 505도로인 갈목재에 내리 선다.
내려오니 관리공단에서 이곳은 탐방지역이 아니라며 이것저것 따지며 물어오기에 잘못알고 내려왔으니 앞으로 주의 하겠다고 하자 그들은 살며시 자리를 내어주고는 가버린다.
우리도 오래 있을 필요도 없고 후미를 태우고는 바로 귀경길에 오른다.
이번 산행에는 원주에서 혼자오신 73세의 노인과 같이 종주를 했지만 그분의 체력도 체력이지만 혼자서 원정 산행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박수를 드리고픈 심정이었다,
오늘도 무사한 산행에 감사하며
아름다운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