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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길이 터널한테 밀려서 사라진 듯 온 나라 굴길은 터널이 휩쓸었다 굴길은 터널 앞에서 명함도 내지 못했다 굴길은 시골에서는 익숙하게 쓰는 말 밝은 눈 죽는 굴길을 살려내려 애쓰더니 대전서 금산 가는 굴 샛고개 굴길 하였다 새고개라 아니하고 주민들은 샛고개 대전과 충남이 이 굴길로 가까운 이웃 굴길아 터널 젖히고 온 누리에 빛나라 호남선 철길이 대전광역시 서구 기성동을 지나는 데에 ‘사진포 터널’이 있다. 여기에서 벌곡길로 5킬로미터쯤 가면 평촌이 있다. 이 곳이 내 고향이다. 여기에서는 ‘사진포’라는 말을 ‘사진개’라고 하고, 그 굴은 ‘검은돌굴’이라고 한다. 검은돌은 흑석리(黑石里)라고 쓰는 법정동이고 ‘사진개’는 그 안의 한 자연마을이다. 이런 사진개, 검은돌굴 등 이름들은 평촌에서만이 아니고 기성동 대부분 사람이 쓴다. 우리 나라 시골마다 다 쓴다. ‘지금 굴길 지나는가’, ‘지금 터널 지나는가’는 함께 쓰는 말이다. 그러나 ‘굴길’이 국어 사전에도 올랐고 많이 쓰는 말이 확실하니 ‘굴길’을 쓰자. 몇 해 전 일이다. 한국도로공사에서 대전 남부 순환도로를 만들었다. 이 길은 진주로 가는 고속도로의 일부다. 구봉산에 굴을 뚫고 구억뜸에서 선골로 가는, 들과 내를 건너는 긴 다리를 놓았다. 이 굴 이름은 ‘가수원 터널’이고, 다리는 ‘갑천교’라고 한 것을 알아냈다. 생각한 끝에 굴은 ‘구봉산 굴길’로, 다리는 ‘모새골다리’로 하는 것이 현지 주민 정서에 잘 맞는다고 건의했다. 3년에 걸쳐 여러 번이나 공문식으로 민원을 거듭 보냈다. 그러자 ‘무슨 굴길’은 ‘무슨 터널’이라 하고, ‘무슨 다리’는 ‘무슨 교’라고 해 왔으므로 지금까지 해 온 방식대로 ‘구봉 터널’, ‘모새골교’로 하겠다는 회신이 왔다. 나는 건설교통부 장관에게 ‘무슨 터널’이나 ‘무슨 교’는 기왕 지은 것은 그냥 두고, 앞으로 새로 공사하는 것은 그 주민이 원하는 경우 ‘무슨 굴(길)’, ‘무슨 다리’로 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했다. “현재 ‘무슨 터널’, ‘무슨 교’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준례에 따른 것이므로 주민이 원하는 경우에는 ‘무슨 굴(길)’, ‘무슨 다리’로 할 수 있다. 따라서 규정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장관 직인을 찍은 공문이었다. 받는 사람은 내 이름만 써 있었다. 나는 “이것은 전국 시도와 국토관리청과 한국도로공사 등에도 이첩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문이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 건의를 받아들여 주었다. 충청남도와 대전광역시에도 보내온 것을 확인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건교부에서 ‘공사를 맡은 데(한국도로공사)에서 이름까지도 다 맡아 처리하도록 했으니 그리 알라’는 통지가 왔다. 한국도로공사에서는 “지금까지 모든 굴과 다리 이름을 ‘무슨 터널’, ‘무슨 교’로 했는데 여기에서만 예외를 만들면 도로 시설물 관리상 불편이 생기므로 귀하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고, 완공 직전에 대전광역시 시장과 합의해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획일주의를 지키다가 더 중요한 것을 놓친다. 첫째로 주민의 합당한 건의를 저버리는 것은 민주주의에 어긋나고, 둘째로 한글 문화 발전에도 걸림돌이다. 그래서 획일주의를 버리고 예외를 두는 것이 옳은 처사”라고 글을 보냈으나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민주주의는 정부에서나 국회에서나 하고 한글 문화는 학자들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지금부터 9년 전 일이다. 장태산 휴양림 가는 길에 ‘산직교’라고 할 뻔한 다리가 있다. 주민들 의견을 모아서 ‘밤갈미다리’로 하자고 서구청장에게 건의하여 결정한 일이 있다. ‘무슨 교’라고 쓰는 준례를 깨는 것을 해냈다. 공식 다리 이름은 한자어로만 하는 줄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부수었다. 그 뒤로 용태울다리와, 금바위다리, 진틀다리, 팥죽다리 등 계룡시 금암 구역 다리 여섯을 ‘무슨 다리’로 이름을 지었다. 또 버드내다리, 백제큰다리 등도 생겼다. 이것은 ‘무슨 굴(길)’로 할 수 있는 길을 뚫은 것이나 다름없다. 대전광역시 중구 안영동에서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 구만이로 가는 샛고개에 굴을 뚫었다. 이 굴 이름을 ‘샛고개 굴길’로 확정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한글 만세를 소리칠 뻔했다. 안영동 노인회관에 전화로 이 소식을 알렸다. 아주 잘한 일이라고 좋아하였다. ‘터널’은 ‘굴길’이 없을 경우에만 쓸 수 있다. 버젓이 ‘굴길’이 ‘터널’과 같은 뜻으로 국어 사전에도 실린 것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국제화, 세계화 시대에 무슨 잠꼬대냐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사람이 다 쓰는 말이라도 우리말을 제치고 영어를 썼다고 세계화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슬기롭지 않다. 세계에 으뜸가는 우리 말글을 더욱 아름답게 갈고 닦아서 세계 각국 사람들이 우리 말글을 더욱 감탄하면서 배우게 하자. 우리말을 배우는 대학교가 외국에도 더욱 많아지게 하자. 세계 각국에서 한국으로 유학생이 많이 오게 하는 세계화를 꾀하자. 어느 대학에서는 한 해에 외국인 유학생 유치 천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이 꿈을 가진 사람의 태도와 눈빛은 다를 것이다. 이렇게 돼 나가도록 지도층에서 이끌어 나가야 한다. 이렇게만 한다면 우리 앞날은 희망이 넘칠 것이다. 이런 꿈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터널’이 ‘무슨 굴(길)’보다 더 좋다고 할 것이다. 서울에는 ‘남산 터널’이 있어도 대전에는 ‘샛고개 굴길’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자랑스럽게 여기자. 촌스럽고 뒤진 이름으로 여기지 말고 우리 겨레의 얼이 들어 있는 것을 깨닫자. ‘샛고개 굴길’은 주민의 말씨에 귀를 기울인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자. 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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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이름은 쉬워야 한다
대전광역시 아파트 입주자 대표 연합회에 드리는 글
‘벌말’은 대전 중구 태평1․2동의 토박이말이다. ‘들말’은 서구 용문동 일부와 변동 일부의 토박이말이다. 벌말에는 학교나 아파트나 가게 이름에 ‘벌말’이 붙은 데가 없다.
‘들말’에는 다방 하나 음식점 하나가 있다.
우리 고향 서구 평촌에는 길헌(吉軒)의 토박이말 ‘길마루’와 길평(吉坪)의 토박이말 ‘진벌’이 하나도 시들지 않고 그대로 살아 남았다. 중구 석교동에 호동이 있다. 이 호동도 ‘범골’이라는 토박이 이름이 그대로 살아 있다. 이 마을에 일부러 가서 아기들이나 노인들에게 이 동네가 범골이냐고 물으면 ‘호동’이라는 이는 없었다. 하나같이 범골이었다.
시골이나 도시나 그 마을 토박이말이 있는데 신기하게도 그 이름이 그대로 전해 온다. 태평1․2동에는 ‘태평’이나 ‘유등’처럼 토박이말을 제쳐놓은 아파트 이름이 있다.
‘버드내마을’이 생긴 뒤로는 버드내 초등, 버드내 중학 등이 생겼다. 유등중은 훨씬 전에 개교했었는데 버드내 초등이 생긴 것을 보고 유등중을 버드내중으로 바꿨다. 이것은 어른들이 해내지 못한 것을 그 중학교 학생들이 해냈다.
벌말에 벌말 아파트가 생기면 학교나 가게도 벌말이 붙게 될 것이다. 벌말은 한자어로 ‘평리(坪里)’라고 썼다. 왜정 때 대전부 ‘태평정(太平町)’으로 일본스럽게 바꿨다. 우리 한국 마을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친 것이니 그들의 야만성이 여기에서도 드러났다. 평정(坪町)보다는 태평정이 그들 맘에 들었을 것이다. 광복과 동시에 ‘태평동’으로 바꿨다.
광복 후에 본정(本町)을 원동, 춘일정(春日町)을 선화동, 영정(榮町)을 삼성동으로 고쳤는데, 이와 동시에 태평정(太平町)도 평리(坪里) 또는 벌말로 고쳤어야 하는데 거기까지 챙기지 못했다.
벌말의 이름이 사라진 것은 일본 정치가 벌말을 통째로 삼켰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제 마을 이름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뜻하지 않은 결과가 왔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행정동명 태평동을 ‘벌말 1․2동’으로 바꾸고 동시에 ‘삼부(三扶)아파트’도 ‘벌말아파트’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평동’과 ‘삼부’에 익숙해진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문제를 삼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면 ‘자주적 민족 정서’에 어긋날 뿐 아니라, 벌말의 역사가 영원히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고구려나 발해 역사를 빼앗으려고 한다. 역사 학자들이 이를 막아야 한다. 대전의 중구 태평동 때문에 벌말의 토박이말이 역사에서 사라지고 있다. 길 이름에서 벌말 1길, ……, 벌말 15길이 벌말을 살려내려고 한다. 벌말의 어느 초등학교 ‘어린이 문집’이름을 2007년부터 ‘벌말 무지개’로 하기로 했다. 태평 4구역 재건축 아파트 이름을 ‘벌말 아파트’로 해 달라고 건의했다. 벌말을 살려내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많지만 힘을 모으면 방법이 생길 것이다.
중구 문화동에 큰 아파트가 완공됐다. 그 이름이 궁금해서 구청 담당자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나는 이를 받아쓰지 못하고 자꾸 거듭 묻다가 매우 난처해서, “미안하지만 전송으로 보내 주시오”라고 부탁했다. ‘센트럴파크’임을 알았다.
한 번 말한 것을 받아쓰지 못하고, 뜻도 모른다면 그것은 매우 불편한 이름이다. 우리는 편리하고 쉽고 뜻이 좋고 정다운 이름을 원한다.
샘머리공원 가까이에 ‘샘머리아파트’, 신탄의 토박이말이 ‘새여울’이니 ‘새여울아파트’,선비들이 살았던 송촌(宋村)에는 ‘선비마을’, 용두동에 선 아파트를 ‘미르마을’(미르는 용의 옛말), 마땅한 것이 없으면 ‘큰솔’, ‘푸른뫼’.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 아주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문화동의 ‘센트럴파크’와 같은 서양식 말은 외었다가도 잊어버린다. 그 곳에 ‘글꽃 초등’, ‘글꽃 중학’이 지난 3월에 문을 열었으니, ‘글꽃마을’이나 ‘글빛마을’로 한다면 아주 쉽고 문화동과도 뜻이 연관되어 외기도 쉽다. 그러나 순풍이 불지 않는다.
영어 바람이 부는 대로 그냥 두고, 거기에 휘말리는 사람들을 보고만 있다. 지도층에서 이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국어 기본법 정신을 살려서 시민에게 그 마을과도 관련이 있고 정다운 이름을 권한다. 정다운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정다운 도시를 만드는 씨앗이다. 그래서 우리 대전시에서만이라도 입주자 대표 연락회에서 입주자 대표 몇 사람을 포함한 아파트 이름 제정 협의회를 만들어 여러 사람 의견을 모아 이름을 지으면, 좋은 이름이 나올 것이니, 그리하기를 건의한다.
유동삼 글
순우리말로 다리 이름 짓기
우리 고향 서구 평촌 마을에는 ‘쉬남독다리’가 있다. 쉬나무 정자에 가기 위해서 다리가 있는데 넓은 돌 한 개를 도랑에 걸쳐 놓은 독(돌)다리다.
지금은 쉬나무도 없어지고 그 독다리도 없어지고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그러나 이름은 ‘쉬남독다리’라고 한다.
서구 산직동에는 ‘밤갈미다리’가 있다.
‘밤갈미’는 산 이름인데 밤나무가 많고 그 산이 어미산과 이어지지 않고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다. 갓모 닮은 산이다. 갓모는 먼길을 걷다가 소나기를 만나면 갓에 비가 맞지 않게 쓰는 종이 모자다. 이것을 갈모라고도 한다.
머리에 ‘밤’을 붙여 ‘밤+갈+미’라고 한 것이니, 우리 조상들의 이름 짓는 슬기가 매우 수준이 높았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밤갈미’는 옛말인 동시에 현대말이다.
이 밤갈미와 매노천 사이의 논을 ‘밤갈미논’이라고 불러 왔다.
이 밤갈미논은 여기서 가까운 오룡동, 매노동, 장안동, 흑석동 등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밤갈미논은 잘 알면서 밤갈미는 무슨 뜻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한글 학회에서 펴낸 한국 지명 총람에 산직동에 밤갈미가 나오고 그 산에 밤나무가 많고 낮으며 둥근 산이라고 밝혔다.
이 근처에 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장태산 자연 휴양림까지 길을 넓히고 아스팔트를 까는 바람에 다리 이름을 붙여야 하는 사정이 생겼다.
구청 담당 직원에게 물었더니 산직동 앞을 지나가니까 ‘산직교’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나는 산직동 토박이이자 터줏대감인 서만수 님에게 물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사무실에서 고향 마을 이름이 산직동이니까 “우리 산직이 일찍 나왔군.”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 말이 듣기가 싫었다고 했다. 그래서 ‘산직’만은 넣지 않은 이름으로 정하라고 했다.
매노천으로 정각골에서 흘러 온 물이 내치는 곳이므로 ‘물내치기다리’가 어떠냐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이 말을 아는 사람이 아주 드물었다. 노인들 중에서도 이 말을 알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그래서 말은 매우 매력이 있으나 낯선 말이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밤갈미논을 끼고 밤갈미를 바라보며 가는 곳에 놓는 다리이니 ‘밤갈미다리’가 좋다는 의견이 들어왔다.
젊었을 때만 산직동에 살다가 태평동으로 이사한 지 매우 오래된 이가 있다.
오룡동은 산직동의 한 자연 마을이다. 밤갈미와는 아주 멀고 지름길도 없다. 그는 “밤갈미논에서 논을 매다가 점심때가 됐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가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밤갈미다리’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 마을 통장도 노인회관에 잘 나오는 노인들도 다 좋다고 말했다. 간단한 서식을 만들었다. 20여 명의 주소와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어서 기성동장을 거쳐 서구청장에게 내도록 했다. 이것이 1996년 일이다.
그 해 12월에 기성동 사무장한테서 “회장님이 용태울 도랑에 놓인 다리를 건너다니시는데, 그 다리를 ‘용태울다리’라고 하면 어떻습니까?”라고 전화가 왔다.
“매우 좋은 이름입니다. 그런 좋은 의견이 나온 것은 기성동의 자랑입니다.”라고 추켜 올려 주었다.
다음해 1997년 정초에 논산 두마 초등학교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논산군 두마면의 계룡 신도시 출장소장이 제 후배입니다. 그가 금암 구역 다리 여 섯 개의 이름을 정하기 위해서 미리 의견 을 써 내게 했었는데, 의견을 낸 분들이 모여서 협의회를 해서 다리 이름을 정한 답니다. 하나는 ‘중앙교’, 하나는 ‘평화 교’로 하고 넷은 주민 대표 합의에 따라 정한답니다. 그 자리에 나와서 도움말을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는 날씨도 춥고 교통도 불편해서, “내가 가서 도움될 것도 없을 것이니 가지 않겠어요. 그 ‘중앙교’, ‘평화교’도 그만두 고 여섯 개를 다 협의회에서 정하되 지방 특색이 나타나고 되도록 쉽고도 정다운 이름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고정 방식인 ‘무슨 교’보다 ‘무슨 다리’가 더 주민 정 서에 알맞으니 내 뜻을 잘 전하시오.”
이렇게 말했다.
얼마 후에 ㅅ신문에 ‘이색적 다리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팥죽다리’, ‘독쟁이다리’, ‘멍구지다리’, ‘두루봉다리’, ‘진틀다리’, ‘금바위다리’ 이름이 논산시 의회에서 인준하였다는 글이 실렸다.
‘팥죽다리’는 두계 쪽으로 가는 다리, ‘독쟁이다리’는 독쟁이고개 쪽으로 가는 다리, ‘멍구지다리’는 멍구지들로 가는 다리, ‘두루봉다리’는 두루봉이 있었던 데를 지나는 다리, ‘진틀다리’는 진틀 마을을 지나는 다리, ‘금바위다리’는 금암 마을 쪽으로 가는 다리란다.
“아버지, ‘버드내다리’이름을 아버지가 지었지요?” 우리 식구들은 내가 순 우리말 이름을 지어 주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버드내다리’가 어디에 있니?”
“복수동에서 한밭가든으로 건너는 내에 놓은 다리입니다.”
“아니다. 나는 처음 듣는 다리 이름이다.”
내가 미리 아파트나 다리나 학교 등 이름을 새로 붙이는 경우, 그 지역의 마을 이름이나 땅 이름을 붙여, 주민들이 정답게 부르는 것은 매우 소중한 것이니, 주민 정서 위주로 새 이름을 짓는 것이 대전 사랑과 대전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일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만들어 대전시장, 각 구청장, 대전시의회의장, 각 구의회의장, 언론 기관 등에 보낸 일이 있었다.
하루는 호남선 ‘괴곡건널목’에 구름다리 공사가 여러 해 만에 끝나고, 그 다리 이름을 ‘괴곡과선교’라고 한 것을 보았다. 시청 도로과장이 챙겼어야 하는데 실수했다. 일본식 한자어다. 과선(跨線)은 철길을 걸터앉는다는 뜻이다. 순화 대상 용어다.
내가 대전시 지명 제정 위원으로 위촉받았을 때였다. ‘불티구름다리’(정림동 고개에서 도마육교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를 논의 끝에 지은 이름), ‘석봉구름다리’(신탄진 석봉 마을에 있는 건널목 위로 놓은 구름다리)가 확정된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 마땅히 ‘고릿골구름다리’로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가 건의서를 내고서 약 한 달 만에 ‘고릿골구름다리’로 바뀌었다.
대전 선화 초등학교 가까이에서 삼성동 쪽으로 한밭내를 건너는 다리 이름이 영교(榮橋)이다. 이 이름은 왜정 때 붙인 ‘사카에바시’이다. 삼성동, 중동, 정동 일대가 다 ‘사카에마치’였다. 삼성 학교는 영정(榮町)소학교였다. 이 일본말 찌꺼기를 없애야 한다고 대전 광역시에 건의서를 낸 지가 퍽 오래다.
한밭 도서관에서 1943년 경의 ‘대전부 정(町) 경계도’라는 묵은 지도를 찾아냈다.
이 지도에 榮町(영정)과 榮橋(영교)가 있다. ‘한밭내다리’로 할 것인지 ‘대전천교’로 할 것인지 지명위원회에서 정할 것이다.
한밭내를 건너 한밭들로 가는 다리가 분명하다. 영교를 ‘한밭내다리’로 고치는 것은 ‘대전천교’보다 뿌리 깊은 말을 소중히 여기는 뜻에서 대전을 역사가 깊은 도시라는 인상을 풍기는 데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물러가고 60년이나 지났다. 이것은 대전의 얼굴에 묻은 먹칠이므로 서둘러 고쳐야 한다.
(2007. 2. 3)
다리 이름 - 2003. 수필예술
유동삼
대전에는 버드내와 한밭내와 갑천 등이 있다. 이 내에는 여러 다리가 있다. 오래된 대흥교가 있다. 이 다리를 원동다리라는 이가 있다. 대흥교보다는 원동다리가 더 적절한 이름이다. 시청에서 어디에 가는가? 그 목적지가 원동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다리를 1951년 5월 31일 이후 대전 공업중학교 근무 시절에 걸어다녔다. 그 때는 다리가 시멘트가 아니고 나무였다. 지금은 현대식 쇠 난간이다. 설명판에 1976년 9얼 28일 준공이라 써 있다. 준공이 아니고 ‘아주고침’이나 ‘개축’이라 써야 옳다.
이런 식으로 붙인 다리 이름이 또 있다. 가장교도 도마교도 그렇다. 가장동에서 태평동 가는 다리이니까 태평교라고 해야 하는데 태평교가 있다. 그럴 때는 태평동의 옛이름 벌말을 살려 벌말다리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도마동에서 버드내를 건너가면 왼쪽과 오른쪽이 같은 동이름이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내가 쑥내라는 이름도 있으니 쑥내다리라고 하면 좋았을 것이다. 벌말이나 쑥내가 한자어가 아니므로 제쳐 놓은 것이다. 우리말 천시 풍조가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목척교 아래 다리는 선화학교에서 건너가는 다리인데 건너가자 왼쪽은 삼성동이고, 오른쪽은 중동이다. 도마교처럼 이름짓기가 난처하다. 중동교라 하자니 중교와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린다. 삼성교라 하자니 삼성동에서 삼성동으로 대동천을 건너는 것이 제1삼성교, 여기에서 철교쪽으로 넓게 놓은 새 다리는 제2삼성교이다. 그래서 삼성교라고 할 수 없다. 그 대동천 끝나는 곳 보문중고 근처에 다리가 있는데 북부교이다. 이 다리는 방향을 표현했다. 어디를 기준해야만 옳은지? 보문다리라고 했더라면 더 쉽게 기억할 것이다.
영교는 선화학교에서 가까우므로 흔히 선화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교명판은 영교라고 새겨 있다. 이 영(榮)은 일제 강점기에 삼성동 중동이 다 영정이었으므로 영교라고 한 것이다. 중구청 다리 대장에는 1970년대 모월 모일에 시공이라 써 있단다. 이것은 유등교처럼 잘못 쓴 설명판이다.
유등교에는 현재 1970년 6월 15일 시공이라 새겨 있다. 이것은 일부 고침이나 보수라고 했어야 한다.
한밭도서관에 1940년도 대전부내 정 경계도(大田府內 町 境界圖)가 있다. 이 지도에 榮橋(영교)라 써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 다리를 건너다닌 영정소학교(삼성학교) 졸업한 현재 80세 노인들은 サカエバシ(사카에바시)라고 불렀다는 기억을 말한다.
버드내에 버드내다리가 생긴 것을 보고서 한밭내에도 한밭내다리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 올랐다. 영교를 건너간 영정 일대가 지난날 대전군 대전면 대전리(大田郡 大田面 大田里)이다. 이 대전리도 대전천도 한밭들 한밭내이다. 그래서 영교를 한밭내다리라고 하면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버드내다리는 역사가 얕다. 그러나 그 이름이 좋아서 어느 학교 학생들은 40%나 알고 있다. 이 고등학교 2학년은 영교나 중교나 목척교나 현암교나 북부교 등은 다리 이름을 아는 사람이 1~2% 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몇 학교 교직원과 초중고 학생에게 다리 이름 아는 실태 조사를 했다. 크고 작고를 떠나서, 많이 다니는 것을 떠나서, 그 다리 이름이 적절한 경우에는 많이들 알고 있는 실정임을 알아냈다.
서구 호남선 철교 이름에 괴곡철교가 있다. 우리 고향 평촌에서 6킬로미터 쯤 거리이다. 우리 고향 사람들은 이 철교를 오야미공굴, 괴곡교를 오야미다리라 부른다. 시청을 기준한다면 괴곡교는 괴곡동에서 흑석동의 자연 마을인 오야미에 이르는 다리이다. 그러나 오야미는 법정동명이 아니고 고유어인 자연마을 이름이다. 그래서 괴곡교 괴곡철교라 한 것으로 본다. 또 서구 오동에서 우명동 실미마을로 건너가는 다리를 우명교라 한 것과도 비슷하다. 실미는 우명동의 한 자연마을이다. 원래는 시루처럼 생긴 산 이름인데 마을은 실미로 남고 산 이름은 시루봉으로 부른다.
일본인은 다리교를 음으로 읽지 않고 훈으로 읽기 때문에 한자로 쓴 다리를 읽을 때 일본말이 죽지 않는다. 석교(石橋)는 イシバシ(이시바시)다. 위에 든 보기는 다리 이름이지만 산 이름 내 이름 들 이름 길 이름 등 모든 말이 다 그렇다.
우리는 石橋를 돌다리라 아니 읽고 석교라 한다. 말은 자꾸 쓰면 살고 아니 쓰면 죽는다.
그래서 한자를 마구 쓰면 우리말이 죽으니 우리말을 죽이지 않는 다리 이름을 주장하는 것이다. 제 본디말을 살려서 한자를 쓰는 일본과 우리와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매우 소중한 문제다. 이것을 생각지 않고 한문 시대의 다리 이름 준례를 이어나가려는 방법은 한글문화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을 죽이면서까지 한자어 다리를 짓는 것은 한글 문화에 애착이 없다는 증거다.
대전에는 버드내다리, 용태울다리, 밤갈미다리, 석봉구름다리, 불티구름다리, 고릿골구름다리, 석봉굴다리, 대동굴다리, 서대전굴다리, 오류동굴다리 등이 있다.
다리 이름에서나마 우리 ‘다리’라는 낱말을 살려 쓰는 것은 ‘○○도’를 ‘○○섬’으로, ‘○○로’를 ‘○○길’로, ‘○○평야’를 ‘○○들’로, ‘○○곡’을 ‘○○골’로 바꾸는 문을 여는 것이나 다름없다.
한글 문화 발전의 높은 뜻을 살려서 ‘영교’를 ‘선화다리’보다 ‘한밭내다리’로 하는 것을 주장한다.
버드내다리 한밭내다리
고운 옷 입고 밤길을 간다. 아무도 안 말리는데
버드내에 버드내다리 한밭내에 한밭내다리
고운 잎 싱싱한 줄기 짓밟는 이 있을까!
시들다 살아나고 말라버리다 일어난 꽃
하늘이 낸 임의 사랑 비단 옷 입고 낮길 가는데
그 누가 이 고운 옷에 물 뿌릴 수 있을까!
※ 2007년 대전광역시 지명 위원회에서 '선화다리'로 정하였음.
'한밭네다리'라고 정해졌다고 하면 시민에게 냇물 이름과 순 우리말 사랑 다리 이름에 정이 붙게 되었을 텐데 '선화학교' 옆에 있는 다리의 뜻으로 '선화교'라고 시민 편리 위주로 정한 것을 매우 아쉽게 생각함.
한문공부는 너무 고생스럽다
유 동삼
한말글사랑 한밭모임 으뜸일꾼
ㅅ 중학교에서 교장으로 근무했었던 때의 일이 생각난다.
정 진호(鄭鎭浩)의 연습장에는 ‘鎭’ 속에 들어있는 ‘目’을 ‘日’로, 16절 연습장 5면에 수없이 여러 번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써 있었다. 적어도 두 시간 이상 걸려서 쓴 분량이었다. 또 ‘浩’와 ‘活’은 매우 비슷하다. 이 학생은 ‘浩’를 ‘活’에 가깝게 베꼈다.
바르게 쓰는 것은 거듭 연습하는 것이 공부가 된다. 그러나 틀리게 쓰는 것은 아니 씀만 못하다. 동쪽으로 가야 되는데 서쪽으로 두 시간을 갔다면 다시 제자리까지 와서 동쪽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너무도 큰 고역이고 손실이다. 개별 지도를 해야 되는데 그냥 “자기 이름을 100번 써 올 것”으로 숙제를 낸 모양이다. 글자 하나 하나를 개별 지도를 하기에는 너무도 여건이 맞지 않는다.
교사가 일거리가 밀려 있으면, 칠판에 한자 몇 자를 써 놓고, 한 시간 내내 쓰라고 지시하는 일이 있기 쉽다. 그래놓고 선생은 사무 처리를 한다. 그 시간에 세계 명작 소설을 읽히거나 글짓기를 시키거나 해서 유익한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국에, 한자 공부에 귀중한 시간을 다 소비하는 일이 있기가 쉽다.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치면 중‧고등 때보다 잘 외게 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70~75세 정도의 한문 세대들은 자기 경험 기준으로 말들을 한다. 자기는 선발된 학생으로 조직된 학급에서 공부한 것을 잊어 버렸다. 요즈음의 초등학생은 선발 집단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한자 공부 때문에 공부에 싫증을 가지게 되어, 모든 과목을 다 싫어하게 되고, 나중에는 학교 가는 것도 싫어지고, 마침내는 자기 인생마저 포기하여, 막된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있다. “유식층 무식”들이 바로 이들이다. 정부의 고위 관리들이 한자 공부로 유식해졌고 권위를 가지게 된 것을, 전국의 어린이들에게 자기가 겪은 대로 시킨다면 이것은 교육을 죽이는 행위나 다름 없으니까 “유식층 무식”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나라 지명 가운데에는 어려운 한자로 된 것들이 있다. 예컨대 ‘關雎洞’의 ‘雎’도 그렇다. ‘雎’를 ‘휴, 수, 유’로 읽는다. 관휴동, 관수동, 관유동으로 된 문서가 있다. ‘睢(휴), 誰(수), 惟(유)’로 읽는 모양이다. 우편 번호부가 처음 나왔을 때 관휴동으로 되어 있었다. 지금 내 서재에 있는 대전 지도에는 관수동으로 되어 있다.
‘鎭岑(진잠)’의 ‘岑’은 어려운 자이다. ‘岺(령)’으로 보고 ‘진령’이라고 읽는 이가 있었다. ‘구즉동(九則洞)’을 ‘구칙동’으로 읽는 이가 있었다.
사람 이름에서도 땅 이름과 같다. 내 성자 ‘유(庾)’를 ‘강(康)’이나 ‘경(庚)’으로 읽는 사람이 많았었다.
나는 한문을 배운 경험이 있다. 11세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그 전에 5년 동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재주가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천자문을 읽는 것부터 공부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너무도 신기했는지 두 손바닥으로 어느 한 면의 16자 중 한 자만 보이게 하고 15자는 안 보이게 가리고서, 그 한 자를 읽어 보라는 시험을 하였다. 척척 읽으니까 “이상하다, 신통하다”고 하며 내 어린 재주를 칭찬하였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몇십 번이 아니고, 몇백 번, 몇천 번을 읽되 대나무 막대로 짚어 가면서 정신을 차려서 한눈 팔지 않고 읽었다. 서산(書算)을 가지고 읽은 횟수를 헤아렸다.
새벽에도 읽고 서당에서 돌아와서 저녁 먹기 전에도 읽고 하였다. 다 아는 것도 되풀이해서 읽었다. 천자문을 몇 달 동안에 끝내고 명심보감, 통감을 배웠다. 해석한다는 말은 없었다. 새긴다는 말이 있었다. 먼저 낱자를 배우고, 새기고, 붙여 읽고, 자꾸 읽어서 외었다. 다음 날 새기고 외는 것을 확인 받고서 그 다음을 배웠다. 글짓기나 쓰기나 옥편 찾기나 획수, 획순, 운필 등은 배우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6년 동안 한자를 조금은 배웠으나 일본식으로 읽게 되었다. 여름 방학 숙제도 8절지 갱지에 붓글씨로 6자씩 교과서에 나오는 한자를 쓰는 것을 성의껏 하였다. 지금 명심보감을 펴 놓고 읽으려면, 많이 막혀서 새기지도 못하고, 내가 이것을 어떻게 외도록 많이 읽었는가 믿어지지 않는다.
한문은 배워도 계속해서 읽지 않으면 다 잊어 버리는 글이다. 내 맏형은 18세까지 한문 서당을 다녔다. 그러니까 13년쯤을 배웠다. 칠언절구를 잘 하는 선생을 만나서, 한 권 책이 되게 많은 자작시를 정리해 놓은 것이 지금도 보관되어 있다. 95세에 이 세상을 뜨셨다. 60세 전후해서 내가 한 군데라도 좋으니 새겨 보시라고 말하니까 손을 내저으면서 “글처럼 무심한 게 없다.” 하셨다. 제사 때마다 축지방을 형이 손수 닦았으나 늙어서 시력이 약해지면서는 내가 닦았다. 내가 닦은 축지방을 꼭 확인하곤 하셨다.
한밭 중학교에서 지리와 도덕을 가르치다가 대전 중학으로 옮겼다. 24 학급 한문을 맡게 되었다. 이것은 자의가 아니었다. 한문 수업을 서로 싫다고 나한테 떠맡긴 것이다. 한밭 중학교에서 한자 눈익히 프로그램을 창안 실행한 것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24 학급에 적용했다. 반복해서 읽는 것이 주된 학습이었다. 필기체, 인쇄체, 작은 글씨, 붓으로 쓴 큰 글씨 등을 많이 읽혀서, 정해 놓은 분량을 다 읽으면 개인별로 점검하는 방법이었다.
읽기의 목표는 교과서를 다 읽을 수 있게 하고, 상용 한자 3,000자를 다 읽게 하고, 신문 제목에 쓰인 한자어를 다 읽게 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에게는 평소 노력한 것을 개인별로 기록해 놓고, 시험 점수에 이 평소 노력한 점수를 가산하는 방법을 썼다. 시험 문제 85%는 음 달기, 15%는 한자로 쓰기, 획순, 획수 등이었다. 이 방법은 한문과 교육과정 내용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 실정에 맞게 하되 너무 어려워서 흥미를 가지지 못하는, 수준이 높은 방법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되어 있었다.
논산군 교육청에서 장학사로 일한 시절에는 각 중학교에서 월례고사 시험 문제를 1부씩을 받아서 이것을 분석해 보았다.
음 달기 문제가 너무 적고, 반대말 쓰기, 부수 이름 쓰기, 한자로 쓰기 등이 고루 고루 출제된 것을 알아냈다. 다양한 문제를 내서, 다양한 실력을 재는 일은 좋으나, 읽기에 중점을 두지 않게 되는 단점이 있다. 한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수 있는 공부다. 읽을 수 없는 상태에서는 반대말이고, 부수 이름이고, 안 보고 쓰기 등은 다 헛짓이 된다.
ㅊ 중학교 교감으로 근무했던 시절이 있었다. 3학년 한문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수업 시간표를 짜지 못한다고 하였다.
내가 3학년 7개 학급을 다 맡기로 하였다. 그 때의 한문책은 1권인데 상, 중, 하편으로 엮어져 있었다. 1권으로 3개년을 배우게 돼 있었다. 처음서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는 공부를 시켰다. 다 읽을 수만 있으면 통지표에 한문 점수를 100점으로 매기는 것을 예고하였다. 약 900자의 한자를 읽는 것만 다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100점을 맞아 보려고 기를 쓰고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시험 점수를 위해서 공부할 뿐, 시험이 끝나면 잊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 학생들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인문계 고교 학생들이 1,800자를 익혔어도 그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평균 70~90%는 잊어 버린다. 그래서 1,800자를 가르쳤다고 1,800자를 다 알고 있으려니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이 잘못은 문맹을 만들어 내고 교육을 거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국어 시간은 거의 한문 시간이 돼 버리고, 독서 지도, 글짓기 지도 등은 없어지게 되고, 한자 부교재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한문 학원도 자꾸 생길 것이다. 한문 급수 매기는 시험도 계속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문맹이 적은 우리 나라, 미국도 영국도 일본도 다 부러워하고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를 거품으로 만들고, 문맹이 60% 내외가 생긴다고 한다면 무슨 꼴이 되겠는가! 세계의 석학들은 이렇게 어리석은 짓(한자 혼용)을 하는 것을 비웃을 것이다.
일본인 여행의 편리를 꾀하다가 우리 자신이 문화적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대로 중‧고에서 한자를 배우고, 초등에서는 한자를 배우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광고물 등 출판물에 한자 병용이나 혼용을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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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동삼 선생님은 저의 중학교 은사님이시다. 가람 문학회 회장과 대전 시조 시인 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대전 충남 아동 문학회.수필 문학회 회원. 한말글 사랑 한밭 모임 명예 으뜸 일꾼. 대전 충남 외솔회 대표, 한글 학회 대전 지부 이사. 한국 문인 협회 대전 광역시 지회 회원. 한국 시조 시인 협회 회원.대일 비호상 받음.한국일보 교원 대상 받음. 충남도 교육감과 대전시장의 한글 유공자표창. 국민훈장 목련장. 항재 시조 문학상.정년 퇴직 후 대전 서구 장안동에 있는 장애인 시설 사회 복지 법인 한마음 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