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보고 들은 것 -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 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시제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한다.
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람바노'는 '능동적으로 취하다', '영접하다', '깨닫다'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요 3:33"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하나님을...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인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하다', '증명하다'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요 3:34]"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하나님이 메시야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다고 보는 견해. 렌스키에 의하면 '주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신'은 '계속적인 수여'를 뜻하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으므로 예수께 적용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없다.
(2)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도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보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부어주셨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전후의 문맥으로나 사용된 어휘의 용례 등으로 볼 때 이 세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예수는 곧 성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신성을 지니셨고 성령과도 하나이셨던 것이다.
[요 3:35]"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 사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 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와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2) 인간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시는 모습이다. 전능성은 삼위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여받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낮아지심' 과 인생의 완전한 모범을 보게 된다.
[요 3:36]"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권고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영생이 있고 - 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하고 만물의 지배권을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성도둘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이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단어이다. 본절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진노...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 이 표현은 인간의 일시적인 성냄이나 분노를 의미하는 헬라어 '뒤모스'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시는 일관된 '심판', '벌' 등의 뜻인 '오르게'를 의미한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를 직역하면 '남아 있다'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의 세력 속에 그대로 방치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래에 끝마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