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설립의 프로그램은 이미 계몽사상가 디드로(Denis Diderot)가 1765년 그의 유명한 백과사전의 한 항목–'루브르' 항목–에서 제시한 바 있었다. 박물관 설립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은 아니었다. 박물관은 사실상 '구체제(ancien régime)'가 닦아놓은 반석 위에 세워졌다. 루브르 박물관은 부르봉 왕가의 소장품들을 기초로 그 일부를 변경시키고 왕궁을 부분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설립된 것이었다.
또한 '박물관'이라는 명칭도 이 시기에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혁명 전까지 이 용어가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17세기 말에 영국에서 '뮤지엄'이라는 이름을 내건 기관이 등장했다. 애쉬몰(Elias Ashmole)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수집한 고대 예술품과 자연의 희귀물들을 옥스퍼드 대학에 기증하여 1683년 설립된 애쉬몰리언 박물관(Ashmolean Museum)이 그것이다. 물론 이때의 '뮤지엄'이라는 명칭은 기관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소장품들의 모음, 즉 '콜렉션(collection)'을 의미했다. 뮤지엄의 이러한 어의는 19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사실상 이미 진행되고 있던 경향을 확고히 하면서, 동시에 더욱 가속화시켜준 계기였다. 그러나 박물관 설립에 있어서 대혁명이 기여한 점을 가볍게 보아서는 곤란할 것이다.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기관이 설립되기 위해서는 이전의 진열공간과는 판연히 다른 박물관 고유의 성격과 기능이 새롭게 규정되어야 했다. 구체제에서 개인이 소유했던 진열공간은 개인의 부와 권력 또는 덕성을 과시하기 위해 꾸며졌었다.
그것은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구성원리에 근거하고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수장가 개인의 취향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최상의 미를 구현할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잡동사니의 성격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또한 수장가의 사망시에는 언제든지 해체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17세기에 갤러리가 주요한 진열공간으로 등장하면서 이러한 문제점이 많이 보완되었지만 소수 특권층의 폐쇄된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보편적인 가치를 얻을 수는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의 설립은 이런 점에서 본다면 획기적 변화를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술품이 '국민' 전체의 소유물임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박물관은 국민에 의한 그리고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등장했다. 그것은 지극히 근대적인 공간이었다.
혁명은 '국민(민족)'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가치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이제는 창조적인 예술작품도, 아니 그것이야말로 '민족정신'의 진정한 구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이 위대한 유산을 국민 모두가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중요한 교육적 사명으로 떠올랐다. 조상이 이룩한 위업과 목표를 자각하지 않고서는 국민으로서의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할 수 없었다. 떳떳한 국민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마땅한 미적 체험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휴일의 박물관 나들이는 마치 선거일에 투표장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정치적 권리이자 의무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박물관의 탄생은 국민이라는 정치적 가치로 고양된 새로운 '공공 영역(public sphere)'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는 다른 법이다. 루브르 박물관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급진적 개혁이 진행되던 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종식되었을 때였다.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 박물관'이었던 시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황제'의 관을 머리에 얹으면서도 '혁명의 아들'로 자처하였던 나폴레옹은 그를 낳아준 혁명을 배반하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던져놓은 씨앗을 다지는 데에는 여느 '아들' 못지않은 실질적 기여를 하였다.
그는 '혁명전쟁'에서의 연이은 승리를 통해 혁명을 해외로 전파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또한 유럽 각지로부터 전리품의 형식으로 많은 예술품과 귀중품들을 파리로 가져옴으로써 루브르 박물관이 자리를 잡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남의 나라의 소중한 예술품들을 약탈해 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정당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혁명전쟁'의 이데올로기는 '전제에 대한 자유의 승리' '미신에 대한 철학의 승리'라는 논리를 통해 이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압적으로 맺어진 평화조약이 이들 예술품들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을 법적으로 뒷받침해주었다. 예를 들어 1797년 2월에 맺어진 톨렌티노(Tolentino) 강화조약은 교황 피우스 6세(Pius Ⅵ)로 하여금 바티칸 갤러리로부터 100개의 그림과 73개의 조각품, 500개의 문서 그리고 수백 개에 달하는 보석과 동전, 모자이크 등을 양도한다는 각서에 서명할 것을 종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박물관의 설립은 '구체제'에 대한 강한 도전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 구체제에서보다 프랑스의 공화국에서 더 잘 보존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정치체제의 효능을 입증하는 도구가 되었다. 물론 그것이 초기 단계에서 일시적으로나마 '황제'의 총칼에 의지하였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 새로운 기관에 진동하던 피비린내를 자신이 제정한 근대적 법전의 합리성을 통해 말끔히 씻어주었다. 박물관은 이제 법적으로 보장된 기관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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