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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8:18-23
오늘 본문을 보면 피조물들을 의인화 시켜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에 피조물이 고대하는 것이 있고, 20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고 있고,
21절은 피조물이 바라는 것이 있고, 22절은 피조물이 이제까지 탄식하며 고통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종합해 보면 피조된 자연계는 지금 심각한 문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감탄하지만 성경이 말해주는 자연은 심각한 지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1990년 여름 서울 북부 지역의 장마로 서울시 재난 구조 본부는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는 물의 양이 너무 많아 저 지대인 마포 일대가 물에 잠귈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결국 한강 남쪽의 김포공항을 피해 북쪽 둑을 폭파 시켜 물을 분산시켰고 그로 인해 능곡과 일산은 물난리가 났습니다.
재난청은 저녁에 이장들에게 긴급히 주민 대피명령을 하달하고 그 다음 날 새벽 2시에 둑을 터트렸답니다.
그 때 저는 그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할 때였는데 저희 부대가 대민 지원을 나갔습니다.
홍수가 쓸고 간 그 지역은 처참했습니다. 물에 떠다니고 진흙에 쳐박힌 가축의 사체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그 지역은 당시 시골로 사람은 얼마 살지 않았지만 경기도 권에서 가축을 제일 많이 키웠습니다.
죽어서 물에 불어버린 소들은 코끼리만큼이나 커져있고 돼지들은 소만큼이나 커져있었습니다.
그런 소와 돼지를 건지는데 얼마나 무겁고 악취가 나든지 잡아당기면 가죽이 죽 벗겨지고 구더기가 드글 댑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애매한 가축들이 몰살 된 것입니다.
2010년 겨울 구제역 파동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540만 마리의 소와 돼지를 죽였습니다.
구제역은 지금 껏 인간에게 피해를 준 적 없지만 정부는 미리 겁을 먹고 많은 가축을 산채로 땅에 묻어 죽였습니다.
20여년 어간에 미국에서는 광우병으로, 유럽에서는 조류 독감으로 소와 오리, 닭을 엄청나게 살처분했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채우고자 자연계를 교란한 인간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애매한 짐승들만 비명횡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죄 지은 후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죄는 인간이 짓고 저주를 땅이 받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자연 만물, 즉 피조세계 전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을 빼고 모든 환경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름답고 기이하다고 놀라고 있는 자연은 사실은 인간 때문에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계21장에 보면 처음하늘과 땅과 바다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오는 것으로 만물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구원의 최종적인 완성이 무엇인지 실감나지 않습니다. 구원은 죽어 천국 가는 것만 있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구원의 완성은 전 우주적으로 자연 만물이 창조 전의 상태로 완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한한 인간은 잘 모르지만 태초부터 있는 자연은 알고 있고 저주 아래서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말은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망하고 인류가 없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정 반대입니다. 인간이 새로워지고, 세상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끝장나는 것은 죄입니다. 종말을 고하는 것은 죄와 저주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영광스러워 집니다.
십자가로 말미암는 구원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종말입니다.
현재 인간은 죄 가운데 있고 이 세상은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는 구원을 받아 죄에서 벗어났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최악의 환경입니다.
그래서 18절이 우리의 삶에 대해 고난이라고 말을 할 때 이것은 어디 특별한 장소에 가서 받는 기압이 아닙니다.
그냥 삶 자체가 허무와 썩어짐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에서 고난입니다. 22-23절을 봅시다.
이런 상태에 빠져 있기에 피조물과 함께 구원 받은 우리까지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말을 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최고의 미녀 배우와 최고의 스포츠 스타의 결혼은 나라를 들썩였습니다. 부러움을 샀습니다.
미모, 부와 명성, 인기 모자랄 것이 전혀 없는 완벽한 결혼이었습니다. 최고로 행복해 보이는 커플이었습니다.
그러나 10여년 어간에 두 사람이 비극적으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최고의 커플이 최악의 커플이 되었습니다.
그의 어린 자식들이 받은 상처와 충격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삶 그것은 고난입니다.
그 누구에게나 삶은 포근한 침대가 아닌 냉혹한 현실이요 쓰라린 고통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저주 받은 땅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오히려 엉겅퀴와 가시를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모든 원하는 것을 다 갖는다 해도 고통을 면할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을 모릅니다.
저희 세대들은 고등학교만 나오면 거의 다 배운 것이고 특별한 사람들만 대학에 진학을 했습니다.
막 가난을 벗어나던 시절이었기에 유치원도 못가고 학원도 못 다녀 보았습니다. 배움의 기회가 훨씬 적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2-30대 세대들은 유치원 못 나온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배움의 기회가 훨씬 증대 되었습니다. 그래서 2-30대가 50대60대 보다 훨씬 훌륭해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훨씬 못합니다. 인류는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다방면에서 인간에게 유익한 것, 행복한 것 좋은 것을 늘려주고 있습니다.
세탁기, 냉장고 전기밥솥, 식기 세척기, 편리한 주방, 따뜻한 집 다 있는데 결정적으로 음식 할 줄을 모릅니다.
할려고를 안합니다. 할 줄 아는 것은 손톱 다듬고 맛사지하고 남편 밥 굶기고 어른들 부려 먹는 것뿐입니다.
정도 없고 예의도 없고, 책임감도 못하고 희생도 안하고 이기적이고 개인적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보습학원, 영어 학원, 개인 과외, 영재 학원, 피아노, 태권도, 바둑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웁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쓰고 정성을 기울여도 현재 우리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인격과 성품의 반절도 못 따라옵니다.
오직 잘하는 것이 있다면 반항하고 노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젊은 부모들이 탄식하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참된 인간의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니 불행한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환경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데서 옵니다.
자기의 헛된 욕망과 자신의 그릇된 생각과 자신의 무지를 극복한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 공부로 되지 않습니다. 재물이나 명예나 인기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가능합니다. 은혜 받지 않고는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죄가 보이기 시작하며 자신이 그렇게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몸이 안갑니다. 새벽에 기도하려는데 잠이 많아서 안 됩니다.
한번 잘하고 나서 백번을 실패 합니다. 신앙적인 승리 보다는 패배가 훨씬 많고 당당한 순간 보다 부끄러움이 일상입니다.
내 자신의 연약함은 물론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이 거룩하게 사는 것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해합니다.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늘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합니다. 가슴 찢을 일 밖에 없습니다.
이 절망과 탄식 속에 쳐 박힌 경험을 넘어야 드디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용서가 아니고는 절대로 이 고통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성도는 우는 사람입니다. 깊은 한숨 쉬는 사람입니다. 탄식하는 사람입니다.
그 때서야 우리는 겸손할 수 있게 되고 드디어 우리 자신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상태가 최고의 은혜를 받은 상태입니다. 감정 기복이 심하거나,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은혜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자기 자신이 조절이 안됩니다. 결국 예수를 믿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더 많은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더 강력한 은혜를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완벽한 것을 내가 내 힘으로 만들거나 갖는 싸움이 아닙니다.
롬1:17절을 보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럽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와 거룩에 있어서 완벽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으로 착각하기가 쉽니다.
이 믿음에 대한 말씀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면 구약성경 하박국 선지서에 나오는데 전체 내용은 이렇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속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의인으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현재 내가 잘하고 내가 노력하고 내가 성공한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나의 죄악과 허물에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약속으로 갖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정직하지 않습니다. 이 근거로는 믿음을 만들거나 제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로 하셨고 그 일을 시작하신 증거로 아들을 죽이시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 믿음은 지금의 나에 대해 있지 않고 약속된 미래에 있습니다. 소망 속에 있지 현실 속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스런 미래에 있는 것들을 오늘 내 현실로 당겨와 평안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홍성사에서 나온 매듭짓기라는 책에 있는 한 의대생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해부학 첫 실험 시간에 해부도구와 고무장갑, 그리고 비닐로된 실험복을 갖춰입고 해부실로 들어갔다.
실험실의 문을 여니 거기에는 실험대마다 한 구씩 모두 32구의 시체가 놓여 있었다.
시체의 피부를 벗기는 것이 첫 해부학 실험 시간의 과제였는데, 그 작업을 하는 동안 그것이 단지 시체일 뿐
사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공 모형 배를 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착각과 함께 나의 뇌리를 스치며 지나가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래 이 사람들도 살아 있었을 때에는 모두 자기 자신이 잘 난체 하며 살았겠지.
돈도 있었고, 명예도 이었고, 사랑도 있었고, 또 죄를 짓고자 하는 사악한 마음도 있었겠지,
그런데 이들은 지금 자신의 머리 털 조차 다 깍인 채 실험대에 누워있다. 부끄러움도 없이 발가벗긴 채로 말이다.
이제는 옷이 아니라 피부가 벗겨지고 근육이 잘리고, 내장이 도려내지고 뼈가 추려지고 있다.
이 아주머니의 얼굴에 평생 동안 발라졌던 화장품은 얼마 어치나 되었을까 ?
저 아저씨는 저 손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만졌으며 그것으로부터 얼마만큼의 만족을 얻었을까 ?
그 순간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 자신과 이 시체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
그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굳이 차이점을 찾는다면 그들은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죽을 텐데 지금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이 젊은 의학도의 질문 앞에 우리는 뭐라 대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저는 제가 죽은 후 제 몸뚱이에 대해 두 가지 조처를 해 놓았습니다.
젊은 날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제 몸에 있는 모든 장기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도록 장기 기증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나 노쇠한 후 부름 받으면 제 몸뚱이는 의과대학에서 해부용으로 쓰여 질 것입니다.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그 때 제 몸뚱이를 파헤칠 의학도는 제 이름은 물론 목사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삶을 산 저에 대해 전혀 모를 것입니다.
그 때 저는 그 젊은 학새에게 그저 실험대 위에 올려져있는 교보재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랑과 지식과 건강을 위해 치열하게 살고 있는 제 인생이 결국은 허무와 썩어짐으로 없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떤 인생도 허무와 썩어짐을 면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허무와 썩어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어 영원한 생명과 의와 거룩도 함께 있습니다.
세상이 모르는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결코 썩지도 않고 허무하지 않는 생명과 존귀와 영광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2000년의 역사동안 세상이 핍박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생명이 있기에 그 많은 방해에도 기독교는 여전히 세상의 소금이며 빛입니다. 할렐루야
소금과 빛이라는 말의 의미는 황금이 아니고 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황금과 열이 되고 싶어 합니다. 자존적인 힘을 갖고 싶은 것입니다.
황금은 자체적인 힘으로 다른 이의 혼을 빼어서 저절로 굴복 시키고 열은 마음에 안들면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은 자존적이지 않습니다. 소금은 섞여야 하고 빛은 어둠속에 들어가야만 진가가 들어납니다.
그래서 소금은 녹아져야 되고 빛은 자신을 태워야만 합니다. 그러니 힘든 일이요 고난입니다.
이 썩어지고 허무한 세상에서 참된 진가를 들어내야 하기에 고독한 것이고 괴로운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찬들이 소금과 빛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황금과 열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인들이 자살하고 장례식 치르는 것을 보면 영정 사진에 십자가를 걸고 나갑니다.
그들도 교회를 다녔다는 것이며 그들도 크리스찬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된 소금과 빛이라고 한다면 절대로 그렇게 비참하게 삶을 끝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현실에서도 장차 나타날 영광을 오늘로 끌어와 사는 그들이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날라리 신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소금과 빛은 될 수 없습니다.
20절을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이유를 굴복케 하시는 이의 뜻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저 짐승들이 하나님이 엎드려 있으라고 했으니까 인간에게 덤비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끼리는 큰 몸집에도 잡혀서 상아를 내주고, 곰은 산채로 쓸개를 내 주고 있습니다.
소와 돼지는 인간에게 전신을 다 잡혀 먹힙니다. 꼬리, 내장, 머리, 할 것 없이 다 먹힙니다.
여름에는 닭과 개가 보양식으로 희생 되고 생선들은 잡히면 산채로 살점이 떨어져 초장과 함께 사람 목구멍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들은 이렇게 허무한데 굴복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굴복하라고 하신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19절 말씀을 보십니다. 그들은 인간에게 괴롭힘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저 짐승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최악의 삶을 사는 못된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최악의 환경에서도 오히려 최고로 멋지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짐승들은 인간 때문에 갖은 고생 다하다가 죽어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인간들이여 당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최고 작품입니다.
그러니 허무한데 굴복하지 말고, 제발 썩기 위해 살지 말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회복하십시오. ”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고기를 먹으면 안 됩니다. 오늘부터 고기 먹을 때 이렇게 말하고 먹으십시오.
“ 미안하다. 내가 이것 먹고 크리스찬으로 멋지게 살게 ” 라고 인사하고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배우고 교회에 다니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 이외에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휴머니즘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저 세상을 알고 있고 현재 뿐만 아니라 영원한 미래까지 알고 있습니다.
썩어질 것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않고 쇠하지 않을 영원한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40 대 남자가 서정리역에서 지하철 문이 닫히지 않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밖으로 목을 내밀었습니다.
순간 문이 닫혔고 그만 목이 끼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목이 낀 채로 낄낄대며 웃고 있는 겁니다.
옆에 있던 꼬마가 이상해서 묻습니다. "아저씨 안 아프세요? 왜 웃어요?“ 남자가 말하길 “나 말고 한 놈이 더 있어”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뭘 보고 계십니까? 무엇을 보고 웃고 무엇 때문에 탄식하고 있습니까?
현실과 믿음 사이에 낀 채, 썩어질 것과 허무한 것 때문에 웃고 울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허무와 썩어짐의 유혹을 이길 믿음은 있는 것입니까?
먹고 살아야 하는 이 처절한 현실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서 영광된 미래를 성취할 믿음은 있는 것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연세가 몇이십니까? 거울을 들여다보면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거기 계시지 않습니까 ?
화장을 두텁게 칠해도 거울 속에 비치는 여러분의 모습 속에서 친정어머니가 보이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짧은 것이 세월이고 제일 허무한 것이 인생입니다.
지나고 보면 일주일은 하루보다 짧습니다. 일 년은 일주일보다 더 짧습니다. 지난 십년은 일년보다 더 짧습니다.
이 세상과 이별하고 주님 만날 시간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제발 미련해지지 말고 지혜로워지십시오.
남들이 얼마를 벌었든지, 하루아침에 돈 벼락을 맞았든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들의 성공 거기까지입니다.
이 세상의 것 결국 다 허무와 썩어짐으로 끝이 납니다. 그들은 죽음이 시작되어야 그 비참함을 압니다.
그것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영원한 고통과 심판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허무와 썩어짐에서 건짐을 받았고 뿐만 아니라 영광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날라리로 믿고 박쥐처럼 믿으면서도 황금과 열을 손에 쥐든 말든 그것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절대로 춤추며 미끄러지듯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 쉽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됨을 포기하면 보다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날라리 신자, 박쥐 신자 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냥 뺀질대면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의 끝자락에 설 때, 그 엄위로운 순간, 몸서리를 치며 떨게 됩니다.
소금과 빛이 되라는 것은 크게 출세하라는 말이 아니라 크리스찬으로서 정당하게 살라는 뜻입니다.
남편에게 여러분의 믿음을 인정받고 자식에게 믿음을 인정받고 부모에게 믿음을 인정받으십시오.
목사에게 신앙을 인정받는 만큼,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가족과 이웃과 동료에게서 그 인정을 받아 내십시오.
그것이 제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른 신앙생활이고 그것이 빛이고 소금입니다.
황금과 열이 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지만 소금과 빛은 우리가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크리스찬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방해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으로 허락된 일입니다.
그렇게 사시면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가 보장합니다.
죽어 세상 떠날 때 주님께서 천국 문을 활짝 열고 나오셔서 여러분의 머리에 의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소망으로, 우리 앞에 정해진 길과 요구 앞에 지거나 썩지 마시고, 소금과 빛이 되셔서
최후 승리 얻는 성도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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