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6. 주일예배설교
시편 119편 145~152절
당장 필요한 기도와 묵상
(나를 구원하시는 말씀, 시편 119편-ק편)
■ 세상사 다 이해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시비를 건 것도 이해합니다. 칸트가 건 시비는 이성의 한계에 대해서였습니다. 그는 우주, 사후 세계, 신 등에 대해 이해시키려는 모든 이성적 작업에 대해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리 이해시키려 해도 이성의 이해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볼 수 있고,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에 한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순수이성’이라고 했습니다.
뭐, 좋습니다. 칸트가 건 시비는 인간의 이성적 한계라는 차원에서 일단 인정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사 또한 다 이해하며 살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도 포함됩니다. 하나님의 행위 중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욥이 친구들과 끝없는 논쟁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만하라며 질문하신 것이 있습니다. ‘네가 도대체 나에 대해, 그리고 내가 만든 세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고, 어느 정도나 이해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고 욥이 한 대답은 ‘잘못했습니다. 아는 것이 없는데 아는 척했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였습니다. 참으로 바른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욥 이상으로 혼난다 해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 150절입니다.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의 법을 무시하며 악을 도모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부담스럽고 긴장되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151절 때문에 괜찮고 오히려 담대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악인들이 가까이 있는 상황이 대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상황을 두고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가까이 계신 데, 왜 악인들이 가까이 오도록 두시느냐는 원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는 이유는 악인들의 행태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것들은 참으로 기가 막히고 끔찍한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150절입니다. “악을 따르는 자들이 가까이 왔사오니, 그들은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주님의 법에서 먼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데,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놔두시니, 주님이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사실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 중에 지켜주신다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 약속에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까? 삶의 곳곳이 불법 천지이고, 주님의 법에서 먼 행동들이니 이 약속을 들었을 때 큰 위로와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악이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악인 또한 가까이 있지도 못하게 해주실 것이라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악/악인들이 곁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향한 섭섭함, 원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이 잘못하신 것이죠? 아닙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해석하고는 주님께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지켜주심은 악/악인이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와도 어찌할 수 없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혹시 해코지를 하고, 심지어 박해를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 악/악인이 항복하게 해주시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지켜주심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운 설명인가요?
‘비버’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집짓기 선수입니다. 아마 동물의 세계에서 최고의 건축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동물원에서 비버를 보면, 비버는 아주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모읍니다. 그리고 집을 짓습니다. 참 튼튼한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집이 완성되자마자, 사육사는 가차 없이 비버의 집을 부서뜨립니다. 그것에 비버는 망연자실합니다. 그렇지만 비버는 또다시 나뭇가지를 부지런히 날라 튼튼한 집을 짓습니다. 그러면 사육사는 또 비버의 집을 부서뜨립니다. 그러면 비버는 또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사육사는 또 집을 부서뜨립니다.
도대체 사육사는 이 냉정한 일을 왜 계속하는 것일까요? 비버를 괴롭히는 것이 재미있는 것일까요? 비버가 미운 것일까요? 아닙니다. 비버를 운동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비버의 활동량을 늘려야 비버가 건강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가 자극적이고 냉정하지만, 이것이 주님이 이유입니다. 악인이 가까이 오는 것을 놔두시는 이유는, 영적 긴장감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덕분에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고, 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게 됨으로 영적 건강이 도모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145절부터 149절이 온전히 이해됩니다. 그리고 이대로 하게 됩니다.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리이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이처럼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간절히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심지어 기도와 묵상을 위해 새벽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건강을 가져옵니다.
물론 반대의 상황도 가능합니다. 짜증스럽고 원망스러워서 오히려 기도도 안 하고, 말씀을 놓아버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깨달음과 회개를 통해 다시 기도하고, 다시 말씀을 붙잡게 됩니다.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주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가까이 온 악/악인에 대한 이해가 확실해지면, 더욱 확실해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의 모든 계명이 진리임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5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이처럼 말씀이 진리이심에 대해 확신하게 되면, 혹시나 했던 것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습니다. 설마 했던 것들도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참으로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의심도 의문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152절의 고백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영원 전부터 있으셨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두고 천연덕스럽다고 한 것은 시편 기자를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와는 달리 왜 악/악인이 가까이 오도록 놔두셨느냐고 원망하던 이들을 향해 날린 유머입니다.
사실 이들이 주님의 지켜주심의 약속에 대해 의심하고 의문을 갖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원망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기도도 안 하고, 말씀도 놓아버렸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깨달음과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서 다시 기도하고, 말씀을 붙잡게 함으로 정상적 신앙 상태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전적이 있는 이들이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152절)고 고백하니, 이것이야말로 천연덕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는 잘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전의 잘못에 휘둘려 계속 답보상태의 신앙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의심의 알을 깨고 일어나서 천연덕스럽게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주님께 경배드려야 합니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참으로 이러한 고백 행위가 당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이 된 것입니다.
■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여러분과 다시 읽고 또 읽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147절과 148절입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
시편 기자는 날이 밝기 전에, 새벽녘에 눈을 뜬다고 했습니다. 기도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세상을 보면, 세상이 악하니 기도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은 주님의 말씀과는 먼 일들입니다. 폭력과 전쟁입니다. 시기와 미움입니다. 사기와 거짓입니다. 이를 바꾸는 샬롬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기도할 일이 많고, 일이 시급하니, 새벽에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조치를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하실 때까지 영혼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영혼을 열고 느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느껴야 하니 좀 더 조용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에 새벽만큼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사실 깨달음과 응답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선입관이나 편견, 두려움, 선호 같은 걸 전부 내려놓고 우리 앞에 있는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필요한 것이 인내심입니다. 응답받을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인내심, 쉬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인내의 시간을 들일 때, 올바로 가는 길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한 방향에로의 오랜 순종이 낳는 결과입니다.
■ 그렇기에 새벽 기도와 새벽 묵상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할 일이 많아서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삶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해야 할 기도가 많기에, 꼭 들어야 할 말씀이 있기에 당장 새벽 기상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와 새벽 묵상이 여러분 곁에 똬리 튼 악/악인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거룩한 에너지의 근원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