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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학교를 다닐 때에 학교에서 학생들의 가정 형편을 파악하는 일을 학년초에 했습니다. 부모님의 직업이 무엇이며, 어떤 집에 살며, 전화가 있는지, 텔레비전이 있는지를 묻는 항목이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화가 있는 집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전화는 부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부모님을 떠나 도시로 공부하러 떠난 자식들이 부모님에게 소식을 전하고 연락하는 것은 대개 편지를 통해서 했습니다.
“부모님, 전상서, 더운 날씨 가운데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저는 부모님의 은공으로 공부를 잘 하고 있으며 건강도 좋습니다. 부모님께서도 부디 건강에 유의하시고 …….”
이렇게 편지를 죽 써내려 가다가 마지막에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누구누구 올림” 이렇게 편지를 썹니다. 객지에 나간 자식이 편지를 부모님께 쓴 목적은 ‘부모님 전상서에서 …. 시작해서 누구누구 올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맨 아래에 ‘추신’이라고 써고는 별표를 해둔 내용입니다. “생활비가 떨어졌습니다. 빨리 보내주십시오”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편지를 끝까지, 말을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끝까지 가보아야 그 진심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데살로니가전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맨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난 1년 하고도 1개월 동안 특별한 절기가 없는 한 데살로니가전서를 설교해 왔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 지겨웠던(?) 마지막 날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재림을 고대하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인근 지역 사회에 믿음의 좋은 소문을 내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격려하고 칭찬하고 당부를 했습니다. 그런 편지의 맨 마지막입니다.
여러분이 사도 바울의 입장에 선다면 편지의 말미에 어떤 내용을 쓰겠습니까? 이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사람들, 지금처럼 수시로 문자를 보낼 수 없는 시대에,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로 편지를 마무리 하고 싶겠습니까?
오늘은 바울의 마지막 부탁을 보십시다.
1.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25).
무슨 부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윟 기도해 달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런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기도의 능력이 있고 또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는 능력있는 종입니다. 사도입니다. 이런 사람인데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기도를 세 번에 걸쳐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그대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언급했습니다(1:3). 그런 그가 성도들이 더욱더 사랑이 넘치고 그들의 마음에 거룩함이 가득하여 강하기를 기도했습니다(3:12-13). 나아가 성도들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온전히 성화되도록 기도했습니다(5:23). 그런데 이제는 바울이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바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들을 기억하고 기도했던 내용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건강과 재물과 형통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 사랑이 넘치고, 마음에 거룩함이 가득하여 강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더욱더 주님을 닮고 온전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중심과 관심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진정으로 이루어내어야 할 것,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필요와 긴급함이 기도의 동력이 되어서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습니다.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음에 있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작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항상 기도하고 끊임없이 기도했던 제목에 우리는 어떤 관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사랑, 거룩, 온전함 – 이런 것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실제적으로 깨놓고 말하자면 ‘돈이 안되는’ 제목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인데도 말입니다.
이번 주간에 말씀 묵상이 예수님의 산상보훈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여든 무리들 가운데서 천국시민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설교하신 내용입니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너희가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무원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6-48)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는 삶, 완전하심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목회자로 살아가면서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사도 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성도들이 지금 당장 급한 문제를 기도하기도 하지만 정말 제가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를 이해가 됩니다. 더 사랑하고, 더 거룩해지고, 더 온전해지는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겸손함을 봅니다. 그리고 기도를 당부하는 인간성을 봅니다.
한국에 있을 때에 저와 함께 사역했던 여전도사님의 시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 여자에게서 시월드는 도무지 해결이 될 수 없는 영원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여전도사님은 시모의 죽음 앞에 목놓아 펑펑 울었습니다.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익살스럽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 아들인 나도 안 울고 있는데 며느리가 왜 그렇게 울어?”
그때에 여전도사님께서 남편을 휠 겨보며 말하기를 “여보,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분이 세상 떠났어요. 그러니 …..”라고 했습니다.
기도해 주는 사람, 내가 기도해야, 본인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 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여러분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을 때에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에 누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까?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천만 다행이며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쓰러질 수는 없습니다.
누가복음 23:27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에 많은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왔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울면서 기도하는 부모님이십니까? 자녀들을 위해 울면서 기도하는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이 자녀를 다 가르치지 못하고, 다 잘해 주지 못하니까, 자기에게 부족한 점들이 많아서 제대로 잘 교육하지 못하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녀를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의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의 어머니’라고 불리어 지고 있습니다. 30세가 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탕과 주색에 빠져 있던 어거스틴은 그칠 줄 모르는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 눈물의 호소, 눈물의 권고 앞에 무릎을 꿇고서 위대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모니카는 예레미야처럼 사랑의 눈물을 뿌리는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자녀를 돌려 세우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부모를 둔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2.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사도바울은 또 무엇을 당부하고 있습니까? 26절에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26)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서로 인사를 할 때에 마로만 하는 인사에다가 몸짓, 즉 ‘거룩한 입맞춤’을 더하라고 당부합니다. ‘입맞춤’은 지역과 시대, 문화에 따라서 다릅니다. 서로 문안하여 인사를 나눌 때에 입맞춤은 그 당시의 친근한 문화였습니다. 오늘날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키스와는 다른 것입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의 시대(2세가 중반)에는 성찬식을 행할 때에 입맞춤을 나누는 것은 예배 의식의 하나였습니다.
성도들이 서로 문안할 때에 그저 말로만 인사를 나눌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적절한 몸짓에 의해 강하고 따뜻하고 더 인격적인 인사를 나눌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좋아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에게’라고 했습니다. 차별하거나 편파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사슴을 기르는데, 암놈과 숫놈을 구분해서 펜스 안에 둡니다. 숫사슴들이 있는 펜스에 유독 한 마리 사슴이 어울리지 못합니다. 이 사슴은 작년에 가장 늦게 태어나서, 가장 늦게 숫사슴 펜스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왕따를 당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한 쪽 뿔까지 부러져서 덜렁거리며 달고 있습니다. 이제는 왕따 당하는 숫사슴은 떼로 다디는 그룹에 아예 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픕니다.
저는 숫사슴 그룹을 보면서 오늘 인간사회, 교회에서도 저런 모습이 없지 않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교회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해서 쭈빗 쭈빗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만 드리고는 살짝 살짝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따 그 사람, 성격 한 번 별나네’라고 생각하고 그냥 둡니까? 누군가 나아가서 손을 내밀어서 악수하고 안부를 물어주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평소에 못 보던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야 뭐, 예배만 드리면 되었지, 목사님, 집사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하고 그냥 둡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해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누구누구입니다’라고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같이 식사를 해야 합니다. 식사를 할 때에 그 분 옆에서 함께 먹으면서 말 벗이 되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내가 먼저 인사하고, 손을 내밀고, 정을 내는 것은 오지랖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관심이며 사랑이며 내가 불편을 감수하는 희생적인 태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어른, 큰 사람이 누구신 줄 아십니까? 직분이 뭔가, 혹은 나이가 얼만가, 혹은 얼마 동안 교회에 다녔는가에 있는 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하면 사람을 품는 넓은 가슴이 있는 사람입니다.
자주 자주 말씀하는 이야기이지만 교회 안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다 다르기에 개성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내 취향에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 썩이지 싫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리고 작은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그러나 큰 사람, 어른은 다들 품어 냅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안되고, 저 사람은 저래서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이래도, 저 사람은 저래도 내가 품고 안아야 할 사람이다고 생각하고 다가가서 격하게 포옹하는 것입니다.
영국이 낳은 극작가 윌리암 세익스피어가 했던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왜 약한 여자인 어머니가 강합니까? 아무리 못나고 말썽을 부리는 자녀라도 어머니이기에 품을 수 있기 때문에 강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손을 내밀어 문안하고 교제하는 성숙한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이 편지를 읽으라
사도 바울은 성도에게 또 무엇을 당부합니까? 27절에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27)
바울은 사사로이 편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를 힘입어’서 명령했습니다. 이 편지(말씀)을 읽어주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당부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성경을 잘 읽으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간절하게 들어서 험한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당부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힘입어 당부를 드립니다. 세상에서 특별하고, 신비로운 말을 찾고 구하기 위해서 예언자를 찾고, 어떤 신령한 사람을 찾아 나서지 말고,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편지(말씀)인 성경말씀 속에 이미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을 주셨습니다. 무궁무진하게 많은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내가 오늘 접하는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 혹은 두 구절 속에 오늘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고 행하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은혜가 너희에게 있기를 ….
사도 바울은 편지의 맨 마지막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8)라고 마지막 축도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무디 선생은 고백하기를 “은혜가 내 입을 붙잡아 놓으니 내가 예수님을 주라 시인할 수 있었고, 은혜가 내 마음을 붙잡아 놓으니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를 위하여 살 수 가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은혜로 구원 받았습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삽니다. 이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이 은혜에 대한 각성과 욕심은 지나침이 없습니다. 더 많은 은혜,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누리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사로 잡히고, 깊은 은혜의 바다에 빠지면 달라집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홀로 외롭게 죽어가야 할 나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놓으시고, 나를 의롭다 칭해주셨습니다. 나를 불러 손잡아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으면 (1)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서로를 돌아보며 문안합니다. 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읽고 묵상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재림을 우리도 고대하며 살아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많이 누리기를 소원하면서 살아가기를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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