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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8월 12일 화요일
[(녹)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말씀의 초대
모세는 온 이스라엘에게, 자신은 요르단을 건너지 못하고 여호수아가 그들 앞에 서서 건너갈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시며,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여호수아, 힘과 용기를 내어라. 너는 백성과 함께 그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1,1-8
1 모세는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을 하였다.
2 “나는 오늘로 백스무 살이나 되어 더 이상 나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또 주님께서는 나에게,
‘너는 이 요르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친히 너희 앞에 서서 건너가시고,
저 모든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시어,
너희가 그들을 쫓아내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너희 앞에 서서 건너갈 것이다.
4 주님께서는 아모리족의 임금 시혼과 옥과 그 나라를 멸망시키신 것처럼,
저들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5 이렇게 주님께서 그들을 너희에게 넘겨주시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대로 그들에게 해야 한다.
6 너희는 힘과 용기를 내어라.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겁내서도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시면서,
너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7 그러고 나서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 놓고,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말하였다.
“힘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이 백성과 함께,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저 땅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8 주님께서 친히 네 앞에 서서 가시고, 너와 함께 계시며,
너를 버려두지도 저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
너는 두려워해서도 낙심해서도 안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10.12-14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신명기 31―34장은 구약 성경 오경의 결론을 제시하며 여호수아기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구실을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는 온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너는 이 요르단을 건너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신명 31,2). 또한 여호수아를 앞에 세우며 말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네 앞에 서서 가시고, 너와 함께 계시며, 너를 버려두지도 저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니, 너는 두려워해서도 낙심해서도 안 된다”(31,8).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한 위대한 지도자인 예언자 모세는 약속의 땅에 발을 딛지 못합니다. 그는 사십 년 광야 생활에 고통과 두려움, 의심과 번뇌를 겪었을 테지만, 하느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은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는 것까지였습니다.
인간적인 마음에 서운해하거나 섭섭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까지가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에 관한 논쟁을 다룹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마태 18,4), 다시 말해서 스스로 우쭐거리거나 자기 잘난 맛에 살기보다 회개하고 겸손한 이가 되라는 초대입니다. 아울러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18,14)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화려하고 위대하며 길이 남을 것 같은 역할이나 업적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그저 초라하고 덧없으며 짧은 한때의 것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자연스러운 욕구이겠지요. 그런데 이 욕구 충족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에게서 오는 위로와 인정은 영원할 수 없고, 하느님만이 우리의 전부이시며 온전히 채워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김상우 바오로 신부)
비극적인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많은 성인 성녀들 가운데 참으로 기구하고 특별한 생애를 보낸 분이 오늘 축일을 경축하는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녀입니다. 젊은 나이에 결혼한 요안나는 9년간의 결혼 생활 중에 6명의 자녀를 출산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아내 역시 남편을 존경했습니다.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친구와 사냥을 나갔던 남편이 친구의 오발 사격으로 인해 큰 부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요안나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간병했지만, 안타깝게도 워낙 중상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요안나의 상실감과 비통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뭐라 말을 잇지 못했고, 다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루 온 종일 방안에 칩거하던가, 깊은 산속에 가서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이렇게 암울했던 요안나의 인생에 한 줄기 희망의 서광이 비추었는데, 그것은 한 인간 존재를 통해서였습니다. 33세 되던 그녀가 친정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갔었는데, 그곳 성당에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강론을 듣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를 뵙는 순간, 요안나는 꽉 막혔던 물꼬가 갑자기 터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의 목표나 방향성을 이분에게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했답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아주 지혜롭고 현명하게 요안나를 영적으로 동반했습니다. 지나친 육신의 고행을 자제하고 영적인 극기로 나아가도록 도왔습니다. 매일의 고통스러운 일상사 안에서 실천해야 하는 숨은 성덕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해감에 따라, 요안나는 소녀 시절 품고 있었던 수도생활에 대한 희망을 다시 지니게 되었고, 가르멜 수녀회 입회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조언에 따라 미망인들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수녀원을 함께 창립하였습니다. 수녀회의 이름은 방문 수녀회입니다. 아직도 존속하고 있으며, 한국에도 진출해 있습니다.
미망인(未亡人)이라는 표현이 차별적 언어라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분위기입니다. 뜻을 보면 남편은 세상을 떠났으나 아직 따라 죽지 못한 부인이라는 뜻이니 그렇습니다. 과부라는 표현도 별로 좋은 표현이 아니라, 최근 서울시에서는 ‘고 아무개씨의 부인’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답니다.
아무튼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부인들에게도 수도 성소의 길이 활짝 열리다 보니, 새로운 형태의 수녀회인 방문 수녀회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습니다. 수많은 지원자들이 줄을 이었고, 요안나가 임종할 당시 분원수는 총 75개에 달했습니다.
요안나가 6명이나 되는 자녀의 어머니자, 수녀회 총원장으로서 새로운 영적 여정을 시작했지만, 넘어서야 할 난관이 참 많았습니다. 큰 아들이 전쟁터에서 사망했습니다. 딸 하나도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든든한 영적 아버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도 먼저 하느님 품으로 건너갔습니다.
사건 하나 하나가 요안나의 심장을 날카롭게 찌르는 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수시로 다가오는 모든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들을 지속적으로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방문 수녀회의 본부는 크고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있는 안시에 위치해 있는데, 한번은 페스트가 안시를 휩쓸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습니다. 요안나의 가족들은 빨리 안시를 벗어나 안전 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요안나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딸이요 자매 수녀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며, 안시에 그대로 남았습니다. 수녀원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거리로 나가 신음하며 죽어가는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간호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따뜻하고 극진했던지, 사람들은 요안나를 가르켜 위로의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비극적인 현실에 좌절하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부단히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성찰하고 헌신했던 요안나의 생애는 오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혹시 예전에 조선 왕 이름 외우셨던 기억 있으신지요? “태정태세 문단세~” 하면서 외우던 왕의 이름들. 순서가 중요했습니다. 학교 다닐 땐 성적으로 등수가 매겨지고, 회사에 들어가면 실적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도, 옆 사람도 그런 잣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혹은 “나는 왜 저만큼 못할까…” 그러다 보면 괜히 속이 상하고, 분하고, 질투가 생기기도 합니다. 나라 사이에도 순위가 있습니다. G7,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같은 말도 다 순위를 매긴 결과입니다. 세상은 늘 크기와 숫자, 능력과 실적으로 줄을 세우려고 합니다. 제국주의 시대와 전체주의 시대에는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인류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끌었습니다. 크고 강한 나라가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더 크게 이바지하기로 했습니다. 문화와 예술로 국가 간의 장벽을 무너트리기도 했습니다. 통신과 교통이 발전하면서 이제 협력과 상생의 길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국지적인 분쟁과 전쟁이 있지만 인류는 공동선을 위해 한 걸음씩 내딛고 있습니다.
교회도 신앙도 크기와 규모로 순위를 정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서울 대교구에서 미주 지역에 파견한 성당이 있는데 그중에 보좌 신부님이 있고, 교우가 많은 성당이 4곳 있습니다. 신부님들은 그 성당들을 ‘Big 4’라고 부릅니다. 워싱턴 DC 성 김대건 안드레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필라델피아 홀리 엔젤 성당입니다. 교구 사제 모임을 할 때도 4개 성당이 돌아가면서 준비합니다. 모임의 분담금도 4개 성당이 많이 부담합니다. 그만큼 재정적인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은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있지만, 전에는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 있었습니다. 미사 참례 인원과 재정은 달라스 성당보다 적지만 공동체는 가족처럼 기쁘게 지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있듯이, 신앙의 기쁨은 공동체의 규모와 크기로 정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고, 친교와 헌신이 있고, 나눔과 기도가 있다면 복음의 기쁨이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그런 우리에게 방향을 다시 알려줍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친구라 불릴 만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홍해를 가르고,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그는 자신이 들어가지 못하는 약속의 땅을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양보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고집하지 않고, 조용히 한걸음 물러섭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었고, 참으로 겸손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말씀을 들으면, 왠지 마음에 찔리지 않으십니까? 어린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매사에 순수하게 받아들이며, 쉽게 웃고 쉽게 용서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가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순수하고, 겸손하며,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마음 말입니다.
요즘, 원망과 미움이 생기는지요? 아니면 분노와 질투가 생기는지요? 그렇다면 내가 세상을 내 욕심과 세상의 잣대로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내 마음에 감사와 찬미가 가득하다면 우리는 이미 신앙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십자가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겨진다면 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4-5)
하늘나라 싹 띄운
지금여기에서
낮은 이 품어
낮아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높아집니다
하늘나라 싹 띄운
지금여기에서
낮은 이 밟아
높아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낮아집니다
하늘나라 싹 틔운
지금여기에서
작은 이 품어
작아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커집니다
하늘나라 싹 틔운
지금여기에서
작은 이 밟아
커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작아집니다
하늘나라 싹 띄운
지금여기에서
보잘것없는 이 품어
보잘것없어지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돋보입니다
하늘나라 싹 띄운
지금여기에서
보잘것없는 이 밟아
돋보이니
지금여기 열매 맺는
하늘나라에서
보잘것없어집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ane Frences de Chantal)
신분: 설립자, 수녀
활동지역:
활동연도: 1572-1641년
같은이름: 방지가, 샹딸,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프란체스카, 후아나
1572년 1월 23일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Bourgogne) 지방 디종(Dijon)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딸로 태어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oanna Francisca de Chantal)은 18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엄격한 가톨릭적 분위기 속에서 아버지로부터 폭 넓은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20세 때에 크리스토프 드 샹탈(Christophe de Chantal) 남작과 결혼한 그녀는 충실한 아내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요 검소하고 알뜰한 주부로서 몰락의 위기에 처해 있던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성(城)에서 매일미사를 봉헌하는 관례를 만들었고, 다른 성의 신심활동을 도입하여 소개하면서 자선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그들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은 유아 때 사망하였다.
게다가 1601년 남편이 사냥을 나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그녀는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시아버지로부터 자신이 살고 있는 몽틀롱(Monthelon)으로 오지 않으면 손자들의 상속권을 박탈하겠다는 위협을 받고 할 수 없이 몽틀롱으로 가서 7년 동안 자녀교육에 힘쓰며 살았다.
1604년 사순시기 동안 친정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을 방문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제네바(Geneva)의 주교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의 설교를 듣고 대단한 감명을 받아 그의 영적 지도를 청하였다.
처음에 다소 망설이던 주교는 결국 그녀의 간청을 받아들였고 여러 번의 만남을 통해 서로 영성적인 교감을 나누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과 주교에게 순종할 것을 서원하였다.
디종의 카르멜회 수녀들과 만남을 통해 큰 영향을 받은 그녀는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하고자 원했으나 주교는 좀 더 인내를 갖고 기다리도록 했다.
1607년에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그녀에게 영성적으로는 성모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였을 때에 드러내었던 덕들을 따르고, 활동적으로는 노인들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하는 수도 공동체를 세우려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였다.
이에 뜻을 같이 한 그녀는 주교의 도움으로 자녀들의 장래 문제와 집안의 대소사를 해결한 후 안시(Annecy)로 떠났는데, 그곳은 주교가 새로운 수도회를 세우고 싶어 하던 곳이었다.
1610년 6월 6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는 안시 수도원의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녀와 2명의 동료들이 그 자리에 함께 참석해 주교로부터 정식으로 회칙을 받았으며 이듬 해 그들 모두 수도 서원을 하고 그녀가 원장이 되었다.
이 수도회의 이름과 회헌은 여러 번 바뀌어 오다가 마침내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공식 명칭으로 확정하였다.
이 수도회는 1612년 1월부터 병자방문을 시작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이듬해 그녀는 시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후 더욱 영성적인 성숙에 힘쓰며 수도회의 새로운 분원 설립에 주력하였다.
1614년 리옹(Lyon)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면서 많은 난관을 겪기도 했지만 그 모든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의 도움을 받아 수도원을 급속히 확장해 나갔고 많은 여성들이 입회하였다.
이러한 성공적인 확장은 육체적인 고행보다는 겸손과 온화함을 강조한 주교의 가르침과 그녀의 신중함과 헌신 덕분이었다.
1619년에 그녀는 파리(Paris) 분원을 설립하면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Vincentius a Paulus, 9월 27일)를 만나게 되었는데,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초기 정신과 활동 방향을 옹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사망한 후에는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주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사망하던 1622년 당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의 분원은 13개였고, 프랑스 전역으로 확장되어 그녀가 사망할 당시 약 86개의 분원이 있었다.
그녀는 수도회 내적, 외적인 시련을 견디어 내면서 계속해서 분원을 설립하기 위해 거처를 옮겨 가며 생활하였다.
1628년 흑사병으로 많은 수도자들이 사망한 후 안시 수도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금 장상을 역임하다가 1641년 마지막으로 파리에 가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를 만나고 돌아온 후 느베르(Nevers)에서 병을 얻었다.
결국 물랭(Moulins)의 분원에서 몸져누운 그녀는 1641년 12월 13일에 그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녀의 시신은 안시로 옮겨져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의 무덤 곁에 묻혔다.
그녀는 1751년 11월 21일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7월 16일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해 시성되어 1769년부터 로마 전례력에 포함되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가 쓴 “신심생활 입문”(The Introduction to the Devout Life)에 잘 나타나 있다.
2001년 12월 18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교령에 의해 성녀 축일의 전례적 기념일이 12월 12일에서 8월 12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1999년 3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가 라틴아메리카의 수호자로 선포한 ‘과달루페(Guadalupe) 성모 축일’과 같은 날이어서 전례적인 기념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는 그녀의 축일을 8월 18일로 변경하여 기념하고 있다.
상류 계급 출신의 여인으로서 부인이나 혹은 과부로 혹은 수녀로 각기 그 신분에 적합한 덕을 닦고 중인이 모범으로서 성녀가 된 예는 극히 드물지만, 요안나 프란치스카는 그런 드문 분 중의 한 분이다. 요안나는 세례명이고, 프란치스카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사모하며 따르기 위한 그녀의 견진 본명이다.
그녀는 프랑스의 부르고뉴 주 디종 시의 귀족 프레미오가의 출신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때 주(州)의회 의장을 겸한 근면(勤勉)한 인사였으며, 생후 얼마 안되어 어머니를 여읜 요안나를 측은히 여겨 특별히 관심을 갖고 그녀의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요안나는 아직 나이 20세 미만이었을 때에, 어떤 부유한 귀족인 청년에게 구혼을 받았으나 그가 이단을 따르는 자란 것을 알자 즉시 거절해 버렸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신앙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그녀는 국왕의 충신이며 신앙심이 깊은 신자인 바롱크리스토퍼 드 샹탈 남작의 구혼을 받고 이것이 주님의 뜻인 줄 알고 승낙을 해 연분을 맺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는 이 새 가정에는 봄 날씨와 같은 온화함이 깃들었고 즐거움뿐이었다.
남편인 샹탈이 혼인 전에는 가사보다도 국사(國事)에 치중하여 분망했던 관계로, 집안에는 약간의 부채가 있었으나 그것도 주부인 요안나의 알뜰한 살림에 의해 얼마 후에는 깨끗이 청산을 했다. 그로부터 9년간 그들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 자녀들의 교육도 알뜰히 시켰다.
그러나 세상이란 것은 믿지 못할 일이어서 보름달같이 원만하던 그녀의 가정에도 우수가 깃들게 되었다.
하루는 친구와 더불어 사냥을 간 남편이 친구의 오발로 인해 불의의 큰 부상을 입고 신음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따뜻한 간호도 보람없이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에 정이 두터웠던 부부였던 만큼 프란치스카의 비통한 모습을 보는 사람은 저마다 눈시울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도 만나기 싫어 방안에 들어앉아 있던가, 혹은 산속에 가서 외로이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종일 울기만 했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이런 비통한 마음이 사라지고 동시에 하느님의 빛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눈물을 씻고 머리를 들어 앞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여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리운 그분의 유물인 아이들을 잘 길러내서 초토에 파묻힌 남편의 영전에 보답할 것을 굳게 결심했다.
상(喪)을 벗은 요안나는 유산을 자녀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그들을 데리고 마테본에 사는 시어머니 댁에 갔다.
시어머니는 본래 무뚝뚝한 성격에다가 그녀가 신임하는 여종까지 요안나를 눈에 티처럼 여겨 그 시어머니에게 여러 가지 나쁜 말을 했으므로 자연히 그녀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안나는 사랑하는 아들들을 위해 모든 것을 잘 참고 시어머니나 그 여종이나 또는 그 여종의 아이들에게까지 한결같이 친절로써 대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요안나는 33세가 되었다.
그 해 그녀는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디종에 있는 친정에 갔었는데, 때마침 유명한 프란치스코 드 살이 그곳에 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성당에 가서 그의 설교를 들은 그녀는 이 분이야말로 자신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곧 그의 지도를 청했다.
이때부터 요안나는 성인의 지도를 받으며 성덕에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녀는 프란치스코에게 육신의 고행보다도 영신적 극기에 대해서 지도를 받았고, 숨은 선덕의 아름다움을 배웠다.
그녀는 실수로 인해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을 물론 미워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사람을 만나서, 지금까지 맺혀있었던 모든 원한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뜻으로 그 사람의 딸의 세례 대모가 되어 주었다.
자녀들이 이제는 다 컸으므로 그녀는 어머니로서의 일도 적어졌다.
그래서 요안나는 소녀시절에 품었던 수도 생활에 대한 동경을 다시금 갖게 되었다.
그녀는 지도 신부인 성 프란치스코에게 그뜻을 밝혔다. 그녀는 가르멜회 입회를 원했지만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전부터 있던 수녀원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과부들을 위한 새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던 참이므로 그 계획은 즉시 실현되어 요안나는 그 계획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곧 ’방문회’의 시초이다. 수녀가 되려면 물론 사랑하는 자녀와 정든 아버지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이 정이 많았던 요안나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한결같이 수도원 입회를 반대했으므로 그녀의 고민은 더욱 커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수도자가 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줄 안 요안나의 신념은 동요됨이 없이 결국 사랑하는 자녀와 아버지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고 수도 서원을 발했다.
그 외에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선한 것이라 인정되는 것은 꼭 실행한다는 서원도 발했다.
그녀는 새로운 수도회의 총장으로서 그 자매들에게 될 수 있는 데까지 어머니다운 태도로써 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기회 있는대로 건축한 분원(分院)의 수는 그녀의 임종 직전만 해도 무려 75개소에 달했다.
그동안 그녀의 성덕을 시기해 고의로 그녀의 사업을 방해하는 이도 있었다.
또 유게노 전투에서 큰아들을 잃었고, 딸과도 사별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다 그녀에게는 비애의 날카로운 칼이 되었다.
그 중에도 가장 비통한 일은 그녀의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의 서거였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았다. 더욱 분발해 많은 자매들을 이끌고 덕행의 길로 매진하는 한편 수도회의 발전을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본부의 소재지인 아네시이에 무서운 페스트가 만연하자 사보아의 공작 부처는 요안나의 신변을 염려해 안전 지대로 피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녀는 자매들을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다고 하며 도리어 시내에 나가 환자들을 돌봐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위안의 천사라고까지 부르게 되었다.
1641년, 요안나는 파리에 있는 수녀원을 방문하고 아네시이로 돌아오는 도중 폐렴에 걸려 위독하게 되어 물렝에서 12월 13일에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곁에 묻혔다.
그녀는 클레멘스 14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복자 인노첸시오 11세 (Innocent XI)
활동년도 : 1611-1689년
신분 : 교황
지역
같은 이름 : 인노첸시우스, 인노켄티오, 인노켄티우스
복자 교황 인노첸시오 11세는 1611년 5월 19일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Milano) 공국의 코모(Como)에서 신심 깊은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베네데토 오데스칼치(Benedetto Odescalchi)라는 이름을 얻었다. 어려서부터 사제성소를 느꼈던 그는 1626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코모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인문학을 배웠다. 1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제노바(Genova)로 가서 가문에서 운영하는 은행의 일을 도우며 도제교육을 받았다. 1630년 그는 페스트의 광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를 잃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로마(Roma)와 나폴리(Napoli)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639년에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어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 때 교황청에 들어가서 다양한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한 그는 1645년 부제 추기경이 된 후 다시 사제 추기경이 되었고, 이어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 받고 있던 페라라(Ferrara)에 교황 사절로 방문하였다. 교황은 페라라의 시민들에게 그를 ‘가난한 이들의 아버지’라고 소개하였다. 1650년 노바라(Novara) 교구의 주교가 된 베네데토는 자신의 수입 전부를 교구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가 선종한 후 강력한 교황 후보였던 그는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결국 1676년 9월 21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의 후임으로 제240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에 선출된 후 인노켄티우스 11세(Innocentius XI, 또는 인노첸시오)라는 이름을 택한 그는 교회에 대한 프랑스 왕 루이 14세(Louis XIV)의 간섭과 견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긴축 재정을 통해 교황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힘썼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도 온건한 입장을 취해 루이 14세 왕의 정책과 배치되었다. 또한 교리교육과 매일 영성체를 장려하고, 신학교 교육의 수준을 높이며, 윤리신학이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리고 1687년 신비주의와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에 물든 미겔 드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에 의해 야기된 이단과 싸우며 교회의 정통교리를 수호하였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는 교황직에 오르기 전이나 후나 늘 단순하고 경건한 삶을 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교회 내의 부패와 족벌주의를 배척하여 큰 존경을 받던 그는 1689년 8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제대 아래 묻혔다. 1956년 10월 7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는 그를 복자품에 올렸는데, 시복식을 위해 그의 유해를 발굴했을 때 죽은 지 26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부패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의 유해는 청동으로 장식된 석관에 모셔져 보존되다가 2011년 5월 1일 복자품에 오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를 모시기 위해 성당 안쪽의 다른 제대로 옮겨 안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