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공의경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론은 허무주의적 견해
식물을 키워보니
세상은 경이롭고 불가사의 합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하지 못하는 일을 목격 했을 때 ‘신비롭다’거나, ‘경이롭다’ ‘불가사의하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무실에 있는 식물이 그렇습니다. ‘홍콩대엽야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보니 작은 오엽의 새순이 돋았습니다. 몇 주 지나서 보니 쑥 자라서 기존의 오옆잎파리를 제치고 가장 높이 솟았습니다. 또 ‘행운’목이 있습니다. 키운지 10년 되었습니다. 어느 날 꽃대가 쑥 솟아 올랐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성장합니다. 마침내 꽃을 피워 냅니다.
사무실에 열대식물이 많습니다. 키우기 쉬운 것이 특징입니다. 물만 주면 자랍니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물을 주는 것 외 다른 것 없습니다. 물만 주어도 새순이 돋고 쑥 자라는 것을 보면 한마디로 ‘경이롭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성장하게 만들었을까요? 준 것은 물밖에 없는데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물만이 아니었습니다. 화분에 흙이 있기 때문에 땅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지대입니다. 수분이 있어서 수대가 있습니다. 사대 중에 남은 것은 화대와 풍대입니다. 화대는 온기입니다. 식물은 너무 추우면 얼어 죽습니다. 그러나 난방이 잘 되어 있다면 얼어 죽지 않습니다. 이로써 화대가 성립됩니다. 다음으로 풍대입니다. 풍대는 공기라 볼 수 있습니다. 공기기 통하지 않으면 식물이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식물에게 준 것은 물밖에 없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7일 만에 물을 한번 줄 뿐임에도 식물은 잘 자랍니다. 그리고 꽃을 피워 냅니다. 단순하게 물만 주어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흙도 있고 온도도 있고 공기도 있습니다. 결국 지수화풍 사대의 작용으로 인하여 식물이 자라게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식물이 지수화풍 사대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사람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육사외도의 견해입니다. 사람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사대로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부처님당시 외도 스승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입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네 가지 광대한 존재(사대)로 이루어진 사람의 그 목숨이 끝날 때에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물은 물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불은 불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S25.5)라 했습니다. 사람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사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식물과 달리 정신기능이 있습니다. 유물론에서는 정신도 물질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모든 감각능력은 허공으로 돌아간다.” (S25.5) 라고 하여 정신기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라고 합니다. 사대가 흩어져 허공으로 돌아 가는 것 역시 ‘돌아간다.’라 합니다. 이는 초기경에서 “땅은 땅의 성분으로 돌아가고” (S25.5) 라 한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말에 대하여 허무주의적 견해라 했습니다. 이는 초기경에서 부처님이“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S25.5) 라는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말을 인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돌아가셨다’라는 말은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적 단멸론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일까 종종 사람들은 “천당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이지!”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치명적 문제점 세 가지
유물론에서 한단계 더 발전된 것이 ‘칠요소설’입니다. 지수화풍 사대에다 고와 락, 그리고 영혼을 추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 수, 화, 풍, 고, 락, 명이라 합니다. 빠꾸다 깟짜야나의 견해로서 역시 단멸론에 속합니다. 비록 영혼이라는 뜻의 지바(jiva)가 있어서 이원론적으로 보이지만, 영혼(생명)도 물질에서 나온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유물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외 육사외도의 가르침에는 운명론, 불가지론, 숙명론 등이 있습니다.
유물론에 바탕을 둔 견해는 거의 대부분 단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유물론은 바라문의 영원론에 대항하여 생겨난 견해입니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바라문 사상이 지배했습니다. 최고신 브라흐마가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이른바 영원주의입니다. 그런데 바라문교는 오늘날 한국에서 보는 유일신교와 매우 유사합니다. 이는 초기경전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너무나 똑 같은 것에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초기경전에 묘사된 브라흐마사를 보면 “그 하느님은, 위대한 하느님이며, 승리자이며, 패배하지 않는 자이며, 모든 것을 보는 자이며, 전능자이며, 지배자이며, 만드는 자이며, 창조자이며, 가장 훌륭한 자이며, 주재자이며, 주권자이며, 과거와 미래의 아버지입니다.” (M49) 라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유일신과 다름 없습니다. 그런데 바라문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지’와 ‘고통’과 ‘죄악’이라는 세 가지 문제입니다. 전능하고 전지하고 전선한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에서 일어 날 수 없는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날 유일신교도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특히 고통과 죄악의 문제는 유물론도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연기법으로 사상의 평정을
창조론과 유물론에서 해결 하지 못한 문제점은 인간의 ‘무지’와 ‘고통’과 ‘죄악’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도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것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의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연기법으로만 설명이 가능합니다.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논파 되었습니다. 연기법으로 사상의 평정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
상윳따니까야 제2권에 ‘니다나상윳따(S12)’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인연상윳따입니다. 연기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중에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가 있습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라 하여 허무주를 논파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S12.15) 라 영원주의를 논파 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연기법입니다. 부처님은 구체적으로 십이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으로 설명합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은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윤회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 삼세에 걸친 양중인과로 설명했습니다. 또 한편으로 부처님의 연기법은 브라만교의 영원주의와 육사외도의 허무주의를 논파한 것이기도 합니다. 연기법은 괴로움의 소멸과 윤회의 종식인 동시에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바른 견해를 제시해 주기도 합니다. 그 중에 괴로움과 관련된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구분별로 질문 했을 때
어느 날 외도 아쩰라 깟싸빠가 부처님에게 괴로움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깟싸빠는 “존자,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입니까?”(S12.17)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답했습니다. 그러자 깟싸빠는 이번에는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답했습니다. 그러자 깟싸빠는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입니까?”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라고 연속해서 묻습니다. 이른바 ‘사구분별’로 질문한 것입니다.
외도의 질문에 부처님은 모두 “그렇지 않습니다.”라 하여 부정했습니다. 그러자 외도는 이번에는 “괴로움은 없는 것입니까?”라며 질문합니다. 사구분별로 질문 했을 때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에 부처님은 “괴로움은 있는 것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압니다.”“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봅니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외도는 태도를 바꾸어 공손하게 “존경하는 세존께서는 저에게 괴로움을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며 괴로움을 가르쳐 달라고 청원합니다.
경어체를 쓴 이유는
부처님은 외도의 질문에 친절하게 “그렇지 않습니다” 라든가, 나는 참으로 괴로움을 봅니다.”라 하여 ‘경어체’로 말했습니다. 이는 전재성님 번역의 특징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에는 ‘그러하다’ ‘아니다’등으로 번역 했지만 제자가 아닌 외도에게는 반드시 경어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초불연 각묵스님역을 보면 “그렇지 않다.” 라든가, “참으로 나는 괴로움을 본다”로 번역하여 마치 제자들에게 말하듯이 했습니다.
번역은 그 나라의 어법에 맞게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예법이 있어서 대화에 있어서도 엄격하게 적용됩니다. 타인에게는 비록 나이가 어려도 경어체를 써주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럼에도 친구에게 말하듯이 또는 하대하듯이 ‘이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빠알리니까야 번역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추근대듯이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듯한 외도의 질문에 부처님은 경어체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짜증내며 귀찮아 하는 뉘앙스를 줍니다. 제자에게 하는 말과 이교도에게 하는 말은 구별되어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내 탓이요!”
외도는 찰거머리처럼 달라 붙어 끈질기게 질문했습니다. 이에 부처님은 아닌 것은 “아닙니다.”라 하고, 설명이 필요하면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부처님은 먼저 외도에게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것은 사성제가 아니라 누가 괴로움을 겪는 것인지 대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괴로움을 만들었다면 “내 탓이오!”라고 할 것입니다. 만일 괴로움이 외부에서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면 “네 탓이야!”라 할 것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이 과거에 지은 나에 의한 것이라면 내가 짓고 내가 괴로움을 받는 것입니다. 과연 타당한 말일까요?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십니다.
"So karoti so pa?isa?vediyat?"ti kho kassapa, ?dito sato "saya? kata? dukkha"nti iti vada? sassata? eta? pareti.
[세존]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이 있는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영원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전재성님역)
‘행위하는 것(karoti)’과 ‘감지하는 것(pa?isa?vediyat?)’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동일하다면 같은 사람입니다. 이를 현생 뿐만 아니라 과거생까지 확장하면 ‘영혼’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변치 않는 실체가 있는 영혼을 가정했을 때 이를 ‘아뜨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주석을 인용하여 “ ‘괴로움은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면, 처음부터 영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며 영원주의에 집착하는 것이다. 영원주의는 행위자와 경험자를 하나이자 동일한 자라고 생각해서 유래하는 것이다.” (Srp.II.35-36) 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뜨만은 고정된 실체로서 자아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행위 하는 자와 고통을 경험하는 자가 동일인이라면 영원주의적 견해라 했습니다. 다름 아닌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말합니다. 오늘날 유일신교와 같습니다.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 하여 모든 것을 전생의 업보로 봅니다. 그래서 “내 탓이요!”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번역을 보면
이 번역과 관련하여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은 “깟사빠여,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존재했던 [괴로움을 상정하여] ‘괴로움은 스스로 짓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어 이것은 상[견]에 떨어지고 만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빠알리어 “So karoti so pa?isa?vediyat?”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동일하다’라고 번역한 것과 비교하여, 각묵스님은 ‘그가 짓고 그가 [그 과보를] 경험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요? CDB를 찾아 보니 “Kassapa, [if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then one asserts] with reference to one existing from the beginning: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When one asserts thus, this amounts to etemalism.”라 되어 있습니다. 각묵스님이 사용한 대괄호와 그 안에 있는 내용까지 유사합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역자는 보디 스님의 설명을 참조하여 본문처럼 옮기는 것이 문맥에 더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이렇게 옮겼다.”(123번 각주) 라고 설명했습니다. 빅쿠보디의 번역과 주석을 참조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각묵스님이 빅쿠보디의 번역을 참조한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빠알리구문 “?dito sato”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짐을 말합니다. 전재성님도 이 구문이 들어간 문장에 대하여 “난해한 구조를 갖고 있다”(84번 각주) 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빅쿠보디는 어떻게 설명했을까요? CDB 각주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Spk glosses ?dito sato as ?dimhi yeva, and explains it as meaning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It seems to me more likely that this phrase is part of the eternalist view itself and means "of one existing from the beginning" i.e., of a being that has always existed. This interpretation can marshal support from the fact that the phrase is omitted just below in the corresponding restatement of the annihilationist view, which is otherwise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same logic and thus, if Spk were correct, should include ?dito sato. Spk says "it should be brought in," but the fact that the text replaces it by another phrase is strong evidence that it does not belong there; see n. 40.
Spk: If at the beginning (one thinks),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in such a case the belief (laddhi) afterwards follows,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And here, what is meant by suffering is the suffering of the round (va??adukkha). Asserting thus, from the beginning one declares eternalism, one grasps hold of eternalism. Why? Because that view of his amounts to this. Eternalism comes upon one who conceives the agent and the experiencer to be one and the same.
Spk-pt: Prior to the belief that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there are the distortions of perception and of mind (sa???cittavipall?sa?) in the notion, "The one who acts is the same as the one who experiences (the result)," and then a wrong adherence to these distortions develops, namely, the belief "Suffering is created by oneself" (a distortion of views, di??hivipall?sa).
On the three levels of distortion with their four modes, see AN I1 52.
(CDB Vol1, 39번 각주, 빅쿠보디)
위 빅쿠보디 각주는 초불연 상윳따 2권 123번 각주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각주에서 네 가지 형태와 관련된 세 가지 레벨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AN I1 52’를 보라고 되어 있습니다. 찾아 보니 ‘전도의 경(A4.49)’입니다. 이는 무상, 고, 무아, 더러움에 대하여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라 하여 잘못 보는 것을 말합니다. 무상에 대한 것을 보면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하여 항상하다고 여기는 지각의 전도, 마음의 전도, 견해의 전도가 있다.” (A4.49)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네 탓이야!”
짓는 자(k?raka)와 경험하는 자(vedaka)가 하나라면 상견이며 이는 영원주의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괴로움을 겪을 때 마다 “내 탓이요!”라며 가슴을 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반대의 견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행위자와 경험자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는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전 생에 행위한 자와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는 자가 같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했습니다.
"A??o karoti a??o pa?isa?vediyat?"ti kho kassapa, vedan?hitunnassa sato "para?kata? dukkha"nti iti vada? uccheda? eta? pareti.
[세존]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전재성님역)
괴로움에 대하여 타자가 만든 것이라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남 탓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불효자식이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어머니, 왜 저를 낳으셨어요?”라고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환경을 탓하며 부모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습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르다면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은 네 탓이 아닙니다. 언젠가 젊은 시절 그 놈이 저지를 행위에 대한 과보가 익어서 지금 내가 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전생 언젠가 어느 놈이 저지른 죄악으로 인하여 지금 내가 고통을 겪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네 탓이야!”라며 젊은 시절 자신이었던 그놈에게, 전생에 한 때 자신이었던 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괴로움을 타자로 돌리는 것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 ‘괴로움은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면, 행위자는 파괴되어 버리고 처음부터 허무주의를 주장하여 허무주의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Srp.II.35-36) 라 되어 있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하여 남탓으로 돌리는 것은 허무주의적 견해라 합니다. 만일 행위자와 경험자가 다른 것이라면, 지금 나의 행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설령 살인을 했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모 수학과 K교수는 “설령 윤회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간난아기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윤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라 했습니다. 전생에서 살인을 했어도, 현생에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살인에 대한 과보는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최악의 단멸론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에서
‘아쩰라 깟싸빠의 경’에서는 행위자와 경험자의 일치와 불일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치하면 상견에 빠지기 때문에 영원주의적 견해이고, 불일치 하면 단견에 떨어지기 때문에 허무주의적 견해라 합니다. 그런데 대승경전 잡아함경에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잡아함 13권 335경)에서도 행위자와 경험자의 불일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有業報而無作者)”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니까야의 “A??o karoti a??o pa?isa?vediyat?”와 똑 같습니다.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는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제일의공경에서 핵심적인 구절은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有業報而無作者)”입니다. 경에 대한 해설을 보면 이 구절에 대하여 중도실상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라 합니다. 니까에서는 분명히 허무주의적 견해라 하지만 대승 잡아함경 제일의공경에서는 중도를 설명한 것으로 바른 견해라 합니다. 그렇다면 제일의 공경은 어떤 것일까요?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云何為第一義空經。諸比丘。眼生時無有來處。滅時無有去處。如是眼不實而生。生已盡滅。有業報而無作者。此陰滅已。異陰相續。除俗數法。耳.鼻.舌.身.意亦如是說。除俗數法。俗數法者。謂此有故彼有。此起故彼起。如無明緣行。行緣識。廣說乃至純大苦聚集起。又復。此無故彼無。此滅故彼滅。無明滅故行滅。行滅故識滅。如是廣說。乃至純大苦聚滅。比丘。是名第一義空法經。 — 《잡아합경》 제13권 제33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 한문본
어떤 것을 제일의공경이라고 하는가? 모든 비구들이여, 눈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에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건만 생겨나고, 그렇게 생겼다가는 다시 다 소멸하고 마나니,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느니라. 이 음(陰)이 소멸하고 나면 다른 음이 이어진다. 다만 세속의 수법(數法)은 제외된다. 귀·코·혀·몸·뜻도 또한 이와 같다고 말하겠으나,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세속의 수법이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니,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으며, …… (이 사이의 자세히 말은 앞에서와 같다.)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고 일어나느니라.
(위키백과, 제일의공경)
여기서 ‘세속의 수법(俗數法)’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세속에서나 통용되는 법을 말합니다. 연기법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단지 세상에서나 통용되는 진리로 간주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제와 속제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이런 논리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미완성된 것이고, 덜 깨달은 것이 됩니다. 후대 용수 등 공사상과 유식사상이 출현하여 깨달음을 완성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에서는 불교는 끊임 없이 진화해 왔다고 합니다.
제일의공경에서는 ‘유업보이무작자’라 하여, 이를 세속법이라 하면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유전문과,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로 시작되는 연기의 환멸문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유업보이무작자’라는 말은 니까야에서 분명히 허무적인 견해라 했습니다. 그런데 제일의공경에서는 이 말이 중도실상을 설명하는 것이라 하여 진제로서 바른 견해라 합니다.
니까야에는 없는 제일의공경
잡아함경에 실려 있는 제일의공경은 니까야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역 아함경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를 매우 소중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바수반두(Vasubandhu, 世親)는 아비달마구사론을 저술하면서 이 경으로부터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경의 내용을 무려 세 차례 인용했습니다. 인용한 이유는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을 논파하기 위해서라 합니다.
니까야에는 없고 아함경에만 있는 것이 제일의공경입니다. 이 경이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대승불교가 흥기할 당시 최대 부파를 형성했던 설일체유부의 논거를 부수기 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바수반두는 ≪구사론≫에서 유부가 주장하는 과거와 미래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세존이 ‘과거 업이 있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과보를 내는 효능, 즉 과거에 있었던 행위에 의해 상속(相續)가운데 있게 되는 힘을 고려한 것이다. 달리 해석하여, 과거 업이 그 자체로서 현재에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과거로 볼 수 있겠는가? 더욱이 경전에는 아주 명백한 언명이 있다. 즉 세존께서는 <제일의공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한 “비구들이여, 눈이 생길 때 다른 어떤 곳(즉 미래)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질 때 어떤 곳(즉 과거)에 축적되기 위해 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눈은 비존재였다가 생겨나며,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만일 미래의 눈[眼]이 존재한다면 세존이 눈은 비존재였다가 생겨난다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바수반두는 주장하였다.
유부(有部)에 의하면, “삼세(三世)는 본체(本體)의 상태의 차이로 나타나며, 본체가 작용과 결합하여 현세적(顯勢的)일 때가 현재이고, 작용을 떠나 잠세적(潛勢的)인 상태로 있을 때는 과거나 미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法)은 자성(自性)을 가지고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의공경>에 의하면, 잠세적인 상태로 남아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게 된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없었다가 생겨나 다시 사라져 버리는 생멸(生滅) 현상만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수반두는 <제일의공경>에 근거하여 과거와 미래는 현재처럼 실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그의 지론을 펼쳤다.
(마성스님, 《韓國佛敎》제630호, 2014년 11월 20일, 9면)
제일의공경에서 키워드는 공(空)입니다. 공의 의미를 밝히는 경입니다. 그래서인지 니까야에서 이 경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유사한 경이 상윳따니까야 ‘아쩰라 깟싸빠의 경(12.17)’이 있지만 내용이 다릅니다. 제일의공경에서 강조한 것은 ‘업보는 있으나 업을 짓고 보를 받는 행위의 주체로서의 자아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일의공경에서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 라는 구절은 단멸론 허무주의로 오해 받기 쉽습니다. 실제로 니까야에서는 “깟싸빠여,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괴로움을 당한 것과 관련하여 ‘괴로움은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다.’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주장한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S12.17, 전재성님역) 라 하여 허무주의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
대승논자들은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 에 대하여 공으로 해석하여 연기의 실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눈을 예로 들어 “눈(眼)이 생겨날 때에 온 곳이 없으며, 멸할 때도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 은 실다운 것이 아니되 생기며, 생긴 후에는 다 소멸된다. 업보(業報)만이 있고 짓 는 자(作者)는 없다.”라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또 작자가 없다고 하여 윤회의 주체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권오민 교수에 따르면 “업과 그 과보는 존재하지만 그 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온이 멸하고 다른 온이 상속할 뿐이니, 일시 개념적으로 칭명된 자아는 예외로 한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현재만 있다고 합니다. 현존(現存)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존(現存)을 말하는 자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로지 현재만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외에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여기서 드러난 것만 의미가 있을 뿐 과거나 미래가 의미가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 뿐이야”라거나 “이것 뿐이거든”라며 ‘이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대게 경전을 부정합니다. 논장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설령 경전을 인정하더라도 수행에 필요한 것 몇 가지와 자신의 깜냥(感量)으로 인지 할 수 있는 경전 몇 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합니다. 이는 가르침을 일부분만 수용하는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감각영역에 들어 오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당연히 윤회가 부정됩니다. 오로지 현존하는 것만 의미 있기 때문에 ‘재생연결식’도 부정되고 ‘삼세양중인과’도 부정됩니다.
아함경으로 중도체계를 말한 L교수가 있습니다. L교수는 논장을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아비달마불교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입니다. 아비달마불교가 부처님 근본가르침을 왜곡했다고 합니다. 이를 용수가 중론으로 바로 잡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 근본 가르침과 대승불교는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 한편 즐겨 인용하는 말이 제일공의경에 나오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입니다. 그러나 바수반두는 이 경을 인용하여 아비달마구사론을 썼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L교수가 아비달마를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 됩니다.
L교수는 자신의 중도체계이론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아비담마논장을 비판합니다. 아마 설일체유부의 유론에 따른 아비달마를 아비담마와 같은 반열에 올려 놓고 싸잡아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의 아비담마는 설일체유부의 유론에 따른 아비달마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L교수는 아비담마 논장에 실려 있는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십이연기를 태생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이해는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하여,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설정한 생물학적 윤회라고 비난합니다. 정말 아비담마에서는 삼세양중인과에 대하여 시간개념을 도입한 생물학적 윤회로 설명한 것일까요? 만일 L교수의 말이 참이라면 L교수는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아비담마에 대하여 문외한이거나 아니면 아비담마에 대하여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자입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과거도 미래도 없다고 합니다. 오로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재 존재하는 것만 있을 뿐이라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생과 윤회를 부정합니다. 심지어 L교수는 유튜브 강연에서 “천당에 갔다 온 사람 본 적이 있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죽어서 돌아 온 사람이 없기에 믿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일체유심조로 설명합니다. 심지어 십이연기에서 ‘명색(名色)’에 대하여 ‘정신-물질’이 아닌 ‘이름-형태’로 설명합니다. 색온조차 인식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이론을 합리화 하기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경전을 자신의 생각대로 재해석한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강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존을 말하는 자들을 종종 유튜브에서 봅니다.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하는 자들이 오로지 현재 존재하는 것만 이야기합니다. 이는 제일공의경에서 눈을 예로 들어 “눈이 생길 때 다른 어떤 곳에서 오지 않았으며, 그것이 사라질 때 어떤 곳에 축적되기 위해 가지 않는다.” 라 하여 오로지 인식된 것만 의미 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것이 오온의 무실체성을 설명한 것이긴 하지만 이를 잘못 활용하면 오로지 현존만 말하게 됩니다. 그래서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뜻[意]을 통해 지은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일의공경은 허무주의적 견해
업보는 있지만 작자는 없다라는 말은 무책임한 말입니다. 니까야에서는 단견으로서 허무주의적 견해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잡아함경 제일의공경에서는 이 말이 제법실상을 잘 나타난 것이라 하여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 공사상을 잘 표현 하는 말이라 합니다. 그런데‘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 론이 단견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일까 속수법이라 하여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음으로..” 라 하여 연기의 유전문과 환멸문을 붙여 놓았습니다.
제일공의경에서 ‘속수법’이라 한 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세속에서나 통용되는 가르침으로 폄하한 것이라 봅니다. 이는 진제와 속제로 구분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 공의 원리로 설명한 것이 진제이고, 십이연기로 설명한 것이 속제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니까야 그 어디에도 부처님이 진제와 속제로 구분하여 설명한 대목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제일의공경은 후대에 편집된 경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편집된 것으로 봅니다.
제일의공경은 한역 아함경에만 실려 있습니다. 니까야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행위자와 경험자가 일치하는지 불일치 하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보입니다. 그러나 제일의공경에서는 오로지 불일치 개념으로만 사용됩니다. 불일치 되면 단견에 따른 허무적인 견해라고 니까야에서는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일의공경의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는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부처님이 중도를 설한 이유
니까야에서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에 대하여 명백하게 허무주의적 견해로 밝혀 놓았습니다. 물론 행위자와 경험자가 일치하면 영원주의적 견해입니다. 그러나 두 견해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이는 니까야에서 “?dito sato”라 하여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빠알리어가 들어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행위자와 경험자가 일치하는 것과, 행위자와 경험자가 불일치 하는 것에 대하여 처음부터 가정한 것은 논리적으로 잘못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깟싸빠여, 여래는 이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S12.17) 라 하며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되는 유전문과 환멸문을 설합니다.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의 허무주의를 논파 했습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쳐 있는 태생학적 인과를 설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등으로 연기로 인과를 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존을 말하는 자들은 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태생학적, 생물학적 연기로 폄하하여 삼세양중인과를 부정합니다. 교학에 대한 무지이거나 아니면 악의적으로 가르침을 폄훼 하는 자들의 수법이라 봅니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이 잡아함경 제일의공경에 나오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에 대하여, 빠알리니까야에서는 “A??o karoti a??o pa?isa?vediyat? (행위하는 자와 경험하는 자가 다르다)”에 대하여 허무주의로 규정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일의공경에서 “업보(業報)는 있지만 짓는 자[作者]는 없다.”라는 말은 허무적인 견해입니다. 비록 속수법이라 하여 십이연기가 따라 붙지만 이는 중도를 설명것이라기 보다는 ‘공(空)’을 설명한 것입니다.
공병에 빠지면 “본래 없다”라거나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합니다. 그 결과 윤회는 없는 것이 됩니다. 윤회가 없다면 업과 내생도 없는 것입니다. 이는 육사외도의 유물론에서도 확인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행위자와 경험자의 일치와 불일치에 대하여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로 규정하고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합니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 하여 연기법을 설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그리고 숙명론과 운명론 등 부처님 당시 모든 사상을 논파하여 사상의 통일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럼에도 행위자와 경험자의 불일치에 대하여 공의 논리로 설명한다면 ‘공허’한 것이 됩니다. 제일의공경에 나오는 ‘유업보이무작자(有業報而無作者)’론은 분명히 단멸론적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2017-01-26 진흙속의연꽃 |
출처: 진흙속의연꽃 원문보기 글쓴이: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