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이 운동 법칙과 중력 이론을 발표한
이후로 절대적 결정론은 큰 힘을 얻었다. 절대적 결정론에 따르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기본적인
물리 법칙에 의해 절대적으로 결정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다 결정되어 있다.
절대적 결정론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상식과 모순된다. 그리고 칸트를 비롯한 많은 도덕 철학자들이 자유 의지가 없다면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범죄자가 이런 식으로 변명할 때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제가 범죄를 저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물리 법칙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물리 법칙에 의해 결정됩니다.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절대적인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경우에도 거의 똑 같이 발생한다. 범죄자가 이런 식으로 변명할 수 있는 것이다:
제가 범죄를 저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신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신에 의해 결정됩니다.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세세한 것까지 완전히 결정하는 물리 법칙이
인간의 자유 의지와 모순되는 것처럼 세세한 것까지 완전히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전지전능한 신도 인간의 자유 의지와 모순될 수 있다.
양자 역학에서는 우연을 인정한다. 절대적 결정론이 확률적 결정론에 자리를 내준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이 아인슈타인은
양자 역학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양자 역학이 미시 세계에 대한 당대의 가장 나은 이론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절대적 결정론에 바탕을 둔, 양자 역학보다
더 나은 이론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양자 역학을 끌어들여서 자유 의지가 존재한다는
명제를 뒷받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뉴턴의 물리학에 바탕을 둔 절대적 결정론보다는
양자 역학의 확률적 결정론이 자유 의지 입증에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는 유물론적 일원론을 받아들인다면 자유
의지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자유 의지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이원론이나 관념론적 일원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신경 과학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 생각, 욕망, 행동은
결국 신경원(neuron)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리고 신경원은
기계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자유 의지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감각에서 행동으로 이어지는 동안 신경원들의
발화(fire)들로 이루어진 인과적 사슬이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양자 역학적 우연이 개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 의지의 통제를 벗어난 물리학적 우연일 뿐이다. 인간은
물리적 필연에도 영향을 끼칠 수 없고 물리적 우연에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주사위를 던져보자. 그것은 중력 때문에 필연적으로 땅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어떤 숫자가
나올지는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적어도 어떤 수준에서는 우연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 우리는 염력으로 중력을 거슬러서 주사위가 공중에 머물도록 만들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염력으로 특정한 숫자가 나오도록 주사위를 조종할 수도 없다. 신경원의
작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염력으로 신경원이 시냅스를 통해 받는 자극의 양과 모순되는 방향으로
발화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사람들이 흔히 자유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실험을 해 보자.
연필을 손에 들어 보자. 그리고 그것을 오른쪽에
놓을지 왼쪽에 놓을지 임의로 결정한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한 대로 놓는다.
이때 우리는 어떤 인과적 사슬도 없이 그냥
자유 의지로 오른쪽 또는 왼쪽에 놓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내성(introspection)의 결과일 뿐이다. 내성은 자신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을 말한다.
절대 다수의 현대 심리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의식은 뇌에서 일어나는 심리 과정 중 일부에만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엄청난 정보 처리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외부 세계에는 빨강이나 파랑 같은 색깔이 없으며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다. 색깔은 뇌가 구성해낸 것인데 우리는 그 색깔을 구성해내는 과정을 의식할 수 없다. 망막에는 2차원 상이 맺히지만 우리는 3차원 공간을 본다고 생각한다. 3차원 공간 역시 뇌가 만들어낸 구성물이며
우리는 그 구성 과정을 의식할 수 없다.
우리가 연필을 어느 쪽에 놓을지 결정할
때에도 뇌 속에는 많은 신경원들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물리 법칙에 종속된 기계적인
과정이다. 다만 우리가 그 과정을 내성을 통해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인과 사슬 없이 자유 의지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컴퓨터에는 유사 난수 발생기가 있다. 인간이 보기에는 무작위로 숫자를 출력하는 것 같지만 상당히 복잡한 알고리즘을 거쳐서 난수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겉으로 볼 때에는 우연이 지배하는 것 같지만 컴퓨터의 내부를 자세히 보면 필연적인 과정이다. 연필 실험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기계적인 과정은 외부 자극에 대해 단순한
반응만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를 생각해 보자. 이젠 컴퓨터가 체스 세계 챔피언을
이긴다. 컴퓨터는 체스판이라는 자극을 입력 받는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정보 처리 과정을 거쳐서 어떤 수를 둘지를 출력한다. 이 때 세계 챔피언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수를 두기도 한다. 그 컴퓨터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컴퓨터가
기계적인 과정을 뛰어넘는 지능을 보인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만 기계적 과정이 매우 복잡할 뿐이다.
CPU는 절대적 결정론의 세계다. CPU 설계에
오류가 있거나, 생산 과정에서 뭔가를 잘못했거나, 고장이
난 경우 등을 제외하면 CPU에게 같은 명령어를 내려면 항상 똑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양자 역학적 우연이 CPU의 절대적 결정론적 작동을 막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CPU가 양자 역학의 기준으로 볼 때에는 거시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세포인 신경원 역시 양자 역학의 기준으로 보면 충분히 거시적이다. 따라서 CPU의 작동을 생각할 때 양자 역학적 우연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경원들로 이루어진 뇌의 작동을 생각할 때에도 양자 역학적 우연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예쁜 여자의 나체를 보고 남자가 성적으로
흥분한 경우에 남자는 보통 자신이 왜 흥분했는지 의식적으로 안다. 외부에 존재하는 여자의 나체라는 물리적
자극이 결국 망각을 통해 뇌로 전달되어 흥분하게 된 것이다. 반면 아무런 외부 자극도 없어 보이는데도
성적으로 흥분했을 때 남자는 인과 사슬을 초월한 자신의 상상력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성의 결과일 뿐이다. 신경원은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 감각 기관을 거쳐서 들어올 때에만 발화하는 것이 아니다. 몸 안에서 오는 자극도 신경원을 발화시킬 수 있다. 또한 뇌의 다른
부분에 있는 신경원들의 활동이 성적 흥분과 관련된 신경원을 발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과정 중
많은 부분이 의식되지 않는다. “물리적 원인 없이 발생하는 상상 또는 욕망”과 “내성을 통해 알 수
없는 물리적 원인 때문에 발생하는 상상 또는 욕망”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심지어 외부에서 오는 자극의 경우에도 의식되지
않을 수 있다. 영화 필름은 1분에 수십 개의 장면을 보여준다. 이 때 수십 개 중 목마름을 연상시킬 만한 장면을 몇 개 정도 넣으면 영화를 본 사람이 목마름을 느낀다. 하지만 왜 목마름을 느끼는지는 의식적으로 알지 못한다. 아주 짧게
지나치는 장면을 무의식적으로는 처리했지만 의식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자유 의지와 양자 역학을 접목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근본적인 수준에서 자유 의지가 있다면 물리 법칙을 초월한 상태에서 우리가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그 결정은 결국 신경원의 작동을 거쳐서 행동으로 나타난다. 물리
세계를 초월한 우리의 마음이 신경원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송과선과 비슷한 것을 상정해야 한다. 송과선을
통해서 마음이 물리 세계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고 물리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이 때 송과선은 양자 역학적으로 미결정된
폭 안에서만 신경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신경원은 양자 역학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거시적이다. 따라서 양자 역학을 어기지 않고서는 송과선이 신경원에 사실상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이것은 CPU에 연결된 송과선이 양자 역학을 어기지
않고서는 입력된 명령어와 다른 방향으로 CPU가 작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덕하
2012-12-01
첫댓글 저도 자유의지란 있을수없다고 생각해요
양자역학에서 확률적으로 기술된다고 하는 부분은 측정 불가능성에 있지 않나요?
제가 하고싶은 말은, 양자 역학이 확률적으로 기술 된다는 것은 자연(정확히는 우리우주)이 본질적으로 무작위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측정 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기술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파인만 강의록의 양자역학을 다루는 파트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이 곧 엄밀한 의미의 결정론을 거부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도 대중서 조금 읽은 수준 밖에 안 되지만 양자 역학에서 측정 불가능성도 이야기하지만 무작위성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범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같은 주장으로 맞받아 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필연에 의해 범죄를 저질렀다면, 우리가 당신을 처벌하는 것도 필연이다.-
와 천재시네용
님 근데여 말은 되는데 그런논리면 전체주의국가(나치) 우생학이라는 명분하에 강제불임수술시키고 목숨빼앗고 그런거랑 다를바가 머죠? 잘못하다가는 몇몇 미친놈들의 다시 옛날로갈수있는 사상적 밑거름이 되지않을까요 국가나 사법부가 그렇게 맞받아쳐셔야 되겠습니까
To 김밥지옥
여기에 나오는 범죄자의 경우 결정론의 입장에서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현상이라고 말 하고 있는것이죠. 이로써 이 범죄자는 자신이 인격체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먼저 인간으로 대해 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다른 관점으로는 네가 살인을 할 수도 있고 그러한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배신자와 이기주의자를 처벌하고 배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사실 모든것이 원래 정해져 있었다고 주장하는 범죄자에게 가장 효과적인 말은 내가 너를 처벌하는것도 원래 정해져 있다고 말을 함으로써, 논리적 모순을 없애는 것입니다. 이미 인격이나 인격체로써의 모든 의지를 기정된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뻔뻔한 인간이 있다면 이게 제일 빠르겠지요. 그리고 저는 이게 왜 나치즘하고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흉악범의 인권도 어느 정도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사람들의 인권을 개무시하니까 나도 당신의 인권을 개무시하겠다”는 식의 법에는 반대합니다.
흉악범도 흉악범 나름이지요. 저는 제 주위의 무고한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에 의해 위협을느끼고 살거나 위험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정황을 잘 살펴보고 행동하는것도 중요하겠지만, 저런 책임 회피적인 주장을 하는 인간은 구제불능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
라곤 하여도 저는 실질적으로 그 범죄자를 그냥 처벌하자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주장을 하였을 때, 같은 논리로 맞받아치고 반응을 보고자 한 것이죠.
논점일탈이지만 저는 국가가 결정론입장을 받아들이고 그런 패러다임을 가지고 국민위에 존재한다는게 생각만해도 끔찍해서 저런말을 했습니다 우생학도 너는 가족력(질병)을 볼때 앞으로 넌 국가에 하등 쓸모없는 존재이다 라면서 불임수술 시키고 사람들 막죽여댓었죠 제가 아직 어리고 부족한점이 있어서 그런줄은 모르겠으나 진리추구도 좋지만 그 방향이 인간을 하대하는방향으로 뻗어나가서는 안된다고생각합니다 뻘소리해서 죄송합니다
양자역학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머리가 저에게 있었으면 합니다. ㅎㅎ; 저는 피상적 이해밖에 하지 못하겠네요. 예를 들면 스티븐호킹이 양자역학을 비유해서 말한 표현 같은 것 말이죠. '권투선투가 시합 중에 왼손을 뻗을지 오른손을 뻗을지 정확하게 계산하려면 지구 역사인 45억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 와 같은..ㅎㅎ 이는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경로를 계산한다는 뜻인데, 이런 단순한 표현속에서도 자유의지는 존재할 공간이 없어 보이네요.
덕하님 저는 자유의지는 존재할수 없다라고 생각했엇는데요 새로운글을 발견했습니다
36개국에 걸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질문한 결과 7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인생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는 거라고 답했다고 한다.
보와 스쿨러는 이 조사를 보고 생긴 궁금증과 책임감에 따라 행위가
달라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행동한다고
믿으면 선하게 행동하는지 실증적으로 알아보고자 했다.
프랜시스 크릭이 결정론적 입장에서 쓴 <놀라운 가설>의 일부를 읽은 뒤
컴퓨터로 시험을 치뤘다. 학생들에게는 소프트웨어에 결함이 있어
문제의 답이 자동으로 떠오른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키 하나를 눌러 달라고 부탁했다. 부정행위를 하지 않으려면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 다른 그룹의 학생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밝은 책을 읽고 똑같이 시험을 치뤘다.
어떻게 되었을까? 결정론에 관한 책을 읽은 학생들은 부정행위를 했고 긍정적인 책은 읽은 학생들은
그러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한 가지 정신 상태가 다른 정신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보와 스쿨러는 자유의지에 대한 불신이 노력은 부질없다는 미세한 암시를 만들어서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느끼게 만든다는 주장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애써서 뭔가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기통제라는 형태의 애를 쓰는 행위는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결정론에 관한 글을 읽은 사람들이 더 공격
적으로 행동하고
타인에게 더 비협조적으로 구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자유의지를 믿으면 자기도 모르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려는 충동이 크게 감소하며
상당량의 자기통제와 정신 에너지가 이기적 충동과 공격적 충동을 억누르는 데 사용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행동의 자발성을 지지하는 정신 상태는 뒤에 올 행동을 결정하는 데도 영향을 미친다.
자유의지는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게할 뿐 아니라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처럼 보인다.
p.177~178 <뇌로부터의 자유>
자유의지가 없다고 믿는것에대한 위험성에 대한글같은뎀..
자유의지의 문제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에 대하여 내린 결론은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확신은 없지만 존재한다고 믿고 행동하자"입니다.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너무 무책임하고 수동적으로 행동하게 될 것 같아서입니다.
또한, 내 자신이 의미, 존엄성이 존재할 자리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들은 모두 꼭두각시에 불과한 존재가 됩니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