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중 일부. 한 수도원에서 아빠스의 규칙아래 공동생활 하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 하느님 찾는 일에 자신들의 전 삶을 투신하고 있다.
한곳에 머물러 성무일도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침묵과 노동을 통해 주님께 가까이 가는 삶, 그것이 「서방수도생활의 사부(師父)인 성 베네딕도가 지향한 삶이었다.
베네딕도의 영성은 세가지로 대별된다. 첫번째는 공동체적 관상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대부분의 수도자들에게 개인주의적 생활보다 공동 생활이 더 유익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두번째는 하느님을 찾는 기본적인 방법으로 기도, 하느님과 함께 하는 독서, 그리고 노동을 제시한다. 마지막 세 번째로 수도생활에 투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순명, 정주(定住) 그리고 수도자 다운 생활의 전향이라는 세가지 서월을 요구한다(본보 1999년 10월 31일자, 11월 14일자, 11월 21일자 13면 「영성의 대가를 찾아서」성 베네딕도 편 참조).
480년경 이탈리아 누르시아의 한 명문가에서 출생한 베네딕도는 청년시절 로마에서 공부를 했으나 세속적인 학문에 환멸을 느끼고 영혼을 구원하는 참된 지혜를 찾고자 수비야코 동굴에 들어가 독수 생활을 한다. 한 때 다른 수도자들의 요청으로 독수생활을 청산하고 공동체 생활도 한 그는 타락한 수도자의 음모로 독살당할 위험까지 겪기도 했다. 이후 다시 동굴로 돌아간 그는 수비야코산 주위에 12개의 작은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역 사제와의 갈등으로 수비야코를 떠나 몬테카시노로 가서 새 수도원을 건립한다. 베네딕도는 이 수도원에서 생활의 지침이 될 규칙서를 작성한다. 이 규칙은 공동생활을 명백히 규정하고 순명을 최고의 덕으로 삼으며 재물의 사유(私有)를 금지하고 특히 전례를 중요시하고 성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를 것을 명하고 있다.
1800년대 말 교황 레오 13세는 산재해 있던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수도원들을 13개 연합회로 나눠 체계화 했다. 베네딕도회 총연합의 멤버는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개별 수도원이 아니라 연합회(Congregatio Monastica)이어야 한다. 연합회란 동일한 장상 아래 모인 자치 수도원들의 결합체이며, 각 연합회는 각각 독자적인 고유법(회헌)과 자치권을 갖고 있다. 현재 총 연합회에 소속돼 있는 수도원은 350여개, 수도자 숫자는 수련자와 허원자를 합쳐(지원자, 청원자 제외) 1만여명이다.
성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이다. 오딜리아 연합회는 1884년 독일의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가 오틸리엔 수도원을 중심으로 베네딕도회 생활과 선교 사명을 혼합함으로써 시작됐는데,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사도」라는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베네딕도회 생활은 1909년 뮈털 주교의 요청에 따라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독일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5명의 수도자를 파견함으로써 시작된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 수도회 탐방]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중)
발자취…영성의 실현(서울 시절에서 공산치하까지)
원산교구 설정과 함께 북방선교에 나서
1922년 간도 선교도 담당
농장 개간… 공장 짓고 임야 가꾸어
1952년 대구대교구에 요청 왜관과 낙산성당 제공받아
1922년 간도 선교도 담당
농장 개간… 공장 짓고 임야 가꾸어
1952년 대구대교구에 요청 왜관과 낙산성당 제공받아
서울 수도원 시절
90여년 전 이 땅에 발을 내디여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1910년에 숭공학교를 설립, 목공·철공·원예 등 기술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설립해 사범교육을 실시한다. 숭공기술학교는 목공부와 철공부로 나누어 많은 기술공을 배출했으며 당시 기술 교육을 실시하는 최초의 정식 교육기관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한편 서울 수도원은 독일 모원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초기부터 많은 수도자들이 파견됐으며 1913년에는 대수도원으로 승격됐고 신보니파시오 원장신부는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반대로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고 1920년 원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북방선교를 위촉받아 1925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해 1927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게 된다.
덕원 수도원 시절
초대 원산교구장이 된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는 1921년 5월 1일 주교품을 받는다. 원산 근처 덕원은 10여가구에 지나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으나 수도원의 이주로 인해 1949년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함경도 뿐만 아니라 간도지방과 한반도 전체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된 원산본당은 이후 신자수가 3000여명에 달하는 큰 본당이 됐다. 또한 이 지역에 모두 11개 본당이 설립되고 1922년에는 간도지방의 선교까지 위임받게 된다.
수도자들은 선교를 위해 농장을 개간하고 공장을 설치했으며 임야를 가꾸었다. 교육사업도 선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선교를 위한 중요수단으로써 각 본당에 「해성학교」(초등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며 직업 청소년을 위해 빈민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신학교 교육은 교구 사제양성을 위해 수도원이 큰 노력을 기울인 활동 중의 하나였다. 1936년에 최초로 2명의 방인사제가 탄생했으며 뒤에 수도회 신부 양성이 허락된 뒤로 신학교가 폐쇄될때까지 12명의 교구사제와 6명의 수도사제가 배출됐다. 이외에도 병원과 양로원을 여는 등 다양한 자선 사업을 펼쳤다.
1940년 1월 함경남북도는 재불할되어 덕원 면속수도원 교구가 설립된다. 이로써 수도원 교구 관할 지역외는 함흥교구가 돼 장차 교구 사제들에게 위임할 계획이 수립된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치하에 놓은 수도원은 토지가 몰수되고 선교활동에 제약을 받다 1949년 5월 8일 공산정부가 급기야 신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신부들을 체포하는 동시에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건물은 농업학교로 접수한다.
연길 성 십자가 대수도원
일본 식민지하에서 정치·경제적 이유로 약 50만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맍 간도지방으로 이주했다. 1922년 5월 이 지역은 원산교구 관할하에 드어갔고 8000여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1200여명의 중국인 신자사목을 위해 선교사가 파견됐다. 이후 1928년 원산교구로부터 분활되어 연길 대리교구가 창설된 훨씬 뒤인 1934년 9월에 가서야 연길 자립대수도원이 설립됐다. 연길수도원도 공산치하에서 「폐쇄」라는 운명을 맞이한다.
6·25 … 새공동체의 시작
6·25발발후 부산으로 피난한 수도자들은 1950년 12월 부산 중앙성당에서 방을 하나 얻어 공동생활을 한다. 이렇게 피난살이를 하던 중 당시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 군종신부의 도움으로 대구 주교관 내의 한 집으로 이주하게 된다. 오랜만에 수도자들이 한 곳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함께 미사드리고 함께 일하는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크리소스토모 총 아빠스는 미국 뉴톤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이디모테오 신부를 이 공동체의 원장으로 임명한다. 이로써 새 원장과 함께 남한에서 새로운 수도원을 시작하게 된다.
1952년 1월 25일 대구에 도착한 이신부는 주교관 부속건물에 살고 있던 15명의 한국인 수사를 만난다. 그는 수도생활에 좀 더 합당한 장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구대교구장이었던 최요한 주교에게 요청, 왜관과 낙산 성당을 제공받는다.
90여년 전 이 땅에 발을 내디여 서울 백동(현 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운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1910년에 숭공학교를 설립, 목공·철공·원예 등 기술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1911년엔 숭신학교를 설립해 사범교육을 실시한다. 숭공기술학교는 목공부와 철공부로 나누어 많은 기술공을 배출했으며 당시 기술 교육을 실시하는 최초의 정식 교육기관으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한편 서울 수도원은 독일 모원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초기부터 많은 수도자들이 파견됐으며 1913년에는 대수도원으로 승격됐고 신보니파시오 원장신부는 초대 아빠스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반대로 서울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고 1920년 원산교구 설정과 동시에 북방선교를 위촉받아 19250년부터 철수하기 시작해 1927년 함경남도 덕원으로 모두 이전하게 된다.
덕원 수도원 시절
초대 원산교구장이 된 신 보니파시오 아빠스는 1921년 5월 1일 주교품을 받는다. 원산 근처 덕원은 10여가구에 지나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으나 수도원의 이주로 인해 1949년 수도원이 폐쇄될 때까지 함경도 뿐만 아니라 간도지방과 한반도 전체에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된 원산본당은 이후 신자수가 3000여명에 달하는 큰 본당이 됐다. 또한 이 지역에 모두 11개 본당이 설립되고 1922년에는 간도지방의 선교까지 위임받게 된다.
수도자들은 선교를 위해 농장을 개간하고 공장을 설치했으며 임야를 가꾸었다. 교육사업도 선교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선교를 위한 중요수단으로써 각 본당에 「해성학교」(초등교육기관)을 설립했으며 직업 청소년을 위해 빈민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부터 시작된 신학교 교육은 교구 사제양성을 위해 수도원이 큰 노력을 기울인 활동 중의 하나였다. 1936년에 최초로 2명의 방인사제가 탄생했으며 뒤에 수도회 신부 양성이 허락된 뒤로 신학교가 폐쇄될때까지 12명의 교구사제와 6명의 수도사제가 배출됐다. 이외에도 병원과 양로원을 여는 등 다양한 자선 사업을 펼쳤다.
1940년 1월 함경남북도는 재불할되어 덕원 면속수도원 교구가 설립된다. 이로써 수도원 교구 관할 지역외는 함흥교구가 돼 장차 교구 사제들에게 위임할 계획이 수립된다. 그러나 해방 후 공산치하에 놓은 수도원은 토지가 몰수되고 선교활동에 제약을 받다 1949년 5월 8일 공산정부가 급기야 신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과 신부들을 체포하는 동시에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건물은 농업학교로 접수한다.
연길 성 십자가 대수도원
일본 식민지하에서 정치·경제적 이유로 약 50만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맍 간도지방으로 이주했다. 1922년 5월 이 지역은 원산교구 관할하에 드어갔고 8000여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1200여명의 중국인 신자사목을 위해 선교사가 파견됐다. 이후 1928년 원산교구로부터 분활되어 연길 대리교구가 창설된 훨씬 뒤인 1934년 9월에 가서야 연길 자립대수도원이 설립됐다. 연길수도원도 공산치하에서 「폐쇄」라는 운명을 맞이한다.
6·25 … 새공동체의 시작
6·25발발후 부산으로 피난한 수도자들은 1950년 12월 부산 중앙성당에서 방을 하나 얻어 공동생활을 한다. 이렇게 피난살이를 하던 중 당시 부산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 군종신부의 도움으로 대구 주교관 내의 한 집으로 이주하게 된다. 오랜만에 수도자들이 한 곳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함께 미사드리고 함께 일하는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크리소스토모 총 아빠스는 미국 뉴톤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이디모테오 신부를 이 공동체의 원장으로 임명한다. 이로써 새 원장과 함께 남한에서 새로운 수도원을 시작하게 된다.
1952년 1월 25일 대구에 도착한 이신부는 주교관 부속건물에 살고 있던 15명의 한국인 수사를 만난다. 그는 수도생활에 좀 더 합당한 장소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대구대교구장이었던 최요한 주교에게 요청, 왜관과 낙산 성당을 제공받는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 수도회 탐방]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하)
발자취…영성의 실현(왜관 수도원 설립서 현재까지)
‘선교’ 모토 … 복음화 사업 앞장
‘한국적 베네딕도회’ 정착에도 적극 힘써
1964년 자립체제인 대수도원으로 승격
출판사·피정의 집 등 다양한 분야서 활동
‘한국적 베네딕도회’ 정착에도 적극 힘써
1964년 자립체제인 대수도원으로 승격
출판사·피정의 집 등 다양한 분야서 활동
1952년 6월 대구에 있던 수도자와 지원자들이 왜관으로 이사함에 따르 본격적인 왜관 수도원 시대가 시작된다. 이디모테오 원장 신부는 수도원 건물을 짓기위해 대지를 사들이는 한편 과수원을 구입해 수사들의 일터와 공동체의 수입원을 마련한다.
1955년엔 천주교 재단인 순심중·고등학교를 인수, 중등교육에 나서는 한편 이듬해인 56년엔 중·고등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세운다. 기숙사의 목적은 사제성소자를 얻으려는 것이었지만 성직을 지망하지 않은 항생이라도 성품좋고 공부를 잘하는 가톨릭 신자면 누구나 입사할 수 있었다.
1954년엔 왜관 수도원에서 방인 수도자들의 수도서원식이 치러졌으며 60년부터 왜관에서 수련을 받은 사람이 사제품을 받기 시작했다.
덕원과 연길에서 본당사목을 맡았던 선교사들은 남한에서도 일선 선교를 계속했으며 1955년에는 서정길 댁주교에 의해 경상북도 서부의 넓은 지역이 맡겨졌다.
이와같이 왜관 감목대리구가 설정됨으로써 연길과 덕원의 선교사들과 북한과 만주에서 베네딕도회가 맡았던 교구에 속했던 교구사제들이 넓은 일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 수도자로서 새로 수품받은 신부중에서도 일부 사제가 본당사목에 힘을 기울였다.
신부들은 복음선포와 성사집행에만 집착하지 않고, 동란 후의 가난과 혼란 중에 어렵게 사는 주민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식량과 옷과 약 등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 4개의 음성 나환우 정착촌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60년 서적을 통한 전교와 신앙심화에 한몫하기위해 인쇄소와 출판사를 설립하는 한편 목공소, 철공소, 대봉방, 구두방도 설치했다. 또 1964년 복음화 활동 일환으로 피정의 집을 설치, 신자들이 수도원과 접촉하면서 신앙을 심화시킬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교회 최초의 피정의 집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왜관 수도원이 베네딕도회 수도원 답게 토지, 건물, 여러 공장들을 갖추게 되자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해 당시 문공부를 통해 왜관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재단법인으로 승인했다.
1958년 디모테오 원장신부는 서울에 집과 토지를 구입해 수사들의 연락소와 대신학교에 다니는 신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케 했다. 이것이 서울 장충동 수도원의 시초인 것이다.
1964년 교황청에서는 왜관 수도원을 대수도원(Abbatia)으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왜관공동체는 자립수도원이 되고, 한국 베네딕도회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된 것이다.
「토팍화」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왜관 수도원은 1967년 부산 오륜동에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새 공동체를 설립한다. 이는 한국적인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을 개척하고 왜관 공동체보다 좀 더 관상적인 생활양식을 추구하려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1971년 방인 아빠스가 선출된 후 계획이 중단되어 이미 서원한 수도자들의 대분은 왜관 수도원으로 돌아와야만 했으며 지금까지 부산 분원은 「부산 성 베네딕도 명상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왜관 수도원은 1987년 경기도 남양주군에 예속수도원인 요셉수도원을 설립해 토착화 작업을 계속 실행하고 있다.
1966년 가톨릭농촌청년회 발족, 1967년 대구 대명동에 가톨릭신학원을 설립하는 등 특수사목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왜관 수도원은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음성 나환우촌 운영, 선산 양로원(1970)과 노인마을(1992)을 개소하기도 했다.
왜관 수도원은 문화·예술방만에서도 두드러진 업적을 과시했는데, 가톨릭조형예술 연구소를 설립하는 한편 유리화·금속·가구공예에 있어 탁월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또한 「문화 영성화 사업」의 한 방안으로 잡지 「들숨날숨」을 창간(1999)하기도 했다.
「선교」를 모토로 복음화 사업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왜관수도원은 북방선교를 위해 한반도 중간 지점에 공동체를 하나 더 설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이와더불어 토착화의 과제를 풀어가며 한국교회에 필요한 기도와 노동, 친교의 생활을 개척하고 성숙시키는데 전력하고 있다. 현재 왜관수도원에는 140명의 수도자(종신서원자는 100여명)들이 생활하고 있다.
1955년엔 천주교 재단인 순심중·고등학교를 인수, 중등교육에 나서는 한편 이듬해인 56년엔 중·고등학생을 위한 기숙사를 세운다. 기숙사의 목적은 사제성소자를 얻으려는 것이었지만 성직을 지망하지 않은 항생이라도 성품좋고 공부를 잘하는 가톨릭 신자면 누구나 입사할 수 있었다.
1954년엔 왜관 수도원에서 방인 수도자들의 수도서원식이 치러졌으며 60년부터 왜관에서 수련을 받은 사람이 사제품을 받기 시작했다.
덕원과 연길에서 본당사목을 맡았던 선교사들은 남한에서도 일선 선교를 계속했으며 1955년에는 서정길 댁주교에 의해 경상북도 서부의 넓은 지역이 맡겨졌다.
이와같이 왜관 감목대리구가 설정됨으로써 연길과 덕원의 선교사들과 북한과 만주에서 베네딕도회가 맡았던 교구에 속했던 교구사제들이 넓은 일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 수도자로서 새로 수품받은 신부중에서도 일부 사제가 본당사목에 힘을 기울였다.
신부들은 복음선포와 성사집행에만 집착하지 않고, 동란 후의 가난과 혼란 중에 어렵게 사는 주민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식량과 옷과 약 등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 4개의 음성 나환우 정착촌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60년 서적을 통한 전교와 신앙심화에 한몫하기위해 인쇄소와 출판사를 설립하는 한편 목공소, 철공소, 대봉방, 구두방도 설치했다. 또 1964년 복음화 활동 일환으로 피정의 집을 설치, 신자들이 수도원과 접촉하면서 신앙을 심화시킬 기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교회 최초의 피정의 집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왜관 수도원이 베네딕도회 수도원 답게 토지, 건물, 여러 공장들을 갖추게 되자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해 당시 문공부를 통해 왜관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재단법인으로 승인했다.
1958년 디모테오 원장신부는 서울에 집과 토지를 구입해 수사들의 연락소와 대신학교에 다니는 신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케 했다. 이것이 서울 장충동 수도원의 시초인 것이다.
1964년 교황청에서는 왜관 수도원을 대수도원(Abbatia)으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왜관공동체는 자립수도원이 되고, 한국 베네딕도회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된 것이다.
「토팍화」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왜관 수도원은 1967년 부산 오륜동에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새 공동체를 설립한다. 이는 한국적인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을 개척하고 왜관 공동체보다 좀 더 관상적인 생활양식을 추구하려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1971년 방인 아빠스가 선출된 후 계획이 중단되어 이미 서원한 수도자들의 대분은 왜관 수도원으로 돌아와야만 했으며 지금까지 부산 분원은 「부산 성 베네딕도 명상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왜관 수도원은 1987년 경기도 남양주군에 예속수도원인 요셉수도원을 설립해 토착화 작업을 계속 실행하고 있다.
1966년 가톨릭농촌청년회 발족, 1967년 대구 대명동에 가톨릭신학원을 설립하는 등 특수사목에도 관심을 기울이던 왜관 수도원은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음성 나환우촌 운영, 선산 양로원(1970)과 노인마을(1992)을 개소하기도 했다.
왜관 수도원은 문화·예술방만에서도 두드러진 업적을 과시했는데, 가톨릭조형예술 연구소를 설립하는 한편 유리화·금속·가구공예에 있어 탁월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또한 「문화 영성화 사업」의 한 방안으로 잡지 「들숨날숨」을 창간(1999)하기도 했다.
「선교」를 모토로 복음화 사업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왜관수도원은 북방선교를 위해 한반도 중간 지점에 공동체를 하나 더 설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이와더불어 토착화의 과제를 풀어가며 한국교회에 필요한 기도와 노동, 친교의 생활을 개척하고 성숙시키는데 전력하고 있다. 현재 왜관수도원에는 140명의 수도자(종신서원자는 100여명)들이 생활하고 있다.
장병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