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正義와 자유민주주의는 좌초 위기에 봉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9주년인 오늘, 4.19에 대한 역사성이나 그 혁명의 의미가 점차 퇴색, 잊혀져 가고 있다. 49주년을 맞이한 4.19 혁명의 역사적 평가나 의의가 제대로 다시 오늘 날 또다시 빛나도록 그날을 엄숙히 기리지 않으면 안된다.
헌법 전문에도 4.19 혁명의 위대성을 알리는데 오늘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까마득한 옛일처럼 자본 탐욕과 욕망, 개인적 이익 때문에 위정자의 부조리, 위정자의 反헌법, 反민주, 反국민, 反법치, 反언론자유 탄압과 파괴등, 권력자들의 불의, 사회적 불의에 침묵하고 침묵을 강요 당하는 무소불위의 공안통치, 경찰국가, 파시즘에 눈치보기 급급해 하며 권력을 쥔자들은 주권자인 국민을 내치고 있는 실정이다.
4.19혁명, 정의롭지 못한 者, 정의롭게 통치하지 못할 것이고, 不義한 者, 그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되새김 해 보고, 거짓과 위선으로 임기응변에 능한 者, 그 거짓과 위선의 가면이 벗겨지는 날,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역사학습과 현대사의 재인식이다.
4.19 49주년을 맞이한 우리는, 헌법적 민주주의에 정통해야 하고 헌법적 국민저항 정신을 만방에 각인 시켜야 한다. 또한, 국어에 몰입해야 하고 경제를 이해해야 하며, 역사를 공부하고 왜곡의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를 가슴에 새기면서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팔아대는 저 위선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고,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을 헌법전문에서 재삼 확인하고, 국민 개개인이 민주주의 첨병 역할을 하는 그런 참시대정신이 요구된다 하겠다.
// 4.19 혁명이란?
1960년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룬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反不正)·반정부(反政府), 반독재 항쟁.
배경
1960년을 분수령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권위주의적인 고령의 이승만 정권이 종식되기를 갈구했다. 그러나 1950년대말 국가보안법의 시행과 이승만의 재집권 기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처형, 그리고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욱의 사망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를 잠식시켰다. 그리고 이들의 집권 정부에 대한 분노는 3·15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로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건국 후 12년을 집권한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서의 정치적 쟁점은 근본적으로 정권적 차원의 것이었다. 즉 부정선거를 통한 장기 집권과 독재 권력에 반대하여 민주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운동이 정치 투쟁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4·19혁명이라는 대중적 봉기로 극적인 표출을 본 제1공화국의 갈등은 체제나 이념 차원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이승만 정권의 지지자들과 그 반대자들 사이의 반목과 투쟁이라는 정권 차원의 정치 현상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분열에 관해 지지 그룹은 자유당 내 이승만의 직속 측근들, 경찰과 관료, 군부(특히 고위층), 그리고 일부 기업인들로 구성되었고, 반면에 그들에 대한 적대 그룹에는 민주당의 야당 정치인, 대학·언론 연계 속의 지식인들, 그리고 학생들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4월 '혁명'은 지지 그룹의 통치에 대한 적대 그룹의 성공적 도전과 전복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원인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많은 공무원들이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는 등 부정은 극에 달했다. 또한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이 후보자등록·선전활동·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3월 선거에서는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 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했던 것이다. 1956년 선거 직전에 있었던 신익희의 죽음에 이어, 1960년 선거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의 죽음으로 다시 실망에 빠졌다. 조병옥은 선거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견제세력이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시되었다. 따라서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후보자 이기붕 사이의 부통령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야당 선거운동원들은 계속해서 경찰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승만을 지원하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의 투표를 감시하기 위하여 투표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농촌지역에서는 3·9인조 등의 '조'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이 되어 '조원'들의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거 결과는 경찰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서 완전히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1/3보다 2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고,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 민주당은 선거를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했고,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는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이반되어 있었으므로 대규모의 봉기에 필요했던 것은 도덕적 분개라는 공통된 감정을 점화시켜줄 수 있는 사건만 있으면 되었다. 4월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도시인 마산 시민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바다 속에 버려진 마산상업 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는 급격히 확산되었다.
전개
4·19혁명 전의 몇 주 동안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또한 해결 능력도 결여된 상태였다.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해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이런 사태의 비극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젊은 청년들'을 폭동으로 유도·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활동에 대하여 경고했다. 이승만의 이런 담화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했다. 또한 4월 18일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의 습격을 받았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다. 전국적으로는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그날 서울에서만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전국의 주요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 중장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으며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했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4월 21일 내각은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다음날 이승만은 전 국무총리였던 변영태와 전 서울시장이던 허정에게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도움을 간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승만의 각료로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이승만은 이기붕으로 하여금 모든 정치활동으로부터 물러나도록 했다. 이어 당시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자기가 이승만의 사임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도록 되어 있는 한 이승만이 결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했으며, 아울러 앞으로 경찰을 포함한 정부관리들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위대들은 재선거의 실시 대신에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고, 시위군중들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4월 25일 시위의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미대사였던 W. P. 매카나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정·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시작될 것이며, 헌법도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뀔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중에게 굴복했음을 의미한다.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골격을 이루어왔다는 것은 4·19혁명 후 경찰력의 마비에 따라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결여 등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일 전에 이승만으로부터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의 수립과 전개
4·19혁명 후 허정은 이승만의 간청에 따라 외무부장관직을 받아들였다. 이승만의 사임 후 정부 내에서 허정의 권력기반이 크게 위태로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허정은 한국 사회의 어떤 부문에서도 정치적인 지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학생과 일반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은 이승만 정권의 연장을 의미했다. 또한 그는 배후에 민주당이나 민족청년단과 같은 조직화된 정치세력을 가지지 못했다. 자유당은 허정이 과거 이승만과 그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지녔기 때문에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5월 3일 발표문에서 허정정부는 정책기조의 전체적인 방향을 광범위하게 밝혔다. 내정에서는 일상생활과 법 그리고 사회조직의 근본구조에 미치는 4·19혁명의 여파를 극소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과제에는 반공투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외관계에서 과도 정부는 강한 반공노선 및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하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허정의 과도정부는 이승만 정권이 초래했던 국제적 고립, 특히 아시아 또는 여타 지역의 중립국가들과 일본에 대한 폐쇄적 관계를 지향하는 정책의 길을 터놓았다. 허정의 과도정부는 일련의 모순된 목표를 추구해야 했다. 군대 내부의 부패를 일소하고, 선거 부정을 저질렀던 자들을 처벌하며, 전직 자유당 관리나 부정축재자를 즉각적이고 혹독하게 처벌하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 정치문제에 있어서 과도정부에 의한 양당제도의 확립을 위한 조처가 기대되었으나, 과도정부로서는 자유당의 부활이나 또는 좌익적 정당의 등장을 용인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상충되는 과제에 부딪힌 과도정부는 최소한의 현상유지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정부는 단지 선거부정이나 정치 테러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경찰의 최고 간부들만을 해임시켰을 뿐, 근본적인 문제처리에는 미흡했다.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반복해서 밝혔으나, 실제로는 몇 사람에 대하여 과거의 부정을 자진신고하게 하고, 부정축재분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데 그쳤다. 7월에 가서야 이승만 정권 밑에서 부정축재한 18명의 개인과 기업가 66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이들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짧은 과도정권 기간중 허정정부는 줄곧 '비혁명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견지한 결과, 후계정권이 혁명적 개혁조치를 지향하는 데 많은 제약과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 그러나 허정정부가 이룩했던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하나는 정치세력집단으로서의 자유당의 해체였다.
의의
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와 정치의식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그의 지지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혁명의 지도력을 가지지 못했다. 조직화된 혁명의 지도력이 없는 상태에서 학생은 학원으로 돌아가고, 혁명의 결과도 당시로서는 별다른 대안 없이 유일한 정치세력인 민주당이 가져갔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4.19기념관에 벌써...
미래세대인 아이들에게 4.19혁명을 데모?로 격하 시키려 했었던...
// 결과적으로, 국민의 심판과 미국의 입김으로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간 이승만, 지휘부의 지도력 부재를 들지만, 이미 4.19가 터지기 전에 박정희는 자유당 정부를 전복 시키려고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4.19 혁명으로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는 잠시 미뤄졌을 뿐이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후에 4.19 혁명을 완성 시키는 정부가 들어 서지 못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예정된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4.19 혁명 정신을 일거에 침묵하게 만드는 무소불위의 독재정권이 탄생되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독재자,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이승만의 노욕과 권력집착으로 친일반민족주의자들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재생, 기득권화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찬탈당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것이다.
친일부역자 박정희의 정권찬탈은, 제2기의 친일반민족부역자들의 부활과 권력화, 민족정기의 영원한 파멸과 내환을 예고했음이다.
후에 또다시 전두환 군사 쿠데타 정부가 대를 이어서 민주주의를 침탈함에 수많은 민주투사들은 민주주의를 피로 썼던 아픈 우리들의 역사가 사장되고 국가찬탈의 역사가 정사가 되는 폐륜아들의 대물림이 계속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4.19가 20년 뒤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승화, 태동하였지만 결과는 박정희 기회주의자를 추종햇던 살인마 전두환의 무력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임정에서 국민공화제를 선언한 이래, 일제치하에서는 독립군으로, 이승만 독재시대, 역사적인 군사쿠데타 정권이었던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이르기까지 현대사는 암울한 민주화운동, 독재저항운동, 국민저항 운동이 시대로, 민주주의는 독재의 망령 앞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무너졌었다.
민주주의가 참다운 헌법적 민주주의로 햇볕을 본것은 불과 20여년전 6월 항쟁이 그것이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한때는 10여년전의 김대중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노무현 정부가 유일한 대한민국의 헌법적 참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다. 국민의 이름으로, 헌법적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실천한 유일무이한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이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이 지나고 MB정부가 들어 섬으로써 또다시 민주주의 역사는 독재와 파쇼에 직면하게 되었다. 현재의 개정헌법을 가져온 6월항쟁, 그 민주주의의 봄은 현정부여당의 시나리오대로 헌법적 가치와 민중이 썼던 민주주의 헌법은 또다시 고난의 길을 예측케 한다.
지난해 현정부와 여당, 교과부, 뉴라이트, 그리고 그들 협력자들이 좌고우면이라는 말로 시작된 교과서 개정과 역사왜곡이라는 편법과 미화, 날조 작업으로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았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지만... 한글이 무시되고 임정법통 부정, 독립운동가들이 테러리스트로 폄훼, 왜곡, 6얼항쟁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4,19혁명이 4.19데모에 이르기까지 그 침탈과 탄압, 왜곡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2009년, 이 시점에서도 이데올로기와 매카시즘에 매몰된 정권, 독재자, 친일부역자, 치명적 도덕적 결함으로 무장한 졸부, 천박하고 몰락해 가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권력의 핵심부을 유린하는 정권, 전정권 탓하고 전정권을 흠집내기 위해서 그 어느때보다 정치보복에 집념하는 정권, 국민건강권, 국민생존권을 등한시 하고 괴담으로 몰아 간 촛불탄압 등등...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 가는 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풀뿌리 민주주의로 정립되지 않고 국민의 민주의식이 정치 무관심화, 정치 혐오증으로 비난과 비판의 힐난에 사로잡힐때 민주주의는 발전과 변화로부터 퇴보할 수 밖에 없다. 국민이 깨어나지 않는한 언제라도 민주주의는 서슬퍼런 독재의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을 각골명심해야 한다. 나 하나쯤이야 하다 가는 국민주권과 권익, 헌법적 민주주의 정체성 파괴는 현대한민국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현재, 빼앗기기 시작한 들판에 내버려진 민주의 역사와 가치가 21세기 2009년, 국민저항이라는 준엄한 헌법적 정의와 주권자로서의 국민들 가슴 속 마디마디 붉디 붉은 그 잔인했던 핏값을 원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民主主義'가 숨죽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여, 피로 민주주의를 다시 쓰고 독재의 망령을 물리치고 조국을 목숨보다 사랑했던 영령들에게 삼가 향을 사르옵니다.
작금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正義와 자유민주주의는 좌초 위기에 봉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9주년인 오늘, 4.19에 대한 역사성이나 그 혁명의 의미가 점차 퇴색, 잊혀져 가고 있다. 49주년을 맞이한 4.19 혁명의 역사적 평가나 의의가 제대로 다시 오늘 날 또다시 빛나도록 그날을 엄숙히 기리지 않으면 안된다.
헌법 전문에도 4.19 혁명의 위대성을 알리는데 오늘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까마득한 옛일처럼 자본 탐욕과 욕망, 개인적 이익 때문에 위정자의 부조리, 위정자의 反헌법, 反민주, 反국민, 反법치, 反언론자유 탄압과 파괴등, 권력자들의 불의, 사회적 불의에 침묵하고 침묵을 강요 당하는 무소불위의 공안통치, 경찰국가, 파시즘에 눈치보기 급급해 하며 권력을 쥔자들은 주권자인 국민을 내치고 있는 실정이다.
4.19혁명, 정의롭지 못한 者, 정의롭게 통치하지 못할 것이고, 不義한 者, 그 파국을 맞이할 것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되새김 해 보고, 거짓과 위선으로 임기응변에 능한 者, 그 거짓과 위선의 가면이 벗겨지는 날,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는 역사학습과 현대사의 재인식이다.
4.19 49주년을 맞이한 우리는, 헌법적 민주주의에 정통해야 하고 헌법적 국민저항 정신을 만방에 각인 시켜야 한다. 또한, 국어에 몰입해야 하고 경제를 이해해야 하며, 역사를 공부하고 왜곡의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를 가슴에 새기면서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팔아대는 저 위선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하고,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을 헌법전문에서 재삼 확인하고, 국민 개개인이 민주주의 첨병 역할을 하는 그런 참시대정신이 요구된다 하겠다.
// 4.19 혁명이란?
1960년 4월 19일에 절정을 이룬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反不正)·반정부(反政府), 반독재 항쟁.
배경
1960년을 분수령으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권위주의적인 고령의 이승만 정권이 종식되기를 갈구했다. 그러나 1950년대말 국가보안법의 시행과 이승만의 재집권 기도,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처형, 그리고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욱의 사망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를 잠식시켰다. 그리고 이들의 집권 정부에 대한 분노는 3·15부정선거에 대한 항거로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건국 후 12년을 집권한 이승만 정권의 제1공화국에서의 정치적 쟁점은 근본적으로 정권적 차원의 것이었다. 즉 부정선거를 통한 장기 집권과 독재 권력에 반대하여 민주 절차에 의한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운동이 정치 투쟁의 주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따라서 4·19혁명이라는 대중적 봉기로 극적인 표출을 본 제1공화국의 갈등은 체제나 이념 차원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이승만 정권의 지지자들과 그 반대자들 사이의 반목과 투쟁이라는 정권 차원의 정치 현상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분열에 관해 지지 그룹은 자유당 내 이승만의 직속 측근들, 경찰과 관료, 군부(특히 고위층), 그리고 일부 기업인들로 구성되었고, 반면에 그들에 대한 적대 그룹에는 민주당의 야당 정치인, 대학·언론 연계 속의 지식인들, 그리고 학생들이 포함되었다. 따라서 4월 '혁명'은 지지 그룹의 통치에 대한 적대 그룹의 성공적 도전과 전복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원인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많은 공무원들이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는 등 부정은 극에 달했다. 또한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이 후보자등록·선전활동·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3월 선거에서는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 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했던 것이다. 1956년 선거 직전에 있었던 신익희의 죽음에 이어, 1960년 선거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의 죽음으로 다시 실망에 빠졌다. 조병옥은 선거에서 이승만의 강력한 견제세력이었으나 그의 죽음으로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시되었다. 따라서 실제 싸움은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후보자 이기붕 사이의 부통령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야당 선거운동원들은 계속해서 경찰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승만을 지원하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시민들의 투표를 감시하기 위하여 투표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농촌지역에서는 3·9인조 등의 '조'가 형성되었고, 자유당에 대한 충성심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자가 각 조의 '조장'이 되어 '조원'들의 자유당 후보자에 대한 투표를 책임졌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후보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선거 결과는 경찰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서 완전히 날조되었기 때문이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1/3보다 2배 이상 많은 표를 얻었고, 이기붕은 180만 표를 얻은 장면을 제치고 840만 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회에서 민주당은 선거를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했고, 부정선거와 불법선거를 규탄하는 반정부시위가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대도시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심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이반되어 있었으므로 대규모의 봉기에 필요했던 것은 도덕적 분개라는 공통된 감정을 점화시켜줄 수 있는 사건만 있으면 되었다. 4월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을 때, 항구도시인 마산 시민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바다 속에 버려진 마산상업 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는 급격히 확산되었다.
전개
4·19혁명 전의 몇 주 동안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또한 해결 능력도 결여된 상태였다.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해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이런 사태의 비극에 책임이 있는 '무분별한 사람들'의 죄는 간과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젊은 청년들'을 폭동으로 유도·선동하는 '정치적 야심가'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활동에 대하여 경고했다. 이승만의 이런 담화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했다. 또한 4월 18일 서울에서 시위하고 있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는 반공청년단의 습격을 받았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다. 전국적으로는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그날 서울에서만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전국의 주요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송요찬 중장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으며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했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4월 21일 내각은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다음날 이승만은 전 국무총리였던 변영태와 전 서울시장이던 허정에게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도움을 간청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승만의 각료로 들어가기를 거절했다. 이승만은 이기붕으로 하여금 모든 정치활동으로부터 물러나도록 했다. 이어 당시 부통령이었던 장면은 자기가 이승만의 사임으로 대통령직을 이어받도록 되어 있는 한 이승만이 결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을 것으로 믿고,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와 결별하겠다고 말함으로써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했으며, 아울러 앞으로 경찰을 포함한 정부관리들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시위대들은 재선거의 실시 대신에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고, 시위군중들은 물러설 줄을 몰랐다. 4월 25일 시위의 물결이 일어났다. 각 대학 300여 명의 교수들이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시내를 행진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미대사였던 W. P. 매카나기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정·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시작될 것이며, 헌법도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뀔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중에게 굴복했음을 의미한다.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골격을 이루어왔다는 것은 4·19혁명 후 경찰력의 마비에 따라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됨으로써 명백하게 드러났다. 교수들의 시위로 시작된 시위의 새로운 물결, 미국으로부터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으로부터의 지지결여 등에 직면하여,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일 전에 이승만으로부터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된 허정은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과도정부의 수립과 전개
4·19혁명 후 허정은 이승만의 간청에 따라 외무부장관직을 받아들였다. 이승만의 사임 후 정부 내에서 허정의 권력기반이 크게 위태로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허정은 한국 사회의 어떤 부문에서도 정치적인 지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학생과 일반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허정은 이승만 정권의 연장을 의미했다. 또한 그는 배후에 민주당이나 민족청년단과 같은 조직화된 정치세력을 가지지 못했다. 자유당은 허정이 과거 이승만과 그의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지녔기 때문에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급격한 변화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5월 3일 발표문에서 허정정부는 정책기조의 전체적인 방향을 광범위하게 밝혔다. 내정에서는 일상생활과 법 그리고 사회조직의 근본구조에 미치는 4·19혁명의 여파를 극소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과제에는 반공투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외관계에서 과도 정부는 강한 반공노선 및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지속하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허정의 과도정부는 이승만 정권이 초래했던 국제적 고립, 특히 아시아 또는 여타 지역의 중립국가들과 일본에 대한 폐쇄적 관계를 지향하는 정책의 길을 터놓았다. 허정의 과도정부는 일련의 모순된 목표를 추구해야 했다. 군대 내부의 부패를 일소하고, 선거 부정을 저질렀던 자들을 처벌하며, 전직 자유당 관리나 부정축재자를 즉각적이고 혹독하게 처벌하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었다. 한편 정치문제에 있어서 과도정부에 의한 양당제도의 확립을 위한 조처가 기대되었으나, 과도정부로서는 자유당의 부활이나 또는 좌익적 정당의 등장을 용인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상충되는 과제에 부딪힌 과도정부는 최소한의 현상유지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정부는 단지 선거부정이나 정치 테러에 책임을 지고 있는 경찰의 최고 간부들만을 해임시켰을 뿐, 근본적인 문제처리에는 미흡했다.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반복해서 밝혔으나, 실제로는 몇 사람에 대하여 과거의 부정을 자진신고하게 하고, 부정축재분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데 그쳤다. 7월에 가서야 이승만 정권 밑에서 부정축재한 18명의 개인과 기업가 66명의 명단을 공개하고, 이들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짧은 과도정권 기간중 허정정부는 줄곧 '비혁명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견지한 결과, 후계정권이 혁명적 개혁조치를 지향하는 데 많은 제약과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 그러나 허정정부가 이룩했던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하나는 정치세력집단으로서의 자유당의 해체였다.
의의
1960년 당시 한국의 상황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와 정치의식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그의 지지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다. 그러나 시위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은 그들 스스로의 조직화된 혁명의 지도력을 가지지 못했다. 조직화된 혁명의 지도력이 없는 상태에서 학생은 학원으로 돌아가고, 혁명의 결과도 당시로서는 별다른 대안 없이 유일한 정치세력인 민주당이 가져갔다. 역설적으로 이와 같은 명백한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의 붕괴 후에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4.19기념관에 벌써...
미래세대인 아이들에게 4.19혁명을 데모?로 격하 시키려 했었던...
// 결과적으로, 국민의 심판과 미국의 입김으로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간 이승만, 지휘부의 지도력 부재를 들지만, 이미 4.19가 터지기 전에 박정희는 자유당 정부를 전복 시키려고 이미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4.19 혁명으로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는 잠시 미뤄졌을 뿐이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후에 4.19 혁명을 완성 시키는 정부가 들어 서지 못함으로써 대한민국은 예정된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4.19 혁명 정신을 일거에 침묵하게 만드는 무소불위의 독재정권이 탄생되게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독재자,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이승만의 노욕과 권력집착으로 친일반민족주의자들은 사회 구석구석에서 재생, 기득권화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찬탈당한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것이다.
친일부역자 박정희의 정권찬탈은, 제2기의 친일반민족부역자들의 부활과 권력화, 민족정기의 영원한 파멸과 내환을 예고했음이다.
후에 또다시 전두환 군사 쿠데타 정부가 대를 이어서 민주주의를 침탈함에 수많은 민주투사들은 민주주의를 피로 썼던 아픈 우리들의 역사가 사장되고 국가찬탈의 역사가 정사가 되는 폐륜아들의 대물림이 계속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4.19가 20년 뒤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승화, 태동하였지만 결과는 박정희 기회주의자를 추종햇던 살인마 전두환의 무력 앞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임정에서 국민공화제를 선언한 이래, 일제치하에서는 독립군으로, 이승만 독재시대, 역사적인 군사쿠데타 정권이었던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이르기까지 현대사는 암울한 민주화운동, 독재저항운동, 국민저항 운동이 시대로, 민주주의는 독재의 망령 앞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무너졌었다.
민주주의가 참다운 헌법적 민주주의로 햇볕을 본것은 불과 20여년전 6월 항쟁이 그것이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한때는 10여년전의 김대중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노무현 정부가 유일한 대한민국의 헌법적 참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해 주고 있다. 국민의 이름으로, 헌법적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실천한 유일무이한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이제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이 지나고 MB정부가 들어 섬으로써 또다시 민주주의 역사는 독재와 파쇼에 직면하게 되었다. 현재의 개정헌법을 가져온 6월항쟁, 그 민주주의의 봄은 현정부여당의 시나리오대로 헌법적 가치와 민중이 썼던 민주주의 헌법은 또다시 고난의 길을 예측케 한다.
지난해 현정부와 여당, 교과부, 뉴라이트, 그리고 그들 협력자들이 좌고우면이라는 말로 시작된 교과서 개정과 역사왜곡이라는 편법과 미화, 날조 작업으로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았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지만... 한글이 무시되고 임정법통 부정, 독립운동가들이 테러리스트로 폄훼, 왜곡, 6얼항쟁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4,19혁명이 4.19데모에 이르기까지 그 침탈과 탄압, 왜곡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2009년, 이 시점에서도 이데올로기와 매카시즘에 매몰된 정권, 독재자, 친일부역자, 치명적 도덕적 결함으로 무장한 졸부, 천박하고 몰락해 가는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권력의 핵심부을 유린하는 정권, 전정권 탓하고 전정권을 흠집내기 위해서 그 어느때보다 정치보복에 집념하는 정권, 국민건강권, 국민생존권을 등한시 하고 괴담으로 몰아 간 촛불탄압 등등...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 가는 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풀뿌리 민주주의로 정립되지 않고 국민의 민주의식이 정치 무관심화, 정치 혐오증으로 비난과 비판의 힐난에 사로잡힐때 민주주의는 발전과 변화로부터 퇴보할 수 밖에 없다. 국민이 깨어나지 않는한 언제라도 민주주의는 서슬퍼런 독재의 먹잇감이 된다는 사실을 각골명심해야 한다. 나 하나쯤이야 하다 가는 국민주권과 권익, 헌법적 민주주의 정체성 파괴는 현대한민국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현재, 빼앗기기 시작한 들판에 내버려진 민주의 역사와 가치가 21세기 2009년, 국민저항이라는 준엄한 헌법적 정의와 주권자로서의 국민들 가슴 속 마디마디 붉디 붉은 그 잔인했던 핏값을 원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民主主義'가 숨죽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하여, 피로 민주주의를 다시 쓰고 독재의 망령을 물리치고 조국을 목숨보다 사랑했던 영령들에게 삼가 향을 사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