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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추사 고택 답사 기행문
-필드가 선생이다-
20100332 철학과
유동균
봄이 마무리 되어가는 2016년 5월 28일. 조선시대 생활사 수업을 통해 예산에 있는 수당고택과 추사고택으로 답사를 가게 되었다. 학술적인 이유로 답사를 가게 된 것은 이번 경험이 처음이었다. 물론 중고등학교 시절 현장학습이라는 명분 아래 박물관이나 유적지 견학을 갔었지만 주변 사람들과 새로운 지역에 가서 논다는 생각만 하였지, 어떤 지역에 남겨있는 역사를 조사하고 체화하러 간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사실 답사 가기 전날은 ‘아는 사람도 없고 학술적인 목적으로 답사를 가야한다는 답답한 마음’이 절반, ‘일찍 일어나야 된다.’는 부담이 절반으로 잠을 쉽게 청하지 못하였고 답사를 가는 설레는 마음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버스가 흑석동을 지나 고속도로에 막 진입하려는 순간 답사 지도를 맡아주셨던 박경하 교수님이 하신 말씀에 의해 답사에 대한 나의 생각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 말씀은 바로 ‘필드가 선생이다.’ 이었다. 학교에서 받는 수업은 물론 중요하지만 한계가 존재한다.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힘과 강력한 인상, 분위기 등이 우리로 하여금 저절로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고 기억하게 한다는 것이 교수님이 말하신 요지라고 생각한다. 시험 점수를 위해 하루 시간을 때우자는 생각으로 갔던 나의 입장에선, 그 말을 듣자 마음의 찔림과 동시에 부끄러움이 느껴졌고, 동시에 ‘그래 필드에 가서 무언가를 느껴보자’라는 생각이 들면서 답사가 기대되는 형국으로 전환되었다.
수당고택과 추사고택이 있는 예산은 비구니 사찰로 유명한 수덕사가 있는 곳이며, 박헌영의 고향이기도 하다. 바로 옆에 있는 홍성과 더불어 예산은 카톨릭 사상, 서학이 일찍 받아들여지면서 평등사상이 비교적 일찍 퍼져나갔으며 훌륭한 독립운동군들이 나타난 곳이기도 하다. 그 예로 홍성 출신의 김좌진 장군은 자신의 농토를 노비에게 주고 독립운동을 떠나기도 하였다. 이처럼 예산은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수당고택> 조선 선비들의 혼 ‘士可殺 不可辱’
고속도로를 빠져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아주 좁은 길에 들어섰다. 가끔씩 나타나는 수당고택 이정표가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였음을 말해주었다. 도착한 수당고택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산 아래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 잡고 있었다.
수당 고택은 고 이남규 선생님이 살던 저택으로 조선시대 말기 일제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이남규 선생님 태어난 곳이기도 하며 독립운동을 도모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는 맹사성고택 이후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기도 하다.
현재 수당고택은 이남규 선생님의 후손이자 중앙대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이문호 교수님께서 관리하고 계신 곳이다. 특히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큰 인상에 남는다.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교수직은 여가로 하는 것이었고 당신께서 본업으로 삼으신 것은 조상을 선양하는 것 이었다. 이 분의 이런 삶의 태도야 말로 조선시대 그대로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접빈객 봉제사였다. 조상을 받들고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그들의 삶이었다는 것을 보면, 이문호 교수님께서 조상의 얼을 받들고 우리 학생들을 반갑게 맞이해주셨다는 점에서 여전히 선비의 삶을 살고 계신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고택 옆에 만들어진 기념관 입구에는 ‘사가살 불가욕(士可殺 不可辱)’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선비는 죽일 수는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라는 의미이다. 수당 선생님의 삶을 축약하여 보여주는 문구이다. 이남규 선생님은 선비의 삶에 한 치도 어긋남 없는 최후를 보여주셨다. 수당선생님은 독립운동의 주요 인물이기 때문에 일제의 많은 회유가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으시다 결국 냇가에서 아들과 가마꾼과 함께 일본놈들의 칼날에 의해 순국하셨다. 마치 조선에서 시행되었던 향규에서 상천에 대한 수탈을 막고 교화를 위해 힘썼던 사족들의 모습처럼 수당선생님의 모습은 선비답게 솔선수범하여 애국정신과 독립에 대한 간절함을 보여주셨다.
수당기념관에는 이남규 · 이충구 · 이승복 · 이장원, 수당 4대로 이어지는 애국 활동에 대한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와, 수당가에 전해지는 선대유물 및 고문서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사자료에 따르면 수당선생은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오른 후 항일활동을 위해 많은 상서를 올렸으며, 많은 독립군들을 숨겨주기도 하였다. 자신의 삶보다 명분과 소신을 중요시 하였던 수당선생의 삶은 이후 유생들의 항일 투쟁에 자극제가 되었고 충 효 의의 선비정신을 보여주며 손자 이승복 선생과 이장원 선생 이충구 선생가 이를 이어받아 애국을 위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상류층이 갖는 권위는 문서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그 존경 또한 돈이나 관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돈과 물질이 그 사람의 신분을 보여주는 요즘 시대에서 수당가의 4대가 보여준 선비정신은 정신이야 말로 그 사람의 가치를 보여준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며, 나아가 사회 전체를 위한 희생은 그야말로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수당기념관에는 수당 4대의 애국 활동 외에도 수당가에 전해지는 다양한 유품들이 많이 있었다. 도장, 호패, 벼루 등 실생활에서 사용하셨던 물건들도 있었고, 혼서나 홍패같은 문서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유품은 어사화와 마패 주머니었다. 수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봐도 어사화임을 바로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관리 상태가 굉장히 좋았다. 또 마패 주머니 역시 관리가 힘들어 지금 찾아보기 힘들 물건이지만 수당가의 사람들의 노력으로 주머니 역시 좋은 상태로 보전되고 있었다.
-수당고택
수당기념관에서 느낀 감동과 즐거움을 느끼고 발걸음을 향한 곳은 바로 옆에 있는 고택이었다. 고택에 들어가기 전에는 열녀문이 세워져 있었다. 당시 집에는 열녀문이 있어야 명문가였고, 수당가의 한 며느리가 효부가 되어 사회적인 보상을 받은 것이었다.
가장 먼저 본 곳은 사랑채였다. 사랑채는 강의를 한다 해도 100여명이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집주인이 앉는 고상은 글공부를 하기 참 좋은 구도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독립군들을 숨겨주고 도와주는 곳이기도 하였으며, 찬바람이 들어 올 것을 우려하여 문단을 통해 바람을 막는 장치도 되어있었다. 또 겨울에는 열이 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천장은 흙으로 덮이고 높아 햇빛이 강한 여름날에도 시원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뒷산의 은은한 바람이 여기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이런 한옥의 과학적인 설계는 자연을 파괴하는 현대 문명의 한계를 넘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에 따르면 한옥은 한옥의 자태를 구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주인의 입장에서 집 밖의 풍경을 보는 것 역시 중요한 관전 포인트이다. 사랑채 가운데 앉아 본 집밖의 풍경은 정원의 아기자기한 꽃과 나무들과 더불어 학이 날개를 펼친 형상의 산이 위치하고 있었다. 아마 풍수와 관련하여 환경과 집안이 한데 어우러진 의미를 지닐 것이다. 한옥은 조경과 함께 이루어질 때야 본연의 멋을 보인다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수당 고택의 모습은 일품이었다. 특히 길게 뽑은 처마 밑에 있는 툇마루에선 선비의 여유와 귀품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채 탐방을 끝낸 후 향한 곳은 안채였다. 안채에 가기 전에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은 손자가 머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손자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공부하기도 하고 늘 심부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흔히 밥상머리 교육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 전통문화에선 집안의 할아버지께서는 아들과는 겸상하지 않아도 손자와는 겸상을 하며 직접 예절을 가르쳐왔다. 지금도 명절마다 시골에 내려가면 할아버지께서 나를 옆에 두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시곤 하는데, 이곳에서 그런 문화의 한 양태를 느껴볼 수 있었다.
안채에 들어서자 추사고택만의 특이한 점을 볼 수 있었다. 안채가 사랑채보다 앞으로 나와 있으며 사랑채가 더 높기도 하였다. 본래 조선시대에선 집안 여성들을 숨기고 여성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안채는 더 깊숙이 위치하는 것이 특징인데, 수당고택의 모습은 그 반대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문호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조상 할머님께서 여장부의 기질을 보이셨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한 근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안채는 ㅁ자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입구는 여자들이 치마를 걷지 않고도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가도 걸리지 않는 구도로도 설계되어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옆에 있는 방이 눈에 띄기도 하였는데 이는 머슴과 노비가 지내던 방이었다.
본격적으로 안채에 들어서자 수당고택만의 특이한 점이 또 하나 발견되었다. 신주를 모시는 사당은 본래 집 바깥에 있는데 이 집은 사당이 안채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본래 사당은 아무나 보여주지 않는 곳이지만 이문호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을 위해 특별히 사당을 공개하고 그 안의 위패가지 보여주셨다. 사당 안에는 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위패는 선조들의 혼이 담겨있다고 생각되어졌기 때문에 봉제사를 중요시하는 양반에게 위패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게 되더라도 다른 것은 챙기지 못해도 가장 먼저 챙겨나가야 하는 것이 이 위패이다. 위패는 4대조까지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집안의 위대한 인물이 있으면 4대에 상관없이 제사를 드리기도 하는데, 수당고택에도 역시 명문가답게 불천위를 볼 수 있었다. 이문호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을 위해 위패를 직접 꺼내셔서 분리되는 구조를 보여주시기도 하였다. 말로만 듣던 위패를 실제로 보니 마냥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수당고택 곳곳에는 수당가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동시에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원한 바람 과 조용한 자연의 풍경은 당시 양반들의 여유로운 삶과 마음을 직접 느끼도록 하였고, 신발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한 구도는 접빈객을 중요시하는 그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독립운동을 몸소 실현하고 때로는 독립군들을 도와주던 흔적 역시 집안 곳곳에 남아있었고 그런 종합적인 정신은 이문호 교수님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책으로만 봐왔던 양반의 정신과 삶은 글에서 끝났었지만 직접 현장에서 느낀 그 감동은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고 마음속에 더 깊이 와 닿았다. ‘필드가 선생이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는 계기였다.
여행의 재미는 먹거리라 하였다. 아쉬운 마음을 한 채 수당고택을 나와 발검음이 향한 곳은 메기 매운탕 집이었다. 박경하 교수님께서는 답사에서 중요한 건 그 지방의 막걸리를 한 잔 마셔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답사 당시 날이 꽤 더웠지만 메기 매운탕과 함께 마신 막걸리 한잔은 다음 목적지인 추사고택으로 향하는 힘을 보태주고 흥을 보태주었다.
-<추사고택> 화법유장강만리 서예여고송일지 畵法有長江萬里書藝如孤松一枝
맛있는 점심식사를 끝마치고 향한 곳은 추사고택이었다. 양반에게는 3채의 집이 있다. 경저, 별서, 향제다. 경저는 벼슬길에 올라 사대문 안에 살기위해 지내는 집을 말한다. 벼슬에 떨어지면 그 날 안으로 사대문 바깥으로 나가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분경이라 하여 벼슬을 청탁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벌을 주었다. 때문에 그 주변에 집을 짓고 언제라도 사대문 안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집이 별서이다. 흑석동 역시 별서가 있는 위치로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고향에 있는 집은 향제라고 하는데 추사고택이 바로 이 향제에 해당한다.
추사고택에 들어가기 앞서 추사기념관에 먼저 들어가 추사선생의 삶을 공부하였다. 추사기념관은 추사선생의 일대기를 쉽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그 흐름대로 역사와 그림을 읽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추사선생은 1786년에 태어났다. 세 살부터 붓을 잡았으며, 집안에서 대대로 명필이 많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추사는 일찍이 박제가와 사제지간을 맺으며 학문적으로 다향한 방면을 배웠으며, 옹방강이라는 청나라 고증학자는 추사의 천재성에 감탄하여 사제관계를 맺었고 추사를 연경으로 두달동안 데리고 다녔다. 추사의 이 연경행은 조선의 새로운 지식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추사선생은 경학, 금석학, 문자학, 사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학문에 통달하였으며, 종교적으로는 불교를 공부하여 조예가 깊고 불교적 심상을 삶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기도 하였다. (불교와 관련해서는 세조와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문수사에서 세조는 한 동자에게 등을 긁어달라 하면서 “임금의 등을 만졌음을 말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동자가 “문수보살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마시오.”라 했다는 것이다. 놀란 세조는 뒤돌아 봤지만 신발만 남긴채 동자는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추사선생은 관직에 있던 도중 당파싸움의 희생양으로 제주도로 귀향을 가게 된다. 이것이 오히려 추사선생의 인생의 반환점이 되어 학문과 예술에 깊이를 더해갔고 하나의 훌륭한 인간으로 나아가면서 특유의 서체를 완성하였다. 추사체라고 불리는 이 특유의 글씨는 귀향 전 멋과 기교를 중시했던 서체에서 조형미를 추구하는 담백한 글씨체로 바뀌면서 한국 특유 서예 맥락을 형성하였다.
조선의 옛 글씨는 모두 중국의 글씨체를 따라하는 것이 유행이자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이광사 선생이 동국진체라는 조선 특유의 글씨체를 고안하였고, 추사선생이 여기에 화룡정점을 찍으면서 오히려 중국에서 조선의 서체를 역수입하기도 하였다. 이후 추사선생은 수많은 명사를 제자로 키워내기도 하지만 권돈인에 연루되어 함경도로 재귀향을 가게 되고 말년에 과천에서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추사선생의 삶은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역동적이고 고난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다사다난한 삶이 마음을 비우는 불교적 심상과 합쳐져 인고의 세월을 하나의 참된 인간으로 성장시켰고, 그런 추사선생의 혼이 작품에 실려 그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울릴 정도로 감동을 받았고 담백함의 멋과 인생무상의 덧없음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추사기념관에는 추사선생이 생전에 썼던 인장과 벼루도 있었고 조선시대의 다양한 서예사도 볼 수 있었다. 역사책에서 유명한 한석봉의 서체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 기념관 속에서 나를 아주 부끄럽게 하는 문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내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나는 70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라는 추사선생의 말씀이었다. 아무 노력도 없는 나에게..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신세한탄만 하는 나에게 추사선생이 혼쭐을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부끄러우면서도 정신차리게 하는 한마디 말이었다.
추사기념관을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추사고택으로 향하였다. 추사고택은 대게의 고태고가는 약간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추사고택은 본래 터만 있었고 집은 없었는데, 얼마 전에 다른 고택 자재를 통해 복구한 것이었다. 때문에 추사고택은 문화재를 아니었고 반면 수당고택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추사고택은 'ㄱ' 자의 사랑채와, 'ㅁ'자의 안채 그리고 집 가장 뒤 영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추사선생이 남긴 명언들이 사랑채 기둥과 대문 등에 붙어있다는 점이었다. 그중 내 마음을 가장 휘잡았던 문구는 畵法有長江萬里書藝如孤松一枝 과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 였다.
畵法有長江萬里書藝如孤松一枝은 ‘그림 그리는 법은 긴 강이 만리에 뻗친 듯 웅장함이 있고, 글 쓰는 기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라는 의미이다. 정확히 추사선생께서 어떤 의미로 하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에 들어온 의미는 이렇다. 그림 하나 글 하나에도 한 사람의 신념과 인생이 담겨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념과 인생이란 욕망, 욕심과 관련된 세속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회를 위한 단호한 결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문득 수당고택에서부터 이어지던 양반의 삶과 그들이 추구하던 가치관이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겨지게 되었다.
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는 고요히 앉아 차를 반쯤 마시면서 참선을 하는 그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요히 앉은 자리에 차를 반 넘게 마시도록 타는 향은 처음과 같고 고요히 흐르는 시간에도 물은 흐르고 꽃은 피더라.’ 라는 의미인데 불교적인 의미라고 추측한다. 추사선생이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세상을 고정불변의 실체로 보고 집착하려는 망념을 버리고 마음을 관조할 때 얻는 깨달음을 말한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 생각나는 것은 어렸을 적 추억이었다. 추사고택을 둘러보고 툇마루에 앉자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추억이 떠오르기도 했다. 여름이 되면 할아버지와 툇마루에 누워 할아버지가 해주시는 6.25 이야기나 옛날 설화들을 들어왔는데, 그때 들었던 자연의 소리와 할아버지와의 교감이 지금도 여전히 아련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그때 그 기억이 추사고택 처마 밑의 시원한 바람과 교차되면서 참 즐거운 하루를 지냈다는 생각으로 모든 것이 가득 찼다.
필드는 선생이라 하였다. 처음 답사는 내게 의무적인 것이자 가기 싫은 것이었다. 하지만 현장은 내게 책에서 가르쳐주지 못하는 것들을 주고 있었다. 물론 교수님들의 수업 역시 인생을 가르치는 강의이기 때문에 훌륭하지만 강의실 안에서 듣는 내 마음은 쉽게 헤이해지고 집중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필드는 실제 선조들의 혼과 얼, 삶 등을 내 피부에 대고 말하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체화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 직전 툇마루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이할 때, 몇 백 년 전에 이곳에 앉았을 선조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문득 깨달으며, ‘이것이 답사의 참 맛 이구나’를 깨달았다. 쉬는 날이면 항상 방에서 젊음을 허비하던 나에게 이번 답사는 많은 감동과 함께 밖으로 나가자는 힘을 주는 인생에서 어떤 가치들이 변하는 계기였고 소중한 추억이었다.
첫댓글 수당 고택에서 사당이 안채 안에 위치한 점이 흥미롭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