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더러 노래하지 말라 하심은? ]
우리 합창단의 수업은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있고, 단원 모두는 이런 전통에 충분하게 익숙해져 있다.
입단하면서 첫째 놀라게 되는 것은 우선 매번 정밀한 수업계획이 미리 공지되고, 갑작스런 초청공연 같은 큰 변수가 없는한 실제 수업이 모두 그 정밀한 수업시간표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우리 단원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인데, 사실 우리 모두는 청춘합창단에 입단하기까지 그 이전에 이미 수많은 합창단에서 경륜을 쌓으며 합창을 공부해 왔어도 이처럼 분단위로 정밀하게 작성된 수업 계획표는 어디에서도 본적이 없다.
김상경 지휘자님은 우선, 우리 같은 아마추어 합창단이 주5일 연속으로 수업하는 프로합창단의 실력을 따라가려면 주1회 세시간의 수업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각자 별도로 주 180분의 자습을 성실히 이행해야 드디어 어느 정도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있으니, 단원 각자는 이 일주일의 추가 자가 연습 총량을 반드시 지켜달라는 것이다.
또한, 수업 시간은 각자가 자습하며 익힌 곡을 전체 단원이 모여 서로의 소리를 들어가며 최적의 화음을 찾아 맞춰가는 하나의 다시 듣는- re hear - 시간이므로 미리 제시되는 시간별 수업계획에 대비해서 그날 리허설에 올려질 곡을 각자 철저하게 숙달시킨 채로 수업에 출석해 달라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다른 합창단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지휘자님이 내어주는 숙제는 막연하게 곡 전체를 다 익혀 오라는식이 아니고 어느 곡의 몇번째 마디에서부터 몇번째 마디까지 확실하게 자습하라는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 주신다.
그럼에도 혹시 자습을 게을리해서 곡을 익히지 못한채 수업에 참여하면 그만큼 학습진도에 어려움이 생기고, 당사자도 동료단원에 비해 뒤쳐지는 찌푸드드한 느낌을 가지게 되며 가뜩이나 명문합창단 단원으로서의 자존감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니 어느모로 봐도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가끔 우리가 신명나게 노래를 진행하는 도중에 지휘자님으로부터 벼락 같은 호통이 떨어질 때가 있다.
" 노래하지 말고!!! "
처음 이런 분노에 가까운 호령을 들었을 때, 우리 단원 모두는 매우 의아했다.
왜냐하면,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지휘는 계속 진행되고 있기에 실제로 그 호통은 노래를 당장 멈추라는 지시는 아니고, 여하튼 합창은 계속 진행하되 노래는 하지 말라는 뜻임을 알아차리게 됐는데,
합창은 계속하되 노래는 하지 말라 하시는 이 이상스러운(?) 지시가 정확하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인지 뭘 어떻게 하라시는 것인지 처음에는 이 호통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많이들 방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지휘자님의 자세한 부연설명이 몇차례 되풀이되고 나서야 우리 모두는 이 뜻을 정확하게 알게 됐고, 그때부터 모두 이 지시에 따라 합창 자체에 순수하게 몰입하도록 정신을 가다듬게 됐다.
지휘자님을 모시고, 합창을 공부한지 어언 11년차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노래하지 말고>의 뜻을 어렴풋이 번역할 수 있게 됐으니 내가 무척 아둔한 편에 속한다고 자인할 수 밖에 없다.
Don't Singing
but Playing....
" 노래하지 말고!! "
의 호통은 언제 듣게 되는가?
생각을 해 보니, 보통 우리들이 어떤 곡을 거의 완벽하게 익혀서 제법 자신감이 들었을 때, 이 호통을 듣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았다.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그럴즈음 우리가 이런 주의를 받게 되는구나 알아차리게 됐다.
가사 음정 음색 리듬 박자등 곡의 구성 요소를 거의 완벽하게 익히고 나서 합창을 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 아, 이곡은 내가 이제 완벽하게 알고 있지...' 하고 여기면서 제 멋에 겨워서 각자가 합창단원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솔리스트처럼 부르려는 경향이 슬며시 솟아나게 되는데, 지휘자님은 이런 경향이 보여질 낌새가 보이면 지체 없이 이 비상발령을 내리시는 것이다.
Don't Singing, but Playing
이라 하심은 우리가
Soloist 의 mind가 아니라
Choir spirit으로 Chorus mind로 불러달라 하시는 요구인 것이다.
나 혼자서 부른다면 내나름의 특색을 부여해서 마음내키는대로 감정과 기분을 살려서 노래해도 되겠지만, 여럿의 소리를 곱게 모아야 하는 합창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전체의 소리에 어울리는 정확한 음정 피치의 비브라토 없는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하지 않으면 안된다.
지휘자님이 노래하지 말라 하심은 우리가 제멋에 겨워서 각각 솔리스트처럼 부르려 할때, 내리는 긴급 경고 메시지이다.
아무리 곡이 익숙해져도 솔리스트처럼 또는 마음내키는대로 또는 절대 금기사항인 비브라토까지 보태서 노래하면 합창은 여지없이 깨어지며 절대로 한사람이 부르듯 절묘하게 블랜딩되지 못하게 된다.
지휘자님은 바로 이점을 경고하는 것이다.
바이얼린 활로 현을 곧게 한 획으로 그어내며 깔끔하게 소리를 내는 것처럼 순수하게 심플하게 일정의 톤으로 비브라토 없이 담백한 소리로 발성해달라는 경고성 주문인 것이다.
세계를 제패한 우리의 합창이 으뜸인 점은 아마도 우리 단원 모두가 무대에서 singing 하는 대신에 정확한 음정 피치로 playing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끝)
첫댓글 저 또한
노래하지 말라는 쥐자님의 지적(?)을 받고
멍~@@@@이건 뭐지??
어케란거지??~
순간 정신줄 놓았던 적이
있지요^^
이젠 그 심오한 지적을
눈빛,손끝, 쥐자님의 미세한 움직임만으로도
찰나에 알아차리고
순간 생목소리, 튀는목소리, 떨어는 피치
호흡위에 소리를 얹어가며
다시 자리잡기~!!!
한 순간이라도
딴 맘 먹을 수 없이
오로지 50명 전원이 쥐자님의 손끝에 운명을 맡깁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단 일 초도
정신가출이 허용되지않는
이 탄탄한 텐션감
넘치는 수업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모두모두 오래도록 노래부르세요.지휘자님께서 그러실땐 아차 한번더 생각하시구요.진심 아니실테니까요.포에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