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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erhouse <Cleopatra>
기원 전 50 년경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역사상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웠고 그런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클레오파트라는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들과 두 번씩이나 결혼해 왕좌에 올랐고,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남편이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여 마침내 승리했다.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녀의 생애는 소설보다 더 흥미롭다.
클레오파트라의 생애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역시그녀가 로마의 지배자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하여 정치적 목적과 이집트의 안전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다..
Cleopatra on the terraces of Philae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2남 4녀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두 언니외에도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가 더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왕가의 혈통과 왕위보존을 위해 전통적으로 남매간에 결혼을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의 후예가 세운 왕조이다.
알렉산더가 대제국을 건설한 직후 사망하자 제국은 이집트 지역,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 지역, 시리아 지역 셋으로 나뉘는데
그 중 이집트를 차지한 것이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따라서 이 왕조의 지배층 문화는 이집트 고유문화가 아니라 그리스 문화요, 지배층의 언어도 그리스어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51년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위에 즉위, 공동통치를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 여덟살, 동생은 열 살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가 아닌 이집트어를 배워 사용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초의 왕이다.
그녀는 이집트 고유어를 익혔을 뿐 아니라 이집트 고유 문화와 신앙, 전통을 존중하고
자기를 이집트 고유의 신들과 결부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였고, 궁전 박물관에서 열리는 학술토론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Alexandre Cabanel (Cleopatra Testing Poisions on Condemned Prisoners)
클레오파트라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는 로마의 위협(합병)속에 이집트의 독립을 유지하는 일과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사이에는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합병을 주장하던 시저에게 접근,
타고난 미모와 지성, 재능으로 능란한 외교를 벌인 끝에 이집트를 '동맹국'으로 선언하게 만들고,
나아가 불안한 자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저가 피살당하자, 이번에는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로마에 대항했다.
Jean-Leon Gerome
< Cleopatra before Caesar >
시저와의 만남..그리고 사랑
기원 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남편 프놀레마이오스 14세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
강제로 폐위되어 유배된 상태였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를 침공한 카이사르의 막강한 힘을 빌어
왕권을 되찾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로마 최고의 실력자인 카이사르와 운명적인 첫만남을 가졌다.
위 그림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몰래 그에게 접근하려던 그녀는 기막힌 계략을 떠올렸다.
스스로 양탄자 위에 드러누운 뒤 충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 것을 명령했다.
충복은 어깨에 맨 양탄자를 호위 병사들에게 보인 후 집정관에게 줄 값진 선물을 가져왔다고 둘러댔다.
큼직한 양탄자는 카이사르의 눈길을 끌었고 호기심이 발동한 카이사르는 서둘러 양탄자를 풀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양탄자를 펼치기가 무섭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반라의 여왕이 비너스처럼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클레오파트라에게 완전히 반한 카이사르는 연인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고,
여왕의 정적을 모두 제거하고 그녀를 왕좌에 앉혔다.
여왕은 카이사르의 권력을 이용해 왕권을 되찾고 피맺힌 복수를 감행할 수 있었다.
Alma-Tadema, <Antony and Cleopatra>
그의 연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고 야망을 키우던 클레오파트라에게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의 무한한 권력에 위협을 느낀 정적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하였다.
흐미~~~ 든든한 후견인을 잃은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정세파악에 온 힘을 쏟다가, 다음 상태로 카이사르의 암살 이후
로마 최고의 실력자로 부상한 안토니우스를 점찍었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피살된 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 권력자였다.
삼두 정치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사령관에 오른 후
동방 원정길에 나섰다는 정보를 입수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안토니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묘안을 짜냈다..
G. Lairesse - Cleopatras Banquet
기원전 41년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타라를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소환했다.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를 도와준 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 명색은 로마의 동맹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호출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몇 번의 독촉을 받은 끝에야 타르수수로 향했다. 시저를 사로잡아 아들까지 둔 클레오파트라,
이번에는 안토니우스도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철저한 준비를 갖추기 위해 늦장을 부린 것이다.
시가지는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황금빛 선체에 거만하게 기대앉은 여인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앉았다.
노예들은 은으로 만든 노를 저으며 피리와 하프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고
배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동했다.
스물 아홉살의 클레오파트라...
아름다움의 절정에 있었다.
이 화려한 첫 만남에 안토니우스는 그만 그녀에게 영혼을 뺏기고 말았다....
Tiepolo, <The Meeting of Anthony and Cleopatra, detail>
1746-47, fresco, Palazzo Labia, Venice
안토니우스와 극적인 첫 만남을 가진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호사스런 생활과 날마다 새로운 쾌락으로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고 10년이 지났다.
클레오파트라는 연인을 아예 자신 곁에 못 박아두고자 안토니우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서두른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키프로스, 리비아, 시라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 한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 왕 중의 여왕'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로마의 권력자를 애인으로 둔 덕분에 그녀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다.
G. Hoet - 진주를 녹이는 클레오파트라
사랑에 눈이 먼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아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의 지배권을 동서로 양분할 것을 요구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사를 돌보기는 커녕 힘들게 정복한 식민지에서 나온 귀한 수입을
이집트 여인에게 몽땅 안겨주는 매국노... 사령관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안젤리카 카우프만 - 안토니우스묘의 클레오파트라
특히 카이사르의 상속자요,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여왕의 노예로 전락한 안토니우스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다.
그는 두 남녀를 국가의 명예를 더럽힌 탕아와 국제적인 창녀의 야합으로 매도한 후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진다.
(트로이랑 흡사하게 흘러간다.. ^^)
기원전 31년 그리스 동쪽 해안의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연합함대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바로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다.
결과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참패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로마에 끌려가 웃음거리가 되느니 자결을 택했다.
자기를 안토니우스 옆에 묻어달라는 편지를 남긴채... 기원전 30년의 일이다
Guido CAGNACCI,
The Death of Cleopatra
그녀의 의문스런 죽음..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만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안토니우스의 묘를 참배하고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최후를 맞았고,
역사가들은 그녀가 독사에 물려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그릴 때는 독사가 벌거벗은 여왕의 젓가슴을 무는
자극적인 장면을 선택하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에로티시즘이 강하게 풍겨 나오는 것은
죽음과 성(타나토스와 에로스) 를 한 쌍으로 묶어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결방법으로 독사를 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플루타르크는 뱀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단지 뱀의 자취같은 것이 발견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Eugene Delacroix
<Cleopatra and the Peasant> 1838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의 의문스러운 죽음에 대해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탐스런 무화과 바구니를 든 농부가 여왕을 방문한 직후에 일어났다.
무화과 바구니에 맹독성이 강한 독사가 들어 있었던 것일까?' 라고 강한 의문을 던졌다.
들라크루아는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한 농부의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는 뱀을 그려넣어
극적인 죽음을 예견하고 있다.
Jean Andre Rixens(1846 - 1924)
The Death of Cleopatra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이용해 왕권을 차지했고
애인들의 막강한 힘을 빌어 정적을 제거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여왕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무너지고 이집트는 로마에 합병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후한을 없앤다는 명목하에 모두 처형되었다.
Hans Makert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영웅전>을 쓴 로마의 전기작가 플루타르크가 클레오파트라를 안토니우스를 파멸시킨 교활한 여인,
'나일강의 세이렌'이라고 부른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남자의 일생을 망치는 요부,
혹은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콧대 높은 여자의 대명사로 근 2천 년 가까이 선망 섞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클레오파트라가 팜므 파탈의 원형이 된 것은 정치적인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권력의 최정상에 앉은 남자들을 차례로 유혹해 희생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J. Jordaems - 진주를 녹이는 클레오파트라
사실 로마인의 입장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오만하고 도도한 요부임에 틀림없다.
로마의 영웅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조국 로마에게 창끝을 돌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녀이니까...
때문에 로마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클레오파트라를 평가절하했고,
그와 견해가 다른 이집트측의 자료나 기록들을 없애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정보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왜곡, 조작된 정보들이다.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클레오파트라는 강대국 로마에 맞서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고 애쓴 인물이다.
H. Markart - 클레오파트라의 나일강에서의 사냥
그런데 로마인들은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로지 미모를 무기로 남자를 유혹해서 욕망을 달성한 여인으로만 남겨놓았다.
로마가 자랑하는 두 영웅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클레오파트라가 몹시 괘씸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녀를 요염한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야심만만하고 탁월한 '정치가'로서 재평가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참고 : 박은봉 저 < 세계사의 뒷이야기, 박은봉 저>
M.Blanchi - 클레오파트라
세익스피어는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현대의 영국 작가 버나드 쇼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에서
클레오파트라를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백인 장군에게 반해버린 황색인 미녀”로 치부해 버렸다.
두 작가 모두 “클레오파트라를 능력과 미모를 갖춘 여왕이라기보다
사랑의 마녀나 복수의 악녀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왕이나 여제는 남성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서였던 이유도 컸을 것이다.
신라의 선덕, 진덕여왕 등도 권력장악에 다른 남자 왕들보다 배 이상 힘을 들여야 했다.
측천무후는 역사의 괴물로 낙인찍혀 있을 뿐이다.
여자라는 것에 덧붙여 클레오파트라는 2,000년 역사 동안 서구에 지배 받아온 동양의 왕이었다.
피지배민족의 왕이었다는 것이 무한정의 오해와 편견 속에 놓이게 한 것이다.
그녀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를 한번 보자^^
구스타프 모로, Cleopatra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으로 기원전 30년 39세의 나이에 죽은 클레오파트라는
타락과 교활함과 함께 이국적인 외모로 유명하다.
심한 매부리코에다 큰 입을 가진 그녀는 그렇게 미인은 아니었지만
균형잡힌 몸매와 뛰어난 화장술, 우아한 자태, 그리고 천사같은 목소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녀의 성욕은 역사상 어느 여인보다 뛰어나 하룻밤에 100명 이상의
로마 귀족을 상대로 변태적인 성행위를 한 날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96년 7월 13일자. 설현욱<의학전문가>)
이 정도의 내용이면 과히 소송감이 아닐까 싶다^^
미인이 아니다는 것은 그녀 사후 발행된 동전(로마에서 만든 듯한데)에 보면
짱구머리에 별로 이뻐지가 않다.
당연히 로마인의 시각에는 마귀 할멈처럼 묘사되었을 것이다.
(근데 그런 그녀에게 미쳤다고 두 영웅이 빠져서 헤어나지 못했을까??
로마에는 미인이 지천에 깔렸을텐데..쩝)
위에서 설명한 대로 클레오파트라의 핏줄은 모두 옥타비아누스측에 살해되어
소송을 걸 만한 친족은 남아 있지 않지만,
만약 이런 사실을 이집트 정부가 안다면 정부차원에서
소송이 진행되지 않을까 살짝 염려가 된다.
딴 건 몰라도 '하룻밤에 100명의 남자와 상대!'.
이건 좀 의학상식을 다루는 전문지에 실릴만한 내용은 아닌것 같다.
만약 그런 내용이 있는 서적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쓴 책인지 한번 보고 싶다^^
첫댓글 제가 운영하는 까페는 일주일에 한번씩 대문을 바꿔줍니다.. 그러다보니 그안의 글자체며 색상들이 바뀌면서 스크랩해놓은 글의 폰트와 색깔이 변해버렸네요.. ^^ 모두 삭제하고 다시 제대로 포스팅해서 올렸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꾸벅 ^^
섬세한 배려 감사드리고, 코밖에 생각나지 않는 크레오파트라에 대해 많이 배우고 갑니다. 건강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