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의 박해 당시에 신자들은 굶주린 사자의 먹이가 되기 위해 원형경기장 안에 들어갈 때 장미 화관을 머리에 쓰고 갔습니다. 비록 죽을 처지이지만 죽음 후에는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강한 확신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치명한 다음에 나머지 신자들은 밤중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며 떨어진 장미꽃들을 모아 놓고 꽃송이마다 기도를 바쳤었는데, 이 관습에서 묵주 기도가 유래되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시편 기도를 바쳤고, 평신도들은 성모송을 바쳤습니다.
박해가 종식되고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후에도 묵주 기도를 바치던 관습과 성모 마리아께 의탁하는 신심은 더욱 발전되었습니다. 오늘이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정된 계기도 이슬람의 군대가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유럽을 침공하려던 레판토 해전에서 묵주 기도를 열심히 바치며 승전을 기원하면서 전투를 벌여 승리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박해시대에 성모 신심이 돈독했던 프랑스 선교사들, 특히 앵베르와 다블뤼 주교의 영향으로 묵주 기도가 전래되었습니다. 오늘날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무덤자리에서는 반드시 묵주가 발견되고 있을 정도로, 우리 신앙 선조들은 박해의 위기와 고난을 묵주 기도로 이겨내고자 무진 애를 쓰며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묵주 기도 관습에 담긴 성모 신심은 여타 종교의 주문이나 주술과는 분명히 달랐다는 것이 박해시대 신자들에게 널리 읽힌 교리서, ‘주교요지’에도 정확한 성모 교리가 기록되어 있고 다수의 성모 신심 서적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박해시대 교우들 사이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을 본받고자 하는 동정녀들의 신앙공동체가 존재했으며, 사회관습상 이런 생활양식이 어려워지자 동정부부의 삶까지도 등장한 것만 보아도 우리 신앙 선조들의 신앙 수준과 신심의 정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정녀 공동체의 회장이기도 했던 유점혜 아가다는 수 차례 성모 발현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묵주 기도로 청하고 감사드리는 관습이 널리 퍼져서 거의 공식화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권장하신 바입니다. 다만 청하되 하느님 나라와 성령을 먼저 청할 것과 청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주시는 것도 기꺼이 받아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