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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3대 경영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저서 “왜 일하는가?”는, 부도 직전의 중소기업에 간신히 취업해 하루하루 패잔병처럼 살던 한 청년이, 세계 100대 기업 중 하나가 된 첨단 전자부품 제조회사를 세워 연매출 16조 원 조직의 총수가 되기까지 60여 년의 시간 동안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아온 일과 삶에 대한 절실한 고민과 태도를 엮은 책입니다. 이 청년이, 직장인들 사이에서, 일에 대한 관점을 뒤바꾸어놓은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입니다. 그는, 여기서, “다른 사람과 같은 길을 걷는다면 늘 같은 것만 볼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걸었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길은 편할지 모르지만,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그만인 길이다. 그런 길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낯설고 두렵지만,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꿈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길이다.”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늘을 보며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늘을 보고 자기 갈 길을 가야 할 성도들이, 땅을 보며 길을 가고 있다는 겁니다. 시인 용혜원 씨의 “내가 가야할 길”을 보면, “내가 가야할 길을 가려면 / 꿈과 비전이 /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 내가 가야할 길을 가려면 / 분명한 목적지까지 / 뒤돌아보며 멈추지 말고 가야 한다 / 언제나 앞으로 나가야 한다 / 내가 가야할 길을 가려면 / 우연을 바라지 않고 / 행운을 기다리지만 말아야 한다 / 언제나 기회를 찾아 나서야 한다 / 내가 가야할 길을 가려면 /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 주님의 뜻을 따라 동행해야 한다 / 언제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가야 하는 길에는, 이중택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간의 상황에 따라 내가 선택해서 가고자 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순간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선택하여 가고자 하는 길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의 시 “가지 않는 길”에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라고 합니다. 로버트는,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한 것이 자신의 인생을 달라지게 했노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내가 선택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길로 간다는 것은, 참으로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선택하기를 피하는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좁은 길을 걸으며,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 성도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그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헤롯 왕의 위협과 예루살렘에 대한 애통으로, 배경은, 예수님께서 헤롯의 영토를 여행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헤롯을 부추겨 사주함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협하여 헤롯의 영토에서 떠나도록 계략을 꾸몄습니다. 참으로, 바리새인의 무서운 음모가 숨어있는 상황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을 싫어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위해서는 헤롯의 편이 되어, 헤롯의 권세를 이용하였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게 되고, 이것을 예견하시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애통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예수님이 갈 길을 가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을 아무도 만류하거나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은, 성도된 우리를 위해 가시는 생명의 길이요, 우리와 동행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는 길에, 어떠한 방해와 상황이 있다하여도, 예수님이 우리 곁에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굳게 믿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끝까지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1 - 32절을 보시면,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가는 길에는 여우가 있습니다.
본문 31절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여기를 떠나소서”라고 합니다. 그것은,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헤롯은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통치하고 있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로, 그는 자신의 불법을 지적하던 세례 요한을 죽인 자입니다. 그러한 그가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려 계획하고 있으니, 그의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유대 지방으로 도망가라는 겁니다. 어찌보면, 예수님을 참으로 걱정하는 바리새인들의 따뜻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은,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가르치는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았고,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곳을 따라다니며 방해하고 시험한 것을 볼 때, 본문에서의 말이 진정, 예수님을 걱정하는 따뜻한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헤롯의 사주를 받거나 그와 합세하여 예수를 위협하여, 그 지역을 떠나도록 하기 위한 계략에서의 음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는 말은, 4복음서 중에서 본문에만 등장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 서기관 등 기득권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탐탁지 않게 여겼기에, 예수님이 자신들의 생활영역에서 떠나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했던 “여기를 떠나소서”라는 말은, 당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헤롯이 자신을 죽이려 하고, 떠나라고 해도, 오늘과 내일은 내가 갈 길을 가겠고, 삼일에는 부활하여 완전하여 지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본문 32절에서, 예수님은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합니다. 여우는 이스라엘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옵니다. 이러한 여우의 습성을 헤롯에 비유하여, 그의 협박과 속임수로 예수님을 관할지역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는,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지적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왜 헤롯을 향해, 이렇게 경멸적인 언어로 호칭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표현 그대로, 그의 인격 속에서 진실함과 정직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을 통해 예수님을 위협하여, 자신의 통치 구역에서 자연스럽게 떠나시게 함으로, 모든 문제를 유대 지역으로 떠넘기려는 술책까지 쓰고 있음을 간파하셨기에 여우라고 호칭하신 겁니다. 이어,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고 합니다. 오늘과 내일은 십자가를 지실 때까지 그동안 해 오셨던 것처럼,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사역을 계속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다 “제 삼일에는 완전해진다”는 말은, 제 삼일에 가서는 모든 일을 완성하신다는 겁니다. 무엇을 완성하신다는 겁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제삼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평소에 늘 해오시던 그대로 귀신을 내쫓고 각색 질병을 고치시는 봉사사역을 계속하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완성하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는 헤롯이라는 여우가 있었습니다. 그렇듯, 성도된 우리가 가는 길에도 여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우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여, 담대하게, 우리의 갈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3절을 보시면,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성도로서 가야할 길을 가는 성도에게는 결코 흔들림이 없습니다.
본문 33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본문 앞의 32절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는 말씀을 강조한 겁니다. 이러한 이 말씀에 대한 의미에 대해, 학자들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메시야로서의 길을 가심에 있어서, 흔들림 없이 가겠다는 예수님의 확고부동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4복음서 전체에서 나타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리스도로서의 사역 전체를 결정하는 확고한 원칙이었음을 분명하게 합니다. 마 4: 25을 보시면,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에는 언제든지 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 같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제각기 병 고침을 받으려고 온 환자들이거나 시험하고 책잡기 위해 온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과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온 사람들 등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의 요구와 시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심을 잃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의 방향을 올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본문의 시작을 보시면,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이는, 본문 앞의 32절 후반부에서 말하는 구속 사역의 완성에 앞서, 반드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 필연성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예수님의 길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예루살렘에서의 완성을 이루기까지, 예수님이 계속 수행해야 할 사역의 기간을 의미하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필연적으로 완수되어야 하기에, 헤롯이나 바리새인이나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해하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 역시, 유라굴로의 광풍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가운데서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았기에, 담대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조금의 어려움만 있어도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어쩔 줄 몰라하지 않습니까? 수 1: 9을 보시면,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사 43: 2을 보시면,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성도된 우리가 가는 길에는, 어려움과 위험과 방해가 많지만, 사도 바울과 같이,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굳게 믿으며, 그 어떤 상황과 위험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담대하게, 우리의 갈 길을 감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4 - 35절을 보시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본문 34절의 시작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비통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은 이미,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선지자들을 돌로 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 겁니다. 그들은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성부께서는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완고했습니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로 모음같이,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었지만, 그들은 완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까지도 거부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 49: 15을 보시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요 15: 13을 보시면,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듯 오래 참고,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시는데, 이 사랑을 거절하면 어떠한 결과가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베푸신 무한한 사랑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기 위해서는, 하늘을 보며 성도된 우리의 갈 길을 걸어야 합니다. 땅을 보며, 내 주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만을 바라보며 간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야하는 갈 길을 바르게 갈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본문 35절의 시작을 보시면,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거부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삶이 황폐해지는 겁니다. 성도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황폐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예수님은, 헤롯의 간교한 위협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메시아로서의 갈 길을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섭리와 계획이, 성도된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된 우리는 어렵고 힘든 세상 속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성도로서 우리가 가야 하는 갈 길을 중단하지 말고, 또, 두려워하여 흔들거리지 말고, 담대함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믿으며 나가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헤롯같은 여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날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라며, 하나님과 동행하심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