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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은...누가?...최초로...설계하고..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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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하였다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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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한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난중일기(亂中日記)』,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이분이 쓴 『행록(行錄)』 세 가지이다.
임진왜란이 발발되기 바로 전 해인 선조 24년(1591) 2월 13일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왜구의 내침을 미리 염려하여 본영을 비롯한 수군의 각 진(鎭)에 대한 전쟁 준비를 급속히 강화하는 한편, 특수전투함인 거북선의 건조를 착수하였다.
『난중일기』에는 임진년 2월 8일에 ‘이 날 거북선의 범포(帆布) 29필(匹)을 받아들였다’고 되어있고, 동 3월 27일에는 ‘거북선의 방포(放砲)를 시험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동 4월 11일에는 ‘비로소 돛을 만들다’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다 대포를 탑재하여 실전용으로 완성된 것은 왜란 직전인 4월 12일이었다. 그리고 실전에 투입된 것은 5월 29일 사천양 해전이 처음이었다.
충무공이 제2차 출동 후의 임진년 6월 14일에 올린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는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따로 거북선을 건조하였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입으로 대포를 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고 전선 수백 척 속에라도 뚫고 들어가 대포를 쏘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싸움에 돌격장으로 하여금 거북선을 타고 적선 속으로 뚫고 들어가 천, 지, 현, 황 각 종류의 포를 쏘게 했습니다’라고 적혀있다.
또 이순신 장군의 맏형 의신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종군한 이분(李芬)이 쓴 『행록』에는 ‘거북선을 창작하니 크기는 판옥선만한데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었다’라고 적었다. 이상이 거북선 건조에 관한 기록의 전부이다.
내용이 너무나 간략하고 단편적이어서 거북선 건조의 시말을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거북선은 왜구의 침해가 심했던 고려 말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하여 조선 초에 만들어져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의하여 다시 건조된 후 전투에 참전한 것이다. 즉 충무공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었으나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전래된 거북선의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전선을 개발하였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거북선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고려말의 평선과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은 구조 등이 다르므로 이순신의 거북선이 비록 전래된 아이디어를 채택했지만 독창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2003년 전남매일 신문에 연재된 함평문화원장 이현석 ,거북선 제작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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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10일부터 전남매일에서 거북선이 대굴포에서 제작되었다는 기획특집에서는, 거북선은 고려말부터 남해안과 영산강 일대에 창궐하던 왜구의 기습공격에 대비한 공수 전용 전함으로 대굴포에서 처음 제작되었으며, 태종 15년 병조의 좌대언으로 있던 나주 출신 탁신의 상소에 의해 성능이 강화되고 외형이 개조되었고, 나주 노안 출신 신숙주에 의해 중국, 일본, 유구국 선박의 장점을 살려 거북선을 재개량했으나 왜구의 소멸로 인해 그 효용이 떨어져 200여년 세월이 흐르다가 왜적의 침입을 예견한 곤재 정개청(주 : 1588년 곤재의 도이장욕설-島夷將慾說- 상소문을 말한 것 같음)과 그의 문도인 송제민, 오익창(吳益昌), 나덕신(羅德愼), 나덕명(羅德明) 등 양명학자와 나대용(羅大用), 박만천(朴萬天), 나치용(羅致用), 이설(李渫) 등 영산강 인근 출신 무관들에 의해 영산강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대곡)에서 다시 건조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 송제민의 해광집,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과 번암집,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 임환의 습정유고(習靜遺稿), 임전(任錪)의 명고집(鳴皐集), 나대용, 박만천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하였고, 대굴포는 고려말 나주시 문평 출신 정지(鄭地)와 전북 부안 위도 출신 이희가 왜구 방어책 10조를 통해 전함 제작의 최적지로 지목하였으며, 바다에 인접한 선소보다 내륙에 있는 대굴포의 선소가 왜적의 급습을 방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고, 고려말에 제작된 구선(龜船. 거북선)이 200년이 지난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오익창,나대용, 송제민 등에 의해 재 건조될 수 있었던 것은 전함 제작과 해전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정지의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던 광산탁씨, 홍주송씨, 예안이씨, 광산김씨, 나주나씨, 금성나씨, 담양김씨, 무안박씨, 함평이씨, 함양오씨, 양성이씨, 고령신씨 등을 통해 거북선 설계도 또는 제작 기술이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고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도수군절제사(정 3품)에 임명되었고, 난중일기에 1592년 2월 8일 거북선에 사용할 돛베 29필을 조달 받았다고 했으며, 동년 3월 27일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실험을 했다고 하였다. 부임 1년만의 단 시일에 거북선이 제작되었다는 것은 믿기가 어려우며, 따라서 1591년 이전에 연구 또는 제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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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 29척을 이순신장군에게 헌납하고 거북선 창제에 참여한
해광 송제민 일생. 기록자 송병완.
해광 송제민의 생애와 업적
일찍이 해광 송제민은 양명학에 심취하였고, 빈민구휼과 애민사상 고취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영광 앞바다에 제방을 쌓아 해일의 피해를 막는 공사였다. 당시 해일로 인해 영광군 일대의 농토가 큰 피해를 입었는데 해광 송제민이 함평, 무안현 일대의 소나무를 베어 제방공사를 총감독한 것이다.
「미암일기」등 당시의 기록은 해광의 행동이 그르다는 평을 하고 있으나 조선 사대부 가문의 덕망 있는 유학자로서 경전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고 實事求是를 행하고자 했던 해광 송제민의 경세사상은 오늘날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43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광 송제민은 금성의 선비인 양산룡, 양산숙 등과 함께 창의사 김천일 장군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또한 前 都事 趙憲을 추대하여 左義兵將을 삼고 前 察訪 朴春茂13)를 추대하여 右義兵將으로 삼아 스스로 종사관이 되어 召募湖南義兵文을 돌려 의병을 쉽게 모집하여 경기일대와 서울 왜적 축출과 충주와 금산 전투를 통해 국난극복의 발판을 마련했다14)
일찍이 곤재 정개청은 해광에게 상선을 이순신에게 주어라하여 대 선주인 해광은 29척을 이순신 장군에게 주어 이를 병선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며, 일찍이 상선을 전함으로 개장하여 강화도 연해와 양해도 해전을 이끌었고, 전란 이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의료 기관인 醫局을 개설하여 백성을 구휼하는데 대선주인 해광의 협조가 아니면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대굴포 전라도 수영고찰」(함평문화원, 2003)에서 아주 상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다. 이를 조금 인용해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곤재 정개청 문하생으로 대학자이며 무역 선단의 대 선주였던, 해광 송제민이 대굴포 서쪽 1㎞ 지점인 사포의 언덕에 백일홍 당을 짓고 우거하였으며, 그의 아들 송타가 대곡마을 앞 창동 득량 골 벼랑에 층층이 쌓은 바위돌이 있는데 이 바위 돌을 해전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적의 배를 격침시키기 위해 송타가 주도하여 쌓았으므로 사람들이‘송 장군 바위’라 불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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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창제 에 대한 나대용 장군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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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의 거북선 개발과 맞물려 항상 언급되는 인물이 군관 나대용(羅大用)이란 인물이다. 사극 등 2차 창작물에서는 주로 공학자같은 이미지로 등장하지만 실제론 선박건조만 전문으로 맡았던 기술자가 아니라 이순신장군과 각종 전투에 참전했던 장수였다.
그의 군생활은 1583년 훈련원 별시에 급제하면서 시작됐는데 1576년 무과에 급제한 이순신장군이 7년 선배다. 이후 훈련원 봉사 등 벼슬을 지내다가 1591년,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로 발령받았을 때 전라좌수영 군관으로 발령받아 내려갔다. 이순신장군과 상관으로 만난 것은 전쟁 1년 전의 일인 셈이다.
사실 그가 거북선 개발에 얼마나 참여하고 어느정도 비중을 차지했었는지 남은 기록은 없는 상황이다. 다만 나대용이 임진왜란 이후 창선과 해추선등 다양한 개량형 선박을 개발했던 것에 근거해 거북선 개발에도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그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군공은 그다지 잘 알려져있지 않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이순신장군과 여러 전투에 참전했으며 옥포해전과 사천해전에서는 척후병 역할의 유군을 이끄는 유군장(遊軍將)으로 활약했다.
사천해전에서는 왜군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했으며 그 뒤로도 당항포해전, 한산도해전, 명량해전, 노량해전 등 주요 굵직한 해전에는 참전해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있다. 최전선에서 맹장으로 크게 활약한 셈이다.
전후에는 본격적으로 전선개발에 나섰다. 임진왜란으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며 함대 승조원인 격군(格軍)을 구하기가 힘들자 나대용은 많은 인원이 필요한 거북선, 판옥선보다 적은 인원으로 운항할 수 있는 선박인 창선을 개발했다.
당시 판옥선과 거북선은 최소 125명 정도의 인원이 필요한 상당한 규모의 전함이었기 때문에 격군을 구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는 많이 운용할 수가 없었다. 이에비해 창선은 42명의 격군만으로도 운항할 수 있었다. 이외에 쾌속선인 해추선도 개발해 조정에서도 시험적으로 건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전쟁터가 아닌 행정직 공무원으로서의 근무태도는 별로 좋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의 감사원 격인 사헌부에서 감찰업무를 맡았던 윤형(尹泂)의 기록에 의하면 나대용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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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공 오익창 의 거북선 창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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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공 오익창 문집 사호집에 오익창이 거북선을 제작하고 창조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이 400여년이 지난 현대에 와서 거북선의 창조의 역사가 잘못 알려지고있다.
대표적인 기록이 함평문화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전남 사료조사위원회 이현석 회장(2007년 71세)의 조사기록 함평 대굴포 사포나루 거북선 창제기록을 오익창 사호집 거북선 창제기록과 연관관계을 조사해보니 거북선 창제의 역사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있기전 몇년전부터 조선 에서는 왜군의 침입이 있을것이라는 소문과 불안이 있었고 선조임금도 알고있었다.
이때에 전라도의 곤재 정개청(1529-1590) 이라는학자가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전라도의 젊은인재 들을모아서 강학 하던중에 젊은인재들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서 안내역을 하였는데
이중에 해광 송제민(1549-1602)이 무역을 크게하고 많은 배을소유하고 영산강 함평지역 대굴포항 사포나루지역에 배을만드는 조선소(선박제조소)을 가지고 있었던것같다.
증거로써는 기록에 곤재 정개청 의 요청으로 해광 송제민이 무역선 29척을 이순신 장군에게 기증하여 전함으로 개조하여 사용토록하였다.
이런상황에서 젊은나이의 오익창(1557-1635)이 계산이 빠르고 창조력이있고 천재적인 개발력이 있었던
소질이 곤재 정개청 선생과 선박왕 해광 송제민 에게 발견되어서 해광 송제민 의 대굴포항 사포나루에 있는선박 제조소에 발탁되어 임진왜란에 대비한 거북선 제조 창제의 고문역 설계자 협조자로 참여하여
일하였던것같다. (사포나루가 영산강,사호강에 있는데 오익창 사호공과 한문이 일치한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된후에 전쟁에 대비하여 급하게 함대을 만드는 과정에서 선박왕 해광 송제민이 무역선 29척을 헌납하여 해군함정으로 개조하였고 이때에 거북선의 돌격함의 가치을 인정한 이순신장군이 거북선 제작 완성을 명하여 1년후에 완성된 거북선에서 함포사격을 하였다.
해광 송제민이 무역선 29척을 이순신장군에게 헌납 했을때에 거북선 창작의 기술과 미완성의 거북선이함께 이순신장군에게 인도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여지고 거북선 연구설계자 사호공 오익창도 같이 참여한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을 판옥선크기의 실용성 있게 처음 창조하는데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하다.
1) 기술자 의 성실성 성격 능력 창조력 계산력(설계필요)
기술에대한 천재적 재능이 있어야 한다.
2) 판옥선크기의 거북선을 실용성 있게 제조할려면 넓고 큰 선박제조소 배만드는인력
경력있는 기술자, 장치시설 숙식장소 가 있어야 한다.
3) 위와같은 조직과 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큰 경제력이 뒷바침 되어야한다.
그리고 사업의목표가 확실해야한다.
4) 판옥선 크기의 실용성 있는 거북선을 처음 개발하고 완성할때까지는
많은 실험이 있어야하고 해군의 도움, 지휘관의 허락이 있어야
완성된 거북선에서 함포사격시험을 할수있다.
사호공 오익창이 거북선을 최초로 창제 하였다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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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공 오익창이 거북선을 최초로 창작하였다는 기록이
1600년--1790년대에 다음과 같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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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신선부 기록 ( 1667-1744 )
始創龜舡, 시창구선 . (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不煩子房之前籌, 默運心算, 無用軒后之舊制, 始創龜舡, 給餽多年, 旣致華人之加敬.
장자방(張子房, 유방의 책사 장량)같이 셈대를 앞세우는 번거로움도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였고,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옛 제도232)도 필요없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여러 해 동안 군량을 배급함이 정확하여 명나라 군이 더욱 공경하였네.
2 ) 홍중현 기록 ( 1660-1726)
通訓大夫前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洪重鉉撰.
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 거북선을 창조할때 공의 지휘가 많았다. )
仍卽發文, 通告諸舡, 諸舡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陳於戰舡之後, 以助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畫,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 居多焉.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바가 많았다.
3 ) 서명응 기록 (1716 숙종42-1787 정조11)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徐命膺撰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
丁酉統制使李舜臣 率舟師 禦倭奴於閑山島 當元均敗衂之餘 收合煨燼戰艦僅十有二 而嶺湖士大夫浮海逃亂者千餘艘 欲散而之諸島 公奮曰賊兵衆 統制之兵寡 其敗可立而待也 統制敗則我之藩籬撤矣 雖欲各保孤島 得乎 毋寧幷力合勢 爲統制聲援 有可以苟全之路 藉令俱死 亦有爲國效忠之名也 衆曰善 遂爲文布告諸舡 於是千艘揚帆 俱列統制舡後 聯成水寨 陣勢甚壯 公乘輕舠 往來統制船 與籌畵軍事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方秋風高 海氣凛凛 徹人肌骨 統制軍皆被褐呼寒 糧且盡 公以忠義激諸船人 各出襦衣米斛 滿載一船 躬卛至統制軍 軍皆感悅
정유년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한산도에서 왜놈들을 방어하는데, 원균(元均)이 패배한 직후라서 불에 타버린 전함들을 거두어 모으니 겨우 12척만이 있었다. 영호남(嶺湖南)의 사대부들 중에 바다를 항해하여 난리를 피하는 자 천여 척이 흩어져서 여러 섬으로 가려고 하자, 공이 분발하여 말했다.
적병이 많고 통제사의 병사는 적어 금방 패배하고 말 것이다. 통제사가 패하게 되면 우리의 울타리가 철거될 것이니, 비록 외딴 섬에서 저마다 보전하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힘을 모아 합세하여 통제사를 위해 성원(聲援)한다면, 온전히 살 길이 있을 것이니, 가령 모두 죽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 충성을 다했다는 명분은 있게 될 것이오.”
모두가 좋다고 응하였다. 마침내 글을 지어 여러 선박에 포고하자, 이에 천여 척의 배들이 출항하여 모두 통제사의 배 뒤에 늘어서서 물위의 성곽 모양을 연이어 이루니 진영의 형세가 매우 웅장했다. 공이 날렵한 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군사의 일들을 계획하니,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가을에 바람도 거세지고 바다의 기운이 쌀쌀하여 사람의 살갗과 뼈에 스미는데, 통제사의 군사들은 모두 갈옷을 입고 추위를 호소하고 양식도 다 떨어지자, 공이 충성과 의리로 여러 배에 탄 사람들을 격려하고, 각기 저고리와 쌀가마를 내어서 한 배에 가득히 싣고서 직접 거느리고 통제사의 군대에 이르니 군사들이 모두 감복하고 기뻐하였다.
본 전(傳)은 서명응의 문집 보만재집(保晩齋集) 권9 잡저(雜著)에도 있는데 여기에는 오익창전(吳益昌傳)으로 되어 있다.
서명응(徐命膺) : 1716(숙종42)~1787(정조11), 호는 보만재(保晩齋)[정조 하사], 증광문과에 병과 급제. 이조판서를 거친 뒤,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행하여 다녀옴. 대제학을 거쳐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그는 박학강기(博學强記)하여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 빈객(賓客)으로서 학문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규장각 제학(提學)에 첫번째로 임명되었고 규장각 운영에 큰 공헌함. 북학파의 비조로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추구하였고, 가학의 전통이 아들 서호수(徐浩修), 손자 서유구(徐有榘)에로 이어짐. 그의 저서 《보만재총서》와 《고사신서》는 이용후생의 학문정신을 반영한 대표작이다
4 ) 이화진 기록 ( 1626 - 1696 )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李華鎭撰.
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 거북선을 창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것이 많았다.)
仍卽發文通告諸船, 諸船中士夫, 皆仁道之人, 素所敬服者也. 齊聲相應, 無有異議者, 一時避亂諸舡, 布陣於戰艦之後, 以助其聲勢. 公時乘片舸, 往來於統制舡, 講論籌畵, 多有裨益. 而至於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이어서 곧바로 여러 배에 글을 보내어 두루 알리니, 여러 배안의 사대부들이 모두 같은 도의 사람으로서 평소 공을 공경하고 감복하던 사람들이었다. 일제히 한 목소리로 서로 응하고 이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서 일시에 피난 가던 여러 배들이 전함의 뒤에 포진하고는 소리를 질러 응원하였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배를 왕래하며 계책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전쟁에 보탬이 되었다. 거북선을 건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것이 많았다.
5 ) 정유주. 주세기. 기록. ( 계사년 정월. 癸巳年正月. 幼學 )
至若龜舡, 創制指揮. ( 거북선 창제 을 지휘 하였다.)
在此統制之勝敗. 各使資粮弓矢, 排列於戰舡之後, 以助其舟師之聲勢, 則賊無輕視於統制之兵, 而統制之兵, 亦不孤矣. 假令統制不利, 則諸島避亂, 獨免魚肉乎? 生而苟活, 反不如死
云爾. 則諸船士夫, 一時相應, 避亂舡千餘艘, 果爲聲援. 公時乘片舸 往來統制之營中, 征謨師畫, 日夜講論, 至若龜舡, 創制指揮.
만약 통제사의 군대가 불리하다면 여러 섬으로 피난한들 홀로 어육이 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서 구차히 사는 것은 도리어 죽는 것만 못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여러 선박에 사족들이 일시에 상응하여 피란선 천여 척이 과감히 성원하였습니다.
공은 이때 조각배를 타고 통제사의 군영을 왕래하며 전쟁하고 군대를 부릴 계책을 밤낮으로 논하였고, 거북선에 있어서도 만드는 과정을 지휘하였습니다.
6 ) 호남절의록에 거북선 제작에 참획 한것으로 기록.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공이 거북선 제작에 참획(參劃)한 것으로 나오며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녹권이 소장되어 있다. 병조참판 이태화(李泰和) 서(序) 문집이 전하고 죽산사(竹山祠)에 향사한다.
7 ) 함양오씨족보 최초족보 무술보 (1778 년) 에 거북선 창제 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
거북선을 창제할때에도 공 (사호공 오익창)의 지휘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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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공 오익창이 거북선을 창제하여 만들었다는 윗글의 인물들에 대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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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신선부(申善溥)
1667년(현종 8)∼1744년(영조 20). 본관은 고령(高靈)천여(天如)
우참찬 신공제(申公濟)의 후손으로, 부친은 행통례원인의(行通禮院引儀) 신호(申滈)이다. 당시(唐詩)와 진(晉) 나라 시대 필법에 능하고 그림도 신묘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국초 이래 삼백년 동안에 나오기 드문 인재였으나, 20세 이후에는 붓을 잡지 않아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또한 손(孫)‧오(吳)의 책 병법서를 좋아하여 공수영진(攻守營陣)‧기정합산(奇正合散)‧천시음양(天時陰陽)의 법에 대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든 기형의품(璣衡儀品), 보시종(報時鐘), 전진(戰陣) 기계, 배, 수레 등과 그 외에 이용하는 도구를 모두 옛 법제를 이해하였고 때로는 새로운 뜻을 찾아내어 완성한 것이 많았다. 그것들을 모두 시험해 보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서른 살이던 1696년(숙종 22)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49위로 합격하였으나 마흔이 되면서는 과거시험 보는 것을 그만두고 순창(淳昌)으로 낙향하여 귀래정(歸來亭) 남쪽에 띠풀로 집을 짓고, 소요하다가 향년 78세로 일생을 마쳤다. 아들로는 신뢰(申洡), 신만(申澫),신현(申灦)을 두었는데, 맏아들 신뢰는 종가(宗家)의 신선영(申善泳)에게 양자로 가서 신경준(申景濬)신경준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여암유고(旅菴遺稿)』에 실려 있다.
1 ) 천여 신선부 거북선 창제 기록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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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부는 사호 오익창 사후 30여년후에 1667년(현종 8)∼1744년(영조 20) 태어난 사람으로 천재적인 기술자로써 많은기계 와 배 들을 창안하고 만든사람으로 사호오익창 의 인물과 공적을 상세히 알고있던분으로
사호 오익창 사당의 상량문을 쓰면서 사호 오익창이 거북선을 설계하고 처음으로 만들었다고분명하게 기록한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신선부는 많은기계와 배, 을 창작한 사람으로 거북선창작의 기술부분 설계부분을 이해하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창제의 가치을 기술적으로 이해하고 공적을 인정할수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춘분으로 볼수있다.
더욱이 천여 신선부 는 기계을 창작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고 계산과 설계에 천재적소질이 있는점 천재성 성격 소질이 사호 오익창과 비슷한점이 있기에 사호 오익창의 거북선창조의 공적의 가치을 누구보다도 잘이해하고 진실되게 이해할수있는 사람으로 거북선 창제의 역사을 기록하여 역사에 남겨지기을 바랬던것으로 보여진다.
더하여 손자병법 오자서병법 등에 능통하였다고 하니 80여년전에 있었던 국난 수난의 임진왜란을 격은 신선부는 임진왜란 전쟁의 상세한상황과 이순신장군 바다의전쟁에 대하여서도 상세하게 연구하고 자료도모았을것이다. 여기에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의 역활도 해전의병법으로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이해하였을것이다.
그리고 명량해전에 대하여서도 상세히 알고 사호공오익창의 역활과 공적과 공과을 이해하고 잘알았을것이다.
병법에 능통한 천여 신선부의 사호공 오익창의 거북선창작설 기록은
1690년대가 임진왜란 이후 90여년정도여서 상당히 많은 정보와 기록이 있었기에 이기록들을 종합하여 사호공오익창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창제하였다라고 믿고 사호공오익창 사당 상량문에 기록을 남긴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호공오익창 선생의 거북선 창작 기록을 남긴 6분들의 사회적 신분들이 다채로운것을 보면
위로는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좌승지. 홍문관교리. 기술자. 사림의 유생들 까지 1630년대-1790년대에 많은 분들이 거북선 창작을 기록으로 남긴것을 종합해볼때에 조선왕조시대 사대부 유림 유생들이 지식과 정보을 널리 공유하였던 시대 였기에 1630년대 에서 1790년 까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창작은 많은계층의 사람들이 사호공 오익창이 거북선을 최초로 설계하고 창조하고 만드는데 제일 공로자 라고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 서명응 기록 (1716 숙종42-1787 정조11)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 世孫左賓客 徐命膺撰
統制倚以爲重 其創造龜船 多訪於公 (통제사가 의지하여 소중하게 여기고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공에게 자주 찾아 왔다.)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서명응 기록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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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응의 문집 보만제집에 사호공 오익창이 거북선을 창조하는데 통제사 이순신장군이 자주찾아왔다.
이글을 해석해보면, 이순신장군이 수군통제사로 임명된후에 1년만에 거북선이 완성되어 함포사격을 하였다.는기록에 비교하여 볼때에 사호공 오익창 은 이순신장군이 수군통제사 임명 초기부터 계속하여 거북선창작 제작에 관여하였다라고 보여진다. 더하여 사호공 오익창의 비석문에 기록된 글에 사호공 오익창은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모집하여 충무공 이순신장군을 도와서 누차 승전하였다. 는 기록을 보면,
통제사 이순신장군과는 의병을 모집하여 도움을주면서 거북선창작에도 참여하여 도움을 주면서 임진왜란에서 정유왜란까지 명량해전에서 피난선 일천척을 모아서 이순신장군을 지원하였으니.
사호공 오익창의 통제사 이순신장군에 대한 믿음과 존경은 대단하였던것같다. 전라도의 모든 백성들이
통제사 이순신장군을 믿고 의지하였는데, 사호공 오익창도 조선의 희망, 통제사을 위하여 모든것을 바쳐서 헌신하였던것같다. 명량해전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장군이 전쟁물자가 없어서 어려울때. 물(동아), 옷,식량, 배, 일천척 피난선동원, 응원,전략,등 모든것을 지원하였다.
4 ) 이화진 기록 ( 1626 - 1696 )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李華鎭撰.
龜舡創造之時, 公之指揮居多. ( 거북선을 창조할 때에도 공이 지휘한 것이 많았다.)
이화진 기록에 대한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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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승지 이공 행장〔右副承旨李公行狀〕
공의 휘는 화진(華鎭)이고 자는 자서(子西)이며 재호(齋號)는 묵졸(默拙)이다. 비(妣)는 함양 오씨(咸陽吳氏)로 정랑 오익창(吳益昌)의 따님이다.
공은 우리 순효대왕(純孝大王) 4년 병인년(1626, 인조4) 1월 13일에 무장현(茂長縣) 욕곡(浴谷)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하고 빼어났는데 몸이 약해서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6세에 오 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례(喪禮)를 행하기를 거의 어른처럼 하였다. 마침내 외왕부 오공에게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오공은 선비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훈육하여 깨우쳐 주니 공의 학업이 크게 진보하였다. 총명함이 월등하여 한 번 보면 다시는 잊지 않았다.
사호공 오익창 과 승정원 좌승지 이화진 과는 사위이고 어린시절 스승이였고 사호공 오익창이 1635년에 졸하였으니 이화진이
9세에 졸하신것이다. 고창군과 무장현에서 살았으니 같은고향에서 살아서 사호공 오익창의 일생과 행적, 공적을 상세하게 알고있었기에 이화진이 기록한 오익창 가장에 17페이지 전부에 상세하게 일생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명량해전의 참전공적과 거북선 창제의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5 ) 정유주. 주세기. 기록 ( 계사년 정월. 癸巳年正月. 幼學 )
至若龜舡, 創制指揮. ( 거북선 창제 을 지휘 하였다.)
1630 년대 에서 1800년대 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향교와 유림의 유생들에게 일반적으로 전하여오는 기록으로
임진왜란때에 이순신장군의 승전에 공헌한 거북선의 창조가 사호공 오익창의 거북선 창제에 있었다는것을
전라도의 향교와 유림 유생들에게 일반적으로 잘알려져 있었다고 보여진다.
6 ) 호남절의록에 거북선 제작에 참획 한것으로 기록.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공이 거북선 제작에 참획(參劃)한 것으로 나오며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 녹권이 소장되어 있다. 병조참판 이태화(李泰和) 서(序) 문집이 전하고 죽산사(竹山祠)에 향사한다.
7 ) 함양오씨족보 최초족보 무술보 (1778 년) 에 거북선 창제 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
거북선을 창제할때에도 공 (사호공 오익창)의 지휘가 많았다
위와같이 임진왜란 이후 약 30년후에서 200여년후에 까지 (1630년대에서 1800년대)
많은 유명한고문서에 사호공 오익창이 거북선을 창제하여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전쟁을 도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 년전의 유명한 고문헌에 거북선 창제에 대한 기록이 사호공 오익창을 제외하고는 구체적으로 기록된 인물은 지금까지는 없는것으로 알려져있다.
( 사호공 오익창은 보만제집. 사호집. 함양오씨족보. 호남절의록 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위와같은 모든결론을 종합하여 볼때에 임진왜란 때 거북선의 활약과 공적은 충무공 이순신장군 전술과 전략에 유용하게 사용되어 이순신장군의 승전에 크게 도움을주었고 빛나는 세계의 해전역사에 거북선의 가치을 인정받게 되었다. 세계의 여러나라 해군박물관에 거북선은 조선의 발명품으로 명장 이순신 장군과함께 전시되어있고, 세계 여러나라의 해군사관학교에서는 교육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에서는 거북선 창제의 역사가 잘못 전해지고 있다. 한국의 이순신장군 역사학자도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명성이 너무도 크게 확대되어 거북선 창제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것같다. 그동안 거북선 창제에 대하여 알려지지 않았던 사호공 오익창의 거북선창제에 대한 기록이 한국의 역사학자들에게 연구의 소재가 되길 기대하며 거북선창제는 이순신장군이 만들었다. 는 단순한 논리로 보지않고, 이제는 거북선 창제에 대한 바른 역사을 찾아서 거북선 창제의 진실을 찾아야하고 거북선창작에 일생을바치고 헌신한 분들의 명예와 고생도 찾아서 알려야 하는것이 역사학자들의 참된길. 이라 본다.
2019 년 10월 29일 서울에서
시암 오 태 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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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굴포..사호강, 사호진,사포나루,에서..사호공,오익창,이. 거북선을 최초로만들어서..사호공,이라..호,을지었다. ................................................................................................................................................................................................................................... 사포나루 함평천이 영산강 본류로 유입하는 곳에 있던 나루로 주변에 넓은 백사장이 발달되어 있고, 하폭이 넓어 호수와 같다하여 '사호진(沙湖津)', 무안에 이르는 강을 '사호강(沙湖江)' 이라고 칭했다. '사호진(沙湖津)'가 '사포나루(沙浦津)'로 바꿔졌지 않았을까? 사호강..사호진..사포나루..대굴포에서..사호공,오익창이,거북선을,최초로,만들었다. 사호(沙湖) 오공(吳公)은 휘가 익창(益昌)이고, 자(字)는 유원(裕遠)이며, 본은 함양(咸陽)이니... ................................................................................................................................................................................................ 신선부 기록 ( 1667-1744 ) 不煩子房之前籌, 默運心算, 無用軒后之舊制, 始創龜舡, 給餽多年, 旣致華人之加敬. 장자방(張子房, 유방의 책사 장량)같이 셈대를 앞세우는 번거로움도 없이 머릿속으로 계산하였고, 황제 헌원(黃帝軒轅)의 옛 제도232)도 필요없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만들었으며, 여러 해 동안 군량을 배급함이 정확하여 명나라 군이 더욱 공경하였네. 신선부(申善溥) 신선부. 인물. 1667년(현종 8)∼1744년(영조 20). 본관은 고령(高靈)천여(天如) 우참찬 신공제(申公濟)의 후손으로, 부친은 행 통례원인의(行通禮院引儀) 신호(申滈)이다. 당시(唐詩)와 진(晉) 나라 시대 필법에 능하고 그림도 신묘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국초 이래 삼백년 동안에 나오기 드문 인재였으나, 20세 이후에는 붓을 잡지 않아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또한 손(孫)‧오(吳)의 책 병법서를 좋아하여 공수영진(攻守營陣)‧기정합산(奇正合散)‧천시음양(天時陰陽)의 법에 대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신선부(申善溥) 1667년(현종 8)∼1744년(영조 20). 본관은 고령(高靈)천여(天如) 우참찬 신공제(申公濟)의 후손으로, 부친은 행통례원인의(行通禮院引儀) 신호(申滈)이다. 당시(唐詩)와 진(晉) 나라 시대 필법에 능하고 그림도 신묘하여, 세상에서는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국초 이래 삼백년 동안에 나오기 드문 인재였으나, 20세 이후에는 붓을 잡지 않아 전해지는 작품은 없다. 또한 손(孫)‧오(吳)의 책 병법서를 좋아하여 공수영진(攻守營陣)‧기정합산(奇正合散)‧천시음양(天時陰陽)의 법에 대하여 두루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모든 기형의품(璣衡儀品), 보시종(報時鐘), 전진(戰陣) 기계, 배, 수레 등과 그 외에 이용하는 도구를 모두 옛 법제를 이해하였고 때로는 새로운 뜻을 찾아내어 완성한 것이 많았다. 그것들을 모두 시험해 보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서른 살이던 1696년(숙종 22)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49위로 합격하였으나 마흔이 되면서는 과거시험 보는 것을 그만두고 순창(淳昌)으로 낙향하여 귀래정(歸來亭) 남쪽에 띠풀로 집을 짓고, 소요하다가 향년 78세로 일생을 마쳤다. 아들로는 신뢰(申洡), 신만(申澫),신현(申灦)을 두었는데, 맏아들 신뢰는 종가(宗家)의 신선영(申善泳)에게 양자로 가서 신경준(申景濬)신경준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여암유고(旅菴遺稿)』에 실려 있다. 천여.신선부 거북선 창제 기록. 신선부,는 사호 오익창 사후, 30여년후에 태어난 사람으로 천재적인 기술자로써 많은기계 와 배 들을 창안하고. 만든사람으로 사호오익창 의 인물과 공적을 상세히 알고있던분으로 사호 오익창 사당의 상량문을 쓰면서 사호 오익창이 거북선을 설계하고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분명하게 기록한 사람이다. 중요한 점은 신선부는 많은기계을 창작한 사람으로 거북선창작의 기술부분 설계부분을 .이해하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창제의 가치을 기술적으로 이해하고 공적을 인정할수있는 능력을 충분히 갖춘분으로 볼수있다. 더욱이 천여,신선부 는 기계을 창작하는데 천재적인 소질이 있었고 계산과 설계에 천재적소질이 있는점 천재성 성격 소질이 사호 오익창과 비슷한점이 있기에 사호 오익창의 거북선창조의 공적의 가치을 누구보다도 잘이해하고 진실되게 이해할수있는 사람으로 거북선..창제의 역사을 기록하여 역사에 남겨지기을 바랬던것으로 보여진다. 더하여 손자병법 오자서병법 등에 능통하였다고 하니 80여년전에 있었던 국난 수난의 임진왜란을 격은 신선부는 임진왜란 전쟁의 상세한상황 이순신장군 바다의전쟁에 대하여서도 상세하게 연구하고 자료도모았을것이다. 여기에 이순신장군의 거북선의 역활도 해전의병법으로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이해하였을것이다. 그리고 명량해전에 대하여서도 상세히 알고 사호 오익창의 역활과 공적과 공과을 이해하고 잘알았을것이다. 병법에 능통한 천여,신선부의 사호 오익창의 거북선창작설 기록은 1680년대에 임진왜란 이후 80여년정도여서 상당히 많은 정보 기록이 있었기에 이기록들을 종합하여 사호 오익창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창제하였다라고 확실하게 말하고 사호 오익창 사당 상량문에 기록을 남긴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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