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
신앙은 인생의 가장 뚜렷한 분기점이 됩니다.
신앙이야 말로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나를 추구하는 패러다임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패러다임으로 바꿔 놓기 때문이죠. 그보다 더 큰 변화는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변화를 경험하죠. 이 세상은 끝없이 변화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변화는 우리 인간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변화의 목적은 나를 더 추구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패션이건 예술이건 학문이건 지식이건 우리는 나를 추구하는 데 이 모든 것을 사용할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 바른 신앙은 인간을 뿌리째 변화시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불가피하고 불가역적인 변화입니다. 내가 진정 누구인지를 아는 이 변화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잘 사는 법을 알게 됩니다. 정말로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이 변회를 경험하기 전까지 모든 인간이 생각하는 잘 사는 길은 남보다 잘사는 것입니다. 의식주를 비롯한 물질적인 부와 번영의 축복을 기준으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수준,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니 언제나 조금 더 소유하는 데 관심이 많고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을 보면 그 순간 나의 만족과 기쁨도 사라지고 맙니다.
나 자신이 통째로 변하는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 바른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목적이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진 것과 내 손에 쥐어진 것을 비교해서 만족감을 추구하는 모습이 사라집니다. 절대적 기준 앞에 서게 되면 상대적 기준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인간과 인간의 비교는 덧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기준에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입니까?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잘 사는 것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첫 설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과거엔 사람들이 만나면 “식사하셨습니까?"가 인사였지만 지금은 “요즘 바쁘시지요?"가 인사가 되었습니다. 목적지도 모른 채 무조건 빨리 가니까, 무조건 잘살기만 바라니까 너도나도 바빠졌습니다. 더 많이 바쁠수록 중요한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비록 속도가 느릴지라도 목적지를 향해 바로 가는 것이 제대로 가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는 '무조건 잘되게'가 아니라 '바르게 되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의 남들 보란 듯이 하는 기도도 이방인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바르게'와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대표적인 종교 행위인 기도에 대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잘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바르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 그리고 나 자신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기도를 배우지 않으면 기도하면서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기도에 위선이 끼이면 사람이 점점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 안 하는 사람보다 더 악할 수가 있고 더 못날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___마 6:9
기도는 어떻게 시작합니까?
기도는 내가 기도하는 대상이 누군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모르던 과거엔 천지신명에게 기도했습니다. 천지신명은 누구입니까? 대상이 불분명합니다. 나무나 돌이나 쇳조각으로 만든 우상에게 하는 기도는 그 대상이 제대로 듣는지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오래 하고 많이 하고 반복해서 주문을 외웁니다. 흔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신념으로 하는 겁니다. 기도의 양과 응답의 수준이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동기가 잘못되면 정성을 더할수록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아버지'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정확한 표현은 '아빠'입니다. 아람어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성 '아바'를 '파테르'라고 해석해서 오늘날 '파더' 즉 아버지'로 해석한 것인데 정확한 표현은 '아빠'입니다. 예수님은 '아빠'를 먼저 부르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이 아빠라는 호칭이야말로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독특한 표현이며, 이것이 예수님 전과 후를 나누는 분기점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시므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___롬 8:15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고, 두려워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이 아빠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관계 맺기
사도 바울은 '아빠 아버지'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똑같이 반복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___갈 4:6
바울은 아빠 곧 아버지, 원어로 '아바 호 파테르'라는 표현을 통해 신앙의 출발, 기도의 뿌리가 아빠와 아들 간의 관계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빠와 아들은 어떤 관계입니까? 이 관계는 처음부터 거래 관계가 아닙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아빠와 아빠를 신뢰하는 아들 사이에서는 거래하지 않습니다. 아빠는 아들의 능력 때문에 아들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은 아빠가 내게 먹을 것을 주는 동안만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고받는 관계가 출발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아빠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아들을 사랑합니다. 아들은 이 사랑 안에서 아빠를 아빠로 인식합니다. 아빠가 점점 내게 해주는 것이 없어질 때쯤이면 오히려 아빠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아빠를 오히려 더 사랑하게 됩니다. 이게 부자관계입니다. 기도는 이런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건강한 부자관계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이라서 더 잘해 주고 사람들이 없다고 해서 냉담하게 굴지 않습니다. 누가 있건 없건 아들은 아빠에게 늘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갑자기 사람들 앞이라고 어른처럼 군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아들은 또 아빠에게 같은 말을 계속해서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어제고 오늘이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한다면 아빠는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겠습니까? 왜 똑같은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아빠는 아들을 잘 알고 아들은 아빠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잘 안다는 이 친밀감이야말로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모르는데 무슨 말을 합니까? 잘 모르는데 무슨 부탁을 합니까? 부탁한들 무슨 소용입니까? 낯선 사람에게 부탁하면 그 사람이 내게 되묻지 않습니까? “실례지만 누구시지요?" "나를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은 더없는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이 친밀감을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친밀감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 아빠는 더없이 친밀하지만 경외의 대상입니다.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눈앞에서 형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아니라면 상의하고 의논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초월적인 분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아빠지만 기도로 나아갑니다. 그분이 초월적인 분이기에 그 어떤 것도 기도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며 오직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미리 다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역설적인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뭘 원하는지도 아시고 내가 뭘 구할지 말하기도 전에 다 아신다면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며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란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말씀을 듣고 말씀에 따라 기도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무엇이 성숙인가_조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