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양준 목사
얼마 전에 학원폭력 때문에 메스컴이 떠들썩하고 또 일본의 이지매처럼 우리나라엔 왕따라는 신종어가 학생들 사이에 많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폭력을 당한다거나 왕따를 당하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아이들 가운데는 학원 폭력에 시달리거나 왕따가 되어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는 것을 결국 견뎌내지 못해서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졸업할 때 제출한 논문 제목이 ‘폭력’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면 폭력이란 말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어릴적 당했던 폭력보다 더 무서운 폭력이 형태를 달리 하면서 나타날 수 있는데 자끄 엘룰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폭력’이라는 책을 읽으면 폭력을 보통 네 종류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 대 개인의 물리적 폭력(서로 싸움을 한다거나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
둘째는 조직과 조직의 물리적 폭력(가장 큰 조직간의 물리적 폭력이 바로 전쟁)입니다.
셋째 개인과 개인의 심리적 폭력(욕설을 퍼붓는다거나 여러 가지 정신적인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가 모두 폭력에 해당됩니다.)
넷째 개인 대 조직의 심리적 폭력(사회 체제의 구조적인 폭력) 예전의 노예제도처럼 제도적으로 인간의 자율성을 억압하거나 인간을 억압하는 여러 가지 잘못된 제도나 법으로 인해 희생되어지는 것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경우 폭력을 행사하는 쪽보다는 폭력을 당하는 쪽이 훨씬 더 큰 괴로움을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저히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힐 때 두려움에 떨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면 BC 700년경 지금으로부터 약 2700년경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갈라져 있던 전체 이스라엘에 커다란 어두움의 그림자가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세계를 제패하였던 앗시리아 제국이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세력이 자신들을 향해 가까이 오고 있을 때 그들은 두려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 교동에 비가 계속해서 내린 후에 또다시 태풍 올가가 북상을 하고 있다는 기상청의 예보를 들었을 때 아마도 두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녁 6시쯤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교동도 태풍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녁 6시에 나권사님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마음이 계속 무거웠습니다. 제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도저히 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한 3-40분쯤이 지났을까 평안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라 생각하고 기도를 마친 후에 나권사님 집으로 갔는데 태풍이 밀려와야 할 시간에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더 잔잔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당하는 두려움은 태풍 올가와는 전혀 다른 차원ㅇ의 두려움입니다. 당시 앗시리아 제국은 디글랏빌레셀 왕 이후로 계속적인 정복에 나섰고 그들의 잔학상은 수천의 사람들을 산채로 껍질을 벗기거나, 몸에 말뚝을 박거나, 다리, 팔, 코, 귀를 잘라내는 등 앗시리아 이름만 들어도 공포감을 조성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 앞에 수많은 나라들이 굴복을 당하거나 아예 항복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도 3년 동안이나 항쟁했지만 결국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처럼 앗시리아는 남왕국 유다를 향해 쳐들어 왔습니다. 그때가 바로 남왕국 유다의 히스기야왕 14년입니다. 왕하 18:13절을 보면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은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쳐서 취했다고 했습니다. 성을 쌓는 이유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까닭입니다. 여기서 견고한 성이라고 말한 것은 성을 튼튼히 쌓고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공격에는 무너지지 않는 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성은 앗시리아의 군대 앞에 너무나 쉽게 무너져버렸습니다. 지금까지 히스기야 왕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믿고 안심했던 모든 기반들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히스기야가 어떻게 행동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왕하 18:14-16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로 내게 한지라.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은 히스기야에게 은 300달란트와 금 30달란트를 요구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시리아 왕이 요구한 막대한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입혀있던 금가지 떼어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히스기야 왕의 위대한 믿음에 대해 들어보신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앗시리아 왕에게 여호와의 전에 입혔던 금들까지 벗겨 주었던 모습이 과연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히스기야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오히려 더 커다란 교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즉위 초부터 모든 우상을 없앴던 히스기야의 의연한 모습, 그러나 앗시리아 왕 앞에서 우리는 그런 히스기야 왕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얼마전 제가 읽은책 중에서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인물들을 모델로 삼으려하지 마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흉년의 어려움이 닥칠 때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가며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습니까?
그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도 늘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문제를 이겨내 보려고 아둥바둥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지금까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버렸을 때 견고한 성들이 무너질 때 히스기야의 신앙의 부분까지 함께 무너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분명히 실패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성전의 기중에 입힌 금까지 다 주었는데 그런데 결과는 어떻습니까? 왕하 18:17에 보면 또다시 앗시리아 왕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큰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약자의 설움입니다. 앗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안정을 되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불완전한 안정이었습니다. 이러한 대책은 항상 불완전한 것입니다.
또다시 남왕국 유다를 침공한 산헤립이 그 신하 랍사게를 보내어 온갖 모욕의 말을 시작합니다. 설교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퍼붓는 것은 분명한 폭력입니다. 아니 폭력이상입니다. 하지만 힘이 없으니 그냥 들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듣다 못해 몇사람이 랍사게에게 이런 요구를 합니다.
“아람말로 해도 우리가 다 들을 수 있으니 다른 일반 백성들은 듣지 못하도록 유다 말은 제발 하지 말아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부탁을 잘 들어줍니까? 아니요. 도리어 왕하 18:28에 “일어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질러”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왕하 18:33-35을 보면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고 큰소리를 칩니다. 대하 32:19은 이 내용을 “저희가 예루살렘의 하나님을 훼방하기를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세상 백성의 신들을 훼방하듯 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앗시리아 앞에 모든 열국이 쓰러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교만했고, 그들의 교만은 정도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권위에까지 도전한 것입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히스기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 거대한 적 앞에서 한 나라의 운명을 지켜야 하는 소국의 왕으로,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교만한 비웃음 앞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는 말을 전하며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임산부가 해산할 힘이 없다는 말은 이제 유대나라가 국난을 대처할만한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힘이 없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고,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이겨 보기 위해서 별의 별 방법을 다 써 보았지 않습니까? 성전문에, 기둥에 입혔던 금까지 다 떼어내 줬는데도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만나지 않았습니까?
결국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고 난 후에야 제대로 된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원래 처음부터 이 방법으로 갔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것을 마지막에 최후의 순간에 쓰는 겁니다.
기도의 결과는 어떻습니까?
왕하 19:6-7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들려주신 응답이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대로 히스기야가 기도하던 그날 밤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 군사 십팔만 오천을 쳐서 아침에 일어나보니 다 송장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역사가 데니우스는 성경에 기록된 것은 신화고 사실은 그날밤 앗수르군 진영에 갑자기 온역이 발생해서 모든 군사가 갑자기 병으로 죽게 되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가 쳐서 십팔만 오천의 군사가 죽게 되었든지 아니면 온역이 발생해서 갑자기 십팔만 오천의 군사가 죽게 되었든지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 기도하던 날 밤 전멸당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수많은 나라와 민족을 정복하여 멸망시키면서도 전혀 아무런 문제도 가져보지 않았던 앗수르 군대가 하필이면 그날 밤에 그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한 결과라고 밖에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히스기야 왕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앗시리아의 산헤립은 예언대로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낳은 아들들의 왕위 쟁탈에 휘말려 두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칼에 맞아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역대하에서는 표현을 더 적나라하게 쓰고 있습니다.
대하 32:21에 “앗수르 왕의 얼굴이 뜨뜻하여 그 고국으로 돌아갔더니”
그렇게 기고만장하던 산헤립의 모습도 결국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초라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존 프리벧은 "인간의 극한 상황은 곧 하나님의 기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삶의 위기가 있습니까?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시 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의 돈에는 “in God We Trust”(우리 하나님을 신뢰합니다)는 글이 쓰여있습니다. 그들은 돈을 세면서도 돈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돈을 셀 때에도 안에서 바깥쪽으로 셉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셀 때 자기 가슴 쪽으로 넘깁니다. 이것은 내 것, 내 것이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물론 정확한 근거는 없지만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 도리어 더 큰 위기를 가져왔던 것처럼 오늘 우리나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의지하려다가 이러한 어려움이 찾아오게 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오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기도해야 할 날입니다.
인간의 방법을 의지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할 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괴롭게 만드는 모든 장애물들을 물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세상에서 일하는 하나님의 보급창고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린 결정은 인간이 땅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취됩니다. 기도는 평범한 사람을 비범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들의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