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편 5절-7절: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5절: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신앙 면으로 사악한 자들은 불타지고 썩어질 세상 소원 목적에 성경구절을 붙여서 해석을 하고 사람을 불타질 소원 목적으로 몰고 간다. 이게 사악한 자들이다. 그리고 이 일이 좋은 것으로 알고 이 일을 같이 하는 교인들도 사악한 자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일들을 교회 안에서 예수이름으로 하고, 의식도 기독교 종교적인 것을 따라 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 믿는 세상을 볼 때 악한 자에게 속아서 자기 신세를 망치고, 가정이 파탄이 되고, 영원히 일어서지 못한 채 그대로 죽는 사람을 많이 본다. 이방 불신세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의 눈으로 보면 기독교 안에도 성경을 들고 교인들을 거짓된 길, 세상 쪽으로 몰고 가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교인들을 세상에 잡아먹히게 하는 악한 짓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정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갖는 것인데, 너무나도 기초적인 이것을 모른다면 우리의 이 교훈을 들을 때 속에서 얼마나 반발심이 올라오겠느냐? 그래서 교회의 인도자들은 교인들에게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이며, 기독교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목사는 뭐하는 사람인지 분명히 알게 해 줘야 하고, 교회를 거룩으로 깨끗으로 끌고 가야 한다. 오만 잡된 깡패와 같은 무리들이 교회에서 판을 치게 하면 안 된다. 이건 저주다.
6절: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벤전5:8에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라고 했다. 악한 자들은 진리성돌르 헐뜯고 핍박을 하고 신앙생명을 찾고 살핀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도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하늘나라의 의와 선을 행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이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학생이 몸이 아파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다가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을 통해 몸이 나았다면 이 학생이 학교를 가야 하느냐, 안 가야 하느냐? 가야 한다. 그런데 학교에 가지는 않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이런 병이 들었는데 어느 병원에 가서 나았으니 여러분들도 이 병원에 가십시오’ 라고 한다면 이게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확실히 비정상이냐?
병원에 가서 아픈 몸이 나았으면 나은 건 좋은데 그 다음에 뭘 해야 하느냐? 돌아다니면서 자기 몸이 나은 것을 광고를 하며 병든 자를 만나면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하느냐, 학교로 돌아가서 배우고 깨달아서 실력을 키워야 하느냐? 학교로 돌아가서 깨닫고 올라가야 한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서 몸에 병이 나았다면 자기가 병 나은 것을 간증하며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진리본질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영능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
예수 믿는다는 게 교회에 와서 찬송이나 부르고 가는 게 아니다. 말씀을 배우고 깨달은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게 예수 믿는 거다. 여기에는 교육이 들어있다. 만물을 다스리고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교육이 들어있다. 그래서 설교를 하다보면 본문과는 전혀 다른 말도 나오는 거다.
예수님께서는 만능의 능력으로 당신을 대적하는 자들을 당장 죽여 버릴 수도 있다. 성도다윗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싸움을 싸워서 이겼고, 하나님의 의를 이뤘다. 그래서 악령이 들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지만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다닌 것은 사울이 다윗 자기를 죽이는 죄를 짓는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면 진리성도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과 악신이 들린 다윗을 따르는 군인들은 무슨 신이 든 거냐? 성령이냐? 악신이 든 거다.
아내에게 손찌검을 잘 하는 남편이 있느냐? 얻어맞지 말고 일단은 도망을 가라. 그 자리에서 얻어맞다 죽으면 남편이 감옥에 들어간다. 그러니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면 도망가 버려라. 아내가 그 자리에서 얻어맞아서 몸이 아파서 드러 누우면 남편이 ‘아이고, 불쌍하다’ 할 것 같으냐?
성도다윗은 자연생명 위주로 살지 않고 신앙생명, 영적 생명 위주로 산다. 만일 다윗이 자연생명 위주로 산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 돼버린다. 다윗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산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을 해도, 도망을 다녀도, 비상수단을 써도 하나님의 뜻이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목적으로 한다.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다윗은 자신을 찾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어디에 숨어서 그러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은 자기의 신앙을 죽이기 위해 어떤 정신 사상들이 자기 주위에 진을 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느냐? 우리는 ‘어떤 정신 사상들이 내 주위에 진을 치고 있구나’ 하는 이걸 알아야 한다. 이단자들이나 사교들이 나에게 파고 들어오려고 얼마나 노리는지를 아느냐?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자기 집에 왔을 때 내가 성경을 잘 모르니까 문을 딱 걸어 잠그고 있다면 자기 집에 온 자들을 이긴 거냐?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종적’이란 어떤 흔적을 남긴 활동을 말한다. 악한 자들이 이걸 살핀다는 거다. 범죄자를 찾으려면 범행을 한 곳에 가서 범인의 종적을 살핀다. 범인이 있던 방의 재떨이에 버린 담배꽁초를 보면 이 범인이 집을 나간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영적인 면에서 의와 사랑의 흔적을 남겨야지 육적인 면에 죄의 흔적을 남기면 안 된다.
사람은 자기가 살다가 간 흔적, 앉았다 간 흔적, 자고 일어난 흔적을 남긴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이불을 펴놓은 채로 놔두면 누가 잔 흔적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좋은 흔적을 남겨야 한다. 말하는 면에서도, 행동을 하는 면에서도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이 된다. 대화를 할 때의 말투라든지, 일을 할 때의 행동이라든지 이런 가운데서 품어 나오는 심성의 인상이 있다.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이런 인상을 봐야 한다. 사람의 겉모양만 보고 상대를 무시하는 건 안 된다.
여자는 뭐가 중요하냐? 심성이다. 물론 남자들도 심성이 좋아야 한다. 성도는 신앙절개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그 사람의 신앙의 심성이 나오는 거다. 진리생명, 신앙생명, 진리사상이 중요한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꺾이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신앙절개다. 자기의 생명을 내대면서 하나님을 따라가려면 이 신앙절개가 있어야 한다. 신앙절개가 안 꺾이고 안 죽으려면 자기의 언행심사를 늘 조심해야 한다. 왜냐? 자기의 종적을 살피며 헐뜯는 자가 항상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절개가 꺾이지 않으려면 우선적으로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 진리를 버리고 인간의 마음을 사려고 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는 거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매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사자 굴 속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풀무불 속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오로지 진리신앙을 사수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누가 자기를 지키겠느냐? 주님이 지켜주신다.
진리신앙 정조를 버리게 되면 절대로 진리정신 사상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런데 예를 들면 창녀에게 전도한답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리생명의 말씀은 안 받고 창녀의 요구조건을 다 들어준다면 창녀가 전도자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진리의 사람이 되겠느냐?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전도자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 하였도다’ 라고 하시겠느냐?
우리 성도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신앙정조를 버리는 짓을 하면 안 된다. 성도는 어디를 가든지 자기 주위에는 항상 악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영적인 지혜를 구하고, 매사에 신중히 선택을 하고, 매사에 말조심 행동조심을 하고, 영의 눈이 밝아야 한다.
7절: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1. 악한 자들이 다윗을 해한 후에 다윗으로부터 떠나겠느냐는 말인지? 2. 죄를 짓고 나서 어떻게 하나님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말인지? 3 죄악을 행한 후에야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느냐는 말인지? 어느 거냐? 두 번째다.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뭇 백성’이란 블레셋 사람들과,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싸잡아 하는 말이다. 질이 똑같다 그 말이다. ‘뭇 백성을 낮추소서’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의 교만한 콧대를 꺾어달라는 거고, 의인을 핍박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교만성을 낮춰달라는 거다.
‘뭇 백성을 낮추소서’ 라고 한 말을 자칫 잘못하면 ‘그들의 콧대를 꺾어서 다윗 자기보다 저 아래로 떨어지게 해 달라. 완전히 망하고 비참하게 해 달라’ 이렇게 해석하기 쉽다. 그러나 이게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을 염두에 두고 다윗 자기를 해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쳐서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거다.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교만이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고 있으니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그 교만을 꺾어달라는 거다.
엄마가 말을 안 듣는 자식에게 ‘이놈아, 내 눈에서 없어져라’ 라고 할 때 이 말이 진짜 자식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인지, 아니면 못된 행동을 고쳐서 부모마음에 쏙 드는 자식이 되어달라는 말인지? 어느 쪽이냐? 뭇 백성을 낮춰달라고 하는 본문도 다 시궁창에 처박아서 없이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백성들 속에 교만이 들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고 있으니 이 교만을 쳐서 없이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다. 겉으로 보면 저주 같으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해 주고 싶은 사랑의 발작에서 나온 거다. 이게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고 복된 기도냐?
자기 주위에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는데, 우리교인 주위에 미운 짓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아이고, 저 사람 꼴도 보기 싫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인지, 아니면 이 사람을 볼 적마다 마음에서 뭔가 씁쓸하고 마음이 아픈 건지? 어느 쪽이냐?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찌하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말한다.
자기가 남을 저주하면 자칫 잘못하면 그 말이 씨가 되어서 남에게 저주한 것이 나에게 되돌아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