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새 출발 (사 26:1~7)
2025년 새해 첫날이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해에 우리를 어렵게 또는 힘들게 만들었던 것들, 괴로웠던 이러저러한 일들로 인하여 아픔과 상처가 있었다면 이젠 다 털어버리고, 마음을 새해와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깨어지고 녹슬고 보기 흉한 놋쇠도 용광로에 들어가면 녹아서 불순물은 다 타버리고 깨끗한 쇠만 남게 되고, 좋은 새 그릇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국가나 개인이나 상처난 것들이 많았을지라도 그와 같은 것들은 다 잊어버리고 깨끗한 정부 깨끗한 교회로 새롭게 되기를 기원하며 우리 또한 새 마음으로 2025년을 출발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지혜로운 어느 어머니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아들의 방을 무심코 들여다보던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이유는 저질스런 그림들과 사진들이 벽면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호통을 치거나 잔소리하는 대신, 다음날 벽 한복판에 독일이 낳은 유명한 화가 호프만의 ‘빌라도 궁전의 그리스도’ 성화를 조용히 걸어 두었다.하룻밤이 지난 후 어머니는 아들방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어 보았다.그리고 거기서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빽빽하게 걸려있던 저질스런 그림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오직 호프만의 성화만이 벽 한복판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성화가 악화를 구축했다는 이야기다.그렇습니다. 우리 시대는 저질시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정치 사회 경제 예술 문화 교육, 심지어는 사람까지도 저질시비의 도마에 오르곤 한다. 양화나 성화가 제 구실을 해낸다면 악화는 스스로 역사의 현장에서 퇴출당하게 된다. 이렇게 이 한 어머니의 지혜로운 진리의 몸짓은 작고 조용하지만 그 위력은 기필코 역사를 새롭게 할 것임을 보여준 예입니다.
오늘 이사야 26:1-6절 말씀에서 새롭게 활력을 불어 주시는 말씀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구원의 은총을 입은 백성들의 기쁨과 환희의 노래가 여기에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우리도 새해 첫 시간을 시간부터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면 이 얼마나 은혜가 되겠는가? 1절 말씀에서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성읍이 견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너희들을 지켜 줄 때만이, 내가 너희들의 성이 되어 줄 때만이 너희의 생은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우리의 성을 쌓고 지키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행의 불씨는 언제든지 있는 것입니다. 불행의 불씨가 아닌 성령의 불 축복의 불이 여러분의 심령을 태우는 성스러운 역사로 바꿔지기를 축복합니다.
새해에는 믿음생활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장작더미에 불을 붙일 때는 약하지만 그러다가 불이 확 살아납니다. 문제는 그것입니다. 비록 나는 약하나, 믿음의 불꽃만 있다면 믿음생활의 변화는 시간문제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마17:20,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너희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좋은 말씀을 가지고 있으면서 얼마나 신뢰하고 살고 있는지?
오늘 새해 첫 시간부터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적은 불씨라도 있으면 태산도 불태울 수 있는 능력이 얼마든지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 있으면 믿음생활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새해를 출발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아직도 시골은 나무를 가지고 소나 돼지가 먹는 밥을 끓여주는 곳이 있습니다. 소죽을 끓이기 위해 처음에 작은 불씨로 검불에 불을 붙입니다. 작은 불꽃하나가 커져서 나무에 옮겨붙고 불이 커져서 소죽을 끓여내는 것입니다. 겨자씨같은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가 사는 마을도 이 사회도 우리 교회도 구원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해에 우리들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시편 16:8에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하셨으며, 또 시46:5에는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온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새벽이 멀지 않는 것과 같이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비록 깜깜한 절망 중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인생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시면 아멘. 합시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심지(心志)를 곧게 하면 됩니다(3절). 오늘 말씀 4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가 영원히 의뢰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인간 사이에서도 심지가 곧은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믿음의 심지가 곧은 사람을 하나님은 “평강에 평강으로 지켜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평강의 공식(公式)입니다. 그의 삶에 평강이 없는 것은 이 하나님의 공식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빌 4:6~8 말씀에서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도 하나님의 평강이 기도와 간구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평강의 원천(源泉)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두 번째 새해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야 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생활이 절대 필요합니다. 요8:12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생명의 빛이십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지위(地位)와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어둠 속에 싸여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죄와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그 얼굴에 그늘이 져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불씨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금방 태산이라도 불태워버릴 것만 같은 그 사람의 얼굴과 눈을 보면 힘이 있습니다. 소망이 넘쳐납니다. 눈에서 사랑이 넘칩니다. 친절이 넘칩니다. 말을 해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자신 있게 말을합니다.
요 1:1-5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서 빛을 받아드리고 빛 가운데 사는 자와 어두움 속에 죄악 속에 빠져 있는 자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 했다. 빛 가운데 거하는 자들, 이 얼마나 축복인가? 사람이 사름으로 태어나서 깨닫고 산다는 것처럼 행복한 것은 없다. 진리를 깨닫고 사니 빛 가운데 사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단순히 생명의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말씀을 믿고 따르면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말씀했습니다. 양은 멀리 볼 수 없는 근시안(近視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앞만 볼 뿐입니다. 그래도 양이 푸른 꼴을 먹고,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양은 그 앞에 무엇이 있는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앞에서 인도하는 목자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을 내 고집대로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힘들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든지 할여고 드니까 힘든 것입니다. 그대로 믿고 따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쉽습니다. 쉽게 믿으면서 복은 다 받습니다. 아멘.
여러분과 내가 온전히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말씀과 기도입니다. 새해에는 더욱 말씀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고 어려운 것 같지만 겨자씨만한 믿음의 불씨가 내 안에 있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해골 때와 같은 이 시대에 여러분이 작은 불씨가 되기만 한다면 이 민족을 순식간에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하나는 기도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교회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믿음생활이 불이 붙는 역사 다시 기도의 불 붙이시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소원하셨던 것도 제자들의 삶 속에 성령의 불이 붙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누가복음 12:4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열망(熱望)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올 한 해 새해에는 세속에 묻혀 살지 말고 깨어서 빛 가운데 행하시되 열심히 주님만을 따라가십시다. 바울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2-14).” 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 고 하셨고, 고후5:17 말씀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2025년 한 해를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소망을 가지시고 달려가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일들은 새 일을 하기 위해서는 잊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나간 일들에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 대하여 열려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라나타!오직 예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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