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이름이 삼식이요?
김종숙
실버타운에 살고 있다. 나는 200명 입주민 중에 세 번째 막내다. 육십 세부터 입주 가능하지만 실제 육십대는 거의 없어 칠십 중반인 나보다 어린 사람은 남녀 통틀어 두 명이 고작이다. 거의 모든 주민들이 나에게는 언니요 오빠인 셈인데 그 중에 내가 존경하는 두 명의 오빠가 있다. 하나는 열네 살 소년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40년간 양자 물리학 교수로 봉직하다 은퇴 후 구십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동생 뻘인 또 하나는 특목고등학교나 외고에 교장으로 재직하며 뛰어난 운영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는 하바드를 비롯한 세계 명문대학에 유학생들을 입학시키며 각 대학의 총장들과 교류해왔고 아직도 국제학교에 초빙 교장으로 활동 중이다. 아침 식사 후 로비에서 차를 마시려는데 두 오빠가 나란히 앉아 담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살금살금 다가가니 교장오빠가 앉으라면서 대뜸 나에게 묻는다.
" 아들이름이 삼식이야?"
"네?"
어리벙벙한 모습으로 바라보니 어젯밤 TV 방송에 출연하여 대담할 때 내가 그리 말했다는 것이다. 은퇴자들의 이야기가 주제인 그 프로그램에서 인터뷰한 내용 중에 삼식이 아빠와 함께 살다보니 밥하기 싫어 실버타운을 찾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단다. 내용을 이해한 나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삼식이가 무슨 뜻인지 정말 모르시나요?"
그는 형님의 얼굴을 살피며 자신만 모르나 싶은지 동정표를 기다린다. 형님이 거든다.
" 나도 처음 들었어. 그 대목 나올 때 삼식이 아빠가 남편을 의미한다는 건 알았지. 영희엄마, 철수아빠 하듯이 애들 이름 붙여 말한 줄 알았는데, 아냐?"
두 오빠들이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나는 깔깔대며 요즘 세상에 삼식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맘껏 우쭐대었다. 이게 세대차이라는 걸까. 아니면 두 어른이 고상하게만 살아와서 비속어는 아예 모르는 걸까. 삼식이란 단어는 세 끼밥을 다 챙겨줘야 하는 남편을 빗대는 아내들의 통용어라며 '두식이'까지 덤으로 설명해주었다. 한편으로는 야단도 맞았다. 남편을 아빠라 했으니 더 오해한 것 아니냐고. 맞다. 나는 그 방송 프로그램 대담 중에 두 가지 말 실수를 하였다. 과거에 선생이었다는 말, 직업을 칭할 때는 교사라 해야 옳다는 것과 남편을 아빠라 칭한 것, 평소에 남편 부르기를 오빠니 아빠니 하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한심해하던 내가 막상 같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방송매체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 파급력 탓에 우리말과 글이 얼마나 많이 훼손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내가 나쁜 말을 서슴없이 입에 담았던 게 부끄러웠다. 어젯밤에 잠시 출연한 그 프로그램 제작진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 떠오른다. 촬영차 왔던 60여명의 젊은이들이 모두 2,30대처럼 보였으므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당연히 MZ 세대들의 사고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리란 짐작은 했었다. PD가 보내온 가편집본에 '일잘러 종숙의 다음 미션' 이란 표제가 붙어 온 자료를 보고 '일잘러'가 무슨 뜻이냐 물었었다. '일 잘하는 사람'의 축약어로 사용된 신조어라는 설명을 듣고 그리 탐탁한 심정은 아니었다. 언어의 축약화 탓으로 세대별 소통에 어려움울 겪고 있는 건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인 듯하다. 또 한가지, 방영된 화면에 나를 인생 선배로 표현한 자막 위에 '원조 파이어족'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것도 보았다. 아들에게 물으니 50전에 은퇴한 사람들을 'FIRE'족이라 부른단다. 빨리 은퇴하고 불처럼 화끈하게 산다는 의미라나. 세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언어 속성 중의 하나이지만 지금처럼 무제한 방관만 하다가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국적 불명의 외계어로 변질되어 버릴까봐 걱정된다. 글을 쓰는 사람들과 언어학자들이 긴장하여 검토하고 우리말과 글의 뿌리를 바르게 지켜나감에 앞장서야 하겠다.
* 붙임: 앞서 말한 TV프로그램 중 내가 출연한 부분을 유튜브에서 보았다며 친구가 전화를 했다. 평소에 즐겨보는 채널이어서 곧바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은퇴 설계자들'이라 검색을 하니 정말 있다. '실버타운의 편견을 깨준 인생 선배 - 실버타운은 요양원이 아녜요.'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신기해하며 살펴보니 조회수 1만명이 넘었다. 재미삼아 내 블로그에 옮겨 놓았다. 잠시 후 20년지기 블로그 이웃의 댓글이 달렸다. 당당하게 말 잘 하는 내 모습에 우심깜뽀하고 싶다나. 우심깜뽀? 틀림없는 축약어 느낌이 들었다. 나보다 한살 위인 노인네가 이런 말을 쓴다고? 젊은 애들 전용어를 어찌 알았을까 의아해하며 검색을 했다. 그리고 살짝 당황했다. 축약어가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가보다 싶어서였다. 우심깜뽀의 원본은 '우리 심심한데 깜깜한 데 찾아가 뽀뽀나 할까'였다. 요즈음 말이 아니고 옛날 어느 영화의 대사 한마디에서 전래된 축약어였다. 생각나지 않았을 뿐 기억 밑바닥에 잠들어있던 그 말을 떠올리며 당시에는 재미있는 발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신조어란 잠시 사랑받다 잊혀지는 유행가처럼 흘러가는 본질에 묻어 흐르다 사라져버리는 거품일 수도 있겠다 싶어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