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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과학의 함정(Out of Our Heads)
다른 마음들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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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어떤 사람이 실제로 의식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우리의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에 관한 질문이기 이전에[...] 언제나 도덕적 질문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조차 그 사람과의 관계를 의문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점은, 우리들 대부분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로 맺는 관계는 단순히 그런 질문을 할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그 질문은 우리가 실제로 서로에게 취하는 더 친밀한, 맞물린 관점과 양립할 수 없는 초연한 관점에서만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생기를 불어넣는 주제가 바로 이 다른 마음에
관한 도덕성과 회의주의의 관계다.
영화의 배경은 '복제 인간', 즉 대량생산된 로봇들이 노예 인구를 형성하는 암울한 미래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복제 인간은 기계에 지나지 않으며, 본질적 가치가 없고, 법적 권리에 의해
보호받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 주인의 변덕에 따라 만들어지고 폐기될 뿐이다.
반전은 일부 복제 인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고, 결정적으로, 평범한 상호작용을 통해서는 아무도
상대가 복제 인간인지 아니면 실재하는 진짜 사람인지를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실은 [...] 자기 성찰을 통해서는 자신이 복제 인간인지 아닌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반란군 복제 인간을 사냥하는 경찰인 데커는 반란군을 진정한 의식을 가진 행위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그들의 인간성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인간성을 위험에 빠뜨리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으로
행동한다.
복제 인간은 결코 마음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커의 초연한 판단은 그 자신이 '암컷' 복제 인간과 친해
져서 맺게 되는 관계와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
데커 자신도 스스로가 복제 인간임을 모르는 복제 인간이라는 점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일종의
생물학적 본질은 아님을 통감하게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품위[...]인 것이다.
[...]
누구나 보상과 처벌을 통해 행동을 조형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보상과 처벌은 모든 의미 있는 동물 관계나 인간관계에서 아마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와 개의 실제 관계를 특징짓는 협조와 동반의 관계로 들어가고 싶다면, 기계장치의 관점을
떠나 개를, 뭐랄까, 하나의 생각하는 존재로서 보아야만 한다.
다른 인간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런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인간을 단순히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조작될 수 있는 물건으로 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독일에서 저질러진 만행은 분명 부분적으로는 다수의 편에서 자발적으로 인간에
대해 그러한 객관화된 기계론적 태도를 취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을 마치 갇혀 있는 에너지를 꺼내기위해 녹여서 활용할 물품처럼 취급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해 초연한 기계론적 태도를 취하면, 우리가 그들을 친구로 보는 일은 물론 적으로 보는
일마저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일단 타인과 모종의 동거에 들어가고 나면, 다시 말해 그들과 친구, 부부, 동료의 관계가 되고 나면,
그들에게 의식이 없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마음에 관한 회의주의를, 어떤 의미에서는 그럴 만한 훌륭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희한한 사실을 설명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사람, 개, 고양이에 대해 비기계론적인
맞물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회의주의는 우리가 정상적인 관계로부터 강제로 단절될 때에만 겨우 납득이 간다.
그저 간신히 와 닿는다. [...]
하지만 일단 타자에 대해 초연한 입장을 취하면, 우리는 그를 이해할 모든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다.
개나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 때는 우리가 개나 사람을 마음이 있는 것처럼 대우할 때뿐이라고, 즉 우리는
그 자체로는 진정으로 의식이 있지 않는 것에 대해 마음을 투사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데커가 복제 인간들에게 저지른 죄, 나치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죄는 각각 복제 인간과 유대인의 진정한
인간성을 인정하길 거부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매사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사실, 또는 매사에 우리가 철저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여전하다.
한 관점 안에서는 타자의 마음을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른 관점 안에서는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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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뇌 속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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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동안 나는 뇌 속에서 의식을 찾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뇌 속에서 의식을 찾지 못했으며, 그리고 찾지 못할 것이다. 의식이 어딘가 다른 곳, 이를테면, 영혼이나 환경이나 집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은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은 우리가 행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은 우리가 구성되는 방식―뇌와 육체―뿐 아니라 주변 세계에도 의존한다.
뇌 속에서 의식을 찾는 것은 다리에서 춤을 찾는 것과 같다.
마음이 몸과 분리되어 있다는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우리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뇌라고 하는 현대의 독단은 공통의 전제, 즉, 우리 안에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하며 의식이 있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우리를 정말 감금해 두고 있는 것은 이원론자들과 대부분의 신경과학자들이 공유하는 이 가정이다.
[...] 애덤 프랭크가 정신과 물질의 관계에 관해 우려하는 것은 옳다. 그리고 인간이나 동물 경험에 관한 과학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 합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그의 견해는 옳다. 나는 우리를 제한하는 것, 그리고 우리 과학을 제한하는 것은 이중의 오해라고 제의한다. 첫번째 오해는 내가 이미 지적했는데, 우리는 마음이 머리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미음의 작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물이 주변 환경과 밀접하게 결합하고 그것에 개입하는 방식을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의 머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두번째 오해는 자연, 즉 우리 자신들이 속해 있는 이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현대물리학의 놀라운 성공을 우리가 물리학이 서술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근거와 혼동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물리학자의 세계가 색깔과 소리와 감촉과 향기와 우리 경험을 채우는 여타 성질들이 결여된 세계라는 사실을 대면한다. 이것은 다시 우리를 우리의 뇌로 되돌리는 경향이 있다. 세계가 정말로 우리가 세계로서 경험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면, 우리의 경험은 우리가 꾸며내는 것이거나 우리의 뇌가 우리를 위해 꾸며내는 것임에 틀림없다. 데카르트적 캡슐로 되돌아간 셈이다!
저명한 과학자 션 캐롤은 [...] 생명의 기초를 이루는 물리 법칙들은 완전히 이해된 상태라고 역설한다. 그렇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 진술은 애매하다. 생명을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물리 법칙들은 잘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물리학의 견지에서 생명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한다는 점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물리학의 세계에서 살지 않는다. 만약에 그랬다면, 생물학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인간들과 다른 동물들은 적소에서 산다. 그들은, 또는 오히려 우리는 가치들의 풍경―양자 격자 구조들이 아니라, 기회와 장애, 유도와 방해로 이루어진 세계―들을 점유한다. 우리의 체험적 삶을 비롯하여 삶은 원자들의 구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피 장소, 식량, 친구와 적들로 둘러싸인 지상에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적극적 삶과 우리의 적극적 체험의 무대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속해 있는 바로 그곳에서이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의식 문제가 있다는 환영―메타인지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제는 낡은 근대 과학의 두 가지 독단―마음은 머리 속에 있다는 것과 우리 또는 우리 뇌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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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노출되어 있다
The Mind Is An Open Book
나는 우리가 한편에는 법과 가치,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기술이라는 두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갈등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갈등은 정부와 기업의 부당한 감시로부터의 보호와 사생활을 둘러싼 법과 관련되어 전개되고 있다.
나는 미합중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자국 시민들과 관련된 정보 수집의 범위에 관한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의 불법적인 정보 공개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놀라는지 그 까닭을 정확히 모르겠다. 미합중국이 모든 전자통신을 감시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 2006년에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와이어드(Wired)그 기사를 언급했다
놀랍든 놀랍지 않든 간에, 아무도 실제로 도청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주장에 안심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누구와, 그리고 언제 통화를 하고 있는 것에 관한 정보가 결코 첩보 기관의 메타자료가 아니라 사적인 자료라고 믿는다. 우리의 통화 기록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듯 느껴진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 안심시키지 못하거나, 또는 틀림없이 안심시키지 못하는 더 심층적인 이유가 있다. 여기서 기술적 변화가 중요하게 된다. 자료와 자료에 관한 자료(메타자료) 사이의 구분은, 피상적으로는 간단하지만, 사실상 매우 미묘하다.
그리고 빅데이터(Big Data)
여러분은 몇 년 전에 타겟이 연루된 사건에 관해 읽었을 것이다. 그 상점은 한 십대 소녀에게 임신과 관련된 제품들에 대한 쿠폰들을 보내기 시작했었다. 그 소녀의 부친은 분개했다. 그들은 그 소녀로 하여금 고등학교에서 임신하도록 시도하고 있었던 것일까? 타겟의 경영진은 당황했고 한껏 사과했다. 그 소녀는 정말 임신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소녀의 구매 행동에 관한 정보에 근거하여, 타겟―정확히 말해서, 그 어느 누구도 아니라 컴퓨터화된 유형 탐지기―은 그 소녀가 자신의 부친에게 말하기 전에 이 사실을 짐작했다. 이 사건이 확인해 주듯이, 누군가가 어느 누군가에게 정보를 공개하기 전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
조금 더 많은 정보―내려받기, 전자 교통카드, 휴대폰 기록, 전화로 접촉한 사람과 시점에 관한 자료, 소셜네트워킹 소프트웨어 등으로부터 수집한 정보―로 어떤 사람이 스스로 알기 전에 임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쉽다. 또한 우리는 당사자가 아직 그 사실을 모르지만, 틀림없이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여러분의 개인사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고,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에 관해 많이 알고 있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지는 전혀 비밀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상식일 뿐이다. 여러분은 함께 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주목하고 있는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보행자는 운전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함으로써 정지 신호에 자동차가 자신의 존재를 새겼는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면 마음은 노출된다.
바로 그렇다. 빅데이터 시대에는 충분한 정보가 있거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그 점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 이것 저것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것 저것 의도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올바른 종류의 방식으로 복잡한 인과적 또는 정보적 연결망에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단히 근거가 확실하다.
실제로 그것이 계산 이론의 바로 그 토대다. 내부에 영리한 생각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들이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컴퓨터의 마이크로전자적 상태들을 지적인, 또는 바로 내용이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예를 들면, 컴퓨터가 이런 저런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사실로 만드는 것―은 그런 내적 상태들이 올바른 종류들의 입력과 출력에 인과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엮여 있는 방식이다. 컴퓨터들은 문제를 풀기 위해 자체의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물리적인 기즈모일 뿐이다. 컴퓨터들이 인지적으로 유의미한 과업들을 수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주변 세계와 엮여 있는 방식―기술적으로 다시 서술하면, 그것들의 내적 상태들의 변화가 계산적으로 유의미한 상태들과 동형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대단히 단순한 사례를 고려하자. 주머니 속의 동전. 그것은 무언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동전이다. 그것은 통화다. 그것은 가치가 있다. 그것은 25센트의 가치가 있다고 하자. 이 가치는 무엇에 놓여 있는가? 한 조각의 금속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하나의 인공물로 여겨지는 동전 자체에 있지 않다. 그렇지 않다. 대략적으로 가치는 관계, 실천, 그리고 제도들의 복잡한 연결망 속에서 그 동전이 통용되는 방식과 그것의 위치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요점은 이렇다. 여러분이 그 연결망을 알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동전의 가치에 관해 알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동전을 구성하는 재료가 무엇인지(나무, 플라스틱, 금속)는 중요하지 않으며, 또는 그 동전이 가상적(대부분의 화폐가 항상 그랬고 현재 그러하듯이)인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이 점은 일반적인 것이다. 의미, 가치 등은 질량이나 모양이 그런 방식으로 사물들의 고유한 특성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관계적 특성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서술했듯이, 의미는 용도다. 데닛이 서술했듯이, 의미는 내재적이지 않다.
이것은 동전의 경우에 참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에도 참이다. 여러분의 머리 속 물질이 도대체 어떻게 나름의 의미를 전할 수 있을까? 뇌는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동전이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뇌도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 뇌는 우리와 우리 뇌가 복잡한 인과적 연결망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방식 덕분에 정보와 의미를 전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이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행위, 언어, 글쓰기, 메시지 등의 형식으로 외부화시킴으로써 타자들에게 생각을 드러낸다. 그것이 일상 생활을 잘 서술한다. 우리는 비밀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염원을 공개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내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도구―외과용 메스에서 뇌 스캔까지―를 사용하면, 동전의 물질적 육체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머리 속에서 의미, 취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내부/외부 구분이 붕괴한다.
이런 개념적 요점들이 20세기 철학과 인지과학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것들은 컴퓨터과학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런데 빅데이터 수집과 처리의 시대에 진입한 오늘날 그것들은 우리의 정치적 문화에 대해 새로운 관련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충돌 과정에 있다.
여러분이 충분한 메타자료를 수집하면, 여러분은 나를 수집한 셈이다.
나는 내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내 메시지는 읽기 위해 개봉할 필요가 있는 봉인된 봉투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의미는 메시지 내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의미는 메시지가 자체를 지금의 메시지로 만드는 행위, 소통, 반응, 필요, 문제, 그리고 상황들의 연결망에서 자리잡고 머무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이―빅데이터의 자원을 고려하면―사찰에 노출되어 있다.
물리학자의 실재관
The Physicist's View of Reality
과학은 한 마을이 아니라 국제연합을 닮았다. 과학자들의 상이한 공동체들은 나름의 방법, 언어, 그리고 양식들을 사용하여 연구를 수행한다. 상이한 분야들의 과학자들은 서로 소통할 수 있으려면 해석자들이 필요하다. 과학의 국제어는 존재하지 않는데, 수학도 국제어가 아니다.
그래서, 물리학이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과 우리가 생물학으로부터 알게 되는 것 사이에 그 어떤 양립불가능성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생물학을 물리학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생물학을 소거하는 것을 진지하게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물리학의 언어로 생물학 연구를 수행할 수 없으며, 생물학의 문제들을 규정하고 그것들의 해답들을 탐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그들이 도대체 이것에 관해 생각하는 데 시간을 보내든 보내지 않든 간에―이 내가 물리학자의 실재관이라고 부르는 것을 신봉할 것이라고 추정한다.
물리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사물들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연구하고 있는 것은 물리학뿐이다. 물리학은 근본적인 실재를 탐구한다. 우주의 아래로 내려갈 때,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우주는 실제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라는 의문들이 물리학이 연구하는 것이다. 거칠게 말하면, 그것은 모두 입자들―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또는 그것은 모두 장들일 것이다.)
물리학의 견해를 취하면, 생물학과 관련된 것은 그것이 대단히 편협하다는 점이다. 살아 있는 물리적 체계들과 살아 있지 않는 물리적 체계들 사이의 차이, 또는 유기적인 화학적 과정들과 유기적이지 않는 화학적 과정들 사이의 차이는 물리학에 쓰여져 있지 않다. 물리학으로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외부에서 자체적으로 순전히 물리적인 과정들에 부과하거나 투사하는 것이다.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생물학이 생명에 대한 우리의 독특하게 인간적인 관심에 의해 형성된 분야라면, 심리학, 인지과학, 언어학, 인류학, 그리고 경제학 같은 다른 과학들―근본적으로 지각, 언어, 문화, 교역, 가치 등과 같은 관념들에 의존하는―은 정말로 가공의 것처럼 보임에 틀림없다. 물리학자들이 알고 있는 대로의 세계에서는 지각, 언어, 문화, 교역, 가치 같은 것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정말로 실재적이지 않다!
그런데 내가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많은 과학자들이 물리학자의 실재관―물리학만이 가공의 인간적 관심사와 가치들과 별개로 사물들을 실제로 있는 그래로 서술한다는 관념―을 신봉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만약 압박을 받는다면 우리는 정말로 물리학자의 견해가 틀림없이 옳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존재하든, 또는 여태까지 존재했든 아니든 간에, 원자번호가 79번인 원소는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이 원소가 황금색인 듯 보이고, 금속에 관한 한, 촉감이 부드러운 점, 희귀하거나 매력이 있거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점은 모두 신경계와 사회적 조직들을 갖춘 우리 같은 생명체들의 존재에 의존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대로, 물리학자들이 알고 있는 대로 정말로 금은 존재하며, 그리고 그것은 우리와 아무 관계도 없다.
그런데, 지금 제기할 가치가 있는 의문은 이럴 것이다. 물리학자의 실재관은 정말로 옳은가?
이 의문에는 두 가지 부분이 있다. 첫째, 우리의 이해관계, 가치, 그리고 지각적이고 인지적인 한계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사물들을 실제로 있는 그래로 만나는, 세계를 아는 방법이 존재하는가? 이른바, 초월적 관점(view from nowhere)이 존재하는가? 둘째, 물리학은 이것을 전달하는가, 또는 심지어 목표로 삼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더 멀리 끌고 갈 수 있다. 압박을 받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물리학자의 견해가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정하자.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물리학자의 실재관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결국, 우리는 초월적 관점을 갖추고 있는 신이 아니다. 우리는 살과 피다. 우리의 관심사들은 감정적이고 의학적이고 정치적이다. 우리는 흥분하고 냉정하다. 우리는 우리 육체에 가해지는 지구의 인력을 경험한다. 우리는 사랑하고 가치를 평가한다. 우리들 가운데 어느 누구가 이 모든 것이 비실재적일 것이라고 진지하게, 정말로 간주할 수 있는가?
그리고 물리학자들은 좋은 설명들을 추구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지 않는 물리학을 상상조차 할 수 있는가? 도대체, 물리학자의 실재관에 따르면, 어떤 설명을 좋은 설명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과 가치의 얽힘에 관하여
1.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과학과 과학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관해 생각하는 유서 깊은 한 방식에 따르면, 과학은 가치중립적이다. 과학은 사실들을 주시한다. 과학은 세계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해석 문제들과 별개로 존재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과학은 가치들에 입장을 확실히 할 필요가 없이 사실들을 알아낼 수 있다. 과학은 가치 문제와 관련된 지루하고 결정 불가능한 논쟁들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참인가?
나는 일부 과학자들이 편향되어 있다거나, 부정직하다거나, 또는 연구 경로가 때때로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이나 기업들에 의해 부당하게 영향을 받는지 여부에 관심이 없다. 이것들은 중요한 문제들이지만, 그것들은 과학이 최소한 외부로부터 부패시키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자체의 작동에 있어서 가지중립적이라는 점을 당연히 여긴다.
그렇지 않다. 내 의문은 이렇다. 과학이 자체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에 가치중립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것이 정녕 참인가?
회의적인 이유는 이렇다.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Hilary Putnum)이 오랫동안 주장했듯이, 과학은 인식적 가치들에 의존한다. 훌륭한 탐정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과학자는 자신의 판단을 사용한다. 가능한 모든 것들이 고려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은 그것들이 불가능하거나, 또는 입수한 증거가 그것들을 배제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가 일반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그것들이 무관하고 당치 않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당치 않은 가능한 것들에 관해 걱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과학자들은 예측하고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과학자들은 많은 정보를 조직하는 이론들을 세우며, 그리고 그들은 단순하고 정합적이고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여러분은 자신이 진리에 이르렀음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진리는 자체의 불변하는 특징들을 지닌 황금과 같지 않다. 여러분은 증거의 무게에 비추어 그것에 관해 의심하는 것이 부조리할 진리를 인정한다.
합당성, 설명적 적절성, 예측력, 단순성, 정합성. 이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가치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과학의 질료다. 과학자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가치들에까지 내려갈 수 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이야기가 바르게 되었다고 만족감을 느끼는지 여부에까지 내려갈 수 있다.
게다가 외부로부터의 과학에 관한 회의주의가 개입할 때 더욱 더 그렇다. 과학자들이 기후변화 부정자들이나 이른바 "지적 설계" 옹호자들과 논쟁을 벌이고자 할 때, 사실들에 못지 않게 가치들이 걸려 있다. 회의주의자들은 과학의 인식적 가치들을 그냥 거부한다. 그들의 입장은 터무니없고 근거도 없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가치의 문제다!
도덕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나는, 퍼트넘이 사실과 가치의 얽힘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과학을 기껏해야 "우리"가 생각하는 것에 관한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설교적 주장들에 불과하다고 간주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요점은 가치 영역에서의 갈등들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고양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갈등들을 단박에 해결할 방식들이 없다는 사실이 그것들을 함께 생각하면서 이루어지는 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2. 과학과 가치는 왜 떼어놓을 수 없는가?
과학에서 사실과 가치는 얽혀 있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다른 종류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편파적이거나 영향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이유, 일관성, 정합성, 개연성, 그리고 재현 가능성에 대한 신념 때문이다. 이것들은 가치 신념이다.
이것을 명백히 하는 한 가지 방법. 우리가 틀림없이 합리적이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더 많은 과학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과학을 수행하는 것은 합리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사실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치다.
그런데, 이런 사실과 가치의 얽힘―이것은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의 어구다―은 과학을 자체의 고귀한 지위에서 강등시키는 것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도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은 또 하나의 실천일 뿐이야!
그 다음에 멈칫하기 시작한다. 하나의 실천에 불과한 것이 어떻게 그렇게 효과적일 수 있을까? 낡은 일례를 들면, 인간을 달에 보냈잖아!
그런데 요점은 과학의 콧대를 꺾는 것이 아닐 것이다. 정말로 요점은 가치들과 그것들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몇 단계 더 위로 향상시키는 것일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실수는, 가치들은 주관적이라는 것, 즉 의견 또는 해석 또는 취향 또는 성향의 문제일 뿐이라는 관념, 가치들은 상대적일 뿐이라는 관념이었을 것이다.
사랑의 가치, 또는 생명 자체의 가치와 관련하여 상대적이거나, 구성되었거나, 또는 문화적으로 구속된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합당성 또는 공정성이라는 가치는 어떠한가?
이것들은 실재적 가치들이 아닌가? 그것들을 판별하는 것은 성취가 아닌가? 예를 들어, 건강은 좋다는 점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세계에 관한 무언가를 알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가치들이 실재적이라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가치들에 대하여 논쟁들을 해결하는 것이 가능한 듯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떠한가? 결국 우리는 다원론적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일단 가치들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여러분은 그것들이 어떻게 세계에 맞게 변화하는지, 어떻게 우리 세상에 맞게 변화하는지 파악하게 되는데, 이것은 쉽지 않다.
사실상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문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추측한다.
과학은 생명의 거울의 방 안에서 자체의 실재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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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신이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신이 생명체들의 거대한 무리들을 만들어내었다. 신이 인간들을 창조했다.
과학은 이 이야기를 일축한다. 그것은 동화다. 그런데 과학은 더 멀리 나아간다. 신은 환영이다. 그렇다. 그런데 그가 창조했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도 환영이다.
생명체들의 무리들? 인간들? 하늘과 땅? 그 어느 것도 실재적이지 않다. 정말로 그렇지 않다.
과학의 경우에,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것들뿐이다.
꿀벌과 모래언덕 자동차들, 산과 쌓인 눈, 사자와 호랑이들, 소년과 소녀들은 겉보기에 다양하더라도, 이것들은 모두 하나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아무 소리도, 아무 냄새도, 또는 아무 색깔도 없는 입자들의 구름이다.
다양성은 우리 머리 속에 존재한다. 우리가 작화자이며 우리가 알고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세계는 기껏해야 우리의 상상의 산물이다. 거대한 환영.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입자들의 구름이 아니라면 뇌는 무엇인가? 세계가 상상의 산물, 이미지, 또는 꾸며낸 이야기라면, 그것은 무엇의 이미지인가? 그리고 도대체 이 이미지, 이 환상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진 것들로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상상의 산물들 속에 있는 상상의 산물들로 귀결되는 듯 보인다.
종교적 창조 이야기는 종교적 공동체의 경계 밖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진지하게 여기기가 불가능하다.
물리학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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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그것의 실재 2
Science And Its Reality: Take 2
나는 종교와 과학은 경쟁하는 이론들이라는 관념에 이의를 제기했던 지난 주 포스트 글
우선, 종교는 이론이 아니다. 종교의 과업은 설명과 예측에 있지 않다. 그리고 종교적 관념, 문화, 텍스트, 실천, 태도들에 귀속되는 가치―가치가 존재한다고 당연히 간주하자―는 이것들이 대략 지난 삼 세기 동안 발달되었던 자연과학의 방법들을 사용하여 시험을 받고, 확증되고, 검증되었거나 또는 이론화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이것을 요약하는 한 가지 방식은 이렇다. 신은 가설이 아니다.
상식도 가설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가치가 있다.
즉, 태양이 내일 떠오를 것이고, 우리 발 밑의 바닥은 안정하고, 우리가 자고 있을 때에도 세계는 지속되며, 우리가 <<트루먼 쇼(Truman Show)>> 세상이나 <<매트릭스(Matrix)>>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우리의 확신도 가설이 아니다. 사실상 우리가 그런 것들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우리가 그것들을 당연히 여긴다고, 그것들이 거짓일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없다고, 그것들은 그것에 관해 어느 것이나 믿게 될 수 있는 배경에 대한 상수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사실상 과학 자체가 하나의 이론이라는 주장에는 기묘한 점이 존재한다.
과학은 많은 이론들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은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다. 이론은 시험할 수 있는 결과들을 낳는 모형 또는 그림 또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결과들이 관찰된 사건들과 부합되지는 여부를 알아봄으로써 이론을 시험한다. 우리는 대단히 미묘하고 상세한 이야기 또는 그림들을 시험하게 하는 실험들을 고안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 과학은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는 종교뿐 아니라 상식과도 긴장 관계를 이루는데, 이론 구성 작업에 있어서 이것들이 경쟁자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 일어났던 과학혁명에 대해 말하는 것, 그리고 갈릴레오, 뉴턴, 데카르트 등을 혁명가들로 간주하는 것은 아무 이유가 없지는 않다. 나는 과학의 이데올로기를 요약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 가지 기본적인 신념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지침으로서 감각 경험을 경시한다는 것은 명백한 듯 보인다.
데카르트 유명한 예를 인용하면, 감각에게는 밀랍이 녹을 때 그것은 완전히 변형되지만, 이성에게는 밀랍이 단지 다른 형태로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외양과 실재는 별개이고 그것들 사이의 간극은 매우 크다.
과학의 과업은 실재에 있다. 최소한 전통적인 형식에 있어서 그 이데올로기의 또 하나의 중요한 신조는 좋은 모형들은 기계론적이라는 것, 즉 아래로 줄곧 당구공을 때리는 당구공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성한 지능이 할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낳는다.
과학이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과학자들이 과학의 독단들을 고수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실험실을 벗어났을 때 많은 과학자들은 상식뿐 아니라 종교도 떠안는다.
이것은 대체로 명백하다. 과학과 다양한 양태들의 의식적 삶 사이의 긴장은 실재적이다. 그 긴장은 해소되거나 해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탁자가 갈색이고 단단하는 사실은 색깔이 우리 머리 속에 있으며 탁자가 입자들의 구름이라는 (추정적) 사실과 사실상 양립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탁자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우리의 상식적 관념은 오도된 것이고 대부분의 미신처럼 포기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 중요한 작업, 가치 있는 작업, 철학의 작업이다.
사랑은 측정할 수 있는가?
Can Love Be Measured?
오늘 나는 비인간, 사랑 그리고 집에 대한 두 가지 주장을 제시하고 싶다.
어제 나는 한 소년이 개를 데리고 걷는 것을 지켜보았다. 소년은 틀림없이 열한 살 쯤이었고, 개는 대략 이 살이었다. 인간과 개는 매우 사랑하는 듯 보였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발렌타인 데이가 아니었더라도 떠올렸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사랑의 휴일이었기 때문에 그 생각은 평소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개는 활기가 넘치고, 의기양양하며, 대단히 활발하고 발랄했다. 개의 주의는 소년과 그의 몸짓에 결부되어 있었다. 개는 소년이 들고 가면서 제멋대로 던지곤 하는 테니스 공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데 소년에 대한 개의 사랑을 표현하는 듯 보였던 것은 관심의 고정성뿐 아니라, 개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기대로부터의 자유였다. 개가 이런 움직임, 저런 움직임, 이제 이런 움직임이 공을 앞으로 쏜살같이 보낼 것이라고 명백히 희망하면서 모든 움직임에 매달려 즐겁게 쫓아다니고 있었던 것은 참이었다. 그런데 개의 시중에는 아무 판단도 함축되어 있지 않았다. 개는 소년이 무슨 일을 하기로 선택하든지 간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개는 즐겁고 흔쾌히 받아들이는 듯 보였다. 내게 그것은 참 사랑인 듯 보였다. 그 어떤 협상도 넘어서고 앞서는 사랑. 나는 이 사랑이 인간의 사랑보다 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이들도 자신의 욕구에 대한 자연적 표현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이 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에 편안한 듯 보였다.
개에 대한 소년의 느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부모 같았다. 나는 소유와 책임의 긍지,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는 개에 대한 비견할 수 없는 관심을 감지했다. 그런데 그의 돌봄 사랑은 의무를 담고 있었다. 소년을 개를 뒤따라 다니면서 치우고, 공을 던진 곳에 주목했다. 소년은 개와 함께 놀고 있었다. 그런데 소년은 아침 일찍 개를 산책시키면서 개의 안녕에 필요한 운동과 신선한 공기, 주의와 돌아다닐 여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참으로, 육욕적이고 습관적이며 본능적인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을 과도하게 해석한다고 하는 반대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왜 만족과 희망을 말하고 있는가? 나는 왜, 최소한 개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생물학적인 상투적 행동 같은 것을 서술하는 데 사랑을 말하고 있는가?
지역 공원의 비에 젖은 풀밭 저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서술하는 더 진실한, 더 정확한 방식이 존재하는가? 동물행동학 전문가의 시각이 더 낫고, 더 정확하고, 덜 감상적이며, 더 진실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제시한다. 흰색 실험실 코트를 입은 사람의 견해는, 그것이 어떤 통찰을 제공하든 간에, 이것이 애정 어린 우정, 충심의 우정이라는 인식을 부정할 수 없다. 과학이 이 사건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어휘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과학의 관점에 대해 훨씬 더 좋지 않다.
그 다음에 달팽이에 주의를 기울이자. 달팽이는 껍질을 지니고 다닌다.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달팽이와 껍질 사이의 관계를 대충 속박의 관계로 여기고 싶을 것이다. 물리적 속박. 공간적 속박. 그리고 기능적 속박. 그런데 달팽이는 결코 자신이 껍질 속에 처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달팽이는 그곳에 거주한다. 껍질은 자기 주택이고, 자기 집이며, 그리고 집에 대한 개체의 관계는 결코 공간적 속박이나 피난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유리 잔 속의 물과 같지 않으며, 또는 땅 바닥에 고정된 벤치의 관계와 같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우정이라는 맥락 속에 있는 개와 소년과 비슷하다. 생물학을 일종의 확장된 화학이라고 생각한다면, 평범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물리학뿐 아니라 생물학 이외의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달팽이와 껍질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달팽이가 자체의 삶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살아 있는 존재자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소년과 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관념에 호소할 필요가 있다.
'로보캅'의 철학들을 해체하기
Deconstructing The Philosophies of 'RoboCop'
어느 날 나는 내 동료 휴버트 드레이퍼스 영화 속 드레이퍼스는 경찰 로봇에 의해 제기되는 위험으로부터 미합중국 인민들을 보호하는 일에 열중하는 상원의원이다. 현실의 드레이퍼스 교수는 인공 지능에 대한 비판으로 유명하다. 그는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What Computers Can't Do)>이라는 책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영향력이 있는 컴퓨터가 여전히 할 수 없는 것(What Computers Still Can't Do)
우리는 타고난 로봇이 아니다.
상원의원 드레이퍼스와 그 영화의 제작자들은 철학자 드레이퍼스의 입장을 제시하는 작업을 매우 잘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들은 기본적인 요지는 올바르게 이해한다.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결정을 로봇에 맡길 수 없다. 로봇은 어려운 결정을 내릴 지혜가 없다. 로봇은 아무 느낌도 익히지 못했다.
드레이퍼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을 것이다. 추리 능력과 세계의 모든 정보에 대한 온라인 접근 능력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사례들을 다루기 위한 알고리즘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명한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다. 좋은 재판관이 된다는 것은 규칙을 맹목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말해주는 규칙이 부재할 때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상원의원 드레이퍼스라는 등장인물이 인공 지능의 한계점들에 대한 회의주의를 가리킨다면, 그 영화의 영리한 공학자 데닛 노턴(Dennett Norton)은 인간은 정보처리 장치일 뿐이라는 가정과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의 역능에 대한 낙관주의적 신념 둘 다를 나타낸다. 어느 누구보다도 더 심대하게 인공 지능의 전망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옹호해온, 그와 이름이 같은 사람인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과 마찬가지로, 데닛 노턴은 진보적 인사이고 좋은 사람들에 속한다. 그는 무기를 탑재한 드론보다 손을 잃은 기타 연주자가 다시 연주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로보캅>에서 이편 또는 저편을 지지하는 논변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표면적으로 그 영화는 이성적 정신과 감정적 영혼 사이의 대립에 관여하는 듯 보이는데, 후자는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반면에 전자는 인간과 기계가 공유한다. 그렇지만 데닛도 드레이퍼스도 그런 대립과 대체로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영화를 그런 단순한 사고방식의 대립 아래에서 깔개를 끌어내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영웅 로보캅인 알렉스는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동하는 무감각한 드론으로 실험실에서 출시된다. 그런데 그는 점차적으로 가치, 기억, 예상 그리고 느낌을 지닌 사람으로 형성된다.
그렇다면 그 영화를 결국에는 인간 영혼이 승리한다는 관념을 얼마간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알렉스는 한때 건강한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줄거리를 이해할 더 좋은 방식이 있다. 그것은 데닛과 드레이퍼스의 견해를 화해시킨다.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점에서 드레이퍼스는 언제나 옳았다. 알렉스가 그저 컴퓨터인 한에 있어서는, 그만큼 그는 기계일 뿐이다.
그런데 데닛도 옳다. 로봇은 그냥 컴퓨터인 것은 아니다. 알렉스는 육체가 있고, 그래서 문제들을 대면한다. 그는 세계 속에 던져진 상태이다. 그의 내부 상태는 프로그램뿐 아니라 로봇과 세계가 결부되는 방식 덕분에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역설적인 요점이지만, 놀랍도록 그럴듯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계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그냥 기계인 것은 아니라는 관념을 올바르게 평가한다. 사람은 세계와 관여하는 현장이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글쎄, 우리는 기계일 뿐이지만 그냥 기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인공 지능이 성공적일지라도 그것은 심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것을 제작한다는 것이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아마도 그 영화의 진짜 초점은, 그것이 리메이크하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기업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무기를 탑재한 드론의 배후 기업인 옴니코프(OmniCorp)는 선한 일을 행하거나 평화를 유지하는 것에 아무 관심도 없다. 그것은 시장 지배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 영화는, 특히 자본주의 환경에서는, 더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든 간에 기술에 결부된 위험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이 영화의 명백한 악당은 옴니코프의 경영자로서 군사화된 인공 지능의 비인간적 관리의 배후에 있는 인물인 레이먼드 셀라스(Raymond Sellars)이다. 그는 사악하고 그는 사기꾼이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 나와 드레이퍼스의 의문이 있다.
왜 그 악역의 이름이 셀라스로 명명되었는가?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는 20세기 철학의 거장들 가운데 일인이었다.
<로보캅>에서 드레이퍼스와 데닛이 다른 한 저명한 철학자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악당에 맞서 대결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그런데 둘 다 철학 교수인 현실의 휴버트 드레이퍼스도 나도, 그리고 그날 영화를 함께 감상한 친구와 학생들도 악역의 셀라스와 동명의 위대한 철학자의 작업 사이에 놓인 그럴듯한 연결점을 생각해낼 수 없었다.
무슨 아이디어 없나요?
알바 노에(Alva Noe)